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초 '노량해전 승첩제 선상 세미나’관련 글을 보고 삼천포 사는 언니랑 참가 신청
을 해 놓았었다. 그런데 가기전날 모이는 장소를 알아보려고 남해 역사 연구회 홈페
이지에 들어갔더니 이게 뭔일!! 선상 세미나가 아니라 학술 세미나에 참가 신청을 해
놨다. 그래서 담당자에게 급하게 연락을 했다. 뒤늦게 14명이 추가 신청을 해서 인원
초과라고 난감해 하시더니 일단 전화번호를 남기면 참가자들 명단 정리 해보고 연락
을 해 주겠다고 했다. 우쨌든 우여곡절 끝에 참석했다.
그런데 기대했던 것 만큼 얻을 건 없다. 충무공 리더쉽센터 교수 제장명씨가 오셔서
노량해전의 전황과 역사적 의미를 간략하게 설명하고 질문도 받고 했지만 엔진 소리
때문에 앞에 앉은 사람들 외에는 들리지도 않고 관련 유적지 한 바퀴 돌아보고 오는
심심한 코스였다. 처음 실시한 행사라 올해 참가자들의 반응을 보고 내년엔 보완해
서 좀더 알차게 진행하겠단다. 그런데 언니랑 이런저런 얘기 나누며 아름다운 남해
바다를 원없이 보고 온 것 만으로도 족하다
(단항 마을에서 창선대교로 가는 길가에 본 유자나무-남해 어디 가나 제철을 맞은 유
자 한창가 익어가고 있어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없는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다.)
승첩제 가는 길에: 충무공 노량해전 승첩제 행사장으로 가는 길에 남해 창선면 단항
마을에 있는 후박나무를 봤다. 이 나무는 수령이 500년 정도로 짐작되는데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왜군을 물리치고 이 나무 밑에 앉아 점심을 먹고 쉬어갔단다. 이 글
을 읽은 언니는 “여기 학생들도 주로 소풍은 임진왜란 관련 유적지로 갔겠네.”그랬
다. 그 소리를 듣고 중.고등학교 시절 봄 가을 소풍 간 곳을 헤아려 보니 거북등 같은
충무공 관련 유적지거나 운흥사 같은 임진왜란 관련 유적지들이 대부분이다. 그러고
보니 남해나 삼천포, 고성,통영 지역 아이들은 답사라는 낱말을 모를 때부터 유적지
를 무시로 드나들고 있었던 거다
창선대교를 건너 지족에서 멸치쌈밥을 먹고 오른쪽에 있는 죽방렴을 보러 갔다.죽
방렴은 참나무로된 나무말뚝을 발:처럼 만들어 바닷물이 흘러오는 방향을 향해 V자
로 벌려 갯벌에 박아 놓고 고기를 잡는 어업도구이다. 다른 지역 바다에는 이제 거의
사라진 풍경이라 잠시 가던 길을 멈추고 쳐다봤다.
2시부터 시작되는 ‘충무공 남해노량해전 승첩제 선상 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해 설천
면 노량리로 갔다. 행사 기간이라 해군들의 안내로 군함도 구경하고 옆에 있는 거북
선도 타보고 유람선을 타러 갔다. 이순신 관련 연구 권위자로 알려진 분이 나오셔서
노량해전 상황도를 보며 경과와 결과 등에 대해 설명을 해 주셨다. 2시부터 강의가
시작된다고 했는데 인원점검하고 아직 오지 않는 사람들 기다리고 하느라 15분정도
늦게 시작했다. 배 엔진을 켜면 뒷사람들은 설명이 들리지 않는다고 정박한 상태로
강의를 들었다.
(승첩제 선상 세미나에 참석했던 분들이 탔던 유람선)
(노량해전 관련 선상 세미나 장면)
노량해전은 임진왜란 7년 전쟁동안 벌어진 106회의 전투 중 가장 마지막에 벌인 전
투이자 20여회의 해전 중 가장 큰 전과를 거둔 해전이라고 한다
노량해전의 배경: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유언에 의해 일본으로 철수하려는 왜군을
전멸시키기 위해 시작되었다고 한다.순천 왜교성에 진을 치고 있던 고니시 유키나
가는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의 공격을 피해 일본으로 물러가기 위해 사천의 시마즈와
남해의 소오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그 결과 왜교성,사천 등지의 왜군과 조선.명나
라 연합군이 대대적인 전투를 벌이게 되는데 이것이 노량해전이다.
(이락사 첨망대에서 본 노량해협)
관음포:관음포는 이 해전에서 가장 치열하게 전투가 치러진 곳이자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곳이다. 이순신 장군의 뛰어난 전략으로 왜군들을 비좁은 관음포 내항으로
유인하는데 성공함으로 왜군 대부분을 격퇴하고 임진왜란을 끝낼 수 있었단다. 그
런데 이와 관련해서 이 마을 주민들 사이에 재미있는 설화가 전해 내려온다고 한다
(관음포-마주보이는 곳이 이락사 첨망대다)
서애 유승룡의 형 을룡은 혜안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일본에서 보낸 첩자가 승려로
가장해서 우리 나라의 형세를 살피고 다니는 것을 알고 을룡이 벙어리 흉내를 내면
이 승려를 따라다니고 있었다. 어느 날 이 승려가 관음포 주변에 가서 지형도를 꼼꼼
하게 그려 바랑에 넣는 것을 보고 그가 술이 취해 잠든 사이에 관음포 뒤편 육지로 표
시된 부분을 바다길인 것처럼 푸른색으로 칠해 놓았더란다. 첩자에게 지형도를 건네
받은 이 사실을 알 리 없는 일본군은 관음포로 들어가면 강진만으로 통하는 바닷길
이 있는 줄 알고 들어갔다가 결국 몰살을 당하고 말았다는...
관음포에서 전사한 이순신 장군의 유해는 관음포 해안에 위치한 지금의 이락사 자리
에 제일 먼저 안치했다고 한다. 충무공이 순국하지 234년 후인 1832년 순조의 명에
의해 이 자리에 비와 비각을 갖춘 이락사를 세웠다.
( ‘지금은 싸움이 한창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마라.’ 는 뜻의 한자는 이 비
를 세우던 1998년 당시 해군참모총장 유삼남씨가 썼다고 한다.
( ‘큰별이 바다에 떨어지다’라는 현액이 붙은 이충무공 비각, 비각 안에 있는 비문은
순조 32년 홍문관 대제학 홍석주가 지었다고 한다.)
선상 세미나 마치고 충렬사 들렀다 오니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이락사 뒤 첨망
대 가는 길은 산책하기 아주 좋은 길인데 어두워서 아쉽다. 첨망대서 일몰을 보려던
계획도 수포로 돌아갔다.
(이락사 첨망대- 가는 산책로도 예쁘지만 여기서 보는 일몰이 기막힌데...)
이락사에서 옮긴 충무공의 유해는 관음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충렬사에 안
치된다. 그래서 충렬사에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가묘가 남아있다. 지금의 건물은 충
무공이 순국 하신지 34년 되던 해인 1632년에 이 지역 선비들이 돈을 모아 조그마한
사당을 지어 제사를 지내오던 곳에 1659년 수군통제사 정익이 다시 지었고, 1662년
나라에 충렬사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충렬사 사당- 위패와 영정, 해전도 등을 모셔 놓았다 )
( 1660년 송시열이 글을 짓고 송준길이 쓴 이충무공 묘비)
(관음포에서 순국하신 이충무공의 시신이 고금도를 거쳐 아산으로 옮겨지기 전에
잠시 모셨던 곳에 있는 가묘)
첫댓글 ^^ 저두 남해갔을때에 유자나무가 꽤 인상적이었어요 .. 잘 다녀오셨군요~~ 덕분에 후박나무도 다시금 보게되고.. ㅋㅋㅋ
우리가 야밤에 쉬었던 그 나무...
하룻종일 답사하고 저 나무 밑에서 휴식을 취했단 말이지 야밤에^^ 이순신 장군이 점심 먹고 쉬었던 것처럼.^^
사진을 보니 못 가본 곳이 더 많은 것 같아요^^다시 돌아봐야 할듯싶어요^^
남해는 '이순신 관련 유적지 답사'처럼 주제를 잡고 돌아봐도 갈 곳이 많고 '사찰' 위주로 돌아봐도 볼 곳이 많고... 한 번 다녀가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