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강(南岡) 이승훈(李昇薰)
<1864(고종 1) 평북 정주~1930>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교육가·기업가.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1920년대에는 물산장려운동·민립대학설립운동 등에 참여하는 한편 이상촌(理想村)
건설운동을 벌였다. 본관은 여주(驪州). 초명은 승일(昇日). 본명은 인환(寅煥). 자는 승훈(昇薰), 호는 남강(南岡).
초년
아버지는 석주(碩柱)이고, 어머니는 홍주김씨(洪州金氏)이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생후 8개월 만에 어머니가 죽자
1869년에는 고향을 떠나 유기(鍮器) 제조공업의 중심지인 납청정(納淸亭)으로 이사하여 약 3년간 서당에서 수학했다.
1873년 아버지가 죽자 이듬해 공부를 중단하고 납청정에서 유기제조와 도산매업을 하는 상점의 사환으로 일했다.
1878년 이도제(李道濟)의 딸 경강(敬康)과 결혼했다.
기업활동
1879년부터는 점원을 그만두고 주인이던 임권일(林權逸)에게 물건을 외상으로 받아 평안도와 황해도 각 지역 장시를
돌아다니며 유기행상을 하다가 철산의 오희순(吳熙淳)에게 돈을 빌려 1887년 납청정에 유기공장과 유기상점을 차리고 평양에
지점을 열었다. 이후 공장을 운영하면서 노동환경을 개선하여 공장을 위생적으로 만들었고 근로조건을 개선하여 근로자의
임금을 올려주고 일정한 시간의 휴식을 하도록 했으며, 신분이나 계급의 차별을 두지 않고 근로자를 평등하게 대접했다.
약 7년간 순조롭게 영업을 하다가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덕천으로 피신했다가 돌아왔으나 집과 상점·공장은 모두 파괴되어
있었다. 다시 오희순을 찾아가 자본금을 빌려 다른 사람보다 먼저 상점과 유기공장을 재건하여 근처의 유기공장을 거의
독점했으며 평양 지점을 다시 열고 진남포에도 지점을 열었다.
1901년 평양으로 가서 윤성운(尹聖運)·김인오(金仁梧) 등과 합자하여 무역상회를 일으키기로 결정하고 평양·인천·서울을
오가면서 새로운 사업을 벌였다. 서울과 인천 간의 운송업을 시작하고 인천항에 수입되는 석유·양약 등을 구입하여 이를
황해도와 평안도에 도산매하기도 했다. 또 서울로 들어오는 각종 지물(紙物)을 매점(買占)하고 종이값이 오르기를 기다렸다가
팔아 큰 이익을 보았는데, 이의 금이 50만 냥에 이르렀다고 한다.
1904년 러일전쟁으로 일어나자 군수품사업에 손을 댔으나 전쟁이 뜻밖에 빨리 끝나자 큰 손해를 보았으며 값싼 일본제
도자기의 대량 수입으로 유기공업도 큰 타격을 받게 되자 1905년 용동으로 돌아가 은거했다.
이후 민족문제에 대해 자각을 하고 다시 활동을 시작하여 1908년 평양에 신민회(新民會)의 산하기관으로 각종 유인물과 서적
등을 출판·공급하기 위해 태극서관(太極書館)을 설립하고 관주(館主)가 되었으며, 1909년에는 평양에 자기회사(磁器會社)를
설립하고 사장에 취임했다.
한편 한국에서 생산되지 않는 외국물품을 이탈리아로부터 수입하고 한국의 특산물을 수출할 생각으로 인천에 파마양행
(巴馬洋行)이라는 합작회사를 설립할 것을 계획했으나 서구 무역상사와의 직접 무역거래가 일본상품 불매운동으로 발전할
것을 염려한 일본의 방해로 이탈리아 파마양행측의 지배인이 귀국하여 이 계획은 좌절되었다. 이때 관서자문론(關西資門論)을
주장했는데 이는 일본 자본의 대량 유입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약소민족자본은 합자해야 한다는 것으로, 첫 단계로 관서지방의
상공업자들은 그들대로 자본을 합자하여 회사를 설립할 것이고, 다른 지방의 상공업자들도 서로 자본을 합치면 일본 자본과
대적할 수 있을 것이며, 그렇지 못하면 민족기업은 외래 대자본에 눌려 망하고 만다는 것이다. 이 계획을 실천에 옮기려고
자본을 확대 모집하여 사업을 확장하려던 무렵에 무관학교사건·105인사건으로 인해 체포되면서 이 계획도 수포로 돌아가는 듯
했다. 그러나 이후 1910년대 윤성운·이덕환(李德煥)·김동원(金東元) 등과 함께 선천·박천·정주 등지의 토착자본을 끌어들여
근대적 산업자본화를 위해 노력했다.
독립운동과 교육사업
1905년에는 용동에 은거하면서 국내외 정세 변동에 관심을 기울였다.
1906년 통감부가 설치되고,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이 일어나자 은둔지인 용동에서 나와 평양으로 갔다가 민중이 자각해야
한다는 안창호(安昌浩)의 연설을 듣고 뜻을 같이하기로 결심하고 용동에 돌아와 봉건적 교육을 하던 서당을 개편하여
신식교육을 하기 위한 강명의숙(講明義塾)을 세우고 산술(算術)·수신(修身)·역사·지리·체조 등을 가르쳤다. 이어 교육과 실업을
통해 실력양성을 하여 독립을 이루려는 비밀결사인 신민회(新民會)의 조직에 참가하여 평북총관(平北總管)이 되었다.
같은 해 11월 24일 중등교육기관으로 오산학교를 열어 백이행(白彛行)이 교장이 되고 그는 학감이 되었다. 오산학교가 처음
개교할 때 학생은 7명으로 여준(呂準)과 서진순(徐進淳)이 수신·역사·지리·산수·법제·경제·체조·훈련을 가르쳤으며 학생들은
모두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이후 이광수(李光洙)·이종성(李鍾聲)·조만식(曺晩植) 등이 부임하여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찬무회(贊務會)를 조직하여 학교의 재정을 마련했다.
1909년 8월 안창호의 발의로 청년들의 수양과 애국심 함양을 위해 설립한 청년수양단체인 청년학우회에 발기인으로
참가했다.
1911년 2월 안악사건(安岳事件)에 연루되어 1년간 거주제한의 형을 받고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유배 도중 가을에는
105인사건이 일어나 많은 신민회 간부가 체포되자 그도 주모자로 인정되어 제주도에서 서울로 압송되었다. 1912년 10월 징역
10년을 선고받았으나 1915년 2월 가출옥한 뒤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년 반 동안 공부했다.
1917년 선천의 북교회(北敎會)에서 오산교회의 장로로 임명되었으며 이후 평북노회에서 활동했다. 1918년 9월 평안북도
선천에서 제7회 장로교 총회가 열렸을 때 상하이[上海] 교민 대표로 참가한 여운형(呂運亨)과 함께 파리 강화회의를 계기로
궐기하자는 논의를 했다. 그해 12월에는 서춘(徐椿)·조만식 등과 더불어 국내 및 상하이·도쿄[東京]에서 각각 독립선언을
발표할 것을 논의했으며, 김승만(金承萬) 등과 더불어 해외로 망명하는 독립운동가들의 안전한 통로를 마련하고 국내외의
독립운동을 연락할 거점으로 교통사무소를 설치했다.
3·1운동 때에는 기독교측 대표로 참여했다가 구속되어 1920년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위반으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마포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윤치호(尹致昊)·이상재(李商在)와 함께 광문사(光文社)의 설립발기인으로 추대되었다.
1922년 민족대표 33인 중 가장 마지막으로 가출옥한 후 일본을 시찰하고 나서 3·1운동과 같은 방법을 통한 즉각적인 독립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장래에 독립을 이루기 위해서는 교육과 산업을 통해 실력을 양성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1923년 이상재·유진태(兪鎭泰)와 함께 조선교육협회를 창립하고, 민립대학설립기성회 중앙상무위원으로 뽑혔으며,
물산장려운동에도 참여했다.
1924년 김성수(金性洙)·최린(崔麟) 등과 더불어 연정회(硏政會)의 조직에 대한 논의에 참가했으며 〈동아일보〉 사장에 취임,
5개월 동안 경영을 맡았다. 이때 조선기근구제회에 관여하는 한편, 출감 후의 환영회나 물산장려운동과 민립대학설립운동,
시국에 관한 것 등에 대해 각지에서 열린 강연회에 참가하여 정치·교육·종교에 관한 강연을 했다.
1925년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이 독립운동 대열에서 떨어져나와 참정권 획득과 자치론으로 기울어지면서 개량주의적 색채를
드러내자 다시 오산학교로 돌아와 초대 이사장을 지냈다.
공동체 건설운동
초기의 이상촌운동은 1907년 용동으로 돌아와 강명의숙을 세우면서 시작되어 위생·단발·금주·금연·근면·문맹퇴치 등을 당면
목표로 하고 있었다. 그 방법으로 온 동리가 술과 담배를 금하고 공동생활을 위한 위생시설과 환경을 개선하고 경제문제의
해결방안을 모색하며 가내작업으로 생산한 물건을 공동으로 모아 판매하기도 했다.
한편 야학을 열어 생활에 관한 지식을 보급했으며 청년회에서는 교육계몽을 실시하고 공동작업 등에 모범을 보였다.
또 국민들의 정신적 퇴폐를 한탄하면서 정신상의 수양을 위해서는 기독교를 믿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용동에 교회를 세우고
기독교의 보급에 힘을 기울였다.
3·1운동으로 인한 옥고를 치르고 다시 용동으로 돌아온 1920년대에는 용동을 중심으로 한 이상촌운동을 7개 마을로
확대하고자 하여 먼저 각 마을에 동회(洞會)를 조직하도록 했고, 7개 마을의 동회를 묶는 조직으로 협동조합과 소비조합을
두었다. 학생과 주민을 위한 생활필수품, 학용품을 취급하는 협동조합을 운영했다.
이상촌운동의 기본조직으로 조직된 자면회(自勉會)는 오산공동체운동 중 마을공동체의 자치기구로 근면·청결·책임이라는
동시(洞是)를 제정했다. 자면회는 농지개량·연료개량·협동생산·협동노동·소득증대 등 생활의 개선과 생활의 수준향상에
노력했으며 자면회의 협력조직으로는 청년회와 학생조직이 있었고 상부조직으로는 협동조합이 있었다.
죽은 뒤 사회장으로 치러졌으며 오산학교 교정에 묻혔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브리태니커백과>
민족교육의 선구자 이승훈
남강 이승훈, 한말부터 일제시대에 걸친 우리 민족 독립운동사의 굵직한 사건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인물이다. 어려서 부모를
읽고 일찍이 상업과 무역업에 투신하여 큰 돈을 벌었지만 한번도 자기 재산이라 생각지 않았다.
1907년 평양에 나갔다가 도산 안창호 연설을 듣고 결심하여 사재를 털어 고향(평북 정주)에 오산학교를 설립, 일제시대
대표적인 민족주의 학교로 육성하였으며 일제의 경제 침략에 대항하여 상무동사를 설립, 민족자본 육성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1907년 안창호가 신민회를 조직할 때 평북 일대 민족주의자들을 동원, 여기에 참여하였고 1911년 105인 사건이 터져, 신민회
관련 인사들이 대거 체포될 때 그는 ‘수괴’로 지목되어 혹독한 고문과 악형을 받아야 했다.
4년 넘게 옥고를 치르고 고향에 돌아와서 후배들에게 한 말이다.
“감옥이란 이상한 곳인걸, 강철 같이 굳어서 나오는 사람도 있고 썩은 겨릅대처럼 흩어져서 나오는 사람도 있거든....”
그는 물론 강철 같이 굳어져서 나왔다. 한 때 목회자가 되려는 마음에서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들어가 신학을 공부하기도
하였지만 1916년 자신이 설립한 정주 오산교회 장로가 된 후 평생을 평신도로 교회를 섬겼다.
1919년 삼일운동 때 그는 다시 전면에 나섰다. 1919년 2월, 고종의 갑작스런 승하로 슬픔과 울분에 빠져 있던 그에게 105인
사건 직후 상해로 망명했던 오산학교 제자 선우훈이 찾아와 미국 대통령 윌슨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파리에서 개최될
강화회담에서 논의될 터인데 이에 맞추어 민족 대표를 파리에 파송하고 국내에서도 호응하는 독립 시위가 있어야 할 것이라
호소하였다.
이승훈은 즉시 동지를 모으기 시작했다. 자신이 속한 평북노회에서 유여대 이명룡 김병조 양전백을 포섭했고 평양에서
장로교의 길선주와 가밀교의 신홍식, 서울에서 이갑성을 포섭하여 민족대표로 참여하도록 이끌었다.
그는 2월 중순부터 서울에 상주하면서 박희도와 정춘수 최성모 이필주 박동완 오화영 김창준 등 감리교 인사들과 접촉하여
기독교 세력을 규합하였다.
그러고 나서 천도교측 최린과 접촉하여 삼일운동을 기독교(감리교 9명, 장로교 7명)와 천도교(15명), 불교(2명) 등 3개 종파
지도자들의 연대운동으로 성사시켰다. 교리와 정서가 다르고 그래서 운동 방향과 방법론이 달랐던 종교 지도자들이 함께 손을
잡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여러 차례 결렬 위기가 있었지만 그 때마다 이승훈이 나서 타협을 이끌어냈다.
운동 막바지에 걸림돌로 나타난 것이 독립선언서에 표기할 민족대표들의 서명 순서였다. 은밀하게 추진된 민족대표 선정
작업이 2월 27일에야 끝나고 이제 독립선언서를 인쇄할 차례가 되었는데 누구를 제일 앞머리에 놓느냐를 두고 종파간
신경전이 치열하였다. 그 중에도 거사 자금 대부분을 댄 천도교측과 인원이 제일 많은 기독교측 사이에 자기네 대표를 먼저
넣어야 한다는 명문을 내세우며 은근히 상대방의 양보를 요구하였다. 뒤늦게 회합 장소에 들어온 이승훈은 순서 문제로 서로
어색해 있는 모습을 보고 일갈하였다.
“순서는 무슨 순서! 이거 죽는 순서야. 천도교 대표 손병희 먼저 넣어. 다음에 장로교 대표 길선주, 감리교 대표 이필주, 불교
대표 백용성 넣고 나머지는 가나다순!”
순간, 엉켰던 실타래가 풀어지듯 분위기가 바뀌었다. 나이로 보나, 그동안의 투쟁 경력으로 보나, 이번 거사에서 보여준
활약상으로 보나 이승훈은 민족대표 제일 앞머리에 이름을 올릴 수 있는 인물이었다. 거기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종파가 다른 천도교에 처음 자리를 양보했고 장로교 대표 자리마저 길선주에게 양보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은 가나다순으로 해서 열일곱 번째로 들어갔다.
이것이 진정한 권위가 아닐까? 당연히 주장하고 누릴 수 있는 자기 권리와 몫인데도 그것을 포기하고 남에게 양보할 수 있는
자만이 발휘할 수 있는 권위 말이다. 주관이 뚜렷하고 자아가 강한 운동가들도 이런 그 앞에서 모두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삼일운동은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자료: 토비아스의 우물>
이승훈의 바른 말
독립 운동가 이승훈(1864-1930)이 젊었을 때의 일이다. 한번은 사업 자금이 필요해서 소문난 부자 오삭주의 집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 오삭주의 집에 도착하니 사랑채에는 이승훈보다 앞서 돈을 빌리러 온 사람들이 여러 명 대기하고 있었다.
잠시 후 오삭주가 사랑채로 들어와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던 중 이런 말을 했다.
"금년에는 조부모님 산소에 석상을 세우느라 꽤 힘들었지. 생각보다는 돈이 많이 들고 일도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더군."
이렇게 은근히 자기 자랑을 늘어놓는 것이었다. 그러자 돈을 꾸러 온 사람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거들며 오삭주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었다.
"참 훌륭하십니다. 조상님께 아주 복받을 일을 하셨습니다"
"그런 일은 돈이 있다 해도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이렇게 칭찬을 하는데, 젊은 이승훈이 정색을 하며 이렇게 말했다.
"자기 조상 산소에 석상 세운 일이 뭐 그렇게 대단하다고 이러십니까?" 이 말에 돈을 빌러 온 사람들 모두가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오삭주도 얼굴을 붉히더니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렸다. 사랑채에 모인 사람들을 오늘은 돈 빌리기 틀렸다며
이승훈을 나무랐다.
한 시간쯤 지났을 때 오삭주가 다시 사랑채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환한 얼굴로 이승훈에게 다가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내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자네 말이 맞더군. 그런 패기가 있다면 내가 돈을 빌려 줘도 아깝지 않을 것 같네."
그러면서 이승훈이 원하는 만큼의 돈을 선뜻 내 주었다. 오삭주는 이 후에도 이승훈을 각별히 신임해 많은 도움을 주었다.
세상 사람들은 강자에게는 너무도 약하고 약자에게는 너무도 강한 일면이 있다. 그래서 권력자니 부자니 하는 사람들 앞에서
너무 쉽게 고개를 숙인다. 그러나 그런다고 해서 원하는 만큼의 대접을 받는 것은 아니라는데 인생사의 또 다른 묘미가 있다.
오히려 자신의 의견을 당당히 밝힘으로써 상대방에게 믿음을 주고, 그럼으로써 인간다운 대접도 받을 수 있다.
상황에 관계없이 원칙대로 행동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야말로 남강 이승훈 선생처럼 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다.
<글: 황필상 박사>
서울 용산구 보광동. 남산의 품에 안긴 오산중고교를 한강이 휘감아 돈다. 3·1운동 때 기독교 대표였던 남강 이승훈(1864~1930)이 세운 학교다. 남강문화재단 상임이사이기도 한 오산고 이신철(58) 교장선생님이 ‘겨레의 스승’ 남강을 전한다. 6·25 뒤 서울로 내려온 오산학교는 애초 1907년 남강이 평북 정주의 제석산 기슭에 세웠다. 올해가 100돌이다. 처음 7명의 학생으로 시작해 기껏해야 전교생이 100명 남짓이었던 이 학교 출신의 교사와 학생들을 살펴보면, 한 사람이 심은 밀알이 얼마나 창대한 결과를 낳는지 그저 놀랄 뿐이다. 고당 조만식, 단재 신채호, 춘원 이광수, 다석 유영모, 함석헌, 주기철 목사, 한경직 목사, 소설가 염상섭, 벽초 홍명희, 시인 김소월, 화가 이중섭 등이 오산 출신이고, 독립투사와 애국지사들은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다. 호랑이굴에 고양이 새끼는 없다고 했던가. 멀리서 남강이 나타나면 “범(호랑이) 온다, 범 온다”고 숨곤 하던 오산의 자식들이 남강의 품을 떠날 때가 되면, 식민지의 비참하고 무력한 낭인이 아니라 자신 안에 잠자고 있던 야성과 웅혼을 되찾은 호랑이였다. 남강은 상민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더구나 8개월 만에 어머니가 눈을 감아 할머니 손에 자랐으나 열 살 때는 할머니와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 천애고아가 되었다.
그러나 시대는 더욱 암울해져 ‘국치’로 치닫고 있었다. 남강은 1909년 9월 평양에서 한 목사의 설교를 듣게 되었다. 목사는 이 고난의 땅만 있는 게 아니므로 하늘을 보며 어려움을 이겨나가자고 호소했고, 섬김과 사랑, 평등의 기독교정신을 설파했다. 남강은 무력하고 분열된 민족을 구원할 사상으로 이를 받아들였고, 오산학교를 기독교학교로 바꾸었다. 남강은 이후 일제가 민족지도자들을 붙잡기 위해 날조한 105인 사건으로 5년간 온갖 고문을 받고 옥고를 치르는 동안 신약성경을 100독해 내면의 신앙을 반석에 세웠다.
“나라 없는 놈이 어떻게 천당에 가? 이 백성이 모두 지옥에 있는데 당신들은 천당에서 내려다보면서 앉아 있을 수가 있느냐?” 남강의 일갈이 없었다면 평양대부흥의 기세도 사그라들어 여전히 서양의 이방 종교에 불과했던 기독교가 한민족과 일심동체임을 분명히 함으로써 동아시아에서 유일무이하게 착근에 성공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남강의 독려로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모든 종교에서 가장 많은 16명이 기독교(개신교)인이었다. 하지만 민족대표들이 각 종교 대표들로 구성됐기에 자기 종교를 앞세우거나 힘 대결로 치달을 경우 민족적 대사를 이끄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큰사람만이 큰일을 이끌 수 있었다. 서명을 앞두고 자기 종교인을 먼저 써야 한다며 좌충우돌하는 민족대표들에게 남강은 “순서가 무슨 순서야. 이거 죽는 순서야. 죽는 순서. 아무를 먼저 쓰면 어때. 의암(천도교 교주 손병희)의 이름을 먼저 써”라고 했다. 상당수 목사들이 따랐던 신사참배나 세속적 영리에 털끝만큼도 흔들리지 않은 신앙을 지녔으면서도 그는 내 종교, 내 종파 에만 빠져 정의와 평화와 자유를 도외시한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신앙을 경계했다. 그는 열네 살이나 적은 안창호의 말을 즉각 수용하고, 스물여섯이나 적은 유영모에게 기독교를 배울 정도로 품이 컸다. 이 교장은 “남강은 권위나 말을 앞세우는 그런 사람과는 전혀 달랐다”고 했다. 알고 깨달은 것을 즉각 실행하는 이가 바로 남강이었다. 그의 유언에 따라 유해는 학생들을 위한 생리표본으로 만들어졌으나 일제는 그의 뼈마저 두려워 강압적으로 매장시켰다. 그러나 남강의 정신은 묻을 수 없었다.
<글· 사진: 조연현 종교전문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