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마골소극장은 1986년 부산 광복동에서 시작되었다. 극단 연희단거리패의 산실을 담당하던 곳인데 연희단거리패의 활동무대가 부산에서 서울로 옮겨졌을 때도 꾸준히 실험연극을 비롯해 새로운 시도를 거듭하면서 시민의 사랑을 받았다. 중앙동과 광안리, 다시 광복동을 거쳐서 거제리로 무대를 옮기면서도 내실있게 운영되다가 길고 길었던 셋방살이 30년만에 기장군에 6층건물로 세워졌다. 1층에는 이윤택이 기자시절 드나들었던 '양산박' 이름을 그대로 따온 주점이고, 2층에는 국제시장 근처에 있던 클레식 음악카페 '오아시스'의 향수가 묻어나게 꾸몄다. 3층부터는 소극장의 무대 및 사용장소이다.
2층 '오아시스'카페에는 가마골소극장과 연희단거리패를 대표하는 여배우이자 연출가였던 故 이윤주의 기념관이 함께 자리한다. 2015년 암에 걸려 투병생활에 마침표를 찍고 꽃같이 산화한 이윤주를 기리는 이윤주기념관에서는 그녀의 연극생활의 시작과 끝을 만날 수 있다. 가마골소극장의 대표로서 서울보다는 부산 연극무대를 지켜왔던 이윤주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신비한 몸짓과 목소리를 가졌던 연극쟁이였다.
<배우로 활동하던 이윤주>
1974년에 태어나 경남여고를 졸업하고 1995년 가마골 19기 워크숍을 통해 입단한 이윤주는 창단 10주년 공연인 <햄릿> 에서 무덤속으로 뛰어들어 흙을 뒤집어쓰고 죽어가는 광기어린 오필리어를 온몸으로 연기했다. 그후 <바보각시>,<어머니>,<도솔가>,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영화 <오구>,<서울시민 1919>,<코마치후덴> 등에서 맹활약을 했다. 2013년 병중에서도 <코마치후덴>의 나레이터로 출연해 대학로예술극장의 무대를 장악한 것이 그녀의 마지막 무대였다.
배우로 활동한지 3년이 지나면서 연출가로도 데뷔햇다. 첫 연출작인 브레히트의 <소시민의 결혼>은 1998년 작으로 난장과 해체로 꾸민 무대에서 부패한 현실에 개혁을 시도하는 이 연극을 통해 삶에 찌든 현대인에게 한편의 코믹극을 선사했다. 2001년 <서툰 사람들>은 가마골소극장 대표 래퍼토리로 지금까지도 꾸준히 공연을 이어가는 이윤주 최고의 화제작이다. 2006년 9월부터 암투병을 시작하면서도 <류의 노래>,를 만들고 <방바닥을 긁는 남자>로는 46회 동아연극상 작품상, 신인연출상, 무대기술상 등을 수상했다. 2014년 <안데르센>이라는 아동극을 끝으로 남해의 선산에 묻힌 그녀의 비명(碑名)이 <불멸의 영혼, 공기의 딸들과 함께 있다> 이다
<이민정의 가마골시대>
가마골소극장을 거쳐간 배우들은 누가 있을까. 가장 손꼽히는 오달수 배우가 있다. 지금은 천만 영화의 아이콘으로 성장했다.. 윤재문 이희준 곽도원 등이 이곳에서 배우의 길을 닦았다. 여자배우로는 전도연이 잠깐 머물렀고, 이 병헌의 부인이 된 이민정도 이곳에서 연기수업을 했다. 황석정도 여기 출신이다. 가마골소극장과 연희단거리패를 이야기하자면 뺄 수없는 사람이 이윤택이다. 연희단거리패의 창단맴버로 문화게릴라를 형성했던 무시무시한 연극인이다. 그들이 추구했던 연극은 말과 몸의 곡예적 운용, 무대공간의 기하학적 배당, 한국전통의 굿의 신명을 바탕으로 한 폭발적인 에너지의 운용 등이 독자적인 공연양식적 특성으로 두드러졌다. 그러나 이윤택이 몰고온 성추행 및 성폭행 미투는 연희단거리패의 몰락과 해체를 가져왔다. 그가 일군 밀양연극촌이 주춤하고 가마골소극장이 경영란에 몰리면서 배우들은 거리로 나서 투잡을 하면서 겨우 연명했다. 그들이 겪었던 각종 직업에서 얻고 들은 바를 각색한 것이 이번 우리가 감상한 <우리동네 홈쇼핑>이다. <우리동네 홈쇼핑>에서는 세개의 스토리가 있다. 골프선수를 꿈꾸었던 여성이 미역등 해산물 사장이 된 이야기, 호텔에서 일하던 조리사가 백년우동이라는 국수집을 연 이야기, 가수를 꿈꾸던 청년이 중국집 배달원이 되어 신명나게 살아가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연극을 본 후 '오아시스'에 들러 일광천에서 튀어오르는 숭어떼를 보면서 클레식 음악을 들으며 뜨거운 커피 한잔씩을 했으면 더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첫댓글 부산의 소극장 역사를 잘 알았습니다 좋은정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