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회의 뿌리를 찾아서] <79> 고씨, 제주고씨(濟州高氏)
김성회 한국문화센터 운영위원장 kshky@naver.com
세계일보 기사 입력 : 2014-09-23 21:11:12
제주고씨는 탐라국 개국설화에 나오는 고을라가 시조
고(高)씨는 우리나라 고유의 성씨로 두 계통이 있다. 대부분의 고씨는 탐라국 개국신화에 나오는 고을라(高乙那)를 시조로 삼고 있는 제주고씨 계통이고, 그 외에는 고구려 동명성왕을 시조로 하는 고구려 계통의 횡성고씨이다.
제주고씨 계통은 제주가 대종(大宗)이며 장흥(長興), 개성(開城), 연안(延安), 용담(龍潭), 담양(潭陽), 의령(宜寧), 고봉(高峰), 옥구(沃溝), 상당(上黨·청주), 김화(金化), 토산(兎山), 회령(會寧), 안동(安東) 등 10여 본이 문헌에 전한다. 하지만 요즈음엔 제주고씨로 합본하여 파로 이해하고 있다. 즉 장흥을 본관으로 하는 장흥고씨는 제주고씨 장흥백파로 명명하고 있는 것이다. 제주고씨가 이렇게 나뉜 것은 고려 태조 때 고말로가 입조하여 중앙정계에 진출하면서 여러 본관으로 흩어지게 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그 외 고씨로는 고구려 계통의 횡성고씨가 있다. 횡성고씨(橫城?氏)는 고구려의 마지막 왕인 보장왕(고장·高藏)의 아들인 고인승(高仁承)이다. 그는 고구려 부흥운동 때 왕에 추대된 고안승(高安勝)의 형이기도 하다. 횡성고씨는 바로 고인승의 12세손 민후(旻厚)가 강원도 횡성에 정착하면서 횡성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횡성고씨는 강원도 횡성을 비롯하여 원주, 제천 등 강원도 일원에 4만여 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외 중국 요령성에는 요양(遼陽)고씨가 살고 있는데, 이들은 고구려 장수왕의 자손들로 알려져 있다.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우리나라에 살고 있는 고씨의 전체 인구는 43만5839명으로 집계되었는데, 그중 제주고씨가 32만여 명, 장흥고씨가 6만여 명, 횡성고씨가 4만여 명 등이다.
■제주고씨는
제주고씨는 삼성혈(三性穴)에서 용출했다는 고을라를 시조로 한다. 탐라국 개국설화에 따르면, 삼성혈에서 양을라(良乙那)·고을라·부을라(夫乙那)의 세 신인이 출현하였고, 그중 고을라가 둘째로 기록하고 있다. 그 후 세 신인은 동쪽 바다에서 떠내려 온 세 미녀, 오곡 종자, 가축을 가지고 활을 쏘아 정착지를 나눈 후 각각 나라를 개국했다고 전하고 있다.
고려사는 “이들 삼신은 삼성혈에서 솟아나온 후 수렵을 하며 살았는데, 동쪽 바다에 자주색 흙으로 봉한 나무궤짝이 떠내려 오기에 건져서 열어보니, 벽랑국에서 왔다는 푸른 띠를 맨 사자가 3명의 공주와 함께 가축과 오곡을 가지고 나왔다. 이에 세 신인이 공주들과 혼인하고 활을 쏘아 영지(정착지)를 정한 후 오곡종자의 씨앗과 소, 말로 목축과 농사를 짓고 살았다”고 전하고 있다. 지금도 제주도에서는 이들 세 신인이 솟아났다는 삼성혈과 나무궤짝이 발견된 황루알 해안, 세 공주와 혼인한 혼인지(婚姻池), 활을 쏘아 영지를 나눴다는 삼사석(三射石) 등이 남아있다.
이렇게 세 신인이 인간세계를 이룬 지 900년이 지난 후 인심이 고씨에게 모아지니 고씨가 임금이 되어 탐라국을 세웠다고 한다. 그 후 15세손인 고후(高厚) 때 신라와 관계를 맺었고, 45대 자견왕(自堅王)까지 군주를 세습해오다가 자견왕 아들 고말로(高末老)가 고려에 입조하여 내륙으로 진출하면서 우리나라 고씨의 중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중시조 고말로에게는 고유(高維)·고강(高綱)·고소(高紹) 삼형제가 있었는데, 이들 모두가 등과(登科)함으로써 가문이 번창할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되었다. 특히 장자 고유는 고려 문종 때 우복야(右僕射)에 올라 고려에 벼슬한 최초의 탐라인이 되었다. 이후로 고려시대에 제주고씨에서는 9상서(尙書), 12한림(翰林)을 배출하였다.
제주고씨는 중시조 고말로의 증손인 고영신(高令臣) 때부터 20여 파로 나뉜다. 제주고씨 영곡공파(靈谷公派), 장흥고씨 장흥백파(長興伯派), 옥구고씨 문충공파(文忠公派), 개성고씨 양경공파(良敬公派), 청주고씨 상당군파(上黨君派), 제주고씨 성주공파(星主公派), 제주고씨 전서공파(典書公派), 횡성고씨 화전군파(花田君派) 등이 있다. 그중 영곡공파 후손이 가장 많아 오늘날 고씨의 5분의 1을 차지한다.
고씨는 조선시대에 총 77명의 문과급제자를 배출하였는데, 이 중 장흥이 29명, 제주가 28명, 개성이 8명이었다.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제주고씨는 10만0954가구 총 32만5951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제주고씨의 연혁과 인물
앞서도 말했듯이 제주고씨의 시조는 탐라국을 세운 고을라이다. 그 후 45대 자견왕까지 탐라국 군주를 세습해오다 46대인 고말로가 고려에 입조한 뒤 그의 아들 셋이 모두 등과를 하고 벼슬을 지내면서 내륙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그래서 제주고씨에서는 고말로를 중시조로 삼고, 제주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그 후 제주고씨는 장흥 등 10여개 본관으로 분파되었으나, 모두가 동원이므로 오늘날에는 제주고씨 단본으로 하여 각 파를 형성하고 있다. 고말로의 15세손 고인단(高仁旦)를 파조로 하는 성주공파(星州公派), 13세손 고신걸(高臣傑)을 파조로 하는 전서공파(典書公派), 15세손 고득종(高得宗)을 파조로 하는 영곡공파(靈谷公派), 11세손 고경(高慶)을 파조로 하는 문충공파(文忠公派), 10세손 고중연(高仲淵)을 파조로 하는 장흥백파(長興伯派), 11세손 고인비(高仁庇)를 파조로 하는 화전군파(花田君派), 13세손 고택(高澤)을 파조로 하는 문정공파(文禎公派), 4세손 고공익(高恭益)을 파조로 하는 상당군파(上黨君派), 4세손 고영신(高令臣)을 파조로 하는 양경공파(良敬公派) 등으로 나뉘었다.
제주고씨는 내륙에 진출한 뒤 고말로의 아들인 고유가 벼슬을 하면서 번창했다. 고유는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한 뒤 벼슬이 문하시중 우복야(종2품)에 이르렀고, 그의 아들 고조기(高兆基)는 예종 때 문과에 급제한 뒤 의종 때 시어사(侍御史)에 올라 이자겸과 결탁한 봉우를 탄핵하고, 의종 때는 정당문학과 판호부사와 중서시랑평장사(정2품)에 올랐다. 이로써 제주고씨는 내륙에서 명문가문으로 기반을 굳히게 되었다. 그리하여 고려 때 9상서·12한림을 배출하였고, 조선조에서도 명문가문의 기틀을 이어갔다.
조선조에 들어와 제주고씨를 빛낸 인물은 영곡공파조인 고득종이다. 그는 전서공파조인 고신걸의 손자이며, 상장군을 지낸 고봉지(高鳳智)의 아들이다. 태종 때 알성문과에 급제하고 예빈시판관을 거쳐 세종 때는 호조참의에 오르고 두 차례에서 걸쳐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또 일본에도 통신사로 다녀오는 등 외교에 공을 세우고, 한성부판윤을 역임하였다. 또 그의 슬하에서 태어난 네 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주변을 놀라게 했다.
조선 개국공신의 한사람인 고여(高呂)는 고성부원군에 봉해졌으며, 화전군파의 고형산(高荊山)은 연산군 때 해주목사와 병마절도사를 거쳐 중종반정 후에는 형조, 호조, 병조판서를 두루 역임한 뒤 우찬성에 올랐다.
제주고씨 문중에서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인물은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우고 순절한 충렬공 고경명(高敬命)과 아들들이다. 그는 중종 때 호랑이 그림을 잘 그려 이름을 떨친 고운(高雲)의 손자이며 명종 때 호조참의와 대사간을 역임한 고맹영(高孟英)의 아들이다.
고경명은 1558년 명종 때 성균관에 수석으로 급제하고, 그 해 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급제 후 성균관 전적, 호조좌랑, 공조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하지만 부친이 유배를 당하는 바람에 담양에 옮겨 살며 산수를 유람하면서 유서석록(遊瑞石祿)을 집필하였다. 그는 송순의 문하인으로 시·서·화에 능했으며 임억령, 김성원, 정철과 함께 ‘식영정 사선(四仙)’으로 불리기도 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늙은 몸을 이끌고 의병을 모집하여 금산전투에 참전했다가 아들 고인후(高因厚)와 함께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 후 그의 맏아들 고종후(高從厚)가 다시 의병을 일으켜 진주성 싸움에서 패하고 김천일(金千鎰), 최경회(崔慶會)와 함께 순국하였다. 세간에서는 김천일, 최경희, 고종후를 ‘진주 3장사’로 일컫는다.
그리하여 나라에서는 고경명을 숭정대부, 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예문관 대제학에 추증하고 충렬(忠烈)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광주에 고경명과 종후·인후 3부자를 기리는 포충사를 지어 충절을 기렸다. 고경명의 큰아들 고종후는 효열, 둘째 고인후에게는 의열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고경명의 두 딸인 노씨부인과 안씨부인도 정유재란 때 왜적을 꾸짖으며 칼을 안고 엎드려 순절하였으며, 손자인 고부립(高傅立)도 정묘호란 때 의병장이었다. 구한말 고석진은 면암 최익현의 수제자였으며,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고영근은 명성황후의 살해에 가담했던 훈련대 2대대장 우범선을 일본까지 추적하여 목을 베었다.
■제주고씨 근현대 인물
고유섭은 일제 시기에 미술사 분야를 연구하여 학문으로 끌어올린 학자이다. 고복수는 울산 출신 가수이며, 걸레스님 중광(본명 고창률)은 불교에 입문했으나 기행으로 승적을 박탈당했다. 하지만 불교화의 영역에서 파격적인 필치로 독보적인 영역을 구축하였다.
행정의 달인으로 유명한 고건 전 총리도 제주고씨이다. 그는 서울 종로에서 철학자이자 서울대 교수였던 고형곤씨 아들로 태어났다. 경기고, 서울대를 졸업하였다. 대학 때 총학생회장을 지냈으며, 행정고시에 합격한 후 최연소로 전남도지사에 임명되었다. 그 후 대통령 정무수석, 교통부, 농림수산부 장관, 내무부 장관, 국무총리를 역임한 후 국회의원과 서울특별시장에 당선되었다. 그는 박정희정부부터 이명박정부 때까지 7명의 대통령이 바뀌는 동안 도지사, 청와대 수석, 각부 장관, 총리, 국회의원, 민선 서울시장을 두루 역임했다. 특히 4번의 장관, 2번의 민선 서울시장, 2번의 총리를 역임하고 대통령 탄핵에 따른 대통령 권한 직무대행까지 맡았다. 그로 인해 사회에서는 그를 ‘행정의 달인’으로 평하기도 한다. 그 외에 민간 활동 영역에서는 명지대총장, 국제투명성기구 한국본부 회장 등을 맡기도 했으며, 대통령직속 사회통합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청조근정훈장, 홍조근정훈장, 세계청렴인상, 몽골의 북극성훈장을 받았다.
그 외 현대인물로는 정관계에서 고광만(문교부 장관), 고재필(보사부·무임소 장관), 고원증(법무부 장관), 고재일(건설부 장관), 고명승(대장, 3군사령관), 고진석(한미연합부사령관), 고재호(대법관) 등이 있다. 국회에서는 고재청(국회부의장), 고정훈, 고판남, 고귀남, 고병헌, 고흥길(이상 국회의원) 등이 있다. 또 학계에서는 고병익(서울대 총장), 고범서(숭전대 총장), 고형곤(전북대 총장) 등과 고병간(연세대), 고황경(서울여대), 고영복(서울대교수), 고승제(한양대 교수)씨 등이 있으며, 문화계에서는 고희동(화가), 고재욱(동아일보회장), 고병간(교육자·의사), 고한승(아동문학가), 고은(시인), 고상돈(산악인, 한국최초 에베레스트 등정 성공), 고정훈(천도교 교령), 고두심, 고현정(탤런트) 등도 제주고씨이다. 재계에서는 고준식(포항제철사장), 고광표(대창운수회장), 고판남(한국합판회장) 등도 제주고씨이며, 북한 김정은의 생모 고영희씨도 제주고씨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