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맛비에 관한 시모음 2)
장맛비 /권경우
숯등걸의 목마름
하늘에 젖은 구름 모으니
간절한 마음 담아
내일 날씨를 만든다.
밤새 뇌우 거느리고
큰 울음에 호수 이루니
농부는 망상의 늪에서
차라리 눈을 감는다.
사나흘로 성긴 누런 모들
아침살에 뭉긋거리고
그제야 정침하는 빗줄기
아무 일 없다는 듯 멀뚱거린다.
그러함에도 피로한 기색은 역력하구나!
하늘이 사(赦)하는 너라지만
다소곳이 다가오면
누가 뭐라니?
※ 뭉긋거리다 :[동사] 나아가는 시늉만 하면서 앉은 자리에서 머뭇거리다.
죽비로 남기는 장맛비 /봄내 최미봉
분홍색 위에
흐드러진 초록빛
아름다운 계절에
파란
하늘에 회색빛
밤새도록
덧칠한 검은색
그마저
터트려버린
골치덩어리
줄줄이 다는
갈길
뭉개 버린 사연
머잖아
희망찬 깨침은
덧칠 속에
사랑으로 남겠지
장맛비 단상 /未松 오보영
줄줄 쏟아져 내리는
빗줄기 보다
오늘은
내리는 비 그저
속수무책으로
철철 맞고만 서있는 나무가
유난히 눈에 띄고
애처로워 보이니..
아무래도
내 마음이
흠뻑 젖어있음이라
장맛비 /김정택
하늘이
울적하여
내리는 눈물인가
온종일
내리는 비
마음을 젹셔오니
잠자는
아린 사연을
하나 둘씩 씻어주네
처마 끝
낙수소리
세월을 두들기면
추억을
더듬으며
사색에 젖어 보니
운무 낀
앞산 마루에
한 시절이 머문다.
장맛비 /안태봉
눈감고 있어도
간혹 꽃맞이하듯
한바탕 눈물을 쏟으며 지난다
이제 서러운 땅마다
그날의 능소화 가지 끝에도
서녘 하늘빛처럼
잠시 앉았다
말없이 이내 꽃잎을 떨군다
지금이 어느 시대인가
말붙일 힘도 없는데
먹구름은 좀체 걷어지지 않고
청녀(淸女)의 가슴 깊숙이 잦아들었다
비 그칠 때를 기다렸지만
그 비로 채우는 구녕
다시 내 곁에서 잠이들고
다음날 새벽까지 멈출 기미가 없었다
유월 장맛비 소고 /정심 김덕성
유월이 떠난다
오랜 가뭄이 계속되고
초여름인데 한더위 못지않던 유월
유월은 떠나면서 미안해선가
장맛비가 내리면서
가뭄을 일소하려고 떠나려는 듯
폭우로 변하기도 하고
마구토해 내는 장맛비
빗방울 한 방울의 생명
폭우라 해도 목말라 헤매던 나날들
촉촉하게 적시는 그 빗방울
투명한 사랑의 눈물인가
사랑의 생수 받아먹는 꽃들
새 생명으로 사랑을 피어 내고
내 가슴에도 사랑이 피며
오는 장맛비 속에
칠월이 오는데...
장맛비 서정 /정심 김덕성
가뭄으로 대지는 타들고
초록빛도 누렇게 빛이 변색되던 날
사랑의 장맛비가 촉촉이 적신다
얼마나 고마운지
생명을 잃기 직전
투명한 맑은 눈물을 생명인양 부어
수목이 새 생명으로 피워나며
내 가슴에도 피워낸다
생명을 지닌 자연에게
목마름을 촉촉하게 적시는 빗줄기
투명한 사랑의 눈물인가보다
이제야 살았구나
안도의 한숨과 함께 새 생명의 부활
새로운 변화로 사랑의 꽃이 피워
장맛비로 되살아나는 고마움에
사랑의 눈물이 흐르고
6월 끝자락 장맛비 주룩주룩 /임영석
아주 긴 가뭄 속에 기다린
대지에 생명수 장맛비
6월 여름 장마
드디어 주룩주룩 내리나요
축 늘어진 잎 밭 장물
죽어가는 나목
그래도 야생의 산과 들녘은
멀쩡한데 논 밭 가뭄
타들어 가는데
시원한 빗줄기 장맛비 시작
충분 충족이면 됩니다
피해는 안돼요
한낮인데 밤처럼 어두컴컴
시원이 쏟아지는 낙수
장마 왔나 봐요!
가뭄 끝 6월 억수 장맛비 /임영석
몇 날 며칠 먹구름
비를 품은 하늘 가득히
비는 안이 오고 돌풍이 분다
강한 바람이 분다
6월 장마 억수 소낙비
세찬 비바람이 불어오나요
초록 잎새 빗방울
대지에 불어닥친 폭우
앞을 가리는 게릴라성 호우
가뭄 끝 6월 장마
서울 우리 동네 아직은
바람만 요란히 불고 있어요
대비 조심하세요
걱정부터 앞서는 장마
오늘은 얼마나 쏟아지려나
오란비* /기 혁
비가 오자 살이 젖는다
누군가의 손이 빠져나가고
다녀간 흔적들이 사라지는 중이다
되돌아갈 길을 잃으면
편협한 기억은 고립되거나
같은 곳을 맴돌곤 했다 어쩌다
만진 사랑의 반절이
생선 비늘처럼 미끌거릴 때
웅덩이와 진흙탕을 오가는
말굽 자국이 보였다
씨앗도 벌떼도 없는 핏줄 위로
푸른 멍이 무지개로 떠오르고
나는 뒷모습 뿐인 풍경을 쓸어본다
가장 아픈 피부는 흔적이 남지 않는 곳
이별이란 지름길은
얼마나 멀쩡한 몸부림인가
말굽마다 쿵쿵거리는 심장을 매단 채
말의 울음이 커튼처럼 펄럭인다
당신이 되돌아오는 계절
환하게 젖은 살결이 허물어지고 있다
* 장마
여름날의 장마비 /전영애
찌는듯한 대지 위
구슬땀 훔쳐내고
푸른 산 계곡물
타는 목 젖 시네
장대 같은 빗줄기
사정없이 퍼붓고
진흙탕 물 강을 이루니
헐벗은 개천에
쓰레기만 모여든다
농작물 손상
농민들의 근심걱정
활개치는
도시의 거리
여름휴가 어디로 떠나 볼까
오란비 /이진선
오란비 꿈틀거리는 오후
지난 일들 토해내듯이 쏟아져
그 무게에 짓눌려
활처럼 휜 나뭇가지 끝
매달려 신음하고 있는 꿈들
논바닥 갈라지듯 타들어가던
가슴 끌어안고
광활한 대지를 적신다
멈칫한 사이,
잿빛 새 한 마리
허공을 가로질러
경계를 넘어선 세상, 저 너머
한 줌 햇살 찾아가고
빗줄기는 창가에서 머뭇거릴 뿐,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순간,
신들린 무당처럼 흔들던 나뭇가지,
사이로 고요가 스며들고
몸 낮춘 바람
휘어진 나뭇가지 일으켜 세운다
*오란비: 장마의 옛말
장맛비 내리는 날에는 /박경림
하필, 장맛비가 내리는 날 산에 올랐어요 시작부터 꼿꼿한 대나무 숲길이 이어져 갈 길이 빡빡
하더니 하늘이 심통을 부렸어요 초봄이라 얼어붙은 흙길이 요리조리 미끌 거리며 길을 내 주지
않았어요 비는 흙길에서도 나동그라 졌구요 여기저기 엉겨 붙었어요 안 하던 짓을 하며 칠더덕
청승도 떨었어요 길이야 만들면 길이라지만 수 억 만년 다져진 길들도 젖어 들더라구요 비구름
은 산허리를 잡아먹고 천황봉 머리도 꿀컥 했나봐요 온데간데 없어요 마당바위 허리에 걸친 구
름도 제 앞을 분간 못해 우왕좌왕 했구요 옷깃을 차고 스며드는 안개꼬리를 피해 정자로 냅다 뛰
었지요 정자를 지키고 앉자 있는 도사를 만났어요 ‘구름 다리는 끝이 보이질 않아 수월히 건널
수 있을 겁니다’ 바람이 맞부딪쳐 올라오는 등성이에서 깎이고 휘청거리고 하는 사이 큰 바위 얼
굴은 산 속으로 숨고 없었어요
그 비 구름다리에 덜컥 멈춰 섰어요 이산저산 몰려다니다 자리 잡고 흔들거리며 발광을 하네요
우리는 구름다리 중앙에서 돌아 섰지요 절반도 못 가고 휘청 돌아 섰지요 카메라를 들이대며 깊
숙이 파고 들었지요 비에 젖은 산들이 삐쭉 거리며 올라 왔지요 구름 다리며 암자터 요동치는 천
황봉 속으로 젖은 우비를 풀어 헤치며 파고 들었지요 가슴팍에서 나는 비릿한 내음에 코를 벌렁
거리며 모여들건 다 모여들었어요 목줄기를 휘감으며 볼에다 비벼도 봤지요 허리츰에 냅다 안
겨도 보았지요 영하 몇 십도에 수억 년 얼었던 가슴이 흘러내리고 여몄던 옷자락을 서서히 풀어
헤쳤지요 비오는 날 산 속 깊숙이 파고들었지요
장맛비 /김경선
해마다 적자공연을 다시 기획하는 7월
구름이 떼로 몰려와 허공 곳곳에 공연 포스터를 붙이고 다닌다
관람료 없음 완전 공짜!
무대 뒤에서는 중국 남부내륙지방과 일본 남해상에 걸쳐 온
출연진의 공연 준비가 한창이다
밑창이 닳은 햇빛 구두를 벗어 던지고
새로 갈아 신은 구름구두 밑창에 탭을 박는다
협찬 받은 무대의상은 유행이 한참 지난 물방울무늬
그 중 새로 맞춘 번개무늬와 사선무늬 몇 벌 끼어있다
무대연출자가 없는 공연,
첫 출연인 애송이 빗발 하나가 리허설을 하고 있다
공연 직전, 관중석에는 우산을 쓴 연인 한 쌍
손님이 들지 않는다고 울먹이는 먹구름
금세 주르르 눈물을 쏟을 것 같다
큐!
드디어 햇빛커튼이 올라간다
무대막 사이 눅눅한 바람의 종아리가 보인다
일제히 무대로 뛰어오르는 굵은 빗발
타닥타닥 탁탁 타닥
저 요란한 탭댄서들
리듬에 맞춰 동그란 발자국이 사방으로 튄다
텅 빈 객석을 향해 온몸으로 춤을 추는 댄서들
차츰 기운이 빠진다
늘 똑같은 지루한 레퍼토리,
제주도 부근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이동하던 출연진이
합류한다는 기별이 왔다
잠시 소강 상태였던 무대가 화끈 달아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