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외입처 일체가 법에서 중요함을 환기시키는 <우다나> 경문입니다.
"생명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아는
바히야는 붓다께서 탁발하는 길을 막고서 막무가내로 법을 설해달라고 청했다.
붓다는 길거리에 서서 말씀하였다.
“바히야여, 보이는 것을 보기만 하고 들리는 것을 듣기만하고,
느끼는 것을 느끼기만 하고,
인식하는 것을 인식하기만 한다면,
그대는 그것과 함께 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과 함께 하지 않을 때,
거기에는 그대가 없다.
거기에 그대가 없을 때,
그대에게는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고
그 둘 사이의 어떤 세상도 없다.
이것이 고통의 소멸이다.”
가르침의 의미를 사유하며 걸어가기를 멀잖아 바히야는 사거리 길거리에서 마차에 치여죽었다.
이를 전해들어신 부처님은 바히야는 그 죽은 자리에서 아라한이 되었다.고 말씀하셨다"
<우다나 바히야 경, U28; 법구경 게송 101번 주석서>
생명이 위독하여 더이상 구차제정의 선정을 닦을 수가 없다는
바히야는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내외입처에서의 형성과 그침에 절실히 매진하여
무상 중도를 깨달아 아라한이 되었다는 가르침 이야기이다.
그는 붓다의 제자들 중에서 가장 빠르게 깨달은 자 중에서 제일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바히야 뿐만이 아니라 사리뿟따도 보름만에 아라한이 되었고,
목갈라나는 일주일만에 아라한이 되었다고 한다.(경전 주석서)
그리고 경전에는 깨달음을 얻는 사람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고 있다.
“비구들이여, 세상에 네 부류의 사람이 있다.
무엇이 넷인가?
설명하는 즉시로 법을 관통하는 자(욱가띠딴누),
자세한 설명으로 법을 관통하는 자(담마아비사마야),
선지식에 의지해서 섬기고 공경하고 법문을 듣고 질문하고 열심히 수행해서 법을 관통하는 자(네이야),
많이 듣고 많이 읊고 많이 호지하고 많이 설명하더라도 태생적으로 법을 관통하지 못하는 자(빠다빠라마)이다.”
<예리한 이해 경, A1.133>
첫댓글 바히야 경을 읽고 있으면 마치 양자역학 내용을 듣는것 같습니다. 관찰자가 없으면 존재하지 않는다... 보여지는것만 있고 들려지는 것만 있고 느껴지는 것만 있다면 .... 존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세상도 저세상도 그 둘 사이의 어떤 세상도 없다... 과학이 발달하여 과학이 부처님 설법을 증명하고 있는 세상에 왜 해탈과 열반은 저멀리에 있는것처럼 남의일처럼 보일까요...2500년의 문화와 언어의 차이 때문 일겁니다. 바히야경 좋아하는 경전중에 하나입니다.
부처님 시대에 부처님은 자신이 할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으로 근기에 맞게 쉽게 설명하였고 숨긴것은 1도 없었습니다.아트만은 없다. 절대적으로 불변하는 존재는 없다..
형성된것은 무상한것이다. 태어난것은 소멸한다. 열반의 세계란 이세상도 저세상도 그 둘 사이의 어떤 세상도 아니다. 욕계,색계,무색계의 세계도 그걸 떠난 세계도 아니다.
제가 오늘 dhamma wheel이라는 영어불교사이트에 가입했습니다. 불교토론사이트인데요 관심있는 분들은 가입해 보세요.
우연일까요 바히야경을 인용해서 올렸었는데 오늘 mindsati님이 여기에 올려주셨네요.
식 vinnana라는 게요 그냥 "아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이 됩니다. 윈냐나는 사물을 분별하는 마음이 일어남과 동시에 함게 일어나는
아만심입니다 . 즉 볼때 보는 자아가 있다는 생각이 함께 드는 것 그게 윈냐나입니다. 오늘 바히야경이 그걸 말씀하는 것이구요
볼때는 보는 것만이 있는 것이지 거기에 보는 자는 없다는 것! 그게 윈냐나교리의 핵심입니다. 무명을 조건으로 한 상카라 때문에 윈냐나가 생기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