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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종기제 대금산조 스크랩 자료 산조특집 27 - 대금산조 1 - 박종기
Mr.송™ 추천 0 조회 325 08.08.25 11:26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산조특집 27 - 대금산조 - 박종기



산조특집 세 번째 악기로 대금을 택하여 명인들의 연주를 싣는다. 첫 번째 순서는 물론 대금산조의 창시자로 알려진 박종기의 소리들이다. 박종기는 진도를 근거지로 한 세습무의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이다. 우리의 속악 특히 남도의 음악들은 거의 대부분 무속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이를 전수하고 또 발전시켜 예술성이 풍부한 위대한 음악으로 승화시킨 사람들 역시 무속인들이다. 조선전기에 발간된 악보 시용향악보에도 다수의 무악들이 실려 있는 점을 고려한다면 우리 전통에서 무속신앙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을 하게 된다.

박종기의 대금산조와 관련하여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의 교수로 있는 이진원의 책 "대금산조 창시자 박종기 평전, 이진원, 민속원, 2007"에 실린 글을 일부 인용한다. "대금산조의 형성과 전승" 그리고 "박종기 대금산조의 창작과정 논의"라는 소제목의 글들이며 86쪽에서 93쪽에 이르는 글들이다.

무수한 예인들이 19/20세기 근대를 살다가 사라졌지만 우리는 그들에 대한 자료나 기록을 충분하게 지니지 못하고 있다. 그만큼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예인들의 삶이 어려웠고, 또 당대의 문화계에서 상대적으로 그들이 소외당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안타까운 일이다. 이런 풍토 속에서 이진원의 책은 매우 귀중한 노력의 소산이라고 평가된다. 철저한 고증작업을 통하여 예인의 삶을 추적하고 더불어 작품까지도 분석하고 있다. 대금 또는 산조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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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대금 산조의 형성과 전승

대금 산조의 형성에 대해서 박종기가 대금 산조를 만들었다고 하는 설이 거의 확정적이다. 그러나 가야금 산조의 명인이었던 한숙구와 그의 아들 한수동이 대금산조를 했다는 기록을 보아 박종기가 대금 산조를 짜기 전에도 다른 이들이 대금 산조를 연주하고 있었음은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또한 박종기 보다 나이는 어리지만 오늘날 가야금 산조의 한 유파를 이루고 있는 최옥산(최옥삼)도 북한에서 그의 대금 산조와 단소 산조를 남기고 있어, 형성기의 대금 산조는 현재와 달리 아주 다양한 양상을 띠고 있을 것이라 보인다.

무형문화재조사보고서 『산조』에 의하면 한숙구, 그의 아들 한수동(1895~?), 전추산(전용선, 1888~1964),전추산의 제자 편재준(1914~1976), 박종기(1879~1941), 강백천, 박종기의 제자 한주환(1904~1966) 등이 20세기 초 대금 산조를 연주하였던 초창기 명인들이다. 여기에 해방 후 북한에서 활동한 최옥산(1905~1956)을 합친다면 8명 정도가 대금 산조 형성기에 박종기와 동시대에 대금 산조를 연주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은 한숙구로서 가야금 산조의 틀을 만들었다는 김창조(1865~1918)와 친구지간이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들 중 대금 산조를 제일 먼저 불었다고 보이는 사람은 바로 한숙구이나 정확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위『산조』등의 자료에 의거하여 대금 산조의 전승 계보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표 1> 대금산조의 전승 도표

한숙구-한수동 박종기 - 한주환 - 이생강/서용석 김광식- 박동현 강백천 - 김동식 - 한범수/송부억쇠 전홍련- 편재준 ----------김동표 이충선 - 이상룡 방용현 - 김원식 최옥삼 - 북한의 대금 연주자들

흔히들 박종기의 산조는 소리 더늠이라 하고, 강백천의 산조는 시나위 더늠이라고 한다. 이는 강백천의 대금 산조와 박종기의 대금 산조가 확연히 구별되는 점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산조를 구성함에 있어서 박종기의 산조가 판소리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한주환은 박종기로부터 산조를 배우기 이전에 이미 한숙구, 한수동으로 이어지는 대금 가락을 습득하고 있었으며, 이것이 한주환 대금 산조가 박종기 대금 산조와 다른 독특한 풍격을 갖게 하였다. 강백천으로부터 배운 김동식이 한주환 대금 산조의 느낌을 주는 이유는 그가 편재준과 한주환의 대금 산조를 스스로 연구한 까닭이다. 단소 산조를 짠 전추산의 대금 산조는 가야금 가락을 바탕으로 구성되었다고 하는데, 편재준에서 김동표로 전승은 되었으나 김동표가 강백천의 산조를 후에 배움에 딸라 현재 그 전승이 끊어졌다. 하지만 김기수에 의하여 오선보와 정간보로 채보된 악보가 남아있어, 충분히 이를 재현 가능하다. 방용현은 서울 지방의 대금 시나위를 구사하던 명인이었으나 그가 남긴 음악은 현재 완전히 전승이 끊어진 상태이다. 박종기에게서 대금 산조를 배운 김광식은 경기 시나위의 대가로 이에 주력하여 그의 산조 음악은 전하여지지 않는다. 이충선도 가야금 산조에 기초하여 대금 산조 한바탕을 구성하였으나 현재 연주되는 바 없다. 최옥삼은 북한에서 무용극장 소속으로 음악대학 강사로 출강하여 천여 명의 제자들을 가르쳤으며, 북한 대금 음악의 기틀을 다졌다. 현재 북한에서 연주되는 산조 풍의 대금, 단소 창작곡들 중 상당수가 그의 작품이다.

최근에 이보형은 「김창조의 가야금산조와 후기(근대) 산조 전승론(전승론)」에서 소리더늠의 대금산조는 판소리의 양식에 가깝고 시나위더늠의 대금산조는 시나위 음악양식에 가깝다고 하였으며, 원초산조 또는 ‘전기 산조형 심방곡’의 장단구성은 살풀이형 장단에서 판소리형 장단으로 변화한 것이다라는 의견을 제시한 바 있다. 여기서 제기된 ‘전기 산조형 심방곡’ 즉, 원초산조라고 하는 것은 앞서 언급한 한숙구가 연주하였던 대금 음악의 하나가 아니었을까 추정한다. 이보형은 또 「박종기의 대금산조<군로사령> 음반 소고」에서 “박종기가 누구에게 젓대를 배웠는지는 알려지지 않았고 그가 대금산조를 처음 짠 것으로 전하여 진다. 그런데 진도 출신 모 노인은 필자에게 여기에 대하여 이견을 제시하였다. 그에 의하면 박종기 이전에도 이모씨라고 대금으로 산조를 하는 이가 진도에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이 사실을 진도 고로들은 다 아는 일이라 하였다. 모 노인이 말한 사실의 진위는 확인하지 못하였지만 모 노인의 말이 맞는다면 박종기 이전에 이모씨가 연주하였다는 대금산조는 아마 판소리장단에 계면조 허튼가락 위주로 된 일종의 ‘대금심방곡’으로 불리는 ‘원초산조’였을 것이다. 이런 원초 산조를 박종기 이전에 연주한 이는 한숙구, 전계문 등 여러 사람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라고 하였듯이, 이보형의 원초산조라는 개념은 김창조가 심방곡을 변작하여 산조를 만들었다는 이야기에서 산조를 만든 시점 이전의 산조를 원초산조라 한 것이다.

3) 박종기 대금 산조의 창작 과정 논의

그러므로 박종기가 대금산조를 처음 만들었느냐 하는 논의를 해결하기에는 많은 자료가 필요하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은 대금산조를 논의한다면 박종기는 분명 그 틀을 정립한 정립자로서 이름을 올릴 수 있는 것이다. 박종기의 대금산조 원형을 논하기 위해서는 앞서 언급한 유성기음반 자료를 고찰해야 한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진정한 대금 산조의 원형은 현재의 자료로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나 박종기가 연주한 대금 산조의 원형은 유성기 음반을 통해서 찾아 볼 수 있다. 박종기의 가장 빠른 산조 유성기 음반은 1929년에 일본 콜럼비아와 일?조선소리판에 취입한 ‘?모리’와 ‘국거리’ 등이다. 이 음반들에는 대금 독주라는 명칭이 붙어있는데 이를 통해 직접적으로 대금 산조의 형성이 비교적 늦었음을 알 수 있다. 6년 뒤인 1935년에 오케에서 대금 산조라는 이름으로 박종기가 세 장의 음반을 취입한 것을 보았을 때, 박종기의 대금산조는 1920년대 후반에서 1930년대 중반에는 그 틀이 잡혀진 것으로 보인다.

일본 콜럼비아와 일?조선소리판에 중모리와 국거리라는 산조에 사용하는 장단명으로 음반을 취입하였으면서도 이를 대금 독주라 칭하고 산조라 하지 않은 것에 주목한다면 박종기 대금 산조의 완벽한 형성은 30년대 초반이라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공교롭게도 1929년은 백낙준이 일본 빅타에 현금 산조를 취입한 해로 거문고 산조가 대중 앞에 본격적으로 선을 보인 해이다. 1935년 대금 산조 음반의 발매는 음악인들 사이에서도 상당히 중시되었으며, 이로부터 이후 박종기가 대금 산조를 짠 해가 1936년경이라는 증언이 나오기도 하였다. 박종기 대금 산조의 창작과정을 상세히 서술할 수 없지만, 그가 남긴 유성기 음반은 그의 예술세계를 종합적으로 보여주고 있고, 산조 창작 과정을 짐작해 볼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해 준다.
1929년의 일본 콜럼비아에 취입한 대금 독주 군로사령나가는데 음반은 동년 일?조선소리판에 녹음한 국거리(자진모리)에 네 장단이 그대로 나타난다. 이 부분은 1935년 오케에서 취입한 대금 산조 국거리에 더욱 확대되어 나타나고 있어 대금 산조의 일부분이 판소리의 일부분 가락을 그대로 차용하여 확대 발전시켜 짜여 있음을 알 수 있다. 1929년의 중모리 음반에 보이는 앞부분의 가락도 오케의 대금 산조 녹음에 어김없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일부 대금 산조의 선율은 연주 대마다 약간의 변화를 줄 뿐이며 대금 산조의 골격 선율로서 이미 1920년대 후반에 박종기 대금 산조의 구도는 대충 짜였던 것 같다. 1935년의 오케 녹음은 박종기 대금 산조의 틀이 진양조-중모리-중중모리-자진모리의 네 종류의 장단으로 이루어지는 틀이 아니라 진양조-중모리-자진모리의 세 가지 장단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1929년에 취입된 백낙준의 거문고 산조도 중중모리 장단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적어도 1930년대까지만 해도 산조는 오늘과 비교하여 본다면 형식상으로도 단순했음을 알 수 있다.

산조대금은 넓은 취구와 큰 지공으로 제쳐 불거나 숙여 불어 음정을 조절하고, 손가락을 이용하여 지공을 점차적으로 막거나 떼면서 음정을 만들어 나간다. 이러한 살아있는 음들의 조화로 산조를 구성한다. 박종기의 대금산조는 이러한 테크닉들의 정화를 보여주나, 오늘날의 산조와 같은 세련된 맛은 좀 적다.

박종기는 갈대청 소리를 적절히 사용하여 산조의 맛깔스러운 음들을 만들어 낸다. 이러한 청 울림이 산조의 기본청인 평취로 부는 전폐음에서 날 때는 정악대금의 청성곡을 듣는 듯 장쾌하고 호쾌한 우조 성음을 만들어 낸다. 이 청소리가 고음에서 날 때는 슬픈 계면의 가락과 어우러져 사람의 심성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대금산조에는 보통 우조와 계면조 두 가지 음계가 사용된다. 이러한 조는 음양, 손바닥의 안과 밖과 같아서 항상 공존하여 서로 상생상극하는 절묘한 관계에 있다. 이러한 음양의 원리가 대금산조에 녹아있다. 이러한 음양의 원리는 대금산조의 연주자면서 이론가인 한범수 명인이 그의 “산조론”에서 주장하기 이전부터 대금연주자들에게는 몸 속 깊이 음악의 생성원리로 자리잡고 있었다. 박종기의 산조음악을 들어보면 이러한 것이 쉽게 확인된다.

산조는 느린 장단에서 시작하여 빠른 장단으로 가는 양식의 음악이다. 박종기는 자신의 대금산조를 구성할 때 중중모리 장단을 쓰지 않았다. 그가 남긴 음반을 보면 진양조에서 중모리로 중모리에서 바로 국거리(자진모리)로 가는 산조 한판을 짜고 있다. 이 음반이 발매될 당시 1930년대 중반에 발매된 가야금산조의 음악을 보면 중중모리의 악장이 있는데 박종기의 대금산조가 이 중중모리 부분을 생략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중중모리 부분이 생략된 것으로 한범수 명인이 연주하는 퉁소산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퉁소산조도 중중모리 부분을 결하고 있다.

박종기의 대금산조를 이어받은 한범수는 중중모리 부분을 오케 음반의 국거리 부분의 가락이나 콜럼비아의 군로사령나가는데 부분의 음악을 차용하여 짜고 있다.

오늘날의 대금산조계를 보면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이생강과 서용석을 중심으로 이생강류의 대금산조와 서용석류의 대금산조의 소리더늠산조가 연주되고, 시나위 더늠의 강백천류 대금산조가 함께 전승되고 있다. 이 중 소리더늠의 이생강과 서용석의 대금산조가 강세를 보이는데 이들이 모두 한주환류의 기예능보유자로 지정되어 있다. 즉, 박종기-한주환으로 이어지는 전통의 맥이 오늘날 꽃피우고 있는 것이다.

박종기의 대금산조를 작곡적 측면에서는 “계면조의 경우 종지선율 다음에는 4도 아래의 떠는 청으로 이를 강조해주는 대비(문답)형식의 선율 형태가 여러 번 나타는데, 뒤의 중머리에서도 나타나는 이러한 현상은 박종기의 작곡 또는 연주습관으로 보인다. 또한 청변화(전조기능)가 다양하게 이루어지는 현행 류에 비해 청변화가 없는 단순성을 가지고 있다.”라고 하여 임재원은 청변화 없이 단순한 연주, 문답형식의 가락 선율들이 박종기 대금산조의 특징임을 밝혔다.

오케의 중모리나 자진모리의 음반에 담긴 음악도 진양조의 틀을 벗어나지 않는다. 국거리 음반에서는 호걸제(설렁제)가 보이는데 앞서도 언급하였지만 판소리 흥보가 중 ‘제비후리러 나가는 대목’이나 춘향가 중 ‘군로사령나가는 대목’ 등과 동일한 판소리 호걸제를 대금산조에 융화시켰다. -"대금산조 창시자 박종기 평전, 이진원, 민속원, 2007" 86-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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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음반 : 명인명창선집 (8) 대금 퉁소 풀피리의 명인, 지구레코드, 1994, 총 연주시간 20분18초

음원 : 1934년 녹음, Okeh 赤30014-A 大笒散調 진양(上) 朴鐘基 長鼓 金宗基

Okeh 赤30014-B 大笒散調 진양(下) 朴鐘基 長鼓 金宗基

Okeh 赤30015-A 大笒散調 중머리(上) 朴鐘基 長鼓 金宗基

Okeh 赤30015-B 大笒散調 중머리(下) 朴鐘基 長鼓 金宗基

Okeh 赤30016-A 大笒散調 국거리(上) 朴鐘基 長鼓

Okeh 赤30016-B 大笒散調 국거리(下) 朴鐘基 長鼓 金宗基金宗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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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08.08.25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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