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대봉 기슭에 비가오면 바위절벽 위의 선계사 절터에서
60m 높이의 폭포수가 쏟아지는데 이를 선계(仙界)폭포라 한다.
일설(一說)에는
조선 태조 이성계가 왕이 되기 전 이곳 절벽 위 암자에서 무예를 수련하다 뛰어내리면서 칼을 휘둘렀는데
그때 절벽 바위가 길게 잘렸다는 설화가 전해지면서 남대봉 '성계골'이라고도 한다
교산(蛟山) 허균(許筠, 1569~1618)은 이곳 어딘가에 있던
정사암(靜思庵)을 고쳐짓고 살면서 유명한 홍길동전을 집필하였다.
암벽위의 세계는 속세를 떠나 신선들이 사는곳이라고 선계라 하였음직 하다.
매창 이계랑(李桂娘·1573~1609)은 부안에서 태어나 서른일곱 살에 부안에서 죽었다.
허난설헌, 황진이와 함께 조선 3대 여류 시인으로 꼽힌다.
하지만 삶은 기구했다.
틀림없이 행복했을 소녀 시대가 끝나고,
아전 하급 관리의 서녀로 태어난 계랑은 관기(官妓)가 되었다.
스스로 기명(妓名)을 매창이라 했다.
그녀가 웃음과 노래와 시를 팔던 연회장에는
16세기 최고 시인 유희경, 혁명가 허균이 끼어 있었다.
두 사내는 단 한 번도 그녀를 매창이라 부르지 않았다.
유희경은 정인(情人)이었고 허균은 문우(文友), 벗이었다.
셋은 대등한 영혼으로 흠모했고 사랑했다.
임진왜란 와중에 유희경과 헤어진 매창은 이런 시를 남긴다.
梨花雨 흣날릴 제 울며 잡고 離別한 님/
秋風落葉에 져도 나를 생각는가/
千里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쾌라('梨花雨')
'나 아끼던 거문고와 함께 묻으라.' 유언과 함께 그녀가 요절했다.
허균은 '복숭아를 훔쳐서 인간 세계로 내려왔다가 불사약을 훔쳐서 떠났다'고 했다.
무덤은 '매창이뜸'이라 불렸다.
사후 45년 만에 묘비가 서고, 사람들은 글을 모아 시집을 편찬했다.
생전 즐겨 찾던 개암사 승려들을 채근해 목판본을 만들었다.
불티나게 팔린 덕에 파산 직전에 이른 개암사가 목판을 불살라버렸다고 했다.
가족 없이 죽은 여자를 300년 넘도록 나무꾼들이 보살폈다.
1917년 사람들이 세운 비석에는 이리 적혔다.
'명원이매창지묘(名媛李梅窓之墓)'.
기생(妓)이 아니라 '재주 있는 여인(媛)'이다.
기녀였으되 남자들에게 택함을 당하지 않고,
스스로 사랑과 우정을 택해 옷고름을 풀고 마음을 열었던 당당한 여자,
계랑이다.
무덤은 부안읍내 매창공원에 있다.
“봉래산 가을빛이 한창 무르익었으리니,
돌아가고픈 흥을 가눌 길 없네.
낭자는 내가 구학의 맹세를 저버렸다 응당 비웃겠지.
그때 만약 한 생각이라도 어긋났다면
나와 낭자의 사귐이 어찌 10년간 끈끈하게 이어질 수 있었겠나?
언제나 하고픈 말 마음껏 나눌 수 있을지.
종이를 앞에 두니 서글퍼지는구려.”
- 허균이 이매창이 죽기 1년 전 이매창에게 보낸 편지 -
깎아지른 듯한 암벽에 천연적으로 뚫린 굴의 높이는 8m, 깊이는 30m 쯤 된다.
굴 안쪽에는 사람이 웅크린 듯한 모습의 움푹 파인곳이 있는데,
혹자는 여인의 자궁을 연상하게 하는 형태라고도 한다.
오래전 굴바위에는 ‘참샘’이라 불리던 샘이 있었다.
복지깨(밥그릇 뚜껑의 방언)로 참샘의 약수를 마시면 모든 병이 낫는다고 하였고
특히 한센병에 효험이 있었다고 한다.
굴바위바닥에 귀를 대고 들어보면 물 흐르는 소리와 파도소리가 들린다고 하며
굴의 깊이가 얼마나 긴지 알 수 없어 여기에서 불을 지피면
그 연기가 열흘 후 80리 떨어진 변산해수욕장 해창으로 나온다고 전해지고 있다
담쟁이덩굴(Japanese Ivy , 洛石 , ツタ蔦)은
돌담이나 바위 또는 나무줄기, 심지어 매끄러운 벽돌까지 가리지 않고
다른 물체에 붙어서 자라는 덩굴나무다.
줄기에서 잎과 마주하면서 돋아나는 공기뿌리의 끝이 작은 빨판처럼 생겨서
아무 곳에나 착 달라붙는 편리한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벽면(壁面)에 붙어 자라는 모양새를 보면 재미있다.
대체로 식물의 뿌리는 중력과 같은 방향인 땅속으로 자라고 줄기는 중력과 반대 방향인 위로 자란다.
그러나 담쟁이덩굴의 줄기는 이런 규칙을 꼭 따르지는 않는다.
공간이 비면 위나 옆은 물론 아래쪽으로 뻗는 것도 주저하지 않는다.
나무이름은 흔히 담장에 잘 붙어서 자란다고 하여 ‘담장의 덩굴’이라고 부르다가 ‘담쟁이덩굴’이 되었다.
한자 이름은 돌담에 이어 자란다는 뜻으로 ‘낙석(洛石)’이라고 하여 같은 뜻이다.
옛 양반가를 둘러치는 토담에는 담쟁이덩굴이 올라가 있어야 제대로 된 고풍스런 맛이 난다.
그러나 토담에서 시멘트 담으로 넘어오면서 담쟁이덩굴은 차츰 퇴출당했다.
줄장미와 능소화가 담장의 나무를 대신하였고, 담쟁이덩굴은 숲속의 나무 등걸을 타는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갔다.
담쟁이덩굴은 담이 아니더라도 회색빛 콘크리트 건물을 뒤덮으면 건물의 품위도 올라가고
아울러서 중요한 역할도 할 수 있다.
여름에 햇빛을 차단하여 냉방비를 30퍼센트 정도 줄일 수 있으니
요즘처럼 온 나라가 에너지 문제로 난리일 때는 더욱 그 역할이 돋보인다.
겨울에는 잎이 떨어져 햇빛을 받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
미국이 자랑하는 단편작가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는 우리에게 잔잔한 감동을 준다.
가난한 화가 지망생인 존시는 폐렴에 걸려 죽어가고 있으면서,
이웃집 담쟁이덩굴의 잎이 모두 떨어지면 자신의 생명도 다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비바람이 휘몰아친 다음날 틀림없이 나목(裸木)으로 있어야 할 담쟁이덩굴에
마지막 잎새 하나가 그대로 붙어 있는 것을 보고 다시 삶의 의욕을 갖게 된다.
기운을 차린 존시에게 친구인 수우가 ‘그 마지막 잎새는 불우한 이웃의 늙은 화가가
밤을 새워 담벼락에 그려 넣은 진짜 이 세상의 마지막 잎새’임을 일러주는 내용이다.
담쟁이덩굴 잎은 가을이 되면 단풍나무를 시샘이라도 하듯 붉은 단풍이 아름답게 든다.
이 담쟁이덩굴의 단풍은 단번에 잎을 떨어뜨리게 하는 ‘떨켜’가 잘 생기지 않으므로
바로 떨어지지 않고 겨울에 들어서야 떨어진다.
봉우리 100개가 넘는다는 변산에 옥녀봉 이름을 가진 봉우리가 세 곳이나 된다.
북옥녀봉으로 불리는 금산(金山) 마을의 옥녀봉과 지포의 옥녀봉,
그리고 이곳의 남옥녀봉으로 불리는 감불(甘佛. 坎佛) 마을 및 우동(牛洞) 마을의 옥녀봉이다
용각봉 삼거리를 거치는 이곳 남옥녀봉은
전설이 깃든 굴바위, 선녀가 비단을 짜는 베틀의 바드인 바드재가 있어
직금옥녀(織錦玉女)에 해당되는 지형이다.
울금바위 일원은 고려시대 문신 이규보가 쓴 기행문 ‘남행월일기’(南行月日記)와
조선 후기 문인이자 화가인 강세황이 남긴 ‘유우금암기’(遊禹金巖記)에 기록됐을 정도로
오랫동안 사랑받은 자연유산이다.
‘우금바위’로도 알려진 울금바위는 우뚝 솟은 바위가 주변의 경관과 어울려
변산의 경관을 한 데 모으는 구심점이 되는 자연유산이다.
아래쪽에 있는 많은 동굴은 수행 공간으로 이용됐고,
주변에는 백제 패망 후 부흥운동이 일어난 장소로 알려진 우금산성과
삼국시대에 세워진 고찰 개암사가 있다.
한반도를 호랑이라고 볼 때
금강산을 봉래산(蓬萊山)이라 하고, 지리산을 방장산(方丈山)이라 하며, 한라산을 영주산(瀛洲山)이라 하여
삼신산(三神山)으로 칭하는 바!
이에 견주어..
변산을 '새끼 호랑이'에 해당한다는 풍수론적 설명으로 전개할 시에
변산은 봉래산으로, 고창의 방장산, 그리고 고부(정읍)의 두승산을 영주산으로 칭하기도 한다
가마소(가마솥처럼 다양한 모양의 늪(沼, 소)을 이루고 있다 하여 불리우는 이름)는
변산에서 가장 깊은 동네였으며,
십승지(十勝地)중의 한 곳이었기에!
한 때는 구도하고 수행하는 '비결장이'들이 선호하던 곳이었다.
변산 실상사는 689년(신문왕 9년)에 초의선사(草衣禪師)가 창건해
조선시대 양녕대군(讓寧大君)에 의해 중창된 천년고찰로
고려시대에 만든 불상과 대장경·효령대군원문(孝寧大君願文)·고사경(古寫經)·고인경(古印經)·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 등 다수의 국보급 유물을 소장하고 있었으나
1950년 한국전쟁 때 사찰과 함께 전부 소실되었다.
- 등로에서 바라본 실상사지(實相寺址) -
"세종대왕이 지은 歌詞 월인천강지곡이 어떻게 외진 전라도
변산반도의 실상사에 보관되어 있었는가?
실상사와 월인천강지곡, 그리고 효령대군과는 어떠한 因果가 있었는가?"라는
근본적 물음에서부터 동학농민전쟁, 일제 강점기, 6·25전쟁이라는 근대사 전개과정에서 월인천강지곡의
소장 경로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요컨대 이 글은 월인천강지곡이란 책자가 1462~1466년 실상사 奉安된 이후 1960~1970년대까지
약 500년간 역사적 공간을 추적해 그 傳存 과정을 살펴본 것이다.
그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15세기 중엽 효령대군에 의해 부안 실상사에 월인천강지곡이 佛腹藏됨
20세기 초, 1462년과 1466년에 작성된 실상사 三尊佛 조성을 위한 普勸詞(勸善文) 2건과
실상사 중창 發願文 1건이 발굴되었다. 이 3건의 고문서를 통해 효령대군에 의해 실상사 삼존불이 조성되었고,
4년 뒤에 실상사가 중창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삼존불 조상과 사찰의 重建을 계기로 월인천강지곡이 효령대군에 의해 佛腹藏되었다.
실상사에 월인천강지곡이 소장된 것은 이 절이 바로 세조의 願堂으로서 사회·경제적 위상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② 19세기 말 동학농민이 실상사 불상을 파괴하면서 월인천강지곡이 세상에 나오게 됨
1894년 동학농민들은 실상사 부처의 몸에 금은보화가 숨겨져 있다는 말을 믿고 불상을 파괴하였다.
이 때 금은보화는 발견되지 않고 다수의 고서와 고문서가 불복장 속에서 쏟아져 나왔다.
이때 월인천강지곡이 세상에 나왔으나 이를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③ 1914년 白鶴鳴 스님이 부안 實相寺 불복장에서 월인천강지곡을 발견함
1914년 봄, 부안 來蘇寺에서 20리 거리에 있는 실상사의 법당이 퇴락하고
本尊佛도 더 이상 수리할 수 없게 되자
당시 내소사 주지였던 백학명 스님이 불상의 腹中에 봉안된 월인천강지곡 상권 1책을 발견하였다.
④ 1918년 鞠黙潭 스님 인수함
1918년 10월, 국묵담(1896~1981) 스님이 내소사에서 당시의 실상사 주지 金性連 스님에게서
'월인천강지곡 상’을 인수해 왔다. 이후 국묵담 스님의 주석처를 따라
백양사 청류암, 담양 용화사에서 보관, 관리하였다.
⑤ 1961년 光州遞信廳 陳錤洪 청장 인수함
1961년 1월 23일, 국묵담 스님이 「월인천강지곡을 陳遞信廳長님께 드리는 말씀」이라는
서한과 함께 월인천강지곡을 당시 광주체신청 청장이었던 진기홍 씨에게 인계하였다.
1963년 9월 2일, 문화재청은 진기홍 씨가 소장하던 월인천강지곡을 보물 제 398호로 지정하였다.
⑥ 1972년 大韓敎科書 주식회사 金光洙 사장 인수함
1972년 7월 21일, 대한교과서 주식회사(현 ㈜ 미래엔) 김광수 사장이 진기홍 청장으로부터
월인천강지곡을 인수하여 회사에서 收藏하였다.
⑦ 2013년 韓國學中央硏究院 藏書閣에서 위탁 관리함
㈜미래엔에서 월인천강지곡을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寄託, 2013년 6월 26일 기탁식을 거행하였다.
이때 ㈜미래엔 김영진 사장,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정길 원장 등이 참석하였고,
이때부터 장서각이 관리의 주체가 되었다.
- 출처_국회 전자도서관 -
내변산 사자동 내변산 탐방센터에서 직소폭포 들머리로 산행을 시작하다 보면
실상사지 가기 전에 청보리밭 뒤로 예사롭지 않은 바위가 좌측으로 보인다.
이 바위는 도장(圖章)을 세워놓은 것처럼 생긴 바위 같다고 해서 인장바위 또는 장군바위라고 부른다.
또한 내변산 입구 사자동 방향에서 보면 그 생긴 모습이 코끼리 닮았다고 하여 코끼리 바위라고도 한다.
첫댓글 역시!
구슬이 서말이여도 꿰어야 보물이라고 하더니 유목민대장님에 의해서 정리되고보니
정말 좋군요
가봤지만 다시 가보고 싶은 마음이 드네요!
비록 서로가
같이하지 않았지만~
동행한 이상으로 큰 감흥이 서린 댓글로 응원해준
우리의 완보님께 감사함을 전하노라!
때가 되거나
끌림이 닿는 변산행이
이뤄지길 기대해도 될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