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도로프 학교의 '전인교육'
《독일 슈투트가르트 발도르프 학교 8학년 사라 로플러(14 여)는 요즘 수업시간에 나무로 빵 접시를 만들고 있다. 빵을 싫어하는 남동생을 위해서다. “동생이 좋아하는 코끼리 모양으로 만들 거예요. 접시에 빵을 담아 주면 맛있게 먹을걸요.” 사라처럼 발도르프 학교 아이들은 무엇이든 뚝딱뚝딱 잘 만든다. 8학년이 되면 나무로 숟가락, 주걱, 접시를 만들고 학년이 올라가면서 스케이트보드, 의자, 탁자까지 만든다. 졸업할 때쯤이면 옷장, 침대는 물론 기타 바이올린 등 악기를 제작해 연주할 정도가 된다. 가구제작 및 돌로 석상을 만들고 털실로 스웨터를 짜는 것이 수업의 절반을 차지한다. 학생들은 부지런한 목공이자 석공이고 대장장이면서 농부다. “아이들은 머리로만 배우지 않습니다. 손(hand), 가슴(heart), 머리(head) 등을 모두 동원한 ‘행위’를 통해 배우지요. 칸트는 손을 ‘밖으로 나온 인간의 뇌’라고 했습니다. 손으로 일하지 않는 사람은 진실을 볼 수 없습니다.”(자유 발도르프 학교 국제연맹 발터 힐러 사무국장)》
▽사물이 가르친다
가장 오래된 발도르프 학교인 슈투트가르트의 한 발도르프학교. 학생들이 목공실에서 책장, 의자, 침대 등 가구를 설계한 뒤 나무를 잘라 못질을 하지 않고 맞물려 조립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석공실에서는 돌덩이를 쪼아 공 같이 만들거나 사람의 머리를 만드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교사는 돌덩이나 나무를 학생들의 ‘스승’이라고 설명했다. 재료에 대한 지식을 잘못 썼을 때 학생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그림과 맞지 않은 모습을 보임으로써 학생들을 ‘가르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발도르프 학교는 책이나 교사를 통해 배운 지식을 체험을 통해 반드시 확인하는 기회를 주고 있다.
▽자급자족이 가능한 생활인
9학년생 요하나 베이스(15)는 “가게가 없어도 살 수 있다”고 말했다. 발도르프 학교 졸업생들은 남의 도움 없이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게 된다는 말이다. 남녀 모두 뜨개질과 바느질을 배운다. 학년이 올라가면 난이도를 높여 치마, 저고리를 만들고 카펫도 짠다. 수북이 쌓인 양털로 실을 만들고 이를 이용해 천도 직접 만든다.
요리는 기본이며 3학년이 되면 학교 안 텃밭이나 농장에서 씨뿌리고 추수하고 탈곡하고 가루로 빻아 빵을 굽는 전 과정을 배운다. 아이들은 감자, 토마토, 보리 등을 재배하는 데 적당한 토양은 어떻고 퇴비는 언제 주어야 하는지를 몸으로 터득하게 된다. 책상이 삐걱거리거나 퓨즈가 끊어져도 사람을 부르지 않고 스스로 해결한다.
‘모든 수업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식을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 발도르프 교육자들의 믿음이다.
▽수학도 예술적으로
발도르프 학교는 교육을 ‘교육예술’이라고 부른다. 이 때문에 음악, 미술, 등 예술과목뿐만 아니라 국어, 수학, 물리 등 예술과 무관한 과목도 그림 그리기, 노래 부르기, 공작활동 등을 곁들여 예술적으로 배운다.
알파벳‘K’를 깨칠 때는‘K’로 시작되는 단어인 왕(king)을 K자 모양의 그림으로 그리고 ‘옛날 옛날에 어떤 왕이 살았는데…’하며 옛날 이야기를 한다. 라인강에 대해 배울 때는 발원지인 스위스의 풍경을 그리고 그 지역 사투리로 된 시를 읽고 민요를 부르고 연극도 한다.
수학 시간에도 손뼉치고 게임하고 노래하며 수의 개념을 배운다. 아이들에게‘5-3〓?’이라고 물으면 하품하지만 “장미 5송이가 있었는데 밤새 도둑이 3송이를 훔쳐갔다면 몇 송이가 남았지”라고 얘기를 꾸며 들려주면 아이들은 눈을 반짝거린다.
▽자연과 가깝게
발도르프 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은 면이나 마 등 천연섬유로 지은 옷만 입는다. 1학년 때부터 배우는 피리도 나무로 만든 것. 장난감도 바닷가에서 주운 조개, 나무, 나비 등 자연물만 허락된다. 4학년 때까지는 TV도 못 본다. 학교에서 TV 프로그램에 대해 이야기하면 부모를 불러 경고한다. 인공적인 모든 것들로부터 아이들을 떨어뜨려 놓는다.
발도르프 교육은 학생들의 육체와 영혼이 그가 보고 만지고 듣는 것에 영향을 받는다고 보고 모든 수업에 자연적인 재료들만 고집한다.
발도르프 학교에서 18년간 학생들을 가르쳐온 얀스 뮐러 교사는 “과학의 발달로 현대 사람들은 자연환경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감각적 인식 능력이 점차 퇴화되고 있다”며 “친환경적인 생활태도를 강조하며 80년 전 시작된 발도르프 교육이 오늘날 더 빛을 발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말했다.
[교육이 희망이다 / 독일편]
왜 '발도로프'인가?
독일 학교를 평가하는 기준 가운데 하나가 아비투어(고교 졸업시험) 합격자를 얼마나 냈는가 하는 것이다. 아비투어에 합격해야 대학 진학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발도르프 학교는 인문계 고교(김나지움)보다 예술이나 실업 교과의 비중이 훨씬 높다. 이 때문에 아비투어 성적으로 평가되는‘공부 잘하는 학생’의 수도 적다.
주한 독일 대사관이 제공한 독일 통계연감에 따르면 98년 현재 발도르프 학교 졸업생 3792명 가운데 아비투어 합격생은 1923명으로 합격률 50.7%. 인문계 고교는 23만6272명 가운데 19만6164명으로 83%다. 기숙사 학교는 81.4%, 야간 인문계 고교는 76.9%. 아비투어 성적이 낮아도 발도르프 학교가 세계적으로 유행하는 이유는 뭘까.
발도르프 교육이 현대 학교와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를 치유할 수 있는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환경파괴, 인간소외, 학교폭력, 마약 등으로 위기에 처한 사회일수록 충분히 발달된 감성과 지적 능력이 조화된 을 강조하는 발도르프의 교육 방식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
이 때문에 독일에서는“발도르프 교육학이 독일이 세상에 기여한 것 가운데 가장 크게 성공한 것”이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교육이 희망이다 / 독일편]
발도로프 학교는?
“내게 학교에 다니는 아이가 있다면 발도르프 학교에 보내겠다.”(솔 벨로 노벨 문학상 수상자)
발도르프는 독일의 대표적인 사립학교일 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문화상품이다.
지난해 말 현재 독일에 182개교(학생수 7만여명)가 있고 독일 이외의 나라에 630개교가‘발도르프’라는 브랜드를 사용하고 있다. 96년 전 세계 발도르프 학교가 680개교인 것을 감안하면 매년 31개교 가량이 생기고 있는 셈이다. 독일을 제외하면 미국이 104개교로 가장 많고 네덜란드 98개교, 스웨덴 39개교, 영국 25개교, 남아프리카 14개교 등이다. 이웃나라 일본에도 1개교가 있다.
최초의 발도르프 학교는 1919년 9월 독일 남부도시 슈투트가르트에서 담배공장 노동자의 자녀를 교육할 목적으로 개교했다. 학교 이름도 담배공장‘발도르프-아스토리아’에서 따온 것. 창시자인 독일의 사상가 루돌프 슈타이너 박사의 교육 철학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 루돌프 슈타이너 학교라고도 한다.
슈타이너 박사는 7세에서 14세까지의 아동기에는 예술을 통해 풍부한 감성을 키워주어야 하며 그 이후에는 사고 발달에 중점을 두어 학문을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발도르프 학교에서는 모든 수업에 그림, 음악, 율동 등을 섞어 수업 전체를 예술적으로 구성한다. 교육 과정은 1학년부터 13학년까지. 13학년은 고교 졸업시험인 아비투어 준비기간이다.
1개 학년에 보통 1개 학급씩, 한 반에 30~40명이다. 1학년부터 8학년까지 담임과 학생이 바뀌지 않고 그대로 가며 유급이 없는 것이 특징. 독일의 공립 중등학교는 30명 중 1명이 유급될 정도로 유급제도가 엄격하다. 9학년부터는 독어, 수학, 물리, 외국어 등 교과 담당 교사에게 전문적인 내용을 배우게 된다.
발도르프 학교는 예술과 실업 교육 외에 외국어 교육을 강조한다. 1학년부터 영어는 필수과목이고 이외에 프랑스어 러시아어 스페인어 등 외국어 1개를 더 배워야 한다. 3학년까지는 듣고 말하기 위주이고 문법이나 쓰기는 4학년부터 시작한다.
발도르프 학교는 사립이지만 학교 운영비의 60~65%는 정부의 지원을 받는다.
입학은 선착순이 원칙이나 발도르프 유치원을 다녔거나 가족 중 발도르프 학교에 다니는 사람이 있으면 우선권을 준다.
학비는 월 220마르크(평범한 회사원 월급이 2300마르크). 우리나라 사립 초등학교와 마찬가지로 독일에서도 중산층 이상의 자녀들이 주로 다닌다.
발도르프 학교 교사는 4년제 발도르프 교사 양성센터에서 배출된다. 교사 경력자를 위한 1년 단기 양성코스도 있다. 발도르프 학교는 해마다 증가 추세여서 교사가 부족한 편.
우리나라에는‘한국슈타이너 교육예술협회’(회장 허영록 강남대 교수)가 발도르프 교육을 연구하고 있다.(문의 031-718-9581, www.waldorf.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