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P, 보고도 없이 장도영 체포…박정희 “혁명에도 의리 있다” (17)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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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에게 늘 의문의 인물이 있었다.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내각수반, 국방부 장관, 육군참모총장, 계엄사령관의 5개 직책을 한 손에 쥐고 있던 장도영이다. 그는 혁명세력에게는 가장 경계해야 할 존재였다. 중앙정보부장 JP는 그를 체포하기로 결심했다. 박정희 부의장에겐 비밀에 부쳤다.
1961년 5월 24일 장도영은 난데없이 기자회견을 통해 “케네디 미국 대통령을 직접 면담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키로 했다”고 발표했다. 전날인 23일엔 박정희 부의장이 매그루더 사령관과 회동하는 등 미군이 혁명정부를 인정하도록 하기 위해 노심초사(勞心焦思)하던 시기였다.
장 의장의 발표는 우리와 사전에 상의 없이 이뤄져 ‘도대체 무슨 뜻을 품고 있을까’라는 의심이 들었다. 케네디 대통령을 만나서 무슨 언질을 받아 엉뚱한 일을 벌일지도 모른다는 의구심도 생겼다. 그는 또 사흘 뒤엔 비상계엄을 경비계엄으로 바꿨다. 이 역시 우리와 사전 협의가 없었다.
장 의장의 속을 알 수 없었다. 혁명 전후 그의 기회주의적인 행적은 나의 주시 대상이었다. 거사를 준비하고 있던 4월 10일에도 그는 박정희 소장을 통해 내가 작성한 혁명계획서를 전달받았지만 끝내 반환하지 않았다. 5·16 새벽엔 한강 다리를 건너던 혁명군에 발포를 명령하더니 오후엔 혁명 지지 쪽으로 돌아섰다. 나는 이제 중앙정보부장으로서 혁명을 흔드는 세력을 눌러야 했다. 5월 31일 장 의장은 AP통신과의 회견을 통해 8월 15일을 전후해 민정 이양을 할 수 있다는 취지로 발언했다. 그것은 미국의 눈치를 보고 윤보선 대통령의 내심을 반영하는 내용이었다.
“당신 부인이 먼저 실례했다” 일본인 교장에 주먹 날린 JP (18)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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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이후 JP가 맡은 일은 국가재건최고회의 위원이 아니었다. 그는 혁명을 지킬 ‘음지의 무력’ 중앙정보부를 만들었다. 혁명 과업을 훼손하려는 세력들을 막는 ‘악역(惡役)’을 자처했다. ‘혁명을 뒷받침하는 무서운 존재’가 처음 위력을 발휘한 사건이 장도영의 체포다. ‘혁명’을 일으킨 지 두 달도 안 돼 명목상 혁명정부 의장을 ‘반혁명 세력’으로 권좌에서 제거한 것이다. 박정희와 사전 상의도 없이 일을 벌인 JP의 무서운 면모. 이번 회부터 잠시 ‘인간 김종필’의 성장기를 되돌아 본다.
울퉁불퉁 시골길로 리어카를 끌고 가려니 속도가 안 났다. 이른 봄날인데도 이마에 땀이 맺힐 지경이었다. 1945년 4월 7일 나는 충청남도 광천 기차역에서부터 보령군 천북면 하만리까지 30리 길을 혼자 짐을 싣고 낑낑거리며 가야 했다. 내가 교사로 일할 첫 부임지 천북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가 그곳에 있었다.
대전사범학교의 수료(교사자격증 부여 1년 과정) 성적이 좋았는데도 벽지로 발령받은 데는 사연이 있었다. 대전 동광국민학교에서 교생 실습을 하던 1944년 10월이었다. 부친의 회갑연에 참석하려고 부여 집에 들렀다 돌아가는 내게 어머니는 곶감을 4접(1접은 100개)이나 싸주셨다. “하숙집 주인 주고, 사범학교 담임과 너 근무하는 국민학교 교장선생님 드려라. 남은 하나는 너 먹고.”
사탕 하나 구해먹기 힘든 일제 말기였다.
나는 저녁 무렵 곶감을 어깨에 짊어지고 동광국민학교 일본인 교장 기시무라 집으로 향했다. 현관을 들어서니 부엌에서 도마 소리가 들렸다. 교생 김종필이 왔다고 소리를 질렀는데 대답이 없었다. 한참 불렀더니 방에서 어린 학생 딸이 나오길래 “선물이니 아버지 드려라”며 건네주려 했다. 그때 ‘선물’ 소리를 들은 교장 부인이 얼른 행주치마에 손을 닦으며 부엌에서 나왔다. 못 들은 체할 때는 언제고, 이제 만면에 웃음을 띠고 곶감을 받으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