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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W : 믿음 BIW : 놋뱀을 만들어 달라 AG : 성도
TS : 믿음이란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이다.
황당한 가족들
교통경찰들이 교통위반 운전자들에게 범칙금을 부과하기 위해서 거리에 많이 나와 있습니다.
어느 경찰관이 급하게 지나가려는 승용차를 세웠습니다.
이유는 정원 초과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경찰관이 승용차를 세워서 하는 말,
“사람을 너무 많이 태웠군요. 사고의 위험성이 있습니다. 신분증을 좀 보여 주시죠.”
그러자 할머니가 하시는 말씀.
“그래~ 내가 뭐라 카드노. 자동차 면허증은 꼭 따서 운전하라고 안 했냐?”
그러자 옆에 앉아 계시는 할아버지가 한 마디 거둡니다.
“그래 술 먹고는 운전하지 말랬지?”
그러자 아들이 한마디 합니다.
“내가 훔친 차로는 얼마 못 갈 줄 알았어.”
이어서 딸도 한 마디 거둡니다.
“운전은 과속을 하면 안 된다고 했잖어?”
이에 질새라 아내도 한마디 합니다.
“교통 위반은 왜 하노. 언제나 안전운전 하라고 했지?”
가족들이 한 마디씩 거두는 말을 들은 경찰관은
“아 ~ 그래요. 잠시 경찰서로 좀 가실까요?”라고 하면서 경찰서로 데리고 갔습니다.
경찰관은 정원초과로 차를 세웠는데. 그만 식구들의 그야말로 황당한 고백으로 정원초과, 무면허, 음주운전, 절도, 과속, 안전운전 의무위반으로 합계 6가지 죄명으로 처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황당하고 한심한 가족들입니다.
가만있었으면 기본점수라도 받았을 텐데 말입니다.
물론 이런 가정이야 없겠습니다만 우리 가정은 서로서로 허물을 덮어주고 감싸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일흔 번에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바로 끝없는 용서와 사랑입니다.
P4.
사람이란 존재는 언제 어디서나 감사보다는 원망, 불평이 먼저 튀어나오는 특성을 가지고 살아간다.
본래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사람을 만들었을 때에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만들었기 때문에 죄악의 모습보다는 거룩하고 성결한 모습이 더 많았겠지만,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선악과를 따먹는 죄악으로 인하여 인간세계에 죄가 들어오면서 모든 사람은 죄인으로 태어나서 죄인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죄성을 가지고 태어나서 죄인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에 어떤 일이건 좋지 않은 일이 생기면 먼저 원망하고 불평하는 일이 앞서게 되는 것이다.
성경에서 여러 사건들을 찾아보면, 원망이나 불평의 대상이 하나님이건, 사람이건, 누가 되었건 원망하거나 불평해서 좋은 결과가 나타나는 사건을 찾아볼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무마해서 그냥 지나가는 것처럼 보일 수는 있지만, 결코 원망이나 불평하여 좋은 결실, 좋은 소득을 얻어낸 경우를 성경에서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사람이란 존재는 자주 망각의 늪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
신 광야 가데스에서 마실 물이 없다고 원망하고 불평하면서 하나님과 다툼으로 므리바가 된 사건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데도, 이들은 얼마 가지 않아서 다시 원망의 늪에 빠지는 것이다.
아마도 신 광야 가데스에서 마실 물이 없다고 하면서 원망하고 불평한 사건 이후에도 수 많은 사건들이 발생했을 것이다.
그 모든 사건들을 기록할 수 없기 때문에 기록하지 않았을 뿐이지, 실상은 많은 사건이 발생하는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사건은 매일매일 발생한다.
대서특필할만한 사건들도 있겠지만, 기록할 필요성이 없는 크고 작은 사건들 속에 살아간다.
사람이란 존재는 과거에도, 그제도,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모레도, 차후에도 사건, 사건 속에 살아가는 것이다.
메스컴에 올라오는 사건만 사건이 아니라 사람이 살아가는 일상생활 자체가 ‘사건이고, 문제 덩어리’라는 것이다.
각종 사건과 문제 덩어리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사람은 과연 몇 사람이나 될까?
사람들이 살아가는 과정을 하나하나 세심하게 관찰해 보면 사람들이 살아가는 과정 자체가 문제덩어리요 사건투성이로 가득 차 있다.
그런데 잘 돌아보면 똑같은 실수, 똑같은 과오를 반복하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분명히 ‘그것은 잘못된 거야.’라고 깨우쳤는데도 다시 그 실수, 그 과오, 그 잘못을 그대로 반복하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잘못된 거야.’라고 깨우쳤다면 그 잘못을 반복하지 말아야 하는데, 역시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이란 존재는 망각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 망각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계속 원망하고 불평하는 사람의 어리석음이란 마치 물고기가 낚시꾼이 던져놓은 미끼를 뜯어 먹고는 다시 낚시코에 낀 미끼를 먹으려고 하다가 낚시코에 걸려서 빠져나가지 못하고 잡히는 꼴과 같다.
한번 원망하고 불평하는 늪에 빠져서 원망하고 불평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을 받았다면 더 이상 다시는 원망, 불평하지 말아야 하는데도, 여전히 조그마한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곧바로 다시 원망하고 불평하는 늪에 빠져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을 초래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말씀이 바로 그런 점을 가르쳐주고 있는 말씀이다.
오늘 본문에서 등장하는 사건은 민수기 21장 중간 부분에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연대기 순으로 보면 네게브 지역의 아랏이라는 가나안 족속의 왕과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든 이후에 발생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이 사건 이후에 다시 여러 지역을 돌아서 모압 변방까지 이동하여 아모리 족속의 시혼 왕과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는 것처럼 보일 수 있디.
그런데 어쩌면 이 본문의 사건은 20장에 추가하여 기록하고 21장으로 넘어가서 전투하는 사건을 기록해도 무방한 내용이다.
오늘의 본문은 가나안 족속과의 전투, 아모리 족속과의 전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건, 전혀 무관하게 발생한 사건이라는 것이다.
전혀 별개의 사건인데 21장 중간에 삽입하여 기록했기 때문에 혼란스러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떤 죄악을 범하고 있을까?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저지른 죄악은 전에는 저지르지 않았던 죄악일까? 아니면 전에도 저질렀던 죄악일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저지르는 죄악이 우리 신앙인들에게는 없는 모습일까?
아니면 우리 신앙인들도 똑같이 저지르는 죄악의 모습일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저지르는 죄악을 어떻게 처리하고 계시는 것일까?
D4.
① 불뱀을 보내서 징계하시는 하나님.
4절에서 “백성이 호르 산에서 출발하여 홍해 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려 하였다가 길로 말미암아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려면 요단강을 건너야 하는데, 요단강을 향하여 가는 길목에 빠른 길을 선택하여 행진하려고 하였지만, 에돔 왕의 반대, 거절로 인하여 다른 길로 우회하여 돌아서 가야 하는 형편이 되는 것이다.
왕의 큰길, 왕의 대로를 따라가면 아주 쉽고, 빠르게 갈 수 있었지만, 에돔 족속들이 완강하게 반대함에 따라서 어쩔 수 없이 다른 길을 찾아서 우회하여 가야 하는 것이다.
명절이나 공휴일에 어디를 가려고 하는데 너무나 많은 차량 행렬 때문에 도로가 주차장으로 착각할 만큼 힘들게 할 때가 있지 않나.
그러면 막 짜증이 나고 신경이 날카로워지는 경우가 많지 않나.
그래서 우회할 수 있는 도로가 없을까? 찾아보기도 한다.
겨우겨우 우회도로를 찾아서 가는데도 역시 차량으로 밀려서 제대로 갈 수가 없을 때 얼마나 짜증 나고 신경질이 나는 지...
지금 타고 다니는 승용차를 구입하고, 아내가 내장산 단풍구경을 가고 싶다고 한다.
아내가 시간을 낼 수 있는 날은 공휴일밖에 없었기 때문에, 공휴일에 내장산으로 갔는데, 얼마나 차량이 많은지 도로가 주차장이 되어 있었다.
그야말로 꼼짝달삭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런 방법, 저런 방법을 찾아도 안 되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차량을 도로에 세워놓고 내장산 입구까지만 걸어서 올라가서 겨우 비빔밥 사 먹고 내려왔던 기억이 있다.
다행히 내려올 때는 지나가는 차량을 불러 세워서 그 차의 도움으로 쉽게 내려오기는 했는데, 공휴일에는 아침 일찍 가든지, 아니면 아예 가지 말든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적이 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분명히 빠르고 쉽게 갈 수 있는 길이 있었는데, 그 길로 가지 못하고 우회하여 가야만 한다는 것이 더 멀고, 더 힘들어서 신경이 날카로워진 것이다.
어른들이야 참고 견딘다 해도 칭얼대는 어린 애기들과 가축들을 데리고 가야 하는 길이기 때문에 더욱더 힘들고 어려운 길이다.
심지어는 만삭인 임산부도 있다. 그러니 얼마나 힘들고 어려웠겠는가.
그래서 백성들의 마음이 상했다고 기록하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이 상하면 저절로 튀어나오는 현상이 원망과 불평이다.
백성들이 하나님과 지도자들을 향하여 원망하는 것이다.
백성들은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 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라고 원망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망하는 메뉴가 정해져 있다.
분명히 쉬운 길이 아니라 힘들고 먼 다른 길로 우회해야 하는 상태이기 때문에 백성들의 마음이 신경질이 나고 마음이 상한 것인데, 백성들이 원망하는 것을 보면 다시 애굽 이야기, 먹는 이야기, 마시는 물 이야기를 가지고 나오는 것이다.
물론 40년 동안 허허벌판, 낭떠러지 같은 모래사막, 날카로운 바위들로 가득찬 광야 생활하면서 똑같은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먹는 문제, 마시는 문제는 항상 생겨나는 문제 덩어리이다.
항상 있던 문제이고, 지금까지 잘 해결되어온 문제들이다.
지금까지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것은 지금까지 생겨난 잡다한 문제들이 잘 해결되어 왔다라는 반증이다.
그런데도 이들은 다시 그 문제를 가지고 원망과 불평의 자리로 나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들은 출애굽한 지 40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애굽의 망상, 애굽이라는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이제는 애굽에서 벗어날 만도 한데, 여전히 애굽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애굽에서 살 때 좋게 살았던 것도 아니고 종살이하면서 너무너무 힘들고 어려운 시련과 고통 속에 살았었는데, 그런 애굽에서의 삶이 좋았다고 하면서 그 애굽의 망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어쩌면 이런 현상이 인간의 근본적인 모습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6절에서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원망하고 불평하면서 애굽의 늪에 빠져버린 이스라엘 백성들의 진으로 불뱀을 보내서 물어 죽게 하시는 재앙을 내리신다.
불뱀은 일반적인 뱀과 무엇이 다를까?
일반적인 뱀으로 기록하는 뱀은 중동지역에 주로 서식하는 뱀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불뱀은 중동지역에서 흔히 나타나는 뱀이라기보다는 매우 강한 독성을 지닌 뱀이라 할 수 있다.
불뱀을 영어성경 KJV나 ESV에서는 “fiery serpents”라고 번역하여 “불같은 뱀들, 성미가 사나운 뱀들”이라고 번역하였다.
NIV에서는 “venomous snakes”라고 번역하여 “독이 있는 뱀들, 맹독성이 강한 뱀들”이라고 번역하였다.
하나님은 원망하고 불평하며 애굽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백성들을 징계하시기 위하여 성경에서 주로 사용하는 뱀과는 좀 다르게 매우 강한 독성을 지닌 뱀을 보내서 그 뱀에 물리게 되면 죽도록 하는 재앙을 내리는 것이다.
하나님은 맹독성이 강한 코브라나 독사, 살모사와 같은 뱀들을 보내서 원망하고 불평하는 백성들을 물어서 죽도록 하는 재앙을 내리는 것이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불뱀을 보내서 원망하고 불평하는 백성들을 징계하시는 것일까?
하나님은 애굽에 재앙을 내리기 전에 모세와 아론을 바로에게 보내면서 지팡이로 뱀을 만들어서 애굽의 뱀들을 징계하는 이적을 베풀어주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위대함을 보여주려고 했던 적이 있다.
지금 백성들은 여전히 애굽의 망상과 환상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허우적거리는 상황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특하면 애굽을 그리워하고 애굽의 망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애굽에서 처음으로 보여주었던 뱀의 이적, 그것도 가장 강력한 독을 가진 불뱀들을 보내서 하나님의 징계가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 일인지를 깨우쳐 주시기 위하여 불뱀을 보내지 않았을까 싶다.
② 놋으로 불뱀을 만들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 원망하고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강력한 독을 지닌 불뱀을 보내서 물어 죽게 되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에게 찾아와서 7절에서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라고 간청한다.
백성들의 간청을 들은 모세는 백성들을 위하여 간곡한 마음으로 기도한다.
불뱀에 물려서 신음소리 한 번 제대로 질러보지 못하고 죽어가는 백성들을 바라보면서 모세의 마음이 얼마나 저리고 아팠을까?
여기저기서 고통으로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온다.
어린아이에서부터 어르신들까지 불뱀에 물린 사람은 너무 고통스러워 울부짖고, 가족들이 불뱀에 물려서 고통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울부짖는 것이다.
모세는 이런 모습을 차마 쳐다볼 수가 없어서 고통당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으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모세의 마음은 갈기갈기 찢어지고 고통스럽다.
이에 모세는 백성들을 살려달라고 너무나 간절한 마음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향하여 중보기도 하는 것이다.
모세의 간곡한 기도를 들으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라고 말씀하신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놋으로 불뱀을 만들었다고 한다.
9절에서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러면 놋뱀은 누가 만들었을까?
모세가 직접 놋뱀을 만들었을까? 아니면 누가 만들었을까?
모세가 직접 놋뱀을 만들었다기보다는 백성들 중에 놋으로 무언가를 잘 만들어내는 기능공들, 장인(匠人)들이 모세가 시키는 대로 만들었을 가능성이 많다.
그러면 불뱀을 만드는 시간은 얼마나 걸렸을까?
놋으로 불뱀을 만들라고 하신다고 무엇이든 뚝딱뚝딱 만들어내는 요술 방망이처럼 금방 뚝딱뚝딱하여 놋뱀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재료인 놋을 구해야 하고, 구해온 놋을 큰 용광로에 넣고 뜨거운 불로 녹여야 하고, 뱀의 기본 틀을 만들어야 하고, 물에 넣으면서 식혀주어야 하고, 구체적인 불뱀의 모습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쉽게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놋뱀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 많은 노력과 시간이 소요하게 마련이다.
이렇게 놋뱀을 만드는 시간에도 여전히 백성들은 불뱀에 물리면서 독에 의해서 죽어가며 울부짖고 고통당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불뱀은 한 마리가 아니라, 수십만 마리, 수백만 마리가 200만 명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진을 찾아 들어가서 닥치는 대로 물어 죽게 하는 것이다.
완전히 놋뱀을 만들어 쳐다보기 전에는 백성들은 고통 속에 살다가 죽어가는 것이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큰 피해를 당하기도 하고, 때로는 생명을 잃기도 하는 것이다.
무언가를 한다고 해서 금방 해결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앞으로 해결될 수 있는 길은 열려 있지만, 아직은 해결의 길이 열려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기에 살아남기 위해서 불뱀을 피해 도망 다니거나 불뱀과 맞장을 뜨면서 싸워야 하는 것이다.
③ 놋뱀을 쳐다보는 이에게 긍휼과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하나님.
드디어 장인들이 각고의 노력 끝에 놋뱀을 만들고 커다란 장대에 놋뱀을 높이 매달았을 때, 그 놋뱀을 보는 사람들은 다 살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9절에서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라고 소개하고 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불뱀에 물려서 고통당하면서 신음하던 백성들이 높이 들린 놋뱀을 보는 순간 곧바로 생기있게 일어나서 당당하게 걸어 다니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펄쩍펄쩍 뛰어다니기도 하는 것이다.
이런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이라는 것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죽을 것 같은 울상, 울분, 통분에 치를 떨었는데, 이제 언제 그랬었냐 하는 모습으로 당당하게 일어서서 활기차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원망과 불평의 죄악에 대하여 징계하시는 분이지만, 이제 그 징계와 재앙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도 제시해 주고 계신다.
하나님은 채찍질만 하시지 않고 맛난 당근도 주시는 분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불뱀과 같은 징계, 불뱀과 같은 재앙의 현상들을 주셨다고 여겨진다면, 하나님께서는 이제 어떤 해결의 길을 열어주실까?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징계하시고 재앙을 내리기만 하시는 완악하신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징계와 재앙을 이겨내고 해결해 나갈 수 있는 길도 열어주시는 은혜와 긍휼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언제나 동행하시면서 치료와 회복의 길을 열어주시고 인도해 가시는 하나님이시다.
B4 & L4.
하나님은 원망하고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징계하시기 위하여 불뱀을 보내어 물어 죽게 하신다.
그런가 하면 다시 놋뱀을 만들라고 하시고,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높이 매달고, 그 놋뱀을 쳐다보는 사람들은 다 살려 주신다.
그러면 우리들에게 있어서 불뱀은 어떤 것이고, 놋뱀은 어떤 것들일까?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불뱀은 지옥행이다.
죄로 말미암아 필연적으로 가야만 하는 곳은 지옥이다.
모든 죄인은 심판받아서 지옥으로 들어가서 영원한 형벌, 영멸 가운데 살아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불뱀에 물려 죽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놋뱀을 만들어 세워주신 것처럼, 하나님은 영원한 형벌을 받아서 영멸 가운데 살아야 할 죄인들을 살리기 위하여 골고다 언덕에 십자가를 세워주시고 그 십자가에 예수그리스도께서 못 박혀 죽게 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예수님께서 바로 죄인들, 바로 죄인인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음을 믿음으로 영접하고 고백하면 살아나서 영생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시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생겨난 것이 있다.
불뱀에 물려 독으로 죽어야 할 사람들이 놋뱀을 쳐다봄으로써 살아났기 때문에 이 놋뱀에 무슨 신비로운 능력이 있는 것처럼 착각하는 어리석은 인간들이 생겨나는 것이다.
놋뱀에게 무슨 신비로운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놋뱀을 만들라고 말씀하신 하나님, 그 놋뱀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이들에게 치유와 회복의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중요한 것이다.
그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놋뱀만을 바라보는 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놋뱀을 하나의 위대한 치료의 신이나 되는 것처럼 여기는 이들이 생겨난 것이다.
언제까지 그랬는가 하면 남 유다의 히스기야 왕 때까지 그런 현상들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열왕기하18:4에 보면 “그가 여러 산당들을 제거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는 바로 히스기야 왕을 일컫는다.
히스기야가 유다의 왕이 될 때까지 놋뱀은 존재하고 있었고, 유다 백성들은 놋뱀을 신성시하면서 분향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히스기야가 유다의 왕이 되면서 여러 가지 우상들을 파괴하는 과정에서 이 놋뱀도 파괴하면서 ‘느후스단(Nehushtan)’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느후스단은 놋조각이라는 말이다.
히스기야 왕은 이 놋조각에 불과한 놋뱀을 산산조각으로 깨뜨려버렸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가 임하지 않는 놋뱀은 놋조각에 불과한 것이다.
놋을 녹여서 만든 놋조각에 불과한 것인데, 그 놋조각이 무슨 대단한 능력이라도 되는 것처럼 놋조각, 놋뱀을 신처럼 섬겼다는 것이다.
그래서 히스기야 왕이 잡동산이 우상들을 파괴하면서 놋뱀까지도 파괴시켰다고 기록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 신앙인들에게는 무엇이 있을까?
바로 주님께서 짊어지시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바로 그 십자가이다.
우리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너무너무 너무너무 너무너무 중요한 것이다.
신앙인들에게 십자가를 빼앗아 가버리면 그야말로 시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신앙인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는 너무너무 중요한 것이다.
우리 신앙인들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바라봄으로 구원을 받는다.
그런데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놋뱀이 우상이 되었던 것처럼, 십자가도 하나의 우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믿음의 주님이 되시는 예수그리스도가 없는 십자가 자체에 어떤 신비로운 능력이 있는 것처럼 여기면 십자가가 부적이 되는 것이고, 십자가 자체가 숭배하는 우상이 되는 것이다.
만에 하나라도 십자가를 놋뱀처럼 우상화가 되었다면, 그 십자가는 마땅히 철저해야 하는 것이다.
놋뱀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놋뱀을 사용하여 치유와 회복의 길을 열어주시는 하나님의 권능이 중요한 것처럼, 십자가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 우리의 주님이 중요한 것이다.
신앙인들은 십자가 자체를 우상으로 만드는 어리석음을 저지르지 말아야 한다.
집에 부적을 부치는 것처럼 십자가를 매달아 놓으면 오던 귀신도 그 십자가를 보고 도망쳐서 들어오지 못한다고 여긴다면 안 되는 것이다.
우리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우리 집에 항상 임마누엘로 내주하시도록 믿음으로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불뱀을 보내서 물어 죽도록 하는 재앙보다 훨씬 더 강렬한 재앙을 보낼 수 있는 분이다.
바로 영원한 심판의 처소인 지옥이라는 형벌을 내릴 수 있는 분이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은 재앙을 내리기도 하시는 분이지만, 다시 싸매어 긍휼과 자비와 은혜와 구원의 길도 활짝 열어주시는 분이다.
호세아서 6:1에서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찢으시기도 하시지만, 싸매어 치료도 해 주시는 분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하나님은 불뱀을 보내서 찢으시고 죽이기도 하시는 분이지만, 놋뱀을 만들어 세우면서 긍휼과 자비와 은혜와 구원의 길을 열어주시고 싸매어 주시는 분이다.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은 우리의 영혼을 살리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면서 구원과 회복의 길을 열어주시는 분이다.
우리 신앙인들은 언제나 징계와 재앙을 이기고 구원과 회복과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바라보며 믿음으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당당하게 살아가야 한다. 아멘
하나님 말씀 따라 살아나기 http://cafe.daum.net/GRACEOFJESUS
♥프레임 설교를 하시려는 분들에게 책을 소개합니다.♥
이 책은 출판되어진 책이 아니라 제본된 책입니다.
① 성경의 여인들 이야기 3권(구약1권, 2권, 신약1권)
② 사무엘 & 왕들의 이야기
③ 창세기 이야기 1권, 2권
④ 출애굽기 이야기 1권, 2권
⑤ 레위기 이야기
모두 9권입니다.
혹시 관심이 있으신 분은 010-5797-9094(한상원목사)로 연락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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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귀한 은혜로운 말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엘샤다이의 하나님께서 언제나 동행해 주시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