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에드먼드 클라우니, IVF, 1998.
하나님의 뜻이 예배를 명한다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의 예배를 이끌고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예배를 명한다.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는 것에 불타는 열심을 가지고 계신다. 하나님은 다른 존재와 예배를 나누려 하지 않으신다.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출 34:14).
하나님은 예배 시에 우상을 사용하는 것을 금하신다(신 4:23-24). 이는 단지 우상 숭배자들이 다른 신들을 예배하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의 형태를 이해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그 땅에 정착할 때 이방 신들의 예배를 탐구하지 말라고 경고하신다.
또 그들의 신을 탐구하여 이르기를 이 민족들은 그 신들을 어떻게 위하였는고 나도 그와 같이 하겠다 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는 네가 그와같이 행하지 못할 것이라. 그들은 여호와의 꺼리시며 가중히 여기시는 일을 그 신들에게 행하여 심지어 그 자녀를 불살라 그 신들에게 드렸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이 모든 말을 너희는 지켜 행하고 그것에 가감하지 말지니라(신 12:30-32).
주님의 경고는 인간을 제물로 바치는 것과 같은 관행에 제한되지 않는다. 예배는 특정한 일이다. 이스라엘은 다른 어떤 방법도 아닌 하나님이 하신 방법대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족속으로부터 농사법이나 건축법을 배우는 것은 금지되지 않았다. 솔로몬은 하나님이 주신 설계도를 따라서 성전 건축을 위하여 두로에서 온 건축자들과 기능공들을 활용하였다. 주님은 특이한 집이나 항아리를 요구하지 않으셨다. 이스라엘의 찬송은 고대 근동의 음악에 맞추어 불릴 수 있었고 그 문화의 시 형식으로 작사될 수 있었다. 외적인 표지들, 즉 할례와 그들의 숄에 달린 파란 장식술이 이스라엘을 특별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표시하였지만 하나님의 법과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구별된 성격이 이스라엘을 열방의 빛으로 만들었다.
종교개혁가들은 성경적 예배를 회복하려고 노력하면서 오늘날 우리가 당면하는 것과 유사한 많은 질문에 부딪혔다. 예배에 대한 성경적 규범이 존재하는가? 세계의 다양한 문화들이 그 문화권의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고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예배의 형식을 만들 수 있는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지침은 새 언약의 예배에도 적용되는가? 신약 성경에는 레위기가 없으며 사해 공동체가 사용하던 것과 같은 「훈련 교범」(Manual of Discipline)도 없다.
그렇다면 신약 성경의 자유는 교회의 예배가 아무런 성경적 인정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의미인가? 분명히 우리는 하나님이 금하시는 것을 피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 외의 모든 것은 허용된다는 의미인가?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은 교리와 마찬가지로 예배에서도 교회는 하나님이 계시하신 뜻 이상으로 나아갈 수 없음을 천명한다. 어떤 설교자나 교회 혹은 교황이라도 그리스도인들에게 성경이 가르치지 않는 것을 믿으라고 요구하거나 하나님이 요구하시지 않는 것을 예배 시에 행하라고 요구할 수 없다.
하나님만이 양심의 주인이시다. 하나님은 어떤 일에서든지 그분의 말씀에 위배되거나 그 이외의 신앙이나 예배에 관한 것만 아니라면 교리와 인간의 명령으로부터 양심을 자유롭게 하셨다.
고백서의 다음 장에서 이 원리는 특별히 예배에 적용된다.
그러나 참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예배의 방법은 하나님 자신이 제정하시고 그분이 계시하신 뜻에 의하여 제한된다. 인간의 상상이나 생각 혹은 사단의 제안에 의하여 만들어진 어떤 시각적 표현, 혹은 성경이 규정하지 않은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도록 하신다.
하나님이 예배를 규제하신다는 이 특별한 원칙은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가 거부하거나 잊어버린 것이다. 이것을 거부하면서 제임스 패커는 그가 그렇게도 잘 이해하고 해명했던 청교도 성직자들과 헤어진다.
하나님을 향한 공예배에 포함되어야 할 모든 요소에 대해 지침 혹은 전례의 형태로 된 성경의 직접적인 보증이 요구된다는 생각은, 사실 청교도가 만들어 낸 것으로서 엘리자베스 시대의 조정 이후에 오랫동안 지속된 토론 과정에서 구체화되었다.
청교도 종교개혁은 예배의 각 요소를 위한 신성한 보증을 요구하였으며 어떤 때는 율법적인 방식으로 그 원리를 적용시켰지만, 그것은 청교도가 처음으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칼빈은 예배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첫째로, 명령에 의하지 않고는 어떤 것도 우리 마음대로 선택하지 않는다.” 그는 「기독교 강요」에서 뒤에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이 의존한 양심의 자유에 관한 논증을 전개한다. 칼빈은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을 뛰어넘어서 교회가 예배를 위한 규정을 만들 권세가 있다는 생각을 부인한다. 교회는 예배를 명할 권위가 있지만(고전 14:40), 하나님이 제공하신 것 이상의 새로운 요소를 도입해서는 안 된다. 칼빈은 골로새서 2:16-23에 호소하면서 사도 바울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그 장의 마지막에 가서 그는 스스로 만든 모든 종교, 즉 사람이 스스로 고안해 내었거나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은 모든 거짓 예배 그리고 하나님을 예배함에 관하여 그들이 함부로 퍼뜨린 모든 규례를 큰 확신을 가지고 정죄한다.
칼빈과 웨스트민스터의 목사들에게 문제가 된 것은 양심의 자유였다. 모든 공적인 행동은 규정을 요구하였고, 여럿이 드리는 공예배도 예외는 아니었다. 교회는 정당한 권위의 영역에서 예배를 명할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이 승인하시는 예배 활동을 명하는 것은 주님이 명하지 않으신 것을 첨가하는 것과는 다르다. 특히 공예배에 참석하는 것은 선택이 아니었기 때문에 종교개혁가들은 집합적인 경건의 실행은 각각의 예배자 편에서의 의식적인 참여를 요한다고 믿었다.
오늘날 예배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받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교회를 종교적 강령을 제시하는 곳으로 생각한다. 스트레스를 줄이는 방법이나 가족의 가치와 같은 문제에 대하여 강사가 전문적인 의견을 제시하는 것 혹은 일종의 야외극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다. 참여적인 예배란 영적인 재능의 과시 혹은 집단 치료로 간주되기도 한다. 슬프게도 교회는 예배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기쁨뿐만 아니라 두려움까지 상실함으로써 그런 오해의 한 원인이 되었다. 우리는 새 언약 아래에서도 옛 언약의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조건으로 예배를 이끄신다. 종교개혁가들은 하나님의 제단에서 취하지 않은 불로 분향함으로써 율법을 범한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를 심판하신 후에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교회에 자주 상기시켰다(레 10:1-7: 참고. 16:12).
나는 나를 가까이하는 자 중에 내가 거룩하다 함을 얻겠고 온 백성 앞에 내가 영광을 얻으리라(레 10:3).
혹은 히브리서 저자가 우리에게 말하는 것을 보라.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히 12:28-29).
출처
교회, 에드먼드 클라우니, IVF, 1998, 137-14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