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에 관한 시모음 32)
장마 /전영관
비 오는데 물 구경 가요
창밖은 폭우와 우산들로 소란스러운데
뒷자리 사내의 통화가 들린다
당신과 장화 신고 웅덩이 마다 잘박거리며
물 구경 가던 때 있었다
왜 상류를 보게 되느냐고 내게 물었지
다리 위에서 상류를 보면 꿈이 많은 사람
멀어져가는 하류를 보면 잃어버린 것들이 많은 사람
쿵쾅거리는 물발에 열중하면 얼핏, 현기증이 난다고
당신은 나란히 잡은 손에 힘을 주었지
물보다 빠르게 걸으면 넘어진다고
상류를 아는 어른 말투로
당신 젖은 어깨를 토닥거렸지
등뒤로 넘어온 생면부지 여자 음성이
부추전 지지는 기름내만큼 고소해
내 사람이라면, 하려다 웃는다
커피 식는 줄도 모르고 우산을 들며
신인 배우마냥 대사를 중얼거렸다
비 그쳤는데 물 구경 갈까
장마의 추억 /김금자
반기지 않아도 여름 문지방을 넘어와
밤 같은 먹구름이 하늘을 가리면
굵은 빗줄기는 메마른 가슴을 적시고
대지의 품에 안겨 둘만의 밀애를 나눈다
고인 빗물처럼 가슴이 흥건히 젖으면
소용돌이치는 태풍의 눈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천둥, 번개의 불꽃처럼 뜨거운 밤을 살랐지
잉태된 소중한 것을 지키려
삶과 죽음의 깊은 물살을 거슬러
내려놓고 퍼내 버린 시기와 질투
긴 장마로 그립고 보고픈 날에 이끼가 끼고
여우비에 거미줄 같은 이야기가 무성하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구름 속에서 얼굴을 내미는 허무
휘몰아치는 태풍에
심연의 바다를 뒤엎는 애별의 눈물
무지갯빛 행복은 어느 구름 속으로 숨어든 걸까
인생이 비바람에 떨어진 과일 같고
고무신처럼 떠내려간 여름 추억이
장마에 휩쓸린 풀뿌리 같아도 끝은 미려하다.
장마에 갇히다 /이동호
창가에 서서 비의 창살을 두 손으로 잡고 흔든다
방은 감방이었고 나는 수감 중이다
언제부터 빗소리에 취조 당하고 있었던가
나도 모르게 기밀들을 발설하지는 않았는지
비는 더 알아야할 것이 있다는 듯 그치지 않고
더 젖을 것도 없는 나는 창가에 서서 불안하다
빗소리에 젖지 않는 것이 이 세상에는 있는가
호출신호처럼 천둥이 울리면 각오할 수밖에 없다
남은 것은 전기 의자뿐이라는 듯
하늘은 연신 전원을 올리고 있다
탈출을 감행했던 사람들은 모두 독방수감중이다
우산 속에 갇힌 사람의 뒷모습과
이역의 대문 앞에서나 처마 밑에서
홀로 발 동동 구르는 사람들은, 그래서 쓸쓸하다
비의 제국주의도 이쯤 되면 폭동이 있을 법한데
잠잠하다 비의 강점기, 비의 탄압은 완벽하기에
언제부터인가 세상의 창가에 불빛이 아른거린다
불빛은 사람들의 염원을 담고 몰래 타오르고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는 나도 기도하는 모습이 되어
창가에서 타올랐지만
여전히 메시아는 오지 않았다
비는 한층 더 큰 소리로 어디론가
모르스 신호를 타전하고 있었다
창밖에는 굵은 빗방울이 떨어졌고 나는
비의 창살이라도 끊을 것처럼
날카롭게 서 있다
겨울 장마 /김미선
누가 여자를 분열된 풍경 속에 걸어 두었을까
물구나무선 여자의 맨발은
버스 바퀴를 굴리고 있다
당돌한 무임승차에
승객들이 히죽이 웃고 있다
풀어 헤친 머리카락 창밖으로 내밀어
어느 별에서의 암호를 수신 중이다
단절이 지어내는 빌딩의 시계바늘
고장난 위성 안테나에서
수신 받지 못하는 별똥별이
아득한 기억 속에서 혼자 흔들린다
지구촌에 기거하고 싶었던 눈빛
처절히 태양에 매달려
억겁의 시공을 넘나든다
생의 궤도 이탈
낯선 우주에 걸터앉은 여자
또 다른 행성을 굴리고 있다
활화산 같은 눈망울이 부질없이
온전한 지상을 불평으로 휘젓는다
불안한 유리창에 흰 거품이 흘러내리고
오후를 실은 도시버스가 황급히 달리고 있다
장마 /최 옥
일년에 한 번은
실컷 울어버려야 했다
흐르지 못해 곪은 것들을
흘려보내야 했다
부질없이 붙잡고 있던 것들을
놓아버려야 했다
눅눅한 벽에서
혼자 삭아가던 못도
한번쯤 옮겨 앉고 싶다는
생각에 젖고
꽃들은 조용히
꽃잎을 떨구어야 할 시간
울어서 무엇이 될 수 없듯이
채워서 될 것 또한 없으리
우리는 모두
일년에 한 번씩은 실컷
울어버려야 한다.
가을장마 /이도연
부초 같은 뭉게구름 바람에 흐르다
비구름을 타고 노는 천둥벌거숭이
온종일 가을장마 심술이 한창이구나
입추의 절기를 밟고
저물어 가는 계절의 바람은
휘몰아치는 태풍 앞에
제 갈 길 몰라 주룩주룩 눈물 흘린다
비구름은 나뭇가지 사이를 파고드는
시원한 바람 곁에 눕더니
가을의 냄새 짊어진 공기를 타고
또 한 계절의 고비를 넘어
나그네 발길을 재촉하는구나
계절은 또 그렇게
속절없이 흐르는 운명 같은 것
한잔 술에 젖어 흐르는 이 밤에
구름은 어디로 가고 비는 어디에 뿌릴지,
내 발길 머무는 곳에
세월의 비바람은 무정하게 고개를 넘는다.
장마 /원무현
참 별난 식성을 가졌군
장미원 나들이 가는 가족의 다리에선 어떤 맛이 나는지
뎅겅뎅겅 잘도 잘라 먹는군
시도 때도 없이 쏟아지는 이놈의 소나기 언제 그치나
먹구름이 번들거리는 칼날을 잠시 집어넣은 것은
너도나도 집으로 되돌아가려는 다리만 남겼을 때
습기 찬 집으로 가는 다리 맛이란!
오늘따라 바삭거리는 닭다리가 먹고 싶군
저마다 집으로 향하려는 다리를 잘라내는 동안
온몸에선 치킨가게로 가는 다리가 우후죽순
가을장마 /오보영
나무야 젖든 말든
땅이야 굳든 말든
그저 저만 좋다고
막무가내 줄줄 쏟아져 내리는
네 기개가 한편으론 부럽기도 하단다
때론 나도
마냥 해보고 싶은 걸
마치 네가 대신
다해주는 것 같아
바라보는 내 가슴이
후련하구나
장마 /안영준
구름에 가려 희미해진 오작교
견우와 직녀가 만나
굵은 눈물을 왈칵 쏟아낸다
달도 떠내려가 캄캄한 밤
가로등은 외로이 서서
비 젖은 여인의 길을 밝힌다
무자비하게 퍼붓는 폭우에
뺨 맞은 해바라기 청치마는
갈기갈기 찢기고
슬피 울며 고개를 들지 못한다
담 넘은 능소화 여인
방울방울 눈물이 맺혀
낭군님 기다리며
흙담에 기대고 이제나저제나
가을장마 /(宵火)고은영
계절 앓이에 묻어 놓은 아픔들이
호우 속에 통곡처럼 요란하다
얼마나 세찬 몸부림이냐
흙과 하나가 되어 흘러가는
사소한 물방울들이 제 형상을 허무는 일은
만남과 이별의 책장을 넘기며
정지된 추억의 앨범에 번개같은
날렵한 청춘의 미소나 행위를 그려 넣은 일은
무심한 세월이 저 빗줄기에 지난 기억을 싣고
저물어가는 세상에 아쉬운 여름과 벗하여
강물로 강물로 흘러가는 물줄기마다
그리움을 그려넣는 일은
마른장마 /靑心 장광규
장마가 시작된다고 했다
한 달 남짓 이어질 거라는
장마는 며칠 계속되더니
그 후론 비는 오지 않고
더위가 제 세상인양 기승을 부린다
장마철인데 비가 내리지 않으니
마른장마라 부르며 함께 간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약속을 했다 안 지키기도 하는데
하늘이 변할 수도
날씨가 변덕을 부릴 수도 있어
비가 안 내리는 것을 어쩌랴
따지고 보면 이런 기후변화는
인간에게 칠 할의 책임이 있는 것을
누가 누구를 원망할 것인가
비는 내리지 않고
온도는 오르고 습도는 높으니
신경이 예민해진다
비가 안 내리니
대신 땀이 흐른다
화내지 마라
이 더위에 짜증내면
더위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찜통더위에 열대야에
인심까지 말라버려서야 되겠는가
기다려 보자
기다리면 언젠가는
시원하게 비 내릴 것이다
장마가 지나간 자리 /신윤규
포크레인 한 대로 닦아 올라가는 신작로
하늘의 물폭탄이 심술을 부리구나
한 대 얻어맞고 부랴부랴 비상회의
레미콘이 들어오고 철근이 배달되었다
비를 맞아가며 강행군의 공사가 시작된다
옹벽이 쌓이고 구거가 단장될 즈음 그곳엔 아무도 없다
구순 노인은 이불보 하나로
산사태를 막아내었다
군데군데 패인 도로는 시작부터 다시
그뿐이랴 곳곳의 작물은 벌레투성이
올해는 왜 그리 모기가 많은지
우거진 풀속을 독차지 하고선
들어서는 농부 어느 한 곳 하나 남기지 않고
온 몸을 초토화시켜 버린다
야채는 그 자리에서 다 녹아버리고
과일은 병들어 쓸모가 없구나
마른장마 /강중훈
마른장마가 비옷 같은 미끄러움으로
내 이마를 타고 내릴 때,
4차선 도로 가장 끝자리에서
나는 또 다른 추억의 사랑을 낚시질한다.
가슴속 비는 계속해서 내리고,
내리지 않는 비와 비 사이로
속 빈 버스 한 대,
내 앞을 막아선 바람을 가르며 지나가지만
비는 내리지 않고,
신호등을 꿈꾸는 나는 아직도 그 자리에 있는데,
질퍽한 그리움이 녹아 흐르는
인도와 차도의 중간 쯤,
오로지 장맛비처럼 비틀거리는 그림자 몇 조각,
오늘도 나를 부정하며
4차선 도로 가장자리에 서 있다.
장마 /장종섭
하늘이 열려 쏟아진다
쌓였던 그리움 퍼냈다고
강물이 넘친다
밖에서 젖고있는
저것들 처럼
날 적셔줄 한 사람
이 장마가 끝나면
온 몸이 젖었다고
버리기야 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