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발탄
1961년 한국영화
감독 : 유현목
원작 : 이범선
출연 : 최무룡, 김진규, 서애자, 김혜정
문정숙, 윤일봉, 이대엽, 노재신
유계선, 문혜란
유현목 감독의 대표작 '오발탄'은 한국의 '시민케인'이며 한국의 '우리생애 최고의 해'이며
또한 한국의 네오 리얼리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시민케인'이 차지하고 있는 '영화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화 1위'와 비교할 때 '오발탄'은
역대 한국영화중 가장 위대한 영화 1위라는 타이틀을 부여받았고, 전쟁후 제대군인들의
방황과 아픔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윌리암 와일러 감독의 '우리생애 최고의 해'와
유사하고, 궁상스런 전후 한국의 현실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는 2차 대전후 빈곤한
이탈리아 상황을 궁상스럽게 그려낸 '네오 리얼리즘 영화'와 유사합니다.
그럼 '오발탄'이 과연 역대 한국영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화 1위 라는 점은 얼마나
신빙성이 있을까요?
일단 걸작에 대해서 순위 매기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것은 분명하지만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현재 '오발탄'의 보존상태로 보아서 아무리 이 영화가 걸작이라지만 '역대 1위'
로 꼽기는 무리입니다. 왜냐햐면 영화의 가치는 '최상의 상태'에서 감상하고 평가를
해야 진가를 제대로 매길 수 있는데 오발탄은 그럴 상황이 아닙니다. 일찌기 필름이
유실되었고, 다행히도 샌프란시스코 영화제에 출품한 덕분에 그 상영본을 구해서
비디오도 나오고 DVD도 나왔는데 화질엉망, 음질엉망입니다. 더구나 영어자막이
깔리고 자막없이는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대사... 이런 상태임에도 이 영화를
'역대 1위'로 느꼈다면 그건 '소머즈귀'나 '매의 눈'을 가진 초능력자이기 전에는
불가능합니다.
제가 '시민케인'을 재미있게 보는 이유는 교과서나 평단에서 떠는 '롱테이크 어쩌고..
딥포커스 어쩌고....'라는 기법에 감탄해서가 아닙니다. 1941년에는 그런 기법이
대단해 보였을지 모르지만 그 훨씬 후에 태어나서 그보다 월등하고 진보된
기술로 만든 영화를 이미 훨씬 먼저 여러편 감상한 제가 '시민케인'의 그런 진가를
알기는 불가능합니다. 그럼에도 그런 것 외에 '오손 웰즈, 조셉 코튼'이라는 이미
한참 익숙한 헐리웃 배우들의 등장과 이야기나 내용 자체가 충분히 관심을 가질
만한 어떤 한 남자의 출세와 몰락의 파란만장함을 잘 표현했기 때문이죠.
'오발탄'역시 지금 화질과 음질 상태로 이 영화를 최고의 영화라고 가슴으로,
머리로 느끼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예전 후배가 구해준 이 '오발탄' 비디오
(정품이 아닌 어디선가 구한 복사본)을 손에 넣었을 때 드디어 '최고의 한국영화'를
본다는 가슴떨림속에 비디오 기기에 이 영화를 넣었는데 알아들을 수 없는 대사와
조악한 화질은 곧 영화보기를 포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와~ 그런데 도대체
이 상태의 영화를 보고 '이건 한국 최고의 영화다'라고 느낀 '소머즈귀'와
'매의 눈'들이 당시에 많았나 봅니다.(당시엔 이런 영화 구하는것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선수층'이 얇은 한국영화에서 이 오발탄을 역대 한국영화 100위안에
넣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더구나 지금은 시대가 훨씬 나아졌지요. 출시된
DVD역시 화질, 음질은 엉망이지만 '신의 한수'인 '한글자막'이 있습니다.
적어도 내용의 이해엔 큰 무리가 없습니다. 척박한 1961년 당시 '오발탄'은
힘들고 어려운 현실을 리얼하고 절망스럽게 그려낸 '진실한 영화'라는 점은
분명이 느낄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영화의 완성도 100을 느끼기엔 불가능하지만.
영화의 상태에 따라서 느끼는 감정이 얼마나 다른지는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좋지 못한 화질로 녹화된 김수용 감독의 1967년작 '안개'를 볼 때와 보정된 좋은
화질의 DVD로 볼 때의 느낌은 완전히 다르니까요. 과거 90년대 영화동호회 시절
소문으로만 걸작으로 칭송받던 '제 7의 봉인'을 구해서 상영회를 했을때와,
누벨 이마쥬의 최고의 영상미로 극찬받던 '소년 소녀를 만나다'를 상영했을때
모여든 회원들의 하품하는 소리가 생생히 들렸덧 것도 당연합니다. 그런식으로
어렵게 구한 '비디오 화질'의 상태가 당연히 좋지 않았고, 그걸 '걸작'이라고
느끼면서 감상하기란 쉽지 않았으니까요.
아쉽게도 오발탄은 영영 지금의 화질로 보존되겠지만 '한글자막'이 있는 것
하나만으로 그렇게 달라질 수 있는 것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1961년 영화지만 4-5년 빠른 50년대 중반시대에 더 어울리는 영화입니다.
전후, 한때 훌륭한 군인이었지만 퇴역후 딱히 할 일이 없어서 '백수'로 지내고
있는 사람들. '우리생애 최고의 해'와 같은 상황을 우리나라 영화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송철호(김진규)의 피폐한 집안을 배경으로 전개되는 영화입니다. 철호는
'남편'이자 '아들'이자 '아빠'이자 '형'이자 '오빠'인 가장입니다. 전쟁의 충격
때문에 미쳐버린 엄마(노재신), 가난으로 영양실조에 걸린 임신한 아내(문정숙)
퇴역후 2년넘게 백수로 놀고 있는 동생 영호(최무룡), 영호와 군대동료로
절친이었지만 다리 부상으로 장애인이 된 경식(윤일봉)을 사랑하지만 아픔을
겪다 양공주가 된 여동생 명숙(서애자). 거기에 아직 어린 막내동생, 그리고
아직 철부지인 딸, 회계사무소(당시엔 계리사라고 부르더군요)에서 일하며 박봉을
받는 철호가 감당하기에는 벅찬 가족입니다. 더구나 잔뜩 썩어들어간 철호의
아픈 이빨은 생활비 감당조차 힘든 형편에서 치료는 요원한 상태입니다. 그럼에도
철호는 묵묵히 열심히 이 힘겨운 삶을 견뎌내고 있습니다.
철호와는 달리 동생 영호는 다소 비현실주의자이면서 낭만주의자입니다. 외상술을
마시고도 큰소리를 치고, 제대군인 다운 허세가 강하지만 그냥 술먹고 노는 백수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군대 후배들에게는 큰 형님 같은 존재이고
번듯한 외모 덕분에 영화배우인 미모의 애인 미리(김혜정)까지 있지만 현실은
막막하기만 합니다. 이젠 어린 조카딸조차 영호가 하는 허튼 소리를 '거짓말'
이라고 알아차릴 정도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연히 영호가 마주친 과거 군 간호사였던 설희와의 만남은
영호의 운명을 바꾸어 놓습니다. 마치 잠시 스쳐간 환상속 여인같은 존재였던
설희와의 만남은 영호의 가슴을 일시적으로 뛰게 했지만 그 이후 벌어지는
비극적 사건을 알 수 는 없었습니다. 설희, 영호, 그리고 철호에게까지 번진
비극의 그림자는 이들의 아픈 삶 보다도 더 잔인하게 이들을 덮쳐옵니다.
한국 고전영화 중에서 궁상스러운 작품은 많이 있지만 이렇게 '도시속의 빈곤'을
리얼하게 표현한 경우는 드물었습니다.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가 정말
지독스러울 정도로 암울하고 우울한 작품입니다. 일자리는 없고, 축 처진
퇴근하는 김진규의 뒤를 따라가는 카메라가 비추어가는 폐허같은 허름한 집과
동네....참고 참고 살던 철호가 결국 입에 피를 흘리며 '가자'라고 외치는 엔딩
장면이 주는 강한 여운은 일말의 희망을 주는 관대한조차도 잘라난 유현목
감독의 잔인한 연출이 돋보이고 있습니다.
'오발탄'은 진실로 잘 만든 영화임은 분명하지만 30년대 영화조차도 깨끗하고
좋은 화질로 볼 수 있는 '헐리웃 영화'와는 달리 이렇게 조악한 화질로 만나야
한다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 영화입니다. 중간중간 다소 어색한 연기, 간혹가다
이해할 수 없는 설정, 너무 상식적으로 허접한 은행털이 장면, 그런 부족함을
상충할 만한 리얼한 현실표현과 심리, 상황설정 등 장단점이 분명한 영화입니다.
만약 좋은 화질과 음질로 제대로 감상할 기회가 되면 좀 더 가치를 느낄 수
있는 영화가 분명하지요. 그러나 이젠 '역대 한국영화 1위'라는 무거운 타이틀은
그만 내려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제대로 보존조차 못한 이 엉망화질의
영화, 그리고 '대다수'가 못 본 '만추', 도대체 우리 영화계는 언제까지 이런
'허상의 1위'를 쫓아야 할까요? '오발탄'은 '60년대 영화의 수작'이라는 타이틀로
이미 충분하다는 생각입니다. 이렇게 '억지 1위타이틀'보다는 내려놓아 주면서
이 영화의 가치를 좀 더 편안하게 다각도로 볼 수 있는 기회를 관객에게 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ps1 : '하녀' '오발탄' '순교자'등 잘 만든 고전 한국영화속에 자주 등장하고 있는 배우
김진규의 가치가 참 높게 느껴집니다. 두 편의 이순신에 대한 욕심때문에
몰락하긴 했지만.
ps2 : 선수층이 얇은 옛날 한국영화들을 보면 제법 이름있는 배우들이 굉장히
하찮은 단역으로 출연하는 경우가 자주 있는데 이 영화에서의 '문정숙'의
역할도 그랬습니다.
ps3 : 이 궁상맞은 영화 속에서도 세련되게 빛난 배우는 '미리'역의 김혜정인데
정말 일찍 은퇴한 것이 아까운 배우라는 생각입니다. '한국적 여성상'과는
동떨어진 이런 현대적 분위기의 배우로서는 거의 원조격인데.
ps4 : 이 영화는 마지막 '5분'이 영화의 가치를 한 단계 더 높여준 것 같습니다.
출연비중은 최무룡이 더 많았지만 마지막 5분을 장식한 김진규가 더 깊은
인상을 주었지요.
ps5 : 포스터에 있는 노란색 초미니를 입은 여인 사진은 도대체 뭘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