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거룩한 잔
나는 방을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거부할 수 없는 경건한 부르심이 나를 잠들지 못하게 했다. 신성한 무엇인가가 나를 불렀다. 들리는 소리라고는 책상 위에 놓인 시계가 규칙적으로 째깍거리는 소리뿐이었다. 마치 수십 길의 깊은 물속에 잠긴 방 안에 있는 것처럼 현실이 아닌 듯 몽롱했다.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가 흐릿해지면서 막 꿈나라로 가려던 찰나였다. 의식이 가물거리며 잠이 들려는 순간,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나의 고요한 마음을 흔들어 깨웠다. 잠이 들었지만 아직 완전히 곯아떨어지지는 않은 상태, 깨어 있기는 하지만 정신이 완전히 맑지는 않은 그런 상태였다. 마음속에서 ”일어나 방에서 나가라“라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그 소리는 점점 강하고 다급해졌다. 나는 도저히 그 소리를 무시할 수 없었다.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든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두 다리를 급히 바닥에 내려놓았다. 잠이 순식간에 달아났다. 내 몸은 결연한 행동을 감행하듯 빠르게 움직였다. 황급히 옷을 챙겨 입고는 기숙사를 빠져나왔다. 그러면서 재빠르게 시계를 보고는 시간을 기억해 두었다.
밤공기는 아침에 쌓인 눈이 딱딱하게 얼어 버릴 만큼 차가웠다. 캠퍼스를 가로질러 걷는 동안, 발밑에서 눈얼음이 바삭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차가운 달빛이 학교 건물을 비췄고, 건물의 낙수 구멍마다 거대한 고드름이 달려 있었다. 떨어지는 물방울을 허공에서 붙잡아 단단한 얼음 칼로 만든 모습이 얼어붙은 맹수의 이빨을 연상시켰다. 자연스레 빚어진 괴물 모양의 석루조는 인간 건축자는 흉내 낼 수 없는 형상을 만들어 냈다.
‘올드 메인 타워(Old Main Tower)’ 꼭대기에 달린 시계의 톱니바퀴가 움직였고, 시곗바늘이 서로 겹쳐졌다. 시계의 종소리가 울리기 직전에 둔탁한 기계음이 들려왔다. 그러고는 이내 네 가지 음으로 된 종소리가 정각을 알렸고, 자정을 알리면서 낭랑하게 울려 퍼졌다. 나는 습관대로 혹시 숫자가 틀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속으로 종소리를 하나씩 헤아렸다. 그러나 그 수는 틀리지 않았다. 시계탑에서는 분노한 판사가 판결봉으로 금속을 내리치는 듯한 종소리가 정확히 열두 번 울려나왔다.
학교 예배당은 ‘올드 메인 타워’의 그늘에 묻혀 있었다. 고딕 양식의 아치 형태로 된 예배당 문은 육중한 참나무로 만들어졌다. 나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등 뒤에서 문이 닫히면서 그렁하는 소리를 냈고, 그 소리가 회중석 돌벽에 부딪쳐 울려났다.
나는 그 소리에 깜짝 놀랐다. 날마다 채플(chapel) 시간에 듣던 소리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사실 낮에는 학생들이 예배당에 들어와 정해진 자리에 앉으면서 내는 소리 때문에 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한밤중에는 문소리가 크게 진동했다.
나는 잠시 서서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기를 기다렸다. 희미한 달빛이 색유리 창문을 통해 스며 들어왔다. 회중석과 성단소 계단으로 이어지는 중앙 통로가 눈에 들어왔다. 둥근 아치형 천장을 이고 있는 예배당의 모습이 매우 장엄해 보였다. 마치 거대한 손이 나를 향해 뻗어 내려와 내 영혼을 잡아 위로 끌어올리는 듯한 높이감이 느껴졌다.
나는 천천히 성단소 계단을 향해 걸어갔다. 돌로 된 바닥과 내 신발이 맞부딪쳐 나는 소리를 들으니 징이 박힌 군화를 신은 독일군들이 자갈길을 행군하는 공포스런 광경이 떠올랐다. 카펫이 깔린 성단소에 도착할 때까지 발을 옮길 때마다 발소리가 계속 들렸다.
나는 성단소 앞에 무릎을 꿇었다. 마침내 원하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나는 나의 잠을 방해한 부르심에 응답할 준비를 갖추었다. 기도하는 자세를 취했지만,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조용히 무릎을 꿇은 채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충만히 의식하게 되기를 기다렸다. 내 가슴 속에서 심장이 쿵쿵거리는 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한기가 등줄기를 타고 목까지 올라왔다. 두려움이 엄습했다. 무엇인가가 다가와 나를 붙잡을 것 같은 불길한 기분이 들어서 그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지만 꾹 눌러 참았다.
그러다가 한순간에 공포감이 사라졌다. 그러나 곧 또다시 이상한 감정이 느껴졌다. 그런데 이번의 감정은 사뭇 달랐다. 내 영혼에 말로 다 할 수 없는 평화가 느껴졌다. 평안함과 안도감이 느껴지면서 고통스러워하던 내 영혼을 순식간에 잠재웠다. 위로가 가득 넘쳤다. 그 자리에 영원히 그대로 머물고 싶었다. 나는 아무 말도,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은 채 오로지 하나님의 임재만을 의식했다.
그 순간 삶이 변화되기 시작했다. 내 영혼 깊은 곳에 있던 무엇인가가 단번에 정리되었다. 다시 돌이킬 수 없는 변화가 일어났다. 그 변화의 능력은 결코 지워지지 않는 각인(刻印)과도 같았다. 나는 하나님과 홀로 있었다. 거룩하고 엄위하신 하나님, 순식간에 공포로 나를 사로잡았다가 다시 평화를 가득 채워주신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셨다. 그 순간 내가 거룩한 잔을 맛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안에 세상에서는 결코 채울 수 없는 새로운 갈증이 생겨났다.
나는 깜깜한 예배당에 임하신 하나님, 나의 기숙사 방에 찾아와 단잠을 청하는 나를 깨우신 하나님을 더 많이 알고, 더 힘써 추구하겠다고 다짐했다.
나 같은 대학생이 그 늦은 시간에 하나님의 임재를 구한 이유는 무엇일까? 내가 그 시간에 예배당에 간 이유는 그날 오후 강의실에서 있었던 일 때문이었다. 당시에 나는 막 그리스도를 영접한 상태였다. 나의 회심은 갑작스럽고 극적으로 이루어졌다. 마치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 위에서 회심한 것과 비슷했다(행 9:1-19 참고). 내 삶은 완전히 바뀌었다. 나는 그리스도의 아름다우심에 온통 매료되었다. 새로운 열정이 나의 몸과 마음을 사로잡았다. 성경을 연구하고, 기도하는 법을 배우고, 악한 성품을 정복하고, 은혜 안에서 성장하는 등, 나는 온 힘을 다해 그리스도께 쓸모 있는 사람이 되고자 했다. 나의 영혼은 “주님, 진정한 신자가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부르짖었다.
그러나 갓 신앙생활을 시작한 나에게는 무엇인가가 부족했다. 열정은 넘쳤지만, 마치 일차원적인 인간이 된 듯 얄팍하고 단순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나는 성삼위 하나님 가운데 오직 2위(位)이신 예수님만을 믿고 받드는 일종의 일신교 신자와 같았다. 예수님에 관해서는 제법 많이 알고 있는 듯했지만, 성부 하나님의 존재는 그저 신비에 싸인 듯 모호하기만 했다. 그분은 나의 영혼에 낯선 분이시고, 나의 생각에 수수께끼나 다름없는 신비 그 자체이셨다. 두꺼운 베일이 그분의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그런데 철학 강의가 나의 그런 상태를 순식간에 바꾸어 놓았다. 나는 철학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단지 지겨운 필수 과목을 빨리 끝마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신학을 전공으로 선택한 나는 철학의 추상적인 사변(思辨)이 시간 낭비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이성과 회의를 둘러싼 철학자들의 논쟁에 관한 강의는 아무런 소득도 없는 듯했다. 철학 논의에서는 영혼의 양식은 물론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조차도 발견할 수 없었으며, 그저 따분하고 어렵고 나를 냉랭하게 만들 뿐이었다. 그 겨울의 어느 날 오후까지만 해도 철학은 나에게 그런 과목에 지나지 않았다.
그날의 철학 강의는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e)라는 기독교 철학자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는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성인으로 추앙된 인물이다. 모든 사람이 그를 ‘성 아우구스티누스(Saint Augustine)’라고 부른다. 철학 교수는 강의 시간에 세상의 창조에 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를 소개했다.
나는 성경의 창조 기사에 익숙했다. 나는 구약성경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라는 말씀으로 시작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 행위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창조의 영광스런 신비를 파헤치면서 “창조는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태초에.......”
언뜻 “옛날에”라고 시작하는 동화처럼 들린다. 문제는 태초에는 우리가 ‘엣날’로 이해하는 시간조차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태초를 역사가 흘러오는 도중에 시작된 어느 시점으로 생각한다. 신데렐라에게는 어머니와 할머니가 있었다. ‘옛날에’라는 말로 시작되는 그녀의 이야기는 절대적인 시작점에서부터 출발하지 않는다. 신데렐라가 등장하기 이전에도 수많은 왕들과 여왕들, 바위와 나무, 말과 토끼, 수선화 등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창세기 1장의 태초 이전에는 무엇이 존재했을까? 태초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람에게는 부모나 조부모가 없었다. 그들에게는 읽을 수 있는 역사책도 없었다. 역사가 시작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창조 이전에는 왕들과 여왕들이나 바위와 나무들이 존재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고, 오직 하나님만 계셨다.
그 철학 강의를 듣는 동안 나는 머리가 깨지는 것 같았다. 세상이 시작되기 전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무(無)’라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 ‘무’에 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무’는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을까?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다. 왜냐하면 ‘무’이기 때문이다. ‘무’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존재할 수가 없다. 만일 ‘무’가 존재한다면, 더 이상 ‘무’가 아니라 ‘무엇’이 되기 때문이다. 나처럼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하지 않는가? 잠시 ‘그것(무)’에 관해 생각해 보라. 사실 나는 ‘무’를 가리켜 ‘그것’이라는 지시대명사를 사용할 수조차 없다. 왜냐하면 ‘무’는 ‘그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단지 “무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무’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한마디로, 생각할 수 없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무’를 생각하려고 하면, 우리는 항상 무엇인가를 떠올리게 된다.
예를 들어, ‘무’를 생각하는 순간, '텅 빈‘ 하늘이 생각난다. 그러나 공기는 ’무엇‘에 해당한다. 공기는 질량이 있는 실재이다. 자동차 타이어에 못이 박힐 때 일어나는 현상을 보면 그 사실을 금방 확인할 수 있다.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는 “무란 잠자는 바위가 꿈을 꾸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 말도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보다는 내 아들의 말이 ’무‘를 좀 더 잘 정의해 준다. 아들이 고등학교에 다닐 때, 나는 녀석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아들, 오늘은 무엇을 했니?”라고 묻곤 했다. 그때마다 녀석은 “아무것도 안 했어요”라고 대답했다. 녀석의 대답은 늘 한결같았다. 나는 ’무‘를 ’내 아들이 고등학교에 다닐 때 매일 하던 것‘이라고 정의하는 것이 가장 그럴듯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창의성이란, 물감이나 진흙이나 음표와 같은 실재적인 것을 사용하여 무엇인가를 만들고 작성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우리의 경험으로는 물감 없이 그림을 그리는 화가나 낱말 없이 글을 쓰는 작가나 음표 없이 노래를 만드는 작곡가를 찾아볼 수 없다. 예술가는 항상 ’무엇‘을 가지고 시작한다. 예술가가 하는 일은 다른 물질들을 재배열하고 형성하고 모양 짓는 것이다. 그들은 결코 ’무‘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이 세상을 ’무‘에서 창조하셨다고 가르쳤다. 창조란 마술사가 모자에서 토끼를 꺼내는 것과 비슷했다.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토끼를 만들지 않았다. 심지어 그분은 모자조차도 필요 없었다.
나의 이웃집에는 숙련된 가구공이 살고 있다. 그는 특히 전문 마술사가 사용하는 도구를 잘 만들었다. 그는 나에게 자신의 작업장을 보여 주면서 마술사가 사용하는 상자와 도구를 만드는 방법을 설명해 주었다. 비결은 거울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것이었다. 마술사가 무대에서 빈 상자나 모자를 보여 줄 때, 사실 관객은 그 모자나 상자의 절반만 보게 된다. 예를 들어, ’빈‘ 모자 안의 한가운데 거울이 고정되어 있다. 그 거울은 모자의 빈 공간을 반사해 모자 반쪽의 형상을 그대로 비춘다. 그 결과 모자가 텅 비어 있는 듯한 착시 현상을 일으킨다. 관객은 단지 모자의 반쪽만을 볼 뿐이다. 나머지 반쪽에는 눈처럼 새하얀 비둘기나 통통한 토끼를 숨기기에 충분한 공간이 남아 있다. 마술도 알고 보면 별것 아니다. 그렇지 않은가?
하나님은 세상을 거울로 창조하시지 않았다. 만일 그렇게 하셨다면, 거대한 거울로 세상의 반쪽을 숨겨 놓은 채 나머지 반쪽만을 가지고 창조를 시작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창조는 말 그대로 거울을 포함해 모든 것을 처음으로 만들어 내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은 ’무‘에서 세상을 창조하셨다. 전에는 아무것도 없는 ’무‘였는데, 갑자기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우주가 생겨난 것이다.
하나님은 어떻게 그렇게 하셨을까? 성경이 제시하는 유일한 단서는 하나님이 말씀으로 우주를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창조 행위를 “신의 명령(divine fiat)”으로 일컬었다. 명령은 말 그대로 명령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fiat(피아트)‘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작은 이탈리아제 자동차(FIAT 이탈리아의 자동차 회사)를 염두에 두지 않았다. 사전에서는 ’fiat‘를 ’명령, 또는 무엇인가를 창조하려는 의지의 행위‘라고 정의한다.
나는 지금 IBM사에서 만든 컴퓨터를 사용하여 이 책을 쓰고 있다. 컴퓨터는 복잡한 부속품들로 만들어진, 참으로 놀라운 기계이다. 컴퓨터는 명령에 반응하도록 설계되었다. 키보드를 사용해 글을 쓰다가 틀리면 지우개를 가지러 갈 필요 없이 다시 명령을 내리면 된다. 그리하면 컴퓨터가 틀린 글자를 고쳐 준다. 물론 컴퓨터상의 명령은 이미 거기에 프로그램화되어 있다. 내 마음 같아서는 컴퓨터에게 “내가 나가서 골프를 치는 동안 이 책을 모두 완성하라”라고 명령하고 싶지만, 컴퓨터는 그 명령을 수행할 수 없다. 내가 알고 있는 한 가장 강한 소리로 컴퓨터를 향해 “이 책을 쓰라!”라고 명령할 수는 있겠지만, 컴퓨터는 그 명령에 복종할 수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에는 그런 제약이 없다. 하나님은 순전히 명령만으로 무엇이든 창조하실 수 있다. 그분은 무에서 유(有)를, 죽음에서 생명을 불러내실 수 있다. 그분은 말씀만으로 그 모든 일을 행하실 수 있다.
우주에서 들려온 첫마디는 “있으라!”라는 하나님의 명령이었다. 사실 ’우주에서 들려온 첫마디‘라는 표현에는 모순이 있다. 왜냐하면 그 소리가 났을 당시 우주는 아직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허공‘을 향해 외치셨다.
아마도 그 소리는 공허한 어둠을 가르는 태초의 외침이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은 즉시 음파를 형성하는 분자를 만들어 내 그분의 음성이 허공에서 멀리 퍼져 나갈 수 있게 했다. 그러나 그 음파는 지금 우리가 말하는 음파와는 달랐을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이 전달되는 속도는 광속(光速)을 초월했다. 하나님의 입에서 명령이 떨어지는 순간, 즉시 창조가 이루어졌다. 그분의 음성이 울려 퍼지는 곳에서 수많은 별들이 나타나 천사들의 노랫소리에 박자를 맞춰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환한 빛을 드리웠다. 거룩한 창조의 힘이 뛰어난 예술가의 팔레트에서 뿜어져 나오는 다채로운 색채처럼 하늘 구석구석으로 널리 퍼져 나갔다. 혜성들이 독립기념일에 쏘아올리는 불꽃처럼 꼬리를 밝게 빛내면서 여기저기 하늘 위를 가로질렀다.
창조는 역사상 맨 처음 일어난 일이자 가장 놀라운 사건이었다. 가장 훌륭한 건축가이신 하나님은 자신의 복잡한 설계도를 바라보면서 명령으로 세상의 한계를 정하셨다. 하나님이 말씀하시자 물이 한곳으로 모여 바다를 이루고, 구름은 습기를 가득 머금었다. 미시시피의 봄날처럼 온갖 꽃들이 망울을 터뜨리고, 옅은 자주색 자두나무가 밝은 색 진달래와 개나리와 함께 춤을 추었다. 하나님이 또 말씀하시자 온갖 물속 생물이 생겨났다. 소라가 가오리의 그림자 밑으로 숨어들고, 거대한 청새치가 수면 위로 솟아올라 파도를 타면서 자태를 뽐냈다. 하나님이 또 말씀하시자 이번에는 사자의 포효소리와 양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네발 달린 동물들과 다리가 여덟 개 달린 거미와 날개 달린 곤충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님은 “보기에 좋구나”라고 말씀하셨다(창 1:4,10,12,18,21,25,31 참고). 그런 다음에 하나님은 땅에서 흙을 집어 조심스레 형상을 빚으셨다. 그러고나서 그것에 입을 살며시 갖다 대고는 숨결을 불어 넣으셨다(창 2:7 참고). 그러자 흙으로 만든 형상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형상이 생각하고, 느끼고, 예배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진 생명체였다. [이하 생략]
출처
하나님의 거룩하심, R. C. 스프롤, 지평서원,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