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7 장. 不出戶(불출호)
- 백서본 제10장
남회근 : 지혜의 성취
장치청 : 문밖을 나서지 않아도 천하를 안다
주춘재 : 문밖을 나가지 않고도 천하를 안다
톨스통이 : 집을 떠나지 않고도 무슨 일들이 벌어지는지 안다
오강남 : 문밖을 나가지 않고도 천하를 알고 – 내면적 성찰
도올 김용옥 : 불출호지천하不出戶知天下
여운 이준호 : 깨달음의 지혜
47. 不出戶, 知天下; 不窺牖, 見天道。其出彌遠, 其知彌少。是以聖人不行而知, 不見而明, 不爲而成。
집 밖을 나가지 않아도(不出戶) 천하가 돌아가는 것을 안다(知天下). 들창을 열지 않아도(不窺牖) 하늘이 돌아가는 이치를 볼 수 있다(見天道). 그러기에(其) 나감이(出) 멀어지면 멀어질수록(彌遠), 그(其) 두루 앎이(知彌) 줄어들게 되는 것이다(少). 그러므로(是以) 성인은(聖人) 행하지 않아도(不行) 알 수 있고(而知), 불투명함에도(不見) 질서가 잡히니(而明), 다스리려 하지 않아도(不爲) 스스로 이루어지는 것이다(而成).
Without going outside his door, one understands (all that takes place) under the sky; without looking out from his window, one sees the Tao of Heaven. The farther that one goes out (from himself), the less he knows.
Therefore the sages got their knowledge without travelling; gave their (right) names to things without seeing them; and accomplished their ends without any purpose of doing so.
不出戶(불출호), 知天下(지천하), 不窺牖(불규유), 見天道(견천도)。
남 : 문을 나가지 않고도 천하를 알 수 있고, 창문을 엿보지 않고도 하늘의 도를 알 수 있다.
장 : 문밖을 나서지 않아도 천하를 알고, 창밖을 내다보지 않아도 하늘의 도를 안다.
주 : 도에 정통한 진정한 군자는 문밖 출입을 하지 않고도 천하의 일을 알 수 있고, 창밖을 내다보지 않고도 자연의 섭리를 알 수 있다.
톨 : (현자는) 집을 떠나지 않고도 세상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안다. (현자는) 창밖을 보지 않아도 천국의 도를 본다.
오 : 문밖에 나가지 않고도 천하를 다 알고, 창으로 내다보지 않고도 하늘의 도를 볼 수 있습니다.
김 : 문밖을 나가지 않아도 천하가 돌아가는 것을 알고, 창밖을 규탐하지 않아도 하늘의 길을 본다.
여운 : 집 밖을 나가지 않아도(不出戶) 천하가 돌아가는 것을 안다(知天下). 들창을 열지 않아도(不窺牖) 하늘이 돌아가는 이치를 볼 수 있다(見天道).
出(날 출) - 나다, 나가다, 낳다, 떠나다, 이루다, 추방하다.
戶(지게 호) - 집, 가옥, 지게, 지게문, 출입구, 방, 거처.
知(알지) - 알다, 알리다, 나타내다, 맡다, 대접하다, 사귀다, 친한 친구, 짝, 슬기, 지식, 앎.
窺(엿볼 규) - 엿보다, 훔쳐보다, 살펴보다, 꾀하다, 반걸음.
牖(들창 유) - 들어서 여는 창, 깨우치다.
見(볼 견/현/천) - 보다, 보이다, 당하다, 견해, 뵙다, 나타나다, 소개하다, 만나다.
그리 어렵지 않은 장이다. 집 밖에 나가지 않아도 천하 돌아가는 경지에 있는 사람들은 사건, 현상, 본질이 돌아가는 도의 순환 원리를 꿰뚫고 있기에 가능하다. 지구의 자전 속도를 알고, 내가 살고 있는 위도와 경도를 알게 되면 계절의 흐름을 읽게 된다. 들창을 열지 않아도 바람의 냄새와 방향에 따라 절기를 예측한다. 열 길 물속을 아니 물길이 지나는 자리와 마르는 자리를 구분하니 농사에 적당한 자리와 무덤에 쓸 자리를 아는 것이다. 사람 쓴 마음을 꿰뚫으니 스쳐 지나가는 인연과 반대로 더불어, 함께 할 수 있는 인연을 구분할 줄 아는 것이다. 절기를 알기에 농사의 시작과 끝을 알 수 있고, 바람을 알기에 우기와 건기와 나가야 할 때와 들어서야 할 때를 저절로 알게 되는 것이다.
공부에 본격적으로 몰입하기 전 나는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사람과 사회를 그리고 세상을 부대끼며 온갖 잡일을 경험해봤다. 내가 살아온 모습을 지켜본 지인들의 공통된 견해는 저놈은 오늘 죽어도 여한이 없는 인간이라는 것이다. 천하고 귀한 일을 떠나 남들이 쉽게 경험할 수 없는 그야말로 다양한 경험을 해보았기 때문이다. 비즈니스 경제활동을 떠나 20대는 사회복지의 일원으로 청소년 관련 일을 했다. 시도 써보고, 노래도 부르고 어느 정도 작곡도 할 줄 안다. 오랜 시간 차를 마신 관계로 내가 그동안 마신 보이차를 돈으로 따지면 벤츠가 몇 대다. 그동안 마신 술값은 빌딩을 사고도 남는다. 어두운 곳, 밝은 곳, 좁은 곳, 넓은 곳을 경험하고 나서 가장 밑바닥으로 떨어졌다. 파산도 해보고 이혼도 해봤다. 경제활동이 커지면 커질수록 반대로 작고 좁아질수록 영향을 주고받는 것이, 가장 가까운 가족과 부모 형제 그리고 지인들이다. 나로 인하여 주변인들에게 피해 드린 상처가 너무 크다. 그러기에 그 이유가 나를 세상 밖으로 가 아니라 내 안으로 밀어 넣은 결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산 후 십 년 동안은 사람 만나는 것에 가장 두려움을 느꼈다. 지금은 어떻게 지내냐는 질문을 받을 때는 뭐라 답변해야 할지 막막했었고, 늘 상 내가 계산하는 일이 당연했던 술값과 밥값을 이제는 계산할 능력을 상실하여 누군가에게 얻어먹는 것을 상상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계산대에 서서 누군가 내 밥값을 계산하는 것은 내게 죽음보다 더한 치욕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뻔뻔해져서 늘 고마워만 하고 있다. 최근 지인들도 나를 만나면 늘 상 자신들이 계산하는 게 관례가 되어버렸다. 어린 시절 친구들 모임에 나가 어떤 한 친구가 말하기를 자신들의 연봉이 1,000만 원도 안 되던 시절, 나랑 술 마시면 2~3달 월급을 술값으로 썼던 적도 있었다고 했다. 요즘은 내가 마시는 술은 오로지 장수막걸리 3병이니 가성비가 친구들의 주머니 사정에도 불구하고 나쁘지 않다. 나는 요즘 세상 소식을 닫고 산다. 그게 정신건강에 이롭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끔 내가 있는 국회 근처로 찾아와 술을 사주는 지인들은 내년 총선의 결과와 향후 기후 문제, 그리고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전쟁의 결말 같은 무겁고 어려운 주제를 묻는다. 국회도서관 안에 처박혀 책만 읽는 놈에게 하는 질문치고는 예사롭지 않으나, 나는 전문가 못지않게 질문에 잘도 떠들어 된다. 장수막걸리 3병이면 말이다.
“집 밖을 나가지 않아도(不出戶) 천하가 돌아가는 것을 안다(知天下). 들창을 열지 않아도(不窺牖) 하늘이 돌아가는 이치를 볼 수 있다(見天道).”
其出彌遠(기출미원), 其知彌少(기지미소)。
남 : 그 나감이 점점 멀수록, 그 앎이 점점 적어진다.
장 : 멀리 나가면 나갈수록, 그 앎이 적어진다.
주 : 지식의 겉모습에 집착해 밖으로 나돌아다니면, 소소한 것만 알게 될 뿐이다.
톨 : 집에서 더 멀리 멀어질수록, 아는 것은 적어진다.
오 : 멀리 나가면 나갈수록, 그만큼 덜 알게 됩니다.
김 : 밖으로 멀리 나가면 나갈수록, 아는 것은 더욱 적어지네.
여운 : 그러기에(其) 나감이(出) 멀어지면 멀어질수록(彌遠), 그(其) 두루 앎이(知彌) 줄어들게 되는 것이다(少).
其(그 기) - 그, 그것, 아마도, 만약, 어찌, 장차, 이미, 마땅히, 이에, 그래서.
彌(두루 미) - 두루, 널리, 더욱, 멀리, 갓난아이, 장식, 미륵.
遠(멀 원) - 멀다, 심오하다, 멀리하다, 소원하다, 내쫓다, 추방하다, 싫어하다, 어긋나다.
少(적을 소) - 적다, 작다, 줄다, 적어지다, 젊다, 비난하다, 젊은이, 버금.
난 어릴 적부터 집을 벗어나는 것을 좋아했다. 방학이면 시골 할머니에게 가는 것이 어린 나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목적이었다. 경쟁이 있는 삶에서 자연의 삶으로 나를 던지는 것이다.
20대 초반에 쓴 시 제목인데 ‘내가 아이의 꿈을 갖고 있을 때’ 이런 내용의 시를 썼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겨울이면 비료 포대기에 짚을 잔뜩 쑤셔넣어 언덕길마다 썰매 길로 만들어 놓으면 동네 아줌니들이 부지깽이를 들고나와 혼내면서 아궁이 재를 뿌렸던 기억, 길이란 길은 죄다 발뒤꿈치로 파내어 그곳에서 자치기, 구슬치기하던 기억, 모르고 쇠똥 밟으면 공부 잘한다는 소리에 눈 감고 가던 등굣길 풍경. 내 어린 시절부터 주변에서 하는 소리가 어린놈이 역마살이 껴 가만히 있지 못하고 싸돌아 다니기 좋아하는 나를 흉보았다. 90년대 중반에는 경희대에서 국내 최초로 두레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던 주강현 박사와 민예총에서 눈이 맞아 전국으로 민속문화 답사 여행을 다니는 인연을 맺은 적도 있었다. 민속학에 관심이 많았던 그 시절 안동대 임재해 교수의 강의를 듣기 위해 9시간을 구비구비 넘어 운전하여 다녔다. 비즈니스를 시작하고서부터는 아예 국내를 벗어나 외국에서 하는 사업에 발을 들어놓고서는 역마살의 절정을 찍었다. 그래서 하나뿐인 딸아이는 아빠와 추억이 별로 없었다고 한다. 정말 그때 내 인생의 유일한 목표는 3천 억이었다. 3천억을 벌어서 내 주변 사람들 잘살게 만들어 주고 사회복지 단체에 거액을 기부하고 나는 차 마시고 음악 들으며 평생을 부족함 없이 살겠다는 것이 나의 목표였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 나가고 또 나가기를 돌아옴이 어려울 정도로 나가기만 했다. “그러기에(其) 나감이(出) 멀어지면 멀어질수록(彌遠),” 들어오는 길을 찾지 못했다. 나가는 법만 알았지 멈추거나 방향을 트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아니, 왜? 배워야 하는지조차 몰랐다.
是以聖人不行而知(시이성인불행이지), 不見而明(불견이명), 不爲而成(불위이성)。
남 : 이런 까닭에 성인은 행하지 않고도 밝게 살피며 하지 않고도 이루어 낸다.
장 : 이런 까닭에 성인은 다니지 않고도 알고, 보이지 않아도 밝으며, 하지 않고도 이룬다.
주 : 그러므로 성인은 사물의 전말을 이해하기 위해 이곳저곳 돌아다니지 않는 다. 무위자연의 마음을 지니고 있으면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아도 중요한 일을 알 수 있다.
톨 : 따라서 성스러운 남자(현자)는 어디로든 떠나지 않아도 지식을 얻는다. (현자는) 사물을 보지 않아도 그 이름을 알고, (현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많은 일을 한다.
오 : 그러므로 성인은 돌아다니지 않고도 알고, 보지 않고도 훤하고, 억지로 하는 일 없이도 모든 것을 이룹니다.
김 : 그러므로 성인은 나다니지 아니하여도 알고, 두 눈으로 직접 보지 아니하여도 사물의 참 이름을 아네. 인위적으로 하지 아니하여도 잘 이루어가네.
여운 : 그러므로(是以) 성인은(聖人) 행하지 않아도(不行) 알 수 있고(而知), 불투명함에도(不見) 질서가 잡히니(而明), 다스리려 하지 않아도(不爲) 스스로 이루어지는 것이다(而成).
是(이 시) - 이, 이것, 여기, 무릇, 이에, 옳다, 바르다, 바로잡다, 다스리다.
以(써 이) - ~써, ~로, ~가지고, ~때문에, ~까닭에, ~인하여, ~하여, ~함으로써, ~하기 위하여.
聖(성인 성) - 성인, 천자, 신선, 슬기, 거룩하다, 성스럽다.
人(사람 인) - 사람, 남녀, 인간, 타인.
行(다닐 행/항) - 다니다, 가다, 행하다, 하다.
見(볼 견/현/천) - 보다, 보이다, 당하다, 견해, 뵙다, 나타나다, 소개하다, 만나다.
而(말 이을 이) - 말을 잇다, 같다, 너, 만약, 따름, 그리고, ~서, ~하면서, 그러나.
明(밝을 명) - 밝다, 밝히다, 날이 새다, 나타나다, 똑똑하다, 질서가 서다, 희다, 깨끗하다.
爲(위할 위) - 하다, 위하다, 다스리다, 되다, 생각하다, 길들이다, 삼다, 속하다.
成(이룰 성) - 이루다, 이루어지다, 정리되다, 살찌다, 우거지다, 익다, 일어나다, 완성하다.
예측은 정확한 관측과 측정을 통해 알 수 있다. 관측이 정확하지 못하면 측정도 예측도 불가하다. 나는 경제적 파산 이후 나를 다시 관측하고 측정했다.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방식으로 지난날 누가(who) 언제(when), 어디서(where), 무엇을(what), 왜(why), 어떻게(how) 잘못되었는지를 꼼꼼히 따져 물었다. 그러나 좋은 질문은 무엇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것을 이때 또 깨달았다. 무지와 직관은 좋은 질문을 방해한다. 성찰과 반성 시스템이 작동하는 것은 제대로 된 道를 알았을 때나 가능한 이야기다. 도서관에 가서 무지막지하게 책을 읽었다. 특히 과학 서적을 중점적으로 읽고 배워나갔다.
인문학과 철학은 답이 없는 학문이란 생각 때문이었다. 서양이 세계를 지배한 여러 이유 중 하나는 ‘=’ 때문이라 강조한다. 수학과 과학에 ‘=’이 없었다면 인문학과 철학과 마찬가지로 정확한 답을 줄 수가 없다. 누가? 새로운 이론이 언제? 새로울 때 어디서? 학계에서 무엇을? 기존 이론을 왜? 틀렸다며 어떻게? 깡그리 무시한다. 그러면서 파벌을 나누고 학파를 나누고 카르텔을 형성한다. 그리고 배타적이면 집단 이기적 이익단체가 되어간다. 그게 한국사에서 일제 식민사학의 계보를 이루는 강단사학자들 아닌가? 주장한다.
본인이 옳다고 기득 카르텔을 형성하여 소수의 근거와 설득력 있는 학설을 집단의 힘으로 죄악시하거나 악마시한다. 이게 내가 인문학과 철학을 싫어하는 이유다. 싫어하나 증오하거나 없어져야 한다는 주장은 아니다. 감정이 없는 이성은 그야말로 기계다. 여기저기 주워들은 이야기를 종합해서 비슷한 답을 내놓는다고 해서 AI가 사람이고 진리인가? 나는 그것에 대해서는 가장 반대론자이다. 유튜브에서 도올 선생의 주역 강의를 듣다가 태양에너지가 핵융합을 통해 스스로 빛과 열을 만들고 태양은 일방적으로 베푼다는 말씀을 들었다. 인문학이 스스로 정의하는 인문학을 내가 부정하는 것이다. 자연과학 역시 인간이 규정한 진정한 道法自然의 도를 아는 참다운 인문학이다. 자연과학을 모르는 인문학은 절름발이 인간 관점의 인간학이다.
고로 성인은 참다운 앎을 추구하고 실행하는 속에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것이다. 그 열매는 누군가에게 밥이요, 유전자의 확장을 도와주는 번짐이다. 많은 인간은 1초 후의 나를 예측하지 않고 행동한다. 인간을 유심히 관찰하는 인간 동물학자로서 자기를 예측하며 사는 사람을 많이 보지 못했다. 자기 예측은 자기 관측, 즉 정교한 성찰과 반성 능력에서 도출된다.
“그러므로(是以) 성인은(聖人) 행하지 않아도(不行) 알 수 있고(而知),” 자신을 만물과의 관계를 통해 관측하고 예측하니 섬세하고 정교해지는 것이다. 자기 예측이 가능한 사람은 타인의 관점에서도 예측이 쉽다. 칸트는 오전 5시가 되면 산책을 즐겼다고 한다. 동네 사람들은 5시를 걸어 다니는 시계, 칸트 시간이라 했다고 한다. 지구가 맘대로 자전하고 맘대로 공전했다면 지구에 생명체가 번성할 수 없다. 성인은 성실함에서 중용이 된다고 자사는 말했다. 꾸준한 성실함은 타인이 나를 예측하고 신뢰하게 만들어 주는 제일 조건이다.
“불투명함에도(不見) 질서가 잡히니(而明), 다스리려 하지 않아도(不爲) 스스로 이루어지는 것이다(而成).”
돈은 쫓는 것이 아님을 파산하고 깨달았다. 돈은 싫다해도 내게 와서 붙는 것이다. 요즘이야말로 딱 살 수 있을 만큼의 돈이 내게 붙는다.
한글비교역주 참고 문헌
남회근 노자타설(老子他說) 상·하 – 번역 설순남
남회근(Nan Huai-Chin, 南懷瑾, 1918~2012) 선생을 소개한다. 본문에는 [남 : ~ ]으로 표기되었다. 부·키 출판사에서 2012년 초판 출판되었다. 1987년 남회근 선생의 『노자타설(老子他說) 상·하』본으로 ‘남회근 저작선 5’의 시리즈물이다.
남회근 선생은 중국의 승려, 종교학자, 작가이다. 현대 중국에서 존경받는 영적 스승인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중국 불교 부흥의 주요 세력으로 여겨졌다. 1918년 절강성 온주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서당 교육울 받으며 사서오경을 읽었다. 17세에 중국 항주 국술원에 들어가 각 문파 고수들로부터 무예를 배우는 한편 문학, 서예, 의약, 천문 등을 익혔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사천(四川)으로 내려가 장개석이 교장으로 있던 중앙군관학교에서 교관을 맡으며 사회복지학을 공부하였다. 교관으로 일하던 시절 선생에게 영향을 준 스승 원환선(袁換仙, 1887~1966)을 만나 삶의 일대 전환을 맞는다.
1942년 25세에 원환선이 만든 ‘유마정사’에 합류하여 수석 제자가 되었고, 스승을 따라 근대 중국 불교계 중흥조로 알려진 허운(虛雲, 1840~1959) 선사(先師)의 가르침을 배웠다. 불법을 더 깊이 공부하기 위해 중국 불교 성지 아미산에서 폐관 수행하면서 대장경을 독파하였고, 이후 티베트로 가서 여러 종파 스승으로부터 밀교의 정수를 전수 받고 수행경지를 인증받았다. 1947년 고향으로 돌아가 절강성 성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던 문연각 사고전서와 백과사전인 고금도서집성을 열람하고, 이후 여산 천지사 곁에 오두막을 짓고 수행에 전념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1949년 봄 대만으로 건너가 문화대학, 보인대학 등과 사회단체에서 강의하면서 수련과 저술에 몰두하였다.
1985년 미국으로 건너가 동서학원을 창립하였고, 1988년 홍콩을 거주지를 옮겨 칠 일간 참선을 행하는 선칠 모임을 이끌며 교화사업을 하였다. 1950년대 대만으로 건너간 후부터 일반인과 전문가를 대상으로 유불도가 경전을 강의하며 수많은 제자를 길렀고, 강의 내용을 바탕으로 40여 권이 넘는 책을 출간하여 동서양 많은 독자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선생의 강의는 유불도를 비롯한 동양사상과 역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 깊은 수행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엄중한 가르침, 철저히 현실에 기초한 삶의 자세, 사람을 끌어당기는 유머를 두루 갖춘 것으로 정평이 있다. 2006년 이후 중국 강소성 오강시에 태호대학당을 만들어 교육사업에 힘을 쏟다가 2012년 9월 29일 9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부키 – 2013년 1월 8일 초판
번역 - 설순남
서울대학교 중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및 박사 학위를 받았다. 북경사회과학원에서 방문학자 자격으로 수학했으며 서울대학교, 가톨릭대학교, 성결대학교 등에서 강의하였다. 저서로 『황준헌 시선』이 있고, 옮긴 책으로 『대학 강의』 『맹자와 공손추』 『노자타설』 『맹자와 양혜왕』 『약사경 강의』 등이 있다.
2. 장치청 『도덕경 완전해석』 - 번역 오수현
두 번째로 소개할 장치청(張其成장기성, Zhang-Qicheng, 1959~) 교수로 본문에는 [장 : ~ ]으로 표기되었다. 중국 고전 연구의 권위자이자 역학과 중의학 분야의 석학이자 대중적인 양생 전문가로도 유명하다. 북경중역국학원 원장과 북경중의약대학 경영대학원 원장으로 있으면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북경대학·청화대학 특별 초빙교수로 강의하고 있으며, 중국 관영 방송 CCTV, 북경 TV 등에서 각종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학문의 대중화 작업에도 힘쓰고 있다.
국가급 무형문화 유산 명의 ‘북송의 장일첩(張一帖, 1130~1200)’ 가문의 제15대 계승자로, 훈고학의 대가 베이징중의학대학 교수 첸차오천(錢超塵, 1036~2022)과 역학의 대가 베이징대학 철학과 주보쿤(朱伯崑, 1923~) 교수에게 사사했다. 1992년 중국 최초로 『역학대사전』, 『역경응용대백과』 등을 편찬했고, 《역도주간》을 창간하여 유교, 도교, 불교, 의학과의 융합적인 차원에서 ‘역(易)’에 접근하고자 했다. 2003년부터 북경대학에서 기업인들을 대상으로 고전 강의를 시작했으며, 멘토제 서원을 세워 ‘중국학의 지혜를 적용한 경영모델’ ‘오행을 통한 인재관리 시스템’을 제시했다. 국가급 석사 교재 『중국전통문화개론』을 편찬하는 등 현재까지도 국학 5대 경전 『주역』, 『논어』, 『도덕경』, 『육조단경』,『황제내경』을 강연하는 ‘고전멘토’로 활동 중이다. 2009년에는 “현대 국학의 선두 주자” 중 하나로 선정되어 “국학 연구의 일인자”로 칭송받기도 했다.
주요 저서로는 『주역 완전 해석』, 『황제내경, 인간의 몸을 읽다』, 『논어 완전 해석』, 『육조단경 완전 해석』, 『황제내경 완전 해석』, 『역경 양생 대도』, 『유가 양생대도』, 『불가 양생대도』, 『도가 양생대도』, 『주역 인생 지혜』 등 다수가 있다. (yes 24 작가소개)
판미동 - 2022년 2월 7일 1판 1쇄 찍음
옮긴이 - 오수현
숙명여대 중어중문과를 졸업하고, 중국 산동과기 직업전문대학 한국어과 교사, ㈜효성, KELLEY ASSOCIATES를 거쳐 현재는 바른번역 소속 출판 전문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옮긴 책으로는 『주역 완전해석』, 『황제내경, 인간의 몸을 읽다』, 『자치통감: 천년의 이치를 담아낸 제왕의 책』, 『주역에서 경영을 만나다』, 『나의 최소주의 생활』, 『나는 왜 작은 일에도 상처받을까』, 『시의 격려』, 『세포가 팽팽해지면 병은 저절로 낫습니다』, 『오늘, 뺄셈』, 『중국은 무엇으로 세계를 움직이는가』, 『비즈니스 삼국지』 , 『똑똑한 리더의 공자 지혜』, 『똑똑한 리더의 노자 지혜』 외에도 다수가 있다.
3. 주춘재 『만화 도덕경』 - 번역 박영재
세 번째로 소개할 분은 저우춘차이(周春才 1957- ) 선생이다. 본문에는 [주 : ~]
1957년 중국 베이징에서 출생한 화가이자 작가로 오랫동안 중국문화의 연구와 대중화에 전념해왔다. 서양 문화와 비교를 통해 과학과 철학을 포함한 방법론적인 측면에서 새롭고 참신한 해석을 전개해 내외의 주목을 모았다. 만화를 넘어서는 풍부한 내용과 생동감 있는 작품 이미지로 광범위한 전문가와 독자의 사랑을 받고 있으며, 십여 개의 언어로 작품이 번역 출판되었다. 대표작으로는 《예기 : 모두들 알지만 아무도 안 본 사서오경》, 《만화 주역》, 《만화 논어》, 《만화 노자》, 《만화 장자》, 《화설 황제내경》 등이 있다. (yes 24 작가소개)
가갸날 - 2021년 8월 10일 초판
번역 박영재
고려대학교와 타이완 정치대학교 동아시아대학원 석사과정을 졸업하였다.
4. 러시아 최초의 완역본 『톨스토이가 번역한 노자 도덕경』 - 최재목 역주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러시아어: Лев Николаевич Толстой, 영어: Lev Nikolayevitch Tolstoy, 1828~1910) 러시아 소설가이자 시인, 개혁가, 사상가이다. 본문에는 [톨 : ~ ]로 표기. 러시아의 소설가이자 시인이자 사상가이다. 도스토옙스키와 함께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대문호로 손꼽힌다.
1828년 9월 9일, 러시아 남부의 야스나야 폴랴나에서 톨스토이 백작 집안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2살과 9살 때 각각 모친과 부친을 여의고, 이후 고모를 후견인으로 성장했다. 어린 시절에는 집에서 교육을 받았고, 16세가 되던 1844년에 까잔 대학교 동양어 대학 아랍·터키어과에 입학하였으나 사교계를 출입하며 방탕한 생활을 일삼다 곧 자퇴해 1847년 고향으로 돌아갔다. 진보적인 지주로서 새로운 농업 경영과 농노 계몽을 위해 일하려 했으나 실패로 끝나고 이후 3년간 방탕하게 생활했다. 1851년 맏형이 있는 카프카스에서 군인으로 복무했다.
1852년 문학지 [동시대인]에 처녀작인 자전소설 중편 「유년 시절」을 발표하여 투르게네프로부터 문학성을 인정받기도 하였다. 1853년에는 『소년 시절』을, 1856년에는 『청년 시절』을 썼다. 1853년 크림전쟁이 발발하여 전쟁에 참여했다. 당시 전쟁 경험은 훗날 그의 비폭력주의에 영향을 끼쳤다. 크림전쟁에 참전한 경험을 토대로 『세바스토폴 이야기』(1855~1856)를 써서 작가로서의 명성을 확고히 했다.
이듬해 잡지 『소브레멘니크』에 익명으로 연재를 시작하면서 작가로서 첫발을 내디뎠다. 작품 집필과 함께 농업 경영에 힘을 쏟는 한편, 농민의 열악한 교육 상태에 관심을 갖게 되어 학교를 세우고 1861년 교육 잡지 [야스나야 폴랴나]를 간행했다. 1862년 결혼한 후 문학에 전념해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등 대작을 집필, 작가로서의 명성을 누렸다. 1859년에 고향인 야스나야 폴랴나에 농민학교를 세우는 등 농촌 계몽에도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였으며 농민학교를 세웠다.
34세가 되던 1862년에 소피야 안드레예브나와 결혼하여 슬하에 모두 13명의 자녀를 두었다. 볼가스텝 지역에 있는 영지를 경영하며 농민들을 위한 교육사업을 계속해 나갔다. 1869년 5년에 걸쳐 집필한 대표작 『전쟁과 평화』를 발표하면서 세계적인 작가로서의 명성을 얻었다. 1873년에는 『안나 카레니나』의 집필을 시작해 1877년에 완성했으며, 1880년대는 톨스토이가 가장 왕성한 창작활동을 했던 시기로 알려져 있는데,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크로이체르 소나타』, 『이반 일리이치의 죽음』 등의 작품이 쓰인 시기도 바로 이때이다.
그러나 이 무렵 삶에 대한 회의에 시달리며 정신적 위기를 겪었다. 그리하여 1880년 이후 원시 기독교 사상에 몰두하면서 사유재산 제도와 러시아 정교에 비판을 가하고 『교의신학 비판』, 『고백』 등을 통해 ‘톨스토이즘’이라 불리는 자신의 사상을 체계화했다. 사십대 후반 정신적 위기를 겪으며 삶과 죽음 그리고 종교 문제를 천착하면서 작품세계의 분수령이 되는 『참회록』(1879)을 내놓았고, 정치, 사회, 종교, 사상적 문제들에 관해 계속해서 저술하고 활동했다. 또한 술과 담배를 끊고 손수 밭일을 하는 등 금욕적인 생활을 지향하며, 빈민 구제 활동도 했다. 1899년 종교적인 전향 이후의 대표작 『부활』을 완성했고, 중편 『이반 일리치의 죽음』(1886)과 『크로이처 소나타』(1889)를 통해 깊은 문학적 성취를 보여주었으며, 말년까지도 『예술이란 무엇인가』(1898)와 『부활』(1899) 등을 발표하며 세계적인 작가로서의 면모를 과시했다. 수익은 당국의 탄압을 받던 두호보르 교도를 캐나다로 이주시키는 데 쓰였다. 그 자신은 백작의 지위를 가진 귀족이었으나, 『바보 이반과 그의 두 형제 이야기』,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사람에게 땅이 많이 필요한가?』, 『세 가지 질문』 등의 집필을 통해 러시아 귀족들이 너무 많은 재산을 갖고 있기 때문에 대다수의 민중들이 가난하게 살고 있음을 비판하는 문학 활동을 하여, 러시아 귀족들의 압력으로 『참회록』과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의 출판 금지를 당했다.
하지만 독자들은 필사본이나 등사본으로 책을 만들어서 몰래 읽었고, 유럽, 미국, 아시아에 있는 출판사들이 그의 작품을 출판하여 외국에서는 그의 작품이 유명한 베스트 셀러가 되었다. 극단적인 도덕가가 되어 1880년 이후에 낸 일련의 저술에서 국가와 교회를 부정하고, 육체의 나약함과 사유재산을 비난하는 의견을 발표했다. 저작물에서 개인의 이득을 취하는 것이 부도덕하다는 생각으로 자신의 저작권을 포기하는 선언을 했고(1891), 1899년 종교적인 전향 이후의 대표작 『부활』을 완성했다. 이 작품은 러시아에서 출간되자마자 독일, 영국, 프랑스 등에서도 번역되었으며, 출판으로 인한 수익은 당국의 탄압을 받던 두호보르 교도를 캐나다로 이주시키는 데 쓰였다.
1901년 『부활』에 러시아 정교를 모독하는 표현이 들어 있다는 이유로 종무원(宗務院)으로부터 파문을 당했다. 노년에 접어들어서도 왕성한 집필 활동을 통해 『이반 일리이치의 죽음』(1886), 『크로이처 소나타』(1889), 『예술이란 무엇인가』(1897), 『부활』(1899) 등을 계속해서 발표했다. 사유재산과 저작권 포기 문제로 시작된 아내와의 불화 등으로 고민하던 중 1910년 집을 떠나 폐렴을 앓다가 현재 톨스토이 역이 되어 있는 아스타포보 역장의 관사에서 82세의 나이로 영면했다. 임종 때 아내를 보기를 거부한 톨스토이의 마지막 말은 “진리를…… 나는 영원히 사랑한다…… 왜 사람들은……”이었다.
귀족의 아들이었으나 왜곡된 사상과 이질적인 현실에 회의를 느껴 실천하는 지식인의 삶을 추구했다. 그는 고귀한 인생 성찰을 통해 러시아 문학과 정치, 종교관에 놀라운 영향을 끼쳤고, 인간 내면과 삶의 참 진리를 담은 수많은 걸작을 남겨 지금까지도 러시아를 넘어 세계적인 대문호로 존경받고 있다. 인간과 진리를 사랑했던 대문호 톨스토이. 그는 세계 문학의 역사를 바꾼 걸작들을 남긴 소설가이자 인도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 사상에까지 영향을 준 ‘무소유, 무저항’의 철학을 남긴 사상가였다. 톨스토이의 작품만이 지닌 문체와 서사적 힘은 지금 보아도 여전하다. 특히 소설 속 아름다운 풍경 묘사와 이야기의 서사성, 섬세한 인물 심리 묘사 등이 돋보이며, 오늘날까지도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세계적 문호로 인정받고 있다. (yes 24 작가소개)
그러나 그가 『노자, 도덕경』에 관심이 많았고, 또한 최초로 러시아어 완역서『노자, 도덕경』을 남겼다는 것을 아는 이들은 거의 없다. 톨스토이는 말년에 부처와 불교, 노자와 공자에 심취하였다. 특히 그는 『노자, 도덕경』의 ‘도道’와 ‘무위(無爲)’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무위사상은 바로 그의 무저항, 박애, 비폭력 평화주의와 공명하는 것이었다.
톨스토이는 러시아어로 된 『노자, 도덕경』 완역본을 희망한지라 여러 차례 번역을 시도하였다. 마침 모스코바 대학에 유학 와 있던 일본인 고니시 마스터로를, 그의 지도교수인 그로트(톨스토이 친구)를 통해서 만나, 1892년 11월부터 1893년 3월에 걸쳐서 『노자, 도덕경』의 러시아 역을 완성한다. 이것이 러시아 최초 완역 『노자 도덕경』이다. (본문 중)
21세기문화원 - 2021년 1월 20일 1쇄 인쇄
역주 - 최재목
영남대 철학과 교수. 일본 츠쿠바筑波대학원에서 문학석사·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동안 하버드대 · 도쿄대 · 베이징대 · 라이덴대 등에서 연구하였다.
‘한국양명학회장’ 및 ‘한국일본사상사학회장’을 지냈다. 전공은 동아시아 양명학 비교(동아시아사상사비교)이며, 저·역서와 감수한 책으로는 『톨스토이가 번역한 노자, 도덕경』, 『근대 일본의 양명학』, 『나는 나대로 살았다 어쩔래』(제8시집), 『풍수 환경학』, 『불교 도상학』 등 50여 권이 있다.
5. 『오강남 풀이 도덕경』
종교학자 오강남(1941~) 교수님이시다. 82세의 연세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활발히 활동하고 계신 존경하는 스승이시기도 하다. 본문에는 [오 : ~ ]로 표기.
현재 캐나다 리자이나 대학교(University of Regina) 비교종교학 명예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북미와 한국을 오가며 집필과 강연을 하고 있다. 더불어 ‘종교너머, 아하!’의 이사장을 맡고 있다.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캐나다 맥매스터(McMaster) 대학교에서 「화엄華嚴 법계연기法界緣起 사상에 관한 연구」로 종교학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그동안 북미 여러 대학과 서울대·서강대 등에서 객원교수, 북미한인종교학회 회장, 미국종교학회(AAR) 한국종교분과 공동의장을 역임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노장사상을 풀이한 『도덕경』, 『장자』, 종교의 이해와 분석을 담은 『예수는 없다』, 『세계종교 둘러보기』 『불교, 이웃 종교로 읽다』, 『종교 너머, 아하!』가 있으며, 최근 인생과 종교에서의 깨달음을 담은 『움켜쥔 손을 펴라』, 『오강남의 그리스도교 이야기』를 펴냈다. 번역서로서는 『종교다원주의와 세계종교』, 『살아계신 붓다, 살아계신 그리스도』, 『귀향』, 『예언자』, 『예수 하버드에 오다』, 등이 있다.
현암사 – 개정판 2010년 3월 15일
6. 도올 김용옥 역주 『노자가 옳았다』
도올 김용옥(金容沃, 1948~)선생은 대한민국의 철학자, 종교학자, 사상가, 한의사, 대학 교수이다. 본관은 광산. 호는 도올(檮杌)이다. 본문 [김 : ]으로 표시
도올 김용옥 선생은 천안 대흥동에서 광제의원을 운영한 집안의 6남매 중 막내로 자랐다. 초등학교를 천안에서 졸업하고, 보성중·고등학교에서 수학하였다. 고려대학교에서 생물학을 전공하였고, 한국신학대학교 신학과에서 수학한 후 고려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였다. 1972년 9월 중화민국으로 가서 국립 타이완 대학 철학연구소에서 2년간 수학하면서 〈노자 "자연" 철학에서의 "무위" 의 기능(老子「自然」哲學中「無爲」之功能)〉이라는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74년 일본으로 가서 1977년까지 도쿄 대학 대학원 중국철학과에서 수학하며 〈왕선산의 동론(王船山の動論)〉이라는 논문을 발표하며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1977년에 미국으로 가서 펜실베니아 대학교 동방학과 대학원과 하버드 대학교 동아시아어문학과 대학원에서 수학하였는데, 하버드에서 〈왕부지王夫之의 철학, The Philosophy of Wang Fu-zhi(1616~1692)〉이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1990년에 원광대학교 한의과대학 한의학과에 입학하여 한의학사학위도 취득하였다.
대학교수, 철학자, 사상가, 언론인, 한의사, 연출가, 시나리오 작가, 희곡 작가, 극단의 단원 등 다양한 정체성으로 활동하였다. 동, 서양 철학과 종교사상까지 다양한 학문적 탐구와 저작 활동을 벌였다. 1982년 9월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철학과 부교수가 되고 1985년 9월에는 동 대학의 정교수가 되었다. 1986년 양심선언(‘한국의 오늘을 사는 한 지성인의 양심선언’)을 하며 고려대학교 교수직을 사퇴한 후 여러 대학에서 철학과 문학 등을 강의했다. 1988년 무렵부터 방송 강연에 출강하였다.
그는 문화계에서도 몇 가지 활동을 했다. 악서고회(樂書孤會)라는 모임을 만들어 국악을 콘템포러리 뮤직으로 승화시키는 다양한 기초작업을 하였다. (1984년 3월~1987년 12월). 한국의 전통음악을 이끄는 대표적 주자, 백대웅, 김혜숙, 박범훈, 송방송, 이성천, 권오성, 최종민, 이보형, 양승희 등이 참여했다. 이후 한대수와 록 콘서트를 가지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도도회(檮濤會)라는 모임을 만들어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한국화 교수들과 그 대학 출신 화가들(이종상, 김병종, 김호득, 장상의, 심현희, 장혜용, 이민주 등)과 정기적인 활동을 했다. (1988년 6월~1999년 6월)
영화와 연극 활동도 했는데 대중의 사랑을 받는 마당극으로 유명한 극단 ‘미추’를 손진책, 김성녀와 함께 창단(1986년 8월)하여 전통과 현대를 접목시키는 많은 연극 작업을 했다. 《시간의 그림자》, 《그 불》 등을 직접 연출하기도 했다. 1987년에는 잠시 영화인 심포지움을 만들어 유현목, 김수용, 임권택, 이장호, 김호선, 하명중, 정지영, 박광수, 이두용, 황기성 등과 활동했다. 이후 임권택의 《장군의 아들》, 《개벽》, 《취화선》의 대본을 썼고, 특히 《취화선》은 2002년 55회 깐느영화제 감독상을 획득하였으며 《개벽》에서 타이틀롤을 맡은 이덕화는 본인(김용옥)이 진행자로 활동 중인 KBS 2TV 《도올학당 수다승철》에 게스트로 출연했다. 《취화선》과 《왕의 남자》의 자막은 직접 영역했다.
유기화학자 친형 김용준과 함께 신과학운동 세미나를 주도하고, 대우재단지원 과학사상연구회(科學思想硏究會)를 설립했다. (1984년 3월~1990년 2월) 한국의 대표적인 과학자, 과학사상가들(조순탁, 이성범, 장회익, 김두철, 서정선, 신중섭, 이봉재 등)이 참여했으며 이후 꾸준히 과학과 철학이라는 학술지를 출간했다.
1989년에는 한국사상사연구소(Korean Institute of Classical Studies)를 세워 한국고전 최초의 일자색인인 《삼국유사인득》을 출간했다. 이 작업은 후에 제자 김현 교수의 방대한 《조선왕조실록》 전체 한글번역 프로그램인 CD-ROM작업으로 이어져 한국학의 신기원을 세웠을 뿐 아니라, 한류의 원류인 사극 드라마들의 희곡작업의 근간을 이루었다.
1993년에는 도올서원을 세워 15기에 걸쳐 3,000여 명의 학생을 배출해 한학의 배경을 가진 우수한 인재들이 이 사회에서 활약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민족문화추진회의 한국고전국역사업을 지원하였고, 그 기관은 이후 한국고전번역원으로 승격되었다.
1989년에는 태권도철학세미나를 개최하여 무술의 본질과 태권도 문화의 세계화를 논하였다. 유병관, 양진방, 김영선, 김용범, 최의정, 임신자, 바비 클레이튼(Bobby Clayton), 스티븐 카프너(Steven D. Capener) 등이 참여했고 이 세미나의 결과물로 《태권도철학의 구성원리》를 집필, 출간했다. 이 작업의 정신과 성과는 이후 무주 태권도공원으로 이어졌다.
한의대 졸업 후 ‘도올한의원’을 개원하여 2년간 활동하기도 하였다. 또 언론인으로 활동하기도 했는데 중앙일보에는 《도올고함(檮杌孤喊)》이라는 칼럼을, 중앙선데이에는 《도올의 도마복음 이야기》(신발굴 성서자료)를 연재하였다. (위키피아)
통나무 – 2020년 10월 9일 출간
마지막으로 영어 번역본을 실었다. 아마도 그의 번역본을 영국의 위대한 철학자인 화이트헤드와 그의 제자인 노벨 문학상 수상자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 1872~1970)이 읽었다. 러셀은 1920년 북경대학에서 1년간 철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리고 독일의 실존철학자 카를 야스퍼스(1883~1969), 마르틴 하이데거(1889~1976) 등이 읽었다. 아마 수많은 서양의 지식인들이 작은 분량의 동양고전을 접하고 충격에 휩싸였을 것이다.
청나라 말에 선교사로 왔다가 중국 고전의 깊은 뜻에 놀라 일부 청나라인들의 도움을 받아 중국 고전을 영문으로 번역한 제임스 레게의 영문본을 찾아 옮겨 보았다.
제임스 레게(James Legge, 1815~1897)는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난 영국의 언어학자, 선교사, 생물학자, 번역가이다. 그는 중국 고전 텍스트를 영어로 번역한 초기 번역가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Legge는 말라카와 홍콩에서 런던 선교사 협회 (1876-1897)의 대표로 봉사했으며 영국 옥스퍼드대학 최초의 중국학과 교수 (1875-1879)였다. Max Müller와 함께 그는 기념비적인 동양의 신성한 책 시리즈를 썼다. (위키피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