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별곡 Ⅱ-108]사랑의 최고 표현은 “나는 너여!”
어느 분야든 ‘가방끈’하고는 아무 상관 없이 재야在野의 고수高手들은 쌔고쌨다. 그러니, 언제나 벼가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말처럼 겸손할 일이다. 최근, 또 한 분의 재야고수를 알게 됐다. 4년 연상 53년생, 도무지 언행言行에 있어 어떤 ‘막힘’도 없다. 불쑥불쑥 암 생각없이 하는 말같아도, 내공이 없으면 내지를 수 없는 말투성이이다. 감탄하지 않고 배길 수가 없는데, 또 한 분은 멀리 장성 축령산 정상에 편백나무집을 자기 맘대로 지어놓고 산신령처럼 유유자적悠悠自適한다. 부러움을 넘어 나같은 속물은 이해할 수 없을 일투성이이다. 그 고수(71)가 언젠가 “인문학은한마디로 짜-안헌 거이요. 앙그ㄹ러요?”라고 해 깜짝 놀랐다. 20년도 넘게 날마다 꼭두새벽에 짤막한 단상과 함께 사진 몇 장을 보내는데, 믿기 어려운 게 그분의 어록語錄 실천궁행實踐躬行이다.
아무튼, 어제 만난 ‘임실의 딸기왕’인 이 성님은 말 그대로 ‘하루라도 술 없이는 못산다’고 할 정도로 술을 즐기는 대주가大酒家이다. 어떻게 그렇게 해독능력이 좋은지는 알 수 없다. 얼마 전 지붕개량을 하다 떨어져 머리가 찢어져 엄청 피를 흘리는 등 죽을 고비를 넘기고 15바늘을 꼬맸다고 한다. 흉한 머리 수술자국을 보여주는데 가죽럭비공도 아니고 징글맞아 눈을 돌린 적이 있다. 그때도 그 선배는 만 이틀도 안지나 술을 마셨다니, 이게 결코 농담이 아니므로 문제의 심각성이 크다. 얘기를 하다보면 다국적 언어가 수시로 튀어나와 좌중을 당황시키는 데 ‘전문’이다. 불어, 중국어 등 초보도 안되겠으나, 하도 자연스레 읊어대는 바람에 긴가민가할 때가 많다. 오늘은 이랬다. SNS에서 전라도사투리 글을 읽다가 그야말로 빠앙 터져 폭소를 했다며 썰을 푸셨다. 전라도에서는 마눌님을 사랑한다는 말을 어떻게 하느냐는 질문에 한 답변이 걸작이다.
“긍개 사랑한다는 말을 넘사스러서 어떻게 헌다요? 그냥 ‘나는 너여!’라고만 허먼 그만이시. 근디 그 말이 먼 말인지 알랑가몰라?” 헐! "나는 너여!"라니? 세상에 어디 이런 말이 조선천지에 있을 것인가? ‘거시기’보다 몇 배 더 압권이다. 백미다. 아니, I = You, 내가 곧 너라니? 내가 너라고 하는데, 더이상 무슨 말씀이 필요할 것인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 '사랑'인 것을. 수년 전 배우 박신양이 ‘파리의 연인’인가 하는 드라마에서 “내 안에 너 있다”고 사랑 고백을 해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우리로서는 세련된 서울말같고 어쩐지 어색하고 흉내내기조차 어렵다. 하지만 “나는 너여”라는 말을 생각해 보자. 이보다 더 진솔하고 깊은 사랑고백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알라뷰I love you. 어쩌고 하며 입에 달고 다니는 사람치고 진짜 아내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을까? 서양넘들도 아니고 ‘사랑한다’는 말은 낯선 말이고 조금은 징그럽지 않은가. 그것을 꼭 사랑한다고 말한다는 게 어쩌면 천박하기까지 하다. 여기저기서 온통 사랑. 사랑, 사랑 타령들인데, 세상은 왜 온통 ‘돌싱’비까리이고 증오사건들이 날마다 왜 일어나는가? “나는 너여”를 소리내어 말해 보자. 너(당신) 밖에 없다는 것이 아닌가? 그 뉘앙스와 억양, 악센트가 피부에 와닿는가? 은근한 말의 여운餘韻이 오래 가는 듯하지 않은가. 아마도 전라도 밖의 다른 지역 사람들이 이 말을 한다면 ‘그 찰진 맛’이 잘 우러나지 않을 듯하다. 이 말이야말로 배우자에 대한 최상의 사랑고백에 다름 아닌 것을. 스킨십보다 몇 배 울림이 있는 ‘우리의 말’이 아닌가 말이다. 덧붙인 말은 더 재밌었다. “근디 ‘나는 바로 너(당신)’라는 내 맴(마음)을 알랑가몰라?” 알랑가몰라? 이 두어 마디 말에 어찌 빠앙 터지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을 기억해 나에게 고대로 들려주는 성님의 총기聰氣도 ‘장난’이 아니지만, 이 양반 번번이 나를 놀라게 하는 어록analects 남발형이다. 당신이 공자孔子도 아니면서 어떻게 편편이 받아적을 만한 어록을 남긴단 말인가? 그것은 어디까지나 당신의 지난 삶을 ‘1도’ 허투루 살지 않았다는 반증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당신의 절친이 뇌출혈로 쓰러져 금세 앞을 알 수 없이 중환자실에 있었다한다. 과다출혈한 가운데에서도 성님에게 전화해 “어차피 이렇게 된 것. 너하고 술 한잔 허고 죽으면 원이 없겠다”고 했다나. 그 말에 감읍한 성님, 병원에 찾아가 어떻게든 데리고 나와 술 한잔 사주려고 했다는 거다. 친구의 어려운 소원을 풀어주는 것이 진짜 친구일 것은 당근. 질색팔색하는 간호사 반대로 ‘병원탈출’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는데, 위급했던 절친은 곧 퇴원하여 현재도 ‘쌩쌩하게’ 살아 있다한다. 마지막 순간에 친구를 찾는 그의 우정友情에 할 말이 없었다는 것.
별나도 정말 유별한데, 나는 이를 두고 ‘인생도처유상수人生到處有上手’라고 생각한다. 미쳐도 단단히 미친, 말도 안되는 일이겠지만, 생사지경을 오가는 가운데에도 최소한 사나이의 뱃포가 이 정도는 돼야 능히 ‘상수’라 하지 않겠는가. 기회가 되는 대로 그 성님의 어록을 소개할 생각이나, 어록에는 동서고금을 왔다갔다하는 박식博識도 중요하지만, 기본적으로 언어에 대한 센스와 순발력은 필요충분조건이다. 순발력은 순간적인 두뇌 회전을 이를 듯, 그러니까 머리가 좋다는 말이다. 하지만 좌중을 압도할 만한 내공을 쌓기까지에는 성님만의 남모를 노력이 있었지 않을까. 하하.
끝으로, 축령산 고수의 어록을 하나 소개하자면 “음주飮酒는 띄어쓰기로 하고 끽차喫茶는 이어쓰기로”를 즐겨 쓴다. ‘띄어쓰기’는 술을 연짱(날마다) 마시지 말라는 경고이고, ‘이어쓰기’는 차는 날마다 마시며 마음수양을 하라는 뜻일 게다. 지당한 말씀이니 명심해야겠다. 조만간, 전남 장성의 고수와 전북 임실의 어록 고수를 만나게 하는 자리를 만들어볼까나. 어록의 진검승부, 경연장이 되지 않을까. 나도 이 글을 빌어 고백 한번 하자. 40년 동안 두 아들을 낳아 기르며 한 이불을 덮고 산 아내, 내 옆지기에게 말하겠다. "나는 너여!" 라고.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