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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면 피는 꽃이 봄이 왔어도 피지 않는다. 피기도 전에 지는 꽃이 있다. 환하게 웃는 영정 사진 속의 지우는 소녀 같다. 설마 그 사진을 보면서 생전의 지우가 영정 사진으로 쓰리라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진 곱게 찍혔네 했었기에 꽃으로 둘러싸인 영정 사진이 되고 말았다. 울어도 다함없을 눈물을 담은 채 어머니의 가슴이 갈래갈래 찢어진다. "고등학교 때 전국체전 매스게임을 잘했다고 대통령이 주었다며 만년필을 학생들에게 나눌 때였어요. (전두환) 대통령에게 편지를 쓰라고 하자 우리 아이(김지우)는 사람 죽이는 사람에게 감사 편지를 안 쓰겠다고 고개를 세웠다가 어느 선생님에게 코피가 나도록 뺨을 맞았어요. 그 때 위로 해주신 분이 김환생 선생님이셨지요." 지우 어머니의 말이다. 그래 생각난다. <혼불> 작가 최명희로 인해 알게 된, 당시 전주 기전여고 교감 김환생 선생(현 기전여중 교장)이 이따금 서울에 올 때마다 나에게 지우를 자랑하곤 했다. 작가를 꿈꾸는 제자가 있단다. 나이는 서른이 훨씬 넘었으나 지금은 꾸준하게 글을 쓰며 기회를 노리고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 내게 전화를 바꿔주곤 했다. 평범한 아줌마 목소리였다. 이 나이에 아직 문학소녀인 아줌마로구나. 꿈은 꿀수록 좋은 거지. 그 나이에 작가를 꿈꾸는 한 아줌마의 노력이 나는 당치도 않게 힘들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2000년 겨울, 단편 '눈길'로 제 3회 창비 신인소설상을 받았을 때 나는 놀라고 기뻤다. 이룰 수 없는 꿈을 이룬 것처럼. "서로 연애해서 딸 둘 낳고 살았던 남편은 명문대 영문과를 나와서 직장 생활을 한 동안 차분하게 했었지요. 그 놈의 술이 원수지. 지나치게 먹으면 사람이 변하는 거예요. 견디다 못해 이혼하고 나서는 병원에 입원을 한두 번 한 것이 아녜요. 지우가 여러 번 찾아갔지요.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행방도 몰라요. 지금 지우가 이런 일을 당한 것을 알리가 없어요."
"나는 지우를 자주 못보고 있어요. 어느 때는 글을 쓴다고 땅끝 마을에 일주일씩 가있기도 하고 어느 때는 제주도에 가있기도 하고. 전세도 아니고 월세로 사는 살림이 힘들지만 늘 하는 말이 글을 써야겠다는 거예요. 우리 부모가 무슨 돈이 있어 이 아이를 돌봐주겠어요. 아래 동생이 변호사라 벌만큼을 벌고 있는데다가 누나에게 그렇게 잘할 수 없어요. 지우가 남긴 두 아이를 제가 거둬서 키워야겠는데, 우리 집을 늘려서라도 아이들이 있을 장소를 구하겠다니 한숨은 놓았어요. 이제 나도 4년 뒤에는 칠순이라 아이들 뒤를 제대로 보아줄 지 걱정이네요. 4년 만 참으면 아이들이 제 앞가림을 할 수 있겠지만 어미 없는 자식을 기르려니 걱정이 앞서요." 상주 노릇을 하는 지우의 아래 동생이 눈이 부은 채로 간절하게 말했다. 그 말은 손을 잡은 사람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자신에게 말하는 듯하다."어렸을 때 누님에게 못되게 굴었어요. 제가 그 신세를 다 갚을 참 입니다" 동생에게 손을 잡힌 사람은 지우의 마음이 되어 고맙다. "지우는 가끔 머리가 아프다고 했어요. 작년 12월부터 몹시 아파했어요. 병원에서 검사를 한두 가지를 받은 것이 아녜요. 무슨 병인지 병명을 못 잡아요. 큰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할 것을, 이제 와서 이렇게 후회를 한답니다. 사흘 전에 머리가 너무 아파서 참을 수 없다기에 병원 중환자실에 들어왔지요. 의식을 잃고 뇌압이 높아지더니 이렇게 떠나네요." 우리 집 집안 어른이 세상을 떠났을 때 지우는 왔다. 검정 옷을 단정하게 입고 마치 어둠처럼 슬며시 왔다. 지우는 조용했다. 차분하고 신중한 사람이었다. 내게 문상객으로 왔던 지우의 모습이 나보다 더 슬퍼보였다. 쓸쓸한 기운이 강해서였는지. 이제 지우가 내게 문상객이듯 내가 문상객에 된 이 주객전도의 역설 때문에 나는 정말로 슬프다. "아까 입관했어요. 우리 지우가 예쁜 아이는 아녜요. 그러나 화장을 하고 입관을 하니 참 곱더라고요. 세상을 떠나면서 곱게 단장하고 갔으니 됐지요." 젊은 작가들이 대기실에 무리지어 여러 명이 앉아 있다. 지우가 글 쓰는 세상으로 나오게 한 김환생 선생도 와주었다. 지우의 소녀 시절부터 불혹이 넘은 날들을 지킨 선생이 "이렇게 죽음에 이르는 병이 있을 줄 몰랐다"며 눈시울을 붉힌다. 내가 느끼는 슬픔의 무게는 얼마나 가벼운가. 지우 어머니나 선생님에 비하여. 김환생 선생이 전주에서 서울에 가끔 오면 나를 불러냈다. 지우와 찻집에서 만났고 점심 한 그릇을 했다. 때로는 지우는 이런 말을 했다. 운세 좀 봐주세요. 제가 언제쯤 상복이 있을까요. 그런 말을 할 때는 젊은 작가들이 아는 단호하고 야무진 작가 지우가 아니라 세상의 운에 기대는 작은 여인네였다.
"어머니, 이제 따님을 가슴에 품었으니 죽을 때까지 가지고 가시려면 무거워서 어쩝니까. 이리 오세요. 제가 어머님에게서 그 무게를 덜어 가리다." 나는 지우의 어머니를 안는다. 슬픔의 무게가 내게 온다. 밖에는 봄꽃이 피기 시작하는데 안에는 꽃이 지면서 떨어졌다. 북망산 가는 길은 옷 한 벌 맨발로 가야하니 세상의 모든 가진 것은 헛되고 헛되구나 상여 소리 꽃상여 따라 울고 갈 아리랑 고개 봄 꽃길 따라 세상사 흘러가며 누구나 떠나는 그 길은 오늘 인 듯 내일 인 듯 저마다 알몸에 꽃단장하고 떠나려니 앞서 간들 서러우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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