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계묘년 새해 옛님 카페 회원님들이 건강과 안답을 기원드립니다. 이 글은 2022년 11월 말에 쓴 글이다. " 예정되어 있었던 길을 나섰다. 계획했던 것보다 1주일 정도 늦은 일정이다. 이번에도 장거리며 4박 혹은 5박의 긴 시간이 될 것이다. 그런데 답사기간 동안 부산에서 꼭 처리해야 할 일이 있다. 적임자를 찾았다. 낙점은 대학 후배다. 같은 과라는 의리상 나의 청을 거절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녀석은 생각보다 완강하게 개기면서 버텼다. 이번에는 고등학교 선배로서 다시 압력을 가했다. 고등학교 선배이자 같은 과 대학 선배라는 이중의 벽을 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면 전화목록에서 지우겠다는 등의 협박은 결코 하지 않았다. 장거리 답사는 항상 평일에만 움직인다는 나의 철칙에 따라 이번 답사길도 평일이다. 오전에 회사 일을 잠시 보고 출발을 준비했다. 그렇게 여유롭지는 않다. 이번 10월과 11월의 장거리 답사길은 40년 답사길 중에서도 거의 기억이 없을 정도의 긴 일정이다. 특히 이번 남도 답사길은 오랜 옛 친구를 만날 일정도 포함되어 있다. 회사를 나섰다. 고속도로를 버리고 국도를 택했다. 바람은 차갑고 서늘하다. 차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생존본색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단풍의 향연은 호사스러울 정도로 강렬하다. 도로는 한적하고 낙엽들만 날아다닌다. 광양에서 국도를 버리고 광양 목포 간 고속도로를 달렸다. 한참을 달려 오늘의 첫 답사지 영암 성풍사지 오층석탑에 도착했다. 성풍사지 오층석탑이다. 영암에는 이름이 비슷한 오층석탑이 2기 유존한다. 1기는 현재 포스팅 중인 영암읍 용흥리에 있는 성풍사지 오층석탑이며 또 다른 1기는 영암읍 학송리에 있었던 청풍사지 오층석탑이다. 영암읍 학송리에 있었는 청풍사지 오층석탑은 1969년 도로 확장 공사로 인해 현재는 전남대학교 대강당 앞 정원으로 이건 되었다. 청풍사지 석탑은 현재 4층이지만 비례상 1층이 유실된 것으로 보아 오층석탑으로 추정한다. 이 탑은 하층기단이 통돌인데 하층기단 저석을 표현하지 않았고 층급받침이 5543이며 옥개석 낙수면에 현수곡선이 보여 12세기 전반기 석탑으로 추정하고 있었다. 다만, 탑신부에 비해 기단부의 넓이가 좁아 탑이 고준 하게 보이는 점과 무엇보다도 오층석탑이면서 탑신석 체감률이 상대적으로 낮아 고려후기까지 내려다볼 수 있는 석탑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탑을 전남대로 이건 할 때 상층기단 상부에서 방형의 사리공이 발견되었는데 그 안에 청자사리호가 수습되었고 사리호 안에는 뼈가루가 들어 있었다. 사리호에 사리가 아닌 뼈가루가 발견됨에 따라 이 탑이 불탑이 아닌 스님의 탑, 부도임이 확인되었다. 이 부도는 석탑형 부도로 추정되며 석탑형 부도의 최초의 사례인 영전사 보제존사 사리탑 (1388년)의 조성시기와 멀지 않은 여말선초에 세워진 석탑형 부도로 추정한다. 이렇듯 성풍사지와 청풍사지는 같은 영암지역 있는 오층석탑이고 이름 또한 비슷해서 석탑매니아 들도 가끔 혼동하는 석탑이다. 오늘의 게시물은 영암 성풍사지 오층석탑인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사진을 잘 찍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석탑 사진을 나보다 더 많이 찍은 답사인들은 드물 것이다. 석탑 한 기에 100여 장 이상 찍으니 현재까지 약 수백만 장 정도는 찍었을 것인데도 사진은 좀처럼 늘지 않는다. 그건 일체의 기교를 부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이는 그대로 찍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나에게 있어 사진은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매개체다. 백 여장 이상되는 성풍사지 오층석탑 사진들 중에서 윗 사진이 그나마 건진 가장 석탑적인 사진이다. 석탑은 석탑 자체의 조형미가 아름다운 석탑이 있고 주위 배경과 어울려 아름다운 석탑이 있다. 성풍사지 오층석탑은 주위 배경과 어울려 아름다운 석탑이다. 월출산을 배경으로 한 석탑 중 가장 아름다운 석탑은 2곳에서 보인다. 한 곳은 강진 월남사지 삼층석탑이다. 아래는 2007년에 4월에 쓴 강진, 보성 답사기 중 강진 월남사지 삼층석탑 일부분이다. " 무위사를 벗어나 월남사지로 향해 가는 길에 느닷없이 다가서는 풍경이다. 갑작스러운 차밭의 깔끔한 풍광인데 굽이굽이 이어지지 않고 일직선으로 질서 정연한 모습이 하동이나 보성에서 바라본 녹차 밭 풍경과는 다른 모습이다. 평지에 저리도 광활한 녹차 밭이 있다는 건 이국적이었다. 특히 녹차 밭 군데군데 서있는 팬이 인상적이었다. 서리를 방지해주는 장치라고 하는데 인위적이란 느낌이 지워지지 않았다. 거기다 국내 모기업이 상업적으로 사용하는 녹차 밭이라 더 이상 거론하기는 싫고 그냥 스쳐가는 풍경으로 만족했다. 하지만 풍경이란 그런 거 아닌가! 밋밋한 평지에 저리도 광활한 녹차밭들은 그 어떤 집단미나 총체미는 있을지 몰라도 오래 보고 있으면 지루하고 식상하다. 풍경으로서의 액센트가 없다는 말이다. 평범함을 벗어난, 그 어떤 특이함, 기이함, 그런 것들이 잔상처럼 오래 남아 있는 법이다. 월남사지.....탑은 고고하게 서있고 월남사지, 월출산의 남쪽에 있는 절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예전의 월남사지는 탑이 있던 자리 주위에 농가가 포위하고 있었고 그 앞에 비좁듯이 월남사지 탑이 서있었는데 지금은 군에서 매입했는지 주위 농가는 없어져 한결 넓어져 시야가 확보되었다. 이제야 폐사지의 냄새가 조금은 나는 듯했다. 탑을 보는 순간, 부산 박물관 회원님들의 부산 사투리가 절로 터져 나온다. “우아,, 직이네!” "이야,, 진짜 직이네!" 부산 사투리의 강점은 일단 좋으면 무조건 직이고 본다는 것이다. 월출산의 능선을 배경으로 장대한 탑이 가로막고 서 있는 모습은 장관이다. 월출산의 기이하고 위엄 있는 봉우리들이 하늘 선을 가르고 있었고 그 정점에 탑은 웅장하게 솟아 하늘과 땅을 맞대고 있었다. 착각인가, 월출산을 배경으로 둔 탑이 산 보다 더 커 보인다. 마치 월출산 최고봉인 천황봉이 탑에 걸려 있는 듯하다. 탑은 고고해 보였고 고고하다 못해 강인함 마저 들었다. 강한 것들은 서로를 끌어당기는 그 무엇이 있을 것이다. 마치 수 백리 밖의 먹구름에서 번개를 끌어당기는 쇳조각처럼 천황봉과 탑 사이에는 끈끈하면서도 강인한 그 무엇이 있었다. 한 가지 이상한 것은, 월남사지 삼층석탑의 안내판을 읽어보니 모전석탑이라고 한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내용이다. 저 탑이 어떻게 해서 모전석탑인가? 잘 알다시피 모전석탑이란 돌을 벽돌모양으로 잘라서 만든 석탑이다 해서 대부분의 모전석탑은 지붕돌(옥개석) 낙수면에 층단이 있다. 그래서 이 석탑도 층단이 있어서 모전석탑이라고 했을까? 그러나 지붕돌을 여러 개의 석재로 만든 점 기단부가 탑신부에 비해 급격히 좁아진 점, 기단부가 여러 매의 석재를 끼워 넣어 결구한 모습으로 보아 모전석탑으로 보기는 어렵다. 특히, 옥개석 하부 층급받침을 공 굴려 놓은 흔적은 그 어떤 모전석탑에서 찾아볼 수 없다. 이런 형태의 층급받침은 사능형이라고 하며 고려시대 백제계 석탑에서 보이는 요소이다. 이 석탑의 특징은 1.옥개석보다 넓이가 작은 기단부 2. 초층탑신석이 매우 고준한 점 3.층급받침의 변화가 있는 탑 (1,2층은 호각호 3단, 3층은 호각 2단) 4. 하면이 내곡 되어 있는 특이한 노반석 5. 옥개석 낙수면의 층단의 표현 위의 특징으로 보아 목탑의 요소가 많은 석탑이며 낙수면에 층단의 표현에서 일부 전탑의 요소도 볼 수 있지만 전체적으로 고려시대 백제계 석탑으로 볼 수 있다. 10C 중후반에 조성되었으며 고려시대 백제계 석탑 중 가장 이른 시기에 조성된 석탑이다. 탑을 뒤로하고 돌아 나오는 길, 무언가가 자꾸만 끌어당긴다. 발자국을 더 남겨란 말인가,, 월출산과 월남사지 삼층석탑에 빠져 정작 이 나무를 스쳐 지나갈뻔 했다. 동백이라 불리기 아까운 나무다. 마치 고목나무를 보듯 신령스러워 보였다. 적어도 이 동백나무는 탑과 몇 백 년은 고락을 같이 했을 것이다. 월남사지 근처의 농가 풍경이다. 참 토속적인 풍경인데 왼쪽의 연보라색의 꽃이 인상적이다. 박태기 꽃이다 꽃모양이 꼭 밥튀기를 닮아서 박태기 나무라고 한다. 하지만 저 꽃은 독이 있어 아름답다고 입에 넣으면 안 된단다 그냥 눈으로만 보시랴,, ㅡ 2007년 4월, 강진 월남사지 삼층석탑 답사기 중에서 월출산을 배경으로 한 아름다운 석탑 중 또 하나의 석탑은 이곳 영암 성풍사지 오층석탑이다. 월출산이 마치 병풍처럼 호휘하고 있는 석탑이 인상적이다. 생각이 머물러 있는 곳이며 좋아한다는 느낌 그 이상으로 좋아하는 곳이다. 성풍사지 오층석탑의 특징은 아래와 같다. 1.지대석이 4매의 장대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면 후면 좌측 우측 지대석의 배치는 좌우에 긴 장대석을 2매를 두고 전후에서 짧은 장대석 2매가 끼워져 있는 감입식의 구조로 4매로 구성되어 있다. 예전에도 언급했지만 석탑에 있어서 지대석의 배치는 700년대 탑에서는 대부분 판석이며 8매 혹은 그 이상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지대석이 아닌 탑구로 결구되기도 한다. 지대석과 탑구의 구별은 아래와 같다. 지대석이란 석탑의 맨 아래 부재여서 반드시 하층기단 저석 아래에 깔려있으며 석탑의 하중을 지탱한다. 탑구란 하층기단 저석 아래가 아닌 측면에 붙어있는 부재를 뜻한다. 탑구는 협의의 의미와 광의의 의미 2가지로 나눌 수 있다. 협의의 의미는 하층기단 저석 측면에 바로 붙어있어 석탑의 밀림을 방지하며 하중을 일부 분산시키는 기능이 있다. 측면에 붙어있어 흔히 지복석이라고 하기도 하지만 학계에서 통용되지 않는 용어이기에 탑구로 정리하는 것이 좋다. 광의의 의미는 하층기단 저석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배치되어 석탑의 구역을 나타내며 하중의 일부를 분산시키는 기능도 같이한다. 지대석의 변화는 700년대의 탑들이 대부분 8매 이상의 판석으로 조성되었데 비해 속초 향성사지 삼층석탑 (800년 ~ 806년) 800년~806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속초 향성사지 삼층석탑에서 비로소 지대석이 장대석으로 변화한다. 이때 지대석의 매수는 8매로 구성된다. 포항 법광사지 삼층석탑(828년) 828년에 조성된 법광사지 삼층석탑에서는 지대석이 장대석이며 6매로 축소되기 시작한다. 대구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 (863년) 863년에 조성된 대구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863년)에서는 지대석이 4매의 장대석으로 정착되며 엇물림으로 결구되어 있다. 즉 석탑사에 있어서 지대석 4매의 등장은 9세기 중반 이후부터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야 하며 지대석 4매의 배치는 석탑의 소형화와 관련이 있다. 위의 흐름으로 석탑의 지대석 4매 배치의 흐름을 이해하면 편할 것이다. 2. 특이하게도 하층기단 면석에 2개의 장방형의 액(額)이 마치 창틀을 표현한 것처럼 보인다. 하층기단 면석의 형태가 좌우에 1구씩, 2구의 장방형의 액(額)이 마련되어 있다. 그러기에 대부분의 자료에는 하층기단 면석에 2구의 긴 액(額)이 새겨져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런데 석탑의 하층기단에 액(額) 형태가 되려면 반드시 아랫부분의 테두리처럼 윗부분도 테두리가 있어야 한다. 성풍사지 오층석탑의 하층기단 면석을 들여다보면 윗면의 테두리가 보이지 않고 위가 터져 있다. 측면을 살펴보아도 마찬가지로 윗면의 테두리가 보이지 않고 위로 터져 있다. 그래서 이런 형태는 하층기단에 긴 장방형의 액(額)이 2구 조성된 것이 아니라 하층기단은 저석과 면석이 일석이며 양쪽 모서리에 얇은 우주가 새겨져 있고 가운데 탱주 1주가 얇게 조식된 형태로 이해해야 한다. 그러기에 전체적인 하층기단의 형태는 하층기단 갑석은 별석이며 하층기단 저석과 면석이 일석이며 양쪽 모서리에 우주가 얇게 새겨져 있고 가운데 탱주 1주가 얇게 조각된 형태로 판단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석탑사에 있어서 하층기단 면석에 장방형의 액(額)이 표현되기 시작하는 최초의 석탑은 남한 석탑에서는 강진 무위사 삼층석탑(10세기 후반)에서 먼저 볼 수 있다. 강진 무위사 삼층석탑 하층기단 전면 (사진 / 시나브로님) 무위사 삼층석탑의 하층기단을 세부적으로 살펴보기 위해 시나브로님 사진을 가져왔다. 하층기단 갑석은 별석이고 하층기단 저석과 면석이 일석이다. 그런데 하층기단 면석 상단에는 성풍사지 오층석탑처럼 위가 터져있는 모습이 아니라 가로로 긴 선이 구획되고 있어 마치 테두리처럼 상단을 막고 있는 특이한 모습이다. 테두리에는 2구로 구획된 장방형의 액(額)이 보이며 내부에는 아름다운 안상이 2구 새겨져 있다. 액의 좌우와 가운데는 마치 우주와 탱주를 모각한 것처럼 새겨 놓았다. 이런 형태는 하층기단 면석에 테두리가 배치된 2구의 장방형의 액((額)으로 보는 것이 가장 이해하기 쉽다. 혹시 이 부분이 2구의 액이 아니라 우주와 탱주를 모각하고 남은 여백공간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하층기단 측면을 보면 좀 더 확실히 알 수가 있다. 강진 무위사 삼층석탑 하층기단 측면 (사진 / 시나브로님) 양쪽에는 우주의 모각 없이 부재의 측면을 마치 우주처럼 배치한 모습이 보인다. 정면 감입식으로 끼워져 있는 부재 양쪽 옆에 우주처럼 보이는 부분은 우주가 아니라 하층기단 저석 면석이 일석으로 구성된 부재이다. 이 부재의 측면이 마치 우주처럼 표현되어 있는 것이다. 장흥 보림사 삼층석탑 (870년) 하층기단의 우주형태를 살펴보면 이해하기 쉬운데 하층기단의 형태는 저석, 면석, 갑석이 일석으로 조성된 부재가 4매 감입식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양쪽에 배치된 부재를 살펴보면 이 부재 자체를 우주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별도로 우주가 모각되어 있는 모습이 확실히 보인다. 가장 확실한 액(額) 형태는 북한 석탑에서 보이는데 평안남도 성천군 자복사 오층석탑 ( 사진 : 조선고적도보) 평안남도 성천군 자복사 오층석탑(11세기 초반)에서 먼저 보인다. 별석으로 조성된 하층기단 면석에 상하좌우 테두리가 확실한 액(額) 형태가 3구 조식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기에 하층기단 갑석이 별석이고 하층기단 면석 상단에 테두리가 있을 경우에는 액(額)이 확실하고 상단에 테두리가 없을 경우에는 액(額)이 아니라 하층기단 면석에 우주와 탱주가 모각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이런 테두리가 확실한 액(額)의 형태는 시대가 내려가면서 하층기단 저석, 면석, 갑석이 일석인 석탑에서도 나타나는데 해남 은적사 삼층석탑(12세기 초반) 광양 성황리 삼층석탑(12세기 후반) 완주 위봉사 석탑 (고려후기)에서 보인다. 3. 하층기단 면석의 넓이가 지대석의 넓이와 하층기단 갑석의 넓이에 비해 매우 좁다. 성풍사지 오층석탑 기단부의 제원은 지대석 넓이 226cm 하층기단 갑석 넓이 223cm 하층기단 면석 넓이는 182cm로 하층기단 면석의 넓이가 매우 좁다. 아래 4번의 특징과 함께 이 석탑의 가장 큰 특징이다. 일반형 석탑에서는 일석으로 조성된 하층기단 저석과 면석의 배치는 영광 신천리 삼층석탑처럼 하층기단 갑석 하부 끝부분에 가깝게 밀접하게 배치되어 있다. 이렇게 밀접하게 붙이는 이유는 탑신부에서 내려오는 하중을 좀 더 견고하게 받치기 위함이다. 그런데 성풍사지 오층석탑은 하층기단 면석이 매우 좁아 탑신부에서 내려오는 하중을 효과적으로 받치기 어려운 구조이다. 일반형 석탑에서는 볼 수 없는 매우 희소한 특징이다. 혹시 기단부를 해체하면서 생긴 이격인가 싶어 유심히 하층기단 면석을 살펴보았다. 4매의 부재중 2매는 신재이며 2매는 원래의 부재로 생각되어 현재 상태가 제 모습으로 판단되었다. 이렇게 희소한 하층기단 면석의 넓이가 좁은 유형의 석탑은 순천 동화사 삼층석탑과 담양 언곡사지 삼층석탑에서도 볼 수 있다. 순천 동화사 삼층석탑과 담양 언곡사지 삼층석탑은 성풍사지 오층석탑과 유사하게 지대석과 하층기단 갑석의 넓이보다 하층기단 면석의 넓이가 현저하게 좁은 것을 알 수 있다. 성풍사지 오층석탑은 초층 탑신석에서 탑지석이 발견되었는데 "統和二十七年己酉" 의 기록으로 보아 統和(983년 ~ 1012년)는 중국 요나라 성종 때 쓰던 연호여서 통화 27년은 고려 목종 12년(1009년)에 해당되어 1009년에 조성된 석탑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하층기단 면석의 좁은 형태는 후대에 보수하면서 잘못 후보 된 형태가 아닌 10c 후반 ~ 11c 극초반에 전라남도 일부지역인 영암. 담양, 순천 지역에서 나타나는 형식이 아닐까 생각된다 4.하층기단 갑석의 넓이가 독특하게도 지대석의 넓이와 비슷하다. 이 특징은 위의 3번 특징과 겹치는 부분이다. 성풍사지 오층석탑의 기단부 넓이는 지대석 넓이 226cm 하층기단 갑석의 넓이 223cm 하층기단 저석과 면석이 일석인 넓이 182cm이다. 지대석의 넓이와 하층기단 갑석의 넓이가 3cm만 차이가 있는 희귀한 모습이다. 이런 유형은 일반형 석탑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어 이 지역의 특징이 아닐까 생각된다. 5. 상층기단 갑석 하부에 부연이 표현되지 않았다. 상층기단 갑석은 2매로 구성되어 있는데 하부에 부연을 나타내지 않았다. 부연이 없는 석탑의 계보는 아래와 같다. 동해 삼화사 삼층석탑 김천 수도암 서 삼층석탑 양평 용천리 삼층석탑 원주 흥법사 삼층석탑 속리산 금강골 쌍탑 영동 반야사 삼층석탑 구례 논곡리 삼층석탑 함안 승안사지 삼층석탑 제천 신륵사시 삼층석탑 영암 성풍사지 오층석탑 (1009년) 진안 강정리 오층석탑으로 이어진다. 부연이 없는 석탑은 대부분 고려시대 석탑이다. 6.상층기단 갑석 상부에 각호각 3단의 탑신괴임이 마련되어 있다. 상층기단 갑석 상면에 새겨진 각호각 3단 괴임의 계보는 아래와 같다. 보령 성주사지 동, 서, 중앙 3기의 석탑에서 먼저 보이며 이중기단에서는 장흥 보림사 삼층석탑(870년) 삼중기단에서는 봉화 축서사 삼층석탑(867년) 단층기단에서는 문경 봉암사 삼층석탑(879년)으로 이어진다. 특히 이중기단 석탑에 있어서 3단 괴임의 계보는 보령 성주사지 동, 서, 중앙 3기의 석탑 장흥 보림사 삼층석탑 (870년) 순천 선암사 동서 삼층석탑 경주 기림사 삼층석탑 곡성 태안사 삼층석탑 광주 증심사 삼층석탑 원주 흥법사지 삼층석탑 개성 불일사 삼층석탑 안성 미륵당 오층석탑(993년) 영암 성풍사지 오층석탑(1009년)으로 이어진다 7. 옥개석 정상에 탑신괴임이 없는 점 옥개석 정상에 탑신괴임이 없는 최초의 사례는 논산 개태사지 오층석탑(936년)이다. 그 이후의 계보는 홍성 고산사 삼층석탑 춘천 청평사 삼층석탑 아산 오봉암 삼층석탑 청양 삼층석탑 부여 대조사 삼층석탑 영암 성풍사지 삼층석탑 안동 봉림사지 삼층석탑 진안 강정리 오층석탑으로 이어진다. 옥개석 정상에 탑신괴임이 없는 석탑은 모두 고려시대 석탑이다. 8. 옥개석 하부 층급받침이 4,4,4,3,3 인 점 오층석탑에서 옥개석 층급받침 3단이 등장하는 최초의 석탑은 논산 개태사지 오층석탑(936년)이다. 개태사지 오층석탑에서는 44433으로 배치된다. 이 이후의 계보는 개성 불일사 오층석탑(951년) 33333 논산 관촉사 오층석탑(970년경) 33333 김제 금산사 오층석탑 (10세기 후반) 33333 안성 미륵당 오층석탑(993년) 33333 영암 성풍사지 오층석탑(1009년) 44433 장성 수산리 오층석탑 44433 으로 이어진다. 오층석탑에서 층급받침 3단의 표현은 모두 고려시대 기법이다. 9. 오층석탑이지만 초층탑신석의 높이가 아직 고준하지 않는 점 고려초기에 세워진 오층석탑의 사례는 구례 화엄사 오층석탑 보령 성주사지 오층석탑 개성 불일사 오층석탑(951년) 서산 보원사지 오층석탑 논산 관촉사 오층석탑 김제 금산사 오층석탑 부여 무량사 오층석탑 등으로 이어지지만 아직 초층탑신석의 높이가 고준 하지 않다. 그런데 문종 재위 기간에 조성된 남원 만복사지 오층석탑(1046년 ~ 1083년)부터는 초층 탑신석의 높이가 매우 고준 해지기 시작한다. 이후 장성 수산리 오층석탑 장성 진원리 오층석탑 나주 송제리 오층석탑 정읍 천곡사지 칠층석탑 남원 용담사지 칠층석탑 특히 운주사 석탑에서는 그 높이가 극에 이른다. 1009년에 조성된 성풍사지 오층석탑은 탑신석의 높이가 고준 해지기 시작하는 과도기적인 석탑으로서 그 의의가 있다. 영암 성풍사지 오층석탑의 가장 큰 특징은 하층기단의 변화에 있다. 이러한 하층기단의 변화는 11월 의령답사 때 보천사지 삼층석탑에서 본 것처럼 하층기단 갑석이 가로로 3매 배치된 점으로 보아 합천 청량사 삼층석탑의 하층기단 갑석 배치와 같아서 경상남도 합천, 의령 지역에서 나타나는 기단부 변화의 특징으로 보았다. 이번 답사길에 나타난 영암 성풍사지 오층석탑, 순천 동화사 삼층석탑, 담양 연곡사 삼층석탑에서 보인 하층기단 면석의 넓이가 매우 좁은 유형도 전남 일부 지역에서 나타나는 특징으로 보아도 크게 무리가 없을 듯하다. 더구나 영암 성풍사지 오층석탑은 1009년이란 명문이 있어 좀 더 유심히 살펴야 하는 소중한 석탑이다. 석탑매니아들의 많은 관심을 기대한다. " 성풍사지를 나서는 길 마음이 바쁘다. 목포에서 꼭 만나야 할 가슴 먹먹한 오랜 친구가 때문이다. 전화를 했더니 늦은 저녁에 보자고 한다. 시간이 남아 유달산에 올랐다. 유달산은 밖에서 보면 악산처럼 험하게 보이지만 막상 올라가보면 트레킹 코스에 적합할 정도로 편안한 산이다. 정상 근처에서 바라본 목포시 전경이다. 목포의 항구와 산의 풍광은 부산과는 다른 곡선과 디데일을 가지고 있어서 대체로 오래된 도시라는 포괄적인 인상이었지만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바다 풍광과 항구 풍경에 익숙한 부산 남자는 그 어떠한 항구도시의 풍광을 보아도 와닿지 않는다. 그것들은 이미 각인되어 있는 풍광이기 때문이다. 목포시의 야경을 등지고 진갑의 남자 둘이 우두커니 바다를 바라보았다. 백 년 만에 만난 그의 첫마디 "밥 무러 가자" 20년 이상 목포에서 살고 있지만 어투 강한 부산 사투리는 여전하다. 80년 3월, 대학에서 처음 만나 내가 입대한 81년 여름까지 같이 어울렸다. 다들 되돌아보면 언젠가 농축된 한 때가 있었을 것이다. 그때 만났다. 푸른 시절, 푸른 계절에... 인생사에 있어서 청춘의 궤적은 늘 파문으로 남지만 그 시간들은 지금까지도 우리 인생에 함축성 있는 이정표가 될 것이다. 동갑내기들은 많은 것들을 공유해 준다. 유사한 경험, 비슷한 취미, 닮은꼴의 가족구성원을 가지고 있다. 특히 그와는 접점이 많았는데 다소 직석적이며 어느정도 거친 성격 산행을 즐겼으며 (물론 나는 산행과 답사를 겸했지만) 술은 전혀 못하며 커피도 거의 못 마시고 주로 현장에서 자주 어울렸던 야전파,,,,, 대학의 실상과 허상 속에 헤매던 시절, 이데올로기로 인해 부유하던 정체성, 골치 아프고 심각한 이야기에 질려 있었던 시기에 가능하면 무게 나가는 대화를 의도적으로 절제하며 이런저런 세월 잡아먹는 농담이나 주고받으면서 시간을 죽이곤 했던 이를테면 아주 편안한 관계였다. 그 해, 초여름 그는 집회와 시위로 인한 수배를 피해 가야산 자락 아래 어느 농가에서 은둔했었고 그를 찾아 한달간 그곳에서 숙식을 같이했다. 아마도 그때가 우리네 인생에서 가장 자유로웠을 것이다. 지금도 그때가 인생에서 가장 자유로웠다고 망설임 없이 말할 수 있다. 그도 동의한다. 그해 가을, 나는 입대했고 그는 학교에 남았다. 같이 어울려 지내기는 그때 까지였던 것 같다. 졸업 후 그는 사회운동가로 나는 복학 후 직장인으로... 그의 삶은, 우리 시대 사회운동가들의 삶이 그렇듯 늘 팍팍했고 곤궁했다. 하지만 그의 내면은 여전히 옹골차다. 그와는 늘 좋은 일만 있었던 기억은 아니었다. 한동안 그와는 소원했다. 이유가 있었기에.... 그래서 그 기억의 끈이 더 질기고 완강하다. 연락을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결국은 만날 수밖에 없었는 사이었다. 그도 흔적과 눈길은 계속 두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한다. 어쩔 수 없이 그와 난 서로 간의 감정의 동선을 공유할 수 있는 친구다. 술과 커피 없이 5시간 이상 기억의 잔영을 추억하며 대화하다 다음에는 부산에서 보자는 기약 없는 만남을 뒤로하고 헤어졌다. 나는 그를 좋아한다. 품성에서 풍겨 나오는 그의 진정성을 좋아한다. 남자가 남자를 좋아한다는 표현은 그를 믿고 신뢰한다 라는 의미다. 그가 이 글을 볼 가능성은 아예 제로겠지만 나는 그를 오랫동안 만나고 싶다. 젊은 날, 동문수학한 남자 둘이 남해바다 끝과 끝, 부산과 목포에서 만나는 것도 결코 우연한 일은 아닐것인데....... " 며칠동안의 전남 해안지방과 섬 답사를 마치고 늦은 오후에 부산으로 출발했다. 당연히 부산길은 멀다. 진주부근에서 꽉 막힌 고속도로를 벗어나 국도로 접어들어 한참 길을 찾아 부산으로 진입했다. 지난 며칠동안의 답사는 일상에 좀더 충실하기 위해 떠났던 길이지만 너무 짙은 여운으로 남은 향취를 쉽게 떨쳐내기란 쉽지 않을것 같다. 답사라는 짙은 농도의 순례길을 마감한 지금 아직도 일상으로 완전한 복귀를 하지 못하고 있다. 며칠 간의 여운, 방황하는 머릿속은 여전하다. 저 처연하게 떨어지는 11월의 남도 산들의 단풍과 인향 가득한 오랜 친구가, 이미 눈에 선하게만 밟히고 있는데...... |
첫댓글 달넘새님.. 오랜만의 글을 읽어보며 오늘도 감사한 마음 가득입니다.
글과 사진을 하나하나 짝지어 살펴보며 위로 올렸다 아래로 내렸다... 중간까지 읽고 한숨 쉬었다가 마저 읽었습니다.
늘.. 방대하고 다양한 자료와 냉철한 분석에 감탄이...
게다가 친구분과의 이야기엔 .. 깊고 진한 바다의 모습처럼 짙은 여운도 전해져.. 또 한편의 작품을 만납니다. ^^.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올해엔 얼굴도 뵐 수 있기를...^^
그리 신통치 않은 글인데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올해는 답사지에서 아란두님과 도킹할 날도 있어야 할텐데요~~
새해에도 즐답 안답하시고 복 많이 받으시고^^
감사합니다. 한 번 읽었고, 또 복습해야지요. 오타 발견입니다. “문경 재위 기간에 조성된 남원 만복사지 오층석탑”입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어~~오타가 있었군요
예리하신 또르님 레이다에 포착되었군요ᆢ역시
새해에는 답사지에서 더 자주뵙기를^^
"푸른 시절, 푸른 계절에...
인생사에 있어서 청춘의 궤적은 늘 파문으로 남지만"
나이 70이 되니 달넘새님의 글귀가 이해가 됩니다. 새해에도 건안하시길 불전에 기원드립니다.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는데 건강은 어떠하신지요
댓글로 건안하심을 확인합니다.
올해는 형님을 자주 뵙기를 소망합니다.
새해에도 늘 건강하시고 복 많이 받으시길 기원드립니다^^
길떠나고
돌아오는건 같은데
중간부분은 저와는 너무나도 차이가 크네요.
좋은 답사기 잘 봤습니다.
지난 초파일에 봉암사에서 승탑가는 길 갈쳐준 아줌마가
저를 아시는 분이셨군요^^
프로필 사진 기생초와 닮은 분이셨던가요?
말씀 하셨으면 꼭 잊지 않고 기억 했을텐데요
덕택에 잘 찾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답사보다 더 좋았을 친구와의
만남을 축하합니다
저도 이제는 답사가면서
친구도 한번 정도는
찿아 보고 싶읍니다
포스팅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정기답사를 제외하고 대부분 솔로 답사를 선호하는데
이번만은 예외였답니다.
인도 답사의 여운이 짙겠지만 일상에 잘 적응하시길 바랍니다.
새해에는 답사지에서 자주뵙지요
감사합니다^^
가슴이 먹먹하네요..말을 하지 않아도..밥 묵자는 그 한마디에 녹아 있는 마음이란...오늘은 탑보다는 친구분의 이야기만 뇌리에 남습니다.
친구들 또한 드문 스산한 시대에
생각하는것 만으로도 자신이 제어될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건 홍복입니다.
올해도 정기답사 잘 꾸며주시고 답사지에서 자주뵙지요^^
"옥개석 정상에 탑신괴임이 없는 석탑은 모두 고려시대 석탑이다."
까묵고 또 까묵고, 또 까묵겠지요?
ㅎㅎㅎ
인간이기에 오타가 있겠지요?
아상 오봉암!
궁금
울진 불영사 대웅전, 김천 수도암, 동화사 금당서원(현재는 교체) 등 많은 전각의 고식 기단부를 額으로 본다면 그 역시도 우주, 탱주가 아닌가예?
자주
포스팅 안하마 녹습니데이!!!!!
새벽
간만에 정독했습니다
댕큐!
동화사 금당선원(옛 기단부)
한번 점검했는데도 또 오타가 나오는군요
그걸 찾아내는 눈 밝은 쥔장님 역시,,,
말씀하신 불영사 대웅전 기단부는 장대석을 3단으로 쌓아 올린 다듬돌 기단이고
김천 수도암 대웅전 기단부는 하대석,우주와 탱주, 면석,갑석으로 구성된 가구식 기단이며
대구 동화사 금당선원도 마찬가지로 하대석,우주와 탱주, 면석,갑석으로 구성된 가구식 기단입니다.
즉 가구식 기단의 배치는 석탑의 저석 중석 갑석으로 배치된 하층기단과 같습니다.
이런 근거로 동화사 금당선원의 기단부 사진을 제시하셨는데
특히 상부에 가로로 긴 횡선대가 석탑 하층기단 면석 상부의 횡선대와 비슷해서
심증을 더하신거 같습니다.
그런데 가로의 긴 횡선대는 가구식 기단과 석탑의 하층기단 표현법은 다릅니다.
예시하신 금당선원 가구식 기단의 긴 횡선대는 면석 상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갑석 하부에 붙어 있습니다.
이런 형태는 갑석 하부에 배치된 부연으로 보시는게 좋습니다.
@달넘새 문경 봉암사 정진대사 원오탑비의 가구식 기단(사진)을 보시면 확실한데
이곳에서는 갑석 아래 부연이 호각 2단으로 조성되어 있습니다.
석탑 하층기단에 표현된 긴 횡선대는 하층기단 갑석 하부에 붙어있지 않고
면석 상부에 새겨져 있습니다.
이 점이 가구식 기단과 석탑의 하층기단과 다른점입니다.
만일 가구식 기단 중 면석의 탱주와 우주로 분할된 부분을 액(額)으로 본다면
액의 형태가 너무크고 갯수가 여러개여서 과연 그 표현이 적합할까 의문이 드네요
여튼 거론하신 부분 생각을 더 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시공간을 넘나드는 아름다운 글입니다.
달넘새님의 청춘의 편린도 살짝 엿볼 수 있었네요.
늘 느끼는 것이지만, 어떻게 이렇게나 세밀하게 특징별로 분류를 해놓으셨는지..
감사한 마음으로 잘 공부했습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무애님의 감성으로 무장된 젊은날의 조각들도 엿볼수 있었으면 좋을텐데요....
1월 답사에 보이지 않아 궁금해하던 참이었습니다.
다음 답사때는 꼭 뵙지요^^
좋은글과 사진들
깊이 있는 해설...
항상 감사드립다~
마애님의 맛깔스런 입답을 들어야하 할텐데요
새해에는 자주 뵙는 기회가 있었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