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665
11월5일[연중 제31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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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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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QDcgV-5caJIㅁ
(제주교구 현요안 사도요한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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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찬란한 성덕과 비범함을 청빈과 겸손의 덕으로 가리고>
예수님으로부터 신랄하면서도 강도높은 비난을 받은 당대 지도층 인사들-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생각하면 마음 속으로 고소하고 후련하면서도 남의 일 같지가 않습니다.
그들의 삶과 제 삶을 비교해 보니 도진개진, 50보 100보라는 생각에 참으로 부끄럽기도 합니다.
예수님 질책의 원인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과 이중성입니다. 언행의 불일치요 하늘을 찌르는 교만, 겸손의 결핍입니다. 안그래도 이런 측면은 사목자로서 가장 마음에 찔리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과 같은 심정으로 예수님의 야단을 맞으면서 드는 한 가지 생각입니다. 야단만 맞고 있을 게 아니라, 위선적인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대척점에 서있는참 목자로서 이정표를 세워야겠다는 생각 말입니다.
어떻게든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보다는 더 잘 살아야겠다는 굳은 다짐이 오늘 제게 필요합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가 눈여겨볼 가경자가 한 분 계십니다. 이탈리아 출신 살레시오 회원으로서 일본선교사로 활동하셨으며, 예수의 까리따스 수녀회 창립에 큰 역할을 하셨던 빈첸시오 치마티 신부님(1879~1965)이십니다.
‘마에스트로’ ‘주님의 음유시인’이라는 애칭으로 불릴 만큼 그는 당대 유명한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였습니다. 동시에 아주 감미로운 바리톤 목소리를 지니셨는데, 음악회가 끝나면 목소리에 반한 귀부인들이 그의 얼굴을 보기 위해 길게 줄을 설 정도였습니다.
그는 돈 보스코의 정신에 따라 음악을 통해 청소년들이 기쁨 속에 주님을 섬기도록 노력했습니다.치마티 신부님은 음악뿐만 아니라 문학나 신학, 영성이나 인품, 등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탁월함과 비범함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찬란한 성덕과 비범함을 청빈과 겸손의 덕으로 가리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습니다. 1935년 미야자키 선교구가 지목구로 승격되자, 그는 초대 지목구장으로 임명되었고, 그에게는 몬시뇰이라는 칭호가 주어졌습니다.
이를 알게된 이탈리아 친구들이 아주 멋진 고가의 자주색 몬시뇰 복장을 선물로 보내왔습니다. 그는 즉시 되돌려보내면서 일본의 가난한 청소년들을 위해 쓸 수 있게 그것을 팔아서 현찰로 보내라고 했습니다.
치마티 신부님의 복장은 언제나 여기 저기 수없이 꿰맨 자국 투성이의 낡은 수단 한 벌 뿐이었습니다. 그의 모범적인 수도생활을 눈여겨본 수도회 장상들께서 그에게 중책을 맡기려고 여러 번 초대를 했었지만, 그때마다 그는 예의바르면서도 완강하게 사양했습니다.
그는 1938~1948년 사이 , 10여년에 걸쳐 일본 살레시오회 관구장직을 역임했었는데, 로마 총본부에 계신 총장 신부님에게 보낸 월말 보고서 말미에는 항상 이렇게 썼습니다.
“사랑하는 총장 신부님, 저는 인간적으로 큰 약점을 지니고 있는데, 지나치게 교만하고 예민한 것입니다. 이 약점을 고치도록 계속 노력하겠습니다.”
치마티 신부님은 자신의 교만을 물리치기 위해 언제나 열심히 기도하고 또 기도했습니다. 일하고 또 일했습니다. 늘 형제들을 자신보다 낫다고 여겼으며 형제들을 칭찬했습니다. 작은 것 하나라도 좋은 것이 있으면 형제들에게 양보했고, 자신은 늘 가난하고 초라한 모습으로 그렇게 살았습니다.
이 땅의 모든 사목자들이 치마티 신부님처럼 충실한 기도생활, 겸손하고 청빈한 삶을 통해 매일 다가오는 다양한 측면의 유혹들을 극복하고, 하느님 만으로 충분한 착한 목자로 설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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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UFcQs66UN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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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에 도전하는 이는 위선적일 수 없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위선을 질책하십니다. 그들은 말은 하고 행동은 하지 않습니다. 다른 이들에게 가르치기는 잘하고 인사 받기 좋아하지만, 정작 자신들은 가르치는 것을 실천하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으면서 그렇게 보이려는 것을 ‘위선’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들만이 아니라 우리는 다른 이들의 시선에서 자유로운가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자기 몸을 무화과잎으로 가리기 시작한 이후로 변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죄는 교만에서 시작되고 교만은 우리를 위선자로 만들기에 이 죄에서 벗어나려면 솔직해지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솔직해지면 다른 이들이 나를 무시함으로 겸손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인천에 사시는 한 할머니가 병원장 사모님으로서 잘 나갈 때 의료 사고가 터져서 병원 문을 닫을 수 있는 상황에 부닥쳤습니다. 그때 가장 두려웠던 것은 망하는 것 자체가 아니라 친구들에게 비웃음 당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동안 돈이 있다고 많이 자랑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우리는 타인의 시선을 위해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소위 이러저러하게 보이려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 시선의 노예가 되어가는지도 모르고. 교회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요? 영화 ‘스포트라이트’(2015)는 미국 가톨릭교회가 오랫동안 성직자들의 아동 성추행을 은폐해 온 사실을 신문 기자들이 밝혀내는 내용입니다. 우리로서는 매우 자존심 상하는 영화입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실화를 기반으로 했고 실제로 이 사건을 통해 미국 가톨릭교회가 상당한 물적 정신적 타격을 받은 것이 사실입니다. 왜 교회는 솔직하지 못했을까요? 하느님을 완전히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세상의 시선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은 세상의 수준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아무리 노력해봐야 자기 힘으로는 모두를 속일 수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나뭇잎으로 가리던 서로의 부끄러움에서 해방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느님께서 만들어주신 가죽 옷을 입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 가죽 옷이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를 입는다는 말은 세상과 다른 새로운 존재로 태어남을 의미합니다. 이 지상 시스템 안에 속해서는 세상 시선에 절대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보고 물 위로 뛰어내렸습니다. 그래야 배에 타고 있을 때보다 자유로워집니다. 같은 배에 타고 있으면 아무래도 나의 모든 말과 행동이 주위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기에 그들의 반응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물 위로 뛰어내리면 이제 물 위를 제대로 걷지 못하지만, 그리스도 예수님을 닮아가는 자신에게만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타인을 신경 쓸 겨를이 없습니다. 이렇듯 그리스도 덕분으로 새롭고 불가능한 일에 도전할 때 이 지상 사람들과 다른 위치에서 살게 됩니다. 그러면 그들의 판단은 신경 쓸 필요가 없어집니다.
위 병원장 사모님도 십자가의 길을 하다가 제4처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만나실 때, 예수님께서 “사랑한다”라는 말을 해주셨고 그 이후로 모든 자존심을 내려놓게 되었습니다. 창피해서 나가지 못하던 본당에 나가 먼저 화장실 청소를 하였습니다. 병원장 사모님이 성당 화장실 변기를 매일 닦으면서도 기쁠 수 있었습니다. 병원이 망해도, 친구들이 비웃어도 상관없었습니다. 그런 것과 무관한 존재가 될 하느님 사랑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타인의 시선에서 해방되는 유일한 방법은 이렇게 하느님 사랑을 믿고 불가능에 도전하는 일입니다. 마더 데레사는 아무 능력이 없는 작은 수녀로서 모든 가난한 이들을 먹이고 입히겠다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러자 모든 비웃음에 무관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동전 몇 개만 가지고 담대히 가난한 이들을 위한 커다란 병원을 짓겠다고 기자회견을 하였습니다. 결국 수녀님의 말대로 병원이 지어지는 것을 본 세상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습니다.
불가능한 일에 도전하여 세상 비웃음에 맞서봅시다. 버락 오바마는 학교에서 장차 무엇이 되고 싶냐고 물을 때 항상 대통령이 되겠다고 말했습니다. 흑인 아이가 대통령이 될 거라고 말하면 대부분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들의 무시에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믿음으로 물 위를 걷는 다른 존재가 되어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겐 성체 성사가 있습니다. 우리를 다른 존재로 만들어주는 가죽 옷입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세상의 시선에 지배 받는 노예 생활로 생을 마감할 것인지, 아니면 불가능에 도전하며 세상을 이길 것인지는 우리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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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열정적인 춤으로 사랑을 받던 가수 김완선이 부른 노래 중에 ‘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가수는 춤을 추며 부르지만 가사는 철학적인 면이 있었습니다. 오늘은 그 가사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빨간 모자를 눌러 쓴/ 난 항상 웃음 간직한 삐에로/ 파란 웃음 뒤에는 아무도 모르는 눈물/ 초라한 날 보며 웃어도/ 난 내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모두들 검은 넥타이 아무 말도 못하는 걸/ 사람들은 모두 춤추며 웃지만/ 나는 그런 웃음 싫어/ 술 마시며 사랑 찾는 시간 속에/ 우리는 진실을 잊고 살잖아/ 난 차라리 웃고 있는 삐에로가 좋아/ 난 차라리 슬픔 아는 삐에로가 좋아/ 초라한 날 보며 웃어도/ 난 내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가사 중에 ‘우리는 진실을 잊고 살잖아!’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한국에서 교우들과 만나면 자연스럽게 ‘본당사제’에 대한 이야기를 하곤 합니다. 교우들이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제들이 있습니다. 교우들이 실망하고, 빨리 임기를 마치고 다른 곳으로 가기를 바라는 사제들이 있습니다. 사제의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뭉클하고, 그리움이 넘치는 사제들이 있습니다. 사제의 이름만 들어도 기분이 나빠지고, 화가 나는 사제들이 있습니다. 32년을 사제로 살면서 ‘나는 어떤 모습으로 비춰졌을까?’ 생각하니 부끄러움이 많습니다.
신자들이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제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저도 기분이 좋아집니다. 신자들은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사제들을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는 사제들을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미사를 정성스럽게 집전하고, 고백성사를 성심껏 들어주는 사제를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가난하고, 아프고, 외로운 교우들과 가까이 하는 사제를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좋은 강론으로 위로와 용기를 주고, 험한 세상에 다리가 되어주는 사제를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늘 기도하고, 항상 감사하며, 언제나 기뻐하는 사제를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재정에 투명하고, 청렴한 사제를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신자들이 실망하고, 분노하는 사제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저도 부끄럽고, 안타깝습니다. 신자들은 말과 행동이 다른 사제들에게 실망합니다. 책임과 의무를 소홀히 하는 사제들에게 실망합니다. 성사에는 관심이 없고 재물만 챙기려는 사제들에게 실망합니다. 준비 없는 강론으로 횡설수설하는 사제들에게 실망합니다. 자주 화를 내고, 남 탓을 하는 사제들에게 실망합니다. 지나친 음주로 자주 실수하는 사제들에게 실망합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처럼 순교하지는 못할지라도,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처럼 열정적인 사목은 못할지라도 신자들이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제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여러분 가운데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하느님의 복음을 여러분에게 선포하였습니다.” 첫 본당 신부가 되었을 때의 일들이 생각납니다. 월요일에는 약수터에서 물통에 물을 담아왔습니다. 그 물을 아이들이 마시고, 어른들이 마셨습니다. 물통에 물을 가득 담으면서 힘든지 몰랐습니다. 주일에는 수녀님과 함께 화장실 청소를 했습니다. 바닥에 묻은 흙을 청소하면서 내 마음도 깨끗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설날과 추석에는 봉고를 몰고 어르신들을 모시러 다녔습니다. 사제가 직접 봉고를 몰고 어르신들을 모시러가니 모두들 좋아하셨습니다. 농사지은 쌀, 마늘, 깨, 오이, 고추도 가져다 주셨습니다. 주일 미사를 마치고 교우들과 함께 마당에 쌓인 쓰레기를 모두 담아 치우면 마음이 홀가분했습니다. 함께 마시는 막걸리는 꿀맛이었습니다. 수녀님과 함께 서울 청계천으로 가서 비디오테이프를 사왔습니다. 아이들을 위해 만화영화도 사고, 종교영화도 사고, 고전영화도 사왔습니다. 아이들이 교리실에서 영화를 보았고, 교우들은 집으로 빌려가서 보았습니다. 주일 미사 후에 교우들이 친교를 나눌 수 있는 ‘식당’도 만들었습니다. 태권도를 시작해서 아이들을 가르쳤고, 그 아이들이 교리를 배워 세례를 받았습니다. 3년이라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32년 사제생활 중에 가장 행복했던 시간들입니다. 저를 믿어 주는 교우들이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저를 위해 기도해 주는 교우들이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교우들이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제들 때문에 예수님께서 미소를 짓기를 소망합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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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23,1-12: 그들은 말만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모든 신앙인을 대상으로 한다. 오늘의 독서를 보면 특히 교회 안에서 지도하거나 가르치는 책임을 맡은 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이것은 지도자들뿐 아니라, 우리 모든 신자에게도 해당하는 것이다. 말라기 예언자는 당시 사제들의 잘못을 비난하며 사제들의 회개를 촉구한다. 그들은 율법을 해석하여 가르치는 스승의 역할을 했지만 “눈먼 인도자들”(마태 23,16.24.26)이 되어, 율법을 왜곡하고 사람들에게 편파적으로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이런 편파적인 태도는 우리가 모두 한 분 아버지를 모시고 있고, 하느님을 유일한 창조주로 모시고 있다.(말라 1,10절)는 사실을 망각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위선적인 행위와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려는 태도를 지적하시고(2-7절), 제자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부분(8-12절)으로 나눌 수 있다. 이렇게 공동체의 지도자들에게 말씀하시면서 동시에 공동체 역시 그러한 위선적 태도에 물들지 않도록 하라는 권고이다. 모세의 자리는 가르치는 직무를 뜻하는 것이지, 특별한 자리는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충실한 율법 해석가들이기는 하지만 율법의 충실한 실행자들은 아니므로 위선자들이며, 위선을 가르치는 자들이라고 하신다(3절). 그들은 제일 높은 자리에 있다는 구실로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 하지 않으면서” 일반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운다.(4절) 예수님은 어떠신가? 그들의 태도에 맞서서 당신 자신에 대해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의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8-30) 하신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그들의 열심을 외적으로 드러내어 사람들이 놀랄만한 행위나 태도를 보였는데, 예를 들면 “성구 넣는 갑”(5절)을 크게 만든다든지, 또는 성경의 지시에 따라(민수 15,37-41; 신명 22,12) 야훼의 모든 명령을 기억한다는 외적 표지로 옷자락, 네 귀퉁이에 술을 달았다. 이 모든 것은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기 위한 것이다.(6-7절) 위선은 항상 허영과 겉치레와 연결되어있다. 선하고 진실한 것은 없으면서 내면의 거짓, 비열, 허영 등을 가리기 위한 외적 장식만 만들어 낸다. 이렇게 추한 모습이지만 이해관계에서 위선이 나온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교회 공동체의 지도자들을 향한 내용이 나오고 있다. “너희는 스승 소리를 듣지 말아라. 또 이 세상 누구를 보고도 아버지라 부르지 말아라. 또 너희는 지도자라는 말도 듣지 말아라.”(8-10절) 여기에 나오는 스승이나 아버지 그리고 지도자란 명칭들은 교회와 같은 “형제들”(8절) 공동체 안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오늘 복음에서의 의미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신앙적 차원에서 상위에 있는 척하며 그들을 지배하려는 겉꾸미는 태도에 대한 반박이다. 이것이야말로 교회 안에서 권한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생각해야 할 문제이다. 마태오는 우리가 모두 유일한 지도자이신 그리스도 안에 평등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마태오는 교회의 권위의 원칙을 확언하고 있다.(16,18-19; 18,18) 그러나 그 권위는 봉사의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11-12절)
그러한 권위는 말로만이 아니라 참으로 형제들에게 사랑과 밝은 지혜의 봉사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가 1978년 10월 22일 교황직을 시작하면서 바친 기도가 본보기가 될 것이다. “오 그리스도님! 제가 당신의 유일한 권한의 봉사자가 될 수 있게 하시며 또한 봉사자이게 하소서! 당신의 온유한 권한의 봉사자, 기울어질 줄 모르는 당신 권한의 봉사자가 되게 하소서! 제가 종이 될 수 있게 하소서! 아니 당신 종들의 종이 되게 하소서”. 그리고 마지막에 모든 신자에게 다음과 같이 당부하신다. “여러분들은 제가 여러분들을 섬길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바오로 사도는 테살로니카 신자들에게 이 점에 관해서 감동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는 그가 행한 사도직의 모습을 상기시키면서 복음 외에 그들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종의 역할보다 어머니 역할은 더 위대하지 않은가! “우리가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에는 마치 자기 자녀를 돌보는 어머니처럼 여러분을 부드럽게 대했습니다. 우리의 목숨까지도 바칠 생각이었습니다. 우리는 그토록 여러분을 사랑했습니다. 우리는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노동을 했습니다.”(1테살 2,7b-9) 물론 이러한 분위기 속에는 신자들의 폭넓은 일치도 들어있었다(1테살 2,13). 우리는 누구나 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는다. 특히 말씀의 선포자들 사목자들 사도들은 더욱 그렇다. 이들을 위해 특별히 이 시간에 기도하고 우리 자신 역시 진정한 사랑의 봉사자로 사는 삶을 살아 주님의 말씀과 하느님 나라를 전파할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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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주보》 생명의 말씀
[서울대교구 구요비 욥 주교님]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일본에서 선교 중인 신부님 한 분이 휴가차 오셔서 들려준 이야기가 제 심금을 울립니다. 일본에서는 어디를 가나 심지어 시골의 아주 작은 마을에도 '서점‘들이 있을 정도로 책을 많이 읽습니다! 청소년들은 우리나라와는 달리 주말에도 등교하여 자유롭게 다양한 운동과 예능 활동을 하며 자기 계발의 시간을 만끽하고 있습니다.
드라마 '더 글로리'의 내용처럼 학교 내 폭력의 트라우마들이 인간과 사회에 미치는 악영향이 그 나라에는 왜 없겠습니까마는 서이초등학교 여선생님의 자살이 촉발한 전국 초등학교 선생님들의 교권 회복을 위한 호소와 절규는 우리나라 교육 현장의 진실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기에 참으로 가슴 아프고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인간은 미완성된 존재로서 성숙하고 완전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교육이 필요하기에 교육자 선생님들의 가르침으로 자기를 계발하고 완성시켜 나갑니다. 이는 예지인(homo sapiens)으로서 인간의 이성이 근본적으로 추구하는 '앎'에 대한 욕구에서 잘 확인됩니다. "사람들은 앎의 즐거움을 원한다.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앎을 원한다."(아리스토텔레스)
복음서에서 계시되는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우신 모습 중 하나는 하느님 나라의 진리를 선포하시는 선생님으로서의 고귀한 품위와 권위가 아닐까요? 인류의 스승이신 예수님의 권위는 당신의 가르침을 경청하며 따르는 백성들과 제자들을 사랑으로 돌보시는 종의 모습(요한 13.5)에서 잘 드러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치유하는 기적을 베푸셨을 때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마르 1,27)라고 하던 사람들의 반응에서 잘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유다교의 동태복수법(Tation)과 폭력의 허용에 반(反)하여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라고 가르치셨을 뿐만 아니라 온 인류의 죄를 대신 속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까지 우리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렇듯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 나오는 율법 학자들과 달리 온전히 지행합일(合)을 이루신 참된 스승이십니다!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마태 23,10)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우리 인간을 당신의 모습(imago Dei)대로 창조하시고 당신을 닮은 존재(similitudo Dei)가 되라는 사명을 부여하셨습니다. 그분은 당신의 창조 계획을 완성하기 위하여 당신이 사랑하시는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우리가 모두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서 일치를 이루고 성숙한 사람이 되며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다다르게 되도록"(에페 4.13)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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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주보》 말씀의 향기
[대전교구 조성광 바오로 신부님(대전가톨릭평화방송 사장)]
<섬기고 겸손하기>
"너희 중에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이는 높아진다."
선거철이 되면 많이 듣는 얘기들이 있습니다. 국민의 심부름꾼이 되겠습니다. 충실한 일꾼이 되겠습니다. 국민을 섬기는 정치를 하겠습니다.' 그런 약속들이 잘 지켜지는지는 당선된 후 의 모습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잘 지키는 사람들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정치적인 약속들에 대한 불신은 계속됐습니다.
예수님의 시대에도 말만 하고 자신은 실천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겠지요. 더구나 소위 민중들의 지도자라고 하는 사람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이 대표적이었나 봅니다. 예수님은 이런 행태들을 꼬집으시며, 위에서 명령만 내리고 자신은 모범을 보이지 않는 사람 들을 비판하시고, '너희중에 너희를 섬기는 사람과 자신을 낮추는' 사람들을 주목하라고 하십니다. 그들이 가장 높이 우러러봐야 하는 사람이고, 존경받아야 마땅 한 사람이라고 알려주십니다.
우리 중에서 우리를 섬기는 사람은 누구지? 존경받고 상을 받아야 마땅하지만, 항상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고, 감추는 사람은 누구인가? 우리 중에 있기는 한가?
우리 공동체에 분명히 그런 분들이 존재하지요. 본당 공동체 안에, 우리가 속한 신심단체 안에, 또한 신자들이 아니더라도 사적인 모임 안에 계신 분들을 떠올려보면,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런 분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따뜻하고 든든해지지요.
오늘 복음의 내용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너희도 분 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라."(루카 17.10)고 하시며, 겸손하게 섬기는 자세를 강조하신 적이 있습니다. 하느님을 주인으로 섬기고 그 명에 충직하고 성실한 사람들, 사람들 사이에 신한 일을 행하고 옳은 일을 하는 것이 특별히 존경받아야 하는 일이 아니라 당연한 일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인정받고 존경받는 세상. 그래서 그것이 우선적인 판단의 기준이 되고 우리 생각과 행위를 지배하는 세상. 예수님이 꿈꾸는 세상이었을 것입니다.
어쩌다 보면,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생각할 때 참 일을 열심히 하고, 남의 일도 자기 일처럼 열정적으로 도와주고, 본당 봉사에도 적극적인 분인데 자신이 한 것의 반의반에도 못미치도록 인정받지 못하고 존경받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요. 십중팔구 '말'로 까먹는 분입니다.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욕구를 조절하지 못할 때 그러합니다.
하느님과 이웃을 겸손하게 섬기기로 오늘 다시 다짐하며, 우리 중에 그런 분들에게 존경의 마음을 갖고 삶의 귀감으로 여기는 공동체가 우리 공동체가 되기를 마음 모아 빌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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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주보》 오늘의 말씀
[인천교구 김영인 요한사도 신부님(서운동성당 보좌)]
<사랑을 전달하는 마음의 유리창>
"형제 여러분, 구원의 신비를 합당하게 거행하기 위하여 우리 죄를 반성합시다."
미사 시작 때 사제의 우리 죄를 반성합시다."라는 말씀과 함께 이어지는 짧은 침묵 동안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하시나요? 저는 오늘 하루 미사 준비를 잘했을까? 그리고 오늘 내 행동이 하느님 말씀과 은총을 가로막는 민폐는 아니었을까?"라는 성찰을 주로 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 사이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고 설명해 주십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스승이었고, 하느님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달해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 모세였습니다. 이러한 모세의 역할을 계승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권위를 예수님께서 인정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 자신이 가진 권위에 맞갖은 행실을 보여 주지 못하는 점을 나무라십니다. 이들의 행실이 하느님 말씀과 은총을 전달하기보다 가로막으려는 시도에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원래 하느님 말씀을 받아들이고 전달하는 모든 사람의 마음은 투명한 유리창 같아야 합니다. 햇빛이 유리창에 비치면 그 안으로 해가 들어옵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 말씀과 은총은 투명한 유리창 같은 우리 마음 안으로 들어옵니다. 우리가 받은 하느님 말씀과 은총은 나만 갖고 있지 않고 이웃에게 전달됩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사랑이 나를 통해 이웃에게 전달됩니다. 나만 하느님 사랑을 움켜쥐려 한다면 그 마음은 유리창이 아니라 답답한 벽일 것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더러워진 마음은 벽처럼 되어 하느님 말씀과 은총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합니다. 먼지가 쌓이고 뿌옇게 되어 안과 밖을 볼 수 없게 된 마음의 유리창은 하느님 말씀과 은총이 자기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고, 말씀과 은총이 이웃에게 전달되는 길을 막아버립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만들었다는 넓은 면적의 성구 갑(甲). 길게 늘어뜨린 옷자락 술은 더러워진 마음의 유리창을 화려한 커튼으로 감추려던 바보스러운 행동이 아니었을까요?
우리 마음의 유리창은 어떨까 하고 한 번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라며 넘겨온 사소한 잘못부터 대죄와 같은 큰 잘못까지. 그런 것들이 크고 작은 먼지들처럼 마음에 달라붙어 벽이나 다름없는 불투명한 유리창을 만들지 않았는지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또 뿌옇게 된 내 마음이 부끄러워 타인을 낮추고 내 주장만 옳다고 소리치는 두꺼운 커튼으로 내 마음을 가리지는 않았는지도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마음의 유리창은 겸손이라는 도구로 깨끗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겸손으로 깨끗해진 우리 마음은 유일한 스승이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겸손한 마음과 이웃을 섬기는 자세로 우리 마음을 깨끗이 닦아야 하겠습니다. 겸손과 섬김으로 마음의 유리창을 뽀득뽀득 잘 닦아 나간다면 우리는 하느님 말씀과 은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또 하느님의 사랑을 이웃들에게 전달하는 훌륭한 하느님 자녀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몸을 받아 모시며 겸손과 섬김으로 더욱 깨끗한 마음을 지닐 것을 생각하고, 깨끗해진 마음으로 내가 받은 하느님 사랑을 이웃에게 전할 수 있는 이번 한 주간이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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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제주》 말씀
[제주교구 양영수 베드로 신부님(노형성당)]
<겸손한 삶>
사람이라면 거의 누구나 높은 자리를 좋아합니다.
자기가 인사하기 전에 먼저 남에게서 인사받기를 좋아합니다.
대부분 인간은 남을 섬기기보다 남에게서 섬김을 받 기를 더 즐깁니다.
이것은 인간의 본성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마태 23.6-8)
예수님 시대에 지도자는 대사제,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께서는 당시 지도자들의 행실을 본받지 말라고 하십니다. 안타까운 그 시대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그 말씀은 옳았습니다. 지도자가 바르지 않으면 그 나라는 망합니다. 예수님 시대에 이스라엘은 40년이 지나지 않아 로마에 의해 침략당했습니다. 기원후 70년의 일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1945년까지 나라 잃은 백성으로 전 세계에 흩어져 살았던 것이죠.
예수님께서는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새로운 덕목을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희 가운데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마태 23.11-12) 너무나도 맞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잘난체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을 보면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이 얼마나 겸손과 거리가 먼 삶을 살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듯 그들은 가난보다는 세상의 부귀영화를 업신여김을 당하기보다는 인사받고 존경받기를, 천대받기보다는 지혜롭고 현명한 스승으로 대우받기를 좋아했습니다.
집회서에서 하느님께서는 겸손한 사람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고 거만한 사람의 마음에는 '악의 잡초'가 뿌리를 내린다고 하였습니다.(3.20.28 참조) 그래서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 분노와 질투를 드러낸 이유를 금방 알게 됩니다. 분노와 질투의 뿌리가 바로 교만이라는 뜻입니다.
겸손(humilitas)의 어원은 '땅(humus)', 곧 '흙'과 같은 뜻입니다. 우리 존재는 아무리 잘난척해 보아야 '흙덩이'이고 아무리 지식이 많다 하더라도 하느님께서 숨결을 거두어 가시면 '흙의 먼지'로 흩어지고 마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말 그대로 우리는 '겸손'해야 합니다.
그러니 땅처럼 모든 이를 발아래서 받쳐 주고 품어주는 너그러운 사람, 하느님의 사랑을 호흡하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겸손해지면 마음속 분노와 질투는 저절로 사라지고 이웃에게 주님의 향 내음을 내뿜는 자녀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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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고을》 빛의 소리
[광주대교구 박대남 미카엘 신부님(본촌동성당)]
<내게 맡겨진 주님의 일을 합시다>
“이번에는 네가 회장 해봐! 내가 도와줄게", "이번에는 네가 담당해봐, 무슨일이 잇어도 도와줄게”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도와주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면 안 되고, 저렇게 해봐"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너 잘되라고 하는 말이다"라는 문자를 사용합니다. “다 너를 생각해서 하는 말이다"라는 그 말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인데도, 그럴듯하게 포장되어 있습니다. 정작 자신에게 그런 일들이 다가올 때는 "나는 다 해보았으니까 다른 사람이 해야지"라는 회피의 말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다른 사람이 맡으면 한결같은 비난, 비판이 아닌 비난을 하는 모습들을 봅니다. 또한 사람들과 대화의 시작이 항상 "그게 아니고",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라는 말을 하면서 부정으로 시작하여 긍정으로 마무리하지 않고, 타인의 탓으로 돌리는 모습을 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하신 말씀이 지금 우리의 모습으로 보입니다. 자신이 하지 않을 일이라면 타인에게 강요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이 하지 않을 거면서 "네가 먼저 하면 도와줄게"라고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너의 일이니까 네가 알아서 해야지"라는 말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저 아무 말 하지 않고 기다려주고 기도해주는 모습이 더 좋은 모습입니다. 더 좋은 모습이라면 책임을 맡은 이가 부탁을 했을 때 단 한 번의 거절 없이 "알겠어, 내가 한번 해볼게"라는 긍정의 말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가셔도 되고, 우리는 무거우니 그 옆에만 따라가든지, 아니면 바라만 보면 되는 것으로 여기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지. 오늘 복음 말씀은 큰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에 대한 비판이 지금의 우리네 삶과 너무나 닮아있습니다. 미사 참회예절 때에는 내 탓이고, 미사 후 성당 문을 나서자마자 너의 탓입니다. 미사 때에는 내 가슴을 치며 내 탓이고, 미사가 끝나자마자 너의 가슴을 치며 네 탓이라고 하는 모습이 바로 율법과 바리사이의 모습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지금부터 내 앞에 있는 사람에게 “이젠 너의 차례다"라고 말씀하지 마십시오. 그 말을 하는 사람의 차례가 되어야 합니다. "너니까, 너가 해야 하는 일"이라고 말씀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나에게 주신 일을 율법학자와 바리사이처럼 떠넘기지 마십시오. 나에게 주어진 주님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우리의 모습이 바로 하느님 자녀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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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주보》 말씀의 향기
[춘천교구 이동주 시몬 신부님(우두성당 주임)]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자기 삶의 체험을 통해 이웃과 형제들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또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됩니다. 형제들의 소리를 통해 자기 삶의 소리를, 하느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고 자신이 받은 삶이 어떤 것이든 소중하게 여기며, 하느님께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형제들과 삶을 나누는 사람이 진실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는 세례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주어진 우리의 소중한 삶을 형제들과 나누며 살아갈 것을 약속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이 아니라 세례성사를 통해 우리가 하느님과 약속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이약 속을 잊고 살기에 형제들로부터 위선자라는 소리를 듣기도 하고, 형제를 위선자라고 하기도 합니다.
세례성사를 받음으로 하느님의 뜻에 따라 그리스도처럼 자신을 비우고 겸손하게 형제들을 받아들이기보다. 사랑을 강요하고 받은 은총을 저버리고, 자신은 더 많은 은총을 받아야 하는 사람으로 착각하며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신의 분수를 잊을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갑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도 그렇게 삽니다. 그래서 자신이 남보다 많이 잘났다는 자부심이 없으면 세상 살맛이 없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잘남을 혼자서만 인정하는 것으로 는 부족하여 남도 이를 알아주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남들도 역시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고 있기에 각자 자신의 잘남을 인정받기를 갈망하는 마음에 좀처럼 다른 이의 잘난 점을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나아가 남이 나보다 잘난 것을 인정하는 일이 상대적으로 자신의 값을 깎는 것 같아 남의 잘남을 인정하기가 힘이 듭니다.
그래서 애써 찾아낸 것이 어리석은 자기 자랑입니다. 세상에 자랑을 위한 자랑거리가 안될 것이 없습니다. 때로 자랑할 것이 없을 때 대신 자랑할 것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각자 그 사람 나름의 장점이 있고, 그 장점도 그 사람으로는 자랑거리가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랑거리로 삼을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의 인격입니 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의 인격을 자랑하면 그의 인격은 보잘것없는 것이 됩니다. 우리의 인격은 하느님과 맺은 삶의 계약을 성실하게 실천함으로써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사람은 자신이 잘났다는 것을 확인하고자 늘 노심초사합니다. 어떤 사람은 스스로 자신을 자랑함으로써 갈망을 풉니다. 그러나 그것을 들어주는 사람에게는 그의 자랑이 지루하게만 여겨지고, 남의 험담에 마음이 개운치 않으며, 여기에는 하느님의 책망이 따라옵니다. 우리는 바오로 사도처럼 자기 자신을 자랑하지 않고 부드럽고 평화롭게 살아가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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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빛》 복음 묵상의 향기 '말씀'
[원주교구 한 장우 베드로 신부님]
<권위에 대해서>
권위란 무엇일까요. 좋은 것일까요? 나쁜 것일까요?
권위는 보통 명예의 개념도 있지만,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미치는 권력적인 의미로 더 많이 사용되곤 합니다. 권위적인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은 사실 명예가 아닌 권력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존중하고 자기 뜻대로 움직이게 만드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권위적인 사람들에 대해서 비판하십니다.
그럼 권위는 나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권위적인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은 권력이고 권위 있는 사람이 추구하는 것은 신뢰입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람들에게 미칠 수 있는 영향력, 권위라고 할만한 힘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요? 저는 믿음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아, 저 사람은 옳은 소리만 하더라. 그러니 이번에도 옳은 소리를 할 거야.' '저 사람은 많은 것을 배우고 노력했어. 지금 상황에 좋은 방법을 알고 있을 거야.' 이런 믿음이 사람들에게 그의 말을 무겁게 여기고 따르게 만듭니다.
여러 사람이 등산을 한다고 생각해봅시다. 그리고 경력 있고 능력 있는 가이드의 안내로 움직인다고 생각해봅시다. 가이드는 모두를 섬기는 사람이며, 그들의 안전을 위해 노력하고 헌신해야 합니다. 그는 길 을 잘 알고 있기에, 상식 있는 사람들은 그의 말을 믿고 따를 것입니다. 강제적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그의 의견을 존중하고 따를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보스와 리더를 구분하기도 합니다. 보스는 권력을 사용하여 사람들을 강제해서 움직이게 만드는 사람이고, 리더는 앞서 나가며 믿음을 주고 사람들을 따르게 만드는 사람으로 구분하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비슷하지만, 전혀 다릅니다.
사람들은 인정받고 싶어 하고 존중받고 싶어 하고 존경받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권력을 추구하고 권위적으로 되려고 합니다. 똑똑한 사람이 되고 싶어서,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지 않고 배우려고 들지 않으며, 올바른 사람이 되고 싶어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려 들지 않고 고치려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 노력하지 않고, 사람들이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그들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타인을 멸시하면서, 자신도 경멸당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도 합니다. 그리고는 강제로 자신을 존중하게 만들겠다며 권위적으로 되어갑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며, 참 권위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헌신과 노력, 성장을 통해서 우리는 사람들에게 믿음을 쌓아 나갈 수 있습니다. 믿음은 우리에게 힘을 주고, 우리가 존경받고 사랑받을 수 있게 해줍니다.
헌신 없이 권력만을 추구하는 자들은 낮아지며, 노력하고 성장하며 남을 위해 헌신하는 자들은 높아집니다. 주님의 모범을 본받아 올바른 권위를 통해,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주님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해나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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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정이》 강론
[전주교구 소명섭 바오로 신부님(교구 청소년교육국장)]
<나의 겸손함의 점수는?>
이병호 주교님(제7대 전주교 구장)께서는 방학하고 인사를 하러 온 신학생들에게 항상 말씀묵상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러한 가르침 중에서 기억나는 것이 있다면, 전례 때에 봉독되는 독서, 2독서 그리고 복음의 순서로 묵상하기보다 때로는 저작의 시간적 순서인 1독서, 복음 그리고 2독서 순으로 묵상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1독서인 말라키 예언서는 구약의 맨 마지막에 나옵니다. 성경 안에서의 위치상으로나 의미상으로 우리에게 종말론적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이는 전례력으로 마지막 달을 보내고 있는 우리에게, 한 해를 되돌아보며 어떻게 마무리할 것인지를 생각하게 해줍니다. 특히 독서 끝에 나오는 “어찌하여 우리는 서로 배신하며 우리 조상들의 계약을 더럽히는가?"(말라 2,10)라는 말씀은, 우리가 하느님의 계명을 깨뜨리며 저지른 중대한 잘못 중에 하나가 이웃에 대한 잘못임을 강조합니다. 이를 역으로 생각해보면, 한 해를 되돌아보며 하느님과의 화해를 위한 시작의 단초가 이웃과의 관계를 짚어보는 것임을 의미합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로 대표되는 당시 지도자들의 위선과 교만을 비판하시며, 군중들과 제자들에게 겸손과 봉사로서 이웃과 관계 맺으며 하느님 안에서 하나 되도록 당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가르침을 자신의 삶 안에서 그대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분께 서는 여러 사람을 가르치고, 때로는 내적육적으로 치유해 주시며 참된 스승으로서 삶을 사셨습니다. 또한 무릎 꿇고 몸소 자신을 낮추시며 겸손한 봉사자의 본보기를 보여주시기도 하셨습니다.
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지도자로서 "어머니처럼 온화하게"(1테살 2.7) 형제들을 대하고, 일상 안에서는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1테살 2.9) 공동체와 함께하였음을 고백합니다. 이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더욱이 지도자의 역할을 맡은 예수님의 제자라면 더욱더 예수님의 겸손을 따라 공동체의 봉사자가 되어야 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가정 안에서 그리고 사회생활 안에서 우리는 각자 여러 사람과 관계 맺고 다양한 역할을 맡아 살아왔습니다. 전례력으로 마지막 달을 시작하는 우리는 한 해 동안의 삶을 되돌아보며 정리하고 새로운 한 해를 준비하게 됩니다.
이러한 묵상의 시작을, 이번에는 특별히 겸손한 목자 예수님을 생각하며, 그 삶을 온전히 본받고자 노력했던 바오로 사도를 떠올리며 "나의 겸손함은 몇 점일까?"라는 물음에서 시작해 보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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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주보》 주일의 말씀
[대구대교구 이지운 시몬 신부님(대천성당)]
<어떤 동기 때문에 높은 지위를 구하려고 달려드는가?>
스위스 출신의 철학자이자 소설가인 알랭 드 보통이 쓴 '불안'이라는 책을 보면, 제일 첫 줄에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사람은) 어떤 동기 때문에 높은 지위를 구하려고 달려드는가?" 이어서 이렇게 그 답을 제시합니다. "먹을 것과 잘 곳이 확보된 뒤에도 사회적 위계에서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를 바라는 것은 그 곳에서 물질이나 권력보다는 사랑을 더 많이 받을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돈, 명성, 영향력은 그 자체로 목적이라기보다는 사랑의 상징으로서 그리고 사랑을 얻을 수 있는 수단으로서 더 중시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높은 지위에 오를수록 다른 사람들이 주목을 하고, 관심을 쏟고, 공감 어린 표정으로 맞장구를 치면서 알은체를 해주기에, 모두가 그 사랑(?)을 받기 위해 높은 지위에 오르려 한다는 것입니다. 저 또한 알랭 드 보통의 이 말에 동의합니다. 이것이 세상의 방식이고, 높은 지위를 추구하는 이유일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그 반대의 것을 추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높은 자리가 아니라 낮은 자리 섬김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 섬기는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실천해야 할까요?
실제 예수님께서는 낮은 자의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세상 가장 낮은 곳에서 태어나셨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며 섬기는 모습도 보여 주셨고, 또 모두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죽는 십자가의 형벌도 받으셨습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세상 가장 낮은 자의 모습을 보여 주셨고, 높은 지위를 추구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런 예수님을 가장 높은 곳으로 올려주셨습니다. 부활을 통해 하늘의 영광을 주셨고 또 세상 모든 사람이 예수님께 주목하며 예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게 하셨습니다. 우리 안에서 높고 낮음을 따지며 세상의 사랑을 추구하는 것보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며 하느님의 사랑 윤 추구하는 것이 더 올바른 방향임을 실제로 드러내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선택이 남습니다. 계산하고, 경쟁하며, 세상의 인정과 사랑을 받기 위해 노력해야 할까요? 세상은 알아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묵묵히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며, 하느님의 사랑을 선택해야 할까요?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의 삶으로 하느님의 방식이 옳다는 것을 세상에 드러내야 하는 아들입니다. 그러니 스스로 높아지려 하지 말고, 우리를 통해 하느님의 영광이 더 크게 드러날 수 있도록, 낮은 자리를 추구해 갑시다. 주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십시오. 그러면 그분께서 여러분을 높여 주실 것입니다."(야고 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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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종주보》 말씀
[군종교구 오승수 미카엘 신부님(비룡성당 주임)]
<복음을 실천하는 사람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군중과 제자들에게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하는 말을 실행하고 지키라고 하십니다.
복음의 다른 구절들을 보면 예수님께서 항상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실 때가 많은데 그들의 말을 들으라고 하니 의아하게 여겨집니다. 하지만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 군중과 제자들에게 어떤 말씀을 하고 계시는지 알 수 있지요.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언행 불일치의 모습을 꾸짖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도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복음에 등장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는 부분을 강조하고 기득권층인 자신들과 다른 수많은 군중을 나누어 자신들이 더 높은 사람, 더 나은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그저 말뿐이고 행동이 따르지 않는 외침은 소음에 불과하고 그 말엔 권위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복음의 가치는 다른 사람보다 더 나은 사람임을 강조하며 올라서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며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을 낮추는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업신여김을 받으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복음의 가치를 사랑의 실천이라는 행동을 통해 함께 이루어 나갈 수 있음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 우리는 그 누구도 다른 사람보다 높거나 낮지 않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들을 짓누르고 올라가는 것으로 높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짓눌린다고 하여 낮아지는 것도 아닙니다. 복음의 실천을 통해 하느님께서 그렇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물론 낮아지는 것은 마치 경쟁에서 밀리고 지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너머에 있는 가치를 추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행실을 보시고 그에 맞는 기쁨을 주시기를 청하며 하느님 자녀답게 살아가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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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부산》 강론
[부산교구 윤명기 요한칸시오 신부님]
<섬기는 자의 위대함>
오늘 복음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책망을 전해주는데 그들은 오늘날의 종교 지도자들, 그리고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지도하거나 가르치는 책임을 맡고 있는 사람들이라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충실한 율법 해석가들이기는 하지만 그 율법의 충실한 실행자들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그들은 위선자들일 뿐 아니 라 더 나아가 위선을 가르치는 자들이라고 증언하십니다.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는다."(마태 23.3)
자신들의 열심과 신심을 외적으로 드러내 보이는 특정 행위나 태도들이 실상은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 사람들로부터 박수갈채와 칭찬을 받기 위한 허영심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입니다. 위선은 항상 겉치레와 허영과 결속되어 있습니다. 선한 것, 참된 것이 없으면서 내면에 들어있는 거짓, 허영, 자만심, 비열한 것 등을 가리기 위해 외적 장식과 포장들이 강조되는 것입니다. 외모를 더 중시하는 현대의 많은 이들도 내적인 것이 비어 있음을 보정하려는 몸짓으로 비치는 것은 아닐까요?
위선적 태도와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자 하는 야심에 사로잡힐 위험은 우리 모두에게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유일한 지도자라는 평등의 원칙을 주장하면서도 분명히 교회 안에 있는 권위의 원칙을 부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단지 그는 권위가 봉사의 차원에서 이행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권위가 지속적인 지도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백성이나 공동체의 구성원을 위해 봉사하는 권위가 되어야 함을 말합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23.11) 예수님의 말씀은 섬기는 자가 다스리는 것이며 그 섬김이란 진실로 형제들을 위한 애정과 선의로 드러나는 봉사라야 합니다. 이럴 때 봉사하는 사람만이 진정한 권위를 가지며 남에게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과 깊은 사랑과 우정의 관계를 맺을 때 위선은 사라질 것입니다. 지도자들이나 남을 가르치는 이들뿐 아니라 우리가 모두 어린이와 같은 단순함을 가지고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죄와 결점, 나약함까지 인정하며 사람의 눈이 아니라 하느님의 눈을 의식할 때 위선의 유혹에 서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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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주보》 말씀 담기
[수원교구 조태현 스테파노 신부님(문경 성 요셉 치유 마을 원장)]
<거울 속의 한 사람>
"잔칫집에서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마태 23,6-7)
예수님께서 경고하신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저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사람을 매일 만납니다. 어디에서 만날까요? 바로 거울 속에서입니다. 거울 앞에 설 때면 '많은 교우의 스승으로, 아버지로, 선생'으로 살면서 하루하루 거만해지고 교만해지는 저를 여과 없이 비춰주는 것 같아 정말로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사실 저도 예수님을 따라 "섬기는 사람" 이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갓 사제서품을 받고 보좌신부로 살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때에는 율법학자들과 바리 사이들을 신랄하게 비판할 줄도 아는, 패기 넘치던 때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스승과 아버지, 선생으로 불리지 않도록 하라고 말씀하셨으니 그 책임과 의무도 거부하면 그만이겠지만,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사제의 직무를 수행하면서 스승의 역할과 아버지의 역할 그리고 선생의 역할을 하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예수 님께서 말씀하신 것들을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을까요?
그 답은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23,11)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스승과 아버지, 선생의 자리와 권위만을 원하며 섬김을 받고 싶어 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제자들을 섬기고, 아버지 하느님의 자녀들을 높여 주며, 무겁고 힘겨운 짐을 진 교우들의 어깨를 가볍게 해주는 참 스승, 참 아버지, 참 선생으로 살고자 한다면! 예수님께서 분명 낮은 곳에 있는 우리를 찾아내시기 때문이지요.
우리의 존재는 이름에만 있지 않고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 속에도 있습니다. 이것들이 하나가 될 때,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목소리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1테살 2.13)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더 늦기 전에, '거울 속의 한 사람'도 다시 한번 “섬기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하며 바오로 사도의 말씀과 함께 이만 줄이겠습니다.
"우리는 여러분 가운데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 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하느님의 복음을 여러분에게 선포하였습니다."(1테살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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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안동》 말씀의 샘
[안동교구 권상목 요한 신부님(사벌퇴강성당 주임)]
<겸손을 구하는 기도>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라파엘 메리 델 발 추기경님의 '겸손을 구하는 기도'가 생각이 났습니다.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 저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존경, 사랑, 칭찬받으려는 욕망에서 저를 구원해 주소서. 높임과 찬양, 다른 이보다 우선권을 받으려는 욕망에서 저를 구원해 주소서. 상담의 대상이 되려는 욕망에서, 인정을 받으려는 욕망에서 저를 구원해 주소서. 경멸과 부끄러움을 당할까 하는 두려움에서 저를 구원해 주소서. 역경 중에서 고통받을까, 잊힐까, 비난받을까, 조소당할까, 부당한 대우를 받을까, 의심받을까 하는 두려움에서 저를 구원해 주소서.
예수님, 저보다 다른 사람들이 더 사랑을 받게 되기를 바라는 은총을 저에게 내려 주소서. 다른 이들이 저보다 더 존경을 받게 되기를 바라는 은총을, 이 세상에서 다른 이들의 평판이 저보다 더 올라가고 저는 낮아질 수 있기를 바라는 은총들, 다른 이들이 선택을 받고 저는 외면당하기를 바라는 은총을 저에게 내려 주소서. 다른 이들이 칭찬을 받고 저는 눈에 띄지 않기를, 다른 이들이 모든 일에서 저보다 더 인정받기를 바라는 은총을 저에게 내려 주소서. 다른 이들이 저보다 더 거룩하게 되게 하시고, 저 또한 가능한 한 더욱 거룩하게 해주소서. 주 예수님, 이 모든 것을 바랄 수 있는 은총을 저에게 내려 주소서.”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한 말은 지키되 그들의 행실은 본받지 말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렇다면 그들이 보인 행실은 어떠했을까요? 그들은 힘겨운 짐을 다른 사람의 어깨 위에 올려놓은 채 자기네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고,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는 스승으로 불리기를 좋아했는데 이는 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행동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높은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렇게 자신을 낮춘다면 하느님께서 높여 주시고 또 영광스럽게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겸손의 옷을 입고 서로 대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대적하시고, 겸손한 이들에게 은총을 베푸십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강한 손아래에서 자신을 낮추십시오. 때가 되면 그분께서 여러분을 높이실 것입니다."(1베드 5.5-7)
신학자인 안토니 볼룸은 '겸손'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겸손(humilitas)이란 근본적으로 끊임없이 하느님의 정의 아래 서 있는 사람의 태도이고 흙과 같은 사람의 태도입니다. 겸손은 땅(Humus)이라는 라틴말에서 나왔는데, 땅은 언제나 무시된 채 밟히도록 허락되어 있고, 말이 없고, 드러나지 않고 검으며, 언제나 어떠한 씨앗도 포용하여 그것에 본질과 생명을 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겸손은 발이 아니라 그 발에 밟히는 것이고, 누르는 것이 아니라 눌리는 것이며, 다지는 것이 아니라 다져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겸손의 삶을 사는 이유는 바로 그리스도 때문인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께 당신 자신을 낮추어 죽기까지 순종하신 그 겸손을 모범으로 보여 주셨습니다.(필리 2,6-8 참조) 그리고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겸손한 이 들의 기도를 들어주시고(집회 35,21 참조) 또 그들을 영광스럽게 해주시는데, 무릎을 꿇은 자만이 일어설 수가 있고, 뿌리가 깊으면 깊을수록 줄기는 더 높이 올라가듯이 우리가 하느님 앞에서 좀 더 겸손하게 살기를 다짐한다면 그분께서는 우리를 한껏 높여 주실 것입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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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마태 23,2-3)
이 말씀에서,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전하는 ‘하느님 말씀’을 뜻합니다. 누가 전하든지 ‘하느님 말씀’은 변함없이 ‘하느님 말씀’이고, 우리는 그 말씀을 다 실행하고 지켜야 합니다. 그런데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언제나 항상 ‘하느님 말씀’만을 전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 생각을 말할 때도 있고, 자기 마음대로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할 때도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이 전하는 ‘하느님 말씀’과 ‘그들 자신들의 말’을 구분해야 합니다.
‘하느님 말씀’은 충실하게 실행하고 지켜야 하지만,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 자신들의 말은 잘 가려서 들어야 합니다. <여기까지는 ‘듣는’ 사람의 관점에서 한 말이고, ‘말하는’ 사람 쪽에서 생각하면, 아무나 ‘하느님 말씀’을 전할 수 있다 하더라도, ‘하느님 말씀’을 전하려면 ‘그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하느님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서 말씀을 전하는 것은 그 말씀을 모독하는 죄를 짓는 일이 됩니다.>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라는 말씀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하느님 말씀’을 전하기는 하지만, 말씀대로 살지는 않으면서 말씀을 모독하는 죄를 짓고 있는 것에 대한 꾸중입니다. 결국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하느님 말씀’을 전하면 전할수록 죄가 점점 더 커지는 자들입니다.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위선’입니다. 위선자들이 하는 ‘말만’ 들으면 거룩한 성인들 같지만, 그들의 행실을 보면, 그냥 죄인들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이런 경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양의 옷차림을 하고 너희에게 오지만 속은 게걸든 이리들이다.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마태 7,15-1ㄱ) 이 말씀에서 ‘양의 옷차림’은 ‘하느님 말씀’으로, ‘열매’는 ‘행실’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말씀을 전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무조건 ‘하느님의 사람’인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을 ‘온 삶으로’ 실행하는 사람만이 ‘하느님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마태 7,21)
우리는 사탄도 성경을 인용해서 말한다는 것을(마태 4,1-11) 생각해야 합니다. 물론 사탄이 인용한다고 해도 성경은 성경이지만, 사탄은 사람을 유혹해서 죄를 짓게 만들려는 목적으로 인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성경을 모독하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유혹에 넘어가는 사람은 사탄이 짓는 죄에 휩쓸리게 됩니다.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그리고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마태 23,8.10) 이 말씀은 요한복음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길만이 ‘구원의 길’이고, 예수님의 가르침만이 ‘구원의 진리’이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만이 ‘참 생명’입니다. 다른 길도 없고, 다른 진리도 없고, 다른 생명도 없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도 4,12)라고 증언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에게는 하느님 아버지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나왔고 우리는 그분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또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있고 우리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재합니다.”(1코린 8,6)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라는 말씀과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가르침과는 다른 것을 사람들에게 가르치지 말라는 뜻입니다.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다.”라는 말씀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라는 말씀은, 예수님만이 ‘구원의 길’이고, 예수님의 가르침만이 ‘구원의 진리’라는 것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자기 혼자만의 생각과 의견을, 그리고 그 생각과 의견이 예수님의 가르침과 맞지 않는데도, 그것을 마치 ‘구원의 진리’인 것처럼 말하고 가르치는 것은, 예수님보다 위에 있는, 또는 예수님을 능가하는 스승이나 선생으로 행세를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런 짓을 하는 자들이 요즘에도 많은데, 우리는 그자들을 ‘이단’이라고 부릅니다. 그런 자들은 교회 밖에도 있고, 교회 내부에도 있습니다. ‘잘못된 성경 해석’에, 자기가 무엇이나 되는 것처럼 내세우는 ‘교만’이 더해질 때, 구원의 길과는 완전히 다른 길로 빠지는 이단자가 되어버립니다. <자기 혼자서만 다른 길로 빠지면 그 한 사람의 멸망으로 끝나지만, 다른 사람들을 구원의 반대쪽으로 끌고 가서 그들마저 멸망을 당하게 만들어버리는 일이 흔히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남을 죄짓게 하는 죄’를 짓는 자들을 대단히 엄하게 단죄하셨습니다.(마태 18,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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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김상우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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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예전 제가 함께 살았던, 호치민 국제공동체에서 가장 큰 이슈는 호칭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언급한 “이 세상 누구도 스승이나 아버지나 선생으로 부르지 마라. 너희의 스승이자 선생은 오직 그리스도뿐이고, 아버지 역시 오직 하늘에 계신 한 분뿐이시다.”(23,8.10.9.참조)고 말씀하셨기에 우리도 그렇게 불러서는 안 된다고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강조하는 신부가 있어서 그랬습니다.
저는 입회와 서원 그리고 서품 연도로 볼 때, 예수고난회 한국 관구 회원 중에서 제일 연장자입니다. 나이 차이는 얼마 나지 않지만, 일찍 수도회에 입회하였고 서품을 빨리 받았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개방적이어서 굳이 호칭에 신경을 쓰지 않고 편안하게 불러 주기를 바라지만, 대부분 형제는 몇 년 혹은 몇 십 년을 함께 살았지만도 아직도 저를 부를 때 깍듯이 ‘아오스딩 신부님’하고 부르며, 어떤 형제는 편하게 ‘아오스딩 형’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아직도 유교적인 예의범절이 남아 있는 베트남 학생들에게 호칭으로 부르지 말고, 제 이름만을 부르라고 말한다고 해서 그렇게 호칭할 학생이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아무리 사회주의 국가라고 해도, 유교 영향권에서 나고 자란 베트남 학생들 가운데 아무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해서, 이제 20대 젊은 친구들이 자신의 아버지보다 나이가 많은 원장과 양성장 신부를 향해서 호칭은 생략하고, ‘하이 제프’, ‘하이 아오스딩’ 이라고 부를 수 있겠어요. 그리고 여러분도 ‘ OO 신부님’하고 호칭을 부르지 않고 본당 신부님을 향해서 ‘분도 안녕’, ‘베드로 안녕’하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불리는 호칭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어느 자리에 있고 어떤 삶을 사느냐에 더 무게가 있다고 봅니다. 호칭을 부르는 사람 보다 호칭을 불리운 존재의 삶의 무게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우리 속담에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고 강은 깊을수록 소리가 작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야말로 벼는 익어갈수록 속이 낟알로 꽉 차게 되고 꼿꼿하던 이삭이 고개를 낮추게 됩니다. 또한 상류에서 졸졸 소리 나던 개울물도 하류의 깊은 강에서는 잠잠히 흐르게 되지요. 그러면서도 수많은 물고기와 생명을 품고 묵묵히 바다로 흘러갑니다. 이러한 속담에는 인격이 높은 사람일수록 남 앞에 겸손하고 자신을 낮출 줄 안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겸손한 사람이야말로 이 땅이 필요로 하는 참 열매를 맺고 세상에 생명을 줄 수 있는 존재들입니다.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면서 제 수련기 동안 그리고 제가 수련장으로 살면서 가장 많이 들었거나 사용한 단어는 겸손·이탈·희생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겸손하게 순명한 수도자들에 관한 이야기도 많이 듣고 인용도 하였지요.
성 아우구스티노는 겸손에 대한 가르침을 누구보다 자세하게 펼쳤습니다. 그에게 겸손은 자신의 한계를 아는 것이고 참된 자기 인식이었습니다. 하루는 아우구스띠노 성인이 볼일이 있어서 한 제자를 불렀습니다. 『 ‘이보게, 레이나.’ 스승이 부르는데도 레이나는 대답이 없었습니다. 옆방에 분명히 있는 것 같은데 응답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듭해 불러 보았지만, 여전히 응답이 없었습니다. 아우구스띠노 성인은 슬며시 부아가 치밀었습니다. ‘이 녀석이...’ 그는 옆방 문을 신경질적으로 열어젖혔습니다. 순간, 그는 ‘아차’ 하고 뉘우쳤습니다. 레이나는 무릎을 꿇고 앉아 하느님께 간절한 기도를 드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너무도 간절히 기도에 몰두하고 있다 보니 스승의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했던 것입니다. 아우구스띠노 성인은 부끄러워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그의 기도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그는 제자에게 간청했습니다. “너의 발로 내 목을 밟고 서서 ‘교만한 아우구스띠노야, 교만한 아우구스띠노야, 교만한 아우구스띠노야' 이렇게 세 번 소리쳐다오.』
사막의 성자 샤를 드 푸코는 세상 맨 끝자리에서 가장 겸손한 자가 되고 싶어 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맨 끝자리를 이미 예수께서 차지하셨으니 자신은 맨 끝에서 두 번째 자리에 만족해야겠다고 농담 삼아 말했다고 합니다. 이런 성인들의 겸손함을 들으면서 저도 그들처럼 겸손하게 순명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저는 제 삶을 되돌아볼 때, 남 못지않게 순명해 왔으며 참회와 고신 극기에는 어느 정도 일가견이 있고 남에게 뒤지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 자부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아직도 겸손과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사실 정말 겸손한 사제나 수도자들을 만나기가 힘듭니다. 예전 신문에서 오려 둔 것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습니다. 저희 본당 신부님이셨던 광주대교구 ‘김정용 안당 신부님’의 이야기입니다. 사실 안당 신부님은 본디 겸손과는 거리가 먼 분이셨지요. 그런데 자신의 삶을 마지막 정리하는 사제 수품 50돌 축하식에서, “무릇 사제란, 기도하는 사람이어야 하고, 겸손한 사람이어야 합니다.”고 강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그분은 참으로 겸손한 삶을 살아오지 않으셨던 분이셨지만, 자신의 50년 사제의 생활을 되돌아보면서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음을 깨닫고 후학들에게 ‘겸손하고 기도하는 사제’로 살아가도록 권고하신 것으로 저는 받아들입니다.
예수님의 자리는 어디이셨지요. 그분은 허름한 마굿간에서 태어나 비참한 죽음을 맞이해야 했던 십자가가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분의 자리입니다. 가장 낮아짐으로써 가장 높아지셨던 예수님의 자리는 소외받고 가난한 이들의 옆자리였죠. 우리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지금도 앉고 싶어 하시는 자리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서열이나 외모보다 우리가 살려고 하는 겸손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나 자신을 주위의 관심을 끄는 흥미있는 존재로 만드는 것, 나를 중요한 존재로 여기는 것, 나를 중심적인 존재로 세우는 것을 모두 포기하게 하는 겸손은 하느님을 향해 우리 자신을 개방하게 하고, 하느님의 자리에서 자신의 존재를 바라보게 하고 하느님의 시선에서 자신을 깨닫게 합니다.
흔히 자신을 낮추는 일이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신을 낮추는 일 자체가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잠깐 낮은 자리에 앉아 있으면 조만간 누군가 다가와 더 높은 자리로 앉힌다고 한다면 낮은 자리를 마다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기에 정작 어려운 것은 사심없이, 아무런 기대도 없이 자신을 낮추는 일입니다. 인정해 주는 사람 하나 없어도 자신을 낮추는 일이 어려운 것입니다. 누군가 자신을 겸손한 사람으로 보아주기를 바라면서 자신을 낮춘다면 그것은 기만일 뿐입니다. 잘난 척하는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은근히 겸손한 척하기 위해 취하는 겸손은 참된 겸손이 아니라 위선적인 겸손, 곧 교만입니다. 누군가 자기를 좀 더 높은 자리로 데리고 갈 것을 기대하면서, 낮은 자리에서 높은 자리로 옮기는 자신을 바라볼 사람들의 선망의 눈초리를 기대하면서 애써 낮은 자리를 찾아가는 것은 위선입니다.
그러기에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23,12)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사심없이 네 자리를 찾아라.'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오늘 말라키 예언자를 통해 말씀하신 것처럼, “명심하여 하느님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지 않으면, 내가 너희에게 저주를 내리겠다.”((1,1,2)는 말을 허투루 듣지 않아야 합니다. 어차피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무엇인가를 기대하는 불손한 겸손이 아니라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며 드러내는 순수한 겸손을 우리는 살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자기 자신과 하느님을 속일 수 없기에, 다른 사람의 눈에 보여지는 겸손이 아니라 자신의 양심과 하느님께 인정받는 겸손을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도 저와 같은 생각이시지요! “주님, 제 마음은 오만하지 않나이다. 제 눈은 높지도 않사옵니다. 감히 거창한 것을 따르지도, 분에 넘치는 것을 찾지도 않나이다.”(시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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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낮은 자존감과 무력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연세대학교 심리학과 이동귀 교수는 ‘완벽주의’에서 온다고 말합니다. 사회가 요구하는 완벽한 기준에 도달하지 못하는 자신을 인정하지 못해서 벌어지는 현상이라고 합니다. 남들은 이 기준에 도달했는데, 자신은 그렇지 못하고 또 앞으로도 도달할 수 없다는 생각에 자존감은 떨어지고 이에 따라 무력감에 힘든 시간을 겪는다는 것입니다.
사회가 요구하는 기준이라고 생각하지만, 결국 자기가 요구하는 기준이 됩니다. 외모를 중시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모두가 연예인처럼 멋지고 예쁠 수 있을까요? 학벌을 중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상위 1% 안에 들 수 있을까요? 또 자산은 어떻습니까? 100억 이상을 가져야 괜찮고 그 이하는 실패하는 삶일까요?
자신의 높은 기준 때문에 스스로에게 엄격하고 박하게 평가합니다. 그런데 자기에게만 이런 평가를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기보다 못하다고 생각될 때, 그 사람에게도 자기만의 잘못된 기준을 내세워서 판단합니다. 예수님을 향해 날카로운 각을 세웠던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의 모습에서 우리의 잘못된 모습이 중첩되어 보입니다. 따라서 생각 자체를 바꿔야 했습니다. 잘못된 기준으로 함부로 판단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주님의 뜻에 맞춰서 열심히 사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하느님 나라의 영광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 백성의 지도자들과 교사들의 위선을 꾸짖으십니다.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기준을 내세워서 사람들을 율법의 노예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스스로 행동하지는 않습니다. 자기는 옳고, 남은 모두 틀렸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런 생각이 예수님을 향해서도 그대로 전해집니다. 예수님께서 놀라운 기적을 행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표징만을 요구하면서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자기들 삶의 특권을 위하여 이용하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를 향해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마태 23,12)라고 말씀하십니다. 섬기는 삶을 살라고 하십니다. 상대방이 틀렸다고 생각하면 섬길 수가 없겠지요. 우리 모두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임을 기억하면서, 상대방에게서 하느님의 또다른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겸손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생각 자체를 바꾸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관점보다는 주님의 관점을 찾고, 세상의 것보다 주님의 것을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과 함께하며 참 기쁨의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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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되고픈 사람>
마태오 23,1-12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과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또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그리고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되고픈 사람>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마태오 23,12)
낮춘 몸
너른 품
열린 마음
밝은 웃음
내미는 손길
다가가는 발길
한결같이
늘 푸르게
그분을 향하여
벗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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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길의 길>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오늘 독서와 복음의 가르침을 요약하면 이런 뜻이 되겠습니다. 백성의 지도라는 사람들이 모세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모세처럼 주님의 길은 따라가지는 않고 제멋대로 가고, 주님의 법을 지키지 않고 제 좋을 대로 하니 그들의 가르침은 따르되 그들의 길은 따라가지 말아야 한다.
먼저 그들의 길을 따라가지 않음에 대해 보겠습니다.
길.
길이란 무엇입니까?
어디서부터 어디로 가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외 없이 어딘가로 가는 존재들인데, 목적하는 그곳을 가기 위해선 어떤 길을 가야 할지 잘 선택해야 합니다.
그런데 길잡이가 되어야 할 지도자들이 길을 잘못 인도하곤 합니다. 이런 지도자들에 대해 오늘 말라키 예언서의 주님은 이렇게 꾸짖습니다.
“너희는 길에서 벗어나 너희의 법으로 많은 이를 넘어지게 하였다. 너희는 나의 길을 지키지 않고 법을 공평하게 적용하지 않았다.”
주님의 길로 인도해야 할 지도자들이 주님의 길이 아니라 자기의 길 또는 다른 길로 인도해 많은 이를 넘어지게 했다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지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의 길을 가면 진리의 길을 가는 것이고, 그래서 생명의 길로 가는 것이며 그것은 하느님 나라로 가는 길인데 구약에서는 거짓 예언자들이, 신약에서는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이 주님의 길을 거부하고 자기들의 법과 길로 잘못 인도한다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서 하느님께 인도해야 하는데 자기의 길로 다시 말해서 자기에게로 인도하고, 하느님을 사랑하게 해야 하는데 자기를 사랑하게 하고, 주님 뜻을 따르게 해야 하는데 자기 뜻을 따르게 합니다.
이런 지도자들이 많기에 클라라는 유언에서 프란치스코 때문에 이렇게 감사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우리에게 길이 되어 주셨고, 그분을 참으로 사랑하고 본받은 이셨던 우리 사부 프란치스코께서 말과 모범으로 이 길을 우리에게 보여주셨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저나 프란치스칸들은 클라라처럼 프란치스코 때문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감사와 함께 클라라처럼 이 길의 길을 놓치지 말고 꼭 붙잡아야 합니다.
저는 프란치스코를 ‘길의 길’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더 정확히 얘기하면 ‘길로 인도하는 길’이 맞겠습니다.
프란치스코는 큰길로 인도하는 작은길이요. 하느님께로 가는 큰길이신 주님께 인도하는 작은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실은 이 작은길을 잘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작은길에서부터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길에서 제일 처음 부모부터 잘 만나야 하고 친구를 잘 만나야 하듯이 이 작은 길들을 잘 선택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 걷는 길이 뒷사람에게 이정표가 될 수 있다는 말이 있듯이, 우리 또한 이웃에게는 큰길로 연결되는 작은 길들이 돼주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프란치스코가 ‘길의 길’이라면 이제부터 우리도 ‘길의 길의 길’이 되도록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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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마태23,12)
<천국과 지옥!>
오늘 복음(마태23,1-12)은 예수님께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군중과 제자들 앞에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을 꾸짖으십니다. 곧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는 위선',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는 위선', '윗자리나 높은 자리를 좋아하는 위선',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하는 위선'을 질책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23,11-12)
인간의 보편마음은 윗자리와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사람들로부터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하는 마음인데, 예수님께서는 이런 마음을 버리라고 하십니다. 아니 정말로 높은 사람이 되고 싶으면 너를 섬기는 사람이 되고, 자신을 낮추는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생각과는 너무나도 다른 역설의 말씀이고, 그래서 이 또한 실행하기가 너무나도 어려운 말씀으로 다가오지만,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 안을 바라보니, 정말로 그 어느 때보다도 "예수님의 이 말씀을 살아내야겠구나!" 하는 마음을 갖게 합니다.
서로가 높아지려고만 하는 바로 그곳이 지옥입니다. 지옥의 상태요 지옥의 모습입니다. 그런 곳에서는 늘 갈등과 분열과 전쟁이 있습니다.
반대로 서로가 섬기려고 하고 낮아지려고 하는 바로 그곳이 천국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너를 섬기는 사람이며, 자신을 낮추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섬기시는 분'이셨고, '당신 자신을 낮추시는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르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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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s5tSHf_YC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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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23, 11)
하느님의
간절하신 뜻은
우리가
섬기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실행은
섬기는 사랑의
참된
실행입니다.
섬기면서
알게 되고
깨닫게 되는
진정한 사랑의
나눔입니다.
섬기는 것이
참된
사랑입니다.
섬기는
참된
사랑을
예수님께서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섬기는 것이
살리는 것입니다.
섬기는 것이
복음의
본질적인
질서입니다.
공동체의 질서는
이와 같이
섬기는
사람들을 통하여
성장하며
일치를 이룹니다.
섬기는 것은
성실함과
충실함과
함께
걸어갑니다.
섬기는 삶이
우리들 삶의
진정한
신앙고백입니다.
섬기는 길이
구원의
길입니다.
섬기는 것이
참된 행복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섬기는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이웃을
섬기는 것은
섬겨야 할
하느님과의
만남이며
하느님을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
자기자신을
다스리는 사람이
섬기는 사람이며
자신의 사명에
충실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섬김의 잔을
마시는
성체성사가
되셨습니다.
섬김에
허기지고
섬김에
목마른
우리들에게
예수님께서
우리모두를
섬기시기 위해
밥이 되시고
빵이 되십니다.
섬기는 것은
생명의 원리이며
사랑의 놀라운
하느님의
방식입니다.
세상에서
느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사랑은
서로를 끝까지
섬기는 사랑입니다.
섬기는 사랑으로
초대받은 우리를
세상 사람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부릅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섬김으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실행합니다.
우리 앞에
있는 사람이
섬겨야 할
가장 소중한
사람입니다.
하느님을 닮은
가장 충실한
사랑은
섬기는
사랑뿐입니다.
섬기는 존중으로
하느님 나라를
만나는 기쁜
주일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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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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