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센총리(1951년4월4일~)
캄보디아는 크메르 왕국의 후예들이다.
크메르 왕국의 최대 영토는 태국동부에서 라오스 북베트남(월맹)에 이르렀다.
베트남에 패하면서 영토가 줄어든다.
캄보디아의 론놀 정권이 들어서고 군주제가 위협을 받자,
노로돔 시하누크 국왕은 크메르 루주(캄보디아 민족연합 정부군)을 지원하며
론놀 정권에 대항하게 된다.
1970년 3월 시하누크 국왕은 론놀 정권에 밀려나 중국 북경으로 망명한다.
시하누크 국왕은 중국 당국의 협조를 얻어 크메르 루즈 군을 지원하였다.
이때 훈센 총리도 크메르 루즈 군에 들어가 부대 지휘관으로 참여하였다.
훈센은 1976년이 되면서 크메르 루즈 군의 과격한 정책에 실망하여,
1977년 6월에 악명 높은 폴포트를 떠나 베트남으로 망명한다.
1978년 12월에 베트남군이 캄보디아를 침공하자,
크메르 루즈 군은 패주하여 태국 동부 국경지대로 피신하였다.
1979년 1월에 크메르 루즈가 전복되자 베트남은 헹삼린을 내세워 친 베트남 정권을 출범시켰다.
이때 훈센은 친 베트남 인민 혁명당(CPP)의 혁명 평의회 위원겸 외무장관으로 취임한다.
인도차이나의 평화를 위한 파리 평화회담에서 중요한 역활을 담당하며,
1990년대까지 인민 혁명당을 이끌었다.
1985년에 챈시가 죽자,
곧바로 총리 수상에 올랐으며,1993년부터 1997년까지는
노로돔 라나리드 왕자와 공동으로 수상을 역임하였다.
1997년에 라나리드 왕자가 이끄는 왕당파(펀신펙당)는
크메르 루즈 반군의 잔당들과 연합하기 시작하였다.
크메르 루즈 반군 잔당들을 자기 휘하에 넣으려는 암투가 라나리드 왕자와 훈센 간에 벌어졌다.
훈센은 한발 빨리 움직여 군부 쿠테타를 일으켜 라나리드 왕자를 제거하고,
1997~1998년에 웅후오트와 공동 수상을 맡았다가 1998년에 단독 수상이 되었다.
훈센이 이끄는 캄보디아 인민당(CPP)에 의해 여러 왕당파 (캄보디아 민족 구국당/CNRP)지지자들이 잡혀,
고문을 당하고 취조를 당했지만 훈센은 개입을 부정하였다.
또한 이런 조치가 쿠테타가 아니라고 부인하면서
쿠테타를 일으켰다면 군주제를 폐지했을 것이라고 정당성을 주장하였다.
2003년 7월의 선거는 CPP가 국회의 다수당이 되는 결과로 끝났다.
그러나 CPP는 개헌 정족수인 2/3에 충족하지 못했으며,
결국 2004년 CPP-CNRP(캄보디아 민족구국당/펀신펙/왕당파)연합으로 정부를 구성하였다.
훈센은 1975년 4월에 프놈펜을 공격한 크메르 루즈 군에 의해 눈을 다쳐 의안을 끼고 있다.
크메르 루즈 군에 잡혀 고문을 당한 후 반강제로 부대장으로 활동하였다.
2013년 8월에 치뤄진 캄보디아 총선에서 부정선거 시비로 재 검표에 들어갔다.
전체 의석 123석 가운데 캄보디아 인민당(CPP)이 68석을 얻어 1위를 차지하고,
삼랭시가 이끄는 통합 야당인 캄보디아 민족구국당(CNRP)이 55석을 확보한 것으로 나타나자,
통합 야당이 부정선거라며 재검을 요구하며 공세를 강화하자
중앙 선관위, 정당, 국내외 비정부 기구(NGO)가 참여하는 공동 조사 위원회를
구성하는데 동의하였다.
총선에 후보를 냈던 6개 정당은 한석도 건지지 못하였다.
CNRP측은 유권자 명부에서 125만 명의 명단이 사라지는 선거 부정이 발생하였다며,
재검을 위해 공동 조사 위원회 구성을 요구하였다.
이번 총선 결과는 8월 중순경에 공식 발표될 예정이다.
시하누크 국왕은 과거 크메르루즈 군과 한통속이었다.
정권을 빼앗기자 북경으로 망명가서 크메르 루즈 군을 움직였다.
훈센은 크메르 루즈 군에 눈을 잃은 후 부대장으로 활동하다가
크메르 루즈 군의 잔혹함에 실망하여 베트남 망명 후에
베트남군과 함께 돌아와서 정권을 차지하였다.
국왕과 CNRP가 토착계라면,
훈센을 지지하는CPP는 유이민계이다.
훈센과 CPP가 진보파라면
CNRP는 민족 보수파로 정의할 수가 있겠다.
동북아 형의 얼굴을 가진 유이민계는 오월과함께 강동, 강남으로 진출하였다가
운남성, 베트남, 라오스 일대로 밀려났다가 다시 베트남에 의해 캄보디아로
밀려 들어가는 남비세력이었다.
라오스도 북오손족과 남오손족으로 나뉘어져 있다.
남비(南鄙)는 신라 역사에도 나오는 남오손 세력이다.
남비는 남비엣국을 말하며 남오손 세력으로 한때 월남의 조상들과 함께 살았었다.
이들이 갈라지게 된 것은 월맹은 북월지족의 후예이며,
려국(黎國)을 만들어 섬서성 한중시 악양현 일대에 살았으며, 빈(彬)지역에서 살았다.
그러다가 조선 (북부여/고구려)에 의해서 기(岐)지방으로 옮겨진다.
이곳이 산서성 진중시, 장치시 일대이다.
이들은 이곳에서 람국(濫國)을 세운다.
이후 이들이 남북으로 갈라지면서 남으로 내려온 세력이 오월과 함께
강남, 강동 진출하였다가 밀려나 월남 참파인이 되어 현재의 위치로 들어가게 된다.
강남, 강동에서 남오족과 융합한 세력은 남오손이 되어
운남성, 월남, 라오스로 밀려나가 캄보디아로 들어간다.
월맹은 북방에서 실크로드 문물 중계무역으로 활동하다가 쫓겨내려간 세력이고,
월남은 중국 남방에서 활동하다 밀려나는 세력이다.
이들이 문랑국 (반랑국)의 후신인 남비엣국(bc206~bc111년 조타(趙陀/찌에우다)을 세우고 살면서
훗날 신라로 망명해 들어가기도 한다.
북월지에서 내려오는 월맹인은 려국과 람국을 세운 바가 있다.
벌휴 이사금(伐休尼斯今)10년조(ad193) 기사를 보면
六月 倭大饑 男女一千余口乞食來泊 命居南鄙閑地 賜食就業 是爲倭圃 與作平齊名
6월 왜가 대기근이 들어 남녀 1천 명이 유리 걸식하며 배를 대어 오니,
남비(南鄙)의 한지(閑地)에 살도록 명하고, 식량과 일자리를 하사하였다.
이것이 왜포(倭圃)이다.
평야에 농사 짓는 것과 나라 이름을 제(齊)로 취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이 나라가 남제(南齊)이다.
이곳은 복건성 일대를 말한다.
하북성 북경에 들어서는 남제(南濟/하남성 정주시 한성백제/ 개봉시, 하북성 안양시의 양나라인 중
반도 이주를 거부한 세력이 북경에 세우는 나라)와는 이름이 비슷하기 때문에,
복건성에 들어서는 남제(南齊)를 훗날 5대10국 시대 때 남한(南韓)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백제(百濟)와 양나라가 멸망하고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광서, 광동성으로 내려온 세력은 북한(北韓)을 세우고
광동 동부, 강서 남부, 복건성으로 내려온 세력은 남한(南韓)을 세운다.
[남제(南齊/소도성)의 수도는 강소성 남경시/건강]
한때 왜인 (북제계/남제(南齊))을 남비의 옛 땅에서 살게 해줬음을 증명해주고 있다.
람국(濫國)의 위치가 산서성 진성시 북부의 진중시였다.
이곳에 람신 위연비가있는데 고구려에서는 이것을 점제현 신사비라고 부르고 있다.
이것은 근현대기에 일제 식민사학자 금서룡이 평북 용강군 점제현으로
람신 위연비(濫娠違筵碑)를 옮기다가 발각되자 그자리에 놓고 도망을 갔다.
그래서 점제현에서 발견되었다고 하여 점제현 신사비(秥蟬縣神祠碑)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이 비석을 세운 세력은 고구려의 제후였던 월지, 점성 세력이었다.
(고구려는 다민족 국가. 동북아 형의 얼굴을 가진 사람들이 동남아 원주민들을 이끔)
점제현 신사비는 정식으로 濫娠違筵碑(람신위연비)이다.
그뜻은 "람국의 후예로 번조선 연국으로 대를 이어서 하늘의 뜻을 어기지 않고 잉태하여
뻗어 나가리라"는 숨은 뜻이 들어있으며, 낙랑군에 속해있었던 곳이다.
다시 남비 세력인 월남인인 남월지와 캄보디아인인 남오손 세력이
백제가 멸망하고 내려오자 백제인과함께 다시 현재의 지역으로 밀려나게 되는 것이다.
태국으로 들어간 진(秦)나라 세력은 현재도 왕가를 유지하고 있고,
크메르 지역으로 들어간 세력은 남오손 옆에 있던 점성세력이었다.
점성국 세력은 폴포트 때 맹위를 떨치며 캄보디아인인 남오손 후예세력과
토착부족이었던 앙코르 왕조 세력 200만 명을 학살하였다.
진(秦)나라 세력은 태국 원주민들에게 이런 사실을 감추기 위하여
나라 이름을 태국(泰國)이라고 지었다.
(秦)과(泰)는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비슷하다.
벌휴 이사금 10년조 (ad193)
十年 春正月甲寅朔 日有食之 三月 漢紙部女一産四男一女
六月 倭人大餓 來求食者千餘人.
10년 (ad193년)봄1월 초하루 갑인에 일식이 있었다.
3월에 한기부의 여자가 한꺼번에 아들 넷과 딸 하나를 낳았다.
6월에 왜인이 크게 굶주려 먹을 것을 구하러 온 사람이 천여 명이나 되었다.
漢紙部(한지부/한기부)는 멸망한 옛 한나라 땅의 오지에 자리를 내어 살게했다는 말이다.
이들을 옛 남비의 땅에서 살도록 했다는 말이다.
남비가 라오스의 남오손, 남월지,크메르 점성인들이다.
남월지는 참파인이라고도 불리웠다.
캄보디아인은 오족의 후예로 남오손 계열이다.
정작 시하누크 국왕이 크메르 루즈의 폴포트(점성국)를 지원하며 움직였는데,
라나리드 왕자가 크메르 잔당 군을 휘하에 넣으려다 실패하고 제거되자,
크메르 루즈 반군 잔당들을 훈센 휘하에 넣게 되면서
훈센이 정국을 주도해 왔던 것이다.
한국과는 반대의 상황이 캄보디아에서 펼쳐지고 있다.
P/S
참파국(參波國)의 전신은 입읍국(林邑國)이다. (ad192)
임읍국은 중원 강회신라의 변방 한지에 있었다.
강회신라는 강소성 회수와 안휘성, 절강성 양자강 강수 일대를 말한다.
강회신라는 안휘성 서화 기자조선의 후신 서불한우로국을 말하며
서국 [안휘성 서화에서 서국이 세워진 후, 반도 서남단으로 이주/수도 서라벌],
-전한의 유방과 후초를 세우는 항우시기 때 한나라 신하 한신 등에 의해
"고담"이 서화 기자조선 지방(서화/실크로드 소비 종착지/ 유유가 남경에서 남송 건국후 다시 서화로 천도)을
토벌하여 한반도 이주 후, 기원후 300년대 후반 전진의 부견이 불교 전파를 명분으로 내세워
실크로드를 장악하기 위한 북조, 남조 천하통일 전쟁 (영가의 난)때 서화(구 하남성 상구현) 서쪽
수현(수춘)에서 동진의 사현이 이끄는 8만 기마대군과의 비수대전으로 나머지가 한반도 이주.
불국 [창녕 이주/비화가야로 성장],
한국 [반도 중남단에서 김춘추에 의해 나당연합 지원을 위해 위나라 출신이 모여 살던 김천으로 강제 이주],
우국 [호남성 무한시(우한시)에서 광주 이주],
로국[호남성 광주시에서 우국인과함께 초나라군에 밀려 강제이주 당한 후 광주, 광산이주/노국]을 말한다.
이밖에 초나라에 밀려 호북성 단양시, 양양시, 호남성 강릉시, 광주시, 한양시, 나주시 등으로
강제 이주당한 산동성 산동반도의 노나라(공자), 추성시의 추나라(맹자), 제남시의 제나라 후예들이 반도로 들어와
지명을 그대로 붙이고 살아 간다.
오월이 강동, 강남에서 밀려나 월남지방의 참파국으로 들어와 자리잡는다.
참파인은 한때 광서성, 광동성, 광서 좡족 자치구 일대의 삼묘(三苗/參苗)지역으로 밀려나 살았다.
절강, 복건, 강서지방에서 밀려나기 시작하면서 삼묘지방(參苗地方/참묘지방)에 머물다가,
운남성으로 밀려난 뒤에 월맹지방으로 들어간다.
월맹으로 들어와서 월지(대월大越)에 밀려 월남 남단으로 밀려났다.
그후 월남 남단에서 참파국(參波國)을 세우고 살았다.
크메르의 선조인 점성(占城)인들이 중원에서 밀려 운남성으로 밀려났다가
월맹지역으로 들어왔으나 대월(월맹)의 공격을 받고
동부 해안을 따라 참파국 동부지방으로 들어가서 자리잡는다.
훗날 참파국이 점성국(占城國)으로 바뀌는 것으로 봐서
쿠테타가 발생하여 왕조가 바뀌는 것이 분명하다.
그후 점성국인은 월남에 패해 캄보디아 크메르 왕국으로 밀려나서
앙코르 왕조를 무너뜨린 후 크메르 왕국을 세우고, 참파인들은 나뉘어져
한 부류는 월남인이 되고 다른 한 부류는 캄보디아인이 된다.
일부는 라오스로 들어간다.
크메르 점성인들은 인도어와 산스 크리스트어를 동시에 사용한 것으로 봐서
월지와 오손족이 섞여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캄보디아 영토에는 앙코르 왕조가 있었고 이들은 토착부족이다.
훗날 점성인들이 월남에 의해 캄보디아로 패퇴하여 들어가
크메르 왕조를 세우고 지배하기 시작한다.
산스 크리스트어를 사용하였다는 것은
우리 선조와 동족들도 섞여 있어서 이들을 이끌었다는 이야기이다.
백제인이 섞여 있었다.
월맹에는 고구려인들이 가장 많이 섞여 있었다.
월맹은 원래 9환족의 일원으로 조선의 제후였고,고구려의 제후국이었다.
백제, 고구려인은 백월로 알려지게 된다.
점성(占城)을 점파(占波)라 하였는데
점파의 전신은 점탁(漸涿)이었다.
이 주변에 사탁(沙涿)이 있었다.
점탁과 사탁이 있었던 곳은 탁수(涿水)였다.
탁수(涿水)는 어디인가?
탁장하(浊漳河), 탁장서원(浊漳西源/후만서고后湾西库)을 말하는 것이다.
섬서성 연안시,위남시,한성시 산서성 운성시,임분시(임둔군)일대에 있었던
월지 세력(려국(黎國)의후예)이 산서성 장치시 일대로 들어가는 곳이 탁장하(탁장서원)였다.
이들을 통칭하여 연주(兗州)세력이라고 불렀다.
백제는 탁수(涿水)를 제수(濟水), 백제하라고 불렀다.
그로므로 탁수[涿水=백제하(한성백제 초기에는 어라하)]는
산서성 장치시(장사지방)의 탁장하(浊漳河/탁장서원/浊漳西源)를 말하는 곳이다.
이곳 낙랑군은 백제의 탄생지이고 백제 2군이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백제인들은 탁장하[浊漳河]를 석장하, 석장서원이라고 불렀다. [浊=涿=탁,택,석,=濁촉]
장사라는 말의 기원이 장치시 남부 장사지방에서 그 시원이 된다.
이곳에 실크로드 교역을 하는 시장이 형성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해주고 있다.
시장에서 장사한다는 용어가 여기에서 나왔다.
조선에 의해서 연주세력 중 려국(黎國)을 산서성 진중시 람국(濫國자리로 옮긴다.
조선의 9환족 제후로 활동한 대가로 진중시 일대를 얻어 람국을 세우는 것이다.
점제현 신사비(秥蟬縣神祠碑)로 알려진 濫娠違筵碑(람신위연비)는
조선의 제후(람국)로서 번조선 연국으로 이어져 대를 이어 충성하고
이어 나가겠다는 뜻으로 비석을 세워 기린 것이다.
람국>연국으로 있을 때는 백제 옆에 붙어서 백제에 충성하였다.
한자가 조금씩 다른 연유는 각 종족, 국가들이 차지하고 살 때마다
다르게 불렀기 때문이었다.
섬서성 위남시,한성시주변에는
한, 말예, 전조, 서량(西凉/북량), 서하, 량(梁/대량), 백적, 하, 촉의 조상들이 살고있었다.
점탁인(漸涿人)과 사탁인(沙涿人)들을 양/량(凉/梁)이라 불렀다.
양/량(凉/梁)의 뜻은 도(道/길-실크로드)이다.
이들의 선조가 양/량(凉/樑/서량, 전량, 후량, 북량, 남량)이다.
이들이 실크로드 오르도스로 짐을 실어나르는 일꾼들로 활동했음을 증명해주는 말이다.
이들이 산서성 태원시 진중시 일대에서 자리잡고 살면서
장치시를 오가며 실크로드 무역에 종사하였다가 남하하는 것이다.
이곳 일대에 있었던 점제현 신사비(秥蟬縣神祠碑)도 이곳에 지명이 있었다.
점탁인(漸涿人)과 점제현 신사비는 동족이었다.
이들은 한때 섬서성 연안시(延安市)의 연주(兗州)에서
북월지와 함께 번조선 연국에 편입된 바가 있었다.(黎國)
그러다가 북월지와 함께 산서성 진중시 일대로 옮겨진다. (람국(濫國)
조선(朝鮮)에서 갈라지는 나라가
한(韓), 조/趙(전조/유연), 말예(靺濊/말갈, 예맥, 동예, 맥국(춘천인)), 하(夏/서하, 후하, 대하),
촉(蜀/예촉, 성촉, 후촉, 성한), 양/량(凉/樑/서량, 전량, 후량, 북량, 남량), 백적 등이다.
하남성 개봉시, 하북 서남단 안양시에 있었던 양나라의 전신이 대량(개봉시/카이펑)이었는데,
양나라의 제후로 활동하며 세운 나라들이다.
백제의 동성왕, 무녕왕이 차지했을 때는 백제 제후로 활동하게 된다.
실크로드 물류 최종 소비지가 양나라였음이 증명되는 것이다.
대량>양나라는 동이족 국가(구당서 기록)로 현재의 경기인들을 말한다.
서진(사마염/265~290/하남성 낙양/317), 동진(사마예/강소성 남경/317~322/420)은
양나라(502~557) 이전 문명으로 동진 황제가문(사마혁,사마덕종, 사마덕문)은 일본으로 이주하지만,
비수대전의 주역 양하사씨 사안, 사현장군의 사택씨/사탁씨, 사타씨, 사씨가문은
북위출신 유유가 환온을 죽이고 최종승자가 되어 남경에서 남송(유송)을 건국하자,
요녕성 조양,심양의 옛 낙랑국을 거쳐 고구려의 고국원왕에 밀려 해주 낙랑국으로 남하하였다가
근초고왕의 도움을 받고 익산 금마연립마한(기준조선과 익산마한인 연립정권/하한)으로 남하한후,
백제에 조공을 요구하였다가 동성왕의 침공을 받고 사탁씨 일부가 여수, 사천으로 남하한후
진흥왕의 팽창정책으로 신라영토로 들어간다.
마한부흥을 위해 신라에도 조공을 요구하였다가 진지왕의 침공을 받자,
사탁부계 진평이 진지왕을 3년만에 폐위시키고 하한을 백제 위덕왕에게 돌려준다.
하남성 낙양 동위의 고환[고태/구태]의 아들 고양이 하남성 정주시 한성백제를 멸망시키고
개봉시[카이펑]의 대량(훗날의 양나라)를 점령하여 북제를 건국하자, 대량(양나라) 황제 일행이
황하강을 건너 하북성 안양시로 들어가고,백성들은 강소성 양주시로 피난갔다가 북조를 장악한
전진의 부견이 불교전파를 위해 영가의 난을 일으키며 남조 천하통일 대업에 나서게 되고
동진이 왕돈의 난, 소외의 난 등으로 혼란스러워지자 북위 출신 진패선이 강소성 양주시
양나라인을 이끌고 하북성 안양시로들어가 양나라 황제로부터 양위를 받아 진나라를 건국하고
양 황제 일행은 한단시, 석가장, 산동성 제남시 위례백제를 거쳐 한반도 경기지방으로 이주한다.
하남성 정주시 한성 백제인들은 경기 개성에서 한성 백제를 이어가다 고구려 고국원왕의
해주 안악 남진으로 안악궁을 건설하자 한강 유역으로 밀려났다가
동성왕 때 공주 웅진백제로 천도한다.
동위[낙양]의 시조 고환/고태/구태의 아들 고양 [북제 건국]이 하남성 정주시 한성백제,
양나라를 침공하여 북제를 건국하자, 하남성 개봉시[카이펑]의 양황제 일행이
하북성 안양시로 천도하였다가 경기도 안양시로 들어오게 된다.
[하북성 안양시, 강소성 양주시 역시 양나라인들이 피신해가서 생성되는 지명임.
강소성 양주시에서 반도로 들어오는 세력을 남양 [수원~양평,양주]이라고 한다.
양/량(凉/樑/서량, 전량, 후량, 북량, 남량)인은 대량>양나라 황제국에 실크로드 물건을 실어 날라주고
물류비를 받는 제후국인으로 현재의 동남아시아인이지만 무리를 이끄는 리더 그룹이 동북아인이고
그 일부가 양나라인의 발자취를 따라 한반도로 들어오는 것임].
전조에서 유연족으로 가장 많이 갈라지고,
유연 석탈해족, 성한, 서하, 대하족이 한(韓)지역인 고구려, 백제로 가장 많이 이주하게 되는 것이다.
김춘추, 김법민의 조상은 월지 휴밀족의 후예로 북흉노 24왕장 중 하나였던
휴도국(휴저국)의 후신 성한, 대하국인이다.
휴저국의 "(氐/저)"는 그 원래 뿌리가 청해성 청해호 동부지방의 저족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들이 실크로드 문물을 선점하기위해 감숙동부6군~내몽고 서남부 파단(단파)길림사막 사반지방으로
이주하여 비단길, 초원의 길 문물 선점 전쟁에 활동하다가 사천성 성도(청두) 성촉과 예촉(환온)을 복속하고
섬서성 서안을 점령하며 산서성 진성시 진평2군 하서시랑을 차지하였다가 서안에서 내란이 일어나
혁련발발이 죽임을 당하고 그 후예가 성한 이세황제때 반도로 탈출한다.
이들의 후예가 진지왕이고 그 손자가 김춘추였다.
대량>양나라, 백제 [백민국>백신>백적]의 조상은 삼한>기자>기준조선을 이어 한(韓)이며
현재의 대한민국 국호이기도 하다.
북위>동위의 시조 고환(고태/구태/탁발선비족)의 아들 고양이 하남성 낙양시에서 정주시(정저우)
한성백제를 점령하고 개봉시(카이펑)의 양나라 황제국을 점령한 후 북제를 건국하는데,
북제 고양의 아들 "고담"은 중원에서 부패정치를 허용하여 중원 최초로 무질서한 중원 정치를 펼치다가
서위[섬서성 서안/시조 우문태/우태/우문선비족] 우태의 아들 우문각과 삼촌 우문호에게
멸망당하게 만든 장본인이다.
우문각은 북제를 멸망시키고 서안에서 북주를 건국한다.
[영화 배트맨에서 "고담시"로 풍자되어 회자되기도 함].
서안에서 북주의 외척으로 있었던 수문제 양견은 아버지 양충이 원북위 [산서성 대동시 평성]에서
흉노(유연)를 막는 무천진의 방어사 [3품]로 천대를 받자, 우문각과 우문호가 서안을 비운 틈을 이용하여
북위 출신 황족 수백명을 모두 참살하며 북주왕으로 있다가 수나라를 건국하고 북조의 마지막 강자 고구려를
멸망시키려다가 영양태왕과 을지문덕에게 패하여 실패하고 이연, 이세민의 당나라로 이어진다.
북주의 수국공(隨國公) 양견(楊堅)이 황족 수백여명을 참살하고 수나라(隋文帝/수 문제)를 세우자,
고구려 첩자 곡사정을 파견하여 양현감의 반란을 유도하였으나 반란이 실패하면서,
을지문덕이 수공(水攻)으로 살수대첩을 치뤄 수국공 양견을 조롱하는 것임.
수문제 양견은 하남성 정주시 한성백제의 후신 정나라와
하남성 개봉시, 하북성 서남단 안양시의 양나라 후신 진패선의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중원에서 가히 천하통일을 이루었노라고 자랑하였다.
북조의 마지막 강자 고구려는 연개소문이 감숙성 평양시[비단길], 청해성 서령시 서경 [초원의 길]에서
영류왕 [고건무]과 귀족 180여 명, 귀족 관련가족 2천여 명을 학살하면서
당나라에 북조를 상실하게 되었고, 광개토 때 구축해 놨던 발해만과 북발해만 요녕성 개주시 안시성 등
조양, 심양으로 이주하여 대련반도 여순(뤼순)남단 비사성에서부터 남북으로 저항선을 구축하고
천리장성을 쌓아 신성 등 신요동에서 대항했으나, 당고종 이치 때 나당 연합군의 제2차 침공(총 제6차 침공)으로
한반도 한강 상륙작전으로 인해 수도 평양에서 멸망당한다.
당태종 역시 북조의 마지막 강자 고구려를 북조에서 동만주로 밀어내며
비단길 초승달 무역과 초원의길 반달무역 교통로를 모두 차지하고 중원에서 가히 천하통일을 이루었노라고 자랑하였다.
[구당서/신당서, 삼국사기 신라본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