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라쿠엔[偕樂園]
도쿠가와의 후손인 도쿠가와 나리아키가 세운 정원이다. 그는 메이지유신 때 막부를 무너뜨린 존왕운동을 하던 인물이었으나, 번주로서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던 1840년대에 40대에 이 정원을 조성하였다. 정원 이름은 백성들과 함께 즐긴다는 맹자의 '古之人與民偕樂, 故能樂也' 에서 따온 말이다. 1842년 7월에 개원하였다.
1. 정원대강
명칭 : 가이라쿠엔[偕樂園]
주소 : 1 Chome-3 Tokiwacho, Mito, Ibaraki 310-0033 일본
방문일 ; 2023.8.27.일
입장료 : 300엔, 70세 이상 50% 할인/ 고분테이(호문정) 200엔
2. 둘러보기
지금은 무더운 여름, 그늘을 만들어주는 나무가 많지 않아서 돌아보기가 쉽지 않다. 매화나무는 꽃 필때는 아름답기 그지 없겠지만, 200년이 다 되어도 크게 자라는 나무가 아닌지라 여름 정원 그늘을 만들어주기에는 역부족이다. 뒷쪽 삼나무, 죽림에 이르면 그늘이 좋다.
정원에 들어서기 전에 비석 하나를 만나는데 '대일본사완성지지'라고 새겨져 있다. 이곳에서 대일본사의 저술이 완성되었다 한다. 도쿠가와가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아들을 번주로 삼은 곳인데, 나중에는 존왕의 중심이 된 지역이니 아이러니다. 대일본사는 2대 번주인 도쿠가와 미쓰쿠니(1628~1700)에 의해 편찬이 개시되어 250년 동안 이루어진 역저이다.
이 정원의 중심부는 숲이 아니라 호문정이라는 건물인 거 같다. 이름은 정자지만 거의 빌딩 규모의 크기로 대강 봐도 10개도 넘는 방으로 구성되어 있고, 방마다 놀라운 그림으로 만들어진 병풍이나 화려한 그림 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호문정을 한바퀴 거의 돌아볼 무렵에는 찻집을 만나게 된다. 이 찻집에서 감주나 커피를 마시며 보내는 시간이 정원구경의 하이라이트다. 입장료가 따로 200원이 있고, 감주는 1,000엔 정도, 커피는 600엔 정도에 마실 수 있다. 전통가옥의 정취에 시원하고 품격 있는 분위기가 시간을 잊게 한다.
나머지 두 개의 정원과 완전히 다른 모습을 이 호문정에서 느낄 수 있다. 덕분에 보는 정원에서 누리는 정원이 된다. 직접 도쿠가와 나리아키가 설계한 건물이라니, 여러 정취를 더듬어볼 수도 있다. 시회, 양노회 등이 주로 열렸다니, 문학적 감수성과 함께 이 정원의 설립 목적인 여민의 의도를 잘 실현한 공간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현재의 건물에서는 시회의 흔적을 찾기는 어렵다. 편액도 없고, 필적도 없다. 우리 정자가 차경을 하여 이루어진 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우리 정원은 소쇄원에서 보듯이 자연 속에 정자를 만들어 자연을 정원으로 삼았고, 인위적으로 조성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 정자에서 시를 읊고 시회를 즐겼다. 음풍농월이 시가 되었다.
자연과 인간과 시문이 하나였다. 이곳은 자연과 인간과 문학이 별도다. 뭐든 나누고 통제하는 것에 익숙한 일본의 모습을 여기서도 읽는다면 무리한 해석일까.
1)소개 : 정원
매년 2월 하순부터 3월 하순에 걸쳐 미토 매화 축제, 4월에는 벚꽃 축제, 5월에는 철쭉 축제, 9월에는 싸리 축제가 열린다.
공원내에는 고분테이((好文亭, 호문정)가 있는데, 이 이름은 매화의 다른 이름인 고분모쿠에서 유래되었다. 고분테이는 1945년 8월 2일 태평양 전쟁중 공습으로 소실되어 3년 공사 끝에 1958년 복원하였지만, 1969년 낙뢰로 또 다시 소실되었다 1972년 복원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2) 소개 - 조성자
도쿠가와 나리아키 (Tokugawa Nariaki , 德川齊昭)
250년 이상 일본을 지배해온 도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를 무너뜨린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 1868]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1829년 형의 뒤를 이어 미토 한[水戶藩]의 한슈[藩主]가 되었다. 당시 일본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을 가진 지역의 하나였던 미토 한은 도쿠가와 가문의 지배를 받았지만, 미토 한은 쇼군[將軍]에게 빼앗긴 덴노의 권력을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하던 존왕운동의 중심지였다. 이 운동에 깊이 관여했던 나리아키는 더 많은 권한을 봉건영주들에게 보장해주고 국내의 단결을 고취시켜야 할 뿐만 아니라 국방을 튼튼히 하기 위해서는 서구의 군사 및 산업 기술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중앙정부에 강력히 촉구했다.
그러나 서양과의 교역과 접촉이 늘어나면 일본의 성스러운 전통이 파괴되리라고 생각한 그는 서양인들의 입국을 허용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서양기술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중략)
쇼군 도쿠가와 이에사다[德川家定]가 1858년에 죽자 그의 아들 게이키가 유력한 후계자로 지목되었으나 결국 다른 경쟁자가 후계자로 뽑혔으며, 정부는 미국과 일본 사이의 통상을 규정한 조약을 체결했다(미일수호통상조약). 나리아키는 덴노의 동의없이 체결된 이 조약이 일본의 전통에 위배된다고 비난했다. 쇼군은 이러한 비난을 자신에 대한 불복종이라고 보아 나리아키와 그 추종세력에게 사퇴를 명령했다. 나리아키가 죽은 뒤 도쿠가와 세력은 붕괴되었으며, 바쿠후 내에서 좀더 개혁지향적인 세력이 권력을 잡게 되었다.
1866년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라는 이름으로 쇼군이 된 게이키는 바쿠후 체제의 폐지를 주장했다.(다음백과 전재)
3) 둘러보기
대일본사
"대일본사"는 중국의 왕조사를 모범으로 삼아 일본 역사를 포괄적으로 기술한 역사서이다. 미토 번(水戶藩)의 2대 번주인 도쿠가와 미쓰쿠니(1628~1700)에 의해 편찬이 개시되었고, 그의 사후에도 미토 번의 사업으로 계속되어 메이지 시대(1906)에 완성되었다.
미쓰쿠니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손자로 도쿠가와 정권의 핵심 인물이기도 하였다. 그는 일본 역사서들이 단순한 연대기에 불과하다고 보고, 고전 연구에 관심을 가지며 역사 편찬 사업을 시작하였다. 일본 황실의 역사와 천황의 권력이 막부로 넘어가게 된 과정을 밝혀냄으로써 천황에 대한 충성심을 일깨웠다. 도쿠가와 가문이지만 존왕 정신을 고취함으로써 미토학의 원류를 이루었고, 그 결과 미토 번은 존왕 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진무 천황(神武天皇)부터 고코마쓰 천황(後小松天皇)까지(남북조가 통일된 1392년까지로 내용이 매듭지어져 있다.)의 100대 천황의 치세를 다루었다. 기전체의 사서로서, 본기 73권, 열전 170권, 지(志) · 표(表) 154권, 전 397권 226책(목록 5권)이다. (학습백과 동아시아사 전재)
등나무시렁
오헌원선생비
호문정 입구
가이라쿠엔 기념비
*매화숲
*아래는 정원 옆 토키와신사(常磐神社). 도쿠가와가를 모셔놓은 신사. 물론 가이라쿠엔의 설립자 나리아키도 모신 곳이다.
오늘은 휴일이다. 정원의 동문 밖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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