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5일 (화) 촬영.
인천시민愛 집(옛 시장 관사)
복도에 게시되어 있는 홍보물.
시인 김기림 가장 우리말 다운 문체로 개항장을 스케치하다.
1930년대는 일제강점기이긴 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말이 가장 아름답게 널리 시로, 노래로 기록된 시기였다.
항구도시 제물포의 모습은 구인회 멤버 김기림의 시집 <태양의 풍속> '길에서 - 제물포 풍경' 여덟 편의 연작시에서 또렷하게 만날 수 있다.
기차
모닥불 붉음은
죽음보다도 더 사랑하는 금벌레처럼
기차는
노을이 타는 서쪽 하늘 밑으로 빨려갑니다.
인천역
'메이드 인 아메리카'의
성냥개비나
사공의 '포케트'에 있는 까닭에
바다의 비린내를 다물었습니다.
조수
오후 두 시...
머언 바다의 잔디밭에서
바람은 갑자기 잠을 깨어서는
휘파람을 불며불며
검은 조수의 때를 모아가지고
항구로 돌아옵니다.
고독
푸른 모래밭에 가빠져서
나는 물개와 같이 완전히 외롭다.
이마를 어루만지는 찬 달빛의 은혜조차
오히려 화가 난다.
이방인
낯익은 강아지처럼
발등을 핥는 바닷바람의 혓바닥이
말할 수 없이 사롭건만
나는 이 항구에 한 벗도 한 친척도 불룩한 지갑도 호적도 없는
거북이와 같이 징글한 한 이방인이다.
파선
달이 있고 항구에 불빛이 멀고
축대 허리에 물결 소리 점잖건만
나는 도무지 시인의 흉내를 낼 수도 없고
'빠이론'과 같이 짖을 수도 없고
갈매기와 같이 슬퍼질 수는 더욱 없어
상한 바위틈에서 파선과 같이 참담하다.
차라리 노점에서 임금(林檎)을 사서
와락와락 껍질을 벗긴다.
대합실
인천역 대합실의 조려운 '벤치'에서
막차를 기다리는 손님은 저마다
해오라비와 같이 깨끗하오
거리에 돌아가서 또다시 인간의 때가 묻을 때까지
너는 물고기처럼 순결하게 이 밤을 자거라
한글 띄어쓰기를 만들고 인천 아리랑을 채보(採譜)한 호머 B 헐버트, 한국에 영원히 잠들다.
현재 서울시립미술관 부지는 한 때 우리나라 최초로 영어, 수학 등 글로벌한 학문을 가르치는 공립학교인 육영공원이 자리하고 있었다.
호머 헐버트 박사와 한국의 인연은 바로 이때부터 시작되었으며
1949년 마포 양화진 묘역에 묻히기까지 평생을 한국의 완전한 독립을 위해 헌신하였다.
또한 그는 1901년 제물포구락부의 개관소식을 코리안 리뷰에 전하였다.
헤이그 밀사 동행, 인천 아리랑 채보, 한글 띄어쓰기 개발 등 문화 전반적인 영역에서 든든한 후원자 역할을 담당했다.
외국인 최초로 건국공로훈장 태극장을 받았다.
언더우드, 러시아 북해함대의 패전을 제물포구락부 난간에 서서 증언하다.
일제가 가장 싫어했으며 두려워한 외국인 중 한 사람이 바로 언더우드다. 연세 학원의 설립자이며 가족 전체가 4대에 걸쳐
한국의 독립과 군사정권에 대한 비판자 역할을 하면서 우리나라의 근현대사를 증언해 주고 있는 든든한 후원자라 할 수 있다.
제물포항을 떠나 어청도를 항해하던 아펜젤러, 물에 빠진 조선 여학생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치다.
아펜젤러는 1885년 인천 내리교회를 만들었으며 최초의 근대 사학인 배재학당을 세운 설립자이다.
학교의 현판을 고종황제가 하사할 만큼 조선 민중의 편에 서서 다양한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어청도에 빠진 그의 시신은 수습되지 못했으며 현재 마포구 양화진에는 주인은 없고 가묘만이 끊임없이 찾아오는 순례자들을 맞이하고 있다.
신부 행차 / 엘리자베스 키스. 목판화, 25.7 x 38, 송영달.
원산 학자와 그 제자들 / 엘리자베스 키스. 1921, 목판화, 68 x 100, 송영달.
인천시민愛집 멤버십 공간 랜디스 다원.
랜디스 다원은 인천 최초의 서양 병원인 성 누가 병원을 설립하여 의료 봉사를 했던 엘리 랜디스(1865~1898)의 숭고한 뜻을 기리는
의미에서 이름 지은 다원입니다. 다양한 소모임을 위한 한실 공간이며 셀프로 차를 드실 수 있는 멤버십 운영제 다원입니다.
랜디스 다원의 방과 복도에는 우리나라 근대 유명 화가들의 그림 모사본들이 설명문과 함께 걸려 있어 명화들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그림 감상.
蘆鴈圖, 노안도 / 심전 안중식(1861~1919), 종이 담채, 138 x 70cm, 홍익대 박물관 소장.
달빛을 등지고 갈대밭에 날아드는 오리의 날카로운 눈동자가 유난히 눈길을 끄는 작품이다.
단순하면서도 명쾌한 필치는 적막한 가을밤에 생명감을 불어 넣어 은밀하게 숨 쉬고 있는 미의 세계를 창출해 보여주고 있으며,
선비들의 시정 어린 高絶(고절) 한 精神性(정신성)을 형상화시켜 주고 있다.
대개 蘆鴈(노안)이란 <秋水長,추수장>이나 <秋夜長,추야장>과 함께 깊은 가을밤의 思念(사념)을 나타내는 주제의 하나이다.
桃源問津, 도원문진 / 심전 안중식(心田 安中植, 1861~1919), 비단 채색, 164.4 x 70.4cm, 호암미술관 소장.
안중식은 1861년에 서울에서 태어나 1919년에 사망하였다. 字는 公立, 號는 心田인데, 심전 외에도 자당(資堂), 심원(心願),
심전(心筌), 경부(耕夫), 용인(庸人), 불이자(不二子), 불불옹(不不翁), 경묵도인(耕墨道人) 등.
1881년엔 신식 무기 제조법과 조련법을 배우기 위하여 관비(官費)로 중국으로 떠났던 영선사(領選使) 일행의 제도사로 조석진(趙錫晉)과
더불어 중국 톈진(天津)에 유학하였고,
이 때 알게 된 조석진과는 평생을 친구로 사귀면서 화단의 쌍벽을 이루었다.
1902년 어진 도사(御眞圖寫)에 조석진과 더불어 화사(畵師)로 선발되어 화명을 높였다.
어진도사 이후 그의 화실인 경묵당(耕墨堂)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1911년 이왕가(李王家)의 후원으로 서화미술원(書畵美術院)이 설립되자 이곳에서 조석진, 김응원(金應元) 등과 같이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이 서화미술원 출신으로는 이용우(李用雨), 오일영(吳一英), 이한복(李漢福), 김은호(金殷鎬), 박승무(朴勝武),
최우석(崔禹錫), 노수현(盧壽鉉), 이상범(李象範) 등이 있다.
1884년엔 갑신정변에 연루되어 일본으로 망명하였으며, 1891년과 1899년엔 도중(渡中), 그곳 문인묵객들과 교유를 깊이하였다.
그의 풍부한 색감이나 구성은 그와 같은 다채로운 이력 속에서 얻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특히 그의 대표작의 하나로 평가되는 <도원문진>은 복고(復古)를 지향하는 집권귀족의 취향(趣向)을 반영하는 것으로서,
전설상의 이상경인 무릉도원을 찾아가는 주인공의 행위를 통해서 옛(古)을 귀감화(龜鑑化)하는 의도가 화면에 게재되어 있는 듯하다.
그는 이와 같은 선상인물(船上人物)들을 많이 그렸었다.
1913년작인 위의 작품은 화면을 다루는 기교나 부채(賦彩 - 먹으로 바탕을 그린 다음 색을 칠함) 구도 등에서
북화적(北畫的) 청록산수에 남화적 정서를 가미한 것인바,
상부의 중첩되는 산악과 하부의 청청한 수목들을 신선하고 정교한 심전 특유의 청록화법이 통일시켜 주고 있다.
오원 장승업에게 그림을 배운 그의 제자로는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라는 춘곡 고희동, 한국 최초로 1컷짜리 시사만화를 그렸던 관제 이도영,
한국화단에 김기창, 장우성, 이유태, 조중현 등 수많은 제자를 양성한 김은호,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서 일장기를 지우고 동아일보에 게재했던 청전 이상범, 겸재 정선 이후 최고의 진경산수화가라는 소정 변관식,
스승인 심전의 아호에서 心자를 하사 받은 심산 노수현 등
서화미술회에서 소림 조석진과 함께 조선시대에서 일제강점기까지 한국화단의 맥을 탄탄하게 이어준 핵심적인 화가이다
神仙圖,신선도 / 小琳 趙錫晉(소림 조석진, 1853~1920), 종이 수묵담채, 125.5 x 42.5cm, 고려대박물관 소장.
1915년에 그린 이 작품은 小琳末年(소림말년)의 筆力(필력)을 유감없이 드러낸 佳作(가작)으로써, 대상을 굵은 墨線(묵선)으로
간소하게 처리하고 있어, 그의 다른 작품에서는 잘 느낄 수 없는 禪味(선미)를 보인다.
布置(포치)는 상하로 兩分(양분)되어, 아래로는 큰 표주박에 기대앉은 신선이 전면에 클로즈업되어 있으며,
위로는 절벽에 매달린 한 그루 나무 사이로 시원하게 흘러내리는 폭포수가 자리하고 있다.
간결한 背面(배면)처리에 전면인물의 誇大描寫(과대묘사)는 이 그림의 주제를 강조하여 줄 뿐 아니라
삼각구도를 이루어 화면을 안정시켜 준다. 검고 거친 두발과 수염, 유달리 강조된 丹脣皓齒(단순호치- 붉은 입술과 하얀 치아)의 미소,
털이 숭숭 돋은 기이한 두 손 등은 상상적 인물로서의 신선을 잘 부각시켜 주고 있다.
아마도 西王母(서왕모)의 복숭아를 훔쳐먹고 三千甲子(삼천갑자)를 살았다는 전설상의 인물인 東方朔(동방삭)을 형상화한 것 같다.
雪路,설로 / 청전 이상범(1897~1972), 종이 수묵, 47 x 103.5cm, 동아일보사 소장.
歸路,귀로 / 靑田 李象範(청전 이상범, 1897~1972), 종이 수묵, 69 x 182cm, 이희원 소장.
약간 높은 언덕 위에 다 쓰러져가는 山家 세 채가 서 있고, 그 앞을 가로 질러 흘러내리는 계류(溪流)가 있으며, 그 계류의 중심부에
걸려 있는 나무다리에는 낚싯대를 든 村老(촌로)가 건너가고 있다. 靑田山水(청전산수)의 전형적인 스타일이다.
이와 같은 청전의 同一主題(동일주제)와 同一手法(동일수법)에 대하여 어떤 美評家(미평가)는 <그의 그림은 하나로서 족하다>고
혹평한 적이 있는데, 당시로서는 靑田의 약점을 찔렀던 것 같은 이 말이 靑田이 가고 난 이제 와선 가당치 않은 듯한 느낌을 준다.
靑田이 동일주제를 반복한 것은 技法(기법)의 매너리즘 때문이 아니라 그 주제에 대한 그의 정진도 때문인 것이다.
즉 靑田은 외적인 동일성을 통하여 내적인 변화와 完熟(완숙)을 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점은 그의 산수를 제작년대별로
진열하여 놓고 보면 확연하게 파악된다. 그는 동일주제의 반복 속에서 대상세계를 擴充(확충)시키고 深化(심화)하여 간 것이다.
春朝,춘조 / 청전 이상범(1897~1972), 종이 수묵, 42.5 x 355.5cm, 개인 소장.
晩秋,만추 / 소정 변관식(1899~1977), 종이 담채, 116 x 264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玉流淸風,옥류청풍 / 小亭 卞寬植(소정 변관식, 1899~1977), 종이 수묵, 91 x 117cm, 개인 소장.
이 그림 역시 소정의 제작열이 왕성할 무렵에 그려진 작품의 하나로 어느 명승의 실경을 그 특유의 화법으로 담은 것이다.
가운데 커다란 岩盤(암반)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절벽을, 왼쪽에는 斷崖(단애)를 배치하고 각각 그 아래 흐르는 山間水(산간수)를
그렸는데 가운데 암반의 수평선과 양쪽 절벽의 수직선, 거기에 斜線(사선)이 적절히 배합되어 動感(동감)을 주고
오른쪽의 콸콸 흐르는 산간수와 왼쪽의 개울물이 서로 강약을 이루어 동감을 더하고 있다.
그리고 적묵에 의한 바위의 당당한 골격미와 塊量感(괴량감), 濃淡(농담)을 적절히 조절하여 찍은 苔點(태점), 배경의 여백,
그리고 무엇보다도 화면 전체를 가득히 적시고 있는 蒼潤(창윤)한 묵색이 시정을 한결 북돋우워 준다.
豊年頌,풍년송 / 霽堂 裵濂(제당 배렴, 1911~1968), 종이 담채, 65 x 43cm, 개인 소장.
이 그림 역시 우리나라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情景(정경)을 소재로 하여 그린 작품이다.
즉 야산을 배경으로 하고 그 기슭에 자리한 민가, 그 앞에 펼쳐진 전답, 거기서 농부들이 일하고 있는 지극히 담담한 정경인데,
제당 배렴은 이를 남화풍의 수묵화법으로 그려놓고 있다.
야산과 수풀과 前景(전경)의 나무들을 潑墨(발묵)과 破墨(파묵)을 적절히 배합하여 그리고,
왼쪽의 전답은 渴필(갈필)로 그려 濃淡(농담)과 筆勢(필세)가 빚어내는 수묵화의 맛을 유감없이 발휘해 놓았다.
제당의 그림은 일견 평범하고 무미한 듯이 보이나 실은 들여다보면 볼수록 우리를 사로잡는 古淡(고담)한 맛이 있다.
그것은 그의 文氣(문기)짙은 수묵법과 俗氣(속기)없는 문인정신이 은연중에 반영되어 있는 때문이 아닌가 싶다.
凌霄花 / 潁雲 金容鎭(영운 김용진 1882~1968), 종이 채색, 137.5 x 49cm, 개인 소장.
영운 김용진은 시, 서, 화에 능한 전형적인 문인 화가로서 일찍부터 協展(협전) 등을 통해 작품을 발표해왔다.
그는 학문과 교양이 높은 선비답게 사군자, 괴석, 화조 등을 즐겨 그렸다.
77세에 그린 이 그림은 화면 아래쪽에 붉은 풀꽃과 난초를 낀 바위를 배치하고 그 위로 늙은 잣나무를 수직으로 뻗어올라가게 하였는 바,
잣나무줄기를 감아끼고 올라간 능소화의 붉은 꽃잎이 百年老柏(백년노백)의 기상을 아름답게 장식하여 주고 있다.
푸른 잎사귀와 붉은 꽃의 대비가 인상적이다.
영운의 작품은 노경에 이를수록 화려하게 전개되는데, 이는 그의 인생과 예술의 완숙성에 기인하는 듯하다.
風竹圖,풍죽도 / 해강 김규진(海岡 金圭鎭 1868~1933), 종이 수묵, 177.2 x 79cm, 홍익대박물관 소장.
이 작품은 1922년 그의 나이 56세 작으로, 전형적인 문인화풍의 수묵죽이다. 서화의 各體(각체)에 능하였던 해강은,
사군자를 서화동법으로 일치시킨 원대(元代) 서화사상의 바탕 위에서 바람에 날리는 대의 표표한 기상을 그린 것이다.
이 점은 前圖(전도)의 <鉤勒竹,구륵죽>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대의 가지는 담 묵으로 일필휘지하여 飛白(비백)의 畵味(화미)를
보여주고 있으며, 죽엽은 濃墨(농묵)의 용필로서 오른쪽으로 휘날리게 하여, 그의 방향이 보이지 않는 바람의 풍세를 가리키게 한다.
이 풍죽은 해강 특유의 구성미와 묘법을 드러내는바, 그의 엄격한 형식주의와 대륙적 기상을 엿보게 한다.
화제는 <老大完天年 百代淸風長(老熟노숙한 氣韻,기운이 天年에 이르러 마치니, 맑은 바람이 백년에 걸쳐 불도다)>이라는
시구를 인용하여 쓰고 있다.
看星,간성 / 以堂 金殷鎬(이당 김은호, 1892~1979), 비단 채색, 138 x 86.5cm, 호암미술관 소장)
怪石圖,괴석도 / 해강 김규진(1868~1933) 종이 수묵, 150 x 65cm, 개인 소장.
叢石圖(部分),총석도(부분) / 해강 김규진(1868~1933) 종이 담채, 37 x 310cm, 개인 소장.
寒村,한촌 / 毅齋 許百鍊(의재 허백련, 1891~1977), 종이 수묵, 65 x 95cm, 개인 소장.
墨梅,묵매 / 毅齋 許百鍊(의재 허백련, 1891~1977), 종이 수묵, 35 x 136cm, 개인 소장.
松石圖(扇面),송석도(선면) / 毅齋 許百鍊(의재 허백련, 1891~1977), 종이 담채, 50.5cm, 개인 소장.
山家訪友,산가방우 / 이당 김은호(1892~ 1979), 비단 담채, 152.5 x 51.5cm, 개인 소장.
[출처] 인천시민愛 집(옛 시장 관사)|작성자 바위솔
하와이 海邊 / 황병식,80.3 x 53cm, 캔버스에 오일, 2007.
송학동 옛 시장관사
제물포구락부.
첫댓글 제물포 인문로드 도보투어로 다녀온 장소에 시장관사도 있었는데 멋지게 담아주셨군요
그 길을 걸으며 불과 100여년 전 이 땅위에서 힘들게 살아가던 사람들이 생각나 마음이 편치않았는데 그 중 엘리자베스 키스의 그림이 마음에 들어
'엘리자베스의 올드 코리아' 주문해서 한동안 푹 빠져서 글과 그림 읽고 감상하고 또 다른 작품없나 검색 하느라 바빴던 시간이 생각나네요ㅎㅎ
멋진 사진과 글 감사드립니다~^^
시민愛집을 들어설 때면"
'내 집처럼 편히 들어 오세요~ "
라고 말씀하신 해설사 전미경선생님의 자상한 웃음이 떠오르네요.
옛 시장관사...
실제보다 더 실제같은
사진으로 빛내주신 바위솔님의 사진과 설명은 역사 문화의 자료입니다.
연재해 주신 초이언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