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자격자가 받은 은혜(제임스 패커)
하나님의 은혜는 죄인들의 행위와는 반대로 실로 그들의 죄과를 무시하고 그들에게 값없이 보이시는 사랑이다. 그것은 가혹한 대접을 받기에 합당하고 가혹함 외에는 그 무엇도 기대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선하심을 보이는 것이다. 우리는 은혜에 대한 생각이 왜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별 의미를 지니지 못하는지를 살펴본 바 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그것이 전제하는 바 인간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왜 이 은혜가 어떤 사람에게는 그처럼 큰 의미가 있는가를 질문해 보아야 한다. 대답을 구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것은 앞에서 이미 말한 것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 일단 어떤 사람이, 앞에서 묘사한 것과 같은 상태에 있으며 그와 같은 필요를 지니고 있음을 확신하면, 신약의 은혜의 복음은 경이로움과 강한 기쁨의 충동을 느끼게 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심판자이신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의 구세주가 되시는지를 말해 주기 때문이다.
은혜와 구원은 원인과 결과로서 한데 결합되어 있다.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엡 2:5, 8).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딛 2:11). 복음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요 3:16) 에 대해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는지”(롬 5:8)에 대해, 예언서에 따라 어떻게 “샘이 열려”(슥 13:1) 죄와 더러운 것들을 씻었는지에 대해 그리고 살아 계신 그리스도께서 지금 복음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고 외치신 것에 대해 선포한다. 아이작 왓츠(Isaac Watts)가 그의 가장 칭송받는 노래는 아닐지라도 가장 복음적인 노래에서 말하듯이, 우리는 본래 완전히 잃어버려진 상태에 있었다.
장엄한 은혜의 목소리가
하나님의 거룩하신 말씀에서 들리도다.
오! 너 가련하게 사로잡힌 죄인이여, 오라.
그리고 주님을 신뢰하라.
내 영혼은 그 주권적인 부르심에 순종하며
이 구원으로 달려갑니다.
주여, 당신의 약속을 믿겠나이다.
오, 나의 믿음 없음을 도우소서.
당신의 피의 복된 샘으로
성육신하신 하나님, 내가 급히 달려갑니다.
내 영혼을 주홍빛 더러움에서,
그리고 저 깊이 물든 죄에서 씻기 위해.
죄 있고, 연약하며, 무력한 벌레 같은 나는
당신의 손에 쓰러집니다.
당신은 주님이시요 나의 의
나의 구세주이시며, 나의 모든 것이니이다.
왓츠의 말을 진지하게 고백할 수 있다면 그는 지치지 않고 계속해서 은혜의 찬양을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신약은 하나님의 은혜를 세 가지 특정한 맥락에서 설명한다. 그 각각의 맥락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영속적인 경이로움을 느끼게 한다.
1. 죄사함의 근원으로서의 은혜 복음은 죄 용서와 그에 따르는 우리 인격의 용납 곧 칭의를 중심으로 한다. 칭의는 유죄 판결을 받고 무시무시한 선고를 기다리는 죄수의 상태에서 엄청난 유업을 기다리는 상속자의 상태로 극적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칭의는 믿음으로 말미암는다. 칭의는 각 사람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신뢰하는 그 순간에 일어난다. 칭의는 우리에게는 값없이 주어지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위해 큰 대가를 치르셨다. 그 값은 하나님의 아들의 구속적 죽음이었기 때문이다. 왜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셨을까?”(롬 8:32)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다. 속죄를 가능하게 한 것은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결정이었다. 바울은 이를 분명히 말한다. 그는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하나님의 자비로운 결정의 결과로서) “값없이(아무것도 지불할 것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그것에 의해 각 개개인에게 효과를 미치도록 하는) 화목 제물죄를 속함으로써 신적 진노를 막는 분)로 세우셨으니”(롬 3:24-25 비교, 딛 3:7)라고 말한다.
다시 한번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사함을 받았다”(엡 1:7)고 말한다. 은혜 이전의 상황과 세상에 은혜가 나타난 이후의 지금 상황을 비교하면서, 이 모든 것을 묵상하는 그리스도인의 마음의 반웅은 프린스턴 신학교의 학장이었던 사무엘 데이비스(Samuel Davies)의 다음 글에 가장 잘 표현되어 있다.
위대하신 경이의 하나님이시여!
당신의 모든 길은 신적 속성들을 드러냅니다.
죄를 용서하시는 은혜의 무수한 행위는
당신의 다른 경이들을 초월하여 빛납니다.
당신과 같은 용서의 하나님 그 누구겠습니까?
그처럼 풍요롭고 값없는 은혜를 지닌 분 누구겠습니까?
놀라 어찌할 바를 모르며, 떨리는 기쁨으로
우리는 우리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입니다.
가장 깊이 물든 범죄에 대한 용서,
예수님의 피로 사신 용서를 받아들입니다.
당신과 같은 용서의 하나님 그 누구겠습니까?
다. 그처럼 풍요롭고 값없는 은혜를 지닌 분 누구겠습니까?
오. 이 기이하고 비길 데 없는 은혜,
이 존엄한 사랑의 기적이
감사의 찬양과 함께 넓은 이 땅을 채우소서.
지금 천상의 합창으로 울리듯이
누가 당신과 같은 용서의 하나님이겠습니까?
그처럼 풍요롭고 값없는 은혜를 지닌 분 누구겠습니까?
출처
하나님을 아는 지식
제임스 패커,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2008, 210-21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