이 한 권의 시집에 전국의 시조시인들이 울산을 노래했다는 사실이
참으로 의미있는 일이며, 나아가 한국 정형시의 아름다움을 다시 인식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 믿습니다.
또한, 울산 예술문화의 역사가 될 것이며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겐
내 고장 울산의역사와 산업, 경제적 위치와 우리의 정형시를 재인식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 울산시조시인협회 한분옥 회장 '발간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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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소통의 꽃길/ 김영철
서울 갔던
울, 총각도
산, 처녀 찾아 돌아오고
태화강 맑은 물엔 은어 황어 다시 뛰고
간절곶 돋을볕 아래로 간절한 꿈 손잡는다
대왕암 정신 같은, 반구대 기도 닮은
여러 마음 한데 모인 소통의 꽃길 위에
억만년 향기로울 역사 한 줄 한 줄 심어 가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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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절곶의 아침/ 박시교
가서는 오지 않는 천년의 그리움과
수없이 쓰러지고 일어서는 억겹의 파도
그 무슨 간절함 있어 여기 다 모였는가
살아 있는 생명들에 주어진 시간 있다면
이곳엔 다만 눈부신 바람만 펼쳐있다
감춰둔 상처마저도 아름다운 간절곶
언제나 너그러움은 내 편이 아니어서
가슴 졸이면서 살았던 어제의 남루
그 모두 훌훌 벗어버리고 아침 해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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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처럼/ 박지현
태화강 거슬러
울산 앞바다에 이르면
모래바닥 뒹굴었던 고래를 만날 수 있다
서둘러
닦고 쓸었던 그 시절 그 몸부림도
십리대밭 지나
울산 앞바다에 이르면
하얗게 숨 뿜어내는 고래를 만날 수 있다
만장의
깃발 펄럭이던
맨발 아린 암각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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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앞에, 그리움 앞에/ 박희정
내 안의 당신을 안고 대왕암공원 돕니다.
사랑의 간주곡은 끊어진지 오래지만
아직도 당신 붙안고 해안길 서성댑니다
질척질척 비는 내리고 먼 기억마저 식었습니다
들썽댄 마음조각 울기등대에 얹어놓고
함초롬 당신을 향해 빗물편지 씁니다
사랑 앞에, 그리움 앞에 파도가 웅성댑니다
늑골처럼 휘어진 해송, 언저리를 쓰다듬으여
지천명 성근 마음으로 듬성듬성 띄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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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화강 십리 대밭/ 백순금
우듬지에 내린 햇발 잠시 땅을 비출 때
발끝 세운 초록들 그 위에 달을 띄워
어둠을 빗질해주는 태화강의 푸른 불곷
삶의 외길 텅 빈속을 득음으로 채우고
댓잎과 댓잎 사이 소곤대던 밀어들
여름밤 긴 이야기가 대숲에서 쏟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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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기행/ 백점례
파도를 휘어 감던 발목 굵은 사내들이
모래 위 통나무배 밀어내는 화면에 들면
고래 떼 뒤엎는 바다, 물보라가 튕겨온다
그 날의 화살 끝에 붙잡힌 생명들이
유구한 시간 안고 꿈틀거리는 반구대
씩씩한 발자국 따라 다져 온 약속의 땅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 오늘 또 내일
웅장한 숨비소리 철선의 힘찬 항해가
다시 온 고래 떼인 양 푸른 바다 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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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환한 전설- 천전리 암각화/ 서숙희
그 시절 그 아득도 하던 먼먼 시절에는
땅 위에만 세상이 있었던 게 아니라지
캄캄한 바위 속에도 세상 하나 있었다지
그들은 솔권하여 어둠을 쪼아서
마침내 단단한 돌의 나라 일구었네
그 전설 너무 환해서 아무도 읽지 못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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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처용설화·2/ 서연정
층층의 육교를 맨몸으로 떠받치고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점점 사라지면서
청청한 깃발을 품어 내일에 걸고자 했네
넘실대는 취기로 휘청이며 헌강왕은
역신을 끼고 앉아 오늘도 홍등을 켠다
그 아래 내팽개쳐진 한 떨기 아내여
숨기느냐 허방다리 번들대는 불빛 속에
시시각각 좁혀들어 처용을 모는 소리
쫓겨간 노루막이에 탈바가지 걸려 있다
어깨가 부러지도록 갈고갈아 벼리는 게
하늘을 휘어감는 춤사위일 뿐이랴
독 오른 꽃대궁이가 역란(逆亂)으로 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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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소(歸巢)/ 신필영
찢어진 옆구리를 움켜쥐고 돌아온다
베링해 가로질러 태화강에 이르는 길
가쁜 숨 못내 고르며 몸을 벗는 연어 떼
빛 한 점 들지 않는 타관의 쪽방에서
이 땅에 홀로된 이 형형하게 눈 밝혀도
제 안에 흐르는 강물 그 상류는 늘 멀었다
망향에 목이 부은 노숙의 낯선 어둠
솔기 터진 시간들을 이제 다시 여며가며
꿈자리 편안한 그곳 비늘 세워 찾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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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마을/ 옥영숙
새끼고래 등에 업은
어미고래가 웃고 있고
작살이 꽂힌 고래와 물을 뿜고 있는 고래
반구대 암각화에서
기념사진 찍고 있다
뜨겁게 사랑하다 돌에 갇힌 물짐승
어디든 잘 어울려 눌러앉은 뭍짐승
물속에 물에 젖지 않은
선사시대가 시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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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 돌고래 윌리- 적조(赤潮)/ 윤금초
난바다
거친 물살
요람인 듯 헹가래 치다
푸우, 푸우,
숨이 겨워
구명신호 타전한다.
어머니 젖줄을 놓고
아흐, 벅차!
아흐, 숨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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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에 새긴 동심원 속엔/ 이경철
한 점에서 왔다가 한 점으로 돌아가네.
태화강 에두르는 상류 적벽 반구대에선 호랑이도 사람
도 새끼고래 어미고래도 모두모두 춤추며 신나게 돌아가
고 수로부인 화랑들도 노닐던 천전리에선 오늘도 벼랑 위
에 진달래꽃 흐드러져 꽃 꺾어 받자오며 신선놀음 한창인
데 동심원 새겨놓고 무궁무궁 춤추는데 너와 나 나뉘지 말
자 한 점으로 돌아가는데 가여워라! 동그라미만 세고 있는
이 마음은,
너와 난
동심원인 줄 모르고
애만 타는
사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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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항/ 이우걸
거대한 선박들이 어깨를 맞대고 있다
잠을 깬 아침해가 노동처럼 달아오를 때
수출용 자동차들은
쉼없이 선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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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절곶/ 이정환
저 바다 물결만큼 간절하지 못했던
가슴을 쓸어본다, 간절곶에 이르러
봄바다 드센 파도를 온몸으로 맞는다
간절하지 못하여 당도할 수 없었던
그 문전 그 안뜰의 은연한 수선화 향기
간절곶 벼랑에 이르러 시리도록 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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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편지- 서덕출* 선생 생각/ 이종문
한 평생 곱사등이로 누워 지낸 한 소년이
연못가에 새로 핀 버들잎을 하나 따서
새파란 우표를 붙여 강남으로 띄웠다
작년에 간 제비들이 푸른 편지 물고 와서
버들잎 푸른 희망을 처마마다 배달했다
이제 곹 해방이라고, 조선 봄이 곧 온다고
하지만 그 답장은 단 한 통도 못 받았다
오마던 조선 봄도 좀체 다시 아니 왔고
그 봄이 오기도 전에 먼 먼 길을 떠났다
이제 또 삼월이 왔다, 버들잎이 너울대는
연못가에 새로 핀 버들잎을 하나 따서
버들잎 푸른 편지를 저 강물에 띄워볼까
*서덕출선생(1906~1940): 일제 강점기에 활약한 울산 출신의 동시 작가. 일생 동안 방안에서
누워 지내는 그야말로 절망적 상황 속에서도 <봄 편지>, <눈꽃송이> 등 밝고 희망찬 동시를 창작하여,
절망 속에 살고 있던 우리 민족에게 희망의 불씨를 남모르게 지피셨다. ...(중략)
선생의 <봄 편지>는 다음과 같다. "연못가에 새로 핀 버들잎을 따서요/
우표 한 장 붙여서 강남으로 보내면/ 작년에 간 제비가 푸른 편지 보고요/ 조선 봄이 그리워 다시 찾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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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어진에서/ 임채성
공단의 크레인 해를 낚는 포구에서
귀신고래 등뼈 같은 흰 등대와 마주 선다
먼 옛날 바다이야기 문신으로 새겨 넣은,
전출 간 고래의 집을 그는 알고 있을까
번지수를 잃어버린 꽃바위 가슴마다
따개비 젖은 울음이 포말로 부서진다
뜨거운 귓바퀴를 바람 쪽에 열어 놓고
잦바듬한 폐선 따라 나도 몸을 기울이면
방파제 물기둥 너머 떠오르는 숨비 소리
햇살의 가시 뼈가 작살 처럼 박힌 물속
전설을 씻김 하듯 술 한 잔을 따를 때
덩치 큰 동해 파도가 허연 배를 뒤집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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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왕암/ 홍성순
침묵한 수평선은 활시위를 당겨대고
물마루 수반 위에 반쯤 걸친 굽은 노송
멀찍이 두고 보아도 눈이 시린 천하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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