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 - 네 부모를 즐겁게 하라.
성경본문 : 잠언 23: 22-25
22. 너 낳은 아비에게 청종하고 네 늙은 어미를 경히 여기지 말지니라
23. 진리를 사고서 팔지 말며 지혜와 훈계와 명철도 그리할지니라
24. 의인의 아비는 크게 즐거울 것이요 지혜로운 자식을 낳은 자는 그를 인하여 즐거울 것이니라
25.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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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천 목사
우리 인생은 살아가면서 삶의 동반자가 필요합니다. 또한 그 동반자와 더불어 삶의 행복과 기쁨을 이루기도 합니다.
어렸을 적에는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부모님이 가장 가까운 분입니다. 그러나 점차 부모에서 친구로, 친구에서 이성으로, 그리고는 사람에 따라 각각 대중 속으로, 혹은 자신 혼자에게로 점차적으로 정서적 평안을 찾아 여행하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언제보아도 변함없이 가장 푸근히 내 편이 되어주시는 분은 역시 우리의 부모님이십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내가 나이 들어도 도무지 부끄러워 남에게 내놓을 수 없는 상처나 아픔이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이해받을 수 있는 마지막 보루입니다.
심지어는 남편에게도 아내에게도 꺼내 보이기 부끄러운 일을 용납 받을 수 있고 이해받을 수 있는 분은 바로 우리의 부모님이십니다. 가만히 생각해봅니다. 이 세상에서 마지막까지 우리 편이 되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일까?
우리가 모든 일을 잘할 때 사람들은 환호할 것입니다. 그러나 비난받는 일을 하고 잘하던 모든 일이 꺼지게 될 때 그 인심은 언제나 변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형편이나 처지와는 상관없이 끝까지 우리 편이 되어주시고 마지막까지 우리 곁에 있어주실 분은 우리의 부모님일 뿐입니다. 물론 예외가 있기는 하겠지만 부모란 마지막 한계수치가 정해지지 않은 최종적인 우군입니다.
친구나 심지어는 형제자매까지도 사랑하는 아내나 남편까지도 내게 등을 돌리는 순간에도 부모는 그 부모라는 사실 한 가지 때문에 마지막까지 옳고 그름을 떠나 우리 편에 서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어느 누구에게 있어서도 마지막 사랑 끝에 서 있는 부모는 누구도 능가할 수 없는 우리의 최종적인 우군입니다.
부모는 뭐라고 해도 자식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 세상에서 제일 만만해하고 또 그러함으로 잘 못해드리는 것이 우리의 부모님이 아닌가 생각도 해봅니다.
우리의 부모님들도 한편으로는 섭섭하시겠지만 ‘그래도 자식이 나를 믿으니 그러하시겠지.’ 라고 생각하고 마음을 푸시고는 하십니다.
오늘 저희 교회에서는 특별히 어버이주일로 지냅니다. 꽃 한 송이 달아드리고 작은 선물하나 달랑 드린다고 해서 우리 마음과 사랑이 전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마음에 부모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조금은 있고 우리 어머님과 아버님을 섬기고자 하는 마음이 역시 가득 있기에 이와 같은 마음으로 우리의 사랑과 은혜를 전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가 설정되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어떤 일이 있어져야 하는가를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 “내 부모를 잘 청종하고 경히 여기지 말고 부모를 즐겁고 기쁘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잠시 생각해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는 하나님이 설정하신 관계입니다.
하나님이 설정한 관계라면 하나님이 정하신 규칙에 따라 운영되어야 합니다. 그 규칙은 부모를 존중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규칙을 지킬 때 따라오는 것이 지상의 축복입니다.
<에베소서 6장 1절~3절>을 보면 ‘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네가 땅에서 잘되고 장수하리라’고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출애굽기 20장 12절>을 보면 십계명의 다섯 번째 계명이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면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내게 준 땅에서 장수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부모를 잘 섬길 때 이 지상에서의 축복을 더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내용을 보면 수천 년 전의 구약시대나 2000년 전의 신약시대나 마찬가지로 역시 자식들이 부모를 잘 섬기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자식들에게 축복까지를 약속하며 그 부모를 잘 섬길 것을 권면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보면서 우리가 부모를 섬겨야함은 선택이 아닌 당연히 이루어져야 할 하나님의 섭리임을 알 수 있습니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내가 원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갑자기 생겨난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관계를 설정해주심으로 말미암아 있어진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는 해와 달이 하늘에 있듯이, 물과 바다가 나뉘듯이, 그리고 밝음과 어두움이 있듯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분명히 설정해주신 관계입니다. 뗄 수도 없고 부인할 수 없는 관계입니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란 만약에 이것이 부인되면 세상의 운행이 불가한 섭리의 파행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를 섬기는 것은 어떤 특별한 작심적 행위가 아니라 우리들에게 당연히 있어야 할 원초적인 행위임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가끔 이런 생각합니다. 왜 부모들이 그렇게 어렵게 자녀를 낳게 된 것일까?
또 인간들이 하나님 앞에 욕심을 부려 범죄함으로 해산의 고통이 있기는 하지만 왜 한 부모를 통해서 꼭 한 사람의 자녀가 나게 되는 것일까 하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질 수도 있고 수많은 사람가운데 갑자기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 이 사람이 네 자식이다라고 생각하면 분명히 가능할 수 있을 텐데 왜 하나님은 한 부모를 통해서 긴 과정을 통해 이와 같이 자녀를 삼으실까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자녀를 낳는 수고보다 더 큰 것은 기르는 수고인데 가슴아파하며 애쓰며 자식을 키워하는 이유가 무엇일까를 생각해 봅니다.
지난주에도 말씀드렸지만 자식하나 키우기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자식 중에 정말 잘 자라주고 걱정 끼치지 않고 건강하고 공부 잘하고 훌륭하게 돼서 부모 잘 봉양하고 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모두가 부모의 마음의 쓰림과 안타까운 훈육을 통해서 잘못된 것 교정 받고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부모의 사랑 속에 키워져 가는 것이 우리 인생임을 봅니다.
목사로서 결혼 주례를 많이 섭니다. 거의 많은 부모들이 대견해서 웃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녀들의 결혼식을 보면서 눈물을 짓는 부모들이 참 많아요.
아픔과 힘든 끝에 오는 감사의 감격이시겠지요.
어느 날 문득 새벽기도 하다가 문장이 생각나서 써 놨습니다.
‘눈물의 기도 가운데 키워진 자식들이 반드시 하나님 앞에 사람 앞에 우뚝 서리라’는 내용입니다.
정말 부모님의 애씀과 사랑의 눈물과 가슴 아픈 기도 속에 자식들이 자라게 됩니다. 그와 같은 사랑 속에 가슴 아픔과 저림 속에 자람으로 말미암아 문득 하나님과 사람 앞에 우뚝 선 모습을 보고 부모님들은 기뻐하게 되실 것입니다.
이것은 부모와 자식 간에 하나님이 특별한 상황관계를 설정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관계를 통해서 자식은 부모님을 사랑하고 그 가운데 하나님을 섬기는 법칙을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축복이라는 것을 담보로까지 하시면서 우리들에게 부모를 존경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모를 섬김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법을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4장 20절>을 보면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도 사랑하지 못하는 자가 어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느냐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눈에 보이는 부모조차 사랑하지 못한다면, 섬길 수 없다면 어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길 수 있겠습니까?
성도들과 대화하다보면 성도들이 겪고 있는 갈등을 느끼게 됩니다. 바로 부모를 섬기고 모시는 가운데 느끼는 갈등도 그 가운데 중요한 하나입니다.
왜 에덴동산이 낙원일까? 하고 물어보면 거기 이런 답이 나와 있습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없기 때문에 낙원이다.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도 있지만 갈등도 많이 있습니다. 사랑하니까 애착이 생기고 애착이 생기니까 집착하고 집착하니 갈등이 더욱 더 커지게 되는 것이죠.
그래요. 사랑하니까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이 지상에서 인간의 관계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루기 위한 전단계이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표현하기 위한 방법이라면 지상에서 부모를 섬기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배우는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이런 생각해봅니다. 우리가 믿음생활 하는데도 그 사람의 기본적인 인격이나 성격상의 특질은 아주 중요합니다.
성격이 반듯하고 뿐만 아니라 굳은 의지를 가지고 있다면 예수 믿어도 그와 같이 열심히 전력을 다해 믿는 것을 봅니다.
부모를 섬기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존경하고 존중하고 섬기는 법을 배우면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도 그와 같이 진행되는 것을 봅니다.
부모를 섬기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아주 중요한 모습이요, 방법이요, 요소입니다.
두 번째, 부모를 잘 섬김이란 부모님의 말씀을 청종하고 그 말씀을 경홀히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네 아비에게 청종하고 네 늙은 아비의 말을 경히 여기지 말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청종한다, 경홀히 여기지 않는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부모님의 말씀을 잘 들어드리는 겁니다. 행하기까지는 못해도 우선 부모님의 말씀을 잘 들어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아마 부모를 소중히 여기고 청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은 그 말씀을 들어드리는 것입니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이것 굉장히 힘듭니다.
요즘 시대는 남의 말을 잘 듣기보다는 내 마음에 있는 말을 많이 하고 싶어 해요.
왜냐하면 고독하고 외롭고 공허하고 쓸쓸하기 때문에 내 말을 해서 다른 사람의 동조를 확인하고 싶어 하는 겁니다.
내실이 꽉 차있고 뿐만 아니라 마음에 자기 확신이 있으면 굳이 상대의 동조를 받지 않아도 자신이 있어요. 그런데 많은 사람이 그렇지 못하단 말이에요.
그래서 마음에 있는 얘기를 해서 언어적으로 동조를 받아야 그 마음이 좀 편안해지는 거죠. 그래서 사람들은 말을 많이 하기 원하는 겁니다.
정말 우리 인생들이 이렇게 외롭고 고독하고 공허하게 살아갈 때 우리는 그 말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마음의 깊이를 헤아려 그 말을 들어주고 동조해주고 그 마음을 위로해줄 수 있습니다. 저는 성도들을 심방할 때나 같이 대화할 때 혹은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나눌 때 성도들의 말씀을 가급적 들어드리려고 합니다. 교회 오면 구조가 꼭 그렇잖아요. 예배를 드릴 때 목사가 일방적으로 말씀을 드리고 성도들은 그 말씀을 들어야 돼요. 그러다보니까 관계가 일방적으로 되잖아요. 그래서 혹시라도 이렇게 개인적으로 말씀하실 기회가 있으면 꼭 저는 많이 들어드리려고 생각해요.
그럴 때 혹시 제가 한 마디라도 들어드리려고 하면 그 가슴속에 있었던 얘기들을 많이 토해내시는 것을 봅니다. 정말 우리는 외롭고 쓸쓸하고 고독하게 살고 있구나! 하는 것을 느끼고는 합니다.
외롭고 삶이 힘겨운 사람들은 그 마음에 있는 말을 자꾸 토해내고 싶어 해요. 우리 부모님들의 이와 같은 마음도 이해해 드려야 합니다.
부모님이 어떤 말씀을 하시면 잘 들어 드리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어떤 말을 해서 부모님을 설득시키고 그 부모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부모님의 말씀을 잘 듣고 우리가 부모님께 설득당하고 부모님께 감동을 받는 겁니다.
요즘 사람을 내편으로 만드는데도 내가 논리적이고 아주 감동적인 말을 해서 그 사람을 내편으로 만드는 것보다 경청을 잘 해서 그 사람의 마음을 사는 것이 오히려 그 사람을 내편으로 만드는 데 훨씬 더 유익하다는 것 우리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요. 우리는 부모님의 말씀을 일단 잘 들어드려야 합니다. 부모님의 말씀을 잘 들어드릴 수 있다면 대단한 인내심을 가지고 있는 거죠.
여러분, 정말 부모님의 말씀을 들어드리는 것 쉽지 않을 겁니다. 정 어려우면 이렇게 생각하세요.
‘내가 십자가에 매달리는 심정으로 십 분씩 들어드리겠다.’
자 따라서 합시다.
“예, 그렇습니다.”
“참 맞는 말씀이네요.”
“어떻게 그렇게 좋은 말씀만 하십니까?”이렇게 적당히 중간에 추임새도 넣어서 십 분 동안 십자가에 매달리는 마음으로 참고 들어드리면 부모님의 마음을 정말 기쁘게 해드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십 분씩만 부모님의 말씀을 잘 경청해 들어드려도 그 부모는 하늘을 나는 이와 같은 기쁨을 누리시게 될 겁니다.
정말 부모님의 말씀을 잘 들어드리고 존중해 드리는 것은 부모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청종하고 경홀히 여기지 아니한다는 것은 부모님을 또한 인정해 드리는 겁니다.
제가 가만히 보니까 우리 모든 성도님들이 어린아이들은 잘 인정해주는 것 같아요.
조그만 일 하나에도 칭찬해주고 박수쳐주고 조금만 재롱부려도 여러 가지로 격려해줍니다.
인정하고 격려하며 무엇보다 그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 이것이 바로 부모님을 청종하고 경홀히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도 제 방에 고등학생 아이가 아침 일찍 꽃을 달아주기 위해서 왔어요. 그래서 제가 꽃을 달아 주기에 “정말 고맙다. 훌륭하다.” 하고 여러 가지로 칭찬을 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의 어린 자녀들만 칭찬해줄 것이 아니라 나이 드신 부모님도 칭찬해드리고 격려해드리고 위로해드리는 것입니다. 부모님들은 고루하다는 선입견을 버리고 긍정적인 태도에서 그 가치를 인정해드려야 합니다.
<룻기 1장 15절>을 보면 나오미라는 홀로 된 여인이 있습니다. 그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두 아들 다 결혼을 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큰 아들과 작은 아들, 두 아들이 다 세상을 떠났어요. 이제 이 어머니가 홀로계신데 그 자부도 두 명 다 홀로 있게 되었어요. 생활도 어렵고...
어머니는 두 며느리에게 이야기 합니다.
“이제 생활도 점점 어려워지는데 너희들에게 아직 창창한 길이 있으니 나가서 젊으니 제 갈 길을 가라. 내가 너희를 자유롭게 해 주리라.”
그 때 오르바라고 하는 며느리는 그 어머니께 너무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어머니. 제가 어머님의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제 갈 길을 가도록 하겠습니다.”하고 인사하고 제 갈 길을 갔습니다.
그런데 룻이라고 하는 며느리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어머니의 백성이 내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 되는데 내가 어찌 어머니의 곁을 떠날 수가 있겠습니까?”
이래서 룻은 나오미를 따라서 본국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물론 나오미가 룻에게 그만큼 감동을 끼쳤기 때문에 어머니의 백성이 내 백성, 어머니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 되겠다라고 고백을 했겠지만 룻의 마음에도 그의 시어머니 나오미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 룻이라는 여인은 풍성한 마음과 풍성한 여건을 가진 보아스라는 사람과 결혼을 하게 되고 그 보아스와 룻 사이에 낳은 사람이 누구냐 하면 오벳이라는 사람입니다. 이 오벳은 누구냐 하면 다윗의 할아버지입니다. 다윗의 왕가에서 예수그리스도의 인간적 혈통이 이루어지니 룻이라는 사람은 결국 자기의 시어머니 나오미를 섬김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육신적 혈통의 계보에 오르는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더욱이 부모를 청종하고 경홀히 여기지 않는다는 것은 부모님께 대한 선입견을 버리고 긍정적인 태도에서 그 가치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나이 드신 분은 도무지 생각이 고루하고 시대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어요. 그러나 더 정확하고 정직하게 우리 자신을 살펴보면 인생의 연륜을 능가할만한 지식과 지혜가 없음을 압니다. 우리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인생의 경험과 연륜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주어지는 직접경험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생각합니다. 면전에서는 ‘아닌데...’ 라고 생각해도 시간 지나보면 ‘그 때 그 말씀이 맞았어.’라고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나이 드신 분들은 시대에 맞지 않아 고루해.’ 라는 생각을 버리고 긍정적인 태도에서 그 삶의 가치와 연륜의 값어치를 생각하면 우리는 그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내 감정에 안 맞을 뿐이지 진리에 안 맞는 것은 아닙니다.
진리는 사랑 안에 거합니다.
부모님들은 심지어 자신의 삶이나 정오(政誤), 가치판단보다도 자녀들을 더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사랑의 무게와 사랑의 힘을 누가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연륜이 가진 무게가 있습니다. 가끔 나이 많으신 목사님들 오면 이러저러한 조언을 구할 때가 있습니다.
언젠가도 나이 많으신 은퇴 전의 목사님이 오셔서 제게 이런 말씀 하셨습니다.
“목사에게 있어서 위기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을 때입니다. 그저 모든 것이 잘될 때가 최대의 위기의 때입니다. 항상 목사는 최악의 경우를 상정하고 목회를 해야 합니다.” 라고 말씀하셨는데 정말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것이 편안할 때, 별 어려움이 없을 때 덜 긴장하죠. 덜 간절해요. 그렇게 지내다보면 어려움을 겪을 수 있는 거죠. 좀 어렵다고 생각하고 더 간절하고 애절하게 주님 앞에 기도하며 더 주변을 돌아보게 될 때 결국 그것을 통해서 더 큰 은혜가 임하게 되는 거죠. 우리를 부지런히 아끼고 사랑하시는, 무엇인가 도움을 주시려는 마음에서 우리의 연세 드신 부모님이 말씀하실 때 최소한 그 말이 맞지 않더라도 그 사랑하는 마음만은 분명하지 않습니까? 보다 긍정적인 태도를 가지면 우리 마음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배울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하면 우리는 얼마든지 그 말씀이 우리 마음에 와 닿을 수 있습니다.
<창세기 47장 8절과 9절>을 보면 요셉이 애굽의 총리대신으로 있을 때 애굽 왕 바로가 요셉을 매우 총애합니다. 그런데 이 요셉의 아버지와 형제들이 애굽으로 이주를 하게 돼요. 그러니까 총애하는 신하의 아버지가 애굽으로 이주를 하니까 애굽의 왕이 그 아버지를 불렀어요. 아마 그 아버지를 환대하게 되면 그 아들 총리 요셉이 정말 이 왕을 위해서 목숨 바쳐 충성하리라하는 이와 같은 생각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애굽의 왕이 요셉의 아버지 야곱을 불러서 묻습니다.
“네 연세가 얼마냐?”
야곱이 왕에게 대답합니다.
“내 나그네 세월이 일백 삼십년입니다. 내 조상의 길에 비추면 비교하지 못하나 참으로 험악한 세월을 보냈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야곱의 일생에 대해서 우리는 잘 알죠. 그야말로 그 인생 험악한 삶이었습니다. 우리 부모들의 인생도 이와 같이 험악한 삶이 아니었습니까?
험악한 삶을 살면서 자식들 부둥켜안고 그들의 앞길에 조금이라도 평탄한 길을 주기위해서 애쓴 것이 우리 부모의 애씀의 모습이 아닙니까?
그것이 얼굴의 주름으로 투박한 손의 모습으로, 그것이 삶의 상흔으로 남아있는 것이 우리부모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모세가 노년에 이르러 우리인생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런 슬픔을 겪어왔고 이런 아픔을 겪으며 수고했어.
이것이 우리 인생의 요약입니다.
우리는 추진력이 있을지라도 연세 드신 부모님은 신중함이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1장 5절>을 보게 되면 디모데의 믿음을 칭찬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의 믿음이 너에게 전수됐다는 것입니다. 결코 너의 모든 현재의 모습은 너 혼자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 네 외조모와 네 어머니의 믿음에 전수된 힘이라는 사실입니다.
즉, 우리의 혼자 힘이 아니라 부모님의 아름다운 은혜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시각을 바꾸면 얼마든지 유익하게 부모님의 말씀을, 부모님의 삶을 우리의 삶의 유익한 용도로 삼을 수 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입니다.
‘네 부모를 기쁘고 즐겁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기쁘고 즐겁게 해 드리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오늘 좀 더 생각해 봅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우리 부모님들이 자식으로부터 모든 것을 부여받았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무엇인가 부모님이 자식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도록 해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정말 부모를 기쁘게 해드리는 일입니다.
부모님들이 존재가치를 느끼고, 자존감을 가지고 자신이 이 세상의 자녀들에게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해드려야 합니다.
난 이제 나이 늙어 자식들의 봉양을 받고 있으니 참 기쁘다라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까지도 자식들에게 유익을 끼치고 있구나 하는 마음을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몇 해 전에 저희어머님이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저희어머님이 세상을 떠나시기 전까지 아주 기뻐하시던 것 몇 가지가 있어요.
첫째는 가끔가다가 제 식사를 차려주실 때예요.
가끔 밖에 있다가 들어갈 때에 저희 아내가 혹시 밖에 나갈 때가 있지 않습니까? 물론 제가 저녁을 차려서 먹을 수 있죠. 하지만 저희 어머님께 “저녁 좀 차려주세요.”하면 그렇게 좋아하실 수가 없어요. 뭔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을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
는 제 아내가 밥을 차려주면 밥 먹고 그 식기를 늘 싱크대에 갖다놔야 돼요. 저만 그렇게 삽니까? 그런데 저희 어머님이 차려주시면 절대 안 갖다 놓습니다.
왜냐하면 어머님은 그것을 굉장히 좋아하세요. 제가 오히려 “어머니, 이것 좀 치워주세요.” 하면 그렇게 좋아하세요. 뭔가 본인이 하실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을 굉장히 좋아하시는 거죠. 그래서 일부러 안 치워요.
또 저희 어머님이 좋아하시는 것이 있어요. 뭐냐 하면 저희 어머님은 다림질을 잘 하셨던 것 같습니다. 제 집사람이 다림질을 굉장히 잘 합니다. 그런데 저희 어머님도 다림질을 잘해요. 아마 저희 남매가 육남매니까 그 육남매 키우느라고 애들 학교 보냈으니까 얼마나 다림질을 많이 하셨겠어요? 그래서 다림질을 잘 하세요.
그런데 문제는 나이 드시니까 눈이 어두워서 바지 줄을 두 개 잡아놓는 것이 좀 문제더라고요. 그래도 잘 하세요.
거기서 제 아내가 대부분 다하지만 어떤 기회가 주어져서 부탁을 드리면 아주 즐거워하세요.
제가 좀 고적해하시는 것 같으면 “뭐 좀 다려주세요.” 하다못해 손수건 하나라도 드리면서 다려달라고 하면 그렇게 좋아하실 수가 없어요.
또 뭘 좋아하셨냐하면 화초를 가꾸는 것을 좋아하셨어요. 거실에 화분 몇 개가 있었습니다. 한 열 개정도 있는데 꼭 그 큰 화분을 끌어다가 목욕탕까지 가지고 가서 그것을 다 주기적으로 물을 주시는 거예요. 그리고 또 끌어다가 창가에 있는데다 놓으시고요, 그런데 이 화분이 굉장히 크잖아요.
그거 잘못 들다가 허리 다치며 큰 화인데... 생각되어서 못하게 해도 꼭 하고 싶어 하세요.
가만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힘들다고 못하게 하는 것이 나은가, 오히려 저것도 열심히 하시게 하는 것이 나은가? 생각해 보니까 무게를 비교 해봐도 아무래도 하시게 하는 것이 나은 것 같아요.
그래서 “열심히 하세요.” 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기운이 딸리시니까요 그것을 들지 못하시고 바닥에다 수건을 깔고 그 수건위에다 화분을 올려놓고 그 수건을 끌고 가셔서 목욕탕까지 끌고 목욕탕까지 가셔서 그 화분 열 개 넘는 것을 다 일일이 물을 주시고 마르면 끌어다가 그 자리에 갖다놓으시는 겁니다.
저희 어머님이 세상 떠나시기 바로 전날 화분 물 다 주고 그 다음날 세상 떠나셨습니다.
지금도 저희 거실에 있는 화분 중에 몇 개는 저희 어머니가 물주시던 것인데 제가 그냥 그대로 두고 보고 있습니다.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린다는 것은 편안하게 해드리는 것만이 아니라 뭔가 좋아하는 일, 기쁘게 하는 일을 하실 수 있도록 기회를 드리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 부모님이 자녀들에 대해서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해 드리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무엇인가 기쁜 일을 만들어드리도록 해야 되는 겁니다.
이 드신 분들이 가지고 있는 고통 중에 4가지 고통이 있습니다.‘사(四)고’라고 하는데 이 네 가지 고통이 뭐냐 하면
첫째는, 병고라고 합니다.
몸이 불편해지십니다. 병들어서 몸이 불편해지세요.
두 번째는 빈고라고 합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습니다. 나이가 드시면.
세 번째는 고독고라고 합니다.
고독해지는 겁니다. 고독해서 고통스러워지는 겁니다.
네 번째는 무위고라고 합니다.
아무것도 하는 일이 없는 겁니다. 그게 고통스러운 겁니다.
우리 한 번 따라서 합시다.
“병고, 빈고, 고독고, 무위고”
이렇게 네 가지를 연세 드신 분들의 ‘사고’ 네 가지 고통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러니 뭔가 좀하실 수 있는 일을 만들어드려야 됩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가지고 자신의 자존감을 가지고 하실 수 있는 일을 하시며 살아가도록 해드려야 합니다.
“어머니, 아버지. 그저 아무 일도 하지 마시고 편안하게 방에서 텔레비전만 보시고 편하게 계세요.”
이것은 부모님들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인가 부모님들이 하실 수 있는 일을 조금 힘드셔도 하실 수 있는 일을, 기쁘게 하실 수 있는 일을 만
들어드리도록 하는 것이 기쁜 일입니다.
요즘은 제가 심방하는 곳이 주로 중환자심방이나 장례, 혹은 개업예배, 또는 애경사, 행사사항이기 때문에 그럴 일이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교회가 2,000명 정도 장년이 출석할 때 정도까지는 초기죠.
제가 일반적인 심방을 했습니다.
그 때 우리 권사님들이 참 많이 동행해서 심방을 했습니다.
혹시라도 전화해서 “권사님 내일, 혹은 오늘 아침에 심방을 가는데 좀 수고스럽지만 동행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하면 권사님들이 좀 힘드셔도 굉장히 기뻐하세요.
이거 내가 나가서 목사님 심방하는 것 도와드리고 또 성도님들도 섬기는 정말 큰 도움이 되는구나! 내가 이렇게 쓸모가 있구나! 라고 생각하시면 정말 기뻐하시는 것 같아요.
전에 한 교구 목사님이 이런 말씀 하셨어요.
“목사님, 우리 장례위원회 따라오시는 권사님들 정말 대단한 분들이십니다. 그 먼 거리를 타고 오면 젊은 사람도 지칠 텐데 그렇게 매일 다녀오세요. 또 뭐라고 얘기하시냐면 그렇게 같이 장례위원에 갔다 오시는 권사님 중에 약 안 먹는 분이 없어요.
이렇게 얘기하시더라고요.
식사하시면 다 약 드시고, 휴게실 가시면 약 드시고 다 약들도 드시면서 그렇게 장례위원회 그 먼 길까지 동행하신다는 것이죠.
제가 보니까 나이 들면 두 가지 특징이 생겨요.
하나는 첫째 몸이 약해져요.
아까 병고라고 말씀드렸잖아요. 몸이 약해지고,
두 번째는 몸이 약해짐과 동시에 마음이 약해지시는 것 같아요.
의지력이 약해지시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마음도 약해지고 의지력도 약해지니까 자꾸 어떤 피해의식도 느끼고 그러시는 것이죠.
이와 같은 모습을 보면 그저 편안하게 아무 일도 안 하도록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아닌 것 같아요. 오히려 힘드셔도 활동하시다가 조금 애쓰시다가 그런 모습으로 하나님나라에 가시면 오히려 주님 위해 봉사하시다가 가시니 그것이 더 좋은 것이 아니겠나 생각합니다.
정말 이 세상에서 조금 힘들다, 힘들지 않다 하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다른 사람에게 어떤 유익을 끼치고 도움을 주고 있다는 생각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우리 부모님들이 기쁘게 하실 수 있는 일을 만들어 기쁘게 하시는 일들을 행하실 수 있도록 도와드려야 합니다.
제가 어릴 때 기억인데 지금도 생각하면 회개하고 참 제가 옹졸하고 용렬했다하는 생각을 가집니다. 지금도 회개하고 있습니다.
뭐냐 하면 저는 왜 도시에서만 태어나고 자라 와서 그런지 비린내 나는 생선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요.
애들은 부모님 따라서 시장 따라가고 이런 것도 좋아하는 것 같은데 저는 시장가면 채소도 사고 다른 물건도 사고 그러는데 꼭 어물을 사기 위해서 가면 그 비린내 나는 것이 싫어서 저는 시장 같은데 잘 안 따라 갔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 음식보다 해산물을 좋아합니다. 비린 것 좋아합니다. 제가 어렸을 적에 그랬다는 얘기예요. 그런데 가끔 점심식사를 할 때가 있으면 어떤 일이냐 하면 저희 자랄 때는 물건을 파는 분들이 머리에다 이고 다니면서 물건을 많이 파셨어요. 생선도 파시고, 야채도 파시고, 여러 가지 물건도 파시고... 그때의 유통구조는 사람들이 머리에 이고 다니면서 파는 것이 많았을 때입니다. 그 때를 아시나요?
그런데 저희 어머님은 꼭 점심 식사 때가 되면 “~사세요.” 이런 분이 있으면 꼭 밖에 나가서 모시고 들어오시는 거예요. 그리고 우리들 같이 앉아있는 식탁에 밥하고 숟가락이랑 꼭 갖다놓고 꼭 권해서 식사를 같이 하시는 거예요.
“지나가시다가 식사 때가 되면 그저 찬은 없어도 밥은 늘 있으니까 늘 그냥 가시지 마시고 들러서 식사하고 가시게.” 하고 늘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제가 자라면서 늘 그런 모습을 보면서 자랐습니다.
그런데 어떤 날 생선파시는 분들 같은 경우는 저는 비린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 때 마음이 불편하더라고요. 그런 생각 지금도 하면 ‘이런 옹졸한 놈 같으니라고.’ 생각이 들면서 마음에 회개하는 심정을 가집니다. 정말 인간 같지 않은 놈이 따뜻한 부모만나서 지금의 복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찌 이런 경험이 저 혼자뿐이겠습니까? 모든 성도님들이 부모님의 이런 아련하고 따뜻한 추억들을 가지고 있지 않겠습니까?
부모님의 사랑, 그 너그러움, 베풂, 관대함, 없는 가운데도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애틋함, 자신을 남에게 내어주는 이와 같은 모든 모습을 보며 자랐기에 오늘 이나마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인류애실천, 인류애실천... 이런 말들을 떠들고 있는 것도 결국 우리가 이와 같은 부모님들의 따뜻한 모습을 보며 자랐기에 이렇게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모든 것을 챙긴다고 해서 가짐이 아니며, 모든 것을 누린다고 행복이 아니며, 그 모든 것을 통해서 우리가 모든 것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배웠습니다.
오히려 베풀고 나누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배려하는 것이 진정한 우리의 소유고 축복이라는 것을 우리는 이렇게 보면서 자라오지 않았습니까?
우리들에게 이러한 부모님들이 없었다면 우리가 오늘 지금의 이러한 모습을 가질 수나 있었겠습니까?
이제 말씀을 마치고자 합니다.
부모님의 마음은 자식의 마음하고 달라요.
자식은 부모에게 섭섭한 것 잊어버리지 않아요. 그러나 부모는 자식에게 섭섭한 것 있어도 잊어버리고 그 섭섭한 것을 다 지워버리고 겁니다.
요즘 가끔은 이미 세상 떠난 부모님을 생각하며 마음에 때때로 죄송스럽다하는 생각이 들어요.
부모님 생각하면 여러분 다 그렇지 않습니까?
잘못 해드린 것만 마음에 생각나는 겁니다.
그러나 또 한 가지 마음에 확신되는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 부모님들은 절대 우리에게 받으신 섭섭한 마음을 남겨두시지 않으실 겁니다. 그리고 우리가 부모님께 드렸던 작은 사랑과 섬김의 마음을 가득 가지고 계시리라고 믿습니다.
혼자서 얘기해요.
아버지, 어머니, 그래도 제가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 기쁜 마음 가지고 있었던 것 아시죠? 저 때문에 기뻐했던 적 있으시죠?
이런 생각하면서 이렇게 혼자 얘기하면서 마음에 위로를 받습니다.
부모 생각하면 자식은 나이 들어도 자식인 것 같습니다.
자연의 섭리는 생성과 소멸입니다.
무엇인가 났던 생각 자연 속으로 스며져 사라지는 겁니다.
그러므로 자연 속에 생성과 소멸이라는 것은 우리들에게 있어서 늘상 있어지는 일입니다. 다만 그것은 우리 눈에 보이는 것처럼 나타났다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자연 속에 항존하는 것이 되는 겁니다. 우리가 생성해서 소멸하는데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언제입니까? 바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느 날 문득 사라져가는 그 때의 모습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나뭇잎이 파릇한 아름다운 새싹이 나고 여름에 푸른 수목이 되어서 가을에 색깔이 퇴색이 해서 이제 물들어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가장 화려한 때는 그 색깔이 퇴색되어진 가을의 단풍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빛바랜 나뭇잎이 오히려 가장 화려한 새깔의 나뭇잎이라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이 세상의 소멸되기 직전인 것입니다.
그 때가 가장 화려한 인생의 작품의 아름다운 완성의 때라는 것입니다.
나이 들어 노년에 이른 것은 우리 인생이 다 찌그러져가는 쭈그러진 때가 아니라 가장 화려한 때입니다.
우리는 우리 삶의 기준을 바꿔야 돼요. 나이 들면 노년 되고, 왜소하고, 위축된 것이 아니라 가장 화려한 모습이라고 우리 자신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 가는 거죠.
하나님은 초라한 인생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가장 화려한 하나님의 작품으로 맞이하여 그 나라에 입성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 가는 그 모습이 가장 화려한 모습입니다.
그러니 나이 드신 우리 부모님들 이 순간 세상에서 가장 초라한 모습이 아니라 가장 화려한 모습인 것을 확신하셔야 합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정성으로 부모님의 말씀을 청종하고 경히 여기지 않으며 정말 부모님의 마음을 기쁘고 행복하고 즐겁게 해드려야 합니다.
이것이 성도의 모습입니다.
우리 사랑하는 모든 부모님들, 부디 건강하시고 마음에 기쁨을 가지시고 오래토록 하나님께 아름다운 삶을 사시다가 하나님이 문득 부르시는 날 잠자는 듯이, 꿈꾸는 듯이 아무것도 없이 주님의 나라에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