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 정말 신나는 스포츠
야구장 바닥에 잔디 심는 일에 참가했다.
참가할 때마다 느끼는 일이지만 대기업에서 주관하는 공사에서는 노동자에 대한 기본권이 잘 챙겨지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다.
우선은 화장실 시설 같은 게 참 잘 되어 있어서 좋았다.
하필이면 기본권 이야기 하면서 화장실 시설 이야기를 하려고 하니 좀 이상하다.
그러나 실제로 겪어야 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그것만큼 큰 문제가 있을까?
대개 일반 야외 공사장에서는 화장실 시설이 제대로 되어있지 않다.
그래서 볼일도 적당하게 알아서 봐야 한다.
남자들은 그래도 좀 덜 하다.
여자분들은 정말 힘든다.
자칫 산모롱이 뒤쪽이나 풀숲 옆을 가다가 민망한 꼴을 볼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그런데 대기업에서 주관하는 공사장에는 이런 기본 시설부터 해 둔다.
만약에 미처 시설이 되어 있지 않은 공사장이라면 간이 화장실이라도 마련해 놓는다.
화장실뿐만이 아니다.
날씨가 더운 날 철저하게 준비해 주는 얼음물 같은 것도 대기업 주관 공사장에서나 볼 수 있다. 오후에 한 차례씩, 특히 여름철 햇살이 강하게 내리 쬐는 시간이면 간호사들이 한 바퀴씩 돌면서 혈압체크도 해 준다.
‘조금이라도 어지럽다고 생각되면 말씀하시고 잠시 쉬세요.’
그 부드럽게 전해주는 목소리만 들어도 대접받고 일하는 것 같아서 어깨가 으쓱해진다.
안전 교육을 시키고, 공사장 내에서는 안전모를 쓰게 하는 곳도 대기업 공사장이다.
이번 운동장에 잔디 심는 일은 대기업에서 주관하고 이렇게 진행되고 있었다.
중장비로 판판하게 닦아 놓은 운동장에 잔디를 펴고, 그 사이에 흙을 넣어주면 된다.
워낙에 넓은 바닥이기 때문에 일반 조경공사에서 쓰는 잔디로는 공사를 할 수가 없고, 여기에서는 장(長)떼라고 불리는 큰 잔디를 쓴다. 혼자서는 들기가 벅찰 정도로 무게도 제법 나간다. 운동장에서 공을 따라 뛰고 달리고, 던지고 받는 곳이다 보니 조금만 수평이 맞지 않아도 안 된다. 약간만 찌그러진 게 있어도 불량품으로 빼어 놓는다.
우리들이 흘린 땀방울의 양 만큼 넓은 마당이 차차 초록빛으로 변해간다. 흡사 카드섹션 무늬가 바뀌어 나가는 것처럼.
야구장.
내 시계바늘은 어느 새 과거로 돌아가고 있었다.
어렸을 때 나는 체육 시간이 참 싫었다.
초등학교 때 해마다 한 번씩 하는 운동회 달리기 종목에서는 꼴찌를 맡아 놓고 했었고, 체육 시간에 축구를 하면 공은 뒤로 빠지고 고무신이 더 멀리 날아가기 일쑤였다. 씨름장에서는 샅바를 매는 순간 모래밭에 내동댕이쳐졌고, 정기체력 검사 때만 되면 철봉대에 매달려 버둥거리다가 턱걸이 한 개 못하고 그냥 내려오곤 했다.
언젠가 한 번은 방과 후에 아이들과 같이 야구라는 것을 했다.
나 보고는 외야수를 하라고 했다.
그런데 상대방이 친 그 웬수같은 공이 하필이면 내 발 밑으로 날아올게 뭐람.
공을 받아야 하는데, 그건 처음부터 어림도 없었고, 받지를 못하면 얼른 주워서 던지기라도 해야 하는데 그것도 내겐 벅찬 일이었다. 공을 쫓아가다가 발로 툭 건드렸는데, 내 발에 차인 공은 데굴데굴 굴러서 운동장 끝에 있는 돌담에 부딪쳐서야 겨우 멈춰 섰다.
시뻘개진 얼굴로 공을 주워들고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던졌더니, 그 사이에 아이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있었다. 점수를 낸 팀은 이겼다고 히히덕거리며 돌아가고, 진 팀은 졌다고 화를 내면서 교문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남았던 공의 주인 아이가 나를 노려보면서 한 마디 했다.
등신-.
그 때 모멸하듯이 바라보던 그 아이의 눈빛은 나를 정말로 참담하게 만들었다.
그 후 나는 그런 놀이에 끼일 생각도 못했고, 아이들이 끼워주지도 않았다.
중학교에 들어가서 나는 내 머리통보다 더 큰 공을 갖고 하는 농구라는 게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 때까지 내 머리는 '농구: 농사지을 때 사용하는 도구' 정도로 기억하고 있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 내 통지표 체육란에는 '미' 정도였다.
내가 운동을 좋아하게 된 계기는 어느 국가 대표 농구 선수 때문이었다.
그 당시 그의 인기는 전국을 들었다 놓았다 할 정도였다. 그 때 아시아 농구 판도는 필리핀, 일본, 우리나라가 서로 다투었는데, 필리핀이 조금 앞서 있었고, 일본과 우리나라가 2위권을 오르내리고 있었다. 1968년이었던가, 태국에서 열렸던 ABC(아시아 농구 선수권) 대회에서 우리나라가 마지막 결승에서 필리핀을 꺾었다. 객관적으로 우리가 실력이 조금 딸린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우승은 감격 그 자체였다. 결승전에서 우리나라가 넣은 득점의 반 이상을 넣으면서 활약했던 분이 바로 그 분이었다.
물론 그 당시 그분을 만난 건 텔레비전 같은 화면이 아니라 순전히 아나운서의 목소리에 의존해야하는 라디오였다.
그래도 그 분이 경기하는, 아니 라디오에서 중계해주는 방송은 거의 들었다.
은퇴할 때까지 수년 동안 그 분에게는 득점 기계라는 별칭이 따라 다녔다.
나는 그 분의 팬이 되었다.
운동선수가 그렇게 큰 매력으로 다가올 줄은 그전까지는 상상도 못했다.
그 때부터 나는 운동에 관심을 두게 되었고, 틈이 나는 대로 운동장에 나가 살았다.
예상하지 못했던 재미가 정말 거기에 있었다.
중학교 때 체육 선생님이 사람들이 스포츠를 좋아할 수밖에 없다는 심리적인 요인을 말해 준 적이 있었다.
“스포츠는 결과가 분명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좋아하는 거야. 만약에 결론이 나지 않고 그냥 흐지부지 끝난다면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을 거야. 운동의 또 하나의 매력은 순간순간 최선을 다하는 선수들의 모습이 아름답기 때문이지. 운동장에서 뛰는 선수들의 눈빛을 봐. 맹수라도 잡아먹을 듯이 번쩍거리는 눈빛에서 묘한 매력을 느낄 수 있지. 그리고 스포츠는 우리들 삶에서 할 수 없는 일을 대신해 주니까 사람들이 좋아하지. 일상생활에서 치고받고 싸우는 일은 어떤 경우라도 용서가 안 되잖아. 그러나 복싱, 레슬링, 태권도, 유도 같은 경기를 보면 상대방을 잘 때리고 차고, 바닥에 메다꽂는 사람이 승리한다고. 그런 승리자의 모습은 우리들의 마음속에 잠재되어있는 누군가를 치거나 때리고 싶은 심정을 대신해 주기 때문에 사람들이 환호하게 되지. 축구, 농구 같은 경기에서는 상대방이 갖고 있는 공을 잘 빼앗는 사람이 영웅 대접을 받아. 일상생활에서는 남의 물건을 빼앗는 게 허용되니? 많이 훔치는 사람이 왕이 되는 경기도 있어. 야구에서는 도루라는 게 있잖아. 이런 등등의 이유로 사람들은 스포츠에 열광하는 거지.”
운동장에 나가 뛰어보니 정말 재미가 있었다.
고교시절, 당시 우리 학교에는 시골에서는 보기 드물게 농구부가 있었고, 그 선수들은 내가 운동장으로 나가면 기꺼이 끼워주고 같이 놀아주었다. 어쩜 지독하게도 운동을 못했던 내게 동정 내지는 연민의 정, 아니면 못하는 사람에 대한 배려 같은 것도 있었으리라. 그 때 친구들이 초등학교에서처럼 등신, 어쩌고저쩌고 했어도 나는 물러서지 않았을 것이다.
운동에 취미를 붙이니까 노력도 저절로 따라 오고 다른 기능들도 저절로 향상되었다.
배구공이 날아오면 가슴으로 껴안고 넘어져 아이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던 실력이 학교 대표로 나갈 수 있을 정도가 되었고, 뜀틀도 겁 없이(?) 뛰어 넘었고, 턱걸이도 열 개 이상 할 수 있게 되었고.......
내 통지표에는 미에서 우, 우에서 다시 수로 올라갔다.
내가 생각해도 놀라운 변신이었다.
야구와 인연을 맺은 것은 내가 처음으로 부임했던 학교에서였다.
그 학교는 야구를 교기로 하는 학교였고, 전국대회에서도 우승을 할 만큼 제대로 실력을 갖춘 그런 학교였다. 그 때 처음 만났던 야구 선수 아이들이 그 후 프로 야구에서도 활약하는 선수가 몇 있었고, 지금은 프로 야구 감독, 코치, 방송국 해설위원들로 활약하고 있다.
학교 교기가 야구다 보니 시합도 자주 있었고, 나는 운동장에 응원을 나가면서 야구와 친해졌다.
지금도 나는 야구 중계방송을 내가 시청하는 텔레비전 프로의 첫 손가락으로 꼽는다.
내가 좋아하는 팀이 있어서 응원도 열심히 하고, 그 팀이 이기면 기분이 좋다.
내가 좋아하는 선수가 홈런이나 안타를 쳐서 점수를 내면, 상대방 투수의 모션을 빼앗아 도루라도 성공할 때면 살그머니 다가가 볼이라도 꼬집어주고 싶을 정도로 사랑스럽다. 대신 헛스윙으로 삼진을 당할 때면 꼭 안타를 치겠다고 약속을 했다가 못 지키는 사람처럼 서운해질 때도 있다. 텔레비전 화면에 비치는 응원석의 문화도 재미있다. 땀을 뻘뻘 흘리며 호루라기를 불면서, 두 팔을 높이 들고,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응원하는 관중들을 보면 그들의 열정에 감탄사가 절로 튀어나온다. 좋아하는 선수를 응원하는 기발한 문구들이 적힌 응원판을 들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의 무한한 창의력에 슬그머니 웃음이 나올 때도 있다.
그러다보니 야구장 공사장에서 잔디 작업에 참여하게 된 것은 나에게 참으로 뜻 깊은 일이었다. 내가 처음 만났던 선수 아이들이 운동장을 누비던 모습이 엊그제 일어났던 일처럼 머리에 그려졌다. 그 아이들이 내가 깔아놓은 잔디구장 위로 뛰고 달리는 환영(幻影)도 눈앞에 나타났다.
보고 싶다.
그 때가 그리워진다.
‘내가 작업하는 이 잔디 위에서 뛰는 선수들, 부상 없이 멋진 기술 익혀서 좋은 결과 있으라.’
마음이 시계를 과거로 돌리고 부지런히 움직이다 보니 어느 새 서산마루 하늘에는 발간 노을이 깔리고 운동장에는 초록빛 잔디가 가득 깔리고 있었다.
첫댓글 재미있게 감상하고
갑니다
편안한밤 되십시요~~^
감사합니다. 님도 좋은 날들만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