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기시대· 동한, 조위, 서진, 북위의 도성 낙양성 유적 铁器时代 · 汉魏洛阳城遗址
출처: 고고학 중국 소스 : 동북아역사문물연구원
▲ 동한, 조위, 서진, 북위의 도성유적 동한, 조위, 서진, 북위의 도성유적.지금의 허난성 뤄양시에서 동쪽으로 약 15킬로미터 떨어져 있습니다.서주 초에 이곳에 성을 쌓고 성주라고 불렀습니다.락수이의 북쪽에서 전국을 락양이라고 불렀고, 양한은 이로 인해 조위는 이후 뤄양으로 바뀌었습니다.동한 광무제 건무 원년(서기 25년)에 이곳에 도읍을 세웠습니다.
헌제(献帝) 초평(初平) 원년(190) 장안(長安)으로 옮기면서 위양궁묘(雒陽宮廟)와 민가가 소실되었습니다.위문제(魏文帝) 황초(黃初) 원년(22)에 한나라의 옛 터에 도읍을 세웠고, 서진(西晋)이 뒤를 이어 영가(永嘉) 5년(311)에 이르러 낙양(洛陽)이 전란(戰亂)으로 파괴되었습니다.북위(北魏) 효문제(孝文帝) 태화(太和) 19년(495)에 평성(平城)에서 이곳으로 천도(迁都)를 옮겼고, 대규모 개축으로 도성의 형태가 바뀌었습니다.
효정제 천평 원년(534)에 업성으로 천도하였고, 원상 원년(538)에 낙양성은 다시 전화에 의해 파괴되었습니다.수나라와 당나라의 낙양성은 서쪽으로 옮겨져 현재 낙양시 일대가 되었고, 한나라와 위나라의 낙양성은 폐기되었습니다.1961년 국무원은 국가 중점 문화재 보호 단위로 발표했습니다.
▲ 내성의 동북성벽 단면은 1962년부터 중국과학원 고고연구소가 오랫동안 이곳에서 전면적으로 발굴하여 성의 평면형상, 성벽의 규모, 성문과 성내 주요 거리의 분포, 무고와 태창의 위치를 규명하고, 성문과 거리의 분포에 따라 동한 남궁과 북궁의 범위를 추정하여 북위 궁성의 주요 유적을 발견하였습니다.
발굴 작업의 초점은 성남의 명당, 벽옹, 영대에 맞춰져 있는데, 이들은 중국 고대 도성 특유의 예식 건축물이고, 영대는 당시 천문대였습니다.최고 학부인 태학의 유적도 탐사 및 부분 발굴을 통해 석경의 잔해들이 많이 출토되었습니다.
▲ 동한 낙양성 평면복원도 동한 락양성 전체는 평면이 약간 직사각형이고, 남북조약 한대에는 9리, 동서약 한대에는 6리라고 해서 '96성'이라고 불렀습니다.
성벽은 흙으로 다져 14~25m 두께로 쌓았습니다.동·서·북 3면의 성벽은 유적이 남아있고, 남쪽 성벽은 낙하개선으로 인해 유적이 파괴되었으나 그 자리를 복원할 수 있습니다.
실측하고 복원한 결과, 동쪽 성벽의 길이는 약 4,200m, 남쪽 성벽의 길이는 약 2,460m, 서쪽 성벽의 길이는 약 3,700m, 북쪽 성벽의 길이는 약 2,700m, 총 길이는 한나라 때 약 31리였습니다.성 전체에 모두 12개의 성문을 설치했습니다.
동쪽에는 상동문·중동문·秏문이 3개, 서쪽에는 상서문·옹문·광양문이 3개, 남쪽에는 개양문·평성문·소원문·진문이 4개, 동쪽에는 곡문·하문이 2개 있습니다.샤먼 유적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으며 시추 후 3개의 출구가 있으며 다른 성문도 마찬가지일 것으로 추측됩니다.
▲ 동한 낙양성24길의 추정 도성 내 주요 거리는 모두 성문으로 통합니다.거리는 서로 교차하여 24개의 섹션으로 나뉘는데, 이는 문헌 기록에서 말하는 '낙양 24거리'일 수 있습니다.시추에 따르면 거리의 폭은 약 20~40m.거리마다 세 갈래로 갈라져 있고, 유공경(唯公卿), 상서(尙書) 등 신하들이 가운데 길을 걷고, 보통 행인들이 좌우로 다닌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 그러나 비전은 복원도성의 주요 궁궐을 남궁과 북궁으로 상상하고 있습니다.기록에 따르면 남궁은 서한 때 어느 정도 규모가 있었다고 합니다.건무 원년에 광무제는 낙양에 도읍을 정했지만, 먼저 남궁에 거주했지만 전은 아니었습니다.이후 증축을 거듭하여 건무 14년에 남궁에 가장 큰 규모의 전당을 지었습니다.
남궁의 유적은 발굴되지 않았지만 거리의 분포로 보아 중동문거리 남쪽, 秏문인 광양문거리 북쪽, 개양문거리 서쪽, 소원문거리 동쪽, 평면은 직사각형으로 남북 약 1,300m, 동서 약 1,000m의 위치에 있는 것으로 판단됩니다.북궁은 명제(明帝) 영평(永平) 3년(서기 60)부터 영평(永平) 8년까지 지어졌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북궁의 덕양전은 '만인을 돌보고, 폐하는 두 장'으로 규모가 웅장합니다.북궁의 위치는 또한 거리의 분포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중둥먼 거리의 북쪽, 진먼 거리의 동쪽, 구먼 거리의 서쪽, 북쪽은 성벽에 가깝고 평면은 직사각형이며 그 범위는 남궁보다 큽니다.기록에 따르면 남북의 두 궁은 7리 떨어져 있고 복도로 연결되어 있습니다.실제 조사에 따르면 칠리는 일리의 잘못으로 보아야 합니다.
▲ 한웨이의 낙양 옛 도시 유적 와당 탐사 작업은 태창과 무기고가 모두 성의 북동쪽 구석에 있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기록에 따르면 상공업 지역에는 난시, 마시, 진시가 있습니다.남시는 남쪽 교외, 마시는 동쪽 교외, 진시는 성내 남궁의 북서쪽에 있습니다.
서진 판웨의 '한거부'는 '면교후시(面郊後市)'라고 하는데, 이는 금시의 위치를 남궁의 북쪽을 가리킵니다. 웨이진뤄양청
▲ 조위 서진 낙양성 평면 복원도 조위는 동한 락양성의 폐허 위에 도성을 재건하였는데, 그 규모는 동한을 넘지 않습니다.서진시대 성의 형제와 배치도 크게 변하지 않았습니다.하지만 위 명제 조叡는 조부 조조가 업성 서북부에 동작대를 쌓는 등 '삼대'(업성 유적 참조)의 경험을 본떠 낙양성의 북서쪽 구석에도 김용성을 축조했습니다.
탐사에 따르면 김용성은 남북으로 약 1080m, 동서로 약 250m로 나뉘어져 있으며, 각기 다른 길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사실 군사적인 성곽으로 북쪽 邙산을 끼고 있어 지세가 높고 낙양 전 성을 내려다볼 수 있어 고지대 역할을 하였으며,
서진 말기 '영가의 난'인 낙양쟁탈전에서는 서로가 반드시 다투던 곳이라 하여 '낙양루'라고 불렀습니다.위진시대에는 전란이 잦았기 때문에 군사적인 필요에 의해 낙양성의 서북성벽 외벽과 김용성 외벽에 많은 돈대를 설치하였는데, 그 형태와 효용이 후대의 '말의 면'과 같다는 것이 탐사연구에서 입증된 바 있습니다.
▲ 조조가 세운 업성 평면도 북위의 낙양성 북위는 낙양에 도읍을 세웠고, 여전히 동한과 위진의 성벽을 사용하고 있습니다.동한에서 온 12개의 성문 중 개양문을 제외하고는 모두 위진이나 북위 때 이름을 바꿨습니다.
상동문은 건춘문, 중동문은 동양문, 秏문은 청양문, 상서문은 병문, 옹문은 서양문, 광양문은 서명문, 평성문은 선양문, 진문은 진양문, 곡문을 광막문으로 개칭하고 하문을 대하문으로 개칭하였습니다.
11개의 성문은 모두 한대 터에 재건되었고, 서양문만 한대의 옹문 터에서 약 500m 북쪽으로 옮겨졌습니다.또 효문제가 처음 낙양에 갔을 때 서성벽 북단에서 김용성 가까이에 승명문을 새로 열어서 성문이 13개로 늘었습니다.
▲ 병문유적
▲ 병문복원도 북위 낙양성의 가장 중요한 변화는 동한 이래 남북 양궁의 제도를 폐지하고 단일 궁성을 쌓았다는 점입니다.탐사에 따르면 궁성의 위치는 성의 북쪽에서 약간 서쪽으로 치우쳐 있으며, 한나라와 위나라의 북궁을 기반으로 건설되었습니다.
평면은 직사각형으로 사방으로 벽을 쌓았는데, 동쪽과 서쪽 벽이 각각 1400m, 남쪽과 북쪽 벽이 각각 660m입니다.남쪽 벽 서쪽 끝자락에는 커다란 문터가 있는데, 바로 궁성의 정문인 병문(阊門)과 문(門)이 닫힌 곳입니다.정전인 태극전은 궁성의 앞부분에 서낭과 문간을 맞대고 있으며, 기단의 남북 길이는 약 60m, 동서 너비는 약 100m로 규모가 매우 큽니다.
▲ 한위낙양고성터
▲ 영녕사 탑기유적은 궁성의 범위와 개별 성문의 위치가 바뀌면서 성 안의 거리도 많이 바뀌었습니다.남궁은 폐허가 되었고 광막문과 평창문 사이에 성 전체를 종단하는 남북방향의 큰길이 있습니다.
옹문은 이미 폐허가 되었고, 옹문 거리도 존재하지 않습니다.승명문을 새로 열어서 이 문이 성안으로 통하는 거리를 늘렸습니다.건춘문과 병문 사이에 성 전체를 가로지르는 동서방향의 큰길이 있는데, 궁성을 남북으로 나누어 남반부는 조회가 있는 곳이고 북반부는 침전이 있는 곳입니다.
▲ 궁성터 자리는 새로 지은 서양문이 동양문과 바로 마주보고 있었기 때문에 동한 이래의 중동문 거리는 연장되어 서양문과 동양문 사이를 관통하게 되었고, 궁성 남쪽 담장 밖을 통과하여 성 전체의 경계선이 되었고, 북쪽에는 황가의 궁궐과 정원사가, 남쪽에는 관서와 사원, 귀족의 저택이 분포되어 있었습니다.궁성의 남문인 병문(阊門)이 남성의 선양문(宣陽門)과 마주보고 있기 때문에 병문(阊門)에서 선양문(宣陽門)에 이르는 남북방향의 거리인 퉁타(銅驼)거리는 성 전체의 중심축이 되었습니다.
종묘, 사직과 태위부, 사도부 등 고급 관서들이 동타거리 양쪽에 배치되어 있고, 유명한 영녕사 터는 거리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 북위 영녕사 탑기 출토 불상 안면부
▲ 북위 영녕사지 출토 흙 인형 중형 보살 두상에 따르면 선무제 경명 2년(501) 낙양에 외곽성을 쌓고 '동서 20리, 남북 15리'로 범위가 넓다고 합니다.외곽성 안에서는 320개의 네모난 방들로 나뉘어져 있는데, 각 방들은 사방에 벽을 쌓고, 각 변의 길이는 300보, 즉 당시의 1리였습니다.동한 이래의 옛 성은 북괴낙양의 내성이 되었습니다.
큰 도시', '작은 도시', '쓰퉁시'와 같은 상공업 지역은 모두 궁성 남쪽에 위치하여 '주례·고공기'에 기록된 '면조후시(面朝後市)'의 전통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요약하자면, 북위 낙양성의 형태와 배치는 양한 이래의 도성과 비교했을 때 획기적으로 변혁되어 수나라의 대흥성, 당나라의 장안성과 낙양성에 선례를 남겼습니다.
남교의 예물 건축과 태학
▲ 벽옹 평면도 동한의 벽옹, 명당, 영대는 모두 광무제 건무 중원 원년(서기 56)에 세워졌습니다.벽옹은 개양문 밖 대로의 동쪽에 평면이 사각형이고 각 변의 길이가 170미터이며 사방에 담장을 쌓았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벽옹 사면의 문 밖에 도랑이 있고 그 위에 다리가 놓여 있습니다.조위와 서진은 동한의 옛 터에 벽옹을 재건했으며, 진 무제의 삼림벽옹비와 비좌가 출토되었습니다.
북위가 옹화를 수리했지만 아직 완성하지 못했습니다.명당은 개양문 밖대로의 서쪽, 평성문 밖대로의 동쪽, 벽옹에서 동쪽으로 약 150m 떨어져 있습니다.유적지는 각 변의 길이가 약 240m인 사각형이며, 그 안에 지름 62m의 원형 받침대가 본건물입니다.
▲ 태학유적의 원형건물지와 보가구조로 미루어 명당의 이러한 형태는 『수경주(水經注)』의 '기조를 찾아 그 위에 원 아래를 둔다'는 기록과 일치합니다.서진과 북위 모두 명당을 재건했으니, 동한의 옛 명당터 위에 있어야 합니다.
영대는 평성문 밖대로의 서쪽, 명당에서 동쪽으로 약 80m 떨어져 있습니다.유적지는 기본적으로 동서 220m, 남북 200m의 네모난 평면을 가지고 있으며, 사방으로 담장을 쌓고 중앙에 높은 단이 있고 기부는 약 50m 정사각형이며 잔존 높이는 약 8m입니다.가옥은 높은 단의 둘레에 상하 2층으로 지어져 있습니다.
아래층은 회랑으로 되어 있는데, 회랑 밖에는 자갈로 깐 '산수'가 있습니다.상층은 하층보다 1.86m 높으며 오르막길이 있고 각 면에 5칸씩 긴 벽돌로 땅을 깔 수 있습니다.
동쪽 가옥의 벽면은 청색으로, 서쪽은 흰색으로, 남쪽은 붉은색으로, 북쪽은 검은색으로 칠한 사신(四神, 청룡·백호·주작·현무)의 분주사방(分主四方)의 학설에 따라 설계한 것입니다.조위와 서진은 모두 동한의 영대를 사용합니다.서진 말기의 전쟁으로 영대가 심각하게 파괴되어 북위 때 폐기되었습니다.
▲ 영대유적 태학유적은 범위가 넓습니다.탐사 및 시굴을 통해 주요 유적은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일부는 벽옹의 북쪽, 평면은 약간 직사각형, 동서 약 200m, 남북 약 100m, 부근은 석경 조각이 발견되어 동한태학의 주요 부분으로 볼 수 있고, 다른 일부는 그것의 북동쪽 약 100m에 유적이 잘 보존되어 있고 평면도 직사각형, 남북 약 200m, 동서 약 150m에 사방에 벽을 쌓았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동한의 태학은 광무제 건무 5년에 지어졌고, 이후 여러 차례 증축을 거쳐 순제 양가 원년(132)에 완공되었으며, 태생은 3만여 명에 달했습니다.영제 희평 4년(175년), 입석경(立石經)이 태학(太學)에 이르러 '희평석경(熹平石經)'이라 하였습니다.
한나라 말 동탁이 낙양궁묘를 태우니 태학에 재앙이 닥칠 것입니다.위 문제 황초 5년에 동한의 옛 터에 태학을 중건하고, 정시에 석경을 새로 세워 '정시석경'이라 불렀습니다.서진 초년에 한나라와 위나라의 통치하에 태학이 흥했고, 함녕 2년(276)에 국자학을 따로 세워 태학과 공존했습니다.
▲ 한위낙양고성지 출토 위진 유물
▲ 한위낙양고성지 출토 북위 유물
분류:고고 표제어
본문 태그:낙양성 동한 위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