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강 수필에서 기교
문학 창작에는 상상력이 전제되어야한다. 왜냐하면 마음속에 형상을 그리는 의도(意圖)가 선행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언어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첫째로 사람과 사람 사이에 통용되는 언어로서 말과 글이 있다. 여기서 언어는 사람 사이에 약속된 언어로서 협의(狹義)의 개념에서 언어이다. 둘째로 우주 만물을 아우르는 개념의 언어로서 대자연에는 무진장한 언어가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광의(廣義)의 개념으로써 우주에서 보내오는 신호를 포착하는 능력은 예술인이나 종교인들과 같이 특별한 사람들만이 지니고 있다. 그것은 해독 가능한 사람만이 읽을 수 있는 영감에 가득 찬 언어이고 계시적인 언어라고 할 수 있다. 문학에서는 그것을 시어(詩語)라고 했으나 지금은 문학어라고 한다.
시어(詩語)라고 하는 것은 인간 사회에서 통용되는 일상적인 언어와는 그 차원이 다르다. 일상적인 언어라고 하는 것은 의사의 전달로서 만족하지만, 예술적 언어는 어떤 계시적 언어나 영감적인 언어까지 포함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달빛이 풀잎을 연주하는 것도 대자연의 언어요. 물소리, 바람소리, 솔바람 소리, 그 바람의 작용에 의해서 “대나무 그림자가 마당을 쓰는데 티끌 하나 일어나지 아니하고, 달빛이 물속을 뚫고 들어가는데 흔적 하나 없다.”는 선시(禪詩)도 넓은 개념으로서의 언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좋은 시를 쓰려면 이러한 넓은 개념으로서의 언어를 포착해야 한다.
태양의 미소와 바람의 애무 등등 인간 사회에서 간단히 통용 될 수 없는 언어를 붙들어서 창작하게 될 때 그러한 시는 보다 영원성을 유지하게 될 것이다. 언어의 안테나, 그것은 높이 올릴수록 좋다. 높은 이념의 푯대를 세운 다음에 충실한 언어의 직공으로서 효과적인 언어 조립에 힘 써야 할 것이다.
언어의 안테나를 높이 올려야 하는 까닭은 문학이 상식적인 범주의 것이나 사실의 기록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픽션(fiction)을 통해서 삶의 진실을 밝히게 되는 창조적인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 황송문, “문장표현의 기술”에서 ===
문장력과 묘사의 기교력을 기르기 위해서는 첫째로 사물의 성격을 파악하고, 둘째로 적절한 언어를 제자리에 끼워 넣는 기술이 필요하다.
문학적 기교는 명료하면서도 모호하다. 수학과 논리학과 같은 자연과학이 ‘왜’에 대한 해답이라고 한다면, 문학은 ‘어쩐지’라는 느낌의 담론이다. 여기서 ‘어쩐지’는 미심쩍지만 감성으로 공감하고 이성(理性)으로 동의하는 마음이다.
13.1 심상과 상징
심상(心象 : image)은 감각적으로 사람의 정서에 호소하여 감정을 풍부하게 일으키고, 상징은 지적인 연상에 호소하여 사물에 대한 인식을 높인다.
이미지(image)는 글을 그림으로 바라보게 하는 촉매와 같다. “시는 말하는 그림”이라고 말 하듯이 심상은 사물을 사람의 마음에 감각적으로 재생시키도록 자극하는데 사용된다. 예를 들면 “향기 나는 머리카락”, “부드러운 바람”, “쓰라린 고통”, “감미로운 키스”, “끓어오르는 격정” 따위이다.
이미지에는 시각심상, 후각심상, 미각심상, 청각심상, 촉각심상 등이 있다.
1) 시각심상
각시붕어는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초례청 앞에 선 수줍은듯하면서 발랄하지만 산란을 하면 온몸에 화사하게 퍼진 혼인색이 점점 사라진다. 해산한 여인처럼 풀어 헤쳐지고 약간은 피로한 듯 느껴진다. 내년 봄 진달래 개나리가 필 그때쯤이나 화사한 혼인색이 다시 드러날 것이다. 그때가 기다려진다. === 강석진, “각시붕어”에서 ===
2) 후각심상
장롱 서랍을 정리하다 깜짝 놀라고 말았다. 조그만 보퉁이 속에 고이 싸여 있는 배냇베개를 발견한 것이다. 십 수 년 전 내가 그렇게 간직해 놓은 것인데 그동안 잊고 있었던 것이다. 보자기를 푸는 순간 향긋한 배냇냄새가 황홀하게 전해왔다.
이 세상에 나만이 아는 신비와 행복! === 서경희, “배냇베개”에서 ===
3) 미각심상
사랑을 말할 때 가장 요긴한 것이 바로 웃음일 것이다..... 내가 그 웃음의 암시를 깨닫지 못하고 떡 접시나 계속 만지고 앉아 있었더라면 큰 손해를 볼 뻔하였다. 새 잎이 피는 냄새도 싱그러운 플라타너스의 등치에 기대어 순식간에 먹어 치우는 햇토마토의 맛을 영영 알지 못할 뻔한 것이다. === 이화련, “웃음”에서 ===
4) 청각심상
어디선가 들려오는 물소리, 점점 더 가까이 들려온다. 내 귀에선 쩌렁쩌렁하게 울린다. 마치 교향악단이 연주하기 전에 저마다의 악기를 점검하는 소리처럼 요란한 물소리와 풀벌레소리가 불협화음을 이루었다. 자신의 생각만 주장하며 상대의 말이나 감정을 무시해 버렸던 나의 처사로 우리 집에서 나는 소리도 저렇게 들렸으리라. 찬 물줄기가 명치끝에서 ‘쏴아’ 내리치는 기분이다. === 송유경, “개울가에서”에서 ===
5) 촉각심상
아무튼 봄바람이 옷깃 속으로 스멀스멀 기어들던 날. 개암사의 만발한 매화를 턱 올려다보며 갱내로 들어선 날. 그 백매는 매창(梅窓)의 현신인가 싶었다. === 김용옥, “매화송(梅花頌)”에서 ===
심상(心象 : image) ⇨ 시에서 심상은 시의 특징 중 하나인 구체적 형상화를 가능하게 해주는 요소이다. 구체적 형상화란 우리가 관념적으로 알고 있는 지식과 같은 것들을 오감을 통해 지각할 수 있는 형태로 나타내준다는 말이다. 즉 심상은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동원되는 모든 물상을 의미하는 포괄적인 개념이다. 이 때, 그 심상이 원래 나타내고자 하는 추상적 개념은 원관념(tenor)이 되고, 그 관념을 전달하는 이미지는 보조관념(vehicle)이 된다. 예컨대 '내 마음은 호수요' 에서 마음은 추상적인 관념이며 원관념이다. 이 원관념을 표현하기 위해 끌어온 물상인 호수가 곧 심상이요, 보조관념이다.
상징(symbol)은 “마크, 표지, 토큰, 앰블럼(emblem)” 따위의 어원에서 출발한다. 예를 들면 “별, 양, 울타리”를 열거할 수 있다. 여기서 별은 “높기 때문에 장군이 될 것이고, 양은 순진한 사람이 되고, 울타리는 집을 지키는 가장이 될 수 있다.
상징은 원관념이 생략되고 보조관념으로 구체적인 대상을 제시하는데, 가장 가시적(可視的)인 물상(物象)으로 비가시적(非可視的)인 관념을 표시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아주 효과적인 수단이 된다.
시인이나 작가는 문학적 환경에서 어떤 대상이나 개념 사이에서 통용되고 있는 일반성을 이용하여 함축적인 효과를 높이려고 한다. 예를 들면 독수리라고 하면 오만, 용맹, 고독 따위를 떠올리고, 석양이라면 좌절, 노령, 절망을 연상하는 것으로서 의미의 선택은 시인이나 작가가 자신의 개인적인 체험에 좌우된다.
그런데 상징은 각각의 작품에서 다른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예를 들면 호랑이가 어떤 작품에서는 악으로 등장하지만, 다른 작품에서는 자연의 수호자로 표현될 수도 있다.
아래 글은 노쇠한 노목이 작가의 분신으로 형상화되었다. 작가의 이형동체(異形同體)로서 나무는 연륜, 각질, 형태, 구멍에서 육신의 나이, 피부, 모양이 일치할뿐더러 구멍에 들락거리는 벌레마저 결핵균에 일치되었다. 작가가 바라보는 노목이 말년의 감회와 비감을 전달해 준다.
사람이 60을 넘기면 노목의 껍데기마냥 피부에 이상한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손잔등이 거칠어지고 검은 티들이 덮이고, 얼굴에 검은 주근깨들과 검버섯이 돋고, 어깨와 등에도 많은 주근깨와 반점이 덮인다. 그뿐인가. 폐를 앓았던 나의 허파에는 구멍이 뚫어졌던 곳도 있을 것이고, 그 독한 파스와 아이나의 복용으로 위장은 헐고, 나른해졌을 것이다. ..... 이제 나의 몸속에서는 이름도 모를 눈에 보이지도 않는 벌레들이, 나의 오장육부를 쑤시어 먹는 날에는 나는 저 노목과 같이..... 열매도 보지 못하고 죽어야 하지 않는가... 나도 죽고 저 노목도 언젠가는 다 죽어야 한다. === 한흑구, “나무”에서 ===
13.2 직유와 은유
대상이나 내용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유사성이 있는 다른 사물에 견줘 보는 경우가 더러 있다. 이렇게 표현하는 방법을 비유법이라고 한다.
이 비유법에는 첫째로 “소라 껍데기 같은 나의 귀가 바닷소리를 듣는다.”와 같은 직유법, 둘째로 “내 귀는 소라껍질, 바닷소리에 귀를 기울인다.”와 같은 은유법이 있다. 두 가지 방법 모두 원관념과 보조관념이 함께 사용되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은유(隱喩 : metaphor)는 “무엇은 무엇이다.”라는 식으로 매개어 없이 앞의 것과 직접 결합하는 방법이다. 이는 비교하기보다는 동일체로 비유함으로써 다른 부류의 특성이나 행동을 나타내므로 직유보다 난해(難解)하지만 훨씬 세련된 기법이다.
은유에는 첫째로 “너는 고양이먹이를 두고 왔군.”이라는 식의 함축적 은유, 둘째로 “너는 소다.”라는 식으로 표현하는 명시적 은유가 있다. 이 은유법은 수사법(修辭法 )의 일종으로 광범위하게 많이 쓰이는 기법이다.
덧없는 지난 1년이란 세월에 어린 도향아, 어떻게 지냈으며 무엇 하러 살았느냐?
너의 지나간 1년을 열락(悅樂)이란 화환과 환희라는 레이스로 꾸미고도 남았느냐. 비애라는 흑포(黑布)와 탄식이란 끈으로 싸고서 동였느냐.
눈물이란 구슬이 너의 가슴에 사무치도록 떨어져 박히더냐. 이별이란 메스가 너의 마음을 쓰리도록 쪼개더냐? === 나도향, “지난 일 년의 알쏭달쏭 수놓은 돗자리”에서 ===
직유(直喩 : simile)는 두 가지의 사물을 비교하여 형용하는 수사법으로서 주(主)가 되는 사물의 뜻에 접근하는데 목적이 있다. 예를 들면 ‘떡두꺼비 같은 아들’, ‘대쪽 같은 선비’,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먹어치운다’ 따위 같은 표현이 예이다.
직유는 원관념과 보조관념을 대조시켜 원관념을 부각시키는 명시적 비교이다. 이는 “듯, 처럼, 인 듯, 인 양, 마치, 이듯, 듯이, 듯하다....”와 같은 말로 결합해 주는 방법이다.
네 팔자나 내 팔자나 잘 먹구 잘 입구, 소라반자 미닫이 각정장판, 샛별 같은 놋요강, 원앙금침 잣모 베개에 깔구 덮구 잠자기는 삶은 개다리 뒤틀리듯 뒤틀렸으니, 웅틀붕틀 멍석자리에 깊은 정이나 들이세. === 김유정, “강원도 여성”에서 ===
13.3 반어와 풍자
반어(反語 : irony)와 풍자(諷刺)는 안팎이 반대되는 내용을 바탕으로 한다. 유머(humor)의 본질이 웃으면서 엄숙하게 이야기 한다면, 반어와 풍자는 웃지 않고 엄숙하게 표현한다.
반어는 온정이 결여되어 있고 부정적인 면을 날카롭게 찌른다. 반면에 풍자는 부정(否定)의 강도가 약하고 부드럽다.
반어법은 “체” 담론이다. 실제와 반대되는 뜻의 말을 쓰는 경우를 의미한다. 이는 겉으로 나타낸 말과 이면의 숨은 뜻이 서로 달라 갈등과 긴장이 발생하는 특징이 있다. 슬퍼도 기쁜 체, 괴로워도 즐거운 체, 싫어도 반기는 체 해야 할 경우 아리고 쓰린 감정이 엉뚱한 반어로 나타난다.
반어에는 구술적 반어, 소크라테스적 반어, 극적 반어, 낭만적 방어 등 여러 가지가 있다.
구술적 반어의 속성은 긍정을 부정으로, 부정을 긍정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이는 화가 나도 기뿐 체하며, 슬퍼도 웃으며, 속으로 멸시하면서도 겉으로는 우러러보는 어투(語套)이다. 예를 들면 “너, 잘났어.”는 잘났다는 뜻이 아니라 아니꼽다는 말이다. 유사한 예로서 “미워 죽겠어(매우 예쁘다).”, “예뻐 죽겠다(매우 밉다)” 따위를 비롯해 예가 허다하다.
낭만적 반어는 예술적 환상을 증가시키다가 나중에 작가가 등장하여 등장인물을 마음대로 조종했다는 사실을 폭로한다. 이러한 폭로는 작품이 지닌 환상을 깨뜨리는 설화적 기법에 속한다. 수필의 서술기법에서는 작가가 직접 경험하지 않았으나 마음속으로 소망하는 것을 현실화하는 방법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소크라테스적 반어는 상대방의 틀린 점을 깨우치기 위해서 반대의 결론에 도달하도록 질문하여 진리로 이끄는 일종의 변증법(辨證法)을 의미한다. 로마 공화정 말기의 정치가로서 시저를 암살한 부루투스(Marcus Brutus)의 연설 내용의 일부이다. 이는 부루투스가 시저를 죽이고 추도하는 문장으로 아이러니의 좋은 예이다.
사랑하는 로마 시민 여러분! 이 부루투스의 인간 됨됨이를 믿고서, 좀 조용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냉정하게 판단을 내려주시기를 아울러 바라는 바입니다. 혹시 여러 분들 중에서 시저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시면 나는 그 사람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내가 시저를 사랑하는 마음은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그럼, 그런 내가 왜 시저를 죽였는가? 이는 시저를 사랑하는 마음이 약해서가 아닙니다. 시저를 사랑하는 마음보다는 로마를 사랑하는 마음이 더 두터웠기 때문입니다!
극적 반어는 관객은 처음부터 알고 있지만 등장인물이 모르고 있는 상황을 서술한다. 등장인물이 실제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일을 하거나, 앞으로 다가올 운명과 정반대되는 행동을 하거나, 닥쳐올 운명과 정반대되는 것을 기대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독자과 작가와 관객은 그 주인공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알고 있어 주인공의 비극을 고조시키게 된다.
예를 들면 흥부가 부자가 된 것을 알고 놀부도 제비다리를 부러뜨려 박 씨를 얻어 심는다. 독자는 그가 나쁜 짓을 저질렀기 때문에 박 안에 몹쓸 것이 들어 있는 줄 알지만 놀부는 동생 흥부처럼 벼락부자가 될 것으로 생각하고 그렇게 믿는다.
내 욕망도 처음엔 깃털처럼 가볍고 조약돌처럼 조그마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어느 틈에 알라딘의 램프 속 거인처럼 몇십 배의 부피로 팽창하여 거대한 아귀를 벌리고 나를 집어 삼키려 마구 달려드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 나는 돌연 하이드로 변신하여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하이에나의 눈빛을 하고, 온몸의 가시 털을 곤두세워 자신을 방어하는 고슴도치의 형상을 지니게 된다. 그리고 또 내 심장을 쉴 새 없이 먹이를 탐하는 돼지의 심장과 맞바꾸어, 하루에도 몇 번씩 죽음을 경험하기도 n한다. 어느덧 나는 나의 명예를 좇고 기회를 좇고 부를 좇는, 도시라는 정글 속의 한 마리 사나운 동물의 영혼이 되어 결코 잡을 수 없는 허망한 신기루를 향해 끝없이 달리고 또 달리는 것이다. === 주연아, “욕망의 두 얼굴”에서 ===
풍자(諷刺)가 원래 함축하는 뜻은 사회제도가 개선되도록 유머와 위트를 혼합한 문학형식이다. 이는 어떤 대상을 우스꽝스럽게 만들어 경멸과 분노와 조소를 불러일으키게 한다. 웃음을 무기로 목표물을 공격하기 때문에 목표물은 개인, 특정한 인간형, 계급, 제도, 국가, 종교일 수 있다. 풍자는 인간의 악덕이나 우매함을 교정하는 수단으로써 상대방이 아닌 그 결점을 비웃는 것이다.
12불타나니 교육(敎育)이 고육(苦育)됐네
이판사판 엎어가며 막판까지 가다 못해
불문곡직 스파이전 엎어치기 묘지국회(墓地國會)
의사당 로비는 로비스트 사교장
힘겨루기 돈겨루기 입신(立身) 재며 입법(立法)하네
검은 싱글 조폭(組暴) 두목 취객골의 정객귀신
나 죽는데 네가 사니 무고(誣告)라도 상관 없네
신의 도리 헌신짝 물고 늘어지기 작전 물귀신
20세기 막차 타고 잡귀들아 물러가라
부정탄 자 물러가고 새바람아 불어대라 === 이옥자, “물림굿”에서 ===
13.4 유머와 위트
유머(humor)와 위트(wit)의 개념을 확실히 구별하기 위해 몇 가지 관점에서 서로를 견주어 보기로 한다.
① 유머는 우리말로 해학(諧謔)이고, 위트는 기지(機智)이다.
② 유머는 정서적 동감이고, 위트는 지성적 공감이다.
③ 유머가 미소를 낳는다면, 위트는 폭소를 낳는다.
④ 유머가 실수의 미학이라면, 위트는 지혜의 미학이다.
⑤ 유머가 인간성에 호소한다면, 위트는 지적인 판단에 근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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⑥ 동양적 유머는 자연과 지혜에서 출발하고, 서양적 위트는 사회와 지식에 서 비롯된다.
⑦ 동양적 유머는 창조성이 짙고, 서양적 위트는 역사성이 농후하다.
⑧ 동양적 유머가 정서적 동감을 나눈다면, 서양적 유머는 위트에 가까워 지 성적 공감을 나눈다.
미국의 유머수필가인 찰스 스티븐 브루크스(Charies Brooks : 1878∼1934)가 “위트와 유머의 차이”라는 에세이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유머는 보다 마음 편하고 더불어 살만한 속성이다. 언제나 같이 있을 벗이고 저녁을 한자리에서 보낼 최상의 친구다. .... 유머가 있는 사람은 넉넉한 즐거움을 발산하여 마치 방 안에 촛불 한 대를 켜둔 것과 같다.
나는 위트를 찬양한다. 위트는 마치 퓨즈 끝에 폭발물을 설치한 것과 같다. 위트의 혀는 나귀의 꽁무니를 찌르는 막대기와 같다. 위트는 몸이 수척하고 따지기 좋아 잘하는 매부리코를 지닌다. 필요하다면 고약한 꾀를 쓴다. 마치 고양이처럼 날쌔게 뛰어오른다.
유머와 위트가 있는 수필과 재미있는 수필은 다르다. “재미있다”는 말은 “흥미로운(interesting)이나 즐거움(amusing)"의 뜻으로 자극적, 감각적, 순간적인 자극에 불과하다. 그런데 유머는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면서 잠재된 불만을 해소시켜 주는 카타르시스를 지닌다. 위트는 지적인 시각을 통해 사물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 개입했을 때 만족감을 수반한다. 따라서 유머와 위트는 수필의 품격을 낮추는 것이 아니라 수필의 멋을 향상시키는 양념 같은 역할을 한다.
⧉ 카타르시스(catharsis) ⇨ 비극을 봄으로써 마음에 쌓여 있던 우울함, 불안감, 긴장감 따위가 해소되고 마음.
유머의 기법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① 수사적(修辭的)으로 표현한다.
② 페이소스(pathos : 애감(哀感)을 살린다.
③ 고정관념을 깨뜨린다.
④ 수필의 해학성을 극대화시킨다.
⑤ 수필의 해학은 극적 대도의 기법에 좌우된다.
⑥ 경구, 금언, 속담, 한자 숙어, 관용어적 표현이나 문맥에 맞는 새로운 표 현을 개발한다.
⧉ 관용어(慣用語) ⇨ 습관적으로 쓰는 말.
⑦ 예사롭게 넘어가는 일에서 놀라운 이치나 의미를 발견한다.
⑧ 유머는 자극적이지 않아야 한다.
천하에 제일가는 지독한 구두쇠의 아이덴티티를 나타내는 우스갯소리가 있지 않은가? 짜디짠 조기 한 마리를 방 앞에 걸어 놓고 밥 한 술 뜨고, 또 쳐다보고, 한 술 뜨고 또 쳐다보고해서 반찬했다는 것이다. 구두쇠의 아이가 밥 한 술 떠먹고 두 번 쳐다보니 벼락을 쳤다는 것이다. “너무 짤라, 짜게 먹으면 물켠다.
이건 물론 과장된 유머지만 아무튼 조그마한 조기 자반 한 마리면 대여섯 식구 한 끼 반찬이 충분할 정도로 자반은 비할 데 없이 짜기가 예사였다. === 임병식, “자반을 먹으며”에서 ===
유머의 본질은 고정관념에 따르지 않고 달리 생각하고 달리 행동하는데 있다. 유머의 본질은 괴팍하고 익살맞고 우스꽝스럽고 희극적인 농(弄)의 속성을 지닌다. 그 기분을 글로 재현하는 것이 수필의 유머성이다.
위트는 우리말의 기지(機智)에 해당한다. “짧고 교묘하여 놀라움을 일으키도록 계획적으로 고안된 언어적 표현”이 위트의 문학적 의미이다 하지만 기발한 의미를 도출해 내는 능력도 위트에 속한다.
위트의 대표적인 예이다. 문학작품에서는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샤일록 재판이다. 샤일록에게 빚 대신에 1파운드의 살을 베어가도 좋지만 증서에 쓰여 있지 않은 한 방울의 피라도 흘려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다.
수필 창작에서 위트를 수용하는 방식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로 경구, 격언, 속담, 숙어 따위의 관용적인 표현을 이용하여 문맥에 맞게 새롭게 개발하는 방법이다.
둘째로 평소에 쉽게 넘어가는 사소한 일에서 깜짝 놀랄 만한 의미와 이치를 찾아내는 방법이다.
그래서 황희 정승도 벼슬길에 오르기 전에 길을 가다가 잠시 길가에 앉아 쉬면서 결(논밭을 갈 때 두 마리 소로 가는 것을 결이라고 하고, 한 마리로 하는 것을 호리라 한다)로 밭을 가는 농부에게 어느 소가 일을 더 잘 하느냐고 물었더니, 농부는 밭 갈기를 멈추고 황희에게로 다가와서 귀엣말로 ‘이쪽 소가 일을 더 잘 합니다.’, ‘아니, 그것을 굳이 귀엣말로 하시오.’, ‘소도 비록 짐승이기는 하지만, 그 마음은 사람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어느 쪽이 낫고 못하다고 하는 말을 들으면, 어느 한쪽은 마음이 편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지요,’라고 대답하더라는 것이다.
그 후 황희는 크게 깨닫고 다시는 사람의 장단점을 말하지 않았다는 옛이야기로 보아서도 우리네의 우공은 준가족의 일원으로 정감이 오갔던 것을 알 수 있다. === 심성구, “경우(耕牛)와 경운기”에서 ===
13.5 풍유와 인유
풍유(諷諭 : allegory)는 추상적 관념을 비유로 표현하는 기법으로써 우유(寓喩) 혹은 우의(寓意)라고 한다. 이는 어떤 원관념 ⓐ를 나타내려고 할 때, 다른 구체적인 보조관념 ⓑ를 사용하여 원관념을 타나내는 방법을 의미한다.
풍유법은 비유법의 한 가지로서, 본뜻을 뒤에 숨겨두고 비유만으로 본래의 뜻을 암시하는 방법이다. 예를 들면 ‘김칫국부터 마신다.’나 ‘모난 돌이 먼저 정을 맞는다.’ 따위와 같은 것을 뜻한다.
보조관념으로 암시하기 때문에 서술이 길어야 내용이 쉽게 전달된다. 요소관계에서 1 : 1의 대응관계를 이루면서 추상적인 의미를 구체적인 말로 표현한다.
알레고리(Allegory) ⇨ 은유적으로 의미를 전하는 표현 양식으로, 주로 문학에서 사용된다. 때 론 우의(寓意), 풍유(諷喩)로 불리기도 한다.
알레고리는 일반적으로 수사학의 형식으로 간주되지만 항상 언어를 통 해 표현되지는 않는다. 눈짓을 가리키는 말일 수도 있고, 사실적인 회 화나 조각, 의사적이거나 재현적인 예술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저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 때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은 백 배, 혹은 육삽 배, 혹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 신양성서 “마태복음” 13장 3∼9절“에서 ===
인유(引喩 : 다른 예를 끌어다 비유함)는 역사에서 실제로 등장하는 인물이나 사건에 내포된 의미를 밝히는 기법이다. 이 기법은 대상을 높이거나 비하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수사법(修辭法)이다.
아래의 내용은 황진이(1506(?)∼1567(?))의 사랑이 지닌 지조를 강조하기 위하여 당대(唐代)의 성풍속(性風俗)을 인유한 것이다.
북송(北宋)의 유명한 성리학의 두 거두인 정명도(程明道)와 정이천(程伊川)은 주돈이(周敦이)에게 함께 학문을 닦아 성리학을 대성했고, 주희(朱熹)에 이르러 함께 현창(顯彰 : 밝게 나타남)되었다.
하루는 명도와 이천이 함께 잔치에 참석했다. 기생이 술을 따르자 명도는 태연히 받아 마시며 질탕 놀았고, 이천은 술잔도 받지 않을뿐더러 쳐다보지도 않고 아예 머리를 외로 꼬고 앉아 있었다.
이튿날 이천은 형인 명도에게 학문을 하는 사람이 품위를 지키지 못하고 그럴 수 있느냐고 책망을 했다. 이에 명도가 태연스럽게 대답했다.
“어제 연회에서 내 마음에는 기생이 없었는데 오늘 집에서는 자네 마음에 기생이 있구먼.”
설명하자면 여자를 끼고 할 짓 안할 짓 다하고도 나무토막으로 여겼다는 것이니 술을 마시고도 곡차를 들었다는 논리다. === 심영구, “천하의 명기 황진이”에서 ===
13.6 인용과 경구
인용법의 다른 말은 따옴법이다. 글의 내용이 보다 참신하도록 속담, 격언, 시가(詩歌), 문장, 어구(語句), 남의 글이나 말 따위를 인용한다. 이 같은 인용법은 첫째로 자기의 주장이 타당하다는 것을 증명하거나, 둘째로 서술 내용을 풍부하게 하고나, 셋째로 자기의 처지를 변호하는데 효과적이다.
인용에는 먼저 ‘인용 부호를 묶어 원문 그대로 살리는’ 명인법(明引法), 다음으로 ‘인용 부호를 쓰지 않고 지문 속에 풀어 넣어’ 인용하는 암인법(暗引法)이 있다.
선운사는 무엇보다도 동백이 유명하다.
‘선운사 골짜기로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아직 일러 동백꽃은 피지 않고 막걸리 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피어서 목이 쉬었다’는 미당의 시구가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전쟁터로 나간 지아비를 그리는 지어미의 시름이 동백꽃처럼 피어 구름에 닿아 있고 그 넋을 기리는 노래가 너무도 은근하여 나라 사랑으로 이어진다’는 노래비가 애잔하기 때문일까. === 박종숙, “선운사의 동백”에서 ===
경구법(警句法)은 기발한 어구를 사용하는 수사법으로써 어떤 인물이나 사건 따위를 호되게 찌르는 기법이다. 진리를 내포하는 어구로써 상대방의 무지를 일깨워주는 수사법인데 교육적이면서 풍자적인 내용이 담겨진다.
예를 들면 “등잔 밑이 어둡다(燈下不明)”거나 “낮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는 말이 여기에 해당한다.
결국 경구법은 그 밑바닥에는 교훈적인 의미나 진리가 깔려있게 마련이다. 경구의 방법은 때에 따라서 풍자와 암시를 요체로 하고 있는 까닭에 속담, 격언, 명언 등에 잘 나타나 있다.
세상 사들아 롱고를 웃지 마라
시불견 청불문 사의 경계로다
어듸서 망령엣 벗님내는 의 시비하느니
위 글은 조선의 영조 때 가인(歌人)박문욱(朴文郁)의 시조의 일부로써 현대에 맞게 바꾸면 다음과 같다.
세상 사람들아 농고(聾瞽)를 웃지마라
시불견(視不見) 청불문(聽不聞)은 옛사람의 경계(警戒)로다
어디서 망령(妄伶) 엣 벗님네는 남의 시비(是非)하느니
이 내용을 해석하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된다.
귀머거리와 장님을 보고 비웃지 말라면서
봐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그들이야 말로 옛 성현이 경계한 바와 일치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런데 남의 시비에 간여하는 망령든 사람들이 있느냐고 꾸짖었다.
이 시조는 사회 현실에 대한 철저한 무관심이요 방관이다. 작가인 박문욱이 서리를 지낸 중인 신분이었기 때문에 사회 현실에 관심을 가져보았댔자 아무 소용이 없다는 사회적 체념 상태인 민중 의식을 드러내 보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3.7 점층과 점강
점층법(漸層法 유사어 : 클라이맥스)은 문장의 뜻을 점점 강하게 하거나, 크게 하거나, 높게 하여 마침내 절정에 이르도록 하는 수사법이다. 다시 말하면 문절(文節)을 점층적으로 배열하여 나아갈수록 뜻이 더 강해지고 깊어지게 하는 기교이다.
이 기법은 읽는 이의 감정을 절정으로 끌어 올리는 표현법으로써, 소설, 희곡에서 많이 사용된다. 예를 들면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아보자꾸나” 처럼 반복법이나 연쇄법과 같이 쓰이는 경우도 있다.
멎었는가 싶던 눈이 다시 내린다. 하늘로 뿌리내린 겨울나무 위에, 포복한 듯 엎드린 낮은숲 위에 눈이 쌓인다. 끝없이 이어진 대간 길에 펑펑 눈이 내린다. 세상 온통 백설에 뒤덮여 정지된 듯한 시야가 어지럼증이 난다. 흩날리는 눈발의 난무 때문만은 아닌 백색이 뿜어내는 화려함이 막막함으로 어지럽다. 저 아래 희뿌여니 내려다보이는 마을과 들판에, 빈 과수원에 내려 쌓이는, 저렇듯 거대한 흔적을 남기는 눈의 소리들은 어디로 묻혀지는 것일까. 눈 위를 찍어 가는 내 작은 흔적만 소리를 낸다. === 장문자 “深處에 내리는 눈”에서 ===
점강법(漸降法 : 크고 높고 강한 것에서부터 점차 작고 낮고 약한 것으로 끌어내려 표현함으로써 강조의 효과를 얻으려는 수사법)은 점층법과 반대되는 기법이다.
글의 힘이나 의지가 점점 약해지는 것 또는 점차로 격조가 낮아져 평범한 사실이 되어버리는 수사법의 일종이다. 익살이나 유머에서 일부러 사용해야 할 경우가 아니면 쓰지 않는 것이 좋다.
아랫방은 그래도 해가 든다. 아침결에 책보만한 해가 들었다가 오후에 손수건만해지면서 나가버린다. 해가 영영 들지 않는 웃방이 즉 내 방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렇게 볕드는 방이 아내 방이요, 볕 안 드는 방이 내 방요 하고 아내와 나 둘 중에 누가 정했는지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나에게는 불평이 없다. 아내가 외출만 하면 나는 얼른 아랫방으로 와서 동쪽으로 난 들창을 열어놓고, 열어놓으면 들이비치는 볕살이 아내의 화장대를 비쳐 가지각색 병들이 아롱지면서 찬란하게 빛나고 이렇게 빛나는 것을 보는 것은 다시없이 내 오락이다. === 이상, “날개”에서 ===
13.8 과장과 완서
강조법은 용어의 뜻을 강조하여 인상을 깊게 하는 수사법이다. 예를 들면 첫째로 감탄적 어구를 삽입하거나, 둘째로 뜻을 점층적으로 강조하거나, 셋째로 의미를 대조적으로 병치(竝置)시킨다. 그 외에 실물의 크기, 정도, 모양, 소리 따위를 감정적으로 보태어 가는 방식이다. 과장(誇張)은 어순의 형식적 변화보다 의미를 강조하는 데 중점을 둔다.
코가 질병자루 같다. 눈이 퉁방울 같다. 귀가 박죽 같다. 입이 나발통 같다. 얼굴이 두꺼비 같다. -소위 추한 얼굴을 형용하는 온갖 형용사를 한 얼굴에 지닌 흉한 얼굴의 주인으로써 그 얼굴이 또한 굉장히도 커서 멀리서 볼지라도 그 존재가 완연할 만하다. 그 얼굴을 가지고는 백주에는 나다니기가 스스로 부끄러울 것이다. === 김동인, “광화사”에서 ===
완서법(緩敍法)은 과장법의 반대로 소극적으로 표현하여 오히려 강한 인상을 얻는 수사법이다. 예를 들면 “좋아하다 뿐이겠습니까”, “그렇고말고요”, “그렇게 기쁠 수가 없습니다”,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식의 표현을 뜻한다. 그러므로 아이러니와도 일맥상통한다.
아닙니다. 이천 년이 지난다 한들 당신을 만나지 못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승에서 당신을 그리워하다 저승으로 그냥 흘러가 버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 한들 나는 가슴만 쥐어뜯을 뿐 딴 도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나의 기다림을 알아주셨습니다. 그리고 지난겨울에야 저와 만남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나는 철이 아니어도, 연못의 수면에 무성한 나무 그늘이 비치는 계절이 아니어도, 식탁 위의 과일이 가득 놓이는 때가 아니어도 섭섭하지 않습니다. 나의 출입을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할 은밀한 밤이면 더욱 고맙습니다만, 그렇지 않더라도 나는 아쉽지가 않습니다. 화려하게 치장한 침실로 불러 주시기를 감히 꿈꾸어보았습니다만 황사 들판인들 조금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조용한 12월 하순의 겨우날 아침, 뭇 인간들의 발걸음이 뜸한 시간에 당신과 만남을 가질 수 있는 게 더욱 기쁩니다. 겨울 아침의 첫 시간을 나누어준 것만으로도 나는 한없는 족함을 느낄 뿐입니다. === 박양근, “화장지에 남긴 편지”에서 ===
13.9 의인과 활유
비유법 중에 사람 아닌 사물을 사람인 것처럼 표현하는 기법이 있다. 자연물, 무생물, 추상적 개념을 인간화하여 인간의 감정이나 속성이 부여된 듯 말하고 행동한다. 사람이 아닌 사물을 사람으로 만드는 것을 의인화(擬人化)라고 하고, 그런 비유법을 의인법(擬人法)이라고 한다. 예를 들면 “영혼이여 깨어나라”라든가 “천지신명이여 도와주소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연기”,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 “두둥실 두둥실 떠나간다”, “너울너울 춤을 춘다” 같은 유형들이다.
E는 햇빛 아래서 밝은 웃음으로 만나 주었다.
그 웃음은 삶의 상처를 딛고 내적 괴로움을 승화시킨 것처럼 보였다. 그의 말은 진지했다. 그의 세상을 보는 눈은 따뜻하지만 날카로운 비평을 담고 있었다. 타인에 대한 평가는 편협하지 않고 주정적이지 않다. 발은 대지를 튼튼히 딛고 머리는 하늘을 향해 있는 그의 삶의 태도에 신뢰가 간다. 자기만의 특수성도 찾으면서도 편견 없는 보편성을 가진 그에게서 온기를 느낀다. 함께 있으면 느껴지는 편안함은 안이함이 아니다. 새로운 것이나 자신과 다른 어떤 사람의 생각도 받아들이는 넓은 포용력 때문이다.
===== 중 략 ======
이제는 방황에 지쳐 어딘가에 정착해야 한다. 후회하지 않는 삶을 위해 E의 곁에 머물 것을 결심한다. 그와 함께 할 시간들이 어렵다는 것을 알아서인지 가슴에 싸아한 아픔이 번진다.
시(poem)와 소설(novel)을 떠나보낸 몇 년 후, 나는 오늘도 수필(essay)를 만나러 간다.
긴 고통 속에 숨어 있는 환희를 찾아서. === 조재은, "P.E.N"에서 ===
활유법(活喩法)은 무생물을 생물인 것처럼, 감정이 없는 것을 감정이 있는 것처럼 표현하는 수사법이다. 예를 들면 ‘나를 에워싸는 산’, ‘울음 우는 바다’ 따위이다.
억새밭, 곳곳에 점화된 불들은 마치 갇혀있던 짐승을 풀어 놓은 것 같다. 저리도 퉁치며 급한 건 찾아야 할 대상이라고 있는 걸까. 드디어 서로 만난 능선과 능선의 불꽃, 합쳐진 불줄기는 오랜 세월 떨어져 있던 정인들같이 지칠 줄 모르고 하늘로 치솟는다. 기약 없는 만남이라 더 애틋한 것인지. 두 몸을 마주하고 하나 되어 흐느끼듯 나울대는 火身.
끝내 파르르 떨며 눕고 마는 불꽃은 길지 않았다. 고작 30여 분, 살아온 세월에 비하면 순간이다. 평생을 고대하며 기다렸다 한들 어찌 미련이 없을까마는 끈끈했던 삶의 흔적마저 무로 만들고 자취 없이 사라진다. 마지막 이래야 한다는 뜻한 모습이다. 겨우 풀로 태어났으면서도 그토록 아름답게 생을 마감하다니. === 김지수, “화무도”에서 ===
13.10 역설과 말재간
역설법(逆說法)은 표면상으로는 모순되지만 그 속에 어떤 진실을 담고 있는 표현법을 뜻한다. 이에는 첫째로 앞 뒤 구절의 모순형용, 둘째로 감정의 모순된 표현도 역설로 본다. 예를 들면 “소리 없는 아우성”, “시를 쓰면 이미 시가 아니다”,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다”, “아는 것이 병이다”, “님은 갔지만,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했습니다”,“작은 거인”, “뜨거운 얼음” 따위이다.
이는 일반적 생각과는 반대되는 말로서, 진리가 아닌 듯 하지만 실은 진리를 표현하는 수사법이다.
연애는 격정이 있다면, 결혼에는 평온이 있다. 연애에는 고뇌가 있다면 결혼에는 권태가 있다. 결혼에는 연옥(천국과 지옥 사이)이 존재하나 연애는 천국 아미면 지옥뿐이다. 연애는 맹목성이고 결혼은 목적성이다. 연애의 다음 순서가 결혼은 아니다. 연애를 졸업한 후에 결혼이라는 상급 학교로의 진학 여부는 철저히 개인 몫이다.
연애가 시작되었다는 것은 생의 신고(申告)다. 우리는 그 속에서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수만 가지의 감정을 경험한다. 그리움, 달콤함, 기대, 배신감, 욕망, 슬픔, 용서, 질투, 살의까지도, 그들은 우리에게 평화보다는 갈등을, 희망보다는 절망을 안겨주지만 그 속에서 인간은 성숙한다. === 박미경, “입맞춤”에서 ===
말재간(말을 잘하는 슬기와 능력)은 말장난이다. 이는 희극적인 목적뿐만 아니라 진지한 목적에도 사용된다.
그냥 두고 보자니 안쓰럽고 드러내자니 흉스럽고 그러다 보니 쌈을 싸듯 안아 가는 보쌈, 어쩌면 보쌈이라는 것이 보고도 못 본 척하라는 어른들의 으름장일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조상들의 지혜란 참으로 기막힌 것이다. ===김종희, “쌈”에서 ===
13.11 설의와 영탄
설의법(設疑法)은 쉽게 판단할 수 있는 사실을 의문의 형식으로 표현하여 상대편이 스스로 판단하게 하는 수사법이다. 이는 서술형으로 표현해도 좋을 것을 일부러 의문형으로 표현하여 감정을 강하게 나타내려는 것이다.
“사람의 자식이 그렇게 비루하였더냐?”
“오, 오해 말게. 내가 무엇이기에 과장이나 나 따위의 말에 따라 일을 처리하겠는가. 말하기도 전에 자네의 옛일을 다 알고 있네. 항상 그렇게 조급한 것이 자네의 병이야. 세상에처해 나가라면 침착하고 유유하여야 하네. 좀 기다려 보게나.
“처세술까지 가르쳐 줄 작정이야.” === 이효석, “삽화”에서 ===
영탄법(詠歎法)은 감탄사나 감탄 조사 따위를 이용하여 기쁨ㆍ슬픔ㆍ놀라움과 같은 감정을 강하게 나타내는 수사법이다 예를 든다면 ‘아아!’, ‘오!’, ‘보았는고!’, ‘아차!’, ‘오호!’, ‘어머나!’ 따위이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참아 떨치고 지나갔습니다. === 한용운, “님의 침묵”에서 ===
13.12 의태와 의성
의태(擬態)는 사물의 모양이나 태도를 그대로 모방하여 표현하는 수사법이다. 예를 들면 ‘두둥실 두리둥실 배 떠나간다.’, ‘어슬렁어슬렁 걷는다.’ ‘포동포동한 얼굴’, ‘말랑말랑한 홍시’, ‘무럭무럭, ‘데굴데굴’, ‘벙실벙실’ 따위가 있다.
흔들흔들 춤추다가 보면 몸이 쑥쑥 자라나 있고 덩달아 흥이 난다. 흔들흔들 춤추다가 보면 몸이 쑥쑥 자라나 있고 매달린 배 다섯 알도 오동토동하게 살이 쪄 갔다. === 남홍숙, “배나무가 하는 말”에서 ===
의성법(擬聲法 : onomatopoeia : 성유법(聲喩法) 혹은 사성법(寫聲法)이라고도 함))은 사람이나 사물의 소리를 그대로 묘사하여 그 소리나 상태를 실제와 같이 표현하는 비유법이다. 이는 읽는 사람에게 실감을 주어 인상을 강하게 한다. 예를 든다면 ‘주룩주룩 비가 내린다.’, ‘아기가 쌕쌕 잠을 잔다.’ 따위이다.
지창(紙窓)에 와 부딪치는 요란한 개구리 소리에 끌려 들에 나와 서성거려 본다. 저녁나절 몹시 불던 바람은 잠이 들고 밤은 이미 이슥하다. 모를 내기에는 아직 이르다. 물이 가득 잡힌 빈 논에는 또 하나의 밤하늘이 떠있다. 지칠 줄 모르는 개구리 소리는 연신 하늘과 땅 사이의 고요를 뒤흔들고 있다. 와글거리는 개구리 소리에 물이랑이 일적마다 달과 별은 비에 젖은 가로등처럼 흐려지곤 한다. 첩첩한 산이며 수목들은 무서운 침묵에 쌓여있다. 그들도 이 밤에 개구리 소리에 묵묵히 귀를 모으고 서 있는 것일까.
개골 개골 개골 기르르 가르르 걀걀걀걀.
13.13 열거와 반복
열거법(列擧法)은 내용적으로 연결되거나 비슷한 어구를 여러 개 늘어놓아 전체의 내용을 표현하는 수사법이다. 예를 들면 ‘꽃밭에는 장미, 백합, 튤립, 칸나가 활짝 피어 있다.’ 따위가 있다.
땅따먹기
공기놀이
공놀이
콩주머니놀이
고무줄놀이
줄넘기 - 줄돌리기
사다리건너기 === 사공정숙, “마당에서의 놀이”에서 ===
반복법(反復法)은 같거나 비슷한 어구를 되풀이하여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수사법이다. 예를 들면 ‘살어리 살어리랏다 청산에 살어리랏다.’ 따위가 있다.
나는 담배도 술도 즐길 줄 아는 사람이 좋다. 마음이 울적할 때 재즈가 흐르는 바에서 술잔을 기울이거나, 창가에 기대어 약간 풀어진 넥타이 차림으로 상념에 잠겨 담배를 피워 문 남자의 모습은 아름답다. 만약 앞에 앉은 남자와 술 한 잔을 하고 싶은 마음이 들거나, 평소에는 m입에 대지도 못하는 담배를 그 앞에 피우고 싶은 생각이 든다면 나는 아마도 그에게 매혹된 상태이리라. === 박미경, “담배의 비밀”에서 ===
13.14 대조와 대구
대조(對照)는 첫째로 둘 이상인 대상의 내용을 맞대어 같고 다름을 검토함, 둘째로 서로 달라서 대비가 됨을 뜻한다. 예를 들면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와 같은 것을 의미한다.
수사학에서 대조법은 대립하는 어구(語句) 또는 사상을 대조시켜 대비의 느낌을 일으키는 기교를 말한다. 이는 상황이나 성격을 명확하게 강조하는 일종의 문학적 취향으로 인티테제(antithesis)라고 한다.
안티테제(antithesis) ⇨ 반대 의견, 반대 주장, 반정립, 반대 명제 등을 뜻하는 말이다. 정반합의 '반(反)'에 해당한다.주로 변증법에서 논지를 전개시킬 때 이용되는 말로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 될 때는 대상의 모순을 드러내기 위한 해당 명제의 역(逆)을 의미한다.
이 땅의 남자가 하늘로 사는 동안 여자는 땅으로 엎드려 살았다. 밟힐수록 일어나는 보리 싹처럼, 대접받지 못하는 운명이 그들을 강하게 만들었을까. 이 땅의 여자들은 억척스러웠다. 위기가 닥칠 때마다 분연히 일어나서 지아비와 아들을 지켜냈다. 행주치마에 돌을 담아 나르고, 삯바느질과 행상으로 남편, 풀 죽은 가장을 도와 우유 배달을 하고, 보험 가장이나 화장품 수레를 끌고 낯선 대문을 두드리는 여자들, 김밥 장수로, 청소부로 하루 종일 힘이 들어도 자존심 강한 남정네를 위해 내색 없이 저녁상을 차린다. 월급을 쪼개어 적금을 붓고, 허리띠를 조르며 교육에 투자한 악착같은 여성들이 없었다면 세계 11위의 경제대국은 가당치도 않았을 것이다. === 최민자, “남자는 머리 여자는 목”에서 ===
대구법(對句法)은 비슷한 어조나 어세를 가진 어구를 짝 지어 표현의 효과를 나타내는 수사법이다. 접속어를 사이에 두어 구문구조가 대칭을 이루게 한다.
“내가 없으면 남도 없다. 내가 없고 남도 없는데 빚이 어디 있으며 체면이 어디 있겠느냐...” 갑자기 염세 철학자가 된 노총각을 구제한 것은 나의 어린 신부였다. “돈이 없으면 어떠냐. 방 한 칸에 이불 한 채, 취사도구야 못 마련하겠느냐. ‘사랑’을 두고도 빚이 무서워 결혼을 못하겠느냐....,” === 강호형, “바다의 묵시록”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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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는 언제나 자신의 끊임없는 욕망을 안고 저돌적인 힘으로 해안을 질주하지만, 해안에 이르면 그 사나운 파도의 힘도 한갓 거품이 되어 힘없이 스러진다. 그래도, 파도는 부딪칠 때마다 무너지고, 무너지고 나면 무력해지고 허망하고 덧없음으로 흩어지지만 살려고 애쓰는 몸부림처럼 파도는 해안을 향해 다가오기를 그만두지 않는다. 그런 파도의 반추가 우리 삶의 모습을 대변해 주는 것 같기도 하다. 아름다운 우리 삶도 죽음을 앞에 놓고 죽음과 부딪칠 때 더없이 허망하고 무기력하지만 그 누구도 삶을 엮어 나가며 죽음을 넘어서려는 도전을 끊이지 않는 것처럼. === 변해명, “파도의 영혼”에서 ===
감동과 당혹
“할아버지가 치매로 죽으면 나도 따라 자살할거야!”
꿈에도 예상치 못한 마른하늘의 날벼락을 온새미로 얻어맞은 격이었다. 바로 어제 밤의 일이다. 잠자리 들어서 자기가 잠들 때까지 지켜봐 달라면서 유진이가 무심코 내 뱉은 말이다. 순간 당혹스럽고 무언가 잘 못 들은 것 같아 곧바로 물었다.
“너, 지금 뭐라고 말했니?”
그런데 놀랍게도 조금 전의 말과 똑 같은 대답이 곧바로 튀어 나왔다. 정신을 가다듬으며 아무렇지도 않은 척 가장하고 그 연유를 물어왔다. 며칠 전(7일) 내가 정신을 잃고 여섯 시간 정도 혼란에 빠져 비정상적인 언행을 지속하던 모습을 지켜보며 무척 충격이 컸었던 게 분명하다. 그 때 이후 내가 병원에 검사를 받으러 갔다 오거나 자기가 학교에서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많이 걱정되는지 되풀이해서 묻는 질문의 유형들이다.
“할아버지! 오늘은 기억이 정상이야?”,
“병원에서 뭐라고 했어?”,
“할아버지! 약은 먹었어?”
따위가 으레 건네는 인사말이다. 유진의 물음에 내 대답은 대략 이렇다.
“정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단다.”
“조금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라고 이르지만 긴가 민가 반신반의하면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또렷하다. 어제도 유진이가 학교에서 돌아와 학원에 갈 시간에 병원에서 검사가 예약되어 직접 챙겨 줄 수 없어 아침 등굣길에 주지시켰다. 그 때문에 몹시 걱정을 했던가 보다. 그런 연유인지 학원에 다녀와 태권도장을 가려고 도복을 갈아입으며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프지 않아?”
“입원해야 하는 게 아니야?”
라고 말이다. 어제는 지난 번 기억 단절 사고 같은 뇌졸중 전조 증상의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신경초음파검사와 심장초음파검사를 위해 병원에 갔을 뿐이다. 그래서 담당의사도 만나지 않고 되돌아왔는데 자기 딴에는 적잖은 걱정을 했었던 모양이다. 지금 아무런 문제가 없이 지극히 정상이다. 그런데 열 살배기 눈에는 몹시 위태로워 보이고 심정적으로 좌불안석의 불안을 느끼나 보다. 툭하면 내게 하는 말이다.
“할아버지! 오래 살아야 돼?”
“나는 할아버지가 이 세상에서 가장 좋단 말이야!”
와 같은 립서비스(lip service)를 해댄다. 그렇게 나를 위안하려는 꼴이 안쓰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그렇게 귀엽고 사랑스러울 수 없다.
유진의 맘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다. 가정이라는 둥지에서 나름대로 나를 절대적인 존재로 여기며 의지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자살을 할 거야”라는 식의 극단적인 말을 하는 것은 매우 나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도록 조곤조곤 타일렀다. 동시에 할아버지를 많이 사랑해 주어서 무척 고맙다며 녀석의 손을 꼭 쥐고 잠들 때까지 지켜봤다.
갑자기(7일) 블랙아웃(blackout) 흡사한 상태에 빠져 있다가 정신을 되찾았다. 그리고 다음날(8일) 병원에 가서 전문의 진찰을 받고 그 다음날(9일) 혈액검사와 심전도검사를 받았다. 병증이 나타나고 나흘째 되던 날(10일)에 다시 병원에 가서 MRI검사와 뇌파검사를 받았다. 그 결과에 따라 최종 진단결과는 뇌졸중이 가볍게 지나간 흔적이 발견되어 2주일 가까이 복용할 약을 처방 받아 왔다. 그런데 그 정확한 원인 규명을 위해 신경초음파검사와 심장초음파검사를 14일로 예약했었다. 이 예약에 따라 어제(14일) 병원을 찾아 두 가지 검사를 받고 돌아와 다가오는 22일에 담당 의사의 재진료를 받도록 예약해 두었다.
어제의 잠자리에서 또 다른 일화이다. 낮에 검사를 할 때 담당 기사가 숨을 크게 들이 마시고 한참을 참았다가 단 번에 내뱉으라는 주문을 여러 번 되풀이 한 것이 생각났다. 그래서 무심결에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한참 만에 “후∼”하고 내쉬는데 옆에 누웠던 유진에게는 커다란 한숨을 쉬는 것으로 들렸던 모양이다. 갑자기
“할아버지! 뭐가 그리 걱정이 돼서 한숨을 쉬는 거야.”
라고 물었다. 전혀 그런 의미가 아니었는데 말이다. 솥뚜껑보고 놀란 가슴 자라보고 놀란다고 했던가? 유진이가 그런 의미로 받아들였던 것으로 생각되어 서둘러 자초지종을 세세히 설명했다. 조용히 내 말을 듣고 나서
“에이! 할아버지, 놀랬잖아!”
라면서 안도하는 꼬마 도령을 물끄러미 넘겨다보면서 무척 행복하다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마냥 흐뭇해 내 얼굴에는 백치아다다*를 닮은 미소가 끝없이 밀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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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치아다다 : 1935년에 발표한 계용묵의 단편 소설. 백치를 여주인공으로 하여 황금만능의 세태를 비판한 작품이다.
2016년 3월 15일 화요일
만추 편감
지각한 가을을 진하게 앓고 있다. 계절적으로 입동을 지나 겨울의 초입에 들어섰습니다. 하지만 남녘 땅 끝자락에 자리한 바닷가 동네의 산야는 이제 겨우 만추의 쓸쓸함을 진하게 앓고 있답니다. 윤기를 잃었을망정 얼마 전까지 푸르른 자태를 뽐내던 나무들이 갑자기 뚝 떨어진 기온의 변화에는 속수무책으로 무기력하게 갈팡질팡 대네요. 게다가 어제 오늘 매서워진 바람결의 난장질에 울긋불긋한 단풍잎을 마구 떨궈 앙상하게 드러난 나뭇가지가 낭패스러워 웅크린 모양새가 무척 안쓰럽습니다. 이 처럼 하늘의 섭리에 따라 한 살이를 마감하고 자연으로 회귀하는 계절이기에 누군가에게 편지를 띄우고파집니다. 수신인은 누구이든지 상관없을 듯합니다. 멀리 혹은 가까이 이웃한 친구나 지인을 위시하여 아련한 첫사랑의 연인이라도 문제될 게 없겠지요!
임이여! 나는 지금 심각한 자괴감에 빠져 허우적이고 있답니다. 풋풋하고 싱그러웠음에도 슬기롭거나 지혜롭지 못해 부질없는 탐욕의 노예가 되어 좌충우돌하던 젊은 날을 돌아봅니다. 그악하게 밀어붙이며 이뤘다고 뿌듯해했던 선 떡 부스러기 같은 하찮고 알량한 얻음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요? 그리고 그것들이 어떤 의미를 가졌었는지 당최 아리송합니다. 지금 내 손에 틀어쥐거나 지식의 곳간에 진정 쓸모 있는 자산으로 오롯이 갈무리된 게 아무것도 없어 내뱉는 독백입니다. 아직은 가야할 길이 멀고 깨우쳐야 할 난제들이 무수한 때문에 좀 더 시간을 두고 마음을 닦거나 수양을 차곡차곡 쌓는다면 무언가 옹골지게 얻거나 건질게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속절없던 지난날은 한마디로 얼치기 의원이 ‘맥(脈)도 모르고 침통(鍼筒) 흔들며’ 나부댄 격이 아니었는지 차근차근 기억을 되살려 곱씹고 있답니다.
매일 동네 뒷산에 산행을 되풀이하곤 합니다. 이즈음 줄기차게 오가는 산꼭대기 완만한 능선 길 10킬로미터 정도의 길바닥에는 낙엽이 수북하게 쌓여 양탄자 위를 걷는 푹신푹신한 느낌이랍니다. 혼자서 걷는데도 낙엽이 밟히며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놀라 뒤돌아보다가 어처구니가 없어 실소를 할 때가 더러 있지요. 알싸한 바람에 실려 오는 청아한 공기가 폐부를 파고드는 늦가을에 산속의 고즈넉한 길을 걷다가 내 삶을 그에 견줘보며 생각에 잠겨 보기도 하지요. 싱싱한 젊음의 고개를 넘어 조락(凋落)을 연상하는 황혼의 삶과 의미를 되새겨 보곤 하지만 답답함이 가시지 않네요. 마음은 ‘아직 이라고 자위를 해봐도’ 현실에서 내게 허용된 자리는 보이지 않고 막막해 의기소침해진 초췌한 나의 모습이 고스란히 밖으로 드러날까 안절부절 하지요.
설익은 자신감과 치기로 똘똘 뭉쳤던 지난날 ‘물에 빠져 죽을지라도 개헤엄은 치지 않는다.’라는 객기를 신념이라고 믿고 냅다 치달았지요. 아마도 지금 유사한 류(類)의 시험에 들게 된다면 젊은 시절과 전혀 딴판인 모습을 보일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면서 제자리에서 뱅뱅 맴돌고 있답니다. 생의 모두를 걸었던 일터에서 내려와 직면한 이모작의 세상은 생각보다 냉혹하기 그지없고 막막하며 무관심한 채 거들떠보지 않아 섧고 안타깝더이다. 그런 연유에서 많은 사람들이 신산한 노년을 이름 모를 이웃으로 살아가는 이유를 알 것 같더이다.
젊은 시절 ‘생각은 냉철한 이성이나 명석한 머리로 하고, 행동은 뜨거운 피와 가슴으로 하라.’고 귀에 딱지가 앉을 만큼 지겹게 들었습니다. 그렇게 올곧고 지혜로운 자세로 거친 세파와 드잡이하며 가정을 꾸리고 가족을 보살펴야했던 숙명적인 짐 때문에 쉽사리 간난신고의 처지를 벗어나지 못했던 게 우리네 보통 사람의 삶이었지 싶네요. 야금야금 100세 시대가 밀려왔음에도 노후의 삶을 야무지게 챙기지 못한 채 얼결에 허겁지겁 황혼을 맞이한 서러움을 어디에 하소연해야 할까요!
어쩌다가 해방둥이로 태어났답니다. 불과 대여섯에 끔찍한 6.25를 맞아 전쟁의 참상을 직접 목격하며 몸으로 겪었지요. 처참한 주검을 목격하기도 하고 지긋지긋한 가난을 견뎌내야 했던 삭막함으로 어린 시절을 몽땅 채색해버렸지요. 그리고 3.15부정선거, 4.19혁명, 5.16군사쿠데타 등의 격랑을 곁눈질하며 자랐어요. 암울했던 세월의 질곡에서도 요행으로 학교교육을 제대로 받고 순탄하게 양지에 뿌리를 내렸었지요. 그러다가 오늘에 이르렀는데도 아무것도 남을만한 흔적이나 이룬 게 없는 빈손에 당황하면서 지동지서하고 있답니다. 하기야 인생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라고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고 하더군요. 성현이나 선지자가 아닌 대부분의 사람에게 공통 현상일지 모른다는 자위로 허허로움을 달래 봅니다. 그렇지만 공허한 마음은 만추의 쓸쓸함보다 더 아릿하고 아프답니다.
‘달이 차면 기우는 것(滿月卽虧)이 자연의 섭리’이던가요! 아름답고 희망찬 세월에 비해 황혼이 섧고 쓸쓸함은 당연한 귀결일겁니다. 그럼에도 황혼의 세월이 마뜩치 않아 젊은 시절로 돌아가고픈 구상유취 한 생각을 떨쳐내기 어렵습니다. 이런 생각은 세상 이치를 제대로 깨우치지 못해 내려놓거나 비우지 못한 인과응보일지 모른다고 여기면서도 대책 없이 비틀거리며 가슴앓이를 하고 있네요. 공자(孔子)가 논어의 위정편(爲政篇)에서 ‘나이 일흔이 되니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좇아도 도(道)에 어그러지지 않았다.’라는 뜻으로 ‘종심소욕불유거(從心所欲不踰矩)’라고 일렀다지요.
옛 선인들은 일흔이 되면 ‘마음을 좇아 행동해도 도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설파했거늘 내게는 ‘쇠귀에 경 읽기’에 자나지 않았던 가 봅니다. 한 달 남짓하면 일흔의 초입에 들어설 풍신인데도 불구하고 부질없는 탐욕에서 자유롭지 못한 나는 누구일까요? 인정하기 싫어도 졸장부의 전형을 보는 것 같아 측은지심이 절로 드는 상황이랍니다. 그런데 어여삐 봐주려고 애써 봐도 나잇값을 못하는 스스로에게 매섭거나 단호하지 못하고 연민에 빠지는 모순의 시원(始原)은 어디에서부터 잘 못 얽히고설킨 업보일까요!
좋은문학, 2013년(통권 제59호)
(2013년 11월 12일 화요일)
고희의 언저리
쏜 살 같은 세월을 실감한다. 빠른 세월의 격랑에 휩쓸려 내닫다보니 얼결에 칠십이라는 나이에 이르렀다. 지난 섣달 열이레가 그날이다. 원래는 이사를 해야 할 형편이었다. 따스한 날씨라도 엄동설한 혹한기의 생일에 이삿짐을 나르는 처량함을 피하고 싶은 욕심을 잠재우기 어려웠다. 그런 심란함 때문에 억지로 이사를 하루 늦춰 볼썽사나운 꼴은 면했으니 가까스로 체면치레를 한 셈이었다.
흔히들 칠십을 고희(古稀)나 종심(從心)이라는 말로 곱게 포장해서 얘기한다. 여기서 고희는 당나라 시인이었던 두보(杜甫)의 ‘곡강(曲江)’이라는 시에서 ‘칠십 해 인생은 예로부터 드문 일이네’라고 표현하여 ‘드문 나이’를 뜻하는 의미이다. 곡강 시의 관련 구절이다. 이 글귀에서 ‘고(古)’자와 ‘희(稀)’자를 합성하여 고희라고 이름을 붙였다.
술집 빚은 가는 곳마다 있기 마련이지만(주채심상항처유 : 酒債尋常行處有)
칠십 해 인생은 예로부터 드문 일이네(인생칠십고래희 : 人生七十古來稀)
한편, 공자의 가르침을 집대성한 논어의 위정편(爲政扁)을 보면 삶의 구비마다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하여 지학(志學 : 15세), 약관(弱冠 : 20세), 이립(而立 : 30세), ... ..., 칠순(七旬 : 70세) 등으로 호칭했다. 그런데 칠순인 ‘일흔에는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따라도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 경지인 종심(從心)에 이른다’고 하여 종심불유(從心不踰)라고 이르고 있다.
세상에 불변의 젊음이나 영생이 있을까? 그 옛날 절대 권력을 자랑하던 군주나 천하의 거부들도 불로초나 영약을 구하려고 별의별 궁리와 수단을 동원해도 신의 영역에 도전이라는 불경죄 때문인지 뜻을 이뤘던 적이 없었다. 그런 맥락에서 늙기를 받아들이지 못하며 자연에 거역하는 안티에이징(anti-aging)보다는 아름답고 건강하며 멋있게 나이를 먹겠다는 넋두리 같은 웰에이징(well-aging)의 각오를 다짐해본다. 어차피 나를 위해 속도를 늦추며 기다려 주거나 어깨동무하고 동행할 세월이 아니다. 그렇다면 내게 어울리도록 쓰임새를 모색하는 슬기로움이 유한한 삶을 알차고 유용하게 쓰는 길이 아니겠는가!
앞으로 남은 삶을 어떻게 꾸리는 게 아름다운 삶일까? 이제는 원해도 마땅한 자리가 없어 일중독자(workholics)처럼 억척을 떨 계제가 아니다. 그러므로 두 어깨에 버겁게 짊어진 짐이나 마음 속 깊이 숨겨둔 탐욕은 과감하게 내려놓거나 비우고 견금여석(見金如石)의 겸허한 자세로 신실한 삶을 꾸려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고 해도 삶의 지혜를 깨우치고 길을 터득하기 위해서는 젊은 날 이상의 박람강기(博覽强記)가 필요할지 모른다. 현명한 어른으로서 아름다운 노년의 슬기로움을 위해서 말이다. 이 같은 생각에서 지금 잠을 자거나 게으름을 피운다면 일신의 편안함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에 비해 지금 신명을 바쳐 나를 갈고 닦으며 지혜로움에 다다르려고 세상사를 두루 섭렵하려한다면 이후에 풍요로운 삶을 누리며 고귀한 꿈을 현실로 꽃피울 수 있지도 모를 일이다.
매두몰신(埋頭沒身)의 처지에서 불철주야 노심초사했던 젊은 날에 대한 소회이다. 모두가 나를 둘러싼 주위 환경이나 사람의 문제로 뜻을 이루지 못하거나 부당한 결과가 초래 되었다고 남의 탓이라는 면피성 말을 입에 달고 살았던 날이 숱하게 많았다. 하지만 그게 과연 그랬을까? 아마도 거개가 나의 모자람이나 무지에 기인했을 것임을 되새겨 보면 뒤 꼭지가 간지럽고 얼굴이 화끈거린다. 그래서 선인들은 얘기했을 게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며 ‘고장난명(孤掌難鳴)’이라고 일렀으리라. 이는 터득이나 깨우침이 부족했던 지난날에 대한 진솔한 자성이 따라야 할 명제가 명백하다.
이제부터 내게 알맞은 역할은 무엇일까! 똑 부러지는 역할의 상징어로 표현한다면 말이다. 이즈음 이래저래 공권력의 권위가 끝없이 실추되어 말씀이 아니지만 우리에게 경찰의 상징어로서 각인된 한 마디가 ‘민중의 지팡이’*가 아닐까 싶다. 나도 사회나 가족 혹은 내가 속한 무리 안에서 반드시 필요한 존재로서 인정을 받는다면 노년의 삶이 한층 찰지고 아름다우며 보람될 터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 자리를 지키며 합당한 역할을 알뜰히 해냄으로써 제대로 된 나잇값을 해낼 맞춤한 일거리를 찾을 길 없어 엄청 낭패스럽고 아쉬우며 떫기 그지없다.
젊은이들의 눈에 얄짤없는* 백두거사(白頭居士)로 비춰질지라도 나름대로 내 몫을 다하며 단아한 노년의 길을 걷고 싶은 바람이다. 그 성패는 온전하게 내게 달려 있기 때문에 ‘고상하게 나이를 먹는다’는 웰에이징의 본때를 보여주는 나를 꿈꾼다. 참된 길을 지향하며 곧고 바르게 살아 갈 다짐을 하는 처지에서 백해무익의 허섭스레기 같은 다변을 피하는 편이 나 스스로의 품위를 지키는 지름길이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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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중의 지팡이 : 1949년 11월 무렵에 국민과 경찰의 융화를 상징하는 민경융화(民警融和)의 표어로 선정하여 서울 시내 각 파출소에 내걸었던 데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졌다.
* 얄짤없다 : ‘봐 줄 수 없다’라는 의미의 속어이다.
우리詩, 2014년 4월호, Vol. 310, 2014. 4. 1
(2014년 1월 22일 수요일)
여자의 네 가지 덕
참된 부덕(婦德)은 뭘까? 우리사회에서 생전에는 물론이고 사후까지 두루 추앙되는 여성상을 함축해서 나타내려면 어떤 표현이 합당할까? 효부나 열녀, 요조숙녀와 현모양처, 자모(慈母) 같은 말로 가름될 듯하다. 끝없는 자기희생과 비움 그리고 베풂을 전제로 한 삶이 아니라면 다다르기 어려운 까마득하게 드높은 경지를 전제로 한 본보기 개념들이 분명하다.
6.25 전쟁이 휴전될 무렵의 얘기이다. 그 시절 어른들 말씀에서 여자가 지녀야 할 덕목으로 회자 되었던 말이 위에서 열거한 어휘들이었다. 그리고 초등학교나 중학생들의 장래 희망사항에 여학생들은 ‘현모양처’라고 적었던 경우가 숱했다. 세월 따라 상전벽해를 연상할 만큼 가치관이나 의식이 엄청나게 많이 변화되었음을 방증하는 현상일까? 이즈음 학생들이 장래 희망을 ‘현모양처’라고 기재한다면 구태의연하며 고루하고 쾌쾌 묵은 냄새가 진동한다는 타박을 받기 십상이리라. 이랬을 경우 주위 친구들의 퇴박과 함께 놀림감이 되어 두고두고 입방아에 단골 메뉴로 등장해 요깃감으로 씹힐지도 모른다.
최근 우리사회에서 여권 신장은 일취월장을 실감케 한다. 따라서 어떤 분야를 막론하고 여성의 진출을 가로막고 있는 벽으로 알려진 유리천장(glass ceiling)이 사라지고 되레 여성 상위시대가 활짝 열렸지 싶다. 이런 사조 때문인지 이즈음 각종 고시나 대입수능고사에서 여자 수석 합격자가 속출하고 세계적으로 우뚝 올라선 스포츠 스타가 탄생했다하면 십중팔구는 여성이다. 이런 세월에 좀팽이처럼 속 좁게 여성이나 부덕(婦德) 운운하는 자체가 흘러간 유행가 가락의 흥에 겨워서 대취하여 흥얼대는 모양새일지도 모른다.
찬란한 현대문명이 만개하면서 삭막해진 사회를 헤쳐 나가는 과정에서 벅찬 충일감보다는 상실감이 커 보임은 어디에서 연유하는 현상일까! 물질만능이라는 가치가 지배하는 섬뜩한 세상이 어렵고 힘들어 비틀거리며 방황하는 영혼을 달래거나 안식을 안겨줄 힐링(healing)이 그리워 허둥대는 평범한 이웃을 생각한다. 그런 연유에서 고결한 성스러움이나 자애로운 성품을 뜻하는 모성 같은 부덕이나 부도(婦道)가 그립다. 언제 다가가 파고들어도 미주알고주알 까발리며 캐묻거나 좀스럽게 이해타산을 꼬치꼬치 따지지 않고 넉넉히 품어줄 어머니 품을 그리며 꿈을 꾼다.
명심보감(明心寶鑑)의 부행편(婦行篇)에 여유사덕지예(女有四德之譽 : 여자는 네 가지 덕의 아름다움이 있으니)라는 글귀가 있다. 이는 원래 중국 송대(宋代)의 교양서인 익지서(益智書)에 수록된 내용 중의 일부이다. 여자의 아름다움의 첫째는 부덕(一曰婦德 : 일왈부덕), 둘째는 부용(二曰婦容 : 이왈부용), 셋째는 부언(三曰婦言 : 삼왈부언), 넷째는 부공(四曰婦工 : 사왈부공)을 뜻한다고 이르고 있다.
먼저 부덕(婦德)이라함은 꼭 재주와 이룸의 뛰어남이나 빼어남을 이르는 것이 아니다. 이는 절개가 곧고, 분수를 지키며 아울러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한결 같이 조신하게 행하고 행동을 조심하며, 행실을 법도에 맞도록 함을 말하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한편, 부용(婦容)이라함은 꼭 얼굴이 아름답고 고움을 이르는 것이 아니다. 이는 먼지나 때로 더렵혀진 옷을 깨끗이 빨아 옷차림을 정갈하게 하고, 목욕을 제 때에 함으로써 몸의 청결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일깨우고 있다.
또한 부언(婦言)이라함은 꼭 입담이 좋고 말을 잘하는 것을 이르는 게 아니다. 이는 말은 가려서 해야 하고, 예의에 어긋나는 언행을 삼가하며, 반드시 말을 해야 할 때에 함으로써 사람들이 싫어하지 않게 하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끝으로 부공(婦工)이라함은 꼭 손재주가 남보다 뛰어남을 말하는 게 아니라고 이르고 있다. 이는 길쌈은 부지런히 하면서, 술을 빚어내기를 좋아하지 않고(勿好暈酒 : 물호운주), 좋은 맛의 음식을 만들어 손님을 접대하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세월 따라 진리나 가치관을 비롯하여 도덕의 기준도 변하는 게 온당한 이치일지 모른다. 그 옛날 중국의 송나라 시절에 정립했던 여자의 네 가지 덕목이 온새미로 오늘에 통용될 여지는 도통 없다. 그런 관점에서 이들은 하로동선(夏爐冬扇) 같이 부질없는 선(善)의 기준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의 본질적인 품성이나 모성의 바탕이라는 견지에서 보면 그 시절의 부덕, 부용, 부언, 부공은 결코 무시하거나 버리기 아까운 선지자의 예리한 통찰이나 설파에 해당하지 싶다.
이런 덕목이 화두로 던져지고 엄청 많은 세월이 흐른 오늘날의 여성들에게 어떤 덕목이 필요한지 곰곰이 반추해 볼 여지가 있지 싶다. 물질적 가치를 지고지선으로 여기는 오늘에 참된 영혼을 일깨우고 모든 사람을 힐링 할 모성의 초석을 올곧게 다지기 위해 닮고 싶은 덕목은 뭘까? 감당하기 버거울 정도로 디지털 문화의 쓰나미(tsunami)가 휘몰아치는 오늘날 현대인의 안식을 겨냥한 새로운 지평을 열기 위해서 말이다.
2014년 5월 30일 금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