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장 은밀십구편(隱密十九篇)
열엿새째 되는 날.
백무영은 표묘은환보법(飇妙隱幻步法)이라는 보법을 연마하고 있었다. 표
묘은환보법은 운신(運身)할 때 소리가 거의 나지 않는 신법이다. 그러하
기에 그것은 은잠(隱潛)할 때 효용이 있으며, 적을 배후에서 칠 때에 위
력을 발휘하는 보법이다.
물론 백무영은 적을 뒤에서 칠 마음은 갖고 있지 않았으나, 표묘은환보법
을 배워 두어야만 했다.
"은화번영(隱花飜影)!"
가벼운 기합 소리.
백무영은 우측을 향해 일 보를 내디딘다.
그리고 그의 몸은 우측이 아니라, 좌측에서 꽃잎처럼 펄럭거리고 있었으
며…….
"탄화잠영(彈花潛影)!"
또 한 번의 기합 소리가 나는 가운데, 백무영의 몸뚱이는 한 줄기 아지랑
이가 스러지듯 갑자기 사라졌다.
어느 틈엔가 그는 허공 이 장 되는 곳에서 나비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전후좌우(前後左右)에 무수한 그림자를 날리며 몸을 움직이는 백무영의
모습은 가히 구름 속에 머물러 있는 한 마리 유룡(遊龍)이라 할 수 있었
다.
그는 표묘은환보법의 열여섯 가지 변화를 관통식(貫通式)으로 시전한 다
음에 사뿐히 내려섰다.
"허무변환보(虛無變幻步)는 빠르고, 표묘은환보법은 신비하며 무음의 특
징이 있다. 만에 하나, 두 가지 신법의 장점을 조화한다면.....?"
백무영은 골똘히 생각을 하며 천천히 걸음을 내딛었다.
천근추신법으로 몸을 이동하는지라,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족인(足印)이
찍혔다.
동쪽으로 갔다가 서쪽으로 가고, 서쪽으로 가다가는 남쪽으로 간다. 전후
좌우 어지럽게 돌아다니기 일각 정도, 땅바닥에는 백팔 개의 족인이 어지
럽게 찍히기 시작한다.
"허무변환보의 변화는 종횡무진에 있다. 그리고 표묘은환보법의 특징은
무음무풍(無音無風)에 있다."
백무영은 또다시 족인을 찍으며 걷기 시작했다. 꽤 너른 연무장 가득히
발자국 도장이 찍혔다. 이번에 찍는 발자국 도장은 표묘은환보법에 의한
발도장이다.
백무영은 두 가지 발자국을 연관시켜 생각하다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 허무변환보의 구결을 축(軸)으로 삼고, 표묘은환보법의 변화를
바퀴살처럼 삼아 함께 시전해 낸다면……."
백무영은 쾌재를 부르며 몸을 이동시켰다.
얼핏 보면 허무변환보를 시전해 나가는 듯.
그러나 그의 몸은 허무변환보에 따라 움직일 때보다 신비하게 움직였다.
그렇다고 해서 표묘은환보법도 아니다.
그는 전혀 새로운 보법을 시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두 가지 신법을 동시에 시전하는 게 잘 되지 않았으나, 횟수가
더해 갈수록 잘 되어 나갔다.
이십여 차례 같은 보법을 시전할 때, 백무영의 몸뚱이는 수백 개의 그림
자로 화해 연무장을 가득 뒤덮을 정도였다.
"하하… 이것은 허무도 아니고 표묘도 아니다. 구구미종(九九迷踪)도 아
니고 월이화영(月移花影)도 아니다. 이것은 무영십팔변환보(無影十八變幻
步)이다."
백무영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보법 연마를 멈췄다.
그는 동시에 두 가지 보법의 구결을 운영한 나머지, 하나의 독창적인 보
법을 만든 것이다.
일컬어 무영십팔변환보(無影十八變幻步).
그가 양의심법(兩意心法)을 터득하지 않았더라면, 동시에 두 가지 신법을
시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양의심법이 익숙해짐에 따라, 백무영의 무공 성취는 전에 비할 수 없이
빠르게 증가되었다.
백무영은 어지러운 발자국을 바라보고 있다가, 누군가 자신을 보고 있다
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등이 따갑군.'
그는 야릇한 기세를 느꼈다.
그건 살기와는 또 다른 기운. 그 기운은 뒤쪽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백무영은 무의식적인 양 위장을 하여 몸을 천천히 틀었다. 아니나 다를
까? 뒤쪽에 누군가 서 있었다. 은색 찬란한 궁장을 걸친 복면여인이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다가, 그의 눈빛을 받자 몸을 움찔 떨었다
"백봉낭자!"
백무영은 눈빛을 차갑게 했다.
그를 지켜보고 있는 여인은 바로 백봉이었다.
백무영은 사마백봉에 대해 별로 좋은 감정을 지니고 있지 않았기에 그녀
를 보자, 눈빛을 보다 차갑게 했다.
"어쩐 일로 저를……?"
"오늘은 제게 공공진결(空空眞訣)을 터득하시는 날입니다."
"소녀를 따라오십시오."
백봉의 귓밥이 발갛게 물들었다.
그녀는 아까부터 백무영이 연공하는 걸 숨어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는 백무영의 남자다움에 매료되어 있었다. 하지만 차마 자신의 마음
을 밝힐 수 없는지라, 애써 초연한 체하고 있는 것이다.
사마백봉의 거처는 흰색으로 치장되어 있었다. 흰빛은 고결한 빛깔이다.
그리고 몹시 차가운 느낌을 주는 빛깔이다. 방 안을 치장하는 흰 휘장이
며 흰색의 주렴, 흰빛 도는 가구 등이 사마백봉의 결벽한 기질을 고스란
히 드러내고 있었다.
팔선탁(八仙卓) 위, 백봉의 시녀가 두 잔의 차를 끓여 와 탁자 위에 올려
놓고 뒷걸음질쳐서 물러났다.
사마백봉은 찻잔을 가리키며 상냥히 말했다.
"차의 명칭은 본시 다섯 가지였지요. 다(茶)와 가(價), 설(薛)과 명(茗), 그
리고 천(薦). 일찍 따는 걸 차라고 하며, 늦게 따는 걸 명이라 하지요."
그녀가 그렇게 말할 때, 백무영이 말을 이었다.
"차의 상등품은 난석질(爛石質)에서 자란 것이며, 황토질 토양에서 자란
차는 하품이오. 잎이 말려 있어 꽃이 아직 피지 않았을 때 딴 차가 상품
이며, 잎이 핀 것은 차등품이오."
"차에 대해 아는 것이 많으시군요."
사마백봉은 백무영의 박학함에 감탄해 마지않았다.
하긴, 백무영만한 학식을 가지고 있는 무림인을 찾는다는 건 상당히 힘든
일일 것이다.
차는 용정(龍井)이었다. 백무영은 차를 좋아하되, 차에는 잎도 대지 않았
다.
'나를 증오하는군.'
사마백봉은 여인답게 감수성이 예민한 편이었다.
그녀는 백무영이 자신에 대해 혐오감을 지니고 있다는 걸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내가 무시되다니…….'
사마백봉은 억울한 듯 눈빛을 흩트렸다.
하지만 백무영으로서는 그녀의 얼굴조차 제대로 알아보지 못할 지경이
아니겠는가?
두 사람 사이에 야릇한 냉기가 감돌았다.
본시 사마백봉은 차에 최음약을 타서 백무영을 중독시킨 다음, 다른 여인
으로 하여금 백무영과 정사케 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지금 백무영 앞에
놓여 있는 찻잔 안에는 최음제가 절대 들어 있지 않았다. 찻잔에 담긴 것
은 정말 질이 좋은 일등품 용정차인 것이다.
"공공진결은 신투술입니다. 신투술이란, 간단히 말해 남의 품안에 있는
물건을 훔쳐 내는 수법이지요."
"소매치기 방법이구려."
"그렇습니다."
"……."
"공공진결의 신투술은 아홉 가지. 그것을 익히면, 남의 품안의 물건을 자
유롭게 꺼낼 수 있습니다. 다만 자신보다 내공이 강한 사람에게는 신투술
이 쓰이지 않습니다."
사마백봉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백무영 앞에서 말을 하게 되자, 저도 모르게 말이 떨리는 것이다.
어찌 되었든, 백무영은 사마백봉에게서 구결로나마 신투절기를 터득하게
되었다.
그는 비상한 암기력을 갖고 있는지라, 사마백봉의 예상보다 빠르게 구결
을 암기할 수 있었다.
황혼이 창을 붉게 물들일 때, 백무영은 굳은 표정 가운데 입술을 떼었다.
"이제 가도 되겠소?"
"가십시오."
"낭자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싶소."
백무영의 말은 다분히 형식적인 말이다.
그는 목례를 한 다음에 천천히 일어났다.
그가 신형을 돌릴 때.
"잠깐."
사마백봉이 다급히 그를 불러 세웠다.
"또 무슨 말을?"
백무영은 주춤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문득, 면사에서 강한 빛이 스미어 나왔다.
그 빛은 사마백봉의 영롱한 눈빛이었다.
"가사(家師)께서 부르시면, 조심하세요."
"조심하라는 뜻은?"
"하여간 조심하십시오."
"후후… 난 소년 시절부터 지금까지 단 한순간도 긴장감을 풀어 놓지 않
고 있소."
백무영은 냉정히 말한 다음에 걸음을 내딛었다.
그는 문을 지나 사라져 갔으며, 그의 모습이 사라진 이후, 사마백봉의 입
술 사이에서 긴 한숨 소리가 새어 나왔다.
땅이 꺼져라 내쉬는 한숨 소리.
설마, 그녀가 상사(想思)의 염(念)에 사로잡혀 버리기라도…….
이십구 일째 되는 날.
백무영은 새벽부터 비표술 연마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는 묘수환궁에 머무는 동안,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라면 이러한 상황 가운데 고독을 느낄 것이되, 그는 고독을
느끼지 않았다.
혼자 있다는 건 오히려 편한 일이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고독이 체질화
되도록 가르침을 받은 것이다.
비표술은 묘수환궁의 장기 가운데 하나였다.
묘수환궁은 대대로 여자만을 제자로 받아들인다.
여자들은 신체 구조로 인해 남자들보다 내외공에서 뒤지기 마련.그러하기
에, 묘수환궁 여제자들은 암기를 쓰는 데 능하다.
묘수환궁의 전대궁주는 암기술을 완벽히 터득하기 위해 강호여협으로 변
장하여 한 사내를 유혹하기까지 이르렀다.
그녀는 사천당가문의 후손.
그는 강호여협 행세를 하는 환궁주에게 유혹되어 사천당가문의 암기술을
모조리 전수하게 되었으며, 결과 그는 사천당가문에 의해 파문당하고 나
서 자결한 바 있다.
묘수환궁의 절예는 그토록 처절한 집념의 역사 가운데 이룩된 것이다.
한꺼번에 열다섯 개의 암기를 발사하며, 열다섯 개 암기는 각기 다른 방
위를 가르며 각기 다른 목표물에 격중이 된다.
그것이 바로 사천당가문 암기술의 무서운 점이다.
묘시(卯時) 초(初), 백무영은 가벼운 인기척을 느끼게 되었다.
연무관으로 접어드는 여인이 하나 있는데, 바로 빙화(氷花)였다.
그녀는 수줍은 표정으로 주춤주춤 다가섰다. 전과는 달리 소박한 흰 옷을
입고 있는 바, 몸에 꽈악 달라붙는 옷이 아니라 약간 느슨하게 조여져 몸
매가 감추어지는 옷이었다.
"어떤 일로 이 곳에?"
백무영은 굳은 표정을 지었다.
빙화는 백무영의 눈빛과 마주칠 때마다 눈을 급박히 깜박거렸다.
"가사께서 부르십니다."
"묘수환랑께서?"
"예, 군화림(君花林)에 드십시오."
군화림은 묘수환궁에서 가장 신비한 장소이다.
일곱 제자가 아니면 군화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 곳은 묘수환란이 거처로 삼고 있는 곳으로, 보보(步步)마다 기관매복
이 삼엄하게 장치되어 있는 것이다.
어두운 방, 온통 검은빛에 휘감긴 방이다.
사마백봉의 방은 온통 흰빛인데 비해, 이 방은 모든 가구가 검은 빛깔을
띠고 있었다.
묘수환랑은 방 가운데 머물러 있었다.
그녀는 무릎 위에 흑묘(黑描)를 올려놓고 있으며, 손바닥으로 고양이 털
을 매만지고 있었다.
그녀는 녹림제일의 여걸로서 십오 세 때 묘수환궁의 대권을 이어받았고,
이제까지 노력하여 묘수환궁을 강호이십대 세력 가운데 하나로 끌어올렸
다.
그녀가 한 일 가운데 가장 큰일은, 전국 각지에 낙양쾌화림의 지부를 건
설했다는 것이다.
백무영은 신중한 표정을 지으며 방 안으로 접어들었다. 그는 묘수환랑을
보자, 무릎을 꿇고 절하고자 했다.
"절할 필요 없어."
묘수환궁의 첫 마디는 차갑기 짝이 없었다.
"예?"
백무영은 멍해져서 고개를 쳐들었다.
"난 자넬 제자로 생각하지 않아. 물론 자네도 날 진심으로 사부로 생각하
지 않겠지만. 그러니, 절할 필요 없어."
"으음……."
"난 빚장이에 불과해. 이미 알고 있겠지만. 우리 혈의육존(血衣六尊)은 자
네의 가문에 엄청난 빚을 갖고 있지."
혈의육존!
백무영을 암중에 키우는 여섯 명의 신비인을 통틀어 혈의육존이라는 것
일까?
혈의육존이라는 말은 이제야 처음으로 듣는 호칭이었다.
솔직히 강호계에는 그러한 호칭이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
"난 자넬 증오하네."
"알고 있습니다."
"자네가 파멸되기를 바라지."
"……."
"하지만 동업자들과 약속한 바가 있기에, 자네에게 무공을 전수한 거야."
"그럼 제가 무엇을 하길 바라십니까?"
"명령을 하면 하라는 대로 하겠는가?"
묘수환랑의 눈빛은 점점 차가워졌다.
그러나 백무영은 그 정도 시선 아래 기가 죽을 성격이 아니었다.
그는 담담한 눈빛 가운데 입술을 떼었다.
"빚을 갚을 수 있는 일이라면,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배짱 두둑한 말이군. 흥! 사내들은 다 그런 식으로 말을 하지. 막상 일에
접하면, 처리하지도 못하면서."
"전 책임을 회피하지 않습니다."
"말은 필요가 없어. 행동이 중요하지."
"제가 무얼 하기 바라십니까?"
"일단은 더 강해져야 해."
"아……!"
"호호호… 나도 통과하지 못한 관문이 있지. 묘수환궁의 마지막 관문. 그
곳으로 들어가게."
"……."
"겁이 난다면, 들어가지 않아도 좋아. 한 번 들어가면 나오기 힘든 곳이
니까."
"가겠습니다."
백무영의 대답이 나오는 데에는 약간의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용감하긴 제 아버지와 똑같군.'
묘수환랑은 백무영을 빤히 바라봤다.
백무영은 그 사이 더 늠름해졌다. 가히 헌헌장부(軒軒丈夫).
묘수환랑은 백무영의 얼굴에서 한 남자를 기억할 수 있었다.
그는 묘수환랑의 인생을 바꿔 버린 남자였다.
'그가 내 앞에 있는 듯하다.'
묘수환랑은 한동안 마음을 바로잡지 못할 정도로 심한 혼란에 사로잡혔
다.
'내 마음이 약해져서는 안 돼. 생각한 대로 처리해야 한다. 이제 하루가
남았을 뿐이다.'
묘수환랑은 고양이 등을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제십구관(第十九關)! 나도 통과하지 못한 관문이지. 장소는 이 곳의 지
하. 과거 공공신마가 거처로 삼고 있던 곳이지."
"공공신마요?"
"십 갑자(十甲子), 다시 말해 육백 년 전에 은밀십구편을 창안한 전대거
마. 바로 묘수환궁의 창시조이시지."
공공신마는 녹림도상(綠林道上)의 인물들에게는 불가(佛家)의 달마조사
(達摩祖師) 취급을 받는 인물이었다.
그는 십 갑자 이전의 무림계를 비웃으며 산 하오문의 제왕이다.
그가 들어가지 못하는 장소는 없었으며, 그가 손에 넣고자 하였을 때 손
에 넣지 못한 기진이보(奇珍異寶)가 없었을 정도이다.
그는 만보를 훔쳐 제 것으로 만들었으며, 천하각지에 궁을 세우고 제왕처
럼 행세했다.
하나, 불행한 것은 그에게 단 한 명의 진정한 친구가 없었다는 것.
그는 주변의 모든 사람을 의심한 불우한 인물이었다.
"공공신마의 다른 절기는 강호계의 인사들에게 노출되었다."
묘수환랑은 얇은 면사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그러나 면사가 워낙 엷은
데다가 백무영의 안력은 야음을 뚫어 볼 정도이기에, 그녀의 얼굴을 또렷
이 살펴볼 수 있었다.
이제 나이 서른 정도로 보이는 그녀가 사십구 세에 달하는 중년여인이라
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이다.
오똑한 콧날이며 짙붉고 도톰한 입술.
말할 때마다 입술을 한쪽만 야릇하게 찡그리는 모습이 우미스럽기 그지
없었다.
젊었을 때 얼마나 뛰어난 미명(美名)을 날린 여인인지는 필설로 부연할
필요가 없을 정도이다.
'아름다운 여인이다. 한데, 눈빛에 한(恨)이 저미어 있다.'
백무영은 묘수환랑의 눈빛이 얼어붙어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묘수환랑은 백무영이 자신의 얼굴을 보며 미묘한 상념에 빠지는 걸 느끼
지 못한 채 말을 이어 나갔다.
"그분의 절기를 얻지 못하는 한, 강호계에 나가 안정을 보장받기 힘들
다."
"그분의 절기라면?"
"나도 모른다."
"하여간 즉시 입관하도록!"
묘수환랑의 말이 거기에 이를 때였다. 백무영의 귓속으로 모기 울음소리
처럼 가는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거절해요! 들어가면 죽어요!"
백무영은 목소리의 주인공이 사마백봉이라는 걸 즉시 알 수 있었다.
사마백봉은 묘수환랑이 알아듣지 못하도록, 전음입밀(傳音入密)을 써서
말을 하는 것이다.
전음입밀의 수법이란, 음파를 내공으로 모아 상대의 귀에 전하는 것으로
… 상승내공을 지닌 사람만이 시전할 수 있는 수법이다.
내공이 초인의 경지에 이른다면, 전음입밀 소리는 남에게 발각을 당하지
않는다.
"거절해요. 그리고 하루를 버텨요.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말해 주겠어
요. 아, 제가 왜 이런 말을 하는 것인지……."
사마백봉은 죽림 안에 숨어 있었다. 그녀는 창을 통해 두 사람의 모습을
훔쳐보고 있는 상황이었다.
'들어가지 말라고?'
백무영은 그녀가 얼마 전에 한 말을 상기했다.
그녀는 묘수환랑을 만나면 조심하라고 하지 않았던가?
'사마백봉은 왜 전음을 보낸단 말인가?'
백무영은 의구심에 사로잡혔으며, 묘수환랑은 하던 이야기를 계속했다.
"죽음이 두렵다면, 입관하지 않아도 좋아."
"죽음이 두렵습니다. 하지만 입관을 거부하지는 않겠습니다."
"호호… 두둑한 배짱이 마음에 드는군."
묘수환랑의 눈빛이 반짝 빛을 발할 때, 백무영의 귓속으로는 이런 목소리
가 파고들고 있었다.
"바보! 여자의 마음을 그렇게 몰라주다니."
사마백봉이 애절하게 말할 때, 묘수환랑은 앉아 있는 의자의 모서리 부분
을 매만졌다.
끼익-!
모서리에 장식되어 있는 용두(龍頭) 부분이 돌아가며 소리가 울려 퍼졌
다. 이어 우레치는 소리가 들려 왔으며, 땅바닥이 쩌억 갈라지며 암혈이
나타났다.
백무영은 지하를 향해 뚫려 있는 계단을 볼 수 있었다. 온통 어둠이다.
빛이라고는 전혀 찾아보지 못할 암흑의 공간에서는 차가운 바람이 흘러
나왔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 죽음이 겁난다면 포기해라."
"포기하지 않습니다."
백무영은 계단 초입 부분에 발을 내딛었다.
순간, 사마백봉의 한숨 소리가 고막 속으로 파고들었다.
"남자들은 어리석다더니, 정말이군요."
사마백봉은 흐느끼는 듯한 어조로 말했으며, 백무영은 그녀의 말을 무시
하고 계단에 발을 내딛었다.
그는 지하 계단을 따라 안으로 접어들었고, 묘수환랑은 그의 모습이 보이
지 않게 되자 다시 용두 부분을 매만졌다.
그녀가 용두 부분에 손을 가하려 할 때였다.
"안 돼요, 사부!"
조급한 목소리와 함께 은색 그림자가 방 안으로 날아들었다.
은색 그림자는 묘수환랑 앞에 무릎을 꿇었고, 묘수환랑의 눈썹이 역팔자
로 휘어졌다.
"백봉, 무슨 짓이냐?"
앞에 나타난 여인은 사마백봉이었다.
사마백봉은 애처로운 눈빛을 던지며 딸깃빛 입술을 벌렸다.
옥같이 흰 치열이 드러나며 구슬픈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기관장치를 건드리면 관문의 입구는 완전히 봉쇄된다는 걸 알고 있습니
다."
"그렇다. 한 번 닫히면 절대 열리지 않는다. 난 널 지키기 위해 무영을
제거하려 하는 거다."
"제발… 사부!"
사마백봉의 눈에서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어리석은 계집! 그 사이 백무영이라는 놈에게 마음을 빼앗겼단 말이냐?"
"그, 그게 아니라……."
"닥쳐! 너에게 백무영을 유혹하라고 명했지, 유혹당하라고 명령한 바 없
다."
"사부님, 제 마음을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백무영이 죽는 걸 그냥
두고 볼 수 없을……."
사마백봉의 말이 거기에 이르렀을 때, 묘수환랑은 용두 손잡이를 향해 일
장을 후려쳤다. 개비수(開砒手)가 떨어지며, 용두 손잡이 부분이 산산이
바수어졌다.
콰르르르릉-!
나무 조각과 돌 조각이 튀어오름과 동시에, 벼락치는 소리가 터져 나오며
군화림의 석실이 온통 뒤흔들렸다.
"기, 기관을 발동시키시다니?"
사마백봉의 두 눈에 핏발이 돌았다.
묘수환랑은 애써 모르는 체하며 시선을 다른 데로 돌렸다.
"마음이 약간 아플 거다. 그러나 곧 잊혀진다."
"사, 사부님이 어찌 제 마음을 아신다고 그렇게 단정지어 말하십니까?"
"세월은 위대한 약(藥)이다. 슬픔도 잊혀진다. 넌 잠깐 동안 열병(熱病)을
앓었다고 생각하면 그뿐이야."
"너, 너무하십니다."
사마백봉의 얼굴이 새하얘지며, 그녀의 입술 사이에서 핏물이 새어 나왔
다.
"바보 같은 계집애!"
묘수환랑이 홱 고개를 돌리는데, 언제부터인지 그녀의 속눈썹 끝에도 이
슬 한 방울이 매달려 있었다.
'넌 사랑의 덫에 걸려서는 아니 된단 말이다. 이 사부가 걸었던 고통의
길을 되풀이해선 절대 아니 되는 게다. 사부는 널 구하기 위해 무영이란
녀석을 제거한 거야. 무영은 제 아빌 닮아 마력적(魔力的)인 용모를 갖고
있고, 뭇여인에게 감동을 줄 용기를 지니고 있다. 그 녀석이 조금 못났더
라면, 제거하고자 하지 않았을 거야.'
묘수환랑이 속으로 부르짖을 때, 사마백봉은 얼굴이 하얘진 채 옆으로 쓰
러지고 있었다.
계단은 백팔 개로 끝이 났다.
백무영이 접어든 곳은 미끄러운 빙판이었다.
"온통 얼음이다."
너른 굴이 얼음에 뒤덮여 있었다.
천장에서 바닥까지 이어지는 고드름에다가 벽에 다섯 치 두께로 덮인 서
리.
실로 오랫동안 결빙되어 있는 만년빙굴(萬年氷掘)인데, 군데군데 기괴한
물체가 엿보였다.
'무엇일까? 얼음 안에 있는 것은?'
백무영은 얼음에 무엇인가 갇혀 있음을 보고 안력을 돋구웠다.
그리고 그의 얼굴이 야릇하게 일그러졌다.
"사람이다!"
얼음에 갇혀 있는 것은 꽁꽁 얼어 죽은 무사들의 시체이다.
도검을 쥐고 있는 자, 철창 두 개를 등에 묶고 있는 자, 봉황필을 쳐든
자.
어떠한 시체의 가슴에는 분수자(分水刺)가 깊숙이 틀어박혀 있었으며, 심
장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자결했나 보다."
피와 죽음에 익숙할 대로 익숙한 백무영이다.
그는 도부 생활을 하며 죽음을 몸으로 체험한 바 있다고 하나, 지금 보이
는 상황은 그의 모골을 송연하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어쩌면 나도 저러한 모습이 되어 죽을지도……."
백무영은 천천히 걸음을 내딛었다.
'내가 죽으면 아무도 울어 주지 않겠지? 후후, 그렇듯 허무하게 스러지고
싶지 않아.'
그의 눈빛은 다시 암울해졌다.
'힘을 아껴야 한다.'
백무영은 야생동물의 본능을 지니고 있었다.
야생동물은 본능적으로 위기를 느낄 경우, 체력을 극도로 절제하게 된다.
백무영은 저도 모르는 사이, 생존의 본능을 일으키는 것이다.
사흘 동안 백무영은 쉬지 않고 빙굴을 헤매고 다녔다.
은밀십구관은 가히 사지(死地)였다. 식량도 구할 수 없으며, 마실 물도 없
다.
백무영은 가끔 얼음 한 조각을 떼어 입 속에 넣고 우물우물 씹었다.
'얼음의 맛이 쓰다. 후훗, 모름지기 벽에서 일어나는 독장(毒樟)의 기운이
얼음에 스미어든 것이다.'
백무영이 물 대신 먹는 얼음은 독빙(毒氷)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얼음을 먹는 즉시 사지가 마비됨을 느끼며 쓰러질 것이
다.
이 안에서 죽은 사람은 대부분 독에 중독되어 죽었다.
'나는 독에 면역체질이니, 쉽게 죽지 않아.'
백무영은 일부러 신경을 느긋하게 풀어 놓았다.
'이런 상황에서 분노와 공포를 느낀다면, 감정에 좌지우지하게 된다. 그
러면 쉽게 탈진한다.'
백무영의 의복은 언제부터인가 서리가 뒤덮였다.
한기가 골수 속으로 저미어 든다.
살가죽이 한 조각씩 잘려져 나가는 듯 춥다.
그러나 백무영의 표정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닷새째 되는 날이었다.
백무영은 가물거리는 의식 가운데, 어디에선가 온기(溫氣)가 흘러 나오는
걸 느끼게 되었다.
'이 미세한 온기는 어디에서?'
그는 저도 모르게 내공이 끓어오르는 걸 느꼈다.
그는 이제까지 숨과 호흡을 조정하여 본래의 내공을 거의 감추고 원초적
인 힘만으로 걸어다녔던 것이다.
미세한 온기는 굴 깊은 곳에서 흘러 나왔다. 그리고 아스라한 미광이 눈
을 밝게 했다.
'저 곳이다.'
백무영은 정확한 방향을 잡은 이후에야 경신술을 써서 움직이기 시작했
다.
빛은 점점 밝아졌고, 눈은 도리어 어두워졌다.
어두운 데에서 오랫동안 지내다가 갑자기 밝은 빛을 접하게 된다면, 실명
할 위험이 있다.
백무영은 문득 그것을 느끼고 눈을 감은 채 청력(聽力)과 감각에 의지하
여 몸을 이동시켰다.
눈알이 빠지는 듯하다. 눈을 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신경(視神經)에
강한 통증이 전해지는 것이다.
눈을 뜬 채 들어섰더라면, 찰나적으로 눈이 멀어 버렸으리라.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백무영은 눈을 천천히 떴다. 그는 순간적으로
눈이 화끈거림을 느끼며 재빨리 손가락으로 두 눈을 가렸다.
"대단한 빛이다."
백무영은 천천히 손바닥을 눈에서 떼어 냈다.
바로 앞, 누군가 서 있었다.
호리호리한 체격의 미녀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앞에 서서 생
긋 웃고 있었다.
도화빛으로 물든 나체에서는 강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여인의 두 눈에서는 무서운 마력(魔力)을 담은 눈빛이 폭사되어
나왔다.
신지가 굳지 못한 인물이라면, 그 빛에 접하는 찰나 의식을 잃을 것이다
"사람이 아니다. 마물(魔物)이다."
백무영은 자신이 보는 것이 환상에 불과하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만에
하나 그가 여체의 유혹에 빠져 버린 처지였다면, 발가벗은 여인의 눈빛을
보는 찰나 색마가 되어 양기(陽氣)를 폭발시키게 되었을 것이다.
원형의 석실 한 귀퉁이, 빛이 바랜 벽화가 걸려 있었다. 벽화 안에는 아
름다운 나녀의 모습이 섬세한 묘사로 그려져 있었다.
환락미인도(歡樂美人圖)!
그림은 천지조화를 일으키는 것이었으며, 그림을 중심으로 하여 진세가
형성되었기에 방 안으로 접어드는 사람은 그림 속의 인물이 살아 있은
듯 느끼게 되는 것이다.
"아아, 이럴 수가?"
백무영은 땅바닥을 보며 입을 가볍게 벌렸다.
보라! 무수한 백골이 널리어 있지 않은가?
가히 백골천하(白骨天下).
이 방 안에서 죽은 사람의 수는 오십 명도 넘어 보였다.
'여기까지 무사히 왔다가 환락미인도의 마력을 이기지 못하고 죽은 사람
들이다.'
백무영은 공공신마에 대해 미묘한 분노를 느꼈다.
그는 방을 둘러보다가 글씨를 보게 되었다.
<음욕을 지닌 자, 제 스스로 불타 죽어 버리리라.
재물에 욕심을 가진 자, 또한 죽으리라. 그 누구도 공공신마의 마지막 유
산을 가져가지 못한다.>
세상을 조롱하는 필치.
공공신마가 이 곳에서 죽어 갈 자들을 비웃으며 적은 글임에 틀림없었다.
"난 쉽게 죽지 않소이다."
백무영은 공공신마에 도전하는 눈빛을 던지며 다시 걸음을 내딛었다.
그는 환락미인도에 손도 대지 않았다. 그가 환락미인도를 건드렸다면, 순
간적으로 손가락이 썩어 문드러졌을 것이다.
그는 호기심이 적고 탐욕이 없는 성격이기에 환락미인도를 내버려두고
걸음을 내디디는 것이고, 그 덕에 한 번의 위기를 가볍게 넘기게 된 것이
다.
또 하나의 방.
그 방 안에는 고양이 눈알같이 생긴 보석이 천여 개 널리어 있었다.
"묘안석(猫眼石)."
묘안석은 희귀한 보석이다. 한 알만 갖고 있어도 자신의 부를 남에게 자
랑할 수 있을 정도이다.
한데 공공신마는 묘안석을 자갈처럼 늘어놓고, 세상 사람들을 비웃고 있
는 것이다.
"이 따위 돌 조각은 신외지물(身外之物)에 불과한 것. 후후, 지금 현재 내
게는 쓸모가 없지. 언제고 쓸모가 있을 때, 꺼내 가자."
백무영은 느긋한 표정을 지으며 그 방을 그냥 스쳐 지나갔다.
만에 하나 백무영이 묘안석에 손을 대었더라면, 사방 벽에서 화탄이 퉁기
어 나와 그의 몸뚱이를 가루로 만들어 버렸을 것이다.
입관한 지 여섯째 되는 날.
백무영은 드디어 마지막 장소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 곳은 너른 서재.
불행한 것은 서재 안이 텅 비었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없다."
백무영은 아차 하는 마음에 사로잡혔다.
'서재 안에 한 권의 책도 없다니?'
백무영은 텅 빈 서가(書袈)를 물끄러미 바라다봤다.
누군가 서가의 책을 모조리 꺼내 간 것이다.
남아 있는 것은 벽에 새겨진 열아홉 개의 부조(浮彫)뿐이었다.
"아무도 여기 오지 못했다는 말은 거짓말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묘수환
랑은 일부러 나를 죽이기 위해……."
백무영은 이제야 사태를 짐작할 수 있었다.
묘수환랑의 사조이던 음환요희(陰幻妖姬)가 묘수환궁을 이끌던 시절, 이
곳이 돌파된 바가 있다.
음환요희는 여기 있던 모든 서적을 외부로 끌어 낸 바 있다.
백무영이 은밀관에서 익힌 서적 가운데 태반은 당시 외부로 유출된 서적
이었다.
"날 사경(死境)에 빠뜨리기 위해 텅 빈 서재로 오게 한 것인가? 날 죽일
작정이라면 쉽게 죽일 수도 있는데, 어이해 이런 복잡한 일을?"
백무영은 문득 묘수환랑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의 한서린 눈빛도.
'다른 사부들과는 틀린 눈빛이었다. 다른 사부들은 날 미워하는 척하면서
도 나를 총애하는 바, 묘수환랑은 진심으로 날 죽이려 했다.'
혈의육존(血六六尊)!
백무영을 은밀히 기르는 여섯 명의 강호이인(江湖異人)들이다.
그들 사이에는 어떤 묵계가 있으며, 백무영은 묵계에 따라 길러지는 것이
다.
'대체 난 누구이기에? 나의 부모가 그들에게 어떠한 빚을 지었기에?'
백무영은 소년 시절부터 품어 왔던 의구심에 빠져들었다.
지금으로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알아 내지 못할 일에 불과하다.
'언제고 알게 되겠지. 만에 하나, 내가 부당한 대접을 받은 것이라면 용
서하지 않는다.'
백무영은 주먹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날 정도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는 숨을 몰아쉬다가 천천히 신형을 틀었다.
이제 남은 일은 나가는 일에 불과하지 않겠는가?
"언제까지 남의 조롱을 받아야 하는지."
백무영은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퍼뜨리며 한 걸음을 내딛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는 실로 야릇한 기운이 엄습함을 느꼈다.
'이 안에 또 누가 있단 말인가?'
그는 저도 모르게 무적십팔로도초(無敵十八路刀招)의 기수식을 취했다.
하나, 그를 향해 다가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백무영은 청력을 곤두세웠으나, 호흡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옷자락이 바람에 펄럭거리는 소리도 없으며, 맥박이 뛰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대체 무엇이 나를 노리는가?'
치열한 살기가 다가선다. 백무영이 느낀 어떠한 살기보다도 강한 살기이
다.
상대의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데, 야릇한 한기(寒氣)가 피부 속으로 저미
어 드는 것이다.
그의 감각이 예민하지 못하다면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미세한 살기이
기도 하거니와, 그러한 기운을 느낀 이상 거미줄에 걸린 나방 마냥 옴짝
달싹하지 못할 위기감을 느끼게 하는 죽음의 느낌이기도 했다.
한 시진 정도의 팽팽한 대치.
백무영의 의복은 땀에 흥건히 젖었다.
기세는 시간이 지날수록 보다 강해졌다.
'촌보(寸步)도 내디딜 수 없다.'
약간이라도 몸을 이동한다면, 상대의 살인수(殺人手)가 자신의 사혈(死穴)
을 노릴 것이다.
백무영은 살인수법에 능통한지라, 상대의 느낌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
다.
다시 삼각(三角) 정도 시간이 지났다.
백무영은 촌보도 떼어 놓지 못할 위기감 가운데, 오사부가 한 말을 되뇌
이게 되었다.
- 타인을 죽이고자 할 때에는 죽음을 의식하지 말아야 한다. 죽음을 의
식한다면, 감정에 휘어 감기게 된다. 감정을 제압한 이후에야 살검(殺劍)
을 완성할 수 있다. 마음을 공허하게 하는 것이 마음을 꽉 채우는 것보다
중요하다. 언제고 네 스스로 그러한 경지를 체험하게 되리라.
갑자기 그 말이 기억나다니?
너무나도 먼 옛날에 가르침 받은 말인데, 지금 그 말이 기억나는 것이다.
'마음을 텅 비게…….'
백무영은 주변에 대해 의식하지 않고자 노력했다.
누가 자신을 노리든 상관하지 않고, 자아(自我)마저 망각해 버리는 허무
(虛無)의 경지.
극도의 인내력이 없다면, 그러한 심경에 쉽게 빠져들지 못한다.
백무영은 어느 순간부터 마음을 텅 비울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살기가 조용히 사라졌다.
얼마 후, 백무영은 자신을 위협하던 존재가 무엇인지 알고는 실소를 흘리
지 않을 수 없었다.
"겨우 저것이었던가?"
백무영은 벽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벽은 열아홉 개의 면으로 이루어졌는 바, 각 면마다 부조(浮彫)가 하나씩
패여 있었다.
부조에 새겨진 것은 관능(官能)적으로 묘사된 관음보살상(觀音菩薩像)이
었다.
나긋나긋한 손을 쳐드는 자세도 있으며, 춤추는 듯 걷는 자세도 보였다.
결가부좌(結跏趺坐) 자세로 하늘을 올려다보는 관세음보살의 모습도 있
다.
열아홉 개의 부조는 각기 다른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십구면관음도해(十九面觀音圖解)가 나를 살기에 사로잡히게 하다니?"
백무영은 예(藝)에 대해서도 조예가 있는지라, 부조를 깎은 솜씨가 지극
히 정밀하고 세밀함을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끌이나 정으로 깎은 게 아니라, 금강지력(金剛指力)으로 깎아 낸 부조이
다. 저것이 공공신마의 솜씨라면, 그의 무공은 재평가 받아야 한다. 벽의
석질(石質)은 쇠만큼 단단하다는 청강석(靑剛石)이 아닌가?"
백무영은 공공신마가 방 안에서 부조를 깎아 대는 모습을 상상하며 감탄
을 금할 수 없었다.
일세의 야적(夜賊)이던 공공신마에게 불심(佛心)이 있었을까?
그가 열아홉 개의 관세음보살을 깎으며 생각했던 것은 어떠한 것이었을
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백무영은 문득 열아홉 개 관세음보살이 취하고 있
는 동작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하나 하나 기이한 초식(招式)을 뜻하고 있다. 모든 초식은 서로 이어지
지 않는다. 그러나 저러한 자세가 이어진다면……?"
백무영의 눈에서 기광이 떠올랐다.
그는 재빨리 첫번째 부조의 자세를 취해 보았다.
그 자세는 옥간도혼(玉奸刀魂)의 자세였다.
두 번째 부조의 자세는 배운어기(排雲馭氣), 세 번째 부조의 자세는 신룡
두갑(神龍枓甲)이다.
그 다음 부조는 홍비명명(鴻飛冥冥)의 자세이며, 다음 부조는 월용성수
(月湧星手), 그 다음은 천룡수지(天龍竪指), 사음이양(乍陰以陽)이었다. 전
혀 이어지지 않는 초식을 이어 나간다는 건 지극히 힘든 일이다.
각 초식을 시전할 때마다 혈류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흐르기에, 각 초식
마다 연관성을 전혀 찾을 수 없다. 하지만 양의심공을 익히고 있는 백무
영인지라, 어렵게나마 모든 초식을 이어 나갈 수 있었다.
초식을 이어 시전하는 수법을 연환관통식(連環貫通式)이라고 한다.
백무영은 열아홉 개의 초식을 모조리 이어 시전할 수 있었으며, 그의 몸
뚱이는 점점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 줄기 연기가 흐르는 듯, 백무
영의 몸뚱이는 무서운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하였으며… 허공 가득히 연
화(蓮花)가 떨어지는 듯한 착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으핫핫… 바로 이것이다."
백무영의 호탕한 목소리가 석실 가득히 메아리쳤다.
"이것이 바로 은밀십구편(隱密十九篇)이리라. 프핫핫……!"
춤사위를 추어 대는 듯, 백무영의 몸뚱이는 유려하고 우아하며 쾌속하게
움직였다.
한 장의 꽃잎이 바람을 타고 떨어져 내리는 것 같기도 하고, 눈보라가 광
풍에 어지럽게 흔들리는 것 같기도 하다. 무시무시한 파공성이 일어나며,
하이얀 손바닥 그림자가 거위털이 뿌려지듯 허공을 휘어 감았다.
어느 한순간.
콰르르르릉-!
요란한 소리가 일어나면서 일진광풍이 휘몰아쳐 나갔다.
백무영은 초식의 변화 가운데 저절로 장풍(掌風)을 쳐내게 된 것이다.
그가 퍼부어 내는 장풍은 열아홉 번째의 부조를 후려치게 되었고, 그 순
간 기묘한 현상이 벌어졌다.
석실이 진동하기 시작하며, 방바닥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기관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가 건드린 부분은 기관장치의 손잡이였
다."
백무영은 초식 시전을 멈추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유심히 지켜봤다.
방바닥이 회전하는 가운데 가운데가 쩌억 쪼개어졌으며, 은빛 찬란한 꽃
한 송이가 땅바닥에서부터 돌출되어 나왔다.
그것은 흰 옥으로 깎여진 백옥연화대(白玉蓮花臺)였다.
"아아, 지하에서 이러한 것이 솟아 나오다니……."
백무영은 기관이 멈추기를 기다렸다가 백옥연화대 쪽으로 다가섰다.
연화대 위에는 금갑 하나가 놓여져 있었다.
백무영은 조심스럽게 금갑을 열었고, 금갑 안에는 몇 가지 물건이 있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
두 권의 소책자(小冊子), 하나의 칙칙한 철환(鐵環), 그리고 하나의 죽부
(竹符).
백무영은 죽부에 글이 적혀 있음을 보고 죽부를 손에 쥐었다.
<여기에 이것을 보는 자, 노부의 진정한 후계자이니라.
그에게 녹림(錄林)을 맡기고 공공지맥(空空之脈)을 맡기노라.>
글을 적은 사람은 묘수환궁을 건립한 공공신마였다.
그는 이 안에서 최후를 마쳤고, 죽기 직전에 연화대의 기관을 이룩했던
것이다.
<공공삼보(空空三寶)를 그대에게 전하노니, 부디 노부가 강호에 진 빚을
갚아 주기 바란다.
노부의 모든 재산을 의(義)에 쓴다면, 더욱 빚을 갚는 것이다. 노부는 불
우한 환경에서 자라났는지라 세상을 증오하게 되었다. 그래서 도적이 되
었으며 기왕이면 고금제일투(古今第一偸)가 되고자 했다.
그래서 모진 시련을 감내하며 천하를 돌며 기진이보(奇珍異寶)와 강호 비
급들을 무수히 훔쳤고, 결국 녹림의 제왕이 될 수 있었다.
노부가 여기 감추어 둔 세 가지 물건은 노부가 모은 기진이보 가운데 가
장 소중한 것으로, 모두 오천축국(五天竺國)의 물건이다.
하나는 포달랍궁(包達拉宮), 하나는 천룡사원(天龍寺阮), 또 하나는 향지
국(香至國)의 왕실 보물이다.
포달랍궁에서 나온 것은 공공진경(空空眞經)!
그 안에는 공공마하반야밀심공(空空摩河般若密心功)이 수록되어 있으며,
그것을 십 년 참수(參修)한다면 수화(水火)는 물론 도검불침지체(刀劍不
侵之體)가 될 수 있다.
또 하나의 서적은 사영환마록(死影幻魔綠)!
그 안에 담긴 절기 가운데 하나가 노부의 후예가 부조를 보고 터득했을
십구면악마무(十九面惡魔舞)이다. 사영환마록에는 천하각지의 살인절기가
기록되어 있으며, 거기 시전된 절기를 쓴다면 꼭 피를 보게 되니… 시전
하는 데 주의하기 바란다.
마지막의 보물은 향지국에서 나온 천화군림환(天花君臨環)!
그것은 노부가 인정한 녹림제일령(綠林第一令)이다.
녹림의 모든 제자는 천환군림환 아래 굴복해야만 한다.
후계자여, 부디 노부가 강호에 저지른 죄업을 모두 씻어 주기 바란다.>
공공신마는 자신의 죄업을 뉘우치며 죽었던 것이다.
그가 은밀관을 세운 이유는 자신의 보물을 영원히 감추어 두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의 보물에 눈독을 들이는 강호거마들을 기관으로 제압하고
언제고 올바른 후계자를 고르기 위함이었다.
백무영은 공공신마의 진정한 후계자로 선택된 것이다.
백무영이 익힌 어떠한 무공도 공공삼보(空空三寶)의 무공을 능가하지 못
한다.
특히 사영환마록의 절기는 무적도법(無敵刀法)과 생사십해(生死十解)를
초월하는 살인수법이다.
백무영은 사경(死境) 가운데 기연을 얻은 것이며, 그의 무공은 전에 비해
몇 단계 위로 증가하게 된 것이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