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남부 볼고그라드에는 중앙아시아에서 러시아로 재이주한 고려인 동포들이 약 3만명 가량 안정된 정착을 꿈꾸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중아아시아 각국으로부터 모여든 우리 동포들은 저마다의 살아온 환경과 문화의 차이를 극복하고 우리문화와 민족의 정체성을 되찾으며 동포사회의 화합과 재이주의 안정된 정착을 위하여 고려인 축제를 해마다 개최하고 있습니다.
2001부터 시작한 ‘고려인 축제’가 올해로 7회째를 맞이합니다.
6회의 축제를 거치면서 고려인들만의 축제가 아닌 여러 민족들이 참여하고 함께 즐기는 다민족 · 다문화의 축제의 장으로 볼고그라드 지역의 중요한 지역문화 행사로 자리 잡아가고 있습니다.
□ 축제를 준비하며
올해 개최하는 제7회 고려인 축제는 고려인들이 직접 재배한 배추들을 가지고 한국의 대표음식인 “김치”를 테마로 하는 “김치축제”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볼고그라드에서 최초로 시도되는 김치축제이며, 한국 음식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는 고려인 음식문화의 재발견 및 확대를 통해 고려인 음식을 알리고 나아가 한국 전통음식인 ‘김치’의 맛과 우수성을 알리는 음식문화축제를 개최하고자 합니다.
김치 담그기 시연과 김치 시식회, 다양한 종류의 김치 전시회 등을 통해 잊혀져 가는 한국 전통음식을 알리고, 다민족 국가인 러시아 현지 입맛에 맞게 업그레이드를 함으로써 세계인의 음식으로서 ‘김치’의 문화산업적 가치를 확인하고, 한국음식의 새로운 한류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번 축제를 통해 고려인들의 위상제고와 한국음식에 대한 소개 그리고 장기적으로는 김치사업을 통해 고려인들의 경제적 자립을 위한 방향으로 발전시키고자 합니다.
이미 여섯 차례에 걸쳐 개최한 <볼고그라드 고려인 축제>는 고려인의 영역을 넘어 모든 민족이 공유할 수 있는 다민족 ・ 다문화의 축제로, 고려인들이 주축이 되어 한국의 전통음식과 문화를 알리고, 러시아 현지의 문화를 접목시켜 새로운 문화행사로서의 모범적인 모델로 성장하고 나아가 ‘김치’의 문화산업적 가치를 통해 고려인들의 경제적 자립에 도움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1. 축제의 의의 및 목적
◦ 고려인축제 목적
- 볼고그라드 유일한 소수민족 축제로 고려인들의 위상 제고
- 민족적 자긍심과 정체성 확립
- 타민족과의 교류를 통한 다민족 ‧ 다문화의 장 마련
- 남부 러시아 고려인들의 문화 구심점으로서의 역할 기대
◦ 김치축제 세부목적
- 한국 음식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는 고려인 음식문화의 재발견 및 확대
- 한국 전통음식 ‘김치’의 맛과 우수성을 알리고 다양한 종류의 김치 소개 및 홍보
- 김치의 문화산업적 가치를 확인하고, 추후 고려인들의 경제적 자립의 밑거름
2. 일시 및 장소
○ 일 시 : 2008년 10월 11일(토), 오전10시 ~ 오후6시
○ 장 소 : 센트랄리 콘쩨르리 잘(볼고그라드 중앙문화회관)
○ 주 최 : 볼고그라드 고려인 민족문화자치회(HKA)
볼고그라드 우리민족서로돕기본부 (ЦВК)
볼고그라드 한글∙문화학교
○ 후 원 : 볼고그라드 시 / 사회복지공동모금회 / 광주시
볼고그라드주 개괄
○ 지리적 개괄
볼고그라드주는 러시아 볼가강 하류 지역에 있는 주로서 주도(州都)는 볼고그라드. 면적 11만 3900km2. 인구 약 270만 4천(1996). 볼가강의 서안은 해발고도 100~300m의 구릉지대이고, 동안(東岸)은 수십m 내외의 저평한 평야가 전개된다. 식생은 스텝, 토양은 흑토가 훨씬 많고, 비옥한 농경지에서는 밀을 비롯한 농산물을 재배한다. 석유 ·천연가스가 산출되어 볼고그라드시(市) 주변에서는 중공업이 발달하였다. 볼고그라드시(市)에서 서쪽의 돈강으로 볼가-돈 운하가 통한다. 볼고그라드(Волгоград)란 볼가(Волгa, 볼가강)와 고라드(горад, 도시)의 합성어로 ‘볼가강을 끼고 있는 도시’라는 말이다. 볼고그라드는 볼가강을 끼고 약 100키로나 길게 늘어져 있는 도시이다. 볼고그라드는 러시아에서 남동쪽-동 유럽 쪽에 위치하고 있다. 볼고그라드는 볼가강을 중심으로 남쪽은 볼가강 우편이고 동쪽은 볼가강 건너편으로 두 부분으로 나누어 진다. 볼고그라드는 모스크바에서 남쪽으로 1,073 키로미터 떨어져 있으며 비행기로는 모스크바에서 1시간 40분이 소요된다.
○ 인구 및 행정구역 개괄
현재 볼고그라드 주 전체 인구는 대략 270만 명으로 러시아 전체 1.8%의 인구가 살고 있으며, 그 가운데 200만 명이 도시 지역에 거주한다. 또한 전체 인구에서 러시아인이 차지하는 비율이 90%로 매우 높은 편이며, 볼고그라드에는 약 60개의 민족이 어우러져서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다.
볼고그라드에 살고 있는 인종 분포는 러시아인이 89,1%이고 우크라인이 3,1%이다. 그 외에 카잔인(1,6%), 독일인(1,1%), 타타르인(1%), 벨라루시아인(0,6%), 체첸인(0,4%), 추바신인(0,4%), 마리인(0,3%), 아제르바이잔인 (0,3%), 아르미니안인(0,3%), 집시(0,2%), 몰로모드바인(0,2%), 몰다비안인(0,1%), 우두므르인(0,1%), 유럽인(0,1%)이다. 그러나 개방 후 가장 크게 변화가 있는 민족은 독일인과 한국인일 것이다. 독일인은 독일인 마을을 만드는 등 독일 정부에서 많은 투자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살기 좋은 조국으로 거의 다 돌아갔다. 특별히 1992년 타지키스탄의 내전으로 타지키스탄 사람들이 자유를 찾아 이동해 왔고 아르미니안들이 이동이 증가해 이곳에 아르미니아인이 증가한 것으로 보인다. 이 밖에도 우크라이나인, 카자크인, 독일인, 타타르인, 한인 및 기타 소수 민족이 살고 있다.
행정 구역은 33개 구역으로 이루어 졌고, 여기에는 19개 시, 27개의 도시형 촌락과 445개 농촌 행정 단위가 있다. 인구 밀도는 1 ㎢ 당 23, 7명이다. 볼고그라드시(1백만 명) 외에 주요 도시로는 볼시키(30만 명), 까므르신(12만 3천명), 미하일로프까(6만 4천명) 등이 있다.
○ 자연 및 산업 환경 개괄
볼고그라드 주는 볼가 강 하류와 돈 강 중류 지역에 걸쳐 있다. 볼고그라드 면적은 11만 3천 9백 ㎢ 로 전제 러시아의 0.7%의 영역을 차지한다. 이 면적은 남한 보다 넓은 면적으로 매우 다양한 지리적 양상을 보이며 특수한 자연 경관을 이루고 있다. 볼고그라드 주 전체는 스텝 지역이다.(농사짓기에 적합) 총 30개의 유전 및 가스전이 있으며 점토 자갈 모래 석회암 등 건축 자재 산지도 다수 산재해 있다.
기후는 건조성 대륙성 기후로서 연간 기온차가 매우 크다. 여름에는 매우 덥고 일조량이 많다. 여름에는 30도를 오르내린다. 겨울은 그리 춥지 않는 온도이다. 겨울 역시 다른 러시아 지역에 비해서 일조량이 많다. 겨울에 날씨가 따뜻하며 안개가 많다.
산업은 주로 공업과 농업이다. 공업으로는 전력 기계제작, 화학 공업 등이며 농업은 채소, 과일, 해바라기, 밀, 보리, 겨자를 생산하며 축산업 등이다. 볼고그라드에는 석유, 천연 가스, 시멘트, 요리용 소금등 유용한 광물들이 유명하다. 볼고그라드 주는 160개가 넘는 공장들이 산재해 있는 중공업 도시이기도 하다. 중요 산업 현황은 화학과 석유화학공업(20%), 제철및 차량산업(15%), 연료산업(15%), 식료품산업(11%) 이다.
볼고그라드는 농업 생산물이 전 러시아에서 세 번째로 많다(사라토프, 따다르스탄). 특별히 볼가-악투빈스키 지역에서는 밀, 야채, 수박, 포도, 쌀, 각종 열매들이 생산된다. 이곳에는 특별히 질이 매우 높아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토마토가 재배 된다.
○ 볼고그라드시
러시아 볼가강(江) 하류의 중공업도시로서 인구는 약 101만(2003). 처음에는 차리친(예카테리나 여왕의 도시)이라 불렀고, 1925~1961년까지는 스탈린그라드(스탈린의 도시)라 불렀다. 볼가강 우안(右岸)의 큰 항구도시이며, 강을 따라 시가가 70km나 이어진다. 볼가-돈 운하의 기점(起點)이며, 철도역과 공항도 있다. 시의 기원은 1589년 볼가 수로의 방위를 위해 볼가강 우안에 만들어진 요새이며, 그 후 페르시아 및 중앙아시아와의 교역 및 화물적환점(貨物積換點)이 되어 번영하였다. 자본주의의 발전과 함께 목재 ·야금(冶金) 공장이 생겼으며, 혁명 후 소련의 제1차 5개년계획시대(1928~1932)에는 집중적으로 공업화가 추진되어, 세계적 규모의 트랙터 ·전차(戰車) 공장 등이 건설되었다.
일찍이 1917~1918년의 차리친 공방전과, 제2차 세계대전 때의 스탈린그라드 공방전에서 적군을 격퇴하여, 소련을 위기에서 구한 곳으로서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후자의 공방전으로 시가는 완전히 파괴되었으나, 전후에 곧 복구되어 공업이 더욱 발전하였으며, 제강 ·야금(철 ·알루미늄) ·기계(트랙터 ·모터 ·석유채취기 ·굴착기 ·조선) ·자동차 ·선박수리 ·석유화학 ·목재가공 ·건재(建材) ·제화(製靴) ·시멘트 ·콘크리트 ·내화벽돌 ·피혁 ·제분 ·식품(통조림 ·유지 ·식육) 등의 공장이 집중되어 있으며, 세계 굴지의 발전소(정식으로는 제22차 당대회기념 볼가 수력발전소, 발전능력 250만kW)도 설치되어 있다. 또 대안(對岸)의 약간 상류 쪽에는 신흥 석유화학공업도시인 볼스키와 크라스노슬로보드스크(조선 ·목재가공)가 생겼다. 볼가강 우안의 저지에 공업지대가 있고, 그 배후의 경사면에는 공원과 녹지대가 있으며, 구릉 위에 펼쳐진 시가는 그 길이가 80km나 된다. 시는 국내전 및 제2차 세계대전 때의 전공으로 영웅도시의 칭호를 받았으며, 전몰병사광장 ·방위박물관 ·마마예프 꾸르간 등 제2차 세계대전의 기념물이 많다. 또 물리요법 ·세균연구소, 6개의 대학 및 전문학교, 3개의 극장, 플라네타륨, TV센터 등 많은 교육 ·문화 시설이 있다.
■ 고려인 동포의 재이주에 대한 개괄
볼고그라드주에는 원래 1990년 초까지 1960년대에서 80년대 중앙아시아에서 농업 콜호즈 건설을 위해 이주해온 고려인 동포가 5,000명 정도가 살고 있었다. 이들은 현재 대부분 볼고그라드시를 비롯한 도시에 정착하여 생활하고 있다.
그러나 소련연방이 1990년 15개 공화국으로 분리되면서 50만 고려인들이 각기 다른 국적을 소지하게 되었다. 그중 중앙아시아에 살고 있는 고려인 동포들에게는 큰 시련이 닥쳤는데 경제붕괴와 민족차별로 인하여 삶이 어려워 진 것이다. 특히 1992년 타지키스탄 내전이 시작되면서 그곳에 거주하는 고려인은 다시 유랑하기 시작하였다. 타지키스탄에 살고 있는 17,000여명의 고려인들은 내전을 피해 소련 각지로 흩어졌다. 이들 대다수는 타지키스탄에서 비교적 가깝고 기후와 토질이 좋은 남부 러시아 볼고그라드주를 중심으로 이주를 하고 있으며 고령층을 중심으로 일부는 과거 선조들이 살았던 연해주로 되돌아가고 있다.
이들은 주로 농촌지역에 브리가다(농사작업반) 단위로 흩어져 ‘아렌다’(일종의 임차농으로 현지에서는 ‘고본질’이라 함)방식의 농사에 종사한다. 이들 중 일부는 내전 전에 이주하여 이미 기반을 잡아 주택을 마련한 사람도 있으나 대부분 전쟁을 피해 탈출하여 이곳에서 라게리(농업막사)나 농가를 임대하여 살고 있지만 일부는 땅굴에서 살고 있는 등의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다.
여기에 우즈베키스탄이나 카자흐스탄, 키르키스탄의 고려인들 중에서도 현지의 민족차별과 생활고로 인하여 수 천 세대가 남부 러시아 볼고그라드주 지역으로 건너와 계절노동자로 일하거나 브리가다 단위의 아렌다 방식으로 농사를 짓고 있는데 해마다 그 수가 증가하고 있다. 물론 이들의 생활상도 별반 다르지 않다.
이들이 볼고그라드로 옮겨오는 이유는 이곳이 농사와 농산물판매에 적합하고 우즈베키스탄이나 카자흐스탄보다 임금도 높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러시아 문화권이기 때문이다. 중앙아시아에 거주하는 대부분의 고려인동포들은 러시아어를 배웠고 러시아어로만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러시아 문화에 익숙해 있다. 그러나 중앙아시아의 여러 국가에서는 민족국가로 독립하자마자 기존 국어인 러시아어를 버리고 각자의 민족어로 국어를 삼았다. 이들 외에도 북 카프카즈, 사할린, 중국에서 온 조선족 동포도 볼 수 있는데 이들을 모두 합쳐 현재 볼고그라드주에서 거주하는 전체 고려인의 총수는 약 4만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또한 남부러시아로 일컬어지는 로스트프, 크라스노다르, 날칙크, 아스트라한과 북카프카즈지역까지 합치면 그 수는 약 15만이 훨씬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1. 볼고그라드 고려인의 재이주 현황
○ 재이주 현황파악의 어려움
볼고그라드에는 약 40,000~45,000명의 고려인이 살고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렇게 추정치로 접근할 수밖에 없는 것은 많은 고려인들이 법적으로 등록절차를 거치지 않고 생활하기 때문이며, 법적으로 등록된 고려인은 약 25,000명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15,000~20,000명은 그 어떤 자료도 없기에 아름아름의 근거와 샘플에 가까운 앙케이트로 추정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재이주고려인들의 문제이자 우리들의 문제의 출발점이다.
하지만 정확히 몇 명의 동포들이 볼고그라드에 살고 있으며, 출신국가가 어디인가를 파악하
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남한보다 큰 땅도 문제지만, 많은 고려인들이 법적으로 등록되어 있지 않을뿐더러 안정된 정착을 하지 못한 관계로 유동성과 이동이 잦기 때문이다. 지금은 예전에 비해서 많이 정착한 모습이라고 하지만 1년 농사의 성패에 따라서 타도시나 지역으로 생계를 위한 이동은 여전히 빈번하기 때문이다.
주요 출신국은 우즈벡이 다수를 차지하고 그 외에 타지키스탄, 카자흐스탄, 키르키스탄, 카프카즈, 중국 등에서 온 동포들이다.
재이주의 시기는 구소련이 붕괴되면서 90년대 중반부터 급격히 증가하였으며, 특히 타지키스탄의 내전과 민족주의정책 등이 출신국가를 떠나게 한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한다. 2000년대 초입까지 재이주의 숫자가 꾸준히 증가하였으나 지금은 많이 줄어들었으며, 일부는 출신국가로 역재이주하는 현상도 발생하고 있다.
○ 재이주의 형태
고려인 동포들의 재이주 형태는 친.인척중심, 혹은 출신국가의 콜호즈(공동생산단위)를 구성했던 사람들간의 정보교류를 통한 이주의 성격이 강하다. 그래서 이주한 곳에서의 마을 구성도 몇가구의 친.인척들로 구성되거나 콜호즈의 구성원의 관계로 이루어진 곳들이 많다.
고려인만 사는 마을은 없으며, 대부분 러시아민족이나 다른 민족들과 함께 마을을 구성하며 살고 있다. 또한 대부분의 마을에서 고려인이 차지하는 비율은 크게 높지 않다. 때문에 고려인동포들을 위한 모임공간이나 민족정체성을 가꿀 수 있는 장소 등은 사실상 거의 없는 상황이다. 이러한 이유는 재이주한 시기가 짧은 결과이기도 하고, 아직은 이주한 고려인들의 대부분이 경제적으로 안정되지 못한 것과 생활적으로는 여름에는 마을에서 생활하기보다는 들판에서 생활하는 상황 등에 기인한 면도 크다 할 것이다.
○ 재이주한 마을의 특징
대부분의 고려인들은 볼고그라드주의 도시(볼고그라드시, 볼스키시와 각 라이언 소재지 포함)보다는 볼가강을 끼고 있는 마을에 재이주를 하였다.
이러한 모습은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농사를 짓기에 유리하고, 또한 행정적 문제나 교육문제, 의료문제 등에서 불편함과 어려움이 있겠지만, 무엇보다 법적으로 불안정하고 문제를 안고 있기에 경찰이나 공무원들로부터 보다 자유로운 면이 상대적으로 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때문에 아이들과 노인들의 경우에는 교육, 의료, 문화활동, 컴퓨터 등 정보활동 등에서는 매우 방치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대부분의 아이들은 여름철에는 농사를 도울 나이면 대부분 들판에서 함께 생활하며, 일부는 부모가 없는 집을 지키며 아이들이 생활하기도 한다.
현재 러시아는 청소년들의 성문제와 마약, 술 등이 큰 문제꺼리로 대두되고 있는데 고려인 청소년의 경우에는 환경조건은 상대적으로 열악하지만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양호한 편에 속하지만 자유로울 수는 없는 상황이다. 일부의 고려인 청소년들의 문제는 발생하고 있으며, 무엇보다 제일 큰 문제는 18세 이상의 성년이 되어도 마땅한 일자리가 없다는 것과 일자리를 구할 수 있는 조건(러시아국적문제, 학업문제, 컴퓨터능력 등)이 약하다는 것이다. 앞으로 이 문제는 점점 심화될 것이라 본다.
○ 재이주자의 90%가 농업
볼고그라드의 재이주 고려인들은 대부분 농사를 지으며, 주된 농작물은 양파, 토마토, 수박, 오이, 고추(서양고추포함), 배추 등의 야채류이다.
이들은 주로 농촌지역에 브리가다(농사작업반) 단위로 흩어져 ‘아렌다’(일종의 임차농으로 현지에서는 ‘고본질’이라 함)방식의 농사에 종사한다. 브리가질(책임자)이 함께 농사를 지을 브리가다(구성원, 한 가정으로 보면됨)을 조직해서 농사지을 땅의 크기를 임대를 하는 것이다. 때로는 브리가질이 농사지을 땅을 먼저 임대를 하고 농사를 지을 사람을 구하기도 한다. 이때에는 브리가다를 조직하지 못하면 싹꾼을 고용하기도 한다. 싹꾼은 주로 우즈베크인이나 타지크인을 고용하는데 먹고 자고 월 80~100달러 정도의 임금을 주는 것으로 나타났다.
브리가질은 대략 10~30명의 브리가다를 조직해서 브리가다 1인당 2~3헥타르의 땅에서 농사를 짓는 것이다. 그러면 약 30~100헥타르의 땅을 임대하게 되는 것이다. 러시아에서는 대부분 땅을 임대할 때 몇 십 헥타르씩 임대를 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관개시설과 농기계사용등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물을 끌어오는 수로나 용수관을 갖추기 위해서는 수 십 헥타르의 대규모 농지를 단위로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브리가질은 농사를 지을 땅과 물, 기계, 농약, 종자 등 전반적인 부분을 조달하고 행정적인 부분도 대표로서 책임과 권한을 가지는 것이 며,브리가다는 자신이 농사를 지을 규모의 땅 에 대한 임차료와 전체적인 소요비용에 대하여 땅크기 만큼 부담을 하는 것이다. 수확된 농산 물의 판매는 브리가다의 몫으로 되고 있다. 구 소련 시절에는 “고본질”이라 하여 조직된 구 성원간의 역할에 의해서 소득을 분배한 경우도 많았지만 이제는 많이 달라졌다고 한다.
많은 경우 브리가질과 브리가다의 관계는 친.인척 관계이기 때문에 브리가다로 참여한 사람이 땅을 임대할 돈과 농사를 지을 돈이 부족하면 브리가질이 보증을 서서 돈을 빌려서 농사를 짓는 경우가 많다.
문제는 농사를 잘 짓고 못 지어서 수익의 불안정성이 큰게 아니라 제대로 판매와 유통을 할 수 없는 “법적신분”과 “경제적 처지” 그리고 아직도 “자본주의적 농업방식”에 적응을 못한 면이 크다고 할 것이다.
2. 재이주한 고려인들의 당면문제
재이주한 고려인들의 당면한 문제는 매우 다양한 케이스의 편차와 현실적으로 절실한 문제와 재이주의 결과에 따른 시간을 두고 풀어가야 할 문제 등이 있다고 생각한다.
크게 법적보장의 문제, 경제(농업)적 안정의 문제, 정체성확립의 문제, 가족 및 청소년문제 등으로 나누어 보았다. (조선족도 있지만 논외로 하겠다)
○ 법적보장의 문제
재이주한 고려인들에게 “법적보장의 문제(러시아국적 혹은 체류권 획득)”는 가장 중요한 현실적인 문제이다. 재이주한 고려인들의 대부분은 이 법적보장의 문제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구소련이 붕괴된 후에도 오랫동안 고려인들은 관행처럼 러시아를 오갈 수 있었기에 러시아국적취득에 대해서는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못했다고 한다. 무엇보다 구소련연방국가의 정책이나 사회분위기가 그렇게 바뀔 줄은 예상을 못한 것이다. 러시아정부는 정부대로 기회를 주었다고 말하고 있는 상황이다. 재이주한 고려인들의 대부분은 이제 경제적으로나 현실적으로 돌아갈 수 없는 상황에 놓여있다.
재이주고려인들이 법적보장을 받는데 어려운 이유는
첫째, 정식으로 입국비자(단기체류)를 받고 들어온 고려인들도 그 기간이 지난지 오래되어 불법체류자 신분이 되었으며, 재발급에 필요한 서류부실과, 재입국의 과정 등을 밟을 경제적, 시간적 여유가 없다는 것이다.
둘째, 러시아입국의 서류절차도 없이 들어온 고려인들의 경우에는 등록국가의 서류첨부 및 확인, 러시아에서의 신청서류 작성 등이 필요한데 그 서류의 종류가 많고 절차가 복잡하며 현실적으로 행정기관을 찾아다니며 준비하기에는 거리적, 시간적, 경제적으로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셋째, 무엇보다 현재 일을 하고 있다는 고용증명과 일정정도의 돈을 예치하고 있다는 잔액증명, 뚜렷한 거주지가 있다는 거주증명 등등이 필요한데 이런 구비조건을 만들기란 싶지 않다.
넷째, 일시체류(3개월, 6개월, 1년등)를 받더라도 농사를 주로 짓다보니 계속 경신하고 유지하기가 현실적으로 싶지 않아서 포기하는 경우가 많고, 많았다는 것이다.
다섯째, 각 라이온마다 약간의 체류허가 조건이 다르며, 주정부의 음성적 허가도 문제의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리고 재이주하면서 가지고 있던 쌈지돈이 바닥이 나고, 농사경험 및 자본주의적인 유통의 판매경험 부족 등으로 농사의 실패와 사업의 실패 등으로 사실상 개인이 체류허가를 받기란 매우 어렵다.
법적보장이 없으면 당장에 문제가 발생한다.
운전면허, 의료보험, 연금, 주택구입, 각종계약관계, 은행이용, 취직이나 사업, 핸드폰 등 생활전반에 고충이 따르고 과외지출이 발생하며 국가적 혜택과 보장으로부터 소외되는 것이다.
○ 경제적 안정의 문제
볼고그라드에 재이주한 고려인들의 당면한 문제중에 심각한 것은 경제적 불안정의 문제이다. 법률적으로 보장받지 못하는 신분인데다가 경제적으로도 궁핍한 상황이다 보니 더욱 어려운 것이다.
재이주한 고려인들은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는데 년간 수입은 1인당이 아니라 가구당 3,000달러를 벌기도 힘든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몇 년간의 러시아의 경지지표는 경제성장과 인플레이션을 계속하고 있다. 특히 볼고그라드는 소비자물가의 상승이 높은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①
재이주한 고려인들 중에 생계를 책임지고 노동하는 사람들의 나이대는 대부분이 30대 후반에서 50대중반까지인데 이들은 이주하기 전에는 농업에 종사한 사람들이 많지 았았다. 재이주를 하기 전에는 대부분 도시에서 직장을 가지고 생활하였으며, 농사일은 주말의 다차농이나 어릴 때 부모를 거들던 경험들인 것이다.
이러한 농업의 경험이 일천한 사람들이 농사를 시작했으니 실패와 적자는 어찌보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농업 외는 달리 다른 것을 할 신분이 아니기에 실패와 적자를 보더라도 다시 친척이나 대부자들에게 빚을 내어 농사를 지을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대부분의 농업을 하는 고려인들은 빚을 안고 있었다.
앞장에서 밝혔지만 농업의 수입편차는 크다. 한국처럼 태풍, 장마등의 급격한 기후나 날씨의 변화에 의한 편차성 보다는 농작물 파종시기, 선택작물, 판매과정에서의 편차성이 더 크다. 파종시기의 문제는 돈과 직결된다. 돈을 제때 구하지 못해 파종이나 물대기, 기계임대, 약치기, 비료주기 등의 시기를 놓치는 경우도 허다하고, 선택작물과 토양과의 관계, 일기도 일정정도 작용을 하지만, 판매시기를 놓치거나 제값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왜 제 값을 못 받는가는 앞에서 밝힌 “신분의 법적보장”이 없으므로 들판을 벗어나 직접 판매를 할 수 없기에 유통망을 형성하고 있는 카프카즈인, 러시아인들에게 밭에서 팔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생산된 농산물의 일부를 간선도로변에서 판매를 하지만 하루 통행량이 뻔한 도로에서의 판매량은 극히 일부이다. 이마저도 길거리의 판매처가 얼마나 많은가?
여름 농사를 실패한 예를 들어보자.(볼가강을 끼고 고려인이 100여 호 사는 마을이다)
전체 100여 호 남짓한 고려인들 중에 10여 호가 넘는 집이 올해 농사의 실패로② 농사가 끝난지 두 달도 되지 않은12월 초부터 마을의 가게에 외상으로 최소한의 먹거리 등을 조달하고 있었다. 한집을 방문하여 구체적으로 들어보았다. 52살 48살의 부부와 28살 26살의 아들 내외, 이렇게 4명이 토마토 농사를 지었지만 적자를 본 것이다. 결국 젊은 아들내외는 돌도 안 지난 딸과 3살짜리 아이를 부모들에게 맡겨두고 몇 일전에 페테스부르그로 돈을 벌러 갔다고 한다.
겨울에 얼마의 돈이라도 벌어야 봄에 다시 농사를 지을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 부부는 손자들을 돌보기가 어려워 함께 재이주해 와서 근처에 같이 사는 사돈댁에 아이들을 맡겨둔 상태라고 했다. 아들내외가 페테스부르그에 어떻게 가게 되었는지를 물었다. 아는 사람의 소개로 그들이 차비를 대주어서 갔는데, 그곳에서 고려반찬도 만들고 무슨 일이든 할수 있다고 사정하며 같다고 했다. 아들부부는 페테스부르그의 어디에선가 집단숙소에서 한겨울을 날 것이다. 그들이 겨울에 마련할 수 있는 돈이 얼마가 될 수 있을까는 차마 생각하기도 슬프다. 여름에 농사에 수입이 적거나 없는 고려인들의 겨울나기는 참으로 힘든 일이다. 이와 비슷한 고려인 가정을 만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겨울에 농촌을 떠나 모스크바나 페테스부르그로 돈을 벌러 가는 고려인들이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6~70년대 농촌의 붕괴와 내용은 다를지라도 결국 결과는 비슷하게 진행될 소지가 다분히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농업실패 - 도시진출 - 전문기술 없음, 법적보장신분 아님 - 도시빈민화 - 자녀들 교육 및 투자부실 - 아이들 방황으로 이어진다.
여름 농사에 실패해서 한겨울을 들판에서 땅을 파고 겨울을 나는 고려인들도 제법 있는 실정이다.
재이주한 고려인들 중에 도시(볼고그라드, 볼스키등)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도 별반 다르지 않다. 러시아의 주택비와 주택임대비는 수입과 대비해보면 매우 높은 편이다. 재이주한 고려인들 중에 법적으로 영주권을 획득한 일부는 아파트나 땅집을 사기도 했지만, 집을 갖지 못한 고려인들은 높아지는 주택 임대료 때문에 좁은 집이나 아파트에 2~3가구가 생활하는 곳이 많다.
도시에 재이주한 고려인들은 재이주 당시에 가져온 얼마의 돈으로 장사나 작은 사업 등을 시도했다가 실패한 경우가 허다하다. 소위 쌈짓돈 날리고, 일자리는 없고, 물가는 오르고 하다 보니 노동력이 있는 사람들은 멀리 모스크바나 페테스부르그로 돈 벌러 간 집도 많고, 한국으로 간 사람들도 있었다.
재이주 이후 정착과정에서 일부 안정된 기반을 구축한 고려인도 있고, 아직은 버틸만하다고 생각하는 고려인들도 있지만, 이미 한계점에 다다른 고려인 가정들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임에는 틀림이 없다. 지금까지는 살기위해 “가족단위”로 움직였지만 이러한 모습은 전통적이고 사회주의적 생활의식③이 크게 작용했지만 자본주의를 경험한지 10년이 겨우 지난 지금 그들은 살기위해 “가족 간의 생이별”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구소련시절 중앙아시아의 농업혁명을 주도하고 전체 러시아인구의 0.5%도 안되는 고려인이 노력영웅의 60%를 넘었다는 이야기가 옛날이야기가 되어 버린 지금, 재이주한 고려인들의 공통된 모습 중에 하나가 “사진첩 보기”이다. 우즈벡, 타직크등에서 큰집에서 행복하게 살던 시절을 사진들을 보면서 그들은 지금의 자신들의 모습이 꿈이길 바란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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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지역별로는 3월중 인플레율은 서비스료가 27.8% 오른 볼고그라드 지역이 4.7%를 기록해 가장 높은 인플레율을 보였다.(코트라, 2005 러시아 경제지표 중에)
② 농사자체의 실패라기보다는 자본주의적인 농업방식(수익구조)을 아직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면이 크다. 즉 상품성과 생산물의 차이, 포장이나 마케팅 등에 약하다 그리고 법적지위가 없다보니 특히 판매의 실패가 크다 할 것이다.
③ 고려인들은 아직도 가족이나 형제, 친인척간의 연대가 강하다. 이는 이주가 빈번한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이웃이나 동포간의 신뢰를 축적할 시간이 약하다보니 발생한 환경적인 면도 크고, 가족에 대한 애착이 강한 우리민족의 전통에 대한 흔적으로 이해된다.
○ 정체성 확립의 문제
재이주 고려인들의 “자기 뿌리에 대한 정체성을 알려고 하는 의지”는 강한 편이다. 이 말은 역설적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많이 잃어버린 것을 안다”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재이주 고려인들은 세 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자신의 뿌리에 해당하는 고려인 또는 한민족으로서의 의식, 출신국가별, 지역별로 가지고 있는 생활 문화적인 의식, 현재 살고 있는 러시아(구소련)인으로서의 의식이 그것이다.
물론 가장 본질적이고 기본적인 것은 민족의식일 것이다. 문제는 여기서 나타난다. 가장 본질적이고 기본적인 “뿌리”에 관련된 많은 것들이 일상 생활 속에 자리할 여유와 실질적인 가치를 담보하지 못하는 것이다. 또한 많이 잃어 버렸고 이제는 흔적화, 형태화 되었음을 부인하기도 쉽지 않다. 김치를 먹으니 우리민족이다. 밥을 먹으니 우리민족이다. 설과 한식을 중요히 한다. 개를 먹는다 등등의 상징성으로 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한다고는 할 수 없는 일 아닌가?
볼고그라드에도 고려인 조직이 있었고 지금도 있다.
하지만 조직의 기본인 참여하는 사람, 재정, 활동은 매우 미약했던 것으로 파악되었다. 더구나 출신국가별, 법적보장의 차이별, 현재 사는 지역별로 특성과 상황이 너무나 차이가 많고, 뚜렷한 목표나 목적을 가지고 활동을 하지 않았기에 형식적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2001년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의 지원으로 시작된 “고려인축제”가 이러한 차이를 해소하고 “뿌리”에 대한 동질성과 단합을 도모하는 계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고려인들도 자성과 인정을 부분이다. 그만큼 외부의 지원 없이는 활동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는 말이 되기도 한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게 정확하다.
재이주 10년 남짓한 기간 동안에 고려인들은 저마다의 정착과 생존도 벅찬 세월이었음을 그들의 삶이 증명하고 있다. 한반도 크기의 수 십 배나 되는 중앙아시아의 여러 나라에서 살던 사람들이 최근에 모인 것이다. 그것도 안정된 기반으로 모인게 아니라 가장 열악한 상황으로 모였기에 “민족의 정체성”이니 “조직적 연대”니 하는 체계를 갖추어 재정을 각출하고 참여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웠다고 보여진다. 또한 이러한 자발적 단체나 모임을 구성하고 운영하는데 익숙하지 않았음도 알 수 있었다.①
재이주 고려인의 정체성 문제는 고려인들이 “자체적” “자발적” “자립적”인 조직의 결성과 민주적인 운영 속에서 풀어나가야 할 과제라고 생각한다. 외부(한국)의 지원이나 참여가 절실히 필요하지만 이러한 참여나 지원은 위의 원칙에 부합해야 할 것이다.
실질적인 사례를 보자
볼고그라드에서 한글학교를 개설한 경우가 몇 번 있었다. 많은 고려인들이 희망했고 참여의사를 밝혔다고 한다. 개설 후 처음에는 많이 참여를 하고 관심도 높았다고 한다. 그러나 얼마가지 않아서 흐지부지 되었다고 했다. 그 이유는 첫째, 고려인들은 한글과 우리문화를 배우고 싶지만 시간적, 거리적, 경제적으로 싶지가 않다는 것이다. 둘째, 우리말과 우리문화가 현실적으로 어떤 유익함이나 장기적으로 필요성을 느끼느냐의 문제이다. 셋째, 제대로 갖추어진 교육환경이나 문화전수의 공간이라고는 말하기 어려운 여건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도 많은 고려인들은 우리말과 우리문화 체험을 원하고 있으며 또한 미약하고 열악하지만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이다.
이처럼 재이주 고려인들에게 당면하게 절실히 요구되는 정체성 찾기의 주요 과제로는 “우리말교육”과 “우리문화 습득”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4만명이 넘는 볼고그라드에 제대로 된 한글학교 하나 없는게 현실이고, 한국식당도 하나 없다. 무엇보다 고려인들이 만나서 회합하고 우리문화를 접할 수 있는 공간(문화센타)이 없다.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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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사회주의적인 조직관리와 민주주의적인 조직운영에 대한 차이는 현장에서 경험한 바로는 매우 컷다. 조직관리자로서의 이들의 모습은 상층 몇몇의 결정과 중간 전달자, 그리고 참여동원, 참여하는 사람들의 모습과 민주주의적인 조직운영자로서 회원들(고려인)의 회비와 의사참여, 민주적인 의사논의구조는 매우 희박하였다.
② 현재 볼고그라드에는 한국에서 파송된 종교인외는 장기체류자가 없다. 우리문화를 새롭게 접할수 있는 곳은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이 개설한 사무실과 한글교실, 한국과의 교류를 통한 사물놀이전수, 한복전달 등과, 한국에서 지원하는 종교단체를 통한 우리문화의 체험등이다.
○ 가족 및 청소년의 문제
재이주 고려인뿐만 아니라 고려인 전체에게도 해당하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러시아는 전통적으로 여성이 아이들을 책임지는 경향이 크다. 이러한 영향 탓인지 고려인 사회에서도 부부간의 이혼과 그에 따른 자녀 양육은 어머니가 맡는 경향이 커 보였고, 예상 밖으로 어머니와 사는 아이들이 많았다. 물론 고려인의 경우에는 러시아의 일반적인 상황보다는 적은 편이라고 한다. 또한 일찍 결혼하는 경향이 아직도 많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스무살 전후의 나이대에 아이를 기르는 경우를 만나기란 어렵지 않았다. 일찍 결혼하는 주된 이유는 문화적인 면도 있지만, 함께 일할 수 있다는 노동의 측면도 부인하지 않았다.
문제는 지본주의로 전환 후 급격한 경제성장과 패러다임의 전환을 하고 있는 러시아의 현실이다. 많은 고려인들이 살기위해(돈을 벌기위해) 가족간에 흩어지고 있다. 그 속에서 청소년들은 방황하고 힘들어 함을 알 수 있었다. 재이주에 따른 환경의 변화, 러시아의 발전속도에 맞추어 증가되는 소비욕구, 어려운 가정형편과 부모들의 다툼과 이혼, 기초적인 가정인프라(카메라, 컴퓨터 등의 전자제품)미비 등은 청소년들에게 많은 심리적인 갈등과 위축을 갖게 하는 것 같았다.
실제로 대부분의 고려인집에는 TV(TV는 주로 한국산이며 크다)외에는 이렇다할 전자제품군이 없었다. 한마디로 지금의 러시아 사회에 진출할 가정인프라가 없다는 것이다. 또한 고등교육기관으로의 진학률도 높다고 할 수는 없다.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은 마음은 매우 강했으나 형편이 안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현재 볼고그라드에서 대학을 다니는 고려인들은 많지 않다. 물론 전문학교에 해당하는 칼리지등에는 다수가 다니지만 비싼 등록금과 교육비는 부모와 학생 모두에게 현실적, 심리적으로 큰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대부분의 청소년들은 여름이면 들판에서 부모들의 농사일을 거들어야 하며, 직장을 구하지 못해서 들판에서 일하는 청년들이 많았다.
도회지에서의 일자리라는 것도 건축붐을 타고 있는 러시아의 현실에서 막노동이나 상점의 물품 판매원 등이다.
이렇다보니 무작정 대도시나 한국 등 다른 나라에 대한 동경이 강했으며, 한번쯤 자살충동을 느낀 청소년들도 많았다고 했다. 실지로 모스크바나 페테스부르그 등의 대도시에서 직장을 가진 고려인보다는 뚜렷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고려인이나 유흥업에 있는 젊은 고려인을 만나기가 더 싶다.
■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소개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은 북한의 극심한 식량난이 외부세계에 알려지고 북한이 긴급지원을 호소하던 1996년 6월 21일에 창립. 창립당시 한국의 천주교, 기독교, 불교계 등 6대 종단과 주요 시민사회단체가 함께 참여하는 국민운동조직으로 창립함.
인도적 대북지원과 남북간 교류사업을 통해 남북간의 반목과 대립을 깨고 한반도의 평화정착과 민족의 화해와 공존을 이루어 가는데 기여하고자 하는데 설립목적이 있음. 초기 긴급구호방식의 지원에서 한걸음 나아가 북한의 인도적 상황을 구조적으로 개선할 수 있도록 농업과 보건의료 분야의 개발복구 지원사업을 중점적으로 추진하고 있으며 인도적 지원 분야 이외에도 다양한 남북간 교류협력사업을 병행 추진하고 있음.
재외동포지원사업은 중국 조선족 초청사기 피해자지원으로 시작하여 현재의 러시아 볼고그라드 고려인지원사업으로 이어지고 있음. 러시아 남부에 위치한 볼고그라드에는 약 4~5만명의 고려인들이 거주하고 있는데, 구 소련의 붕괴 이후 살 길을 찾아 중앙아시아와 러시아 타 지역에서 모여든 이들이 대부분임. 이들은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나 비싼 토지 임대료와 농산물 가격 하락 등으로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음. 이에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은 1999년 첫 현지조사를 시작으로 볼고그라드 이주 고려인들에 대한 정착지원과 함께 한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하도록 한글・문화학교, 고려인 축제, 시설영농지원, 생활・의료지원, 유학생 지원 등의 사업을 펼치고 있음.
● 단체연혁
1996년 6월 21일
창립대회 개최
1998년 5월 23일
사단법인 인가 (통일부)
10월 15일
세계협의회 결성
1999년 2월
4월 26일
대북지원 독자창구로 지정 (통일부)
공익성 지정기부금단체 지정 (재정경제부)
2001년 3월
대북지원사업자 지정 (통일부)
2003년 6월 7일
11월 26일
재외동포센터,
(사)동북아평화연대로 독자법인화 (외교통상부)
평화나눔센터 설립
2004년 2월 ~ 2006년 1월
대북협력민간단체협의회(북민협) 회장단체 역임
2006년 11월 8일
창립 10주년 기념식 개최
2007년 7월 31일
유엔경제사회이사회(UNECOSOC) 정기총회에서 협의지위 NGO 승인
■ 방문지역 소개(볼고그라드, 상트 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
볼고그라드
볼고그라드에는 9개의 대학교와 22개의 전문대학이 있으며 59,000명의 학생들이 공부하고 있는 교육 도시이다. 볼고그라드 시에 6개의 박물관과 7개의 극장, 26개가 넘는 영화관, 72개의 도서관과 공설 운동장이 있는 문화 도시이기도 하다.
● 마마예프 꾸르간
마마예프’란 1380년에 러시아에 들어와서 패배한 사람의 이름이다.‘꾸르간’이란‘언덕’ 또는‘작은 산’이란 뜻이다. 마마예프 꾸르간이란 마마예프를 이긴 것을 기념하여 이름을 붙인 것 이다.이곳에서 2차 대전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매우 치열했는 데 마마예프를 물리친 것처럼 독일을 물리쳤다. 이것을 기념하 여 이곳에 기념탑과 거대한 조각품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마마예프 꾸르간에는 거대한 조국의 어머니 상과 무명 용사 기 념관이 있고 목숨을 걸고 조국을 지킨 영웅들의 기념탑이 있 다.
작은 산 전체를 2차 대전 승전을 기념해서 만든 곳으로 서서히 걸으며 관람하기에 좋은 곳이다. 2차 대전과 러시아의 웅대함을 느껴 보기에 알맞은 곳이다. 제일 처음 만나는 것은 높은 계단이다. 계단을 올라서면 가장 처음 목숨걸고 조국을 지킨 영웅이 나온다. 그리고 바로 계단을 올라서면서부터 높이 16.5 미터의 높이에 각종 전투의 이야기들을 조각해 놓았다. 이곳에 들어서면 그때 전투에 있었던 함성들이 아직도 들리고 있다.
다시 계단을 올라서면 분수와 분수가에 전투시에 있었던 장면들을 조 각상으로 생생하게 만들어 놓았다. 이 분수와 동상들을 지나가면 거대 한 손위에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과 함께 조국을 지키다 죽어간 사람 들의 이름을 써 놓은 원형으로 된 큰 홀이 나타난다. 이곳은 언제나 헌병 둘이 보초를 서고 있다. 이들은 아무리 덥고 추워도 움직이지 않 는다. 더울 때는 장교가 나타나 손수건으로 땀을 딱아 주기도 한다. 무명용사 기년관을 지나 서서히 올라가다 보면 당시 전투에서 싸우다 죽어간 장군들의 묘지를 지나가게 된다. 마지막 정상에 올라서면 볼고그라드 도시와 볼가강이 한눈에 바라다 보인다.
마지막 산언덕 정상에는 거대한 “조국의 어머니(마치 로진나)”상이 우뚝 서 있다. 조국의 어머니 상은 높이가 85미터이다. 이 상은 기초를 하지 않고 그 자체로 무게 중심을 잡도록 설계되어 있다.
● 스탈린 그라드 전투 전경 박물관
이곳에는 스탈린 그라드 전투에서 독일군을 물리친 전투 현장의 모습을 볼가강면에 생생하게 묘사해 놓은 파노라마 형식으로 된 거대한 그림과 스탈린 그라드 전투 현장에서 사용되었던 무기와 기타 유물들이 전시 되어 곳이다. 여기에 그려져 있는 그림은 파노라마 형식(회전화)으로 된 회화로서 러시아에서 가장 큰 것이다.
이 박물관은 1936년에 시작 되었다. 2차 대전 때는 잠시 국영 백화점 지하로 이사를 했다가 1948년에 다시 박물관이 회복 되었다. 그리고 1982년에 스탈린 그라드 전투 상황을 7명이 4개월에 걸쳐서 그림으로 그렸다. 이 그림은 러시아에서 가장 큰 그림으로 표면이 2000평방이며, 플라스틱 부조는 1000평방이다. 그림의 둘레는 120미터이며 높이는 16미터이고 사람이 서 있는 위치에서 그림까지 거리가 13미터이다. 여기에는 영화 ‘에니미 엣 더 게이트’ 나오는 주인공 바실리의 저격용 총이 1층 제 4전시관을 들어서서 오른 쪽으로 두번째에 전시되어 있다.
● 볼가 강(밝다는 뜻으로 사투리로 '볼따'(광명)에서 유래)
볼가 강은 유럽에서 가장 큰 강으로 러시아의 젖줄이라고 말할 만큼 아주 중요하고 큰 강이다. 볼가강은 모스크바에서 고리키, 카잔, 사하로프를 거쳐 카스피해로 들어가 다시 운하를 거쳐 흑해에서 지중해까지 흐르는 수상 교통의 대동맥과 같은 강이다. 볼고르라드는 이 강물을 먹고 살며 이 강물을 끌어서 농사를 짓는다. 그리고 이 강을 이용하여 유럽의 최대 수력 발전소를 만들어 놓았다.
볼고그라드에서는 ‘볼고그라드 리치노이 바그잘’(볼고그라드 강 승선장)에 가면 약 1시간 정도 볼가강을 유람할 수 있다. 볼가강은 러시아연방 서부를 남쪽으로 흐르는 유럽 제일의 강으로 길이 3,700 km. 유역면적 138만 평방킬로미터이다. 볼가강은 러시아 평원의 4개 지대인 북쪽의 삼림지대, 삼림·스텝 혼합지대, 스텝지대, 반(半)사막지대를 관통하여 카스피해로 흘러든다. 볼가강은 계단상(階段狀)의 하천이 되어, 세계의 대하천 중 하수통제·수리시설이 가장 잘 된 강으로 알려졌다. 한편 볼가강 수계(水系)에는 모스크바-볼가 운하, 볼가-돈 운하, 볼가-발트 운하 등이 건설되어, 볼가강은 카스피해·흑해·발트해 등을 잇는 내륙수로의 대동맥이 되었다. 볼가강 본·지류를 합친 1만 7000km의 수로는 결빙기(11∼12월에서 다음해 3∼4월)를 제외한 기간에는 항시 선박 운항이 가능하다. 한편 볼가강에는 수산자원도 풍부하여 꼬치고기·청어·철갑상어 등이 많이 잡힌다.
볼가강은 17세기 농민반란의 주역이었던 스텐카라친의 활동무대였던 볼고그라드(舊스탈린그라드)로 흐른다.
● 볼가 -돈강 운하
이 운하는 볼고그라드 끝 부분인 크라스나아르메이스키 지역에 있다. 그러므로 볼고그라드 시내에서는 상당한 거리를 가야 한다. 이 운하는 볼가강과 돈강을 연결 시킨 운하로 배가 통과 할 수 있는 것으로 1952년에 만들어 졌다. 이 운하를 통해서 볼가강 물이 카스피해로만이 아닌 흑해로도 들어 가게 된다.
● 볼고그라드 국립 대학
볼고그라드 국립대학 1985년에 세워진 학교로 역사는 그리 오래 되지 않았지만인문과학대학으로 볼고그라드에서 가장 유명한 국립대학이다. 이 대학은 2차 세계 대전 스탈린 전투 격전지 언덕에 세워져 있다. 이 대학 정면에는 러시아를 빛낸 사람들을 벽화로 만들어 놓고 있는데 레닌, 똘스또이, 멘젤레프, 로마노소프, 퓨쉬킨, 레드몬드, 칼 막스, 엥겔스이 보인다. 학생은 약 12,000명이며 분교가 4개 있다.
이 대학은 볼고그라드 시내에서 브타라야 쁘라돌리나야 거리를 따라 가다 보면 사비예트스키 지역 오른쪽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 고리끼 희극 극장
이 건물은 러시아 고전적인 형식을 따라서 지어진 것으로 1988년까지 고리끼 희극 극장이었으나 현재는 새로운 실험 극장으로 운영되고 있다.
볼고그라드 호텔에서 바로 왼쪽에 위치하고 있는 건물이다.
● 볼고그라드 카잔 성전
이 성전의 본 이름은 “그리스정교회 감독구의 볼고그라드 마리아 이콘 카잔 성전”으로 볼고그라드에서 가장 오래된 성전 중 하나로 14세기에 지어진 것이다.
러시아를 알려고 하면 정교회를 알아야 한다는 말이 있다. 러시아 역사와 정교회 역사는 그만큼 연관이 깊다. 러시아를 여행하는 동안 정교회 예배를 참석해 보는 것은 매우 색다른 여행의 맛을 느끼게 할 것이다.
* 상트 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 북서쪽으로 715㎞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 러시아의 두 번째로 큰 도시인 이 곳은 문화적 중심지로, 그리고 18-19세기에 지어진 우아한 바로크 양식의 건축물로 인해 많은 이들에게 알려져 있는 곳이다. 모스크바가 동양적 모습을 많이 간직하고 있는 도시라면 페테르부르크는 "서유럽으로 가는 통로"라는 호칭에 걸맞게 좀더 서양적인 특징들을 많이 보존하고 있는 곳이다.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1703년 표트르 대제에 의해 지어진 이래 200년간 로마노프 왕조의 수도가 되었다. 그 후 이 곳은 많은 동란과 혁명으로 굴절 많은 역사의 장이 되었다. 러시아 혁명 당시의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시절의 레닌그라드, 1991년 공화국으로 다시 거듭나면서 그 명칭이 과거의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회귀하는 등 그 명칭에서도 급변하는 역사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쭉 뻗은 대로, 수많은 운하와 아름다운 다리들, 6,7월이면 볼 수 있는 백야의 광경은 가히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북쪽의 베니스"라고 칭송할 만 하다.
● 에르미타쥐 박물관(러시아 문화의 보고, 에르미타쥐 국립박물관)
궁정광장 한 편에는 재정 러시아 황제들의 거처였었던 겨울 궁전 이 네바 강을 따라 230m 나 쭉 뻗어있다. 담록색의 외관에 흰 기 둥이 잘 어울리는 로코코 양식의 이 궁전은 1762년 라스트렐리 (B.Rastrelli)에 의해 건축된 것으로 총 1056개의 방과 117개의 계단, 2000여개가 넘는 창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게다가 건물 지 붕 위에는 170개가 넘는 조각상이 장식되어 있다.
겨울 궁전은 오늘날 총 6개의 건물로 연결되어 있는 에르미타쥐 국립 박물관 건물 중의 하나이다. 1764년 예까쩨리나 2세가 서구로부터 226점의 회화를 들여왔던 것을 계기로 현재는 약 300만점의 전시품이 소장되어 있는 세계 최고의 박물관으로 잘 알려져 있다. 현재 이 곳은 서유럽관, 고대유물관, 원시문화관, 러시아 문화관, 동방국가들의 문화예술관과 고대화폐 전시관 등 총 6개의 큰 파트로 나뉘어져 있다. 전시된 작품들을 한점당 1분씩만 본다고 해도 총 관람시간이 5년이나 된다고 하는 에르미타쥐에서 꼭 놓치지 말고 봐야 할 것은 125개의 전시실을 차지하고 있는 서유럽 미술관으로 이 곳에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라파엘, 미켈란젤로, 루벤스와 렘브란트 등 우리와도 친숙한 화가들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 카잔성당(러시아 군의 영광을 상징하는 곳)
넵스키 대로를 걷다 보면 길 한쪽 가에 아치형의 성당이 하나 위치해 있다. 이는 스트로하노프 백작의 농노 출신 건축가 바로니킨 (A.Varonikhin)에 의해 1801년부터 10년에 걸쳐 지어진 성 카잔 성당 이다. 처음에 이 성당을 세울 무렵 바로니킨은 고민에 빠졌다고 한 다. 기독교 정교회의 제단은 서쪽을 향해야만 했는데 그렇게 하려면 입구가 넵스키 대로를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즉 넵스키 대로에서 볼 경우 성당의 측면이 보이게 됨) 이에 생각을 해 낸 것이 바로 석고대리석으로 1m정도씩 이어서 만들어진 94개의 코린트 양식 기둥으로 성당의 주위를 둘러싸는 방법이었다.
카잔 성당이 완성된 후 러시아는 나폴레옹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지금도 성당 안에는 승리의 트로피와 상대군으로부터 탈취한 군기 등이 걸려있고, 이 곳에서 러시아 군대의 위대한 장군인 쿠투조프(Kutuzov)의 장례식이 거행되기도 하는 등 카잔 성당은 러시아 군의 영광을 상징하고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 성이삭 성당
청동의 기마상 맞은편에 위치한 거대한 황금빛 돔은 성 이삭의 날인 5월 30일에 태어난 피터 대제를 기리기 위해 건립된 성 이삭 성당으 로, 돔의 크기가 세계에서 세 번째 규모인 101.5m에 이르는 도시의 어느 곳에서도 눈에 쉽게 띄는 건축물이다. 길이 111.2m, 폭 97.6m로 총 만 4천명까지 수용할 수 있는 웅장한 규모의 이 성당은 1818년, 몽페란드(A.Moontferrand)에 의해 설계된 후 40년이 지나서야 완공되 었다. 이 엄청난 공사에는 총 40만명이상의 인력이 동원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성당을 장식하는 데에는 대리석과 반암, 벽옥 등 40여가지가 넘는 다양한 석재가 사용되었고, 성당의 내부에는 성서의 내용과 성인을 묘사한 150점이 넘는 러시아 화가들의 회화와 조각품, 12000여개의 조각으로 만들어진 62개의 독특한 모자이크 프레스코화가 전시되어 있다. 43m에 달하는 교회의 전망대에서는 페테르부르크의 아름다운 전경을 감상할 수 있다.
● 피의 사원(화려한 그리스도 부활교회)
카잔 성당의 맞은편에는 전통적인 러시아 건축양식 중 하나인 모자 이크 프레스코로 장식된 그리스도 부활 교회가 우뚝 서 있다. 알렉 산더 2세 암살 기도가 있었던 바로 그 곳에 1883-1907년에 걸쳐 세 워졌기 때문에 사람들에게는 "피의 사원"이라는 별칭으로 더 잘 알 려져 있다.
교회의 내부는 27년간의 복구 끝에 (1907년 첫 개관 이후로 90년 후) 드디어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그 안에는 알렉산더 2세가 상처를 입었던 정확한 위치가 보존되어 있을 뿐 아니라 현란한 모자이크 장식으로 인해 이 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있다.
● 넵스키 대로(성페테스부르그의 모든 길이 통하는 곳)
만약 유럽의 모든 길들이 로마로 통한다면 페테르부르크의 모든 길들 은 넵스키 대로로 통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해군성에서 알렉산 드르 넵스키 수도원까지 4.5㎞로 뻗어 있는 이 거리에는 모든 것-최고 의 호텔,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레스토랑과 카페, 상점들, 음악당 등 이 위치하고 있다.
1710년에 처음으로 길이 뚫리게 되면서 습한 늪지대였던 이 곳은 페테르부르크를 대표하는 문화, 상업의 중심지이자 가장 아름다운 거리 중 하나로 손꼽히게 되었다. 모이카, 그리바이도바, 폰탄카 등의 3개의 운하가 대로를 가로질러 네바강으로 흘러 들고 있는 이 곳에는 19세기에 건축된 화려한, 그러나 그리 높지 않은 건물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더욱 더 많은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모스크바
모스크바는 면적이 878,7㎢나 되는 세계적인 대도시로, 러시아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이다. 모스크바의 중심 크렘린과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는 붉은광장과 성바실리성당, 굼백화점은 모스크바를 가장먼저 느낄 수 있는 곳이다.
현대적인 빌딩들과 그 사이사이로 러시아 정교회의 첨탑들이 오색빛을 발하는 곳, 레닌과 스탈린시대의 어둠의 흔적사이로 체홉과 푸쉬킨 톨스토이가 이미 이곳에서 무한한 상상력을 펼쳤던 곳, 모스크바.
회색빛도시, 사람들의 굳은 표정, 오랜 혼란의 시대를 거쳐 조금은 지쳐보이는 듯한 도시처럼 비춰질 수도 있지만, 지속적으로 도약하고 있는 러시아 사회를 발견할 수 있는 곳 역시 모스크바이다.
지리적으로는 동유럽 평원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으며, 중앙과 동쪽 부분은 평평하고 낮은 지대인 이 곳의 대부분은 모스크바강의 계곡과 그 지류이다. 도시 내에서 흐르는 모스크바 강은 모스크바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흘러 볼가 강과 합류해 카스피해로 흘러 들어간다. 기후는 대륙성 기후로 모스크바 내에서도 지역에 따라 기온차가 심하게 난다. 모스크바 시가지는 과녁판과 흡사하며, 과녁의 중심은 크렘린이다.
● 크레믈린
크레믈린은 모스크바의 심장부로 러시아의 역사를 엿볼 수 있는 곳이다. 러시아어로 요새를 의미하는 크레믈린 안에 는 15세기의 장대한 교회에서부터 현대적인 의회까지 다양 한 건물이 있다. 또한 레닌, 스탈린, 흐루시초프, 브레즈 네프와 고르바초프가 여기서 서기장으로 활동을 했다. 대 크렘린 궁전을 비롯하여 높이 2,235m에 이르는 크렘린의 망루, 1961년에 완성된 대회 궁전, 표트르 대제때 만들어 진 바로크 양식의 궁전 병기고, 원로원, 이반 대제의 종 루, 현재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12사도 사원, 우스펜스키 사원, 세계에서 가장 큰 종인 황제의 종, 황제의 개인 예배 사원이었던 블라고베시첸스키 사원, 아르항게리스키 사원 등 셀 수 없는 많은 건물들과 보물들이 보는 이들의 감탄을 자아 내는 러시아 문화의 정수가 모여 있는 곳이다.
● 검지만 아름다운 붉은광장(Красная Площадь)
붉은 광장은 국립 역사 박물관과 굼 백화점 및 양파머리 모양의 바실리 사원에 둘러싸여 있는데, 전에는 시내 중심부에 있던 시장이었다. 끄라스나야 쁠로샤지, 즉 현재는 "붉은"으로 해석되는 이 광장의 명칭은 고대 러시아어로는 "아름다운, 이쁜"이라는 뜻이었기 때문에 본 의미는 "아름다운 광장"이었으나 많은 이들은 메이데이와 혁명 기념일에 붉은 색의 현수막이 국립 역사 박물관과 굼 백화점의 벽에 걸리고, 사람들도 붉은 깃발을 손에 들고 있어서 광장이 온통 붉은 색이 되었다는 데서 그 명칭의 유래를 찾기도 한다. 붉은 광장 주변에는 아직도 살았을 때의 모습 그대로 누워있는 레닌의 묘, 불균형 속에 조화를 이루고 있는 성 바실리 사원, 국립 역사 박물관, 모스크바 최대의 백화점인 굼 등이 있다.
● 굼 백화점(러시아 최대의 굼 백화점)
붉은 광장 내 레닌 묘 맞은 편에 길게 세워져 있는 베이지 색 의 건물이 러시아 최대의 국영백화점인 굼(GUM)이다. 1890년에 지어진 오래된 건물이지만 1950년대에 대폭적인 수리가 이루어 져 오늘날까지도 러시아에서는 최고급 백화점으로 손꼽히고 있 다. 3층 높이의 이 건물의 1, 2층에는 200여점에 이르는 최고 급 외제산 상점들이 위치하여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다.
● 노보데비치 수도원(러시아의 유명인사들이 잠들어 있는 곳)
16세기에 바실리 3세가 모스크바와 스몰렌스끄의 연합 을 기념하여 건설한 것이 노보데비치다. 다섯 개의 돔 이 있는 스몰렌스끼 사원과 종루 등 노보데비치 수도원 에 있는 건물들은 모두 16-17세기 러시아 건축을 대표 하는 것들이라 할 수 있다. 이 곳에서 또 한가지 놓치 지 말아야 할 것은 고골리, 체홉, 마야콥스키, 스타니 슬랍스키 등 유명인들과 크렘린 성벽에 유회나 유골이 묻히지 못했던 흐루시초프가 묻혀있는 묘지이다. 이 곳, 노보데비치 수도원은 계절의 멋을 한 눈에 느낄 수 있는 아주 아름다운 곳이다
● 모스크바 국립대학(러시아 지식인들의 집합소)
학자 라마노소프가 창설한 모스크바 대학은 스탈린 양식의 캠 퍼스를 가지고 있는 러시아 최고의 학부이다. 중앙에는 30층짜리 건물의 관리 탑이 있고 그 양 옆으로는 기숙사가 있다. 30층의 건 물에 들어갈 때는 여권을 수위에게 제시해야 하고 올라가면 모스 크바 시내를 조망해 볼 수도 있다.
● 아르바트 거리(젊음과 문화의 상징, 아르바트 거리)
러시아의 위대한 작가인 뿌쉬킨, 레르몬토프, 뚜르 게네프 등이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기도 하면서 스 탈린 양식의 거대한 외무성 건물까지 계속되는 아르 바트 거리는 마치 우리나라의 대학로와 비슷한 느낌 을 주는, 현재 모스크바에서 젊은이들이 가장 많이 붐비는 곳이다. 70년대에 새로 생긴 신 아르바트 거 리는 모스크바의 가장 번화한 곳 중 하나로, 러시아 가 개방되어 각국의 상업 문물들을 얼마나 수용하고 있는지를 즐비하게 늘어선 상점들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반면 구 아르바트의 한쪽에서는 소규모 악단이 연주를 하고 있는가 하면 관광객들을 상대로 그림을 그려주기도 하는 등 러시아의 문화적인 면들을 흠뻑 느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90년대 초 사망한 러시아 젊은이들의 우상, 빅토르 최를 기념하는 낙서벽도 구 아르바트 거리의 한 켠을 차지하고 있다.
● 성 바실리 사원
붉은 광장 진입로로 들어서는 모든 관광객들의 시선을 한눈에 사로잡아 버리는 아름다우면서도 묘한 느낌을 주는 성바실리 성당.
200여년간 러시아를 점령하고 있던 몽골의 카잔 한(汗)을 항복시킨 것을 기념하기 위해 이반 대제의 명령으로 지어진 건축물로, 사원의 이름은 이반 대제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수도사 바실리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1555년에 착공해 1561년에 이르러서야 완성되자 이반 대제는 그 아름다움에 탄복, 더 이상 이와 같은 성당을 짓지 못하라는 뜻으로 설계자인 포스토닉과 바르마의 두 눈을 뽑아버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각양 각색의 색채와 무늬를 자랑하는 9개의 양파형 돔 지붕으로 이루어진 이 그리스 정교 사원은 가장 러시아적이면서도 그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특색있는 건축물로 정평이 나 있다. 오늘날에는 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 볼쇼이 극장(러시아 무대예술의 메카, 볼쇼이 극장(Bolshoi Theatre))
모스크바에서는 세계 일류의 발레, 오페라, 클래식 음악을 감상할 수 있다. 이들은 17,18세기에 서구에서 들어온 것을 바탕으로 로맨티시즘, 리얼리티, 소셜 리얼리즘의 영향을 받아 태어난 불멸의 예술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예술의 한 가운데에 볼쇼이 극장이 있다.
1776년에 건립되어 200여년이 넘는 세월동안 러시아는 물론 전세계의 발레, 오페라, 그리고 연극예술에 지대한 공헌을 해 온 볼쇼이 극장에서는 순회공연을 떠나는 여름 시즌을 제외하고는 항상 최고 수준의 공연을 감상할 수 있다.
■ Это Россия~!! 여기는 러시아
1. 짐 꾸리기
두근거리는 마음을 가라 안치고 여행에 필요한 것들을 차근차근 생각해보자. 무겁게 꾸리지 말고, 가서 버릴 것과 사올 것들을 생각해서 부피 조절을 해야 한다.
☞ 필수품
여권, 여권․비자․초청장 복사본, 항공권 및 복사본, 예비용 증명사진(3매), 소형계산기, 필기도구 및 수업, 카메라, 부피가 작은 사전 또는 회화집, 세면도구와 수건, 지퍼백, 작은 손수건, 기초 의약품, 스테인리스 물컵, 수저 한 벌, 서류 파일, 속옷, 양말, 긴 바지, 긴 소매 티셔츠, 바람막이 잠바 등.
☞ 옵션
손톱깎이, 물티슈, 기초화장품, 실과 바늘, 건전지, 소형 나침반, 등산용 조끼, 깨끗한 남방이나 세미정장 계열 바지, 면도칼, 빗, 고추장(튜브), 포장지, 한지(A4), 간단한 선물용 전통 장신구나 엽서, MP3 또는 CD 플레이어, 손거울, 읽을 만한 책, 선글라스 등
☞ 배낭과 신발
배낭은 자신의 체격에 맞는 크기로 고르며 어깨 끈의 바느질이 튼튼하고 방수가 되는 것으로 준비한다. 또한, 간단한 소지품과 간신 등을 넣고 다닐 수 있는 작은 배낭이 있으면 시내를 이동할 때 편리하다. 자물쇠를 준비하여 큰 배낭의 지퍼에 채워두면 도난 사고를 방지 할 수 있다.
신발은 가벼운 트래킹화나 운동화가 편하고, 밑바닥이 울퉁불퉁한 고무창으로 된 것이 빙판 길에도 좋다. 실내화(슬리퍼)는 숙소에서 아주 유용하지만 거리에서 슬리퍼만 신고 다니면 경찰 검문의 표적이 되기 쉬우니 주의 한다.
☞ 여권지갑
러시아는 여권과 거주등록증을 항상 소지하고 다녀야 함으로 관련 서류와 지갑을 겸용으로 쓸 수 있는 여권지갑을 준비하면 도움이 된다.
2. 환 전
환전은 국내 외환은행에서 한화에서 루블로 바꾸는 것이 가장 좋다. 간혹 지방 또는 작은 지점에서는 루블이 없어 바꿔주지 않는데 이 경우 미국 달러로 하는 것이 좋다. 미국 달러로 환전 시 2001년 이후 발행된 US달러 신권이어야 사용이 가능하다.
러시아 현지에서 환전은 100달러와 50달러 지폐를 기준으로 하며, 공항․은행․호텔 내의 환전소에서도 환전이 가능하다. 러시아는 암달러상이 많은데 안전상 은행 또는 전문 환전소에서 환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 ATM으로 현금인출
번화가, 주요 건물입구나 은행벽면에 ATM이 있다. ATM에 Visa, Mastercard, Cirrus 등의 로고가 있으면 현금인출이 가능하며, 현금 인출을 위해서는 한국 통장 카드가 해외 인출이 가능하도록 은행에 별도로 신청을 해야 한다.(국제현금카드) 이외에 신용카드의 현금서비스도 가능하다.
현지 은행에 따라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1회에 10,000루불, 하루에 4회 인출이 가능하며, 수수료는 1회에 약 3$정도이다. ATM에서 현금 인출을 하는 것이 러시아 현지 통장을 만들어 송금을 받는 것 보다 수수료가 적다.
3. 여행 시 주의사항
・ 여권과 거주등록증을 항상 소지하고 있어야 한다.
・ 러시아 경찰의 불심검문은 러시아 여행 중 가장 성가시고 골치 아픈 일로, 주로 동양인들의 여권 검사를 목적으로 접근하여, 트집을 잡는다. 경찰과 부딪치면 끝까지 못 알아듣는 척하면서 버티는 것도 괜찮은 처세이다. 우선은 경찰과 부딪치지 않도록 피하자.
・ 러시아 지역을 여행 할 때에는 가급적 단체로 행동하고 개인행동은 자제한다.
단체일 경우에는 남녀가 혼성으로 다니는 것이 좋다.
・ 어두운 시간의 외출․산책 등을 자제하고, 역․카지노 등 우범지대 방문을 자제한다.
・ 범죄발생 시에는 안내인을 통해 인근 경찰서 또는 대사관(총영사관)에 즉시 신고한다.
・ 노상에서 집시들이 접근할 때는 아이라고 할지라도 쉽게 생각하지 말고 피하는 것이 좋다.
・ 사람이 혼잡한 곳에서는 가방 등 소지품을 옆구리 또는 등 뒤에 두지 말고 몸 앞으로 놓아야 한다. 특히 여권 및 사증을 분실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이런 서류들은 허리에 차는 작은 백에다 넣어두면 가장 안전하다.
・ 러시아의 수돗물에는 석회성분이 다량 함유되어 있을 뿐 아니라, 눈이 녹기 시작하는 4 ․ 5월에는 특히 정화상태가 좋지 않으므로 수돗물을 바로 받아서 마시는 일은 없도록 해야 한다. 생수를 사먹거나, 끓여서 마시는 것이 좋다.
4. 러시아 현지 물가
러시아는 매년 물가 상승률이 매우 높은 편으로 한국의 1:1 수준으로 계산할 수 있다. 공공요금과 먹을거리는 저렴하지만 공산품, 서비스업은 2~3배 이상 비싼 편이다. 우리나라의 마트형식의 슈퍼마켓은 매우 비싸며, 다음으로 일반 마가진(동네슈퍼), 재래시장 순이다. 최고급 호텔이나 레스토랑에서는 5~15%까지의 팁이 별도로 계산된다. 어디서든 조금이라도 나은 서비스를 받고 싶다면 단돈 10루블이라도 건네는 게 좋다.
알뜰살뜰한 유학생들도 물가가 무서워서 함부로 돈을 쓰지 못한다. 서민층이 즐기는 문화비, 먹을거리 비용은 매우 싸지만, 조금 괜찮은 곳에서 먹거나 놀면 한국에서 만큼 돈이 나간다. 대체로 생필품은 한국보다 조금 싸거나 비슷하지만 옷과 신발 등은 매우 비싸다.
5. 러시아 먹거리
러시아 사람들의 주식은 빵과 고기이다. 빵은 신맛이 나는 호밀빵을 즐겨 먹으며, 고기는 지방 함유량이 높은 돼지고기를 많이 먹는다. 이와 함께 깔바사(소시지)를 홀랩과 함께 즐겨 먹는다. 또한 추운 기후로 인하여 알콜 함량이 높은 보드카를 많이 마시며 여름에는 갈증해소를 위해 호밀빵을 넣어 만든 청량음료인 크바스를 마신다.
러시아 요리는 천연재료를 사용하며 요리하는 사람의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가정집이나 레스토랑 모두에서 정성껏 준비한 요리를 맛볼 수 있다.
마가진(슈퍼마켓)에는 일상용품부터 식료품 등 다양한 것들을 판다. 규모가 조금 큰 마가진이나 시내 중심가의 마가진에는 반찬거리를 만들어서 팔기도 한다. 또한 러시아 어딜 가든 팔도 도시락 라면을 볼 수 있는데, 빵과 도시락으로 한 끼를 해결하는 러시아인도 많이 있다.
▶ 이것만은 꼭 먹어보자
ㅇ 보르시치 : 고기 국물에 비트와 토마토, 당근, 감자 양파 등의 채소를 넣어 끓인 고기수프이다. 지역에 따라 넣는 재료가 달라서 지방마다 특색있는 보르시치가 있으며 러시아의 만능 소스인 스메타나를 뿌려서 먹는다. 겨울에는 따뜻하게 여름에는 차갑게 먹는다.
ㅇ 숄랸카 : 고기나 생선으로 우려낸 국물에 고기와 야채가 들어있는 수프이다. 러시아 특유의 향신료가 들어 있어서 독특한 맛이 나며 우리나라 사람들의 입맛에도 잘 맞는다.
ㅇ 샤슬릭 : 양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등의 육류나 연어 등의 어류를 야채와 함께 꼬챙이에 끼워서 숯불에 구운 음식으로서 러시아 사람들이 야외에서 즐기는 대표적인 음식이다.
ㅇ 피라쉬키 : 우리나라의 만두와 비슷한 음식으로 밀가루 반죽한 피에 고기나 야채, 잼 등을 넣고 튀기거나 오븐에 구워서 만든 것이다.
ㅇ 뺄메니 : 러시아 전통 만두로서 피라쉬키에 비해 크기가 작으며 고기로 소를 만든 만두이다. 물에 삶아서 스메타나 소스를 뿌려 먹는다.
ㅇ 블린 : 러시아 대표적인 명절 음식으로서 케피르를 넣어 만든 반죽을 둥글고 얇게 부쳐서 연어알, 햄, 치즈, 고기 등을 넣고 잼을 발라 싸서 먹는다. 길거리에서 쉽게 사먹을 수 있다.
ㅇ 흑빵 : 흑빵은 호밀가루에 캐러멜을 넣어서 만든 것으로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흑빵을 주식으로 먹는다. 흑빵의 종류가 다양하여 호밀로만 만든 것을 비롯하여 곡식을 넣은 것이나 부드럽고 딱딱한 흑빵 등 여러 가지가 있다. 러시아의 흑빵은 독일 등 유럽의 흑빵보다 더 차지고 신맛이 나는 것이 특징이다.
ㅇ 케피르 : 우리나라의 떠먹는 요구르트와 비슷한 유제품으로서 좀 더 진하고 신맛이 강하며, 유산균을 함유하고 있어서 위장 기능을 촉진시킨다. 러시아 사람들은 케피르를 그냥 먹너나 잼을 조금 넣어서 먹는다.
ㅇ 크바스 : 보리의 맥아나 호밀을 원료로 해서 만든 알콜이 들어 있는 탄산음료로 여름철 갈증해소에 좋다. 러시아 사람들이 워낙 즐겨 마시기 때문에 여름에는 크바스 전용 탱크가 거리를 돌아다니며 판매를 한다.
6. 소식 전하기
국제전화, 어떻게?
러시아의 공중전화기는 한국처럼 관리 운영되는 것이 아니라 통신회사별로 전화기와 카드, 사용방법이 다르기 때문에 사용이 불편하다. 즉, 같은 회사에서 나온 전화기와 카드가 일치해야 통화 가능하고 서로 호환되지 않는다.
첫댓글 사랑은 우리에게
우리들의 아주 작은 슬픔이나
하찮은 즐거움까지도
서로 이야기나누어 보고픈
기적의대한민국 박사모가족 소중한 벗님
한주도 수고많이하셨습니다.
주말엔 사랑하는 가족과 행복가득히 보내시기를
바라옵니다.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