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계 인사 파행, 누가 과학계를 망치나
요즘 우리 사회를 돌아보면 제대로 굴러가는 곳이 있기나 한지 찾기 힘듭니다. 작은 이익 때문에 엉터리 짓을 하는 힘센 자가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요즘처럼 과학계의 인사가 헝클어진 적이 있었던가 싶습니다.
김승환 한국과학창의재단 이사장이 9월 1일 갑자기 사퇴했습니다. 임기를 1년 이상 남겨둔 때였습니다. 스스로는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서라고 했지만 그대로 믿는 사람은 별로 없었습니다. 정부의 압력이 작용한 게 아니냐는 풍문이 돌았습니다. 이 사태는 10월 이화여대 입시 비리가 도마 위에 오르면서 실체가 드러났습니다. 사퇴 후 후임 인선에 들어갔습니다. 10명이 이사장 공모에 응했습니다. 최순실의 딸 정유라의 특혜 의혹과 직결된 이화여대 김경숙 신산업융합대학장의 남편 건국대 어느 교수가 공모에 지원했습니다. 과학분야라 하기 어려운 축산분야 교수가 이사장 공모에 나선 것이고, 이는 '최순실 추문'의 일부였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과학계가 들썩댔습니다. 그는 부적격 처리됐습니다. 다시 공모가 진행됐고 후임이 올 때까지 넉 달 공백이 생겼습니다.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 원장 선임도 안개 속에 있습니다. 공모 과정에서 이미 누가 내정돼 있다는 소문이 나돌았습니다. 평가원 이사회는 이사 13명이 참석하여 새 원장 선출 투표를 했고, 과반 표를 얻은 현 박영아 원장을 차기 원장에 재선임하기로 의결했습니다. 이사회가 원장 승인을 요청지만, 미래부는 뚜렷한 이유 없이 결정을 미뤄오다가, 이런저런 이유를 붙여 연임을 승인하지 않았습니다. 평가원이 출범한 뒤 이사회가 올린 원장 후보를 주무부처가 승인하지 않은 것은 처음이고, 매우 이례적이었습니다. 이 결정에 불복하여 박영아 원장은 미래부 최양희 장관을 상대로 행정소송을 냈는데, 산하기관장이 장관을 상대로 소송을 낸 것도 처음입니다.
과학 분야의 부끄러운 낯
최근 몇 가지 사태에서 드러난 과학계 모습은 낯 뜨겁습니다. 멀리 갈 것도 없습니다. 2015년 메르스(MERS) 사태 때를 보죠. 정부에 초기 대응능력이랄 게 없었습니다. 발생 지역이나 발생한 병원 같은 기본 정보조차 공개하지 않아 온 국민이 불안에 떨게 했습니다. 외국인이 나라 전체를 감염지역으로 오인하게 했습니다. 외국 관광객이, 환자가 발생한 지역만 조심하면 될 것을, 아예 우리나라에 오지 않게 만들었습니다. 국민 경제가 어려운 판에, 정부가 경기를 더욱 얼렸습니다. 그 뒤 감사원은 초동대응 부실 책임을 물어 질병관리본부장 같은 실무 관련자 16명을 징계하도록 요구하는 것에 그쳤습니다. 그때 지휘를 맡았던 문형표 전 장관은 책임을 지기는커녕, 오히려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으로 자리를 옮겨 갔습니다. 시민단체들은 문형표 전 장관을 직무 유기로 고발했습니다. 이들은 “메르스 사태로 국민 건강 망쳐놓고, 국민 노후를 망칠 문형표를 즉각 처벌하고 해임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지금은 국민연금에 손해를 끼친 혐의로 특검의 수사를 받고 있으니, 시민단체의 예측이 맞았습니다.
올해에 와서야 밝혀진 가습기 살균제 사건도 우리에게 뼈아픈 기록입니다. 소비자의 안전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익만을 챙긴 기업, 학자나 연구자로서 최소한의 양심마저 저버렸던 학자, 안전 관리에 무능하고 안전 체계조차 갖추지 못한 정부기관, 이들 탓에 선량한 우리 국민이 아프고 죽어갔습니다.
전문가 지도자로서 자질이 없는 사람이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그들이 우리 사회에 재앙을 던졌습니다. 그 재앙은 선량한 국민을 덮쳤습니다.
과학계 인사 감시와 평가 체제 갖추어야
과학분야에서 지도자는 자기 분야를 통괄할 수 있는 전문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 전문지식은 자기의 연구 실적이나 경력으로 객관적으로 증명돼야 합니다. 그리고, 조직을 이끌 수 있는 자질도 지녀야 합니다. 이런 자질이 있는지는 그 분야의 전문가들이 평가할 수 있고, 마련된 임명 절차를 따르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겁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숨은 손이 제멋대로 휘둘렀습니다.
우리는 인사가 잘못됐음에도 그것을 지적하고 바로잡으려고 나서지 않았습니다. 정부가 엉터리 인사를 임명해도 과학계는 조용히 있었습니다. 이제는 달라져야 합니다.
지원자, 추천권자, 인사권자, 그리고 감시자가 각자 제자리에서 제구실을 할 때 과학계가 제대로 굴러갈 수 있습니다. 임명권자나 승인권자가 적임자를 뽑아야 합니다. 개인 정실에 얽매이지 않아야 합니다. 이 당연한 게 안 되고 있습니다.
적합하지 않은 사람을 임명하려 할 때 나섭시다. 정부의 인사는 그 분야의 전문 단체와 시민 단체가 감시하고 평가합시다. 지금까지의 인사 관행을 바로잡읍시다. 전문가가 전문가답고, 과학자가 과학자다워야 합니다. 과학계가 과학계답지 않으면, 우리 사회가 멍듭니다. 과학계도 인사가 만사입니다. 과학계도 촛불을 들어야 할 때입니다.
[펌] / 필자소개; 고영회(변리사, 기술사. 과실연 공동대표, 성창특허법률사무소 대표) / 2016년 12월 28일 (수) 00:04:14
숙취 해소법
작년 5월 경찰에 비상이 걸렸다. 주한 외교관이 회식 후 행방불명된 것. 주변 CCTV를 샅샅이 뒤진 끝에 이틀 만에 숙소에서 숙취로 잠든 그를 발견했다. 최근 경찰이 이른 아침 집중 음주단속을 벌인 결과 전국에서 수백 명이 적발됐다고 한다. 술이 덜 깬 채 운전대를 잡은 탓이다. 출근길 숙취운전은 말릴 사람도 없어 음주운전보다 더 위험하다.
연말을 맞아 숙취(宿醉)의 나날이다. 온갖 송년모임에서 호기롭게 폭음한 뒤끝은 길고도 괴롭다. 숙취는 알코올이 체내에서 독성이 있는 아세트알데히드로 남아 잠이 깬 뒤에도 속쓰림, 두통, 구토, 심신 무기력 등을 유발하는 현상이다. 술에 섞인 불순물 탓이란 주장도 있다.
우리나라에선 일찍이 속풀이 해장국이 발달해 종류만도 수십가지다. 콩나물, 북어, 복어, 뼈다귀, 선지, 우거지, 재첩, 순두부…. 나름대로 화학적 근거도 있다. 콩나물의 아스파라긴산은 알코올 분해를 돕고, 북어의 글루타치온 성분은 단백질 손상을 막는다. 재첩의 오르니틴은 간 해독에 좋다. 숙취해소 음료나 건강식품도 대개 이런 성분들이다. 요즘엔 숙취해소용 아이스크림, 젤리까지 나왔다.
서양인도 숙취는 마찬가지다. 영어에서 알딸딸한 상태를 tipsy, 엄청 취하면 wasted, 고주망태가 되면 hammered, 다음날까지 이어지면 hangover라고 표현한다. 그런 경험이 많다는 얘기다. 나라마다 숙취해소법도 다채롭다. 미국에선 꿀물과 사이다, 바나나, 커피 등을 먹는다. 토마토주스를 섞은 해장 칵테일 ‘레드아이’도 있다. 영국인은 주로 계란, 토마토를 먹고 보드카에 토마토즙을 섞은 ‘블러디 메리’를 해장술로 마신다.
프랑스는 양파와 치즈 수프인 ‘아 로뇽’을 먹는다. 독일 핀란드 등 북유럽에선 청어절임(롤몹스)을 즐긴다. 콩나물처럼 아스파라긴산이 많다. 스페인에선 달착지근한 추로(일명 츄러스)가 해장음식이다. 보드카 천국인 러시아는 오이와 양배추즙 음료인 ‘라솔’을 빼놓지 않는다.
이웃 일본과 중국은 차를 주로 마신다. 일본인은 우메보시(매실장아찌)를 녹차에 넣어 마신다. 중국인은 인삼 칡 귤껍질 등을 넣은 전통차(싱주링)를 마시고 날계란을 먹기도 한다. 해장음식도 서양인은 대개 차고, 동양인은 따뜻한 편이다.
반면 사우나는 숙취해소에 금물이라고 한다. 술이 깨는 것 같지만 실은 혈관을 확장시켜 알코올 분해를 방해한다. 해장 커피도 많이 마시면 탈수증상이 생긴다. 해장국도 맵고 뜨거운 것은 위벽에 부담을 줘 피하는 게 좋다. 가장 좋은 숙취해소법은 물을 많이 마시는 것이다.
[펌] / 출처; 한경닷컴 / 오형규(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 / 2016-12-27 23:35:26
일본의 신도래인
섬나라이기 때문일까. 일본을 폐쇄적이라고 한다. 그런 속성은 종교에서 잘 드러난다. 기독교인 비중 1%. 많은 일본인은 신도(神道)를 신앙으로 삼는다. 기독교인 1350만 명인 우리나라와는 판이하다. 신도에는 우리의 고대 종교 원형이 남아 있다고도 한다. 의식을 지배하는 상부 문화인 종교. 종교를 보면 폐쇄의 정도를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일본은 폐쇄적이기만 했던 걸까. 도래인(渡來人). 주로 한반도에서 건너간 사람들이다. 삼국유사, “두 왕자는 한산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岳)에 올라 살 만한 곳을 찾았다. … 비류는 말을 듣지 않고 미추홀로 가 살았다. 온조는 위례성에 도읍해 열 명의 신하를 이끌고 국호를 십제(十濟)라고 했다.” 백제 건국에 대한 기록이다. 미추홀은 인천이다.
다른 설도 있다. 남쪽으로 간 비류와 후손은 일본에도 세력을 뻗었다고 한다. 비류 백제설이다. 왜로 간 왕인 박사. 3세기 말 기타큐슈에 세워진 야마토(大和) 정권. 이때 천황의 성 진(眞)씨는 백제 근초고왕 직계 배우자 성씨를 이은 것이라고 한다. 백제 위례성이 고구려군에 짓밟힌 뒤 많은 백제인은 또 일본으로 갔다. 모두 도래인이라고 부를 만하다.
큰 변화는 천년을 넘어 또 일어난다. 1867년 막부를 무너뜨린 메이지 일왕은 부국강병 개혁을 단행했다. 메이지 유신이다. 이 개혁은 근원을 따지면 일본 연안에 출몰한 서양 흑선에 가 닿는다. 일본을 바꾼 것은 외부 변화다. 섬나라이기에 외부 변화에 더 민감한 것은 아닐까.
작은 변화 하나가 또 인다. 일본 아베정부가 1년만 체류해도 영주권을 주는 일본판 그린카드 제도를 도입하기로 했다. 고급 인재를 끌어들이기 위해서다. ‘잃어버린 20년’. 아베노믹스에도 되살아나지 않는 일본 경제. 그린카드에는 변화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을까. 일본으로 가는 인재를 ‘신도래인’이라고 해야 할까. 일본은 변하고 있다.
섬나라 한계를 극복할 때마다 도약을 한 일본 역사. 그럴 때면 한반도는 위험해지지 않았던가. 최순실 게이트에 사공을 잃은 우리나라. 일본 그린카드에 또 마음을 졸이게 된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라는 것일까.
[펌] / 출처; 세계일보 / 강호원(세계일보 논설위원) / 2016-12-28 01:08:18
계란 파동
'꼬꼬댁 꼬꼬댁 보채는 소리를 제일 먼저 알아듣고 암탉 곁에 지키고 있다 갓 낳은 따뜻한 달걀을 손에 넣기까지는 별로 어렵지 않았습니다. 그 달걀을 삶는 것이 문제입니다. 밥솥에 넣어 볼까, 국솥에 들여뜨려 볼까.' 작가 박완서는 1979년 단편 '달걀은 달걀로 갚으렴'에서 손수 닭 키워 계란 팔아 수학여행비 마련하는 시골 아이들과 선생님 얘기를 애틋하게 담았다.
▶60년대 중·고등학교에서 부잣집 도련님의 도시락은 남달랐다. 도시락 뚜껑 열면 둥그런 계란 프라이가 위엄도 당당하게 밥 한가운데를 덮고 있었다. 그 시절 아이들에게 삶은 계란과 사이다는 소풍 때나 싸갈 수 있는 특식이었다. 70년대 지방 소도시에서 자라난 친구는 어머니가 동생들 몰래 밥공기에 깔아준 계란의 기억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다른 자식들 모르게 계란 하나 더 챙겨주는 게 장남에게 해줄 수 있는 지극한 모성애의 표현이었다.
▶1970~1980년대 다방엔 '모닝' 메뉴란 게 있었다. 모닝 커피의 줄임말이다. 설탕·크림 다 넣은 커피에 계란 노른자 동동 띄운 한국식 커피가 모닝 커피다. 전날 마신 술의 숙취를 모닝 커피의 계란 노른자 하나가 싹 달래준다고 믿고 빈속에 들이킨 직장인들이 많았다. 모닝 커피의 계란 노른자에 참기름 한 방울 떨어뜨려 준 오지랖 넓은 다방 마담도 있었다.
▶애니메이션으로도 히트한 황선미의 동화 '마당을 나온 암탉'에서 주인공 잎싹은 양계장에서 매일 알만 낳는 암탉이다. 잎싹이는 어느 순간 양계장 문틈으로 마당을 보며 알을 품어 병아리 기르는 꿈을 꾼다. 더 이상 알을 낳지 못하게 되자 주인에게 버려진다. 잎싹이처럼 알만 낳게 사육하는 닭을 산란계라고 한다. 국내 산란계의 70%가 미국서 개량된 하이라인 브라운 품종이다. 그동안 산란계를 7000만 마리 가까이 길렀는데 이번 AI(조류 인플루엔자)로 2000만 마리 넘게 살처분했다. 그 바람에 계란 공급이 확 줄어 계란값이 껑충 뛰었다.
▶오리나 육계 피해가 많았던 2014년 AI와 달리 이번에는 산란계가 큰 피해를 입었다. 산란계 낳는 씨닭(산란종계)도 84만 마리 중 절반 가까이 살처분돼 계란 파동은 당분간 이어질 전망이다. 우리나라의 1인당 계란 소비량이 연간 254개다. 하루 0.7개꼴로 계란을 먹는다. 그동안에는 전국에서 매일 계란이 4200만 개씩 생산돼 남아도는 게 걱정이었는데 AI 파동으로 갑자기 계란 못사 발 동동 구르는 상황이 됐다. 계란이 서민들에겐 가장 값싸고 영양가 있는 식재료라는데 조금만 주의를 기울였다면 당국의 AI 대응이 이렇게 부실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펌] / 출처; 조선닷컴 / 강경희(조선일보 논설위원) / 2016.12.28 03:16
가죽 꽃매미
제대혈과 차병원
조선 중종 28년(1533년) 2월 11일 약방제조 장순손 등이 “상(上)의 건강이 이제 매우 좋아지셨으니 신들의 기쁨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라고 인사를 올렸다. 임금이 먹은 약은 뭔지 모르게 해야 더 효험이 있기 때문에 이제야 말하겠다고 그들은 머리를 조아렸다. 자하거(紫河車), 바로 태반이었다. 태반은 동의보감에 혈기 보충, 심신 안정, 피부 질환에 좋다고 나와 있다. 대통령이 주사를 맞았대서 요즘 뜨고 있는 그 태반이다.
▷태아는 탯줄로 어머니의 태반과 연결돼 영양을 공급받는다. 태반이나 탯줄에 들어 있는 피를 제대혈(탯줄피)이라고 한다. 단순한 혈액과는 달리 소아암부터 치매까지 난치병 치료에 희망을 줄 줄기세포가 풍부하다. 출산 때 제대혈을 냉동 보관하면 나중에 본인이나 가족의 치료용으로 쓸 수 있다. 이를 수익사업으로 만든 것이 제대혈 은행이다. 소중한 제대혈을 함부로 사고팔지 못하도록 2009년 ‘제대혈 관리법 제정안’을 대표 발의한 국회의원이 당시 한나라당 박근혜 의원이었다.
▷2011년 이 법 시행 이후 제대혈을 사고팔거나 제대혈을 연구가 아닌 미용이나 노화방지용으로 쓰는 건 불법이다. 최근 분당차병원은 연구용으로 기증받은 제대혈을 차광렬 차병원그룹 회장과 그의 부친 차경섭 명예이사장 등 가족에게 9차례 불법 시술했다가 적발됐다. 차움의원은 보건복지부 지정을 받지 않았는데도 노화방지·건강관리 전문의료기관이라고 광고하다 3개월 업무정지까지 받았다. 이곳 단골이었던 최순실과 박 대통령도 혹시 제대혈을 맞지 않았나 하는 억측이 생긴다.
▷차 회장 부자(父子)는 1960년 차산부인과를 시작으로 강남차병원 분당차병원 차의과학대 등을 잇달아 세웠다. 차 회장은 외환위기 때 320억 원을 장학금 등으로 내놓을 만큼 기부에도 적극적이었다. 부친은 1995년 ‘훌륭한 아버지상’을 받고 자부(慈父)라고 스스로 평가했다. 내년에 백수(白壽·99세)인 그가 네 차례 제대혈을 맞은 것은 아들의 효성 덕분인지 모르겠다. 명성을 쌓긴 어려워도 허물어지는 것은 일순간이다.
[펌] / 출처; 동아닷컴 / 이진(동아일보 논설위원) / 2016-12-28 03:00:00
가상과 실물이 만나다
이 엄중한 때, 세계사에서도 흔치 않은 격랑의 와중에서도 언론사마다 송년 특집이나 신년 특집에서 앞다투어 4차 산업혁명과 교육 및 일자리 문제를 다루는 중이다. 어쨌든 우리는 먹고살아야 하고 미래를 내다보고 준비해야 하지 않는가. 산업의 급격한 변화 양상에 대한 국민적 관심은 분명하고, 4차 산업혁명이 가져올 변화와 일자리 문제에 대한 진지한 담론은 형성되고 있다.
증기기관이나 전기의 도입이라는 기술적 혁신은 노동생산성의 획기적 증대로 이어지며 1차 및 2차 산업혁명이라고 부르는 거대한 변화를 낳았다. 컴퓨터와 인터넷이 만들어 낸 가상 세계의 혁신은 인간의 삶의 방식과 일자리의 양상을 크게 바꾸어 디지털 혁명 또는 3차 산업혁명이라고 불린다. 여기에 몇 번의 빙하기를 겪은 인공지능기술이 마침내 혁신에 성공하며 가상 세계는 새로운 수준으로 올라섰다.
이런 가상 세계가 로봇이나 자동차 같은 실물 세계와 연결되자 이전에 인류가 경험해 보지 못한 수준의 생산성 증대가 일어나는 중이다. 가상 세계와 실물 세계의 결합이라는 이 추세는 이제는 4차 산업혁명이라고 불린다. 과격한 수준의 일자리 변화를 동반할 것으로 예측돼 우려도 크지만, 그래서 준비해야 하는 것이리라.
이러한 결합 과정에서 나타나는 문제 중에는 수학적 방식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게 놀라울 정도로 많다. 문제의 성격과 필요에 따라 순수 수학의 전 영역을 활용하는데 산업수학이라 부른다. 이러한 방식의 성공 사례로 주목받는 미국 스타트업 아야스디가 개발한 소프트웨어는 비슷한 생체 데이터를 가진 환자들인데도 추가 암 검진이 필요한지를 구별해 낸다. 기본적인 생체 데이터로부터 당뇨병 유무와 유형까지 자동으로 알아낸다. 위상수학이라고 하는 수학 이론으로 이런 결과를 냈다.
산업수학은 사회 문제 해결의 주요 도구가 되기도 한다. 2012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수학자 로이드 섀플리의 알고리즘을 공립학교 배정에 적용한 뉴욕시에서는 원하지 않는 학교에 배정된 학생이 적응하지 못해 중간에 전학을 가는 경우가 크게 줄었다.
산업과 과학기술 영역에서 빅데이터 등의 이슈가 쏟아지지만, 이미 개발된 수학적 도구를 기업이 활용하는 게 쉽지는 않다. 결국 협업이 답이다. 다행히 시작이 늦은 우리나라도 빨리 따라잡고 있다. 산업 현장에서 나오는 많은 문제를 수학적 방식으로 해결하기 위해 기업이 수학자들과 협업하는 사례가 늘고 있고, 이런 협업을 가능하게 하는 인프라도 빠른 속도로 마련되고 있다.
딥러닝 방식을 에너지 관리에 적용해 건물의 전기 비용을 크게 줄인 국내 스타트업이 출현했고 위상수학 빅데이터를 사용해 조류독감의 감염 경로를 알아낸 기업도 나왔다. 의료 및 영상 처리를 위한 데이터를 분석하는 과정에서도 기업과 수학자들의 협업이 진행되는 중이고, 대형 병원과 함께 심장 문제를 연구하는 수학자도 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지속성을 가지려면, 수학을 전공한 학생들이 학계뿐 아니라 산업계에 진출해 기업의 난관을 수학적 방식으로 돌파할 수 있도록 교육 과정과 제도의 마련이 필요하다. 산업 현장의 문제를 해결하는 젊은이들의 일자리도 늘어날 것이다.
수학을 어려워하는 초중고 학생들에게 이유를 물으면, 배워서 어디 쓰는지를 몰라서 관심도 떨어지고 싫어하게 됐다는 경우가 잦다. 모든 학생에게 수학의 우아함과 언어적 측면을 이해하라고 할 수는 없지만, 사회와 산업의 문제를 성공적으로 해결한 사례를 학생들이 함께 접한다면 수학 학습의 새로운 동기가 마련되지 않을까.
[펌] / 출처: 서울신문 / 박형주(국가수리과학연구소장·아주대 석좌교수) / 2016-12-27 18:48
뉴스의 강철 코어가 무너지고 있다
이완영-이경재 향우회 사진 속 몇몇은 여름 반팔 와이셔츠
최순실 측 위증교사와 관련 없어
탄핵 정국에 쏟아진 오보와 억지… 신문 지면 가득 채울 정도
신뢰할 만한 뉴스의 상실은 민주주의를 위협할 것이다
뉴욕타임스 기자 출신의 앨릭스 존스는 ‘뉴스의 상실(Losing the News)’이란 책에서 정보의 ‘강철 코어(iron core)’가 사라지면서 민주주의가 위협받고 있다고 경고했다. 저자는 현재 미국 하버드대 언론 관련 연구소인 쇼렌스타인센터 소장으로 있다. 정보의 강철 코어는 팩트에 기반을 둔 뉴스를 말한다. 이런 뉴스에 근거해 신문의 논평이 이뤄지고, 시사 프로그램과 인터넷 커뮤니티의 담론이 펼쳐지며, 식사 자리에서 대화가 오간다.
나로서는 박근혜 대통령 탄핵 정국에서 정보의 강철 코어가 붕괴되는 것을 목격하는 기분이다. 국회 최순실 국정 농단 국정조사장에서 박영선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이완영 새누리당 의원과 최 씨 변호인인 이경재 변호사가 향우회에서 만나는 사진을 공개했다. 이 사진이 위증교사 의혹의 증거로 거의 모든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디지털 사진 시대에 촬영 시점이 없는 사진에 의심을 갖는 데 기자의 감각까지 필요하지도 않다. 신문에 난 사진을 자세히 보니 몇몇 참석자는 여름 반팔 와이셔츠를 입고 있다. 사진은 최 씨 사건이 터지기도 훨씬 전에 찍혔다.
이런 사진을 믿고, 아니 믿는 척하고 일부 신문에서는 심각한 논평을 냈고 시사 프로그램의 패널들은 흥분해 떠들었다. 네이버와 다음은 이런 뉴스일수록 더 많이 더 오래 포털에 띄운다. 이렇게 잘못된 여론이 형성된다. 그런 여론에 비위를 맞추려고 인명진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은 이 의원이 국정조사 위원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압박하고 있다.
최 씨 아들은 청와대에서 근무한 적이 없다. 아니 아들 자체가 없다. ‘길라임’이라는 가명은 박 대통령이 아니라 차움병원의 한 직원이 임의로 만든 것이다. ‘통일 대박’은 최 씨가 만든 말이 아니라 신창민 교수의 책 ‘통일은 대박이다’에서 나왔다. 최 씨의 언니 순득 씨는 박 대통령의 성심여고 동창이 아니다. 포털은 찌라시를 닮아가고 언론은 그런 포털을 닮아가고 있다. 명백한 오보들만으로도 신문 지면 하나를 가득 채울 수 있을 정도다.
나는 현장을 취재할 수 없어서 국정조사 청문회만은 빼놓지 않고 보려고 노력했다. 최근 언론 보도 중 믿을 수 없는 게 너무 많아 직접 당사자들의 말을 듣고 싶었다. 당사자들이 거짓말도 하겠지만 거짓말이라 할지라도 표현이나 표정에서 뭔가를 읽을 수 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청문회를 다룬 뉴스의 내용이 내가 청문회를 보면서 느낀 것과는 너무 다르다는 점이다.
기자는 취재할 때 가설을 세운다. 그러나 기사는 가설이 아니라 사실을 써야 한다. 정윤회 문건을 작성한 박관천 전 경정은 비선 실세를 느꼈다. 그 문건이 폭로됐을 때 비선 실세에 주의했더라면 지금과 같은 비극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왜 최순실이 아니라 정윤회를 중심에 놓고 문건을 만들었을까. 사실이 아니라 가설에 기초했기 때문이다. 정윤회가 최순실에 이은 권력서열 2위인지도 의문이다. 그는 최순실 게이트에서 그림자도 비치지 않는다. 언젠가 정윤회가 등장할 것이라고? 그래 기다려 보자. 그러나 첩보 보고가 아니라 기사라면 그때나 가서 써야 한다.
워터게이트 사건은 도청 현장팀에서 중간 관리자를 거쳐 백악관 참모와 대통령에게로 단계적으로 올라가는 구조였다. 그러나 최 씨의 국정 농단은 박 대통령과 최 씨의 직접적이고 비밀스러운 관계로 출발했다. 워터게이트 사건처럼 공식 라인에서 중간 단계의 조력자가 꼭 필요한 구조가 아니다. 그런데도 김기춘 전 비서실장과 우병우 전 민정수석이 최 씨와 잘 알았을 것이라는 가설에 매달린 기사들이 쏟아지고 있다. 일부는 상상력이 부족해서 그럴 수도 있고, 일부는 우 전 수석 처가와 넥슨의 부동산 거래를 다룬 의혹 기사 이후 이를 어떻게든 합리화해 보려는 바이어스(bias) 때문에 그렇다고 볼 수도 있다.
최순실의 국정 농단을 밝혀내고 박 대통령의 탄핵소추를 이끈 것은 언론의 개가(凱歌)다. 그러나 대통령 관련 보도에 대한 견제가 한번 무너지자 언론은 가장 신중하지 못한 태도로 돌변해 이 나라를 ‘아니면 말고’ 뉴스 공화국으로 만들어버렸다. 탄핵 정국에서만의 일이라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계속된다면 민주주의는 심각한 위협을 받을 수 있다.
[펌] / 출처; 동아닷컴 / 송평인(동아일보 논설위원) / 2016-12-28 05:23:30
수재 관료들의 바보놀음
국민들이 처단한 대통령 헌정 농단. 청렴사악한 ‘권력충’들은 어찌하나
이 즈음이면 식자(識者)들은 저물어간 한 해의 세태를 사자성어로 풍자하는 유희(遊戱)를 즐긴다. 매년 촌철살인의 사자성어를 뽑는 교수신문은 올해 ‘군주민수(君舟民水)’를 내놨다. “백성은 물, 임금은 배이니 강물은 배를 뜨게 하지만 화가 나면 뒤집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이 밖에 후보로 거론됐던 사자성어를 보니 천리를 거스르는 자는 패망한다는 뜻의 ‘역천자망(逆天者亡)’, 이슬이 모여 바다를 이룬다는 ‘노적성해(露積成海)’ 등이 있었다. 박근혜 대통령의 헌정 농단 사태와 이에 맞서 결연히 일어난 촛불 민심을 빗댄 비유가 주를 이루었다.
교수신문의 사자성어는 오랫동안 인심과 세태를 풍자하는 것으로 날카롭지만 씁쓸하게나마 웃어넘길 만한 여유가 있었다. 한데 최근엔 가벼운 유머조차 사라지며 비장함마저 감돈다. 지난해엔 대통령을 직접 겨냥한 ‘혼용무도(昏庸無道)’를 뽑아 본격적으로 국가 리더십에 대한 의심을 표현했다. “혼용은 어리석고 무능한 군주를 가리키는 혼군(昏君)과 용군(庸君)을 합친 것으로 각박해진 사회 분위기의 책임을 국가 지도자에게 묻는 말”이라고 설명했다.
지난해 말 나도 이를 빌려 중국 명(明)나라의 대표적 혼군 만력제(萬歷帝)의 사례를 들어 박 대통령의 일하는 방식을 걱정하는 칼럼을 썼다. 출근하지 않고 관저에 틀어박혀 있었던 박 대통령처럼 만력제도 조정에 나가지 않고 인사도 제때 하지 않는 태정(怠政)에다 개인 축재에 힘을 쏟으며 환관 세력이 발호하도록 함으로써 나라를 멸망으로 끌고 간 왕이었다.
비록 박 대통령은 취임 초부터 불통과 무능으로 국민들을 걱정시켰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우리에겐 이런 근심과 우려를 대통령에게 전달해 스스로 각성하고 성찰할 수 있도록 하려는 열망도 컸던 것 같다. 그런데 이젠 알게 됐다. 근심스러운 국가 리더십은 나라의 우환거리일 뿐 대반전이나 기적을 기대해선 안 된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나도 웃음기 거두고 교수신문이 주목하지 않았지만, 대통령 못잖은 우리 사회의 우환거리에 대해 연말 유희 삼아 사자성어를 하나 뽑아보려고 한다.
‘가치부전(假痴不癲)’. 바보인 척 하되 시쳇말로 ‘정신줄’을 놓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병법 36계 중 27계로 적의 기운을 빼놓는 ‘병전계(幷戰計)’의 계책 중 하나다. 똑똑함을 숨기고 자존심을 누르며 손가락질을 감내하는 역발상의 처세술. 한신과 사마의가 성공했던 높은 경지의 술수다. 한데 김기춘·김장수·우병우 등 이 정권 핵심 관료들의 국정조사 청문회에선 웬만한 내공으로는 도달하기 힘들다는 ‘가치부전’ 달인의 경지를 목격할 수 있었다. 이들은 또 거짓과 진실을 교묘하게 섞어 현혹하는 ‘무중생유(無中生有)’의 기술로 본질을 흐트러뜨리고 진실을 허물어 사태를 혼미하게 만드는 신묘한 재주도 구사했다. 소년 등과하고 권력의 핵심부로만 질주했던 이 나라 대표 인재들의 바보놀음에 청문회는 무능하게 겉돌았다.
이들이 무능·나태하고 속된 말로 ‘허세 쩌는’ 대통령 앞에선 바보처럼 굴고 뒤에선 무슨 일을 했을까. 이번 정부 들어 스포츠와 문화융성, 창조경제 말고도 이상하게 돌아갔던 정책과 인사의 난맥상은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인데 여기에서 이 수재 고수들의 권력놀음은 없었을까. 이런저런 의심들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중에 특검에서 새나오는 김기춘의 재임 시절 혐의들을 보고 있자면 의혹이 현실로 구현될 것 같은 오싹함이 느껴진다. 한데 그들을 기소해봐야 직무유기·직권남용 정도란다. 뒷돈 챙긴 증거는 없으니 크게 걸게 없다는 것. 하긴 권력 핵심을 꿰차는 능력 있는 수재들이 탈날 만한 사소한 뒷돈을 챙기진 않았겠지. 문제는 국민 기운만 빼는 이런 청렴사악한 권력놀음은 벌할 방법이 마땅찮다는 거다.
이들을 보며 깨달은 건 있다. 대통령만 보면 안 된다는 것. 주변 인사들도 부정부패뿐 아니라 권력에 탐닉한 사악한 ‘권력충’들이 아닌지 깨알같이 검증해야 한다는 것. 다음 대선을 위해 꼭 기억할 일이다.
[펌] / 출처: 중앙일보 / 양선희(중앙일보 논설위원) / 2016.12.28 0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