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권
제 2장 문(文)과 무(武)의 우정(友情)
-1
봉산진(鳳山鎭).
바람이 다소 거세게 부는 데다 지세(地世)가 험한 산중턱에 자리
잡고 있어 황량한 곳이었다.
약 백여 호나 될까?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대체로 척박한 산허리를 일구며 사는지라
생활이 빈궁한 편으로 가옥도 대개 모옥이거나 토옥(土屋)이었다.
다만 한 곳의 예외가 있을 뿐이었다.
한 채의 작은 장원(莊園).
그 장원은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약 사년(四年) 전에 이곳에
처음 지어진 것으로 따로 이름도 없었다.
그런데 이 장원에 사는 인물들은 매우 괴이한 인물들이었다. 두
명의 깡마르고 냉혹해 보이는 백발노인과 한 명의 준수한 소년으
로, 그 소년의 이름은 독고황이었다.
장원의 후원에는 연무장(練武場)인 듯한 작지 않은 공지가 있었고
그곳에 한 채의 소정(小亭)이 있었다.
지금 정자 안에는 한 명의 흑의청년이 탁자와 마주 하고 앉아 있
었다. 그 탁자 위에는 문방사보(文房四寶)를 비롯하여 세 권의 낡
은 책자가 놓여 있었다.
흑의청년은 바로 독고황이었다.
어느덧 십구 세(十九歲)로 성장한 그는 이제 그 누구라도 한번 보
면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신비하고도 특이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
다.
먹같이 검고 진한 눈썹은 세 치나 되게 뻗어있고 흑의와는 대조적
으로 창백할 정도로 새하얀 얼굴, 그리고 날카로우면서도 비범한
야망과 지혜가 담긴 깊은 눈(眼). 그리고 반듯한 콧날과 한일 자
로 다문 입술.......
실로 상선기재요 절세미남이었다.
독고황은 무릎에 한 자루의 긴 장검을 놓고 반듯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지극히 고요한 그의 자세와 얼굴에서는 무심(無心)이 흘
렀다.
후원의 월동문(月洞門)으로 누군가 들어섰다. 하후성이 나타난 것
이다. 하후성은 가쁜 숨을 내쉬며 이마를 땀으로 흠뻑 적신 채,
독고황을 발견하자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대뜸 정자로 뛰듯이 올라왔으나 곧 웃음을 거두고 신색을 가
라앉혔다. 그는 독고황이 명상에 잠긴 것을 알고는 방해하지 않고
탁자 옆에 조용히 앉았다.
탁자에 양팔을 올린 채 독고황을 응시하는 그의 얼굴에 한 가닥
의문이 피어 올랐다.
'황의 이런 모습을 몇 번이나 본 적이 있다. 대체 무엇을 하는 것
일까?'
하후성은 내심 이렇게 중얼거리며 시선을 돌려 탁자 위를 바라보
았다. 그의 눈에 세 권의 책자가 보였고 그는 일순 큰 흥미를 느
꼈다.
어려서부터 책이라면 무엇이든지 좋아했던 하후성이 아닌가?
그는 맨 위에 놓여 있는 책을 한 권 집어 들었다. 그러나 책을 바
라보는 그의 시선이 기이한 빛을 발했다.
괴이하게도 표지에 섬뜩한 서체(書體)의 핏빛 글씨가 쓰여 있는
것이 눈에 뜨인 것이었다.
<수라혈경(修羅血經)>
하후성은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책 이름이 이토록 섬칫하단 말인가?'
그는 뭔가 꺼림직함을 느끼며 책장을 넘겨 보았다. 첫장에는 역시
핏빛 글씨로 다음과 같이 쓰여져 있었다.
<지옥아수라천(地獄阿修羅天)의 피로써 천하(天下)를 씻는다.
수라혈마(修羅血魔) 역천균(逆天均)>
'아!'
하후성의 안색이 변했다. 그는 십사 세가 되기까지 이토록 끔찍한
저주가 가득 찬 글을 읽은 적이 없었다.
하후성은 가슴이 마구 떨리는 것을 느꼈으나 자신도 모르게 다음
장을 넘기고 있었다.
<아수라비천마공(阿修羅飛天魔功)>
다시 섬뜩한 글이 쓰여 있었고 다음 장을 넘기니 전신에 핏빛 장
삼(長衫)을 입은 백발노인이 앉아 있는 그림과 빽빽한 주해가 쓰
여 있었다.
하후성은 자신도 모르게 정신을 집중하여 도해와 구결주해를 읽어
내려갔다. 그는 천하제일의 총명한 두뇌와 오성(五性)을 가진 소
년이었다. 단지 한 번 읽었을 뿐인데도 모든 구결은 그의 머리 속
에 암기되고 말았다.
그러나 구결을 읽은 하후성은 탄식해 마지않았다.
'이것이 바로 무공이라는 것이구나! 그런데 무공은 모두가 다 이
렇게 끔찍한 것이란 말인가? 도무지 이 무공 내용에서는 인성(人
性)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으니.......'
그는 계속 책자를 넘겨보았다.
수라혈경 속에는 각종 검법(劍法), 장법(掌法), 신법(身法) 등이
수록되어 있었다. 하후성은 비록 마음이 떨렸으나 이상한 호기심
때문에 모두 읽었다.
한참 후 그는 여전히 목상(木像)처럼 허공만 노려보고 있는 독고
황을 바라보며 내심 또다른 의문을 느꼈다.
'황은 이것을 모두 익혔을까?'
하후성은 또 다음 책을 집어 들었다.
<만독진결(萬毒眞訣)>
거기에는 천하의 만(萬)가지 이상의 극독(極毒)을 다루는 법과 독
물을 이용하여 수련하는 독공(毒功) 따위가 수록되어 있었는데 역
시 모두 한결같이 극악한 내용 뿐이었다.
하후성은 가느다란 전율이 이는 것을 느끼며 만독진결을 덮고 나
서 마지막 책을 살펴보았다.
<마검통천진해(魔劍通天眞解)>
그 책은 한 권의 검경(劍經)이었다. 살기가 물씬 풍기고 지극히
패도적(覇道的)이며 상상을 초월한 마검식(魔劍式)이 수록되어 있
었다.
하후성은 대강 훑어본 후 책을 덮으며 눈썹을 찌푸렸다.
'이 두 권 역시 좋지 않은 느낌이 든다.'
하후성은 힐끗 독고황을 응시했다. 독고황은 그때까지도 눈을 감
고 무아지경(無我之境)에 빠져 있는 듯 했다.
그런데 문득 괴이한 현상이 벌어졌다.
하후성은 경악하며 눈을 크게 떴다. 독고황의 입에서 붉은 혈홍
(血紅)색 기류덩어리가 숨을 내쉬면 나오고, 들이마시면 빨려들어
가고 하는 괴현상이 연출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
하후성은 놀라는 한편 신비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잠시 넋을 잃
고 그 광경을 바라 보았다. 그러다 갑자기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
지 그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 적봉우사(赤鳳羽士)란 도인이 주신 옥갑(玉匣)속의 무공을 황
이 익히는 무공과 비교하면 어떨까?'
하후성은 이 일에 지대한 호기심을 느꼈다.
마침내 독고황은 두 눈을 떴다. 혈홍색 기류는 모두 빨려 들어가
고 없었고 그 대신 그의 눈에서는 차가운 한광이 비수처럼 날카롭
게 뻗어 나왔다.
그 한광은 만물(萬物)을 얼음덩이로 만들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
가 눈을 몇 번 깜빡이자 한광 또한 없어지고 담담한 기운이 감돌았
다.
그리고 잠시 후, 독고황은 눈앞의 하후성을 발견하고는 흠칫놀라
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는 곧 미소를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언제 왔지? 소성(小星)?"
하후성도 따라 웃어 보였다.
"조금 전에."
독고황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말했다.
"소성, 조금만 더 기다려라. 하던 것을 마저 끝내고 얘기하자."
하후성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여 대답을 대신했다.
독고황은 정자 밖으로 걸어 나갔다.
"소성, 자리에 앉아서 이 형님의 실력을 자세히 보아둬라. 아마
너의 눈이 튀어나올 것이다."
그 말에 하후성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황, 그대는 무(武)가 영원히 문(文)을 능가하지 못함을 모르는구
나. 설사 그대가 그 검(劍)으로 하늘을 찌른다 해도 나는 놀라지
않을 것이다."
"핫하하하......."
독고황은 앙천광소했다.
"소성, 나는 너의 그 호쾌함과 대범하고 밝은 기질을 좋아한다.
비록 네가 문(文)을 알고 무(武)를 모르지만 어쩌면 그래서 더욱
너를 좋아하는지도 모르지."
독고황은 말을 마치자마자 장검을 뽑았다.
번쩍!
검집이 떨어져 나가며 눈부신 백광(白光)이 폭사되었다. 검집과
검자루는 흑색인데 반해 검신은 눈부신 백색이었던 것이다.
독고황은 장검을 허공으로 쭉 뻗으며 검식(劍式)을 전개했다.
츠츠츠츠!
대기(大氣)를 가르는 괴이한 음향과 함께 백사(白蛇)가 혀를 내밀
듯 살벌한 검기가 검 끝에서 다섯 자나 치뻗었다.
쉬쉬쉬... 쉭... 파파파파... 팟!
독고황의 몸은 처음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그가 검을 전개할
때마다 검기의 형세는 방원 십장(十丈)까지 뻗었다. 십장 범위는
완전히 검광과 검기의 영향권에 갇혔다.
실로 검초(劍招) 한식 한식 마다가 한결같이 악랄무비하고 괴이했
다. 비록 무공을 모르는 하후성일지라도 그 흉험한 기세와 뼈를
찌르는 살기는 절실히 느낄 수가 있었다.
하후성의 안색이 가볍게 변했다. 그는 찬연한 백색 검기에 가려진
독고황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내심 중얼거렸다.
'저 검법은 바로 수라혈경에 수록돼 있는 수라구마검(修羅九魔劍)
이구나!'
놀라운 일이었다. 어찌 무공을 전혀 모르는 그가 단 한번 본 검법
을 기억할 수 있단 말인가?
또한 하후성은 한동안 독고황의 검법을 지켜보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탁자 위에 놓인 문방사보에 손을 댔다.
그는 한 장의 화선지를 펼치고 붓에 먹을 찍어들었다. 그리고 다
시 시선을 돌려 한동안 독고황의 검법을 자세히 보았다.
우우웅!
엄청난 마기(魔氣)를 느끼게 하는 파공성과 함께 독고황의 검법은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위이이... 웅!
가공할 검광과 검기가 허공 십 장 높이까지 치솟는 것을 보며 하
후성은 내심 부르짖었다.
'제 팔 초(八招) 진천수라겁(震天修羅劫)이구나!'
검법은 돌연 홱 변했다.
우우우우... 웅--! 우우웅--!
천지가 온통 아수라(阿修羅)의 울음소리로 가득 찼다.
하후성의 안색이 급변했다.
'마지막 초식 영멸수라혼(永滅修羅魂)이구나!'
그의 수중에 들려져 있던 붓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화선지
위를 날았다. 화선지 위에는 그림이 그려지고 있었고 그것은 한
흑의청년이 검을 휘두르는 모습이었다.
어느새 연무장에는 검법시전을 끝낸 독고황이 검을 검집에 집어
넣은 채 처음 그 자세 그대로 서 있었다. 자세나 호흡이 전혀 흐
트러지지 않은 태연한 모습이었다. 아니, 애초부터 그는 검법을
전개한 것 같지도 않았다.
독고황은 돌아섰다.
"하하하핫... 소성! 어떠냐? 나의 검법......?"
그는 갑자기 말을 끊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하후성이 그림에
골몰해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휙!
독고황은 신형을 번뜩이더니 단숨에 정자 위로 올라섰다.
"소성, 뭐하는 것이냐?"
탁자 위에 시선을 던진 그는 화선지에 그려진 그림에 탄성을 발하
며 경악하고 말았다. 그림 속의 흑의청년은 바로 자신의 모습이었
던 것이다.
놀라움은 그 뿐이 아니었다. 하후성의 그림은 정확히 수라구마검
의 마지막 초식인 영멸수라혼의 검식을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
다.
그러나 그보다 더더욱 놀랄 일이 있었으니, 그것은 아까 독고황
자신이 전개할 때는 괴이하고 사악하기만 했던 검법이 그림에서는
광명정대(光明正大)하기 이를데 없이 변해 있었던 것이다.
마치 일대의 군자(君子)가 탕마멸사를 하기 위에 검무(劍舞)를 추
는 듯한 그런 그림이었다. 독고황은 넋을 잃은 듯 굳어진 채 하후
성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눈빛이 가볍게 흔들렸다.
'소성. 너는 이 그림으로 나에게 뭔가를 권유하고 있구나. 그것은
바로.......'
독고황은 더 이상 생각할 수 없었다. 그의 안색은 삽시에 침중해지
고 말았다.
하후성이 밝게 웃으며 물었다.
"황, 두 분 노인이 보이지 않는데 어디 가신 모양이지?"
하후성은 의식적으로 화제를 돌리고 있었고 독고황도 그것을 짐작
하고는 억지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두 분은 좀 멀리 가셨다. 아마 열흘은 있어야 돌아오실 것이
다."
독고황은 말하고 나서 몸을 돌렸다.
"소성, 잠깐 앉아 있어라. 내 방에 다녀오겠다."
그러나 독고황은 멈칫했다. 탁자 위에 쌓아둔 세 권의 책자가 흩
어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그의 눈빛이 기이한 변화를 일으켰다.
'혹시... 소성이?'
독고황은 의문을 품은 채 그대로 정자를 걸어 나갔다. 그리고 잠
시 후 그는 소반에 찻주전자와 찻잔 두 개를 들고 다시 나타났다.
독고황은 탁자에 앉으며 담담히 말했다.
"이것은 사천산(四川産)의 용정연화향문차(龍井蓮花香文茶)라는
것으로 무척이나 고귀한 것이다. 소성에게 맛을 보여 주기 위해
조금 남겨 놓았었지."
독고황은 신중한 동작으로 찻잔에 용정연화향문차를 따랐다. 차는
짙은 청황색을 띄고 있었으며 향기가 금세 정자 안에 감돌았다.
하후성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차갑고 시원한 느낌이 목구멍을
적시자 입안이 향긋해지고 가슴이 시원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야! 정말 좋은 차군!"
하후성은 탄성을 발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독고황의 준수한 얼
굴에 만족의 빛이 감돌았다. 그러나 독고황은 표정과는 달리 가라
앉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소성, 너에게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다."
하후성은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고 독고황은 찻잔을 내려
놓으며 심각하게 입을 열었다.
"만약에 말이다. 이것은... 만약이다."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가? 하후성은 독고황의 기색에서 일말의 불
안을 느꼈으나 내색치 않고 묵묵히 듣고 있었다.
"내가 만일 훗날 세상의 커다란 죄인이 된다면 너는 나를 어떻게
대하겠느냐?"
의미심장한 말에 하후성은 난색을 띄며 반문했다.
"황,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냐?"
독고황은 다소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니까 만약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하후성도 따라서 미소를 지었다. 다만 그의 미소는 일면 천진한
듯 하면서도 무한한 현기(玄機)를 품고 있었다.
하후성은 담담하게 말했다.
"황, 이 하란산은 언제쯤 평지(平地)로 변할까?"
독고황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아니, 갑자기 그것이 무슨 말이냐? 이 거대한 하란산이 어찌 평
지가 될 수 있다는 것이냐?"
하후성은 그 말에 자신의 가슴을 손바닥으로 두드리며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황, 나는 산을 좋아한다. 특히 이 하란산을 더욱더 좋아한다!"
하후성은 말을 그치고 그윽한 눈빛으로 독고황을 응시했다. 독고
황의 표정이 가볍게 동요하고 있었다. 뭔가 의미를 되새기려는 듯
그는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하후성은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황, 나의 마음은 곧 하란산이다."
독고황의 눈이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소성.......'
독고황은 이 순간의 감정을 스스로도 정의할 수 없다는 생각을 했
다. 단지 분명한 것은 하후성에게서 진하디 진한 우의(友義)를 느
낄 수 있다는 것 뿐이었다.
그는 마음의 파문을 느끼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는 하란산의
웅지를 우러러 보며 입을 열었다.
"소성, 너의 꿈은 무엇이냐?"
하후성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나는 훌륭한 대학자(大學子)가 되는 것이 꿈이다."
독고황은 기이한 음성으로 다시 물었다.
"명예(名譽)를 얻고 싶지 않느냐?"
하후성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명예? 글쎄... 나는 아직 나이가 어려서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
했다."
문득 독고황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그는 하후성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힘찬 음성으로 말했다.
"소성, 저 하란산의 정상에 올라 밑을 보면 광활한 대지가 드넓게
펼쳐져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으음."
"그러나 그것은 장대한 중원 땅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중원... 그
곳에는 수많은 영웅호걸들이 나타나고 또 소멸되었다."
독고황의 눈에서는 강렬한 야망과 집념이 넘쳐흘렀다.
"나는 언젠가 저 중원에 뛰어들 것이다. 저 광활한 중원을 무대로
나의 힘을 시험해 보겠다."
독고황은 말을 마친 후 하후성의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주며 확
고한 음성으로 말했다.
"소성! 너는 문(文)의 제 일인자(一人者)가 되어라. 나는 무(武)
의 일인자가 되겠다. 나는 천하의 모든 인간들을 내 발아래에 놓
고 굽어보겠다!"
"크ㅋ......."
"핫핫핫... 소성, 만약 그 때가 되면 나는 천하에서 가장 화려하
고 멋진 마차(馬車)로 너를 나의 집으로 데려가겠다! 어때? 재미
있지 않느냐?"
하후성은 짓궂은 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재미있다! 너무나 재미있어서 이 하란산도 배꼽을 잡고 웃으려
한다. 하하하하......."
독고황은 눈썹을 치켜 세웠다.
"이 녀석! 나를 비웃고 있구나!"
그는 짐짓 하후성을 치려는 시늉을 했다.
"하하하하......."
하후성은 크게 웃으며 혀를 쑥 내밀어 보였다. 그는 이어 시선을
돌려 백설을 잔뜩 이고 있는 하란산의 봉우리를 바라보았다. 그리
고 눈을 반짝이며 들뜬 음성으로 말했다.
"황! 하란산의 정상에 한번 올라보자!"
그 말에 독고황의 눈빛도 번쩍 빛났다.
"좋다! 지금 가자!"
그들은 정자를 뛰어 내려갔다.
장원의 문을 나서자마자 그들은 나란히 하란산의 주봉(主峯)을 향
해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도 않아서 하후성은 지치고
있었다.
"헉... 헉헉!"
그는 숨이 턱에 찰 지경인 반면 독고황은 마치 산보하듯 유유히
걷고 있었다. 사실 걷는다고 하지만 그 속도는 뛰어가는 하후성보
다 훨씬 빨랐다.
독고황은 하후성이 헐떡이며 쳐지자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하후
성을 향해 몸을 돌이키며 말했다.
"소성, 너는 너무나 약하구나. 몸이 그렇게 유약하면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한다. 어떠냐? 내가 무공을 좀 가르쳐 줄까?"
헐레벌떡 그에게 다가간 하후성은 이마의 땀을 훔치며 고개를 내
저었다.
"필요 없다. 너에게... 배우지 않아도 곧... 몸이 튼튼해질 거
야......."
하후성이 이렇게 말한 것은 얼마 전 적봉우사(赤鳳羽士)가 준 옥
갑이 생각나서였다. 그는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
'그 옥갑의 무공을 익혀 황의 높은 코를 반드시 납작하게 만들어
주리라.'.
이런 하후성의 심중을 알리 없는 독고황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녀석, 고집은......."
그는 하후성을 갑자기 번쩍 안았다.
"아, 아니... 왜?"
"가만 있거라. 네 체력으로 하란산 정상까지 오르려면 해가 다 질
거다!"
휙!
독고황은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신형을 날렸다. 실로 엄청난 속도
로 내닫고 있었다.
윙--! 윙--!
하후성은 귓전을 스치는 바람소리를 듣고 그 속도감에 진저리를
쳤다. 그가 만일 땅을 본다면 놀라 기절초풍을 했으리라.
독고황은 한번 신형을 솟구칠 때마다 무려 삼십 장(三十丈)을 날
아갔으며 허공 십장(十丈)까지 솟구치고 있었던 것이다. 실로 통
천경악할 일이었다.
전설상의 팔보간섬(八步 蟾)도, 능공허도(凌空虎渡)도, 그리고
등천공(登天空)의 경공술도 따르지 못할 가공할 경공술이었다. 순
식간에 구름과 작은 산봉우리를 넘어 독고황은 하란산의 주봉에
당도했다.
그곳은 작은 분지를 이루고 있었다. 온통 만년빙설로 뒤덮여 은색
을 이루었으며 뼈를 얼릴 듯이 춥고 바람이 불었다. 그런데 봉우
리 밑으로는 운해(雲海)로 구름과 안개가 각 봉우리를 누르듯 흐
르고 있었으니.......
일대 장관이었다.
"아아!"
바닥에 내려진 하후성은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바로 발밑은 운
해와 산봉우리들이 늘어져 있었고, 멀리로는 광활한 대지가 끝없
이 펼쳐져 있었다.
서쪽으로는 등격리사막(騰格里沙漠)이, 동쪽으로는 거치른 황야
(荒野)가, 그리고 남쪽으로는 끝없는 대지가 안개 속에 희미하게
묻혀 있었다. 북쪽은 계속 산이었으며 남쪽은 바로 신비한 중원인
것이다.
하후성은 광활한 대지를 둘러보며 연신 탄복을 금치 못했다.
"황! 정말 이 대륙은 너무도 드넓구나!"
독고황은 호쾌한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하지만 나는 네가 볼 수 있는 저 끝까지 만 하루면 갔
다 올 수 있다."
독고황의 모습에서는 불타는 투지와 호기를 엿볼 수 있었다. 그는
중천에 뜬 태양을 바라보며 팔을 벌렸다.
"나의 야망(野望)은 저 태양보다도 높고 꿈은 대륙보다도 넓다.
하하하하하......."
하후성은 멍하니 대륙과 태양, 그리고 독고황의 모습을 바라보았
다. 그러나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그의 가슴속에서도 치열한 불꽃
이 피어올랐다.
그것은.......
바람이 분다. 따뜻한 훈풍이었다.
천년고목(千年古木).
하란산 기슭에 우뚝 서 있는 거대한 천년고목 앞, 그 언덕에 두
인영이 나타났다. 바로 하후성과 독고황이었다.
황혼.
어느덧 해가 지기 시작했고 부드러운 일사의 황혼빛을 받으며 그
들은 다정하게 고목나무 아래로 다가왔다.
독고황은 황혼에 물든 불그스레한 얼굴로 고목을 올려보며 미소를
지었다.
"소성(少星), 너는 이 고목나무를 기억 하느냐?"
하후성도 따라 미소 지었다.
"이곳은 우리가 처음 만난 곳이지."
독고황은 기이한 웃음을 흘리더니 고목 곁으로 다가갔다. 그는 품
속에서 조그만 비수(匕首)를 꺼내 고목의 껍질을 벗겨내고는 그곳
에 글씨를 새겼다.
<독고황(獨孤皇)>
그 광경을 지켜보는 하후성의 눈에 부드러운 읏음이 어렸다. 이어
독고황은 비수를 그에게 건네 주었고 하후성은 고개를 끄덕인 뒤
다가갔다.
<하후성(夏候星)>
그의 이름이 바로 옆에 새겨졌다.
독고황은 나란히 새겨진 두 이름을 번갈아 바라보고는 하후성의
어깨를 치며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소성! 이 천년고목이 사라지지 않는 한 우리의 우정은
영원이 변치 않을 것이다! 하하하......."
하후성은 미소를 지었다. 독고황은 한동안 고목에 새겨진 두 이름
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더니 이윽고 몸을 돌렸다.
"자 소성, 날이 어두워졌다. 이만 돌아가자. 내 너를 바래다 주겠
다."
두 사람은 손을 맞잡은 채 고목나무를 떠나갔다.
일락(日落).
황혼은 지고 대지는 어둠에 가라앉고 있었다. 하란산의 거대한 웅
자도 어둠에 스며들 듯 컴컴해졌다.
휘 --이-- 잉--!
천년고목에 한 줄기 바람이 불었다.
우-- 우-- 웅-!
가지가 떨며 괴이한 울음소리를 토(吐)해 냈다.
천년고목은 말이 없었다, 천년(千年) 동안을.
그리고 앞으로도 말이 없을 것이다, 고목으로써의 생명이 다할 그
날까지.......
겨울(冬).
엄동설한(嚴冬雪寒)의 동지(冬至), 북방의 기후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혹한이었다.
폭설(暴雪).
모진 광풍과 함께 쏟아지기 시작한 폭설은 연 사흘째 계속되고 있
었다. 온 천지는 백색으로 물들었고 하란산 일대 역시 그야말로
설중(雪中)에 갇혔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위-- 잉! 휘이-- 잉!
광풍을 동반한 폭설은 천지를 온통 눈으로 뒤덮고 말았다. 그리고
어둠, 폭설이 계속 내리는 가운데 밤이 도래했다.
장원(莊園).
도화전현성에 위치한 허름한 장원은 어둠과 눈보라에 묻혀 적막하
게만 보였다. 바로 하후성이 거처하는 장원이었다.
후원의 한 침방.
방안 구석에는 낡은 나무침상이 있었고 침상 위에는 백발이 무성
하고 주름살투성이인 노인이 기진한 듯 누워 있었다. 노인의 안
색은 희다 못해 푸른빛이 감도는 것이 도저히 산 사람이라고는 볼
수가 없었다.
노인의 옆에는 하후성이 잔뜩 근심어린 기색으로 지켜보고 있었
다. 하후성은 계속 물을 적신 천으로 식은땀이 배이는 노인의 이
마를 닦아주고 있었다.
노인이 어느 순간 힘겹게 두 눈을 뜨자 하후성은 황급히 물었다.
"할아범, 몸이 아직 괴로운가요?"
매우 염려스럽고 관심어린 어조였다. 그러나 잠시 희뿌연 눈길을
바로잡지 못하던 노인은 겨우 촛점을 맞추는가 싶더니 기침부터
연방 해댔다.
"콜록! 콜록... 도, 도련님... 콜록! 노복은 괘... 괜찮습니다.
밤이 깊었으니 그만... 돌아가 주무십시... 오. 콜록! 콜...록!"
하후성은 고개를 흔들었다.
"할아범, 내 걱정은 말아요, 얼른 할아범이나 병이 나아야
지......."
그 말에 노인의 두 눈이 흐릿해지며 금세 눈물이 고였다.
그는 깡마른 손을 힘겹게 들더니 하후성의 손을 잡았다. 온통 주
름살투성이의 뼈만 남은 손이었다.
"그... 그럼요....... 이렇게... 착하신 도련님을 두고... 어찌
이 늙은 몸이 죽을 수가....... 콜록... 콜록! 콜록......."
노인의 기침은 점차 더 심해졌다.
"할아범!"
하후성이 다급히 불렀으나 노인의 안색은 이미 잿빛이 되고 있었
다.
"욱! 콜록......!"
다시 한바탕 심한 기침을 하자 이번에는 시커먼 피가 한덩이 토해
져 나왔다. 그는 안간힘을 쓰듯 겨우겨우 말을 이었다.
"주... 주인님도 무심(無心)하시지....... 벌써... 칠 년이나 되
었는데도....... 욱! 콜록!"
시커먼 핏덩이가 연이어 노인의 목구멍에서 넘어왔다. 하후성은
어쩔 줄 모르는 듯 당황하며 비통하게 부르짖었다.
"할아범! 할아범......."
노인은 그의 손을 꽉 잡으며 꺼져드는 음성으로 더듬거렸다.
"도련님... 도련님... 부... 부디....... 훌륭한 사람이... 되어
야... 합니다......."
"하, 할아범!"
"끄... 끝까지... 돌보지 못하는... 노복을... 용서... 용서...
용... 서......."
마침내 하후성의 손을 쥔 노인의 깡마른 손에서 힘이 빠져 버렸
다. 노인은 결국 숨이 다하고 만 것이었다.
"할아범! 할아범......."
하후성은 크게 울부짖으며 노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오열을 터
뜨렸다.
어려서부터 줄곧 자신을 보살펴주던 노인(老人).
그가 죽은 것이었다. 비록 주종관계라고는 하지만 하후성으로서는
친조부나 다름 없이 의지해왔던 노인이었다.
더구나 부친이 안계신 동안 넓은 장원에서 단둘이 외로움을 나누
며 칠 년이라는 긴 세월을 동고동락 해오지 않았던가? 그저 평생
동안 충심만을 가지고 착하게 헌신적으로 살아온 노인이었다.
"할아범! 할아범......."
하후성의 오열은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이렇게 혼자서 훌쩍 가버리시다니! 할아범......."
방안은 온통 하후성의 울부짖음으로 가득 차고 말았다.
눈은 계속 내렸다. 새하얀 백설은 어둠 속에서 하후성의 마음도
아랑곳없이 계속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폭설(暴雪), 그야말로 어둠을 짓뭉개 버릴 듯이 내리는 폭설이었
다.
하루가 소리없이 지났다.
여전히 눈은 그치지 않고 계속 내리고 있었다. 실로 몇 십 년 만의
대폭설이었다.
소년(少年) 하후성.
그는 추운 줄도 모르는 듯 창문을 열어젖힌 채 쏟아지는 눈을 바
라보며 앉아 있었다. 그의 얼굴은 불과 하루 사이에 눈에 띌 정도
로 수척해져 있었다.
하후성은 멍하니 눈발을 바라보며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이 커다란 장원에 지금은 단지 나혼자 뿐이다.'
갑자기 고독감이 엄습해 왔다. 그 고독감은 그에게 뼈가 저릴만큼
지독했다. 비로소 하후성은 자신의 생활 중에서 죽은 할아범의 비
중이 얼마나 컸던가를 깨닫고 있었다.
위-- 이-- 잉-- 휘--잉-!
밖은 오로지 폭설과 광풍 뿐이었다. 다만 이따금씩 방안으로 눈보
라가 휘몰아쳐 들어오곤 했는데, 그때마다 하후성은 몸을 부들부
들 떨어야 했다.
고독(孤獨).
애초부터 그는 고독한 존재였다. 그리고 그는 더욱 완벽하게 고독
해져 버렸다.
혼자라는 사실에 하후성은 미칠 것만 같았다. 평소에는 그리도 좋
아하던 눈이건만 웬지 이젠 눈조차 싫었다. 저주스러운 느낌으로
그의 가슴에 퍼붓는 눈.......
눈이 오는 날에 할아범이 죽었기 때문이었다.
"할아범......."
그는 자신도 모르게 웅얼거려 보았다. 외로움은 뼈를 깎다 못해
폐부를 저미고 있었다. 불현듯 그의 머리에 떠오르는 하나의 얼굴
이 있었다.
준수하고 믿음직한 청년, 바로 독고황이었다.
일단 그의 모습이 떠오르자 하후성은 미치도록 그가 그리워졌다.
'황(皇)! 보고 싶다!'
그동안 할아범의 병세가 악화되어 근 한 달간이나 그를 만나지 못
했다. 독고황의 모습이 황량한 그의 가슴에 물밀 듯이 밀려 들고
있었다.
"황......."
하후성은 부르짖으며 벌떡 일어났다.
'그에게 가보자!'
그는 지체없이 방을 나섰다.
장원의 밖은 눈이 몇자나 쌓여 있었고 허리까지 눈이 덮혀 걸음을
옮기기가 무척이나 힘들었다. 그러나 그런 것은 하후성에게 아무
런 문제도 되지 못했다. 그로서는 어떻게 하든 빨리 이 장원을 벗
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하후성은 눈을 마구 헤치며 곧장 화원을 지나고 또 전원(前院)을
지났다. 힘겹게 대문을 열어 젖히는 그의 눈에는 형언키 어려운
절박함이 담겨 있었다.
"앗!"
그러나 그는 대문 앞 일 장(一丈) 쯤 거리에서 무엇인가에 발이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눈속에 손을 짚은 순간 전해져오는 뭉클한
감촉! 그것은 놀랍게도 분명 사람의 가슴 부분의 감촉이었다.
"이, 이것은!"
하후성은 대경하여 급히 일어났다. 그가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는
사이, 두툼하게 부풀어 오른 눈더미가 문득 꿈틀거렸다. 나직한
신음성이 그 안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으... 으으... 음....... 서... 성(星)아야......."
하후성은 마치 벼락을 맞은 듯이 몸을 떨었다. 그는 곧 앞 뒤 가
릴 것 없이 급히 눈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눈속에서는 차츰 한 중년서생(中年書生)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
다.
"아니!"
하후성은 경악성을 발했다.
중년서생은 워낙 남루한 옷을 입고 있는 데다 깡마르고 피골(皮
骨)이 상접하여 도무지 산 사람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온 몸이 시퍼렇게 얼어 있어 아직 살아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하후성의 눈길이 중년인의 쾡한 얼굴을 살피다 흡사 자석에라도
이끌리듯 그의 왼쪽 귀에 가서 멈추었다. 중년인의 왼쪽 귀, 그곳
에는 손톱만한 붉은 점이 하나 박혀 있었다.
그것을 확인하자 하후성의 전신은 경련으로 떨렸다.
"아... 아... 아버님!"
그 중년서생은 바로 하후성의 부친이었다.
하후연(夏候淵). 이것이 중년서생의 이름이었다.
하후성이 일곱 살 때 집을 떠났던 부친 하후연. 그가 마침내 돌아
온 것이다.
"아버님......."
하후성은 절규하듯 외치며 급히 하후연을 안았다.
그는 힘겨운 줄도 모르고 하후연을 안고 장원 안으로 들어가더니
자신의 방 침상 위에 눕혔다.
하후연은 완전히 뻣뻣하게 얼어 있었다. 그가 이런 몸으로 장원
앞까지 온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기적같은 일이었다.
"아버님!"
하후성은 얼음장같이 굳어진 부친의 몸을 주무르며 처절하게 외쳤
다. 하후연은 그 소리를 들었는지 힘겹게 두 눈을 떴으나 아쉽게
도 그의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아버님! 정신 차리세요, 성아예요! 성아......."
하후성이 귀에 대고 이렇게 외치자 하후연의 몸이 한 차례 격하게
떨렸다. 그의 입술이 기적적으로 움직였다.
"서... 성아라고....... 그... 그럼 내가... 집에... 까지 왔단
말이냐......."
거의 알아 듣기 힘든 말이었으나 하후성은 부친의 입 가까이 귀를
대고 있었으므로 똑똑히 들을 수가 있었다.
하후성은 격동하여 외쳤다.
"그래요, 아버님! 아버님은 지금 집에 계세요."
하후연의 움푹 꺼져 들어간 촛점 없는 눈자위로 눈물이 고였다.
"하... 하늘에 감사한다......."
"아버님... 흑흑!"
"서... 성아야, 손을......."
하후성은 급히 자신의 손을 차디찬 부친의 손에 대주었다. 하후연
은 미약하게나마 손에 힘을 주며 더듬거렸다.
"칠 년(七年)... 만이구나. 칠 년......."
"흑흑... 아버님......."
하후성은 오열을 금할 길이 없었다. 하후연은 한동안 그의 손을
쥐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성아야....... 슬퍼하지 말고... 내 말을... 끝까지... 들어
라....... 이 말을... 해야 한다는... 오직 한 가지 집념... 으
로... 이곳에... 왔다......."
그의 목소리는 너무나 약해서 거의 들릴락말락 했다. 하후성은 그
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성아... 너의 어머님은... 살아... 계신다......."
뜻밖의 말에 하후성의 몸은 굳어 버리는 것 같았다.
어머니. 그것은 과거 그에게는 하나의 금기(禁忌)였다.
부친인 하후연은 언제나 모친에 대해 물으면 침통한 표정을 짓곤
했다. 고사리같은 하후성의 손을 잡으며 눈물을 글썽였는가 하면
며칠 동안이나 방안에 틀어박혀 식음을 전폐하고 보냈던 적도 있
었다.
때문에 어린 하후성은 부친이 슬퍼할까봐 의식적으로 모친의 얘기
를 꺼내지 않았고, 그것은 아예 습관이 되어 버렸다. 그런데 칠
년(七年)만에 돌아온 부친이 지금 그의 손을 잡고 어머니의 얘기
를 꺼낸 것이 아닌가?
아아, 모친(母親), 얼마나 사무치도록 그리운 사람인가!
하후연의 꺼져드는 음성이 계속되었다.
"너의... 어머니의 이름은... 주(朱)... 설(雪)... 란(蘭).....
.."
하후연의 흐려지던 눈에서 갑자기 신비한 빛이 발산되었다. 사랑
하는 아내의 이름이 그에게 어떤 생기(生氣)를 부여한 것일까?
"십(十)... 오년(五年) 전의... 일이었다......."
그는 아련한 추억을 더듬듯 천장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지금으로부터 십오 년 전.
하후연(夏候淵)은 일개 낙척서생(落拓書生)이었다.
비록 가슴에는 무한한 학문과 청운의 높은 뜻을 지니고 있었으나
어려서 양친을 여의고 빈궁한 가운데 천하를 떠돌아 다녀 불운한
낭인문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결코 좌절하지 않았다. 천하를 주유하며 계속 학문
을 정진시켜 그의 학문과 덕망은 점점 높아만 갔다.
그러던 중 하남성(河南省)의 명사(名寺)에서 그는 운명의 전기를
맞았다. 백마사에서 책을 읽던 그는 그곳에 불공을 드리러 온 절
색의 미소녀를 만난 것이었다.
주설란(朱雪蘭). 이것이 그녀의 이름이었다.
청춘의 두 남녀는 이내 서로 인품에 반해 사랑에 빠지고 말았고
급기야 하후연이 주설란의 조부에게 찾아가 청혼을 하기에 이르렀
다. 주설란의 부친은 당시 일찍 타계하고 없었다.
그러나 주설란의 조부는 일언지하에 하후연의 청혼을 거절해버렸
다. 주설란의 조부로 말하면 강호(江湖)에서 위명이 쟁쟁한 일대
고수로, 가문 역시 무림대세가(武林大世家)였다. 그러므로 일개
떠돌이 문사(文士) 따위에게 금지옥엽인 주설란을 절대로 내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하후연의 비통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더우기 주설란은 당시
하후연과는 이미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몸이 되어 있었다.
반면에 그 사실은 주설란의 조부에게는 그야말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노발대발한 나머지 하후연을 잡아 지하뇌옥에 가두
고 말았다.
일점혈육인 손녀가 자신의 허락도 없이 떠돌이 사내와 정(情)을
통했다 하여 실로 가혹한 처사를 감행한 것이었다. 손녀에 대한
사랑이 큰만큼 미움도 컸던 것일까?
이후로 주설란이 아무리 눈물로 애원해도 조부의 마음은 돌이킬
수가 없었다. 그러는 가운데 무심한 세월만이 흘렀다.
그러나 세월은 조부의 분노를 점차 용해시키는 듯도 했다. 주설란
이 귀여운 옥동자(玉童子)를 낳게 되었는데 그 아기가 바로 하후
성이었다.
하후성이 태어나자 주설란의 조부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하후연을
뇌옥에서 끌어냈다.
"너는 진정 설란(雪蘭)을 사랑하느냐?"
그의 느닷없는 질문에 하후연은 비장하게 말했다.
"저의 목숨보다도 더 사랑합니다."
"좋다! 너희들의 관계가 이렇게 된 이상 노부도 더 이상 막고 싶지
는 않다."
"아!"
하후연과 주설란은 모두 감격의 탄성을 발했다. 그러나 조부는 역
시 호락호락한 위인이 아니었다.
"그 대신 한 가지 조건이 있다."
그는 하후연에게 문초(問招)라도 하듯 냉엄하게 덧붙였다.
"그렇다. 그 조건을 이루지 않는 한 너와 너의 자식을 결코 노부
의 집 안으로 들여놓을 수 없다. 네가 노부의 문제를 해결해야만
너와 너의 자식을 노부의 혈족으로 인정하겠다."
하후연은 아연 긴장하여 물었다.
"그 문제가 무엇입니까?"
"노부는 닭잡을 힘도 없는 너같은 떠돌이 문사를 가장 싫어했다.
네가 만약 무인(武人) 못지않게 참다운 용기와 인내를 보여줄 수
있다면 너를 받아들이겠다."
"하명(下命) 하십시오."
"천축(天竺)에 가면 뇌음사(雷音寺)라는 신비의 절이 있다. 그곳
의 진산이보인 뇌음진경(雷音鎭經)을 가져 오너라. 그럼 허락하겠
다."
하후연의 얼굴은 그만 창백하게 굳어지고 말았다.
그것은 무공을 조금도 모르는 그에게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찌 일만 리(一萬里)가 넘는 천산(天山)을 넘어 천축까지 다녀올
수가 있단 말인가? 아니, 설혹 간다하여도 뇌음진경을 가져오는
일은 도저히 말도 되지 않는 일이었다.
뇌음사는 천축비문(天竺秘門)으로 무공(武功)이 엄청나게 높은 신
비의 라마승의 집단이었다. 더구나 뇌음진경은 그들의 밀종무학이
수록된 지보로써 타인에게 넘겨줄 물건이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하후연은 기어코 외치고 말았다.
"하겠습니다, 어르신!"
이후로 그는 갓 낳은 핏덩이인 하후성을 안고 중원의 북쪽 하란산
까지 왔다. 그리고 도화전현성에 장원을 짓고 하후성이 일곱 살 될
때까지 함께 있었다.
그러다가 하후성이 일곱살 나던 해에 결국 그는 죽음을 무릅쓰고
천축으로 떠났던 것이다.
하후연.
여기까지 말한 그의 안색은 회색에 가까워졌다.
"서... 성아야....... 이 애비는... 칠 년(七年)동안... 뇌음사에
서 온갖 수모를 겪으며... 마침내... 뇌음진경을... 가져왔
다......."
"아... 아버님......."
하후성은 통곡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부친의 일생이 너무
나도 처절한 한(恨)으로 점철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후연은 더욱 꺼져드는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처... 천축은 너무... 멀어... 이 애비의 약한 체질... 로서...
견딜 수가... 없었다....... 춥고 허기진 것을... 참고... 수많은
난관을 ... 뚫고... 일만 리를 지나... 이곳까지... 왔...
다......."
그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품속에서 하나의 황색보자기를 꺼냈
다.
"이것이... 뇌음... 진경... 한(恨) 맺힌 물건....... 애비는...
틀렸지만... 너는... 이것을 가지고... 외증조부에게 가... 어머
님을... 만나라....... 그리고... 그... 리고......."
"아... 아버님!"
"그리...고... 나... 나는... 최선을... 다 했고... 사랑... 했었
노라고... 전(傳)... 전해......."
차츰 하후연의 손에서 힘이 빠져 나갔다. 그의 동공이 서서히 위
로 치켜 올라가고 있었다.
"아, 아버님!"
최후의 힘(力)을 다한 듯 하후연의 입술이 달싹였다.
"성아....... 내 몫까지... 행... 행복...해...라....... 그리
고... 외증조부의... 집...은... 중(中)... 중... 중......."
별이 떨어졌다.
유성(流星)이 떨어졌다.
하후연이라는 이름의, 일생을 불운하게 지냈던 낙척서생(落拓書
生)은 마침내 이렇게 허망하게 지고 말았다. 사랑하는 아내를 다
시 보지도 못한 채 어린 아들의 비통한 눈물 속에서 그는 죽은 것
이었다.
"아버님---!"
절규(絶叫)!
하후성의 피맺힌 절규가 하늘을 찔렀으나 죽은 자(死者)는 말이
없었다. 단지 싸늘히 식어갈 뿐이었다.
하후성은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아니, 흘릴 눈물조차 없었다. 너
무도 커다란 충격에 눈물조차 말라 버린 것일까?
"아버님! 칠 년 만의 상봉이 이토록 허망하다니요....... 더구나
아버님은 그 칠 년간을......."
그는 넋이 나간 듯 눈을 부릅뜬 채 읊조리고 있었다.
"어떻게... 그렇게 사셨을 수가....... 아버님--!"
피눈물.
피눈물이 흘렀다. 하후성의 눈가가 찢어지고 마침내 눈물 대신 피
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눈, 눈은 더욱 거세게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폭설에 잠긴 설야는 말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