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군의 공세가 우크라이나 북부 제 2의 도시 하르코프(하르키우)로 향하기 시작했다. 지난 2월 도네츠크주(州) 군사 요새인 아브데예프카(아우디이우카)가 함락된 뒤, 향후 러시아군의 진격은 도네츠크주의 '완전 해방'에 맞춰질 것이라는 관측이 유력했다. 그러나 지난달 초부터 하르코프에 대한 러시아군의 공습및 폭격이 눈에 띄게 늘어나더니, 기어이 지상 공격으로 이어지는 모양새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와 rbc 등 러시아 언론에 따르면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국경을 넘어 하르코프주(州)로 진격을 시작한 것은 지난 10일이다. 이제 갓 서너 날이 지났을 뿐인데, 현지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우크라이나측의 '죽는 소리'가 대부분이다.
하르코프를 향해 진격하고 있는 러시아군의 FPV드론 운영 모습/사진출처:소셜 미디어ok 영상캡처
"러시아의 특수 군사작전(우크라이나 전쟁, 2022년 2월) 개시 직후를 연상케 할 정도로 빠른 속도를 남하하고 있다" "하르코프 북부 지역의 방어선이 무력화됐다" "요새 구축에 투입한 돈은 다 어디 갔나? 방어 진지를 구축하기나 한 건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군사 전문 블로그들의 주장이 서로 다르니, 현 전황을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지만, 하르코프 북부 지역 마을 10여개가 이미 러시아군의 손에 넘어간 것은 확실해 보인다. 그렇다고 러시아가 대규모 기갑부대를 이 곳에 투입한 것은 아니다. 3~4개 대대 병력이 마치 자기네 집 드나들 듯이, 우크라이나 국경 마을에 진입하면서 남진(南進)중이라고 한다. 관련 동영상도 인터넷에 올라왔다.
하르코프를 향해 진격하는 러시아 보병부대/텔레그램 영상 캡처
우크라이나는 거의 무방비 상태에서 하르코프 북부 전선에서 허를 찔린 것 같은 느낌이다. 전투가 치열한 돈바스 지역(도네츠크주와 루간스크주) 중심의 기존 동부 전선에 주력하다 보니, 상대적으로 북쪽 방어에 등한시해 왔다는 관측에서다.
◇ 하르코프 공격은 두 방향으로
러시아군의 진군은 크게 두 방향으로 이뤄지고 있다. 인구 120만명 안팎의 하르코프시(市)로 곧바로 진격할 수 있는 길목의 리프치(Липцы)와 개전 초기에 점령했다가 퇴각한 볼찬스크(Волчанск, 보우찬스크)다. 러시아군은 개전 6개월 만인 2022년 9월, 볼찬스크와 이쥼, 쿠퍈스크 등 하르코프주에서 동쪽으로 퇴각한 바 있다.
미국측(존 커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전략 커뮤리케이션 조정관과 블링컨 국무장관)은 여전히 "여건은 어렵지만, 우크라이나군이 방어선을 지켜낼 것"이라며 "미국의 추가 군수품들이 속속 도착하고 있어 연말까지는 우크라이나가 러시아군의 공세에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져 있어 하르코프 상황이 전쟁의 큰 흐름을 바꾸지는 못할 것"이라는 일부 군사 전문가들의 분석(미 뉴욕 타임스 보도)과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또다른 전문가들은 "우크라이나가 러시아군의 이번 공세로 매우 위험한 상황에 빠졌다"며 반대 주장을 편다.
이같은 차이는 러시아군의 하르코프 공세를 보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국가 국방안보회의 산하의 허위정보 대응 센터(소장 안드레이 코발렌코)는 러시아군의 공격을 전선을 확대하고, 돈바스 지역 방어군을 북부 전선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성동격서'(聲東擊西) 위장 공격 작전으로 보고 있다. 이 센터는 북부 전선의 긴급한 SOS 신호에 우크라이나군 최고 지휘부가 예비병력을 급히 현지로 투입하는 등 방어를 낙관했다.
실제로 현장에 있는 우크라이나 군사 전문 블로그들은 "러시아군의 공격을 장갑차의 지원을 최소화한 '보병 (중심)공격'"이라고 지적했다. 대규모 기갑부대가 아직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러시아군의 기동을 좀 더 지켜봐야 러시아군의 하르코프 공격에 숨은 의도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유다.
◇러시아군의 하르코프 공세 시나리오
이들이 내세우는 러시아군의 공격 시나리오는 △하르코프 점령 △완충지대 확보 △위장 작전 등 크게 3가지다.
하르코프의 점령은 이론적으로 가능하지만, 러시아군의 병력 규모로 볼때 실현 가능성은 낮다. 오히려 우크라이나 서부지역에서 하르코프로 연결되는 공급망의 차단이 최우선 순위라는 분석이다. 키예프~폴타바~하르코프 고속도로를 일단 차단한 다음, 하르코프 점령을 위한 포위 공격 가능성을 검토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하지만, 이 직전의 성공을 위해서는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 북부 국경에 대규모 부대를 포진시켜야 하는데, 아직 그런 조짐은 포착되지 않고 있다.
하르코프 주변 작전 지도. 왼쪽으로는 폴타바를 거쳐 키예프로 이어지는 고속도로가 있고(빨간색 화살표), 오른쪽 붉은 사각형들은 하르코프주 쿠퍈스크로 향하는 러시아군 표시. 하르코프는 나흘째 남진중인 러시아군과, 동쪽에서 진격해오는 러시아군의 측면 공격에 시달릴 것으로 보인다/지도 출처:스트라나.ua
러시아군의 주 공격 지점인 볼찬스크의 위치. 왼쪽에 하르코프시, 왼쪽 위로는 러시아 국경도시 벨고로드가 보인다. 벨고로드와 하르코프 중간에 리프치가 있다. 맨 아래에는 2022년 9월 러시아군이 점령했다가 퇴각한 이쥼, 오른쪽 위에는 쿠퍈스크가 있다/얀덱스 지도 캡처
두번째는 완충지대의 확충이다. 러시아 국경도시 벨고로드에 대한 우크라이나군의 잇단 포격을 차단하려면, 우크라이나군을 현재보다 남쪽으로 10km이상 밀어내야 한다. 10Km 이상의 환충지대가 확보되는 것이다. 하르코프주 북쪽에는 러시아의 국경도시 벨고로드가, 수미주 북쪽에는 러시아 쿠르스크가 있다. 벨고로드와 쿠르스크는 그동안 우크라이나군의 집중 포격 대상이 됐고, 무장세력의 침투 지역이었다.
러시아군은 하리코프주와 수미주 국경 지역을 폭넓게 점령함으로써 우크라이나군의 포병 공격과 국경 침입 위험을 크게 줄일 수 있다. 하르코프 점령보다는 훨씬 적은 병력으로 목표를 달성할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성동격서' 작전. 코발렌코 우크라이나 허위정보대응센터 소장의 주장이 대표적이다. 그는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기만 작전에 속아 대규모 병력을 북부 전선으로 옮기면, 다른 전선이 큰 위험에 처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바로 드네프르와 자포로제(자포리자)로 이어지는 소위 '남부 전선'이다. 러시아에게는 하르코프보다 몇 배나 더 중요한 곳이라는 것. 드네프르와 자포로제 지역을 장악하면, 러시아는 (서방 군수물자가) 돈바스의 동부 전선으로 향하는 우크라이나 핵심 보급로까지 차단할 수 있어 1석2조라는 분석이다.
최종 공격 목적이 어디에 있든, 이번 러시아군의 1차 목표는 리프치와 볼찬스크다. 두 지역을 점령하면, 하르코프시를 위협하면서(리프치), 큐퍈스크 등 동쪽로 향하는 물류를 포격 사정권안에 둘 수 있기(볼찬스크) 때문이다. 2022년 가을, 다급했던 철군의 이전 상태로 전황을 되돌릴 기회가 만들어진다.
특히 리프치를 장악한 러시아군이 남쪽으로 10~15km 더 남하하면, 하르코프시 대부분 지역을 포 사정권 안에 두게 된다. 또 서쪽 폴타바 등 외부 도시로 이어지는 고속도로도 포함된다. 이를 위해서는 수미 지역에 대한 러시아군의 군사작전도 필요한데, 13일 이 지역에 대한 포격이 강화됐다.
물론, 이 모든 게 쉬운 작전은 절대 아니다. 사실상 교착상태에 빠진 현 전선에서 10km 이상 전진하는 것은 쉽지 않다는 게 러-우크라 양측의 판단이다.
◇방어에 나선 우크라군 고민은
러시아군의 하르코프 공세에 직면한 우크라이나의 최대 고민은, 역시 전선 확대에 따른 배치 가능 병력의 부족이다.
미국 일간지 뉴욕타임스(NYT)는 13일 "러시아군의 공세가 우크라이나 북부 국경을 따라 전선을 확대했으며, 우크라이나군은 예비 병력이 고갈될 위협에 빠졌다"고 분석했다. NYT는 또 "하르코프에 대한 위협은 지난 2년 동안 수십만 명이 희생되고, 수십억 달러가 투입됐지만, 변한 게 아무 것도 없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며 "궁극적으로 우크라이나측에 러시아와 평화협상을 재개하도록 압력을 가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우크라이나군/사진출처:우크라군 합참 페북
러시아군의 하르코프 진격이 우크라이나 정치및 군사 지도부에 안겨주는 영향도 적지 않다. 가뜩이나 젤렌스키 대통령의 원래 임기가 20일로 끝나는 상황에서, 우크라이나군부는 군사 작전에 대한 야당이나 여론의 질타가 부담스러울 수 밖에 없다. 야당과 군 블로거는 이미 우크라이나 북부 전선에 대한 대비 부족, 지지부진한 방어진지 구축 작업, 국정 운영 시스템의 문제점 등을 구체적으로 지적하며 정치 공세에 나선 상황이다.
알렉세이 곤차렌코 야당 의원은 "(예산을 투입했는데) 콘크리트 방어 요새는 어디에 있고, 지뢰밭은 어디에 있느냐? (그 책임을 진) 국방장관은 지금 어디에 가 있나"라고 질타했다.
스트라나.ua는 13일 하루를 결산하는 기획기사에서 "(하르코프 공세로) 전쟁의 향후 전망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며 "매일 영토를 빼앗기고 있다면, 현 전선에서 당장 전쟁을 중단(휴전 혹은 평화협상)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라고 되물었다.
옌스 스톨텐베르그 나토(NATO) 사무총장 이날 "우크라이나가 전쟁에 진다면 '재건'이라는 말도 의미가 없다"며 "자유롭고 독립된 우크라이나에서 복원할 게 아무것도 없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절망적인 심정을 표현한 것이라는 해석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