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집 식물상담소_식물들이 당신에게 건네는 말과 위로
신혜우, 다산북스, 2022, 6-12, 36-43쪽.
서문
식물과 이야기하고 싶은 당신에게 보내는 초대장
고향이 서울이 아닌 저는 2015년에 얼떨결에 지금 사는 동네로 이사를 왔습니다. 아파트 단지에 오래된 나무가 울창하고 놀이터엔 아이들이 많다는 이유로 덜컥 집을 골랐지요.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단지 바로 곁에 있어 어린 친구들이 무척 많았습니다. 우리나라에 출생률이 낮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죠. 특히 집을 둘러싸고 사방에 놀이터가 있어서 늘 참새 소리처럼 어린이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처음으로 동네 한 바퀴를 돌던 날, 여기서 예전부터 꿈꿔왔던 ‘이웃집 식물학자’가 되어보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실험실에 출근하지 않는 주말이나 휴일에 놀이터에 앉아 있으면 누구나 와서 식물에 대해 물어볼 수 있는 만나기 쉬운 우리 동네 식물학자 말이죠.
그러나 막상 제가 사는 동네에서 시작하려니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온 동네 어린이가 나를 알게 되면 좀 곤란하지 않을까?’, ‘어디에서 어떤 모양새로 시작하지?’ ‘남녀노소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게 좋을까?’ 등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한 상태였죠. 바쁜 날들 속에 저는 계속 익명의 주민이었습니다.
4년이 지난 2019년, 미국 연구원 생활을 마치고 돌아와 ‘식물상담소’를 열 좋은 기회를 만났습니다. 미국에 가기 전에 마지막 전시를 열었던 통의동의 복합문화공간 ‘아트 스페이스 보안’에서 플리마켓이 열렸거든요. 식물을 좋아하시는 그곳 대표님의 초대로 친한 작가님과 전시를 열었던 곳입니다. 플리마켓이었지만 저는 물건을 팔지 않고 무료로 식물상담소를 운영하고 싶은데 참여해도 괜찮냐고 여쭈었고 대표님도 좋아하셨죠. 미국 연구소에 있을 때 겨우 하루밖에 한국인을 만나지 못했던 저는 한국 사람들을 만나 식물 이야기를 실컷 할 생각에 그저 들떠 있었습니다. 그렇게 무작정 첫 번째 식물상담소를 열었습니다.
식물상담소를 열고 여러 사람과 만나며 즐거웠지만 아쉬움은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이웃을 만날 일이 없었거든요. 저희 집 근처에는 산이 많고 개천이 흘러 자주 곳곳을 산책하며 식물을 관찰합니다. 한번은 개천 옆에서 다닥냉이를 관찰하고 있을 때, 산책하던 어떤 사람이 다가와 식물 이름을 물어오기에 이름을 알려주었습니다. 이름을 알려준 것뿐인데 진심으로 감사해했던 그 사람이 종종 생각났지요. 지금껏 여러 곳에서 식물과 관련된 전시와 강연을 열었지만 한 번도 제가 사는 동네는 아니어서 우연히 만난 이웃의 질문이 반가웠거든요.
그러다 운이 좋게도 제가 사는 지역의 한 갤러리에서 제안을 받아 「이웃집 식물학자의 초대, 봄꽃봄」이라는 전시를 열었고 식물상담소도 열었습니다. 동네를 걸으며 기억해 둔 식물들과 차곡차곡 쌓아놓았던 생각을 전시에 담을 수 있었죠. 처음 계획했던 진정한 '이웃집 식물학자'가 될 수 있어 좋았습니다.
그렇게 우연히 시작한 식물상담소를 2021년까지 열었습니다. 대부분 '아트스페이스 보안' 2층 '보안책방'에서 한 달에 한 번 정도 무료로 진행했고, 전시나 강연이 있으면 그곳에서 상담소를 열기도 했지요. 1시부터 5시까지, 한 사람과 길게는 1시간 동안 상담했습니다.
식물상담소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식물에 대해 무슨 상담을 그리 오래 하는지 궁금해했는데요. 식물에 대한 지식뿐만 아니라 식물과 관련된 무엇이든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였습니다. 1시간이나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꽤 친해지게 되어 인생 이야기, 사는 이야기. 별것 아닌 농담 등 예상 못한 방향으로 대화는 흘러가곤 했습니다. 우리들은 흐르는 대화 속에 지식을 나누었고 고민에 대한 대답을 찾아나가고는 했습니다. 상담자는 식물에 대해 알게 되었고, 저는 다양한 상담자를 통해 인생 수업을 받은 것만 같습니다.
가끔 예약을 받지 않은 날이면, 식물과 전혀 관련이 없고 관심도 없는 사람이 지나가다 우연히 앉기도 했습니다. 대화를 나누면서 서로 놀라워하고 감동할 때마다 상담자와 저 둘만 알고 사라져버리기에는 우리들의 이야기가 너무 아까웠습니다. 그래서 책을 내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출판사와 계획을 세웠습니다. 상담자에게 동의를 구해 대화를 녹음하고 만약 상담자의 이야기가 책에 담기면 책을 보내드리기로 약속했죠.
식물상담소에서 나누었던 대화를 출판사의 도움으로 모두 글로 옮겼더니 A4용지로 590쪽이나 되었습니다. 그 내용이 그대로 책으로 나왔다면 아마 백과사전 분량의 두꺼운 책이 되었을 겁니다. 비슷한 질문과 답변을 정리하고 현장에서 미처 이야기하지 못한 답변도 추가해 책에 담았습니다. 사실 저는 모든 이야기와 현장의 분위기가 소중해서 그대로 빠짐없이 책에 담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한 아쉬움이 있습니다.
대화하는 시간 말고도 제가 준비해 간 식물을 함께 관찰하는 시간도 가졌는데 그런 부분은 책에 담기 어려워 그 또한 아쉬움이 있습니다. 식물의 신비한 형태를 알게 되어 기뻐하며 돌아간 상담자와 저만의 추억으로 간직해야겠네요. 상담소에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어린이 상담자도 여럿 있었습니다. 식물 이야기가 아니라서 빠졌으나 함께 온 부모님과 웃음이 터질 때가 많았습니다. 그 또한 좋은 추억입니다.
이 책에 앞서 출판한 『식물학자의 노트』는 과학책입니다. 저는 글을 쓸 때 ‘아무도 상처받지 않는 글쓰기’를 목표로 합니다. 그에 맞는 가장 좋은 글은 과학 논문이라고 생각했었죠. 실험과 이론으로 객관적 사실만을 담는 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유로 『식물학자의 노트』 원고를 처음 쓸 때도 과학적 내용만 쓰길 원해서 담당자분과 조금 옥신각신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각 식물학적 내용 끝에 교훈이나 생각해볼 점으로 마무리하길 권유하셨는데 저는 최대한 제 개인적인 생각이 들어가지 않길 바랐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는 그런 마무리가 좋았다고 하신 독자들이 많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저의 경험이나 생각을 담는 글쓰기는 부담스러웠습니다. 그전에 제가 쓰던 글은 과학보고서와 논문이 대부분이었고, 제가 글을 쓰는 작가가 아니라고 확실히 선을 긋고 있어서 더욱 그랬습니다. 그러나 이번 책에서는 그럴 수가 없었지요. 과학적 내용이 아닌 경우 상담자에게 할 수 있는 대답은 대부분 저의 생각과 경험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제가 인생의 고민에 대해 좋은 답변을 할 수 있는 나이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전문 작가가 아니어서 미흡한 표현으로 혹여나 누군가 상처를 받으면 어쩌나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이번 책을 쓰며 늘 신경을 쓰고 고민한 부분입니다. 독자분께서 따뜻하고 너그럽게 보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조금은 허무맹랑한 제 아이디어로 시작된 식물상담소가 이렇게 책으로 나오게 되어 감격스럽습니다. 오랜 시간 저의 고민과 고집을 다잡아 책의 모양을 갖추게 도와주신 봉선미 편집자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전시는 물론 식물상담소를 허락해주시고 무료로 멋진 장소를 제공해주신 아트스페이스 보안 최성우 대표님께도 감사드립니다. 보안책방 강영희 선생님, 다리를 놓아주신 박승연 큐레이터님을 포함한 보안 식구들도 고맙습니다. 이 책은 식물상담소를 찾아와주신 상담자가 없었다면 나올 수 없었던 책입니다. 책에 미처 담지 못한 이야기를 들려주신 상담자, 책을 준비하기 전 방문했던 상담자를 포함해 식물상담소에서 만난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6-12)
잡초의 역할에 대해 생각해본 적 있나요?
식물상담소에서 나눈 이야기를 책으로 내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처음 든 것은 나노 입자를 연구하는 어느 과학자를 만나면서였다. 그 과학자를 만난 날은 식물과 관련된 미술전시의 연계프로그램으로 식물상담소를 열었을 때였다. 누구나 와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식물상담소를 열고자 했지만 그래도 식물과 관련된 전시와 연계되어 있다 보니 식물을 좋아하거나 미술을 좋아하는 관람객이 대부분이었다.
상담소가 끝날 때쯤 머뭇거리며 한 사람이 들어왔다. 그 사람은 자신을 나노입자 연구자라 소개했다. 이 과학자는 그냥 그 동네에 사는 사람이었는데 아무것도 모르고 지나다가 불쑥 들어온 것이다. 그러고는 입자들의 연속, 불연속성에 관해 이야기했다.
우리가 인식하는 물질들이 연속적으로 생성되는 것 같지만, 한편으론 불연속적으로 불현듯 등장해서 놀랍다는 것이다. 몇 개의 원자가 모이다가 어느 순간 어떤 분자가 된다는 예를 들며 식물의 세포도 하나씩 모여 어느 순간 우리가 꽃잎, 수술, 암술 등으로 인식하게 되는데 그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것이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니, 그런 어려운 질문을 주시면 어쩌죠?’
생각의 폭을 넓혀주는 반짝반짝한 질문이 감사하고 흥미로워서 책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식물상담소를 찾아 온 아래의 상담자도 그런 고마운 분 중 하나다.
상담자: 선생님, 잡초에게도 역할이 있을까요?
선생님: 잡초에게 역할을 묻는 건 너무 슬픈 일 아닌가요?
상담자: 길거리를 가다 보면 바랭이 같은 잡초들이 많잖아요. 개들은 왜 거기서 필까요?
선생님: 우리가 지구에 태어났듯 잡초도 그냥 존재하는 거 아닐까요? 우리 인간이 호모 사피엔스 Homo sapteris 라는 한 종이듯 바랭이도 바랭이라는 한 종이에요. 바랭이랑 인간이랑 동급인 거죠. 그래서 '바랭이 너는 무슨 역할을 하니?' 이렇게 묻는 게 되레 이상한 일 아닐까요? 인간이 지구의 주인처럼 생각될 수도 있지만, 바랭이 입장에서는 "나도 동등한 한 종이고 지구의 주인이라 생각하는데, 그럼 인간 너의 역할은 뭐니?" 이렇게 물을 수도 있겠죠. 우리가 너무 인간 중심적으로 생각하는 건 아닐까요?
상담자: 숲에 있는 식물들은 이해가 돼요. 왜냐하면 저 공간이 그들만의 공간이니까요. 근데 잡초는 우리 생활 주변에서 골목 같은 곳에 막 자라나잖아요. 그걸 볼 때마다 저는 '이게 무슨 역할을 하는 건가? 거기에도 뭔가 생태계가 있지 않을까? 그 안에 뭔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잡초에게도 역할이 있을까요?'라는 질문을 처음 들었을 때는 여태껏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질문이라 당황했지만, 곧바로 너무 슬픈 질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담자는 잡초의 생태학적 위치나 도시에 미치는 영향 등을 물어보고자 던진 질문일 수도 있지만 내게는 '잡초에게도 역할이 있을까?'라는 질문 자체에 생각할 거리가 많아 흥미로웠다.
잡초는 식물분류학적 용어가 아니다. 잡초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면 가꾸지 않아도 저절로 나서 자라는 여러가지 풀을 뜻하며 때와 장소에 적절하지 않은 식물을 말한다. 농장, 정원, 공원과 같이 인간이 통제하는 환경에서 인간이 원하지 않는데 자라나 인간에게 해를 입히는 식물이다. 예를 들어 서양민들레 샐러드를 만들기 위해 서양민들레를 키우면 잡초가 아니지만, 복숭아 과수원에 심지도 않은 서양민들레가 침입해 살고 있다면 그때는 잡초다. 그래서 잡초라는 용어는 식물을 이용 가치에 따라 나눈 인간 중심적인 용어다.
잡초는 기회가 생기면 빠르고 광범위하게 번식하고 낯선 곳을 장악하거나 교란된 생태계에 성공적으로 적응한다. 한번 자리를 잡으면 근절하기 쉽지 않은 강한 생명력을 가진다. 이런 끈질긴 생존 능력과 해롭거나 하찮은 존재라는 부정적 의미 때문에 잡초는 경멸적 용어로도 사용된다. 그러나 미국의 시인이자 사상가 랠프 월도 에머슨 Ralph Waldo Emerson은 잡초를 ‘그 가치가 아직 발견되지 않은 식물들’이라고 했다. 실제 여러 농작물, 약용 식물, 정원 식물이 예전에는 잡초로 취급되었다.
지구에 수많은 식물이 인간보다 먼저 탄생했다. 도시가 있는 자리에는 식물이 먼저 있었을 것이다. 가끔 인간이 만든 크고 작은 구조물들로 가득 찬 도시를 걷다 보면 온통 쓰레기라는 생각을 한다. 집 안에 앉아 주변을 둘러봐도 그렇다. 지구에 자연적으로 탄생하지 않은 소재를 보면, 네모나고 동그란, 자연스럽지 않은 형태를 인식하면 가끔 미래가 암담하다. 언젠가 우리 인간이 모두 사라지면 자연과 융화되지 못하는 저 거대한 쓰레기들은 어떡하나 싶다. 그런 눈으로 보면 도시의 골목을 비집고 자리 잡은 잡초들이 정상일지도 모른다.
식물원 온실에서 일하고 있다는 어떤 상담자는 자신이 파괴자가 되는 것 같다고 얘기한 적이 있다. 관람객에게 온실이 단정하게 보이도록 잡초 제거를 수시로 하다 보면 그런 기분을 지울 수 없다고 했다. 식물원 온실은 식물이 잘 자라도록 영양분을 풍족하게 제공하고, 온도와 습도 등 생육 환경도 좋으니 덩달아 잡초도 아주 잘 자란다. 자연스레 다수의 식물 종이 자랄 수 있는 환경에서 일부 식물만 두고 잡초라 규정되는 많은 식물을 계속 죽이다 보니 파괴자가 된 것 같다는 것이다. 잡초라고 뭉뚱그려 부르지만 각각의 이름을 가진 다양한 종을 죽이게 되니 그런 마음이 드는 건 자연스러운 일일지 모른다.
"잡초의 역할이 있을까요?"라는 질문에 담긴 잡초의 개념과 잡초에게 역할을 묻는 태도까지도 인간 중심적이다. 식물상담소에서 이 질문을 접한 이후로 나는 사람들이 식물과 관련해 쉽게 간과하는 인간 중심적인 용어나 태도에 관심이 갔다. 전시나 강연에서도 확장된 생각을 이어나갔다.
최근 전시를 마친 2021 덕수궁 「상상의 정원」 그룹 전시에서 「면면상처: 식물학자의 시선」이라는 전시로 참여했을 때도 잡초에 관한 생각과 태도를 전시장 한편에 다뤄보고 싶었다. 문헌 조사를 하면서 덕수궁에 식재된 식물과 달리 잡초에 대해 조사된 적이 없는 점이 흥미로워서 반년 동안 덕수궁의 모든 식물을 조사했다. 그러면서 덕수궁 구석구석에 어떤 식물이 어떤 모습으로 있는지, 반년 동안 얼마만큼 자라는지 알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알게 된 덕수궁 식물들의 위치와 이름을 표시해 덕수궁 식물지도를 만들어 관람객들에게 나눠드리기도 했다.
전시장 한편에 덕수궁에서 채집한 잡초의 씨앗을 전시하면서 미국 작가인 데이비드 쿼먼 David Quammen이 쓴 「Planet of Weeds」라는 글의 한 구절을 인용했다. 데이비드 쿼먼은 지구상에서 지리적으로 널리 퍼져 있고, 번식률이 높으며, 자원을 확보하고 독점하는 데 능숙한, 멸종시키기 어려운 잡초 같은 존재가 인간이라고 이야기했다. 지구에서 다른 생물이 우리 인간을 바라본다면 아마도 경멸스러운 용어로 사용되는 잡초가 우리에게 딱 맞는 표현일 것이다.
종종 식물 그림의 역사에 대해 강의한다.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식물 종을 기록하기 위해 제작된 그림과 화가의 삶을 살펴보는 강의다. 시대별 식물 그림을 보다 보면 식물에 대한 인간의 인식 변화가 재미있다. 자주 언급하는 것이 맨드레이크, 혹은 만드라고라라 불리는 만드라고라 오피시나룸 Mandragora officinaruns 그림이다. 맨드레이크의 시대별 그림 변화를 보면 식물에 대한 인식이 인간 중심적 선입견에서 서서히 식물 그 자체를 과학적으로 이해하는 방향으로 옮겨가는 것을 알 수 있다.
맨드레이크는 그 식물이 가진 화학적 성분 때문인지 서양 전설에서 종교나 마법적인 용도로 자주 등장한다. 맨드레이크는 그 뿌리가 사람처럼 생겼는데 식물을 뽑으면 사람 모양의 뿌리가 소리를 질러 뽑은 사람을 죽인다는 전설로 유명하다.
재미있는 것은 그리스 시대의 과학자라고 볼 수 있는 의사가 그린 그림을 보면 맨드레이크의 뿌리가 사람 모양으로 그려져 있다. 그 이후에도 시대별로 꽤 오랫동안 사람 모양 뿌리를 가진 맨드레이크가 등장하고 1600년대의 식물학자가 그린 그림까지도 그 전설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맨드레이크를 향한 인간 중심적 선입견을 거두면 실제 맨드레이크는 그저 예쁜 연보라색 꽃이 피고 뿌리가 두툼한 평범한 식물일 뿐이다.
우리가 인간 중심적인 선입견 없이 과학의 눈으로 식물을 바라보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생물 분류학의 기초를 마련한 스웨덴 식물학자 칼폰 린네 Carl von Linné는 1700년대 사람이고, 진화론에 기여한 찰스 다윈 Charles Robert Darwin 은 1800년대 사람이다.
식물을 향한 그리 길지 않은 과학의 역사 속에 식물에 대해 굳어진 선입견은 여전히 많을 것이다. 인간이 식물을 온전히 이해하는 일이 가능할까? 어쩌면 우리가 식물이 되어보지 않는 이상 이해하기는 영영 힘들지도 모르겠다.(36-43쪽)
출처
이웃집 식물상담소_식물들이 당신에게 건네는 말과 위로
신혜우, 다산북스,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