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5 (토) 학과대표 연석회의;박물관 회의실,과대표만 표결권주는 것 가결
추진위원회에 대한 의구심
3.21(금) 학생회부활추진위원회(아래에선 동위원회로 지칭)와 동 실행위원회 발족에 즈음한 선언문작성.동위원회에서 식목일행사 추진위원장 담당
3.22 공대 여러학과의 과대를 맡고 있는 고교동문들과 선관위로부터 총학생회
출마권유받다. 고심 끝에 거절하다.
3.24 집체훈련간(3학년) 학욷,f 위해 동위원회에서 문무대 방문
3.26-3.26 식목행사계획과 패넌트 준비,협조공문을 교내 구성원과 학과에 전달
*3.28 불교창립 서클등록 시작(철학과 소천운 담당) .조요한 학장님 면담서 허락받음.
이 당시 공대쪽에서 불교학생회 준비를 하던 전명철(기계) 법우를 우연히 만나 힘을
모으자고 약속함. 그전에 불교학생회가 생겼지만 탄압으로 사라졌단 소문무성.
동위원회 위원장(경영과)이 총학생회장 출마 선언--사퇴권고
식목행사 페넌트 500매와 광고문 3천부 각써클에 배포
식목행사 목표액 160만원 모금활동개시
3.31(월) 비. 제1회 철학과 총회 1202 강의실 50명;총학생회장과 문리대학생회장 후보 추천.기계과 전명철에게 협조서한 보냄(인편으로)
# 4.1(화) 임우형(경영과)과 전명철(기계과)에게 얽힌 추진위 안건에 대해 조치를 취하다.
공대,법경대에서 서명받다. 철학과 3,4학년이 선거에 대한 환담.
4.2 교수들,행정부서,학과로부터 식목기금 거둠. 페넌트 판매 및 기증 180부
SALK 대표 김종규 (마지막 입시본 경기고출신.주니어 전수영국가대표, 사사과) 첫만남,남궁용(영문과) 격려
4.3(목) 총학생회 선거 유세 시작. 총학생회장 후보 김영주(철학과) 지원단 동원
4.5 신촌 박수원에서(전명철 외 추진위원들과 동행) 나무구입(내가 구상한 꽃사과,벗꽃,고부시,오동,등나무 등 꽃나무 중심으로 구입하다. 당시 교내엔 주로 침엽수만 있었다. 식목 장소까지 교내 원예 담당 기능직에게 요청하다.
4.6(일) SALK 서클실 방문; 오후 아르바이트.홍대 전기과 황호찬(고교후배) 전화
4.7(월) 식목행사 감사문,영수증,식목세부 행사내용 인쇄
* 점심 때 <불교학생회> 신청회원이 구름처럼 몰려들다. 동국대에서 기독교학생회가 발족
소식.
4.8 식목행사 오후1시 교내교회 앞마당;직원,교수,과대표들,학생들 모임. 철학과 4학년대표
박지근이가 교수들에게 인민재판. 일침을 가하다. 선거유세가 한창. 학도호국단 출신 후보들 퇴진 요구 성명에 소란과 선관위의 파국 연출. 참모들과 선관위에 수습책 논의 결정.
수습과정서 경성동문에 문제가 됨. 항의방문차 온 5명과 화해. 편파적 동아일보 사절
4.9 사태 해명서와 방송국에 해명공문 발송. 식목행사 사후처리 및 헌금자에 대한 페넌트 증정.(70매)
* 불교학생회 대표로 만돌린 오케스트라 3돐맞이 행사에 초청받음.오후 아르바이트
4.10 만돌린오케스트라에 불교학생회의 감사 선물(꽃병에 불교학생회 리본달아)전달
*불교학생회 신입회원 모집 이틀만에 50여명 가입.
식목행사 모금과 행사준비를 위해 20여일간 저녁 7시에 귀가한 나날.
힘겨움을 극복하고 알찬 성취감을 맛보다.
종가의 산 사라짐
*4.11 오후 5시30분 친교실에서 <불교학생회 발기총회> 28명 참석
회원 모집 사흘만에 70여명이 입회.
총학선거 뒤 학생회부활위원회 위원들 위로 회식(학생처,위원들 ;진고개 모임)
4.14(월) 학생회대의원회의 (박물관회의실서 개최,본관회의실로 옮겨 진행)
여기서 4명(나를 포함)이 추천받다. 학생회추진위 위원장이었던 정일(경영과)가
선출되었다. 난 차점자로서 부의장을 제의 받았으나 거절.
*점심때 불교학생회실에서 써클장회의가 열림. 때마침 전명철 등장해 인계하고 써클연합회장에 전명철 법우를 천거해 당선됨.학생활동위원회 발족일임.
4.15 학교예배당에서 오후4:30(2시간) 함석헌 초청 강연이 있었다.
*4.16(수)오전 불교학생회 발족 취지문 교내배포.
오후1시경 백운암에서 이서옹 종정과 불교학생회원들(전명철,김영선 등) 첫만남.
총무스님으로부터 신축하는 회의실에서 법회 가질 수 있도록 허락받고 지원 약속.
불교학생회 창립총회;계단강의실 오후5시40분 ,대학불교연합회 간사,서울지부장,
개교이래 최초로(학생처장 승낙하에) 동국대생 14명과 스님(一悟; 2004년 현재 월명암 사성선원장 추측),숭불회원80여명 참석,나의 사회로 창립총회가 시작됨,저녁 7시 까지 다괴회 겸 대담.밤 8시반까지 신복반점서 회식.
미션계학교에선 ‘74년 연대 불교학생회 이후 마지막으로 우리가 발족.
안동환(선관위원장)이 면담을 요청해 신임총학생회장과 참모들과,대의원들,종교부장과 불교학생회에 대한 의견교환.
4.18(금) 문리대 학생회 집회;채플실 오후1시 문리대 학회장 대표로 성명서 낭독.
총장퇴진 농성 70여명. 횃불제.밤 지세우다. 이때 숭불회원인 박범규(기계2)와 대화.
4.19 사일구 추모식. 광신도들이 숭불회와 격론 벌인날. 농성장에서 여러 사람들이 숭불회지지 표시로 찬불가를 함께 배웠다. 철야농성은 계속되다. 대전분교의 학생들은 분리를 연호하며 시위를 연일 벌이고 있다.
4.21(월) 민주의 벽엔 대자보와 급보가 많이 붙었다. 전주예수병원을 모체로 의과대학이 생긴단다.(*전주예수병원측이 전체이사의 인원중 반을 요구하여 무산),문리대 철거,AID차관,독일기독재단기금,축구부신설,교무위원 경질,채플개선 등.
오후 3시 비상학생총회에서 고범서 총장의 사퇴가 완전 결의되다.
5.3(토) 비. 문리대 총회 학교사태 처리방안 토의. 총단에 보내는 호소문 3천매 여러명 작업
5.7(수) 학내문제와 국가의 비상시국에 대한 성토. 투옥된 학생회장 석방 요구.노량진경찰서에서 풀려난 총학생회장(윤여연,법)이 오후3시20분 나타나 원형잔디에 모여있던 학생들의
우뢰와 같은 박수. 교문을 나서는 시위대에 경찰의 페퍼포그 연막세례.
구호가 뒤 섞이고 과격한 행동,원색적 성명서가 쏟아져 나오는 교내 시위현장.
5.8~5.9 시국사태에 대한 농성과 시위 계속
*5.10(토) 친교실서 20여명의 임원 들과 회칙과 사월초파일 행사에 대해 환담.
*5.11 진행자로부터 불교학생회 창립법회시 떡을 하기로 했다는 연락을 받고 쌀을 준비.
*5.12(월) 철학과 총회;시국 토론. 강형철(현 문예진흥원 사무국장),김승국(전 한겨레기자),
박해전(현 한겨레기자),남근우(현 민주당 사무처) 등 난상토론.
문리대학장(조요한 교수),문리대 대위원 시국 토론.
총단 농성 풀다.
5.15 서울역 앞 광장. 10만 시위 대학생 물결. 격렬한 시위,최루탄의 난사.보도블럭 조각 투척.고층에서 던지는 창,불타는 데모진압용 차. 페퍼포그의 매연에 눈을 뜰 수 없다.
5.16(금)맑음. 오전 9:30 영등포역 시계탑 집결. 이태영(현 요가학회부회장) 결혼식에 가려고 20명 정도의 철학과생과 김이준 교수와 천안행. 저녁 6시 피로연 끝남. 밤8시10분 서울 도착. 이때 학교로 간 김영주는 군에게 체포되어 노량진서에 수감됨. 내가 같이 갔더라면?!
5.20(화) 집으로 하루 수십통의 전화벨이 울린다.
박호철(철학과,현 국민은 차장)으로부터 피신하라는 연락받음
5.22(목) 광주사태 진행중
5.25(일) 비, 청주 윤택진(철학과;현 호텔매니저) 친구집으로 감. 당일 가가호호 수상한자
신고하라고 통장들이 돌아다닌다고.
5.26(월) 속리산으로 떠남. 속리산 입구에서 전경이 버스를 세워 놓고 철이른 배낭 주인
나오라고, 배낭 뒤지니 휴지로 잘라간 일간지에 김대중 사진있으니 의심의 눈초리 보이는데
어떤 경찰이 내 동생도 대학생인데 그냥 보내라고 하며 과일칼 압수하며 갈 때 찾아가라고 친절히 안내까지. 그바람에 위기 모면. 오월의 야영장 춥데.오후 6시경 야영장에 온 청년들이 텐트를 치지몬해 쩔쩔매는 것 도와줌. 너무 춥고 외로워 달빛 보며 우네.신문지를 옷속에 넣고 추위를 삭이는데 도와준 그들이 초대해서 술과 담배 대접받고 기타반주에 맞추어 함께 구슬픈 노래.
5.28(수) 포기하고 밤에 귀가함.
5.30(금) 안병욱 교수의 삼성교 자택을 방문.홀로 그분의 강의를? 듣다. 수필집 선물로 받고.
6월 휴교(공백기)
#7.2(수) YMCA 친교실서 미술강좌 1개월 배우기 시작. (어양우 화백; 홍대출신.서일전문대 강사) 그 사람이 날 문하생으로 영입하려함. 화실비용을 반값만 내고 배우라고 (안함)
처음으로 미술을 배움.그가 관여한 한불미술교류회화전 출품요청(안함).
7.9(수) 정일,명철,영문과 대표와 만남.
7.27(일) Y 미술회 양수리 야외스켓치
#8.7(목) 비. YMCA 전시회 출품
8.8 YMCA미술강좌 2개월 마지막 등록.
8.11 철학과 사제모임; 최명관 지도교수 지숙,이용길,나 등에게 철학과 십여명
정화대상에 포함된다고 학생과에서 통보왔다고 전해줌.
이 때 문리대학생회장(장의덕)이었던 사람은 유기정학에 처해지고 우린 경고처분. 그가
이를 가지고 억울하다며 시비 걸어와 분쟁이 벌어짐.
8.14 친한 친구들이 유학을 떠남.
8.16 최규하 대통령 하야 성명.
8.17(일) 칠월칠석. 도선사 일오스님이 어린이 여름불교교실의 지도교사 부탁함.
8.19(화)흐림. 김동식(법학과) 과 도선사 여름불교학교 지도교사 봉사. 무애반 18명
~8.21
# 이후 일년간 신군부 정권의 탄압으로 학생회가 사라지고 학생들의 집회가 제한되자 이를 기화로 학교당국은 숭불회에 대한 탄압을 노골화한다.숭불회의 공백기간 후. 백운암이 동아리방 구실을 하고 물심양면 도와주고 전명철 법우를 위시해 최광봉,김형배,박범규 등이 힘을 모아 난국을 헤쳐 나가 오늘에 이르게 된다. 또다시 백운암 철거의 위기가 닥쳤지만 험난한 시절도 버텨내었는데 어려울 것이 없다.
<요약>
(1) * 창립1기 회원: 전명철,김영선 (따라서 학번을 말할 필요도 없다. 78학번 이전이니)
적성 찾느라 핵교 여러개 다니다 말아서 학번만 75,76,78,84. 학번 얘기 때마다 아픈 기억이 떠올라.묻지말아 다오.기냥 창립1기라고 할께. 사적인 기록은 언젠가 따로 올릴 것.
첫댓글 당시 숭불회 창립 내용은 경향신문에 기사화되었다. 전통적 미션계학교에서 불교학생회가 생긴 것이 뉴스가 되었다. 성선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