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용/아나운서: 1945년 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미국은 일본제국의 항복을 이끌어 내기 위해 일본 열도에 원자폭탄 두 개를 투하합니다. 어디에? 바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원래는 나가사키가 아니라 이곳 교토가 원폭을 투하할 가장 강력한 후보지였다는 사실 혹시 알고 계십니까?
이시원/배우: 왜 바뀐거예요?
이광용: 왜 바뀌었느냐? 중요한 질문입니다. 바로 헨리 루이스 스팀슨 미전쟁부 장관이 교토는 절대로 안된다며 강력히 반대했기 때문입니다. Immediately rejecting Grove’s first suggestion to bomb Kyoto, a city be revered as the country’s ancient cultural hub. (일본의 고대문화의 중심지로 동경했던 도시 교토를 폭격하라는 그로브스의 제안을 즉시 거부했다). 그 이유는 일본인들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교토에 원푝을 투하할 경우 일본인들의 반감을 살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일본인들이 미국이 아니라 소련에 더 호감을 느낄 거다 라는 생각을 했던 겁니다.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전후에 미국이 아시아에 끼치는 영향력이 줄어들 수 밖에 없다고 판단을 했던 것이죠. 그리고 50년 뒤 1994년 교토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됩니다. 교토는 8세기에서 17세기까지 일본의 종교 건축과 일반 건축, 정원설계의 진화를 보여주는 주요 중심지이다. 현존하는 교토의 건축물과 정원들은 전근대 일본의 물질문화 측면에서 최상의 표현으로 인정되고 있다.
최태성/한국사 강사: 와~ 최상의 표현~
이광용: 이래서 교토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된 겁니다. 일본 문화의 정수가 담긴 도시이자 유네스코도 인정한 일본의 교토, 이 도시는 대체 어떤 곳이고 어떤 역사가 살아 숨쉬고 있을까요?
최원정/KBS 아나운서: 363번째 역사저널 그날입니다. 코로나 19가 끝나면 제일 하고 싶은게 여러분 뭐예요?
최태성: 비행기 타는 거요, 비행기 타야지, 비행기 타고 싶어서 미치겠어요.
최원정: 0.1초도 고민 안하고~여행~근데 실제 설문조사결과 압도적 1위가 여행이었어요. 앞으로 우리가 엔데믹 시대를 맞이해서 여행욕구 지식욕구 이걸 해소할 수 있는 그런 시간을 오늘 준비해 봤습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아시아 시리즈 첫번째 여행지는 바로 이웃나라 일본의 교토입니다.
최태성: 여행 갔는데 그냥 가서 사진 찍을 것 아녜요. 영혼 없는 사진보다 나 저기~ 알고 있어, 이거 알고 가면 너무 좋아요.
최원정: (기습질문) 교토, 가보셨죠?
최태성: 교토만 안 가봤어요.
최원정: 역사 기행물도 많이 찍으시고 하셔서 세계를 많이 다니셨는데 어떻게 교토를 안 가보셨죠?
최태성: 교토만 안가봤어요. 일본은 많이 가봤는데 그래서 이번 시간에 제가 미리 교토 준비해 놓고 사진 영원히 찰칵 찍겠습니다.
이시원/배우: 저는 교토 갔을 때 교토가 레몬 소바가 굉장히 유명하더라구요. 그걸 먹으면서 맥주를 한 잔 했던 기억이 납니다.
최원정: 추억들이 있군요. 저두 두 번이나 갔었거든요. 문화유산을 찾아서 다니고 그러지는 않았어요.
허준/방송인: 아내와 같이 교토를 가서 온천엘 갔는데 흔히 생각하는 온천이 있잖아요. 야외에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고 거기에 앉아서 수건을 머리에 얹어놓고~ 그래서 돈을 내고 들어갔는데 흡사 우리나라 80년대 대중목욕탕 같았어요. 그래서 아내하고 따로 따로 들어가서 30분 있다 만나~ 그래서 목욕 끝인 기억이 있어요.
최원정: 17개의 세계유산을 품고 있는 도시라면서요. 얼마나 할 얘기와 역사가 깊고 많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특별한 분을 모셨는데요. 연예계 대표가수 김정민씨와 달콤 살벌한 케미를 보이시고 계시는 루미코씨를 모셨습니다.
일동: 안녕하세요,
루미코/방송인: 반갑습니다. 저는 방송에 나가면 항상 부부생활을 하는 얘기를 많이 하는데 오늘은 교토에 대해 일본사람으로서 자부심이 있어요. 교토는 정말 아름다운 곳이고 볼 것도 많구요. 그리고 역사가 담긴 도시예요. 그래서 오늘은 교토 이야기를 하게 되어서 너무 영광입니다.
최원정: 루미코 씨는 고향이 어디세요?
루미코: 전 도쿄예요. 한국 사람들은 수학여행하면 경주로 많이 가잖아요. 일본 사람들은 수학여행하면 교토로 많이 가요.
최태성: 경주와 교토가 굉장히 분위기가 비슷해요. 거기다가 공통점을 찾아보라고 한다면 지금 말씀하신대로 양국의 수학여행지, 왜냐면 천년의 수도 역할을 했기 때문에 수학여행지로 딱 입니다. 그래서 두 도시 모두 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될 정도로 역사성을 갖고 있습니다.
루미코: 도쿄에 사는 사람들은 솔직히 도쿄가 수도라고 생각해요. 근데 교토에 사는 사람들은 그렇지가 않고 지금도 교토가 중심에 있다 교토가 수도라고 생각하는 것 같애요.
최태성: 교토를 한자로 쓰면 교토의 교가 서울 京 이에요. 京都 교토라고 하는 건데 진짜 수도였던 기능을 그 단어에 그대로 담고 있는 거죠.
루미코: 지방에서 서울로 가는 것을 상경(上京)이라고 하잖아요. 일본에서는 보통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방에서 도쿄로 가는 걸 상경이라고 합니다. 근데 교토 사람들은 다른 데에서 교토로 오는걸 상경이라고 한다고 하더라구요.
이시원: 그건 헷갈리겠어요. 만약에 동경에 살다가 교토로 갔어요. 아~ 저 상경합니다. 그러면 알아듣나요?
루미코: 교토 사람들은 다 알아들어요.
박진한/인천대학교 일본지역문화학과 교수: 교토는 2차 세계대전 당시에 피해를 거의 입지 않았기 때문에 보통 일본 사람들이 전쟁하면 2차 세계대전을 이야기 하는데 교토 사람들은 전쟁하면 전국시대 전쟁을 말합니다. (일본전국시대-15세기 중반부터 16세기 후반까지 사회적 정치적 변동이 이어진 내란의 시기),
최원정: 원폭투하 계획이 바뀔 정도로 일본 사람들의 교토는 정신적 수도라고 봐야될 것 같애요.
박진한: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 도요토미 히데요시, 역시도 교토와 굉장히 관련이 있습니다. 전국 시대 때 교토가 전국시대 주요전란의 무대였기 때문에 굉장히 많은 피해를 입게 되는데 그 피해를 극복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이 바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였구요.
최태성: 허준 또 열받겠는데~ 좋아하는 일본 관련 문화와 음식이 있지만 요것반큼은 정말 안되겠는거야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저히 용서가 안되는 발음할 때는 조금 입을 악물게 돼죠.
루미코: 이해해요. 저는 일본에서 일본역사를 배웠잖아요. 아무래도 일본 사람들 시선에서 봤을 때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영웅이에요. 일본 국민들은 그렇죠, 근데 제가 한국에 와서 한국인의 시선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봤을 때는 안 좋아할 수 밖에 없더라구요.
최태성: 그것도 침략전쟁이었고~
루미코: 어쨌든 싯점에 따라 아무래도 역사에 차이가 있어요. 그래서 저는 이해를 합니다.
최태성: 시청자분들이 일본사에 대해서 굉장히 헷갈리고 복잡해 하시더군요. 제가 그 차이점을 설명해 드릴게요. 우리나라 역사시대 구분을 하는 기준은 일반적으로 왕조중심으로 시대구분을 합니다.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 다 이게 왕조교체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거잖아요. 그런데 일본은 7~8세기 아스카 시대를 중심으로 우리가 알기로는 천황 시스템이 구축된 이후로 왕조 교체가 단 한 번도 없어요. 그게 지금까지 쭉 이어져온 거예요. 천황은 상징적 권력이고 실질적 권력은 막부입니다. 저 막부가 교체가 되는데 막부가 어디에 있었느냐 가마쿠라(도쿄)에 있었으면 가마쿠라 막부 (1185~1333), 무로마치(교토)에 있었으면 무로마치 막부 (1338~1573), 에도에 있었으면 에도 막부 (1603~1868) 이렇게 지역명을 기준으로 해서 나누는게 일반적이니까. 헷갈리시면 안됩니다.
이시원: 근데 막부를 일본말로 막부라고도 하나요?
루미코: 그건 바쿠후(幕府) 라고 해요. 가마쿠라 바쿠후, 무로마치 바쿠후, 에도 바쿠후 이렇게 말하거든요.
최태성: (이시원씨를 향해) 막부가 뭔지 혹시 아세요?
이시원: 막부가 행정지배세력 아닌가요?
최태성: 이렇게 생각하시면 좋을 것 같애요. 전쟁이 났어요. 전쟁이 나면 군인들이 진영을 구축하잖아요. 옛날 산 같은데 보면 어딘가에 들어가서 회의를 해요. 그곳이 어딜까요? 천막 안이잖아요. 그 천막 幕 자를 떠올리시면 됩니다. 군인들이 작전 회의를 하는 본부를 떠올리면서 아~ 그럼 幕府라고 하는 것은 바로 군인들이 중심이 된 행정 시스템 (무신정권)이겠구나. 그 최고 대장을 누구라고 하냐면 장군이라고 하거든요. 장군을 일본말로?
루미코: 쇼군~
최태성: 맞습니다. 쇼군, 12세기에서 19세기 까지 천년 이후라고 했을 때 이 당시에는 쇼군이 어디에 있었느냐에 따라 가지고 시대구분을 하고 있습니다.
최원정: 그러니까 에도 막부는 지금의 도쿄 부근이군요. 그러면 그 전에는 교토지역이 계속 수도였던 거에요?
박진한: 그랬던 거죠, 사실은 도쿄라고 하는 지명 역시도 한자로 풀어보면은 동쪽에 있는 수도이다 해서 東京이잖습니까.
최태성: 중심이 京都잖아요.
박진한: 그렇죠, 천황이 거주하는 곳이 미야코 都 수도라고 부르는데 794년 나라에서 교토로 천도를 한 이후에는 무려 천 년이 넘게 가마쿠라, 무로마치,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에도 막부까지 여러 무신 정권의 교체는 있었지만 천황이 거주하는 곳은 변화가 없었기 때문에 일본의 수도는 교토였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최태성: 교토의 자부심이 여기서 나옵니다.
최원정: 교토를 빼놓고는 일본사를 논할 수가 없는 거예요.
-----------------794년 간무 천황은 나라에서 교토로 수도를 옮긴다. 헤이안 시대의 개막, 천년 수도, 교토 역사의 시작이었다----------------------
박진한: 간무 천황은 사실상 한반도와 아주 밀접한 인연이 있는 인물입니다. 심지어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일본의 천황이 자신의 선조 중에 한반도와 깊은 관련이 있다.
아키히토 천황(2001.12)-나는 간무 천황의 어머니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에 기록돼있는 사실에 한국과 깊은 인연을 느낍니다.
박진한: (루미코를 향해) 일본에서는 화제가 되지 않았어요?
루마코: 난리가 났었어요. 간무 천황의 백제계라는 말이 일본에서 공식으로 이야기 한 것이 그때가 처음이었어요. 국민들은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듣기도 하고 저희도 인지는 했었어요. 옛날에 연관이 있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솔직히 그말을 해서는 안되는 이야기처럼 생각을 했었거든요. 근데 천황이 공식적으로 말씀을 하시니까 깜짝 놀랐어요.
박진한: 간무 천황은 사실상 어머니가 백제 도왜인의 후손이었기 때문에 (도왜인-주로 5~6세기 무렵 중국,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들), 자신을 후원해 줄 수 있는 정치적 기반이 약했다. 게다가 당시에는 일본의 수도가 나라였을 때 나라가 당시에도 불교세력이 굉장히 풍성해서 세상 정치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간무 천황이 자신의 어떤 정치력을 회복하고 뭔가 승부수를 던진 게 바로 나라에서 새로운 도읍, 교토로의 천도였습니다.
최원정: 우리 역사에서 보면 지지기반이 약하거나 새로운 왕조가 만들어지면 서경천도도 그랬고 이성계가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것처럼 천도는 정치적으로 많이 이용되어온 경우네요.
이시원: 그런데 그 의도와는 다르게 천도가 분위기 반전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는 안했나 봐요 아까 보니까 막부가 계속 득세하고 있잖아요.
박진한: 천도와 함께 간무 천황은 그 이후로 어느 정도는 사실 여러 개혁적인 정치를 시행을 하면서 천황의 정치력이 많이 상승된 것은 사실입니다. 근데 그 이후에 후지와라 씨를 비롯한 여러 유력 귀족들의 가문이 득세를 하게 되고 그러다 보니까 천황의 존재가 점점 무의미하게 되었던 거죠. 그래서 천황의 지위를 물러난 상황이 지방의 무사들을 동원해서 대거 교토에 진출하게 되면서 무사들이 정권을 최초로 만들게 되는 데 그게 바로 가마쿠라 무사정권의 성립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최태성: 칼의 역사가 시작되게 되는 겁니다.
--------------------이광용/아나운서: 천황의 후견인으로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 지방 무사들, 우리는 그들을 사무라이 라고 부릅니다. 현대판 사무라이 등장? 진짜 칼인가? 시범에 앞선 세심한 준비, (칼에 대한 예를 갖추는 과정), 드디어 준비완료, 긴 칼을 뽑아들고 봉을 내려침, 순식간에 잘려 나간 종이 봉, 이번에는 반대편, 봉을 단 칼로 베어 버린다.
최태성: 칼이 언제 두 개가 된 거야?
루미코: 저 칼이 일본 이름으로 이도류예요 (이도류-일본 검술에서 양 손에 검을 들고 공수를 행하는 기술),
최원정: 다섯 개를 한꺼번에?
------------------무사가 장칼로 5개 봉을 두 번 내리쳐 잘라낸다---------------
전원재/동양검술 전문가: 반갑습니다. 동양검술을 연구하고 있는 강의일도류 전원재 사범입니다.
이광용: 정말 숨 죽이셨죠, 관장님, 지금 보여 주신 검술은 어떤 건가요?
전원재: 일본의 사무라이들이 예전에 썼던 검술 중의 하나인 발도술입니다. 검을 뽑으면서 상대를 제압하는 검술인데요. (발도술-칼집에서 칼을 뽑으면서 재빠르게 상대를 제압하는 기술), 혹시 사무라이의 주 업무가 어떤 것인지 알고 계십니까?
이시원: 사무라이 하면은 밤에 몰래 잠입해 가지고 순식간에 탁 덥쳐 가지고 암살을 하는 거 아닌가요?
허준: 그건 닌자~
전원재: 사무라이는 귀족의 경호를 주업무로 하고 있었습니다. 누군가 경호대상을 공격할 때 즉각적으로 반응을 해야 했죠. 그래서 항상 검을 허리에 차고 다니면서 예상치 못한 상황에 대비해야 했습니다.
이광용: 지금의 경호원이나 그때 귀족의 경호를 담당했던 사무라이가 크게 다르지 않다. 왜냐하면 갑자기 요인 암살시도가 있으면 바로 몸을 날리잖아요. 총을 뽑던가 그런 식으로 가는 거죠.
허준: 진짜 쓸데없는 질문 하나만 해도 됩니까?
이광용: 안 됩니다.
허준: 궁금한 게 칼에 손을 넣다가 손을 벤 적은 없으신지?
전원재: 초보자들은 손을 벨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수련을 하면은 눈이 칼로 가는 사이에 상대가 공격을 하기 때문에~
이광용: 저도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劍검이라는 표현도 있고 刀도라는 표현도 있잖아요. 칼을 표현할때 두 개가 다르다고 제가 들었는데 맞습니까?
전원재: 양날을 劍이라고 하고 한 날을 刀라고 통상 칭합니다. 그래서 劍의 경우는 찌르기 공격이 활성화 되어있고 지금 제가 갖고 있는 일본도의 刀의 경우는 찌르기 위주 보다는 베기, 참을 위주로 합니다. 하지만 劍이라고 해서 벨 수가 없고 刀라고 해서 찌를 수 없는 게 아니죠. 둘 다를 사용할 수는 있으나 劍은 아무래도 찌르기에 유리한 편이고 刀는 참에 유리한 편입니다.
이시원: 그리고 진짜 또 궁금한 거요. 사무라이들 보면 항상 칼을 두 개 차고 다니잖아요. 선생님도 그렇고 이런 이유가 있나요?
전원재: 두 개의 검을 차고 다니는 것은 에도 시대의 사무라이들의 특징이었습니다. 보통 건물 내에서 좁은 공간에서는 큰 칼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가 없겠죠. 그래서 작은 칼을 가지고 개인의 호신이나 요인을 경호했겠죠. 또는 일대 다수, 여러 명의 적이 출현했을 때 하나로 사용하기 보다는 두 개의 칼로 대치를 원할하게 하는 방법으로 쓰였습니다. 하지만 에도 시대에는 사실상 큰 전쟁이 끝났습니다. 그래서 검을 별로 쓸 일은 없는 상태였습니다.
이광용: 잠깐만요 검을 무겁게 왜 두 개씩이나?
이시원: 폼생폼사 사무라이~?
이광용: 폼생폼사 이거예요?
전원재: 네, 맞습니다. 사무라이 라는 것을 평민들한테 또는 외부인한테 자랑하기 위해서 패용했던 장신구입니다.
이광용: (폼을 잡고) 내가 사무라이이거든~뭔가 자랑이기도 하지만 일종의 특권일 수도 있겠네요.
전원재: 일본인들도 도심에서 장사를 하는 장사치들도 와께자아라는 작은 칼을 가지고 다닐 수 있었어요. 그리고 농민들 자체도 자신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서 작은 칼을 패용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카파라 라는 큰 칼은 유일하게 사무라이들에게만 허용이 됐습니다.
이광용: 사무라이 하면 사무라이들만이 갖고 있는 어떤 명예와 관련한 그런 부분도 있잖아요.
전원재: 사무라이는 충성을 가장 중시했습니다. 또한 불명예를 죄처럼 여겼어요. 특히 자결의 문화가 있는데요. 자결에 대한 방법으로 스스로 자신의 배를 가르는 그래서 할복에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이시원: 우리 도요토미 히데요시 편을 하면서 다뤘잖아요. 그게 무섭고 끔찍했었거든요.
박진한: 무사라고 하는 존재 자체가 전투자아닙니까. 가장 불명예스러운게 다른 사람에 의해서 자신의 목을 침해 당하는 거죠. 그러니까 그런 불명예를 감수하지 않도록 자결을 했던 거죠.
전원재: 할복과 관련된 사무라이의 일화가 있습니다. 어느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자신의 말들을 점검하다가 우연히 도쿠가와 이에야스 수하의 무사를 만납니다.
최태성: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라이벌이잖아요.
박진한: 그렇죠,
전원재;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그 무사를 보고 라이벌 이니까 어떻게든 뺏고 소유하고 싶고~
최태성: 내 사람을 만들려고 했구나,
전원재: 네~ 사무라이한테 녹봉을 훨씬 더 많이 줄테니까 나한테 충성을 해라,
이광용: 거액의 스카우트 제의를 한 거예요.
전원재: 이 소식을 들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무사를 조용히 불러냅니다. 돈을 더 많이 받고 사는게 너한테도 훨씬 이로울 것 같으니까 도요토미한테 가서 충성을 맹세해라.
이광용: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그릇이 크네요,
전원재: 이때 사무라이는 눈물을 흘리면서 즉시 자결해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충성하는 마음을 밝히겠습니다 라고 얘기를 합니다.
최태성: 그렇다고 죽으면 안되지~
전원재: 다른 사람을 모시느니 죽음을 택하겠다.
허준: 죽었어요?
박진한: 죽은 건 아니고 할복을 하겠다 라고 까지 했다더라~카더라
허준: 나 억울해 나 이렇게는 못 살아~ 말려서 다행~
이시원: 일본 사무라이한테 그만큼 내가 충성심이 있다 목숨보다 중하다는 뜻이잖아요.
최원정: (루미코에게) 일본 사람들은 사무라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루미코: 사무라이가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고 죽을 각오로 장군을 모시잖아요. 그런게 강인한 정신이라고 생각을 해요. 그래서 사무라이 정신을 일본 사람들은 자랑스럽게 생각하고요. 그래서 예를 들면 꼭 이겨야 될 때 우리는 사무라이 정신이다 라고 하면서 스포츠 경기, 일본 축구국가 대표팀을 사무라이 블루라고 부르는데~
박진한: 사무라이 라고 하는 이미지는 오늘날 일본이 내셔널리즘을 고양시키는 중요한 기재로 활용되고 이용이 되고 있습니다.
전원재: 이런 충성심을 바탕으로 귀족과의 신뢰가 점차 쌓여갔습니다. 사무라이는 귀족의 경호담당자에서 점차 무사계급으로 확대되고요. 하나의 신분으로 성장을 합니다. 심지어 영주가 되어 장원을 소유하기도 하고 신분적으로 상승하자 사무라이 자체에 대한 대우도 달라집니다. 큰 칼을 차고 다닐 수 있는 권리 외에도 성씨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무라이의 가문, 자신이 이룩해 놓은 가문을 후대에 이을 수 있는 권리까지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광용: 그런데 여러분, 중요한 건 예를 들어서 사무라이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사무라이를 중심으로 한 쇼군이 세운 막부가 권력의 한 축을 이때부터 형성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이제는 실권을 장악한 일본의 막부 그 이야기는 계속 이어집니다.
최원정: 무인세력이 이제 황족의 호위무사였는데 지배층이 되어 버렸어요.
이시원: 나를 지켜주세요 하고 불러모았는데 오히려 나를 위협하는 존재가 된 거죠.
박진한: 가마쿠라의 뒤를 이어서 14세기 초에 무로마치 막부가 등장을 하게 되는데 무로마치 막부의 제3대 쇼군이었던 아스카와 요시미쓰 같은 경우에는 공가(귀족)와 무가(무사)를 또 중요한 정치집단이었던 사원(불교) 세력들을 하나로 통합하는데 굉장히 많은 노력을 합니다. 특히나 아스카와 요시미쓰는 자신의 거처를 황거 주변에 옮겨서 천황과의 관계를 가깝게 하고자 했었고 더 나아가서 교토의 기타야마 라는 곳에 자신의 별장을 지어서 그곳에 권력을 같이 하기 위해 금박을 두른 아주 멋있는 산장을 지었는데 그게 바로 금각사 입니다.
루미코: 서울에는 서울 타워가 있어요. 도쿄에는 도쿄 타워가, 교토에는 무조건 금각사예요.
최태성: SNS에 보면 다 저걸 배경으로 사진을 찍더라구요.
허준: 해가 좋은 날씨에는 눈이 아플 정도로 빛나요.
최원정: 저걸 사원이라고 그래서 왜 사원이 저렇게 화려한가 생각했는데 쇼군의 별장이었군요.
최태성: SNS에 사진을 봤는데 나 사진 찍었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 진짜 금인가? 그런 질문들이 엄청 많더라구요.
이시원: 진짜 금이라고 하던데~
루미코: 금박을 씌웠죠.
최태성: 저게 진짜 금이에요, 저게 1950년에 한 번 불이 났더라구요. 승려가 화재를 일으켜서 불이 났는데 복원공사를 다시 하는데 거기에 들어간 금이 무려 20킬로그램이래요. 돈으로 환산하면 18억 정도래요. 이게 가로 세로 10센치 무려 20만장을 하나 하나 다 금박을 옻칠해 가지고 만든거에요. 당시 막부의 권위와 힘을 그대로 보여준 상징적인 존재라고 볼 수 있겠죠.
박진한: 아까 금각사를 가셨더라도 저 안에 들어가 보신 분 계신가요?
최태성: 들어갈 수 있어요?
박진한: 사실은 저도 들어가 보지는 못 했습니다. (금각사는 현재 일반인의 내부 출입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얼핏 보더라도 1층하고 2층하고 3층에 각각의 층 마다 건축양식이 다릅니다. 1층은 귀족들이 사는 주택양식을 바탕으로 해서 지었구요. 그 다음에 2층은 무사들이 사는 주거양식을 바탕으로 해서 지었습니다. 3층은 사원 양식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각층마다 창틀과 문의 형식이 다릅니다. 1층 같은 경우에는 방에 빛과 바람을 들이기 위해서 시돈이라고 하는 전통적인 우리나라 한옥 전통집에서 들개 열어문이라고, (열어 들개문-열어서 천장을 향해 들어 올려 고정하는 문), 여는 방식으로 창틀이 만들어져 있구요. 2층 같은 경우는 실용성을 추구하는 무사들의 심성을 담아서 옆으로 문을 닫는 미닫이 형식으로 문이 되어 있습니다. 3층에는 당시 유행했었던 선종의 영향을 받아서 동그랗게 창문이 나있는 것을 볼 수가 있죠.
최태성: 교토의 문화가 저 한 건물에 총집합이 되어 있는 거에요.
박진한: 그만큼 당시 무로마치 막부는 우리가 칼에 의해서 군사력으로만 무력을 장악한 게 아니라 귀족들과 불교 세력을 다 아우를 수 있는 문화적인 포용력이 있다 라는 것을 보여준 것이죠.
최태성: 통합의 상징~
박진한: 그런데 무신이다 보니까 화려하고 이제 벼락부자가 되었듯이 부와 재력을 보여주다 보니까 금박을 사용했죠.
허준: 금각사 지붕 꼭대기에 있는 건 닭이에요?
박진한: 봉황!
이시원; 설마 저 위에 닭을 놨을까~ 상징적인데~
허준: 닭 쫓던 개가 지붕을 쳐다보게 된 이유가 저기에?
이시원: 여기서 당연스럽게 나오는 질문 저렇게 화려하게 건물을 지을려면 돈이 많이 들 것 아네요?
최태성: 혹시 신안선 기억해요?
이시원: 신안에서 어부들이 그물에 보물이 걸려가지고~(신안선-1976년 신안 앞바다 해저에서 발견된 무역선),
최태성: (동영상), 신안선에서 발견된 물건들을 보면 중국의 도자기, 동전 등이 쏟아져 나왔거든요. 그런데 과연 이 보물들을 싣고 어디로 가고 있었을까? 요거 알면 아까 들은 질문에 해답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이 드는데요.
이시원: 정답~ 오늘의 주제, 교토!
최태성; 정답, 저기 지금 보시면 목간이라는 게 있습니다. 목간은 지금으로 본다면 택배송장 있죠 그걸로 보시면 돼요. (신안선 목간 -> 택배송장 역할), 저걸 잘 보시면 신안선이 항해하던 때는 1323년이었구요. 목적지는 일본이었습니다. 목간을 보면 저기 보이죠, 교토의 도후쿠지(동복사)로 갈 예정이었다는 거죠. 그러니까 원나라에서 물건을 실어가지고 일본으로 향했던 무역선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박진한: 당시 중국을 중심으로 해서 주변국가와 이루어지는 무역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조공무역 형태로 이루어졌는데요 (조공무역-중국에 공물을 보내고 희사품을 받는 형태의 무역), 감합이라고 하는 당시 명나라 정부가 인정해 주는 일종의 무역 대장인데 (목간) 그걸 가져다가 같이 맞춰보는 형태로 (감합제도-중국에서 조공을 원하는 주변국들에 ‘감합’이라는 확인표를 미리 발급, 물건과 확인표를 확인하여 조공 사칭을 방지한 제도), 일본 같은 경우에 1404년부터 150년 동안 무로마치 막부를 중심으로 해서 여러 다이묘들이 중국과 무역을 하면서 막대한 이득을 봤다고 합니다. (明日貿易船旗/1584년),
최원정: 이게 감합무역이다. 어려운 단어이지만 굉장히 중요했겠네요. 막부의 입장에서는 감합무역으로 부를 축적한 막부, 막부 문화의 정수를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하이라이트가 있습니다.
----------------이광용; 여러분, 일본의 정원하면 뭔가 떠오르는게 있어요? 어떻습니까?---------
최태성: 뭔가 정리가 된 그런 느낌~
이시원: 모래가 생각나요,
허준: 조그마한 소나무?
이광용: 교토가 199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배경에 바로 정원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일본식 정원에 대해 여러분께 차근차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선생님, 어서 오세요.
일동: 안녕하세요,
강미숙/순천만국가정원 정원해설사: 안녕하세요, 순천만 국가정원에서 활동하고 있는 강미숙 정원해설사입니다.
이광용: (동영상 정원그림), 지금 보이고 있는 이 그림이 일본식 정원인가요?
강미숙: 이 설정은 물이 없이 물을 표현했다고 해서 일본어로는 가레산스이, 영어로는 Japanese dry garden 이라고 하는 일본의 전통정원입니다.
최태성: 내가 생각했던 그 정원이 아닌데요,
일동: 일본엘 안가보셨서서 그래요
이광용: 다 교토에 가 본거 아니에요, 저도 교토에 가 봤지만 사실 정원을 눈여겨 보지는 않았거든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정원은 물 있고 식물 있고 꽃 있고 그래야 하는데~ 그런데 이건 달라도 너무 다른데~
강미숙: 한국의 정원은 경치 좋은 곳에 이를 통해서 물이 흐르는 곳 그리고 나무나 아름다운 자연 속에 정자를 만들고 감상하는 정원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일본의 가레산스이식 정원은 담장 안에 나무나 초벌 식물은 한 점도 없이 돌과 모래를 이용해 정원을 만듭니다. 살아있는 것이라고는 세월이 흐르며 생긴 약간의 이끼들 뿐이죠,
이광용: 아~ 여기 보이는 거~
강미숙: 정원에 들어가지 않고 차를 마시는 다실 또는 방이나 마루에서 차를 마시거나 좌선을 하면서 정원을 바라볼 수 있게 했습니다.
이광용: 여기서 이 정원을 바라보면서 차 한 잔 하면 뭔가 마음이 편안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긴 드네요.
강미숙: 네~
허준: 전 밟고 싶어요.
루미코: 저게 물결로 보이는 거예요. 가만히 보고 있으면 연못에다 물이 퐁 떨어지면은 파동이 생기잖아요. 그런 모양이죠.
허준: 그러면 혹시 정원에서 저렇게 가꾸어놓았잖아요. 아이들이 밟거나 그러면 굉장히 큰 실례예요?
루미코: 당연하죠,
이시원: 저거 하는 장인이 있으시다고 들었는데~
루미코: 그런데 저는 밟아볼 생각도 안해봤어요. 절대 밟으면 안되는곳~
허준: 흰 눈이 소복하게 하얗게 쌓이면 밟고 싶은 생각이 안들어요?
루미코: 들어요, 그런데 이거는 밟으면 안 되는 거예요.
최태성: (막부문화의 정수: 가레산스이 정원), 일본인들은 저걸 바라보면서 의미를 부여하는 거구나.
이시원: 저게 물도 물이지만 꼭 하늘 위에 떠 있어서 세상을 작게 내려다 보는 거에요. 신선이 된 것 같은 느낌,
이광용; 그런데 이 대목에서 궁금한 게 이 가레산스이식 정원은 언제 어떤 이유로 이렇게 만들어지기 시작했을까요?
강미숙: 무로마치 막부시대에 선종이 융성하면서 발전했습니다.
최태성: 선종~ 참선을 중요시한 선종~
강미숙: 정원을 조성하는 것도 선의 경지에 도달하기까지의 수행의 한 과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정원도 요란하거나 산만하지 않게 차분한 분위기를 연출했습니다. 선의 메시지가 정원 속에 잘 표현되어 있죠.
루미코: 교토 료안지에 유명한 절이 있어요. 료안지에 가면은 대표적인 정원을 볼 수가 있는데요, 일본사람들이 정원을 그냥 정원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예술의 한 분야로 생각하고 있어요. 그래서 다도를 하면서 감상하고 명상하고 그런 문화가 발달된 것 같애요.
최태성: 참선이나 명상을 하기 위한 무대장치 같애요.
박진한: 말씀 잘 하셨는데요. 사실 이런 종교적인 목적도 있지만 실용적인 목적도 있었다고 해요. 지금처럼 전기장치가 없었지 않습니까. 실내로 조명을 쏠 수가 없으니까 모래에서 반사되는 간접조명을 이용했다고 해요.
이시원: 보다 보면 오묘하고 심오한 매력이 있어요. 그리고 이런 걸 처음 봤던 유럽인들은 화려하고 분수가 확 펼쳐지는 걸 상상했을텐데 그런 것 없이 이런 고요함을 준다는 게 오히려 충격적이고 신선하게 다가왔을 것 같애요.
최원정: 저기 가면 외국인들이 불멍 하듯이 정원을 보며 멍하게 앉아 있어요. 마음이 고요해지고 좋더라구요.
이광용: 여러분, 감합무역으로 부를 쌓으면서 막부는 칼을 쥔 무사에서 한발 아니 두발을 더 나아가서 자신들만의 세력과 함께 독특한 문화까지 만들어냈습니다. 그런데 영원할 것만 같았던 막부의 시대가 결국은 막을 내리게 됩니다. 왜냐? 그 사람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동영상) 드라마 임진왜란 1592 中-히데요시, 나는 명나라를 정벌할 몸이오!---------
이시원: 드디어 등판하셨군요,-도요토미 히데요시,
허준: 그런데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국시대의 인물아닌가요?
박진한: 그렇죠, 전국시대는 무로마치 장군 후견자를 둘러싸고 1467년에 교토를 무대로 해서 오닌의 난이 벌어지게 되는데 (오닌의 난-1467~1477년 무로마치 막부 쇼군의 후계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진 내란), 그때서부터 시작으로 보고 있구요. 그리고 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하고 나서 그 다음에 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 막부를 설립할 때를 마지막으로 130년 정도의 시기를 이른바 전국시대 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시원: 근데 내전이 100년 넘게 약 130년간이나 지속이 된 거잖아요. 그러면 굉장히 내부적으로 피폐해졌을 것 같거든요.
최태성: 그림이 그려져요. 그냥 쑥대밭이 됩니다.
루미코: 그래서 일본 사람들이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영웅, 좋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거예요. 전국시대 때 내란으로 국토가 초토화되었을 것 아녜요. 그걸 다시 일으켜 세운 사람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예요.
최원정: 리더로서 전후 복구를 잘 했다, 능력을 보여준 거네요.
최태성: 하여튼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혼란한 정국을 통일했잖아요. 그러면서 교토를 정비를 한 거죠. 교토 주위 23킬로미터 성벽을 두르고 도심을 정비를 하는데 사찰을 한쪽으로 모우고 그 때 그 거리를 데라마치, 데라가 뭐냐면 절寺, 절이 모여있는 거리, 지금 우리나라로 본다면 인사동 거리처럼 전통거리로 되어 있어서 걸으면 이쁘다는데 어떻던가요?
이시원: 어딜가도 화보, 막 찍어도 화보~
박진한: 그런데 중요한 교토에 커다란 위기가 찾아옵니다. 바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 전쟁 중에 사망을 하게 돼죠. 그러면서 도요토미 정권은 점차 서서히 몰락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 뒤를 이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새로 에도에 막부를 수립하게 되면서 일본의 정치적인 중심지는 바로 교토에서 에도로 바뀌게 됩니다.
최원정: 도요토미의 무리한 전쟁으로 인해서 교토시대가 막을 내리는 거군요.
박진한: 물론 막부를 에도에 두었으니까 정치적인 중심지는 분명히 교토에서 에도로 옮겨온 게 사실이죠. 하지만 에도시대 때 당시 사람들은 정치적인 중심지인 에도, 경제적인 중심지인 오사카, 역사와 문화와 전통의 중심지인 교토, 이 세 개의 도시를 다른 여타 도시들과 구분해서 3도 라고 부릅니다.
허준: 교수님, 제가 아는 것과 약간 다른 부분이 있네요. 일본인들의 전언에 따르면 오사카는 경제의 중심지가 아니라 먹다 죽는 음식의 중심지라는 데요.
루미코: 그것도 맞아요,
박진한; 경제가 풍부하니까
루미코: 일본에 구이다오레 라는 말이 있어요. 그 뜻은 먹고 죽자 라는 말이에요. 먹는 것에 재산을 탕진한다 라는 뜻
허준: 우리는 술인데 일본은 음식이구나.
박진한: 에도 시대 때 사실 정치적인 중심지는 에도로 바뀌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교토의 중요한 역할이나 위치가 바뀐 건 아니었기 때문에 에도 막부 입장에서는 교토에 천황을 비롯한 여러 공가(귀족) 세력들을 감시하기 위해서 교토 시내 한 복판에 니조성 이라는 성을~
루미코: 니조성은 무조건 거기 가면은 우구이스바리 라는게 있어요. 이게 뭐냐면 꾀꼬리 마루라고 불리고 있어요. 마루를 밟으면 끽~끽~새소리가 나요. 그 당시에는 천황과 막부들이 권력싸움을 많이 했을 것 아네요. 그래서 암살을 당할 위험에 있었던 거에요. 암살자들이 들어 왔을 때 위험을 감지해야 되니까 마루 바닥에 그런 장치를 만들어 놓았어요.
허준: 오래 되어서 나는 소리가 아니었어요?
루미코: 마루가 서로 마찰을 일으켜서 소리가 나게 만들었는데 그 기술을 터득하려면은 3대를 거쳐서 익혀야될 정도로~
허준: 3대 정도 마루를 놔두면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지 않을까요?
최원정: 왜냐하면 우리가 일본성 하면 임진왜란 이후에 토란줄기로 만든 다다미를 뜯어서 식량부족으로 먹고 그랬잖아요. 무언가 생존코드가 담겨 있는 것 같애요.
최태성: 이것은 지금 말씀하신 대로 천황이 있었던 곳이 아니고 바로 천황의 동태를 한 눈에 바라보기 위해서 천황을 감시하기 위해서 만들었다는 건물인데 이것만 봐도 당시 천황의 위세가 얼마나 쪼그라들었고 막부의 힘이 얼마나 센지를 교토가서 니조성을 보시면서 천황과 막부의 관계를 보시는 것도 매력포인트입니다.
허준: 근데 혹시 가셨다가 삐거덕 소리나면 이거 오래 돼서 그런 가봐가 아니고 암살방지용~
------------1868년 에도 시대가 막을 내린다. 시대의 변혁에 따른 막부 시대의 종말, 메이지 천황과 새 정부는 황실을 도쿄로 옮기는 등 사실상의 천도를 추진한다
최태성: 1869년 천황도 드디어 교토에서 도쿄로 거처를 옮겨 갑니다 (메이지 천황의 도쿄행행/르몽드 일러스트 1869.2.20) 이렇게 되면서 교토라는 곳이 현대화의 움직임 속에서 방치된 느낌이 있는 거예요. 교토가 보존되어야 하잖아요. 그래서 1871년 역사적 장소 보존에 대한 조례가 최초로 발표가 되면서 지금의 교토가 보존될 수 있는 길이 이때 만들어진 거죠.
이시원: 그렇게 역사를 잘 보존 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원폭투하도 피해갔고 전세계의 사람들로부터 사랑 받는 도시로 각광받고 있잖아요.
최원정: 근데 우리가 한번쯤 가보고 싶은 세계문화유산 교토이긴 한데 최근의 기사에서 교토가 파산 위기에 놓여있다고?
박진한: 사실은 십 여년 전만 하더라도 일본 사람들이 살고 싶은 도시순위 랭킹 매번 1위였습니다. 그런데 요 십여년 사이에 교토의 노령화가 심각하게 진행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러다 보니까 보건이나 복지에 비용을 사용하게 되겠죠. 그러면서 시재정이 나빠지게 되었고 일본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세계 각지에서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오는 관광도시이다 보니까 이른바 오버투어리즘이 되면서 (오버투어리즘-수용 가능한 범위를 넘어서는 관광객이 관광지에 몰려들면서 관광객이 도시를 점령하고 주민들의 삶을 침범하는 현상), 교토에서 수용할 수 있는 이상의 관광객들이 몰려들면서 그로 인해서 여러가지 복잡한 사회적 문제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최원정: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교토를 살펴봤는데 막부 천황 이게 일본 사람들의 인식, 일본 역사의 뼈대인 거예요. 오늘 거기에 대해서 자세히 알게 되어서 의미가 있었습니다.
이시원: 저희가 코로나 시대에 해외로 못나가다 보니까 진짜 유행했던 게 먹방이었던 것 같애요. 먹방 잘 할려면 물론 즐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거기에 문화 역사를 알면 맛있게 먹을 수 있어요. 이제 엔데믹 시대로 갔으니까 여방이 아마 유행하지 않을까 그때 진짜 중요한 건 그 나라의 역사문화를 아는 것 같애요. 그러면 그냥 즐기는 것 보다 훨씬 더 많이 즐길 수 있지 않을까요. 그래서 우리 오늘 역사저널 그날은 여방의 문을 저희가 열었습니다.
허준: 교토 가기 하루 전날 요편만 다 보고 가도 돼요..
최태성: 비행기에서 이거 보고가면 돼~ 딱이야~ 딱~
허준: 보시라고요, 일본하면 어쩔 수 없이 양날의 검이에요. 교토를 이야기하고 맛 있는 걸 얘기하고 문화를 얘기하면서 아~ 맞어 맞어 할 수도 있지만 반대편에선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도 있어요. 이렇게 해도 돼냐? 이런 마음이 들 때도 있거든요. 근데 문화는 문화로 역사는 역사로 이런 것을 분리하는 연습도 역사저널 그날을 통해서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최원정: (루미코를 향해) 오늘 정말 덕분에 생생하게 감사했습니다.
루미코: 허준씨가 말씀하셨지만 아픈 역사가 많잖아요. 한일관계에서 봤을 때 근데 저는 여기에 나와서 교토의 아름다운 문화를 소개해 드릴 수 있어서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박진한: 이번에 여행가시고 교토를 방문하실 일이 있다면 여행자의 시선에서 교토의 여러 명소나 관광지를 소비하는 데 멈추지 말고 그 속에 담겨 있는 역사라든지 오늘 소개가 되지 않았지만 조선인 포로라든지 조선인의 귀나 코를 베어가지고 만든(귀무덤-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일본군에게 희생당한 조선인의 귀와 코 묻힌 곳), 귀무덤이 사실 교토에 있거든요. 우리나라의 역사와 관련된 여러 장소들을 살펴 보면서 의미있는 체험을 하였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교토에서의 새로운 체험 방문을 통해서 한일관계를 새롭게 만들어가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최원정: 역사와 함께 하는 패키지 여행 다음은 어디로 가는지 궁금하시죠. 중국 만리장성입니다. 함께 하신 여러분 고맙습니다. 끝. (KBS 역사저널 그날 363회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아시아 ① 교토에서 정리).
① 1945년 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미국은 일본제국의 항복을 이끌어 내기 위해 일본 열도에 원자폭탄 두 개를 투하한다. 바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다. 그런데 원래는 나가사키가 아니라 교토가 강력한 후보지였다. 이유는 미전쟁부 장관 헨리 루이스 스팀슨이 강력히 반대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일본인들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교토에 원폭을 투하할 경우 일본인들의 반감을 살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일본인들이 미국이 아니라 소련에 더 호감을 느낄 것이다.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전후에 미국의 아시아에 끼치는 영향력은 줄어들 수 밖에 없다. 그리고 50년 뒤 1994년 교토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② 교토는 8세기에서 17세기까지 일본의 종교 건축과 일반 건축, 정원설계의 진화를 보여주는 주는 중심지다. 현존하는 교토의 건축물과 정원들은 전근대 일본의 물질문화 측면에서 최상의 표현으로 인정되고 있다. 교토는 17개의 세계유산을 품고 있는 도시다. 한국 사람들은 수학여행하면 경주로 많이 가는데 일본 사람들은 수학여행하면 교토로 많이 간다. 보통 일본 사람들이 전쟁하면 2차 세계대전을 이야기 하는데 교토 사람들은 전쟁하면 일본 전국시대 전쟁을 말한다. 일본전국시대는 15세기 중반부터 16세기 후반까지 사회적 정치적 변동이 이어진 내란의 시기다, 교토는 원폭투하 계획이 바뀔 정도로 일본 사람들의 정신적 수도다.
③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교토와 관련이 있다. 전국 시대 때 교토가 전국시대 주요전란의 무대였기에 많은 피해를 입게 되었다. 그때 그 피해를 극복하는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잘 했다. 일본 사람들에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영웅이다. 한국에서 한국인의 시선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원수였다. 한국은 왕조중심으로 시대구분을 한다.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가 다 왕조교체에 의해서 탄생했다. 일본은 7~8세기 아스카 시대를 중심으로 천황 시스템이 구축된 이후로 왕조 교체가 단 한 번도 없었다. 천황은 상징적 권력이고 막부가 실질적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교체된 막부 가 어디에 있었느냐, 가마쿠라(도쿄)에 있었으면 가마쿠라 막부 (1185~1333), 무로마치(교토)에 있었으면 무로마치 막부 (1338~1573), 에도에 있었으면 에도 막부 (1603~1868) 이렇게 지명을 기준으로 해서 나누었다. 전쟁은 군인들이 천막에서 한다. 천막에서 작전 회의를 한다. 幕府라고 하는 것은 군인들이 중심이 된 행정 시스템이었다. 거기서 최고 대장은 장군, 일본말로 쇼군이다. 12세기에서 19세기 까지 쇼군이 어디에 있었느냐에 따라 시대구분을 하고 있다.
④ 천황이 거주하는 곳을 미야코 都 수도라고 부른다. 794년 간무 천황은 나라에서 교토로 수도를 옮긴다. 헤이안 시대의 개막, 천년 수도, 교토 역사의 시작이다. 간무 천황은 사실상 한반도와 아주 밀접한 인연이 있는 인물이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일본의 천황이 자신의 선조 중에 한반도와 깊은 관련이 있다. 아키히토 천황(2001.12)은 나는 간무 천황의 어머니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에 기록돼있는 사실에 한국과 깊은 인연을 느낀다. 간무 천황의 백제계라는 말이 일본에서 공식으로 이야기 한 것이 그때가 처음이었다. 일본인들이 깜짝 놀랐다고, 교토천도 이후에 천 년이 넘게 가마쿠라, 무로마치,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에도 막부까지 여러 무신 정권의 교체는 있었지만 천황이 거주하는 곳, 일본의 수도 교토는 변화가 없었다.
⑤ 간무 천황은 어머니가 백제 도왜인의 후손, 도왜인은 주로 5~6세기 무렵 중국,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들, 자신을 후원해 줄 수 있는 정치적 기반이 약했다. 게다가 당시에 일본의 수도 나라가 불교세력이 풍성해서 세상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래서 간무 천황이 자신의 정치력을 회복하고 승부수를 던진 게 교토천도였다. 조선역사에서도 보면 지지기반이 약하거나 새로운 왕조가 만들어지면 천도를 했다. 간무 천황은 어느 정도 개혁적인 정치를 시행 하면서 정치력이 상승은 되었지만 후지와라 씨를 비롯한 유력 귀족들의 가문이 득세를 하고 그러다 보니까 천황의 존재가 점점 무의미하게 되었다.
⑥ 천황의 지위에서 물러난 상황이 지방의 무사들을 동원해서 대거 교토에 진출하게 되면서 무사들이 정권을 최초로 만들게 되는 데 그게 바로 가마쿠라 무사정권이다. 천황의 후견인으로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 지방 무사들을 사무라이 라고, 사무라이의 주 업무는 귀족 경호였다. 그래서 항상 검을 허리에 차고 다니면서 예상치 못한 상황에 대비해야 했다. 사무라이는 충성을 가장 중시했고 불명예를 죄처럼 여겼다. 특히 자결의 문화가 있다. 자결에 대한 방법으로 할복이 있다. 무사의 가장 불명예스러운게 다른 사람에 의해서 자신의 목이 침해 당하는 거다.
⑦ 할복과 관련된 일화가 있다. 어느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자신의 말들을 점검하다가 우연히 도쿠가와 이에야스 수하의 무사를 만난다. 사무라이한테 녹봉을 훨씬 더 많이 줄테니까 나한테 충성을 해라, 이 소식을 들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무사를 조용히 불러냈다. 돈을 더 많이 받고 사는게 너한테도 훨씬 이로울 것 같으니까 도요토미한테 가서 충성을 맹세해라. 이때 사무라이는 눈물을 흘리면서 즉시 자결해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충성하는 마음을 밝히겠다 라는 얘기가 있다. 사무라이는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고 죽을 각오로 장군을 모신다. 사무라이 정신을 일본 사람들은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이런 충성심을 바탕으로 귀족과의 신뢰가 점차 쌓여갔다. 사무라이는 귀족의 경호담당자에서 점차 무사계급으로 확대되었다. 하나의 신분으로 성장을 한다. 심지어 영주가 되어 장원을 소유하기도 하고 신분적으로 상승하자 사무라이 자체에 대한 대우도 달라졌다. 큰 칼을 차고 다닐 수 있는 권리 외에도 성씨를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사무라이의 가문, 자신이 이룩해 놓은 가문을 후대에 이을 수 있었다.
⑧ 사무라이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사무라이를 중심으로 한 쇼군이 세운 막부가 권력의 한 축을 형성하기 시작한다. 이제는 실권을 장악한 일본의 막부 이야기다. 무인세력이 황족의 호위무사였는데 지배층이 되어 버렸다. 나를 지켜주게 하고 불러모았는데 오히려 나를 위협하는 존재가 되었다. 가마쿠라의 뒤를 이어서 14세기 초에 무로마치 막부가 등장하게 되는데 무로마치 막부의 제3대 쇼군이었던 아스카와 요시미쓰는 공가(귀족)와 무가(무사)와 사원(불교) 세력들을 하나로 통합하는데 노력을 한다. 특히나 아스카와 요시미쓰는 자신의 거처를 황거 주변으로 옮겨서 천황과의 관계를 가깝게 했었고 나아가서 교토의 기타야마 라는 곳에 자신의 별장을 지었는데 그게 바로 금각사다.
⑨ 금각사는 사원이 아니라 쇼군의 별장이었다 당시 막부의 권위와 힘을 그대로 보여준 상징적인 존재였다. 금각사는 현재 일반인의 내부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얼핏 보더라도 1층하고 2층하고 3층에 각각의 층 마다 건축양식이 다르다. 1층은 귀족들이 사는 주택양식을 바탕으로 해서 지었다. 2층은 무사들이 사는 주거양식을 바탕으로 해서 지었다. 3층은 사원 양식이다. 그러다 보니까 각층마다 창틀과 문의 형식이 다르다. 당시 무로마치 막부는 칼에 의해서 일본을 장악한 게 아니라 귀족들과 불교 세력을 다 아우를 수 있는 문화적인 포용력이 있다 라는 것을 보여주려고 애했다.
⑩ 무신이다 보니까 벼락부자가 되었으니 부와 재력을 보여주다 보니까 금박을 사용했다. 막대한 돈은 당시 중국과의 무역을 통해서 많은 이득을 올렸다. 일본 같은 경우는 1404년부터 150년 동안 무로마치 막부를 중심으로 해서 여러 다이묘들이 중국과 무역을 하면서 막대한 이득을 봤다. 막부 문화의 정수를 알 수 있는게 있다. 교토가 199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배경에 일본식 정원이 있다. 일본어로는 가레산스이, 영어로는 Japanese dry garden이다. 이 정원은 무로마치 막부시대에 선종이 융성하면서 발전했다. 정원을 조성하는 것도 선의 경지에 도달하기까지의 수행의 한 과정이었다. 선의 메시지가 정원 속에 잘 표현되어 있다. 일본사람들은 이 정원을 그냥 정원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예술의 한 분야로 생각하고 있다.
⑪ 막부는 칼을 쥔 무사에서 자신들만의 세력과 함께 독특한 문화까지 만들어냈다. 그런데 영원할 것만 같았던 막부의 시대가 막을 내리게 된다. 전국시대는 무로마치 장군 후견자를 둘러싸고 1467년에 교토를 무대로 해서 오닌의 난이 벌어지는데, 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하고 나서 그 다음에 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 막부를 설립할 때를 마지막으로 130년 정도의 시기를 전국시대 라고 부른다. 내전이 약 130년간이나 지속이 되어서 내부적으로 피폐해졌고 나라가 쑥대밭이 되었다. 이걸 다시 일으켜 세운 사람이 도요토미 히데요시다. 리더로서 전후 복구를 잘 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혼란한 정국을 통일하고 교토를 정비한다. 교토 주위 23킬로미터 성벽을 두르고 도심을 정비하는데 사찰을 한쪽으로 모우고 그 때 그 거리를 데라마치, 절이 모여있는 거리, 지금 우리나라로 본다면 인사동 거리처럼 전통거리로 만든다. 그런데 바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 전쟁 중에 사망한다. 도요토미 정권은 점차 서서히 몰락하게 되고 뒤를 이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에 새로 막부를 수립하면서 일본 정치의 중심지는 교토에서 에도로 바뀌게 된다.
⑫ 물론 에도가 정치적인 중심지는 분명하지만 당시 사람들은 에도는 정치적인 중심지, 오사카는경제적인 중심지, 교토는 역사와 문화와 전통의 중심지로, 이 세 개의 도시를 다른 여타 도시들과 구분해서 3도 라고 불렀다. 에도 막부 입장에서는 교토에 천황을 감시하기 위해서 교토 시내 한 복판에 니조성을 만들었다. 천황의 위세가 얼마나 쪼그라들었고 막부의 힘이 얼마나 센지를 알 수 있다. 1868년 에도 시대가 막을 내린다. 메이지 천황과 새 정부는 황실을 도쿄로 옮기는 천도를 추진한다. 1869년 천황도 거처를 교토에서 도쿄로 옮겨 간다. 이렇게 되면서 교토라는 곳이 현대화의 움직임 속에서 방치되어서 1871년 역사적 장소 보존에 대한 조례가 최초로 발표가 되면서 지금의 교토가 보존될 수 있었다.
⑬ 십 여년 전만 해도 교토는 매번 일본 사람들이 살고 싶은 도시순위 랭킹 1위였다. 요 십여년 사이에 교토의 노령화가 심각하게 진행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보건이나 복지에 비용을 사용하게 되었다. 시재정이 나빠지게 되었고 일본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세계 각지에서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오는 관광도시이다 보니까 오버투어리즘이 되면서 교토에서 수용할 수 있는 이상의 관광객들이 몰려들면서 그로 인해서 여러 복잡한 사회적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일본역사는 막부와 천황이 뼈대이다.
⑭ 한국인은 일본하면 어쩔 수 없이 양날의 검이다. 교토 문화를 얘기하면서 긍정 할 수도 있지만 한편 마음이 무거워진다. 아픈 역사가 많다. 한국인의 시선에서 교토의 명소를 보는 데 그치지 말고 그 속에 담겨 있는 소개되지 않은 조선인 포로, 조선인의 귀나 코를 베어가지고 만든 (귀무덤-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일본군에게 희생당한 12만 6천여 명의 조선인의 귀와 코가 묻힌 곳), 귀무덤이 교토에 있단다. 한국의 역사와 관련된 장소를 의미있게 살펴 보면서 교토에서의 체험을 통해서 한일관계를 각자 새롭게 만들어가야 되겠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