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게시글
게시글 본문내용
|
다음검색
좌측 부터 : 돌샘 이길옥 이사님(호남), 갈령 이수한 이사님(부산), 석향 노민환 시인님(경남), 베틀산 이수문 시인님(부산), 솔숲 이석락 시인님(부산,경남 지부장), 청호 정용장 감사(부산), 정선수 시인님(호남 지부장)
환벽당(環碧堂) 돌계단이 있는 언덕을 오르니 거대한 태산목(泰山木)이 잎을 지천에 깔고 우리 일행을 반긴다. 담양 가사문화권역에 있는 환벽당은 광주호 상류 충효 동쪽 높다란 언덕위에 자리하고 있다. 환벽당은 홍문관 교리, 나주 목사 등 13개 고을의 성주를 역임한 후 고향으로 돌아온 사촌(沙村) 김윤제(1501~1572)가 창건하고 육영에 힘쓰던 곳인데, 송강 정철, 서하당 김성원 등이 대표적인 제자다. 부근에 위치한 용소는 환벽당 및 창계천의 깊은 물웅덩이를 말하며 이 곳은 송강 정철에 대한 전설이 얽힌 곳이기도 하다. 전설에 의하면 환벽당에서 사촌이 낮잠을 자는데 꿈에 환벽당 앞 용소에서 청룡이 하늘로 승천하는 것이었다. 꿈에서 깨어나 이를 괴이히 여겨 하인을 시켜 살펴보라 하였는데 어린 동자가 목욕을 하고 있었다. 이 동자가 바로 집안이 역적으로 몰려 피신하는 길에 잠시 쉬고 있던 송강 정철이다. 사촌(沙村)이 송강을 불러 문답하는 중에 그 영특함에 놀라 자기 슬하에 두고 학문을 닦게 하여 송강 나이 17세에 그를 외손녀 사위로 삼고 정철의 뒷바라지를 했다. 용소옆에는 송강이 이곳에서 낚시대를 드리우고 고기를 잡았다는 조대가 있다.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 1호) 환벽당 앞에는 넓은 공터와 연못터의 형태가 있었는데, 그 옛날에는 건물과 연못이 있었던듯 싶다. 환벽당은 조선조 중엽, 관직에서 물러난 김윤제가 고향인 충효리로 돌아와 죽림이 우거진 아름다운 이곳에 정자를 짓고 세월의 수상함을 지켜보며 세월을 기다리던 곳이다. 이곳에서 김윤제(1501~1572)가 송강 정철(1536~1593)을 처음 만났던 전설같은 이야기가 아름답게 전해온다. 자미탄은 충장공 김덕령장군이 태어난 충효동뒤 정자인 환벽당과 지실마을이 마주하는 곳에 흐르는 물길이다. 사람들은 자미탄언덕의 환벽당을 죽리청강(竹裏聽江) 호남지경승(湖南之景勝)의 아름다운 경관이라고 했다. 환벽당과 자미탄사이 언덕에 대숲이 무성하여 자미탄 자갈밭을 흐르는 물소리가 마치 옥이 구르는 소리처럼 청아하게 들렸다 전한다. 배롱나무의 한자말이 '자미'이고 개울의 옛말이 '탄'이다. 이곳 자미탄 개울가 따라서 배롱나무가 수 없이 붉은 꽃을 피웠고 맑고 청아한 계곡물은 옥소리를 내며 흘러갔다. 옛 선인들은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시문을 지었고 풍류를 즐겼다. 자미탄의 지금 이름은 '창계천'이다. 정철이 목욕했다는 '용소'는 지금도 예전 그 자리 환벽당아래에 창계천에 남아있지만, 광주댐 담수호가 만들어지면서 자갈밭을 흐르던 그 맑은 물소리는 간곳이 없어져 버렸다./벅수 김윤제는 광주광역시 충효동 태생으로, 호는 사촌(沙村)이다. 1528년 진사가 되고, 1532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갔다. 그후 나주목사 등 13개 고을의 지방관을 역임하였고, 을사사화의 영향으로 관직을 떠난 뒤 고향으로 돌아와 환벽당을 짓고 후학 양성에 힘을 썼다. 자미탄(창계천) 건너 마주 보이는 곳에 식영정 '서하당'이 자리하고 있다. 서하당(김성원)과 사촌관계인 김윤제는 무척 친하게 지내어 자미탄위에 무지개 다리를 놓고 수없이 오고갔다 한다. 물론 그 다리는 지금은 없어져 버렸다. 그의 제자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로는 정철(鄭徹)과 김성원(金成遠) 등이 있고,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김덕령과 김덕보 형제는 그의 종손으로 역시 김윤제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특히, 정철은 16세 때부터 27세에 관계에 나갈 때까지 환벽당에 머물면서 학문을 닦았던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환벽당 아래에 있는 조대(釣臺)와 용소(龍沼)는 김윤제가 어린 정철을 처음 만난 사연이 전하는 곳이다. 16세의 정철을 처음 만난 김윤제는 정철이 27세(1562년)에 이르러 문과에 장원급제할 때까지 온갖 뒷바라지를 하였다. 정철이 큰 인물(용)이 되도록 지극한 후견인 역활을 다 하였던 것이다. 건물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의 목조와가(木造瓦家)이며, 당호는 신잠(申潛)이 지었다. 송시열이 쓴 제액(題額)이 걸려 있고, 임억령(林億齡)·조자이(趙子以)의 시가 현판으로 걸려 있다. 비교적 순탄하던 정철 집안은 그가 아홉 살 적에 시집 간 누이네가 을사사화(乙巳士禍)에 연루되며 고초를 겪게된다. 정철의 부친 '정유심'도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귀양을 가고 풀려난뒤 처가가 있는 전남 창평으로 낙향하여 현재 고서면 원강리에 머물게 된다. 유배가(流配家)의 자손이 되어 16세까지 틀잡힌 학문을 못하던 정철이 부귀와 영예를 얻게되는 기초를 쌓은 곳이 환벽당(環碧堂) 이다. 정철은 이 곳에서 김인후(金麟厚), 기대승(奇大升) 등 명현들을 만나 그들에게서 학문과 시를 배우게 된다. 후에 김윤제는 그를 외손녀와 혼인을 하게 하고, 그가 27세로 관계에 진출할 때까지 모든 뒷바라지를 해주었다. 현재 환벽당은 정철의 4대손 정수환(鄭守環)이 김윤제의 후손으로부터 사들여 연일 정씨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 주변에 '맥문동'이 만발하여 지친 눈을 위로해준다. ▲ 환벽당 입구에 있는 '조대釣臺' 자미탄을 건너 환벽당 입구에 들어서면 낚시하기 꼭 알맞은 큰 바위가 하나 있다. 이것이 '성산별곡'에 나오는 조대이며, 그 맞은편에는 이게 걸맞게 매운탕집이 자리잡고 있다. 왼쪽으로는 환벽당 흙담이 길다랗게 있고 오른쪽에는 자미나무(배롱나무)가 붉은 빛을 뽐내고 있다. 그 너머로 조대쌍송이 우뚝 서 있다. 그 길위로 햇살이 벌써 뜨겁게 쏟아진다. 용소에 풍덩 들어가 멱이라도 감고 싶은 충동이 인다. 이렇게 이곳 자미탄 주변으로 당대 유명한 문인들이 모여들었으니 풍성한 시회詩會가 어찌 없었겠는가? '성산계류탁열도'로 그려진 것이 "송강집" 부록에 실려 있다. 뜻을 새기자면 '별뫼 계곡 버드나무 아래서 더위를 씻는다'라 해석할 수 있겠다. /벅수
5.18. 민주항쟁추모묘지공원(광주)
5.18. 민주항쟁추모묘지공원(광주)
|
첫댓글 섬바우 오라버니![!](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54.gif)
좋은 곳 다녀 오셔서 이렇게 자세하게 설명 까지 하여 주시는라 정말 수고 하셨습니다 감사 합니다 *^^*
아름다운 계절에 아름다운 만남이 더욱 아름더워 보이십니다 인생을 참 성공적으로 살으신것 같습니다 더불어 지내시는 모습 더욱 아름답고요 곳곳에 궁금증없이 장문으로 안내해 주심 고마운 마음으로 눈과 마음이 즐거웠습니다 건강하십시오 .
한번 가보고 싶은 코스였는데 가만히 앉아 가을여행을 했네요. 즐감하고 갑니다.
찬찬하게 설명해주신 귀한역사공부에 감사드림니다.늘 멋진모습으로 건강하세요^^
찬찬하게 설명해주신 귀한역사공부에 감사드림니다.늘 멋진모습으로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