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7 장 : 상호 신임의 회복
화해를 요청함 ( 7: 1 )
1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
고후 7: 1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 -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 (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 )
이 약속은 앞에서 말한바(6: 18)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약속을 가리킨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얻었다.
* 요 1: 12 -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우리는 장차 의인의 부활 시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스런 모습을 가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비록 아직 죄성을 가지고 있고 우리 속에는 죄와의 싸움이 있지만 하나님의 자녀의 품위를 가지고 거룩하고 바르고 선하게 살아야 한다.
1]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남을 권면하는 일은 쉬운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남에게 듣기 싫은 말을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특히 맞대면하고 말하는 것은 용기가 필요하다.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인들에게 책망하는 것은 그들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남의 허물을 덮어주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권면하여 바로 잡도록 일깨워주는 일은 그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다.
2]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께서 성도들과 함께 거하시겠다는 약속(6: 16-18)이다.
이것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거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당신이 거하는 성전으로 삼으시겠다는 약속이다.
3]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여기서의 '두려움'(*, 포보)은 더러움과 죄악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두려움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무조건적 두려움, 즉 경외심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경외심은 성도들이 성결(聖潔)한 삶을 살도록 해주는 기본적인 바탕이 된다.
바울의 경우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은 그의 모든 사역의 동기가 되었으며 이것은 아울러 사도로서의 그의 가르침에 대한 순수성을 변호해준다.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은 유대 지혜 문학에서 발견되는 삶의 원리이다.
* 시 2: 11 -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 시 5: 7 -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리이다.
* 잠 1: 7, 29 – 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29 대저 너희가 지식을 미워하며 여호와 경외하기를 즐거워하지 아니하며
* 잠 8: 13 -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
* 전 12: 13 -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라는 말은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우리의 거룩한 삶의 원동력이 됨을 보인다.
* 잠 16: 6 - 인자와 진리로 인하여 죄악이 속하게 되고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말미암아 악에서 떠나게 되느니라.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명령하셨기 때문에, 또 장차 그가 우리를 심판하시고 선악간에 보응하실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거룩하고 의롭게 살아야 한다.
4]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하나님의 성전으로서의 성도에게 요청되는 것은 거룩함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거룩하기 때문이며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거할 성전도 마땅히 거룩해야 하기 때문이다.
* 레 19: 2 –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본문의 '거룩함'(*, 하기오쉬넨)이라는 단어의 어원인 형용사 '하기오스'(*, '거룩함')는 신약성경 전체에서 무려 229회나 나오고, 동사 '하기아조'(*, '거룩하게 하다')는 29번, 명사 '하기아스모스'(*, '거룩')는 10번 나온다는 분석(Robertson)은 '거룩'이라는 덕목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잘 말해준다.
그런데 이 '거룩'은 일회적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성결을 향한 노력을 끊임없이 함으로써 얻어진다.
이것은 '온전히 이루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피텔룬테스'(*)가 계속 반복되는 과정을 의미하는 현재 분사형이라는 점에서 잘 나타난다.
거룩함의 본질은 분리됨이다. 즉 육과 영의 온갖 더럽고 거짓되며 죄된 것들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키는 것이다.
이처럼 성도가 자신을 모든 죄와 거짓과 더러움으로부터 분리시켜 온전한 거룩함을 유지해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성도는 하나님의 성전으로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거처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 고전 3: 16-17 – 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17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거룩함을 온전히 이룬다는 말은 현재 분사형인데 일회적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계속 반복되는 과정을 의미한다.
곧, 성도의 성화 과정에 관한 언급이다. 그러면 왜 거룩해야 하는가?
여호와 하나님께서 거룩하시기 때문이다. 즉 모든 부정과 죄악으로부터 떨어져 분리되어 있는 상태가 거룩한 상태이다.
하나님은 본질적인 속성상 모든 부정과 죄악으로부터 떨어져 분리된 절대 거룩하신 분이다. 따라서 그처럼 거룩하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분과 온전한 교재를 나누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역시 모든 부정과 죄악으로부터 떨어진 상태, 곧 거룩한 상태에 있어야 한다.
5]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
여기서 '육과 영'이란 그리스도인의 전인격적 자아를 의미하며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및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내적인 면과 외적인 면 전체를 일컫는 말이다(Plummer).
* 고전 7: 34 - 마음이 갈라지며 시집 가지 않은 자와 처녀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되 시집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남편을 기쁘게 할까 하느니라.
따라서 어느 한쪽이 더러워지면 그것은 다른 쪽도 더러워짐을 의미한다.
그런데 본문에서 바울이 염두에 두고 있는 '온갖 더러운것'은 무엇이었을까?
혹자는 본 절에서 바울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이미 더럽혀졌음을 암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본다(Harris). 이 경우 '더러운 것'(*, 몰뤼스무)은 우상의 신전에서 음식을 함께 나누는 것, 이방인들의 사원에서 열리는 축제나 의식에 참여하는 것, 어떤 특정한 이교에 가입하여 회원이 되는 것과 관련이 있다.
* 고전 8: 10 -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믿음이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 고전 10: 14-22 – 14 그런즉 내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 15 나는 지혜 있는 자들에게 말함과 같이 하노니 너희는 내가 이르는 말을 스스로 판단하라. 16 우리가 축복하는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17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이라. 18 육신을 따라 난 이스라엘을 보라. 제물을 먹는 자들이 제단에 참여하는 자들이 아니냐? 19 그런즉 내가 무엇을 말하느냐? 우상의 제물은 무엇이며 우상은 무엇이냐? 20 무릇 이방인이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21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식탁과 귀신의 식탁에 겸하여 참여하지 못하리라. 22 그러면 우리가 주를 노여워하시게 하겠느냐? 우리가 주보다 강한 자냐?
이와 더불어 갈 5: 19-21에서 언급되고 있는 '음행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 등이 본절의 '더러운 것'에 해당될 것이다.
* 갈 5: 19-21 – 19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 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성도들은 이런 것들로부터 자신을 분리해 성결하게 해야 하며 그것이 곧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다.
결국, 본 절은 성도의 성결을 다음 세 가지로 요약하고 있다.
(1) 성결(聖潔)은 하나님의 언약에 기초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요구받는 것이다.
(2) 단순히 윤리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에서 생겨난다.
경외(敬畏, Fear Reverence)는 하나님의 권위와 거룩함에 대해 공경과 두려움을 말한다.
시내 산에서 율법이 주어지는 때, 하나님은 영광과 광채 가운데 친히 나타나, 이 경외심을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속에 심어주셨다.
* 신 4: 10 – 네가 호렙 산 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섰던 날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나에게 백성을 모으라. 내가 그들에게 내 말을 들려주어 그들이 세상에 사는 날 동안 나를 경외함을 배우게 하며 그 자녀에게 가르치게 하리라. 하시매
그것은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께 대한 응답이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는 공포같은 두려움과는 다르다.
* 출 20: 20 -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임하심은 너희를 시험하고 너희로 경외하여 범죄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죄인이 된 인간이 하나님의 거룩을 대면했을 때 .되는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 출 19: 16 - 셋째 날 아침에 우레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매우 크게 들리니 진중에 있는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
하나님에 대한 경외는 율법을 들을 때 생기며,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 된다.
* 신 4: 10 - 네가 호렙 산 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섰던 날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나에게 백성을 모으라. 내가 그들에게 내 말을 들려주어 그들이 세상에 사는 날 동안 나를 경외함을 배우게 하며 그 자녀에게 가르치게 하리라. 하시매
* 시 111: 10 -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훌륭한 지각을 가진 자이니 여호와를 찬양함이 영원히 계속되리로다.
* 잠 1: 7 -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또한, 성경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생명의 샘이며, 여호와를 경외함이 사람의 보배가 된다고 말한다.
* 잠 14: 27 -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생명의 샘이니 사망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느니라.
* 사 33: 6 - 네 시대에 평안함이 있으며 구원과 지혜와 지식이 풍성할 것이니 여호와를 경외함이 네 보배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게 되고, 하나님은 그러한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푸신다.
* 시 22: 22-23 – 22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 가운데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23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너희여. 그를 찬송할지어다. 야곱의 모든 자손이여! 그에게 영광을 돌릴지어다. 너희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여 그를 경외할지어다.
* 시 103: 13 -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거룩을 온전히 이루게 된다(고후 7: 1).
신약에서 쉬지 않고 기도와 구제를 한 고넬료는 하나님을 경외한 사람이라고 소개한다.
* 행 10: 2 -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이러한 고넬료를 하나님은 기억하시고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
* 행 10: 31, 35 – 31 말하되, 고넬료야. 하나님이 네 기도를 들으시고 네 구제를 기억하셨으니 35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하나님 앞에서 거룩해지는 것은, 하나님의 경외함의 결과이고(고후 7: 1),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 없이 구원은 달성될 수가 없다.
* 빌 2: 12 -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3) 성결은 영과 육, 즉 성도의 전인격에서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
가령 영적 성결만을 중요시할 때는 쾌락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고, 육체적 성결만을 강조할 때는 율법적 금욕주의에 빠질 우려가 있다는 점등이 그것이다.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들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는 것은 구원받은 성도의 삶의 목표, 곧 성화의 목표이다.
비록 완전 성화가 땅 위에 사는 동안 불가능할지라도, 성도는 완전한 거룩을 향해 달음질해야 한다.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이란 우리가 육신적 죄뿐 아니라, 심적 더러움, 예를 들어 미움, 음란한 마음, 물질에 대한 탐욕 등에도 빠지지 말아야 할 것을 보인다.
* 막 7: 20-23 – 20 또 이르시되,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21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22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23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 롬 1: 25, 30-32 – 25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30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1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32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 갈 5: 19-21 - 19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 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 골 3: 6-10 – 6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7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8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9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2. 환난 중에 위로와 기쁨 ( 7: 2 – 4 )
2 마음으로 우리를 영접하라. 우리는 아무에게도 불의를 행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해롭게 하지 않고, 아무에게서도 속여 빼앗은 일이 없노라. 3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를 정죄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전에 말하였거니와 너희가 우리 마음에 있어 함께 죽고 함께 살게 하고자 함이라. 4 나는 너희를 향하여 담대한 것도 많고, 너희를 위하여 자랑하는 것도 많으니, 내가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치는 도다.
고린도 교인들은 사도 바울에 대한 거짓 교사들의 악한 비난으로 인해 생긴 간격을 포기하고 마음으로 그를 영접해야 했다.
바울은 그들에게 불의를 행하거나 해롭게 하거나 속여 빼앗은 일이 없었다. 모세나 사무엘도 백성의 나귀 하나도 취하지 않았고 한 사람도 해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 민 16: 15 - 모세가 심히 노하여 여호와께 여짜오되 주는 그들의 헌물을 돌아보지 마옵소서. 나는 그들의 나귀 한 마리도 빼앗지 아니하였고 그들 중의 한 사람도 해하지 아니하였나이다. 하고
* 삼상 12: 3 - 내가 여기 있나니 여호와 앞과 그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내게 대하여 증언하라. 내가 누구의 소를 빼앗았느냐? 누구의 나귀를 빼앗았느냐? 누구를 속였느냐? 누구를 압제하였느냐? 내 눈을 흐리게 하는 뇌물을 누구의 손에서 받았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그것을 너희에게 갚으리라. 하니
디모데전서 3: 8은 집사의 자격에 더러운 이익을 탐하지 않는 것을 말했다. 직분자는 그래야 한다.
바울은 그 교인들과의 일치된 마음과 사랑으로 생사(生死)를 같이하기를 원했다. 교인들을 향한 바울의 담대함과 자랑은 그들을 사랑하고 신뢰하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그가 그들을 참으로 사랑하지 않고 신뢰하지 않았다면 담대히 말할 것도, 자랑할 것도 없었을 것이다. 그의 담대함과 자랑대로, 그의 사랑과 신뢰대로, 바울은 많은 환난 중에서도 그들로 인해 위로와 기쁨이 넘쳤다.
그는 6, 7, 13절에서도 자신이 위로와 기쁨을 얻었다고 말하였다.
고후 7: 2 마음으로 영접하라 - 마음으로 우리를 영접하라. 우리는 아무에게도 불의를 행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해롭게 하지 않고, 아무에게서도 속여 빼앗은 일이 없노라. ( 마음으로 우리를 영접하라. 우리가 아무에게도 불의를 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해롭게 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속여 빼앗은 일이 없노라 )
1] 마음으로 우리를 영접하라.
바울은 매우 솔직하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고 있다.
이 말은 6: 13과의 연속 선상에 있는 것으로 거듭 화해와 일치를 촉구하고 있다. 이것은 1절의 '온갖 더러운 것'이 '분쟁', '시기', '분냄', '분리' 등이 되는 것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암시해 준다.
'영접하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코레사테'(*)는 장소를 나타내는 '코로스'(*)에서 파생된 말로 '...을 위해 장소를 마련하다'의 뜻이다.
그렇다면 본문은 '마음속에 우리가 들어갈 수 있는 자리를 만들라'로 직역할 수 있다. 결국 바울이 말하는 바 '영접하는' 것은 상대를 위해 마음에 장소를 만드는 것. 즉 상대를 자기 실존의 중요한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Strachan).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이렇게 요구할 때 그 자신은 이미 그렇게 하고 있었다(6: 11-13).
2] 우리는 아무에게도 불의를 행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해롭게 하지 않고, 아무에게서도 속여 빼앗은 일이 없노라.
본 절에서 바울은 다시 그의 사역의 동기가 순수하고 그에 대한 중상(中傷)은 잘못된 것이라고 변호하고 있다(4: 2. 5: 12-13. 6: 3).
그러나 본문에서는 앞에서 제기된 문제들, 가령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한다든가 스스로를 추천한다든가 하는 문제들에 비해 윤리적 차원의 문제들이 거론되고 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본문을 보면서 바울이 사람들에게 불의를 행하고 해롭게 하며 속여 빼앗는 자라는 비난을 받았었다고 추론한다.
그러나 바울에게 가해진 그러한 비난은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고 그 오해는 복음의 진리에 눈먼 거짓 교사들에 의해 야기된 것이었다(2: 17. 4: 3).
사실 바울은 언제나 고린도 교인들에 대하여 영적 아버지로서의 따뜻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고(6: 13) 모든 일을 그들을 위하여 행했다(1: 24. 4: 15).
그런데도 고린도 교인들이 허황된 거짓 가르침에 현혹(眩惑)되고 바울을 불신했을 때, 그의 심정은 큰 애통으로 눈물을 흘려야 했다(2: 4). 그러나 바울은 넘치는 사랑과 용서하는 마음으로 그들이 스스로 회개할 때까지 인내하고 기다리는 목회자적 모범을 보였다(2: 7-10. 7: 9).
(1) 불의를 행하지 않고
①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은혜를 베푸셨다.
* 마 5: 45 -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② 소유의 개념
ⓐ 생산적 개념 : 자신이 직접 만들었거나 출산하였을 때 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 교환적 개념 : 댓가를 지불하고 구입하였을 때 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 점유적 개념 : 내 손 안에 있을 때 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 눅 16: 9-10 – 9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 10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본문은 불의한 청지기에 대한 비유이다. 주인의 것을 자기 마음대로 허비한 청지기가 주인에게 빚진 자에게 탕감하여준 것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창조된 자연 만물은 그 배후에 그것을 만드신 능력 있는 누군가(Someone)가 존재하고 있음을 입증한다. 자연 만물은 우연의 산물이 아니고 창조주의 존재를 입증해 주는 무수한 증빙자료이다. 미세한 입자로부터 우주까지 아름답고 정교하게 모든 것을 계획하고 만든 전능자의 존재를 분명히 보여준다.
그런데 우리는 내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주인이 원하시는 대로 사용해야 할 물질을 우리는 어떻게 사용했나?
③ 불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
* 롬 1: 18 -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 고전 6: 9 -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 골 3: 25 -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심이 없느니라.
* 딤후 2: 19 -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하였느니라.
* 벧전 3: 18 -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 요일 5: 17 -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④ 불의에 대하여 보응하신다.
* 계 18: 5 - 그의 죄는 하늘에 사무쳤으며 하나님은 그의 불의한 일을 기억하신지라.
심판의 때에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된다. 그 이유는
1) 죄가 하늘에 사무쳤다. - 배교의 죄
본문은 렘 51: 9을 반영한다. 큰 성 바벨론의 죄는 하늘에 미칠 정도로 극에 달하였다. 그의 죄는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을 정도로 관영하고 항상 악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불의한 일, 즉 죄를 기억하셔서 진노의 포도주를 부어 심판하실 것이다(2, 6절. 16: 19).
* 렘 51: 9 - 우리가 바벨론을 치료하려 하여도 낫지 아니한즉 버리고 각기 고토(故土)로 돌아가자 그 화가 하늘에 미쳤고 궁창에 달하였음이로다.
* 창 19: 13 - 그들에 대하여 부르짖음이 여호와 앞에 크므로 여호와께서 우리로 이곳을 멸하러 보내셨나니 우리가 멸하리라.
* 창 6: 5-7 - 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6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7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 사 1: 10-14 - 10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14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음녀의 음행으로 말미암은 이 세상의 타락된 죄악, 하나님의 심판은 언제나 죄악이 극에 달했을 때 그의 심판을 내리셨다.
* 창 18: 20 -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중하니
2) 하나님
하나님은 우리 입의 무익한 말까지 낱낱이 기억해 두신다.
* 마 12: 36 -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 말 3: 16 -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생각하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 책에 기록하셨느니라.
ⓐ 불의한 일을 기억하셨다. - 배교의 각종 행위.
ⓑ 성도에게는 기억하지 않으신다. - 십자가의 보혈로 모든 죄를 씻어주셨기 때문이다.
* 사 1: 18 -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
노아 시대에는 세상에 죄악이 가득하므로 하나님께서 홍수로 세상을 멸하셨다.
* 창 6: 5, 11, 13 - 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11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패괴하여 강포가 땅에 충만한지라. 13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말세의 배교한 교회의 죄는 하늘에 사무칠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그 불의한 일을 기억하신 고로 그에게 멸망의 심판을 내리실 것이다.
* 계 22: 11 -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
1) 불의를 하는 자 - 말씀 밖의 불의
* 단 12: 10 - 많은 사람이 연단을 받아 스스로 정결케 하며 희게 할 것이나 악한 사람은 악을 행하리니 악한 자는 아무도 깨닫지 못하되 오직 지혜 있는 자는 깨달으리라.
혹자는 본 절이 더 이상 회개의 기회가 없는 것을 나타낸다고 주장한다(Charles, Swete). 그러나 17절에서 회개의 초청을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 본 절을 그렇게 해석하는 것은 부당하다(Beasley-Murray, Ladd).
본 절은 마지막 때에 사람들이 자신들의 마음과 행위대로 열매를 거두게 됨을 시사한다. 그러기에 본 절은 지금 이때에 회개해야 함을 강조한다(Morris, Mounce).
2) 더러운 자 - 영육 간에 더러운 자
* 약 1: 21 -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 버리고 능히 너희 영혼을 구원할 바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
* 겔 24: 13 - 너의 더러운 중에 음란이 하나이라. 내가 너를 정하게 하나 네가 정하여지지 아니하니 내가 네게 향한 분노를 풀기 전에는 네 더러움이 다시 정하여지지 아니하리라.
* 말 1: 7 -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 도다. 이는 너희가 주의 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함을 인함이니라.
* 마 10: 1 - 예수께서 그 열 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3) 의로운 자 - 예수 안에 있는 자.
* 시 11: 7 -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 얼굴을 뵈오리로다.
* 말 4: 2 -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4) 거룩한 자 - 거룩한 행실과 경건한 삶을 사는 자.
알곡 된 자와 쭉정이가 갈라진다. 때가 가까워서 인봉 했던 예언의 말씀을 개봉할 때 마지막 때에 택한 자는 깨닫도록 인봉하지 말라 하였다. 인봉했던 말씀이 개봉되면 불의한 자와 의로운 자가 갈라지고, 더러운 자와 거룩 된 자가 갈라지게 된다.
(2) 해롭게 하지 않고
해롭다는 것은 손해를 입게 하였다는 의미이다.
* 창 42: 36 - 그들의 아버지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에게 내 자식들을 잃게 하도다. 요셉도 없어졌고 시므온도 없어졌거늘 베냐민을 또 빼앗아 가고자 하니 이는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
* 출 22: 22-23 – 22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23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으리라.
* 잠 11: 17 - 인자한 자는 자기의 영혼을 이롭게 하고 잔인한 자는 자기의 몸을 해롭게 하느니라.
* 전 8: 9 - 내가 이 모든 것들을 보고,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마음에 두고 살핀즉 사람이 사람을 주장하여 해롭게 하는 때가 있도다.
(3) 속여 빼앗은 일이 없노라.
속이다는 것은 거짓을 참으로 곧이듣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후 7: 3 정죄하려고 -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를 정죄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전에 말하였거니와 너희가 우리 마음에 있어 함께 죽고 함께 살게 하고자 함이라. ( 내가 정죄하려고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 말하였거니와 너희로 우리 마음에 있어 함께 죽고 함께 살게 하고자 함이라 )
1]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를 정죄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자기에게 대하여 오해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바울의 사랑에 상응하는 행위를 하지 않고 도리어 마음이 식은 것을 지적하는 것은(2절. 6: 12) 그들을 책망하기 위함이 아니라 바울과 그들이 공동의 운명으로 묶여 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자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정죄하거나 책망하려는 의사가 없다는 것은 앞에서도 밝힌 바 있다. 그는 이미 문제를 일으킨 자들이나 그 문제에 동조한 자들이나 할 것 없이 모두 용서하였다(2: 7-10).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이 사람들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게 하려고 구원하는 것임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사람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권면을 할 때 그것이 정죄의 차원이 아니라 다만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껴 잘못을 뉘우칠 수 있도록 하는 차원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게 노력하였다.
* 고전 4: 14 -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 고전 6: 5 -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의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
* 고전 15: 34 -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2] 내가 이전에 말하였거니와
본문이 구체적으로 지시하는 것은 6: 11 내용이다(Bruce, Martin).
혹자는 본문에서 바울의 화제가 급작스럽게 전환된 것을 보고 다시 고린도 교인들에 대한 사랑의 권면을 하기 위해 6: 11-13로 되돌아왔다고 한다.
만일 이러한 견해가 옳다면 그것은 6: 14 – 7: 1 부분이 다른 서신에서 가져온 삽입부라고 주장하는 견해(Gnilka)를 반박하는 것이 된다.
3] 너희가 우리 마음에 있어 함께 죽고 함께 살게 하고자 함이라.
바울이 자기가 돌봐야 할 성도들과 운명을 같이 하며 그들을 위해서 자기의 목숨을 희생할 수도 있다고 한 그 자세는 그의 전 생애를 통해 일관하는 목회자적 신념이었다.
* 살전 2: 8 -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뿐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너희에게 주기를 기뻐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라
본 절은 권면의 목적과 바른 자세에 관한 모범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사랑의 동기에서 출발하며 선을 지향하는 것이다.
본 절 외에도 성경에는 다양한 권면이 나오는데 그 권면들의 목적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1) 회개에의 인도
* 눅 3: 17-18 – 17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18 또 그 밖에 여러 가지로 권하여 백성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였으나
(2) 믿음을 유지하게 함
* 행 14: 22 -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3) 순종할 것을 권고함
* 딛 3: 1 - 너는 그들로 하여금 통치자들과 권세 잡은 자들에게 복종하며 순종하며 모든 선한 일 행하기를 준비하게 하며
(4) 거룩한 생활의 독려
* 살전 4: 1-6 – 1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끝으로 주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구하고 권면하노니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배웠으니 곧 너희가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 2 우리가 주 예수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무슨 명령으로 준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 3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4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대할 줄을 알고 5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따르지 말고 6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고 증언한 것과 같이 이 모든 일에 주께서 신원하여 주심이라.
고후 7: 4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치는 도다 - 나는 너희를 향하여 담대한 것도 많고, 너희를 위하여 자랑하는 것도 많으니, 내가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치는 도다. ( 내가 너희를 향하여 하는 말이 담대한 것도 많고 너희를 위하여 자랑하는 것도 많으니 내가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치는 도다 )
1] 나는 너희를 향하여 담대한 것도 많고,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르레시아'(*)는 '모든 것을 거침없이 자유롭게 말하는 것'을 가리킨다.
여기에는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 대하여 어떤 비밀도 없이 다 말하였다는 의미가 있다.
2] 너희를 위하여 자랑하는 것도 많으니,
바울은 14절에서 디도를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내기 전에 디도에게 교인들을 자랑하였다.
바울이 이렇게 고린도 교인들을 자랑하는 것은 그들에 대해 좋은 소식을 들었으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이길 것이라는 그의 확신(13: 8)에 근거한 것이었다.
물론 바울은 마게도냐에서 재회한 디도를 통해 고린도 교회에 대한 좋은 소식을 들은(5-16절) 후에 더욱더 그들에 대한 자신의 자랑이 헛되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3] 내가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치는 도다.
본 절에서 표현되는 바울의 기쁨은 디도가 가지고 온 기쁜 소식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Harris, Lowery).
즉 고린도 교인들에 대한 신뢰가 배반당하지 않았음을 확인한 것에서 바울은 큰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바울이 이렇게 기쁨을 누리는 것은 고난이 끝났기 때문에 오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바울은 계속해서 고난을 당할 것이었다. 그리고 바울은 그러한 고난 가운데서 위로와 넘치는 기쁨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것이었다.
복음으로 인한 만족은 세상에서의 부족을 물리친다. 아무것이 없어도 복음이 있음으로 웃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하박국 선지자와 같이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고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세상 것이 없다고 해서 근심하고 염려하고 걱정하는 것은 결국 복음이 그 마음을 채우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다.
이 땅에 오셔서 죄인을 위해 피를 흘리신 주님의 고귀한 피가 전혀 그 마음을 적시지 못하고 있어서 세상 것이 없으므로 인해서 근심하고 걱정하는 것이다.
복음의 기쁨은 보이는 것으로 채워지는 기쁨이 아니다. 이러한 기쁨은 보이는 것이 사라질 때는 기쁨도 같이 사라지게 된다.
또 더 좋은 것, 더 많은 것을 기대하는 욕심으로 나아가기 때문에 기쁨은 사라지고 다시 불만으로 뒤바뀌게 된다.
그러나 복음이 주는 기쁨은 보이는 것으로 채워진 기쁨이 아니라 보이는 것에 대한 욕구가 비워진 그 마음에 보이지 아니한 것으로 채워지게 될 때 몰려오는 기쁨이다.
3. 위로 ( 7: 5 – 8 )
5 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하지 못하였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었노라. 6 그러나 낙심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가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 7 그가 온 것뿐 아니요 오직 그가 너희에게서 받은 그 위로로 위로하고, 너희의 사모함과 애통함과 나를 위하여 열심 있는 것을 우리에게 보고함으로 나를 더욱 기쁘게 하였느니라. 8 그러므로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지금은 후회하지 아니함은, 그 편지가 너희로 잠시만 근심하게 한 줄을 앎이라.
고후 7: 5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 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하지 못하였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었노라. ( 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치 못하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라 )
바울의 전도 활동은 육신적 휴식이 없는 활동이었다.
그는 사방으로 환난을 당했다.
밖으로는 유대인들의 핍박과 이방인 우상숭배자들의 핍박이 있었고, 안으로는 인간적 연약과 두려움이 있었다.
주님을 따르는 전도자의 길은 많은 고난을 감당해야 하는 길이다.
고린도 교회 안에 서로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바울을 지지하는 자들과 아블로를 지지하는 자들이 생겼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다툼이 발생하게 되었다.
* 고전 3: 3-7 – 3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4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육의 사람이 아니리요 5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6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7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이런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바울이 잠깐 고리도 교회를 방문했지만, 문제의 해결은 고사하고 사태는 더욱 악화하였다. 이로 인하여 바울의 마음은 찢어질 듯이 아팠다.
그 후에 이 사태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여 드로아에 할 일이 있는데도 소식을 빨리 알고자 디도를 만나기 위해 길을 나섰다. 디도로부터 모든 것이 잘 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기쁨이 넘치게 되었다(7: 13).
이것이 본문의 배경이다.
1] 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치 못하였고
바울은 마게도냐에서 겪은 일들을 회고하면서 앞 절에서 언급한 고난 가운데서도 기뻐하는 이유를 계속 설명하고 있다.
본 절의 '육체'(*, 사륵스)는 신학적인 의미가 아닌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Bruce).
바울은 12: 7에서 '육체에 가시'를 언급했던바, 여기서 자신의 신체적 연약함을 나타내고 있다.
2]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바울은 마게도냐에 도착한 후 그들이 신자든 불신자든 간에 많은 적대자로부터 줄곧 박해를 받는 역경에 처했던 것으로 보인다.
3]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었노라.
바울은 심적으로 고통을 겪고 있었다.
그것은 분쟁에 말린 고린도 교인들을 치유(治癒)하기 위해 디도를 파견했던바, 고린도 교인들이 디도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에 대한 염려요, 부차적으로는 예정된 시점에 디도를 만나지 못함으로 야기 염려에서 비롯되었다(Plummer, Martin).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책망할 수밖에 없는 기회라 생각했다. 자녀들에게 왜 부모가 필요한가? 잘못할 때는 사랑하는 마음으로 책망하여 고처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몸에 이상이 발생하면 고통스럽지만 바로 치료하여야 불치의 병으로 발전하는 것을 예방할 수 있다.
고후 7: 6 위로하시는 하나님 - 그러나 낙심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가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 ( 그러나 비천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의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 )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고 복음을 위해 충성되리 일하려 하다가 힘이 빠지고 낙심한 자들을 위로하신다.
1] 그러나 낙심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바울은 그가 디도를 통해서 전달한 편지에 대해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반응하는 상태의 여부를 매우 심각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이렇게 볼 때 디도를 만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바울에게 있어 심적으로 커다란 근심의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Harris).
'낙심한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타페이누스'(*)는 본래 '지면상 낮은 위치'를 가리켰다.
* 겔 17: 6 - 그것이 자라며 퍼져서 높지 아니한 포도나무 곧 굵은 가지와 가는 가지가 난 포도나무가 되어 그 가지는 독수리를 향하였고 그 뿌리는 독수리 아래에 있었더라.
그런데 후대에 와서 '상태의 낮음'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었다.
* 롬 12: 16 -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 빌 3: 21 -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 약 1: 9 -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이 말의 더 깊은 신학적 의미는 세상에서 지위가 낮고 천한 자들로서 의지할 만한 그 어떤 인간적인 것을 소유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만 의지할 수 밖에 없는 자들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철저하게 당신만을 의지하는 자들을 위로하신다.
본 절의 '위로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개념은 1: 3-4에서 강조된 바이며, 이는 사 49: 13의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위로하셨은즉 그의 고난 당한 자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는 말씀을 상기케 한다.
본 절과 사 49: 13 말씀과의 연관성은 바울이 6: 2에서 역시 같은 장(章)인 사 49: 8을 인용하였다는 점을 고려할 때 매우 의미심장하다.
* 사 49: 8 -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은혜의 때에 내가 네게 응답하였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왔도다. 내가 장차 너를 보호하여 너를 백성의 언약으로 삼으며 나라를 일으켜 그들에게 그 황무하였던 땅을 기업으로 상속하게 하리라.
2] 디도가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
디도가 바울에게 돌아온 것이 바울에게 위로가 된 것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였다.
(1) 디도가 돌아옴으로써 바울은 그의 조력(助力)을 받을 수가 있었다.
(2) 디도에게 준엄한 편지를 주어 고린도에 보낼 때 고린도 교인들이 어떻게 반응할지에 대해 바울과 디도 두 사람 모두 불안했었다(13-15절).
그런데 고린도 교인들이 의외로 디도를 환대했기 때문에 디도는 자신감을 회복할 수 있었다.
(3) 디도를 통하여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태도가 매우 고무적이라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바울에 대한 고린도 교인들의 애정, 그를 보고 싶어 하고 그와 화목하기를 사모하는 마음, 그를 실망시켰던 행위들에 대해 회개하는 마음, 그리고 다시금 그를 따르고자 하는 열심 등에 관한 소식은 바울에게 더할 나위 없는 큰 위로와 기쁨이 되었다(7절).
고후 7: 7 너희에게서 받은 그 위로로 - 그가 온 것뿐 아니요 오직 그가 너희에게서 받은 그 위로로 위로하고, 너희의 사모함과 애통함과 나를 위하여 열심 있는 것을 우리에게 보고함으로 나를 더욱 기쁘게 하였느니라. ( 저의 온 것뿐 아니요 오직 저가 너희에게 받은 그 위로로 위로하고 너희의 사모함과 애통함과 나를 위하여 열심 있는 것을 우리에게 고함으로 나로 더욱 기쁘게 하였느니라 )
바울의 마음이 위로를 받고 기쁨을 얻은 것은 그의 협력자 디도가 그들로부터 돌아와서 그들에 대한 좋은 보고를 하였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위로이며 기쁨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악한 세상에서 하나님만 바라며 때때로 낙심하는 성도들을 도우시고 위로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이 세상에서 그들이 도움과 위로를 받을 데가 없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도우시고 위로하신다.
1] 그가 온 것뿐 아니요 오직 그가 너희에게서 받은 그 위로로 위로하고,
바울은 다른 사람을 책망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고통을 가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다. 바울이 책망하는 유일한 목적은 사람들을 올바르게 만드는 일이었다.
2] 너희의 사모함과 애통함과 나를 위하여 열심 있는 것을
그들이 순종하지 않고 사고를 저질렀을망정 그들의 마음 바탕에는 바울에 대한 참다운 열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러한 과정이 당장은 고통을 주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그들을 일으켜 세우려는 것이었다. 사람들을 낙심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격려하기 위해서였다.
다행히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의 권면을 잘 받아들여서 서로 화해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바울은 기뻤다.
* 시 133: 1-3 – 1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2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3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1) 사모함
바울이 고린도에 소위 '가슴 아픈 방문'을 한 후 양자 사이는 심각하게 냉각되어 갔다.
그래서 바울은 다시 고린도를 방문할 때 서로가 더 어렵게 되는 상황이 야기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방문을 피해야 했었다(2: 1).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전혀 달라졌다. 그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을 몹시도 보고 싶어 한다는 것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2) 애통함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의 슬픈 방문 때 보여준 그들의 행동, 즉 적대자들이 바울을 공격할 때 바울을 옹호하지 않았던 것에 대해 통회(痛悔)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바울과 함께 있지 못하는 것에 안타까워하고 있다(Barrett).
(3) 열심 있는 것
고린도 교인들은 놀랍게도 과거를 완전히 청산하고 바울을 위해 무엇인가를 하려는 열심을 보여주었다.
3] 우리에게 보고함으로 나를 더욱 기쁘게 하였느니라.
이렇게 변화된 고린도 교인들의 소식이 바울에게 전해졌을 때 그가 느꼈을 위로와 기쁨이 얼마나 컸을까에 대해서는 다음의 견해를 고려하면 능히 짐작된다.
즉 바울은 가슴 아픈 방문 이후 디도를 통해 준엄한 편지를 보내면서 이방인의 사도로서의 자신의 장래가 그 편지의 권위에 대한 고린도 교인들의 반응 여하에 달려있다고 보았다(Harris).
그리하여 그는 디도를 만나기까지 걱정과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5절).
바울의 기쁨은 잃었던 고린도 교인들을 다시 찾은 기쁨에 더하여 자기의 사도직에 대한 자신감을 회복한 기쁨이 있었던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었다(6절).
초대교회를 살펴보자.
* 행 2: 42-47 – 42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43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그들은 거대한 예배당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물 샐 틈이 없는 조직이 있는 것도 아니다. 세상적인 지위를 가진 자들도 아니다. 그들에게 성령의 충만함이 넘칠 때, 그들은 서로 사랑했다. 그 결과 유무상통(有無相通)했다.
이것은 제도나 법에 따른 것이 아니라 순전히 자발적이었다. 여기에 의미가 있다. 멋이 있고 흥이 있다. 이것이 교회의 참모습이라고 믿는다. 우리의 마음속에 성령이 충만할 때 이루어진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이요, 사랑하니까 화평이 오고, 기쁨이 온다.
고후 7: 8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 그러므로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지금은 후회하지 아니함은, 그 편지가 너희로 잠시만 근심하게 한 줄을 앎이라. ( 그러므로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지금은 후회하지 아니함은 그 편지가 너희로 잠시만 근심하게 한 줄을 앎이라 )
바울은 먼저 쓴 편지에서 범죄자를 지적하고 책망했던 것이 너무 심하여 그들이 낙심했을까봐 후회했으나, 그것이 그들을 잠시만 근심케 한 줄을 알고 이제 후회하지 않게 되었고 지금은 도리어 기뻐하고 있다.
1] 그러므로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이 편지에 대해서 혹자는 '고린도 전서'를 가리킨다고 보기도 하나(Farrar) '고린도전서'를 대부분의 학자는 이 편지를 소위 '눈물의 편지' 또는 '준엄한 편지'로 본다(Barrett, Harris, Robertson).
이 편지는 바울이 A.D. 55년경 고린도 교회에 대한 '가슴 아픈 방문'을 끝내고 돌아온 후 A.D.56년 봄. 디도 편으로 보낸 것으로 보이며 지금은 분실되어 전해지지 않고 있다.
2] 지금은 후회하지 아니함은,
바울이 '준엄한 편지'를 쓸 때 마음이 몹시 고통스러웠던 것은 사실이지만 조금이라도 그들을 정죄하려 하거나 고통을 주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3절).
도리어 그는 생각하듯 사랑하는 마음으로 편지를 썼다(2: 4. 6: 13).
그러나 이러한 의도와는 달리 고린도 교인들이 그 편지를 받고는 마음의 고통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바울은 잠시나마 그 편지에 대해 후회를 하였었다.
아마 그는 너무나 강한 어조로 편지를 쓴 것에 대해 후회했을 것이다.
3] 그 편지가 너희로 잠시만 근심하게 한 줄을 앎이라.
다행스럽게도 고린도 교인들의 고통과 근심은 지속되지 않았으므로 바울은 더 이상 '준엄한 편지'를 써 보낸 것에 대해서 근심하지 않았다.
만일 편지를 보낸 결과가 좋지 않은 것이었더라면 그때 바울은 그 편지를 쓴 것을 계속 후회하였을 것이다.
4.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 ( 7: 9 – 11 )
9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11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고후 7: 9 근심함으로 회개함 -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
그것은 그들이 근심함으로써 회개함에 이르러 바울에게 어떤 징계도 받을 필요가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범죄한 자를 포용한 문제에 대한 책망이 그 범죄자와 교회에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
1]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바울의 준엄한 편지는 잠깐 고린도 교인들에게는 근심을, 바울에게는 후회를 가져다 주었다.
2]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바울에게 기쁨을 안겨주었다. 왜냐하면,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의 편지를 받고 낙담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회개하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3]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여기에서 나타나는바, 근심에서 회개로, 후회에서 기쁨으로의 반전(反轉)은 바울이 쓴 편지 자체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개입 때문이었다.
본문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되었다는 것은 '이렇게 여러분이 마음 아파한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된 일이니 결국 여러분이 우리로 해서 손해 본 것은 조금도 없습니다'(공동번역)의 뜻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근심이 회개로 이어졌을 때 그것을 단지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 것이아니라 그 과정에 하나님의 섭리가 개입되어 있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하나님의 방법은 사람의 예상을 뛰어넘는다. 그러기에 때로 하나님께서는 근심을 통하여 회개에 이르게 하신다.
고후 7: 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 -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
바울은 두 종류의 근심과 그 각각의 결과들을 극명하게 대조시켜 설명하면서 앞 절 내용과 연결하여 계속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에 초점을 두고 있다.
근심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요 다른 하나는 세상 근심이다.
1]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저는 여러분에게 세상 것을 가지고 근심하지 말자는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 것으로 근심하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근심은 하고 싶다고 하고 하기 싫다고 않게 되는 것이 아니다. 내가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근심도 자연스럽게 그 방향을 달리하여 일어나는 것이다.
때문에, 만약 여러분들의 근심거리가 모두 세상적인 것으로 일관되어 있고, 믿음의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근심되지 않고 있다면 결국 여러분의 관심은 세상에 있지 주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자신이 세상 것으로 근심하고 있는 것 자체가 주님께 관심을 두지 않고 있는 결과임을 알고 그 근심 때문에 근심한다면 관심을 주님께 두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오늘 여러분들은 요즘같이 바쁘고 할 일이 많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과연 어떤 근심에 파묻혀 있는가를 살펴봐야 한다.
바쁜 일 때문에 주님에대한 관심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 문제로 통회하고 자복하면서 근심한 적이 있는가를 살펴보자. 바쁘다는 핑계를 대고 주님과 멀어진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성도는 세상의 바쁜 것 때문에 주님으로부터 멀어지는 듯한 자신이 발견될 때 그것으로 마음 아파할 줄 알아야 한다. 이것이 성령으로 살아가는 성도의 모습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것은 자기의 행위가 하나님의 판단에 합당한 것인가를 생각하여 자기의 잘못을 진정으로 뉘우치고 돌이키는 데까지 나아가는 근심이다.
그리하여 혹자는 이 근심을 죄에 대한 근심이요, 하나님의 은총을 저버린 행위에 대한 근심이라고 하여 '신령한 근심'이라고 정의하였다(M. Henry).
2]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자기의 죄와 부족을 깨닫고 하는 근심이다. 이런 근심은 많이 할수록 좋다.
왜냐하면, 그것은 회개와 구원에 이르기 때문이다.
* 시 34: 18 -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 도다.
* 시 51: 17 -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함께 한 자라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성령은 성도를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도하기 위해서 일한다. 그런데 정작 성도된 사람이 그리스도와 멀어질 때 성령이 우리 안에서 탄식을 한다.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탄식하시고 간구하심으로 성령이 함께 하는 성도는 자신이 주님과 멀어진 것 때문에 가슴 아파하고 회개하게 되는 것이다.
이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회개도 내가 하는 것이 아니요, 성령이 하도록 하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도 내가 믿음이 있어서 스스로 알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 내 속에서 탄식하시고 기도하시기 때문에 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고자 하고 자신이 주님과 멀어지는 것은 아닌가? 하면서 자기를 돌아보고 점검하는 사람은 내 믿음이 좋아서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 내 안에서 나를 위해서 탄식하시고 간구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성령이 함께하는 것에 대해서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럴 때 그 사람의 심령은 복음의 기쁨으로 채워져 가게 된다.
자기를 돌아보고 근심한다고 해서 성도가 되는 것도 아니고 구원받는 것도 아니다. 여러분이 생각할 것은 내가 주님과 멀어지는 것 때문에 근심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 이상하게 세상 것이 있고 없고보다는 주님과 멀어져 있느냐 가까워져 있느냐는 문제가 더욱 신경이 쓰이고 관심거리가 되어 있는 것, 그것은 나 자신이 이미 뭔가 다른 사람이 되어 있다는 것이고 다른 사람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3]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이에 비해 '세상 근심'은 분노하고 원한을 품으며 자기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애쓰는 근심이다.
이 근심의 결과는 낙담하고 좌절에 빠져 자기 파괴적인 상황으로 발전한다.
세상 근심은 세상의 일들로 인한 근심과 염려, 즉 의, 식, 주의 염려, 건강의 염려, 경제의 염려, 사회 환경의 불안 등이다.
이런 근심은 마음과 몸의 건강을 해치고 믿음까지도 잃어버리게 한다. 하나님을 믿는 자는 이런 근심을 버려야 한다.
* 눅 8: 14 -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이나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 눅 21: 34 -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우리는 세상의 모든 근심과 염려는 버리고, 믿음으로 바르게 살지 못하고 온전한 거룩함을 이루지 못한 것만 근심해야 한다.
이상에서 언급한 두 종류의 근심에 대한 성경의 전형적인 실례는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가인과 다윗이다.
형제가 서로 사랑하고 화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그 일이 어렵다. 형 가인이 동생 아벨을 들로 끌고 나가 쳐 죽였다. 이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성경은 형제가 서로 우애할 것을 강조한다.
* 히 13: 1 -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 롬 12: 10 -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형제의 화목은 하나님의 뜻이다.
* 딤전 6: 7-12 – 7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8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9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11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
개는 사람이 먹다 버린 뼈다귀를 가지고 싸운다. 어찌 사람이 물질로 싸워야 하는가?
우리는 예수의 피로 한 형제가 되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하나님의 자녀다.
* 마 12: 47-50 – 47 한 사람이 예수께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서 있나이다. 하니 48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49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이르시되,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 50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
* 요일 4: 20-21 – 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21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자기의 신하 우리아의 아내를 범한 다윗은 자기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였기에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을 받았다.
* 시 51: 1-19 – 1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 2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3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4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5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6 보소서. 주께서는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시오니 내게 지혜를 은밀히 가르치시리이다. 7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8 내게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들려 주시사 주께서 꺾으신 뼈들도 즐거워하게 하소서. 9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지워 주소서. 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11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12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13 그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 14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 15 주여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 16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17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18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쌓으소서. 19 그 때에 주께서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리니 그때에 그들이 수소를 주의 제단에 드리리이다.
둘째, 가룟 유다와 베드로이다.
유다는 예수를 배반하기 전에 회개할 기회가 있었으나 끝까지 타락하였다.
* 마 26: 24 -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반면, 베드로는 예수를 세 번 부인한 후 통곡하며 회개하였다.
* 마 26: 75 –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고린도 교인들은 후자의 경우에 속한다. 그들은 바울의 편지를 받고 회개하였으며 거짓 사도들로부터 돌아서서 하나님께로 향하였다.
이렇게 바울의 사랑('준엄한 편지')에 응답한 그들은 결과적으로 '영적 사망'을 낳는 죄의 길을 피할 수 있게 되었다(Martin).
고후 7: 11 자신의 깨끗함 -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명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저 일에 대하여 일절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
하나님의 뜻대로 한 근심은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
고린도 교인들은 잘못을 해결하기 위해 간절했고, 그들의 거룩함을 증거하기 위해 변명했고, 자신들의 잘못에 대해 의분했고, 하나님의 징벌을 두려워했고, 하나님의 은혜을 사모하였다.
그들은 회개하기에 열심을 내었고 악한 자를 벌하였다.
그들은 그렇게 함으로 자신들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다. 이것은 감사한 일이었다. 미련한 자는 교훈과 책망을 받으려 하지 않지만, 지혜로운 자는 겸손히 받는다.
* 잠 1: 7 -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우리가 책망을 들을 때 그것이 우리에게 해당하지 않으면 조심하면 될 것이고, 우리에게 해당하면 받아들여 고치면 될 것이다.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의 책망을 겸손히 받았다.
1]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겪은 근심이 진심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한 것임을 구체적인 실례를 들어 증명해 보이고 있다.
구체적 증거들은 다음의 7가지로 정리된다.
2]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이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잘못된 것들에 대하여 그 심각성을 진지하게 의식하고 그것들을 바로잡고자 하는 열심을 갖게 되었음을 말해준다.
3]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이에 대해서는 대개 고린도 교인들이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그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그들의 입장에 대해 탄원(歎願)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4] 얼마나 분하게 하며,
이것은 바울을 공격하여 그의 명예를 실추시킨 적대자들에 대해 고린도 교인들이 의분을 느끼게 되었음을 말해준다.
과거에 고린도 교인들은 이들에게 동조하였거나 아니면 적어도 그들의 행위를 방임하였다.
5] 얼마나 두렵게 하며,
이것은 바울을 다시 볼 면목이 없는 것, 또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나타낸다.
6]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7절에서처럼, 복음을 심어준 바울을 진정한 사도로 받아들이며 예전처럼 신뢰와 사랑의 관계로 회복되기를 간절히 열망하는 것을 나타낸다.
7]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이는 회개와 성결의 실천을 위한 열심 그리고 바울을 섬기려는 열심을 의미한다.
8]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이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을 공격한 자들을 공의에 입각하며 처벌하였음을 말해준다.
9]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본문의 의미가 고린도 교인들의 본래적인 무죄를 가리키는 것인지 아니면 본래 있던 잘못이 용서된 것을 가리키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견해가 엇갈린다.
혹자는 본문의 '나타내었느니라'(*, 쉬네스테사테)가 '입중하였느니라'를 뜻한다고 본다(Barrett).
고린도 교인들이 자신들의 무죄함을 입증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린도 교인들이 회개한 것(9-10절)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이에 대해서는 고린도 교인들이 실제로 범한 잘못을 회개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잘못을 범할 때 무관심했던 것을 회개한 것이라고 한다.
칼빈(Calvin)도 이와 유사한 견해를 보여주는바, 그는 '고린도 교인들이 편한대로 행동했기 때문에 잘못된 것처럼 보일 수 있었겠지만, 결코 그들 자신이 잘못을 범하지는 않았으며 이에 대해 그들은 분명하고도 진심에서 우러난 증거를 보여주었다.'라고 말한다.
이런 견해는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게 되었고'로 번역하고 있는 공동번역과도 일치된다.
그러나 어떤 학자들(Harris, Lowery)은 '고린도 교인들은 전에 실제적인 잘못을 했으나 지금은 회개하고 용서받았기 때문에 깨끗하게 되었다'는 의미로 본 절을 해석한다.
바울이 '눈물의 편지'를 쓰게 된 직접적인 배경은 고린도를 향한 '가슴 아픈 방문'이었다. 그런데 그 방문이 가슴 아픈 방문이 되었던 것은, 적대자들이 바울을 공격할 때 고린도 교인들이 보여준 태도와 관련이 있다.
즉 고린도 교인들이 적극적으로 동조했는지 아니면 방관자적 태도를 보였는지 분명하지 않지만, 그 어떤 경우이든 그들이 보여준 행동은 바울에게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때 보여준 행동에 대해 회개를 하였기에 지금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바울과 고린도 교인들 사이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 그리고 고린도 교인들 자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앞의 두 견해는 다 참조할 수 있으며 굳이 어느 것 하나를 선택할 필요는 없다.
고린도 교회와 우리 시대의 교회
주님은 과부와 재판장의 비유를 통하여 하나님의 응답에 대하여 교훈하고 있다. 불의한 재판관 일지라도 과부의 끈질긴 간청에 못 이겨 마침내 그녀의 소원을 들어주었다.
하물며 사랑과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의 간청을 들어주지 않을 이유가 없다.
* 눅 18: 1-8 – 1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2 이르시되,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 3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4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5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6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7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1) 항상 기도하고
이는 모든 일을 그만두고 오직 기도에만 몰두하라는 말씀이 아니다. 사도 바울도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 갈파한 바 있다(살전 5: 17). 이 말은 매 순간을 주님의 도움과 인도하심에 자신을 맡기는 순종의 삶, 곧 생활이 바로 기도인 삶을 살라는 뜻이다. 조용한 시간을 별도로 내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필수적으로 요청되지만, 구체적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실천해나가는 일이 더욱 중요하다.
또한, 이 말씀은 하나님께 어떤 기도 제목을 놓고 간구하는 자가 응답이 더디다고 생각하여 지레 포기하거나 낙심(落心)하지 말라는 권면이기도 하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깊고 오묘한 계획을 이해하지 못하고 조바심할 때가 많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간구에 반드시 응답하시되 적절한 때를 좇아 최상의 것으로 응답하신다(11: 9-13).
* 시 19: 14 -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특히 본 비유가 종말론적 주제와 관련되어 있음을 생각할 때 이 말씀은 악하고 음란한 말세의 때를 살아가는 성도들이 끝까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는 뜻으로 이해된다.
2)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6절에서 예수께서 정의한 이 사람의 속성은 '불의함'이다. '불의'(unjust, NIV)라는 말은 '종교적인' 혹은 '경건한'의 의미와는 정반대의 것으로서 세속성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사람은 완전히 세상적인 의미에서의 소위 '속물'(俗物)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성격은 이중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첫째는 그가 하나님을 경외치 않았다고 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는 '공경', '예배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런데 여기서의 의미는 그가 하나님의 심판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는 것을 지적하는 말이다. 또한, 그의 부패한 삶을 엿볼 수 있게 하는 두 번째 성격은 그가 사람을 존중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다. 이는 주로 고아나 과부같이 힘없고 보잘것없는 사람들(출 22: 22-24. 시 68: 5. 애 1: 1)을 멸시하고 그들의 권리를 보호치 않는 것을 의미한다.
3) 한 과부 : 성도를 상징한다.
고아와 과부는 의탁할 곳이 없고 무력한 자의 표본이다. 구약에서는 이미 이러한 자들을 압제하지 말고 보호하라고 하는 명령이 반복되어 나타난다(출 22: 22. 신 10: 18. 욥 22: 9. 렘 22: 3).
4) 듣지 아니하다가
원어 상으로는 '원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는 과부의 청원을 아예 무시하려는 의도를 반영한다. 이 불의한 재판관은 공정한 법 집행보다는 사리사욕(私利私慾)에만 밝았기 때문에 가난한 과부에게는 무관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 여인에게는 군침을 돌게 하는 뇌물도 없었고 뒤를 돌봐줄 만한 세력가도 없었다.
5-1) 번거롭게 하니
'수고', '고난', '어려움'의 뜻인 '코포스'(*)는 단순히 성가시게 하는 것이라는 의미보다는 막대한 지장을 주는 것, 즉 그 일 때문에 다른 정상적인 업무에 전념할 수 없게 타격을 주는 것을 의미한다.
5-2) 늘
헬라어 '에이스 텔로스'(*)는 '끝까지', '목적이 달성될 때까지'의 뜻이다. 재판관은 과부가 자신의 탄원이 받아들여질 때까지 판관인 자신을 번거롭게 하는 그 일을 절대 중단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을 한 것으로 짐작된다.
5-3) 괴롭게 하리라
헬라어 '휘포피아조'(*)는 '아래'의 뜻인 '휘포'(*)와 '눈'의 뜻인 '화스'(*)의 합성으로 이루어진 동사로서, 문자적인 의미로는 '눈 밑을 때리다' 또는 '눈이 멍들게 만들다'는 의미이다. 이는 동양권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어법(語法)으로, 얼굴에 먹칠을 당하는 것 곧 부끄러움이나 수치를 당하는 것, 또는 명예를 훼손당하는 것을 의미한다.
과부의 필사적인 탄원(歎願)이 귀찮든 혹은 자신의 명예가 실추될 것을 두려워든 간에 결국 불의한 재판관이 과부의 청을 들어주었다는 데에 본 비유의 핵심이 있다. 여기서 우리는 올바로 구하기만 하면 그것을 반드시 응답해 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상기해 볼 수 있다(마 18: 19. 요 15: 7). 우리는 항상 기도하며 낙심치 말고 결코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의 신실성을 굳게 믿어야 한다(삼상 15: 29).
6)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비유를 끝내고 그 비유에 대한 해석을 들려 주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스스로 생각할 여유를 주기 위한 말씀이다.
7-1) 밤낮 부르짖는
1절의 '항상 기도하고'라는 말씀의 또 다른 표현이다. '부르짖다'의 뜻인 '보아오'(*)는 고뇌의 부르짖음 혹은 원조를 청하는 외침의 뜻을 의미하는 '보에'(*)에서 나온 말이다. 본문에서는 하나님께 애원하는 태도를 암시한다.
7-2) 택하신 자들
이말은 구약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키는 데에 사용되었으며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의 공로에 힘입어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게 될 자들을 나타낸다(마 24: 31. 막 13: 27. 계 17: 14). 여기서 '택하신 자들'이란 주의 제자들로서, 과부나 고아와도 같이 예수의 죽음 이후에는 어떠한 사람도 의지할 자가 없는 무력한 자들을 상징하기도 한다. 따라서 그들이 의지할 분은 바로 하나님 한 분밖에 없다.
7-3)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헬라어 문장 '마크로뒤메이 에프아우토이스'(*)는 주석하기에 매우 난해한 구절로 알려져 왔다. 문제는 여기에 사용된 동사 '마크로뒤메오'(*)가 '지체하다', '미루다'의 뜻인지 아니면 '참다', '견디다'의 뜻인지에 관한 것에 있다. 또한, 전치사 '에피'(*)가 '...을 향해서'일 수도 있고 '...때문에'일 수도 있기에 여기서 가리키고 있는 '저희에게'란 구체적으로 택하신 자들인지 아니면 그의 원수들인지가 명확지 않다.
그리고 이 구절은 전체 문장과 연관성이 있는 것인가 아니면 완전히 독립적인 것인가 하는 것도 문제인데 이에 대해서
(1) 바이스(J.Weiss), 벵겔(Bengel)등은 '택한 자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하나님은 오랜 참으심으로 그들에게 응답하신다'고 하는 의미로
(2) 맨슨(J. W. Manson)은 '하나님이 택한 자들을 박해하는 자들에게 회개할 시간을 주기 위해서 그들에게 내릴 진노(震怒)를 연기하신다'고 하는 뜻을 가진 원래의 아람어적 표현이 잘못 사용된 문맥으로 이해하는가 하면
(3) 리젠펠트(H.Riesenfeld)와 예레미야스(Jeremias)등은 이 구절을 양보절로 이해하여 '비록 기다리게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그의 택한 자들을 구하지 않겠는가'라는 뜻을 가진 것으로 본다.
앞 구절과 8절과의 관련성 속에서 본다면 어쨌든 '아니'라고 하는 부정의 대답을 이끌어내는 구절인 것은 분명하다. 즉 하나님께서는 택한 자들의 밤낮 부르짖는 기도를 불의한 재판관처럼 오래 지체하거나 계속 외면치 않으시고 응답해 주신다고 하는 의미이다.
8-1) 속히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타케이'(*)는 일반적으로는 아주 짧은 간격 뒤에 곧 일어날 사건을 지시한다. 그러나 때로는 어느 정도의 기간이 흐른 후 '갑자기' 어떤 일이 발생하리라는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비교, 계 22: 20의 '타퀴'(*). 어쨌든 이 말은 하나님의 응답이 조속히 혹은 반드시 이루어지게 될 것을 시사한다.
8-2) 믿음을 보겠느냐
여기서의 믿음은 풀루머(Plummer)의 주장대로 그리스도로서의 인자에 대한 믿음일 수도 있고 또는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않는 기도의 자세를 견지하는 실천적 믿음일 수도 있다. 또한 이 말은 인자의 재림이 지연됨에 따라 많은 주의 제자들이 박해의 시대 속에서 낙망하여 허탄함에 빠지게 될 것을 예고하는 말씀이기도 하다.
결국 이 말 속에는 주의 재림이 늦어짐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세상 풍조에 휩쓸려 신령한 믿음의 길을 포기하게 되리라는 예측이 담겨 있다. 이 점에 관해 주님은 열 처녀의 비유를 통해 경고하신 바 있다(마 25: 5).
하지만 애굽에서의 오랜 종살이로 인해 하나님의 약속을 잊어버렸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끝내 출애굽을 명하셨으며(출 3: 10) 또한 바벧론 유수(幽囚)로 말미암아 다윗 왕국에 대한 언약이 끊긴 것으로 알고 소망을 잃었던 백성들에게 위대한 귀환은 기필코 성취되었다(출 12: 51). 이처럼 하나님은 당신의 구속 계획을 만세 전으로부터 차질 없이 하나하나 성취해 나가셨고 지금도 그 과정에 있는 것이다.
이번에는 말세의 요한 사도의 계시록을 살펴보자.
* 계 6: 9-11 – 9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 있어 10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 11 각각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쉬되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9-1) 죽임을 당한 제단 아래의 영혼.
(1) 여러 견해.
① 구약, 신약시대의 모든 순교자들이다.
⒜ 아벨의 피로부터 진리를 수호하다 순교 당한 모든 영혼들이다.
⒝ 스데반집사부터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 당한 사도들과 성도들의 영혼들이다.
⒞ 재림을 앞두고 일어날 대환난 때까지의 모든 순교자로 본다.
모리스[C. L. Morris] : 권세가들은 역사를 통하여 끊임없이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해 왔다. 이 사실은 오늘날에도 볼 수 있다. 종말에도 그러할 것이다.
래드[G. E. Ladd] : 요한은 모든 시대의 모든 기독교인 순교자들을 특별히 종말 때의 순교자들을 염두에 두고 있는 듯하다.
② 로마의 열 황제의 박해로 순교한 자들이다. A. D. 64년 네로[Lero]로부터 A. D. 305년 디오클레시안[Diocletian] 황제 때까지 순교당한 영혼들이다.
마운스[R. H. Mounce] : 네로[Lero]의 핍박으로 희생당한……
비더울프[W. E. Biederwolf] : 역사학파는 디오클레시안[Diocletian] 황제가 통치하던 A.D. 303년에 시작된 기독교인들의 순교와 관련시킨다.
③ 대환난의 전반기에 나타날 순교자들이다.
⒜ 미래주의자들이 취하는 이론이다.
⒝ 교회의 휴거 후에 이 땅에 거하는 자들이 순교한 영혼들이다.
⒞ 전 3년 반에 순교한 자들은 제단 아래의 영혼이고, 11절의 "그 수가 차기 까지 하라"는 순교자들은 후 3년 반에 순교한 자들이다.
왈부르드[J. F. Walvoord] : 교회가 휴거되면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은 이전에 부활 되었을 것이다. 여기 나오는 순교자들은 종말시대의 사람일 것이다.
팀 라하이[Tim Lahaye] : 휴거 전까지 믿지 않던 성도들이 7장의 증인들로 인하여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된 자들이다.
(2) 저자의 견해 - 아담부터 대환난 직전까지 순교 당한 모든 성도들의 영혼이다.
① 창세 이래의 모든 순교자이다.
⒜ 요한이 1세기의 박해받는 성도들에게 위로를 주는 것임을 생각해야 한다. 그러므로 창세 이래로 모든 순교자들의 영혼이다.
⒝ 대환난 직전까지 전 세계, 모든 교회와 성도들에게 위로로 주신 말씀이다. 그러므로 교회시대의 순교자를 포함한다.
⒞ 11절에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고 했다. 그러므로 10장 11절의 사명을 감당하는 11장 3절의 두 증인까지 포함한다.
② 순교자의 신원은 하나님이 대신 풀어주신다.
* 마 23: 34-36 - 3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고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구박하리라 35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36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것이 다 이 세대에게 돌아가리라.
⒜ 아벨의 핏소리가 땅에서 호소하여 하나님께 상달되었다.
* 창 4:10-12 - 10 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11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12 네가 밭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인 죄 값이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성취되었다.
⒞ 순교자들의 호소로 진노 재앙을 받게 된다.
* 계 6: 12-17.
* 계 11: 7-13 - 7 저희가 그 증거를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저희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저희를 이기고 저희를 죽일 터인즉 8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9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목도하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10 이 두 선지자가 땅에 거하는 자들을 괴롭게 한고로 땅에 거하는 자들이 저희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하더라. 11 삼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저희 속에 들어가매 저희가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 12 하늘로부터 큰 음성이 있어 이리로 올라오라 함을 저희가 듣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저희 원수들도 구경하더라. 13 그 시에 큰 지진이 나서 성 십분의 일이 무너지고 지진에 죽은 사람이 칠천이라. 그 남은 자들이 두려워하여 영광을 하늘의 하나님께 돌리더라.
③ 순교는 주님의 가르침에서 예고하셨다.
⒜ 순교는 기독교의 최고의 영예이다.
* 마 10: 38 -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 마 16: 24 -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 순교자들의 호소는 복수가 아니다.
* 눅 23: 34 -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저희가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쌔
* 행 7: 60 -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④ 하나님의 나라가 속히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9-2) 시기 - 다섯째 인.
본문은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 증거 때문에 죽임을 당한 순교자들의 영혼에 대한 묘사이다. 공관복음에서는 복음 증거로 인한 순교가 여러 모양으로 예고되었으며(*) 본문에서는 이미 성취되고 있다.
* 계 1: 9 -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 마 24: 9-10 - 9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10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져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 막 13: 9-13 - 9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사람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너희를 회당에서 매질하겠으며 나를 인하여 너희가 관장들과 임금들 앞에 서리니 이는 저희에게 증거되려함이라 10 또 복음이 먼저 만국에 전파되어야 할 것이니라 11 사람들이 너희를 끌어다가 넘겨줄 때에 무슨 말을 할까 미리 염려치 말고 무엇이든지 그 시에 너희에게 주시는 그 말을 하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요 성령이시니라. 12 형제가 형제를, 아비가 자식을 죽는데 내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13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 눅 21: 12-18 - 12 이 모든 일 전에 내 이름을 인하여 너희에게 손을 대어 핍박하며 회당과 옥에 넘겨주며 임금들과 관장들 앞에 끌어가려니와 13 이 일이 도리어 너희에게 증거가 되리라 14 그러므로 너희는 변명할 것을 미리 연구치 않기로 결심하라 15 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재와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 16 심지어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벗이 너희를 넘겨주어 너희 중에 몇을 죽이게 하겠고 17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18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치 아니하리라.
그 순교자들은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13: 15), '땅 위에서 죽임을 당한 모든 자'(18: 24)로서 일반적으로 역사상에 있는 순교 사건들 가운데 죽임을 당한 자들을 가리킴과 동시에 종말에 핍박을 당한 자들과 핍박으로 죽게 될 순교자들을 암시한다.
'영혼들'은 순교당한 '목숨'들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그들이 순교를 당했으나 살아있는 사람의 모습으로 보인 것을 의미한다(Johnson).
9-3) 순교자들.
(1) 순교의 이유 -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자로 인정받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① 하나님의 말씀
* 사 40: 9-11 - 9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 이르기를 너희 하나님을 보라 하라. 10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으며 11 그는 목자 같이 양 무리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 사 52: 7-10 - 7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8 들을지어다. 너의 파숫군들의 소리로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일제히 노래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시온으로 돌아오실 때에 그들의 눈이 마주 봄이로다 9 너 예루살렘의 황폐한 곳들아 기쁜 소리를 발하여 함께 노래할지어다. 이는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위로하셨고 예루살렘을 구속하셨음이라 10 여호와께서 열방의 목전에서 그 거룩한 팔을 나타내셨으므로 모든 땅 끝까지도 우리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도다.
* 사 61: 1-3 - 1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2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3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 계 14: 6-7 - 6 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하는 자들 곧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 7 그가 큰 음성으로 가로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
② 저희의 증거 - 참 빛과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기 때문이다.
* 신 4: 1-8 - 1 이스라엘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가르치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준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요 너희의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게 되리라. 2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라. 3 여호와께서 바알브올의 일을 인하여 행하신 바를 너희가 목도하였거니와 바알브올을 좇은 모든 사람을 너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에서 진멸하셨으되 4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붙어 떠나지 않은 너희는 오늘까지 다 생존하였느니라. 5 내가 나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하신대로 규례와 법도를 너희에게 가르쳤나니 이는 너희로 들어가서 기업으로 얻을 땅에서 그대로 행하게 하려 함인즉 6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함은 열국 앞에 너희의 지혜요 너희의 지식이라. 그들이 이 모든 규례를 듣고 이르기를 이 큰 나라 사람은 과연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로다. 하리라. 7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그에게 기도할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 하심과 같이 그 신의 가까이 함을 얻은 나라가 어디 있느냐? 8 오늘 내가 너희에게 선포하는 이 율법과 같이 그 규례와 법도가 공의로운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
* 마 24: 9 -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 행 20: 24 -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 고전 1: 17 -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③ 죽임을 당한 자 - 자기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막 8: 35 -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 행 7: 59-60 - 59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 계 14: 13 -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2) 순교자들의 위치 - 제단 아래.
'제단'에 대하여는 몇몇 견해가 있다.
Ⓐ 순수한 상징으로 해석한다(Alford).
Ⓑ 하늘에 있는 제단으로 해석한다(Jeremias, Delitzsach).
이 중에서 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본서를 통해 하늘의 제단이 여러 번 언급될 뿐 아니라(8: 3 ,5. 9: 13. 11: 1. 14: 18. 16: 7) 땅의 제단은 하늘 제단의 모형으로 제시되기 때문이다.
* 출 25: 9 -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대로 장막의 식양과 그 기구의 식양을 따라 지을지니라.
* 민 8: 4 - 이 등대의 제도는 이러하니 곧 금을 쳐서 만든 것인데 밑판에서 그 꽃까지 쳐서 만든 것이라. 모세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보이신 식양을 따라 이 등대를 만들었더라.
* 히 9: 23 -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이런 것들로써 정결케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더 좋은 제물로 할지니라.
'제단 아래 있어'라는 표현은 순교가 하나님께 드린 산 제물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Mounce). 이런 사실은 역사적으로 그리스도를 적대한 자들의 흉측한 박해를 상기시킴과 동시에 복음을 위해 종말에 교회가 순교의 각오를 새롭게 갖도록 한다(Ladd, Morris).
'제단'은 제물을 올려놓는 곳을 말한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은 자기들의 제단에 예수 그리스도를 제물로 올려놓은 제단이 되었다. 오늘날 우리도 순교자들의 제단 위에 올라간 제물이 되어 그들의 피를 신원할 때 새 하늘과 새 땅은 열리게 되는 것이다.
① 제물을 바치던 장소
* 창 22: 9 = 십자가의 예표 - 하나님이 그에게 지시하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고
② 성전의 중심부 - 하나님과 인간의 중보자이심
* 히 9: 9, 12, 22 - 9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의지하여 드리는 예물과 제사가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나니 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22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 히 10: 19-20 - 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③ 제단을 쌓았다 - 성전을 세웠다.
* 창 12: 7-8 - 7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곳에 단을 쌓고 8 거기서 벧엘 동편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는 벧엘이요 동은 아이라 그가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 창 26: 25 - 이삭이 그곳에 단을 쌓아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거기 장막을 쳤더니 그 종들이 거기서도 우물을 팠더라.
④ 다듬지 않은 돌이나 반석으로 쌓았다.
* 출 20: 25 - 네가 내게 돌로 단을 쌓거든 다듬은 돌로 쌓지 말라. 네가 정으로 그것을 쪼면 부정하게 함이니라.
* 신 27: 5-6 - 5 또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단 곧 돌단을 쌓되 그것에 철기를 대지 말지니라. 6 너는 다듬지 않은 돌로 네 하나님 여호와의 단을 쌓고 그 위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릴 것이며
* 삿 13: 19-20 - 19 이에 마노아가 염소 새끼 하나와 소제물을 취하여 반석 위에서 여호와께 드리매 사자가 이적을 행한지라. 마노아와 그 아내가 본즉 20 불꽃이 단에서부터 하늘로 올라가는 동시에 여호와의 사자가 단 불꽃 가운데로 좇아 올라간지라. 마노아와 그 아내가 이것을 보고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니라.
⑤ 층계가 없다.
* 출 20: 26 - 너는 층계로 내 단에 오르지 말라. 네 하체가 그 위에서 드러날까 함이니라.
⑥ 네 개의 뿔 - 도피처의 기능
* 왕상 2: 28 - 그 소문이 요압에게 들리매 저가 여호와의 장막으로 도망하여 단 뿔을 잡으니 이는 저가 다윗을 떠나 압살롬을 좇지 아니하였으나 아도니야를 좇았음이더라.
⑦ 향단
* 출 30: 1-10 - 1 너는 분향할 단을 만들지니 곧 조각목으로 만들되 2 장이 일 규빗, 광이 일 규빗으로 네모반듯하게 하고 고는 이 규빗으로 하며 그 뿔을 그것과 연하게 하고 3 단 상면과 전후좌우 면과 뿔을 정금으로 싸고 주위에 금테를 두를 찌며 4 금테 아래 양편에 금고리 둘을 만들되 곧 그 양편에 만들지니 이는 단을 메는 채를 꿸 곳이며 5 그 채를 조각목으로 만들고 금으로 싸고 6 그 단을 증거궤 위 속죄소 맞은편 곧 증거궤 앞에 있는 장 밖에 두라. 그 속죄소는 내가 너와 만날 곳이며 7 아론이 아침마다 그 위에 향기로운 향을 사르되 등불을 정리할 때에 사를 찌며 8 또 저녁때 등불을 켤 때에 사를지니 이 향은 너희가 대대로 여호와 앞에 끊지 못할 찌며 9 너희는 그 위에 다른 향을 사르지 말며 번제나 소제를 드리지 말며 전제의 술을 붓지 말며 10 아론이 일년 일차씩 이 향단 뿔을 위하여 속죄하되 속죄제의 피로 일 년 일차씩 대대로 속죄할지니라. 이 단은 여호와께 지극히 거룩하니라.
* 레 16: 12 - 향로를 취하여 여호와 앞 단 위에서 피운 불을 그것에 채우고 또 두 손에 곱게 간 향기로운 향을 채워 가지고 장 안에 들어가서
* 계 5: 8 - 책을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 사 장로들이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 계 8: 3-4 - 3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 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들과 합하여 보좌 앞 금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4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
10) 순교자들의 호소 -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
거룩하고 참되신은 하나님의 신적 속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신실하신 하나님에 대한 순교자들의 확신과 신뢰를 의미한다(Morris).
'대주재여'의 헬라어 '호 데스포테스'(*)는 원래 종이 주인을 지칭할 때 사용하는 용어로 절대적 권력과 소유권을 가진 자에 대한 호칭이다.
* 딤전 6: 2 - 믿는 상전이 있는 자들은 그 상전을 형제라고 경히 여기지 말고 더 잘 섬기게 하라. 이는 유익을 받는 자들이 믿는 자요 사랑을 받는 자임이니라. 너는 이것들을 가르치고 권하라.
* 딛 2: 9 - 종들로는 자기 상전들에게 범사에 순종하여 기쁘게 하고 거스려 말하지 말며
이러한 호칭은 신약에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 눅 2: 29 -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 도다.
* 행 4: 24 - 저희가 듣고 일심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가로되, 대 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은 이시오
* 벧후 2: 1 - 그러나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 유 1: 4 -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저희는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치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거리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
본문에 사용된 이 칭호는 절대적인 권능을 가진 하나님을 지칭한다(Johnson, Morris, Robertson).
(1) 큰 소리로
* 삿 16: 28 - 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로 강하게 하사 블레셋 사람이 나의 두 눈을 뺀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하고
(2) 거룩하고 참되신 대 주재여
* 시 9: 12 - 피 흘림을 심문하시는 이가 저희를 기억하심이여!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잊지 아니하시도다.
* 시 58: 10-11 - 10 의인은 악인의 보복 당함을 보고 기뻐함이여! 그 발을 악인의 피에 씻으리로다. 11 때에 사람의 말이 진실로 의인에게 갚음이 있고 진실로 땅에서 판단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 하리로다.
* 사 61: 2 -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 유 1: 4 -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저희는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치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거리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
(3) 땅에 거하는 자들의 심판.
땅에 거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하는 세상에 거하는 자들이다(3: 10. 11: 10. Burrows, Morris, Mounce). 땅에 거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하면서 종교계를 이끌고 있는 거짓 지도자들을 말한다(계 3: 10; 11: 10; 요 8: 23).
* 요 8: 23 -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 롬 12: 19 -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4) 신원하는 시기.
신원하여로 번역된 헬라어 '에크디케이스'(*)는 구약이나 신약에서 형벌과 보복과 연관되어 나타난다. 이것은 개인적인 보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보복의 권한은 인간에게 있지 않으며 오직 하나님에게만 있다.
* 롬 12: 19 -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본문에 나타난 신원 역시 하나님께 충성하는 자를 핍박하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인들에 대한 보응으로 하나님의 궁극적인 심판을 의미한다.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신약에 나타나는 중심 사상 가운데 하나이다.
* 눅 23: 34 -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 이다. 하시더라. 저희가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쌔
'신원(伸寃)'이란 원통함을 풀어준다는 뜻이다. 순교자들은 하나같이 자기들이 흘린 억울한 피의 누명(縷命)이 언제나 풀어질까 하고 학수고대하고 있다. 신원이란 하나님께 충성(忠誠)하는 자들을 핍박하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인들에 대한 보응(報應)으로 하나님께서 행하실 궁극적인 심판을 말한다(눅 23: 34. 롬 12: 19).
* 단 8: 13 - 내가 들은즉 거룩한 자가 말하더니, 다른 거룩한 자가 그 말하는 자에게 묻되, 이상에 나타난바 매일 드리는 제사와 망하게 하는 죄악에 대한 일과 성소와 백성이 내어준바 되며 짓밟힐 일이 어느 때까지 이를꼬? 하매
* 슥 1: 12 - 여호와의 사자가 응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여 여호와께서 언제까지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들을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려나이까? 이를 노하신지 칠십년이 되었나이다. 하매
11) 순교자들의 위로 - 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1) 각각 저희에게
* 마 10: 41-42 - 41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42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 살후 1: 6-8 - 6 너희로 환난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7 환난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8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2)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흰 두루마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톨레 류케'(*)는 '비품을 마련하다'를 의미하는 헬라어 '스텔로'(*)에서 파생된 표현으로 '옷들을 차려 입는 것'을 의미한다(3:4. 4:4. 7:9,13. 19:14). 하나님께서 순교자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는 것은 영생과 승리를 보장하심을 상징한다(Mounce, Johnson, Walvoord).
하나님께서 순교자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셨다는 것은 영생과 승리를 보장하여 주심은 물론이고 의로움과 거룩함을 찾아 입혀주셨다. 순교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하나님의 말씀의 정당성과 의로움과 거룩함을 모두 밝히고 나서 저들을 심판하시겠다는 말씀이다.
* 막 12: 38 -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가라사대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① 제사장의 옷 – 성결
* 레 6: 10 - 제사장은 세마포 긴 옷을 입고 세마포 고의로 하체를 가리우고 단 위에서 탄 번제의 재를 가져다가 단 곁에 두고
* 겔 42: 14 - 제사장의 의복은 거룩하므로 제사장이 성소에 들어갔다가 나올 때에 바로 바깥 뜰로 가지 못하고 수종드는 그 의복을 그 방에 두고 다른 옷을 입고 백성의 뜰로 나갈 것이니라 하더라.
② 하늘에 있는 군대 – 승리
* 계 19: 14 -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③ 권세자, 부자 – 축복
* 막 12: 38 -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가라사대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④ 신부의 옷 - 순결의 상징
* 계 19: 8 -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3) 잠시 동안 쉬되 - 재림, 부활, 휴거 때까지.
잠시 동안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티 크로논 미크론'(*)은 시간의 연속을 나타내는 목적격으로 동일한 사건의 연장 속에서의 휴식을 의미한다. 이는 복수를 신원하는 순교자들의 울부짖음으로부터의 휴식을 나타낸다(14: 13).
'쉬되'에 대하여 '잠시동안'과 연결지어 '탄원하기를 쉬었다'는 의미다(Bengel, Bousset). 혹자는 천상계의 축복 가운데 쉼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Alford, Morris, Swtet, Plummer). 이 두 견해는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 왜냐하면 천상에서의 '잠시 동안'이란 시간의 개념이 인간들에게는 영원과 같은 긴 시간이 될 수 있으며(20: 3), 의로운 자들의 쉼은 자연히 천상에서의 축복이기 때문이다(14: 13, Johnson).
(4)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 모두가 동일인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순교한 자들을 지칭한다(Mounce, Alford).
Ⓑ 순교치 않은 일반 성도들과 순교한 신자들을 지칭한다.
두 견해 중 전자가 타당한 듯하다.
* 단 12: 13 - 너는 가서 마지막을 기다리라. 이는 네가 평안히 쉬다가 끝 날에는 네 업을 누릴 것임이니라.
* 눅 18: 7-8 - 7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 시 119: 63 - 나는 주를 경외하는 모든 자와 주의 법도를 지키는 자의 동무라.
* 마 12: 50 -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
* 계 20: 4 -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노릇 하니
(5)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 대환난 때 두 증인의 순교자 수.
차기까지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사본에 따라 차이가 있어서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 어떤 사본에는 '플레로도신'(*, 완성되었다)으로 되어 있어 미래부정을 의미하는 부정 과거 가정법으로 해석된다.
Ⓑ 가득 차게 될 것이란 의미로 가득 채워질 때까지, 혹은 순교자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소명을 다하기까지를 의미한다.
두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한 듯하다. 본문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순교자들의 수가 채워져야 종말이 온다는 수적 개념 보다는 교회가 더 많은 순교를 각오하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함을 시사한다(7: 14. Ladd. Johnson).
* 딤후 1: 8 - 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 사 26: 20-21 - 20 내 백성아 갈지어다. 네 밀실에 들어가서 네 문을 닫고 분노가 지나기까지 잠간 숨을지어다. 21 보라 여호와께서 그 처소에서 나오사 땅의 거민의 죄악을 벌하실 것이라. 땅이 그 위에 잦았던 피를 드러내고, 그 살해당한 자를 다시는 가리우지 아니하리라.
* 마 10:21 -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비가 자식을 죽는데 내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 마 23: 34-35 - 3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고,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구박하리라. 35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 롬 11: 25 -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5. 화해로 인한 기쁨 ( 7: 12 – 16 )
12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그 불의를 행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그 불의를 당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오직 우리를 위한 너희의 간절함이 하나님 앞에서 너희에게 나타나게 하려 함이로라. 13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위로를 받았고, 우리가 받은 위로 위에 디도의 기쁨으로 우리가 더욱 많이 기뻐함은 그의 마음이 너희 무리로 말미암아 안심함을 얻었음이라. 14 내가 그에게 너희를 위하여 자랑한 것이 있더라도 부끄럽지 아니하니, 우리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다 참된 것 같이 디도 앞에서 우리가 자랑한 것도 참되게 되었도다. 15 그가 너희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과 떪으로 자기를 영접하여 순종한 것을 생각하고, 너희를 향하여 그의 심정이 더욱 깊었으니 16 내가 범사에 너희를 신뢰하게 된 것을 기뻐하노라.
고후 7: 12 너희의 간절함 -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그 불의를 행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그 불의를 당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오직 우리를 위한 너희의 간절함이 하나님 앞에서 너희에게 나타나게 하려 함이로라. (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그 불의 행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그 불의 당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오직 우리를 위한 너희의 간절함이 하나님 앞에서 너희에게 나타나게 하려 함이로라 )
여기서 논점이 되는 것은 바울이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고 있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누구인가 하는 것과 가해자의 구체적인 범죄 행위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이것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 불의를 행한 자와 그가 저지른 불의는 고전 5: 1 이하에 기록된 고린도 교회 내의 음행 사건, 즉 아비의 아내를 취한 패륜아 사건이었다고 보는 견해이다(Farrar).
이럴 경우 불의를 당한 자는 아들에게 아내를 빼앗긴 아비가 될 것이다.
Ⓑ 불의를 행한 자는 고린도 교회에 들어온 거짓 교사이며, 이들이 저지른 불의한 행위는 바울의 사도직에 도전하고 그의 명예를 훼손시킨 것이라고 보는 견해이다(Fallon, Martin).
이 경우 피해자는 바울이다.
전자의 견해는 2: 5을 볼 때 다소 타당성이 적어진다. 왜냐하면, 2: 5에 의하면 피해자가 바울과 고린도 교인들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후자의 견해가 전개되는 상황에 더 잘 부합된다.
문제는 바울이 고린도를 방문했을 때, 외부에서 온 거짓 교사들이 자기들의 권위를 내세우며(3: 1) 바울의 권위를 무시하는 언동을 하고 그의 인격을 모독하는 행위를 했을 때 생겼을 것이고, 그때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의 기대와는 달리 적극적으로 그의 편을 들지도 않고 그 적대자들을 제지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불의를 행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회개해야 하고 해명해야 했던 이유가 된다(9-11절).
또한, 바울이 적대자들로부터 무시당한 것은 곧 적대자들이 고린도 교인들을 무시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수수 방관했던 그들의 행동은 문제의 심각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었다(11절).
1]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그 불의를 행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그 불의를 당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쓴 것은 불의를 행한 자나 불의를 당한 자, 즉 한 개인을 향한 편지가 아니다.
바울은 온 교회가 그리스도의 말씀 위에서 든든히 서기를 원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죄에 대해서 아주 가벼운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무척 안타까웠다. 그래서 디도를 통해서 편지를 보내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혹 그들이 자신의 편지를 받고 마음이 상하지나 않을까 걱정을 했지만, 디도가 와서 그 편지를 본 교회가 회개함에 이르러 간다는 말을 듣고 무척 기뻐한 것입니다.
그 기쁜 마음을 표현한 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2] 오직 우리를 위한 너희의 간절함이 하나님 앞에서 너희에게 나타나게 하려 함이로라.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준엄한 편지'를 보낸 목적이 드러나 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잘못을 일깨워주기 위하여 '준엄한 편지'를 보냈던 것이고 혹시나 고린도 교인들이 그 편지에 대하여 오해하거나 근심하지 않을까 걱정하였다(8절).
그러나 고린도 교인들은 곧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는 자기들의 잘못을 뉘우쳤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이 '준엄한 편지'를 쓴 것은 불의한 자들이나 직접적 피해자인 바울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고린도 교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바로 서서 그들의 죄를 회개하고 성도들 간의 교제를 회복하도록 하기 위함이며, 아울러 바울에 대한 고린도 교인들의 열정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바울 사도는 분명히 자신이 편지를 써서 고린도 교회로 보냈고 그 결과로 고린도 교회가 회개하게 되었음을 들었으면서도 그 자랑을 자기에게 돌리지 않고 하나님에게로 돌린다.
그 이유는 자신이 쓴 편지의 문장력이 좋고 내용이 그들을 회개하게 할 만큼 감동적이어서 회개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셨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회개의 출발이 어디로부터인가를 안 것이다. 이것은 바울로 하여금 자기 자랑으로 나가지 않고 하나님이 고린도 교회의 배후에서 하신 일을 바라보고 기뻐하고 감사하게 된 이유이다.
우리가 바울의 마음을 살피면서 생각할 것은 출발점이다. 성도는 어떤 문제를 대하든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할 수 있어야 한다. 만약 자기로부터 출발하여 하나님께로 나아가려고 한다면 보이는 것은 불신앙 뿐이다.
본문의 경우와 같이 뭔가 결과가 좋은 일이 있을 때는 자기 자랑과 교만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고, 결과가 좋지 않을 때는 낙심해 버리고 원망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것이다.
성령이 함께 한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이 하신 일을 바라보면서 기뻐한다. 자기가 한 일을 바라보고 기뻐하고, 스스로 대견스럽게 여기는 것은 성령이 함께하지 않은 사람, 즉 불신자들의 모습이다.
불신자들은 다 자신이 잘한 것이고 자랑뿐이다. 배후에 하나님이 계셨다는 말은 아무도 안 한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은 하지만 그 은혜는 하나님이 하셨다는 은혜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힘을 줘서 내가 이런 좋은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고 말한다.
은혜로 출발하는 듯하지만 자기로부터 출발하면서 은혜라는 명목을 덧붙여서 듣기 좋게 만들고 있을 뿐이다. 겸손을 가장한 교만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한다.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지 아니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여러분의 몸이나 소유한 모든 것이 하나님 없이 된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여러분의 배후에서 하나님이 일하시고 여러분을 다루셨기 때문에, 지금의 여러분이 존재하고 있다.
성도의 기쁨과 감사는 하나님을 바라볼 때 발생한다. 나만이 아니라 내 형제를 바라보면서도 그 배후에서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일을 발견할 때 기뻐할 수 있고 감사할 수 있다.
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는 것이다. 배후에서 일하신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다. 여러분이 생활을 위해서 열심히 살아가고 땀 흘려 일하는 것은 옳은 일이다. 그러나 내가 일해서 이러한 결과를 가져왔다고 생각하는 것은 분명히 죄악이다.
고후 7: 13 위로를 받았고 -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위로를 받았고, 우리가 받은 위로 위에 디도의 기쁨으로 우리가 더욱 많이 기뻐함은 그의 마음이 너희 무리로 말미암아 안심함을 얻었음이라. ( 이로 인하여 우리가 위로를 받았고 우리의 받은 위로 위에 디도의 기쁨으로 우리가 더욱 많이 기뻐함은 그의 마음이 너희 무리를 인하여 안심함을 얻었음이니라 )
바울의 편지의 결과, 바울을 향한 고린도 교인들의 진실함과 간절함이 확인되었다.
편지를 통한 그의 책망은 그들의 회개를 가져왔다. 이로 인해 바울 일행은 위로를 받았다.
또 바울이 그들에게 보냈던 디도의 마음이 그들로 인해 안심함과 새 힘을 얻었기 때문에 바울은 더욱 많이 기뻐하게 되었다.
말씀의 봉사자의 위로와 기쁨은 성도들이 예수님을 잘 믿고 믿음 안에서 순종하며 살 때 온다.
1]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위로를 받았고,
바울이 편지를 보낼 때 목적했던바 그의 사도적 권위에 대해 고린도 교인들이 여전히 존중하고 있음을 확인했으므로 바울은 커다란 위로를 받았다.
(1) 하나님은 위로의 하나님이시다.
* 고후 1: 3-7 – 3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5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6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7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2) 위로는 소망을 갖게 한다.
* 롬 15: 4-5 – 4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5 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3) 남편에게서 위로를 받아야 한다.
* 룻 1: 9, 11-13 – 9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허락하사 각기 남편의 집에서 위로를 받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그들에게 입 맞추매 그들이 소리를 높여 11 나오미가 이르되, 내 딸들아 돌아가라. 너희가 어찌 나와 함께 가려느냐? 내 태중에 너희의 남편 될 아들들이 아직 있느냐? 12 내 딸들아 되돌아 가라. 나는 늙었으니 남편을 두지 못할지라. 가령 내가 소망이 있다고 말한다든지 오늘 밤에 남편을 두어 아들들을 낳는다 하더라도 13 너희가 어찌 그들이 자라기를 기다리겠으며 어찌 남편 없이 지내겠다고 결심하겠느냐? 내 딸들아 그렇지 아니하니라.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말미암아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 하매
* 룻 2: 13 - 룻이 이르되, 내 주여! 내가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나는 당신의 하녀 중의 하나와도 같지 못하오나 당신이 이 하녀를 위로하시고 마음을 기쁘게 하는 말씀을 하셨나이다 하니라.
(4) 하나님은 우리의 남편이시다.
* 사 54: 5 - 이는 너를 지으신 이가 네 남편이시라. 그의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이시며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시라. 그는 온 땅의 하나님이라 일컬음을 받으실 것이라.
* 렘 3: 14 -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나는 너희 남편임이라. 내가 너희를 성읍에서 하나와 족속 중에서 둘을 택하여 너희를 시온으로 데려오겠고
* 렘 31: 32 -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 호 2: 16 -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일컫고 다시는 내 바알이라 일컫지 아니하리라.
(5) 바울 사도의 가르침을 명심하자.
* 엡 5: 22-32 – 22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23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24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27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28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과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29 누구든지 언제나 자기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함과같이 하나니 30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라. 31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32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 골 4: 8, 11 – 8 내가 그를 특별히 너희에게 보내는 것은 너희로 우리 사정을 알게 하고 너희 마음을 위로하게 하려 함이라. 11 유스도라 하는 예수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그들은 할례파이나 이들만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하는 자들이니 이런 사람들이 나의 위로가 되었느니라.
위로(慰勞)는 따뜻한 말이나 행동으로 괴로움을 덜어 주거나 슬픔을 달래 줌을 의미한다.
* 롬 12: 8 – 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 창 24: 67 - 이삭이 리브가를 인도하여 그의 어머니 사라의 장막으로 들이고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사랑하였으니 이삭이 그의 어머니를 장례한 후에 위로를 얻었더라.
* 살후 2: 16-17 - 1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사랑하시고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17 너희 마음을 위로하시고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건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2] 우리가 받은 위로 위에 디도의 기쁨으로 우리가 더욱 많이 기뻐함은 그의 마음이 너희 무리로 말미암아 안심함을 얻었음이라.
어떤 이유에서인지 분명치는 않지만, 디도가 바울이 건네준 '눈물의 편지'를 가지고 고린도로 향할 때 다소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 디도가 그렇게 유쾌하지 못한 마음으로 고린도를 방문했을까'에 대해서는 단지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과거에 고린도에서 좋지 않은 경험을 했거나 아니면 바울이 당한 쓰라림을 자기도 당할 수 있다는 불안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디도는 전혀 예상 밖의 환대를 받았고 결과적으로 그의 마음은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동역자인 디도의 이런 모습은 바울의 기쁨을 더욱 배가(倍加)시켰다.
고후 7: 14 부끄럽지 아니하니 - 내가 그에게 너희를 위하여 자랑한 것이 있더라도 부끄럽지 아니하니, 우리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다 참된 것 같이 디도 앞에서 우리가 자랑한 것도 참되게 되었도다. ( 내가 그에게 너희를 위하여 자랑한 것이 있더라도 부끄럽지 아니하니 우리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다 참된 것 같이 디도 앞에서 우리의 자랑한 것도 참되게 되었도다 )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진리를 말했고, 디도에게 고린도 교인들에 대해 말한 말도 참되었다고 증거한다.
이것은 말씀의 사역자들에게 꼭 필요한 간증이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항상 바르고 참된 말만 전달해야 한다.
* 약 3: 1-2 – 1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2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1] 내가 그에게 너희를 위하여 자랑한 것이 있더라도 부끄럽지 아니하니,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문제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바울은 그들에 대한 신뢰를 굳게 가지고 있었고 비통한 심정으로 편지를 써 보내면서도(2: 4) 디도에게 고린도 교인들은 믿을 만하고 사랑이 풍부하다고 자랑을 했다.
참다운 목회자로서 바울의 넓은 마음과 신실함이 탁월하게 드러나는 대목이다.
디도가 환대를 받았다는 소식을 접한 바울은 자신의 확신을 배반하지 않은 고린도 교인들에 대하여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다.
2] 우리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다 참된 것 같이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진실만을 말했다(1: 17-20).
3] 디도 앞에서 우리가 자랑한 것도 참되게 되었도다.
성경에 보면 거짓말을 한다는 곳이 있다.
(1) 눈에 보이는 부모를 공경하지 못하면서 보이지 않은 하나님을 공경한다는 것은 거짓말하는 것이라고 했다.
* 마 15: 5-6 – 5 너희는 이르되, 누구든지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6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 도다.
(2)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죄가 없다고 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라고 했다.
* 요일 1: 8 -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3)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라고 했다.
* 요일 4: 20 -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고후 7: 15 두려움과 떪으로 - 그가 너희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과 떪으로 자기를 영접하여 순종한 것을 생각하고, 너희를 향하여 그의 심정이 더욱 깊었으니 ( 저가 너희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떪으로 자기를 영접하여 순종한 것을 생각하고 너희를 향하여 그의 심정이 더욱 깊었으니 )
1] 그가 너희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과 떪으로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이 보낸 복음 사역자 디도를 두렵고 떨림으로 영접하였고 그의 말을 순종하였다.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들의 바른 태도이다.
주께서 세우시고 보내신 자를 영접하고 순종하는 것은 곧 주님을 영접하고 순종하는 것이다.
* 마 10: 40 -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 마 25: 35-40 – 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37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38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39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요한삼서에 보면, 디오드레베라는 사람은 교회에서 으뜸이 되기를 좋아하는 자였다. 그는 전도자들을 영접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영접하려는 진실한 성도들을 교회에서 내어쫓기까지 하였다.
얼마나 악한 행동인가! 사도 요한은 그 서신에서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하나님에게서 나왔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고 교훈하였다(11절).
2] 자기를 영접하여 순종한 것을 생각하고,
바울 자신이 편지를 보낸 후 상당한 심적 조바심을 내었던 만큼, 디도 역시 고린도 교인들이 자기와 자기가 가져온 편지에 대해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에 대해서 불안한 마음을 가졌었다.
그러나 고린도 교인들이 나타낸 반응은 바울과 디도의 염려가 기우(杞憂)였음을 보여주었다.
고린도 교인들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디도를 영접하였고 더 나아가 순종하기까지 하였다.
'두려움', '떪' 그리고 '순종' 같은 단어들은 고린도 교인들이 여전히 바울의 권위를 존중하고 있음을 말해주며 바울의 대리인인 디도에 대해서도 동일한 태도로 예우해 주었음을 말해준다.
3] 너희를 향하여 그의 심정이 더욱 깊었으니
'심정'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플랑크나'(*)에는 '애정', '사랑', '긍휼'의 뜻이 담겨 있다.
고린도 교인들이 디도를 겸손하게 대접하고 그가 하는 말들에 대해 순종하였을 때 그는 대단히 큰 감동을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고린도 교인들이 선하고 훌륭한 신앙인들이라고 한 바울의 말(14절)이 사실이었음을 확인한 것도 물론이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디도의 마음속에는 고린도 교인들에 대한 편견과 오해(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을 실망시킨 것을 보면서 그런 마음이 생겼을 것이다)가 사라지고 대신 그들에 대한 사랑과 신뢰가 깊어진 것이다.
고후 7: 16 신뢰하게 된 것 - 내가 범사에 너희를 신뢰하게 된 것을 기뻐하노라. ( 내가 너희를 인하여 범사에 담대한 고로 기뻐하노라 )
고린도 교인들을 향한 디도의 사랑의 심정은 그들의 진실한 영접과 순종을 인해 더욱 풍성해졌다.
복음의 일꾼이 주의 백성의 진실한 믿음과 순종을 볼 때 그들을 향해 사랑이 깊어지고 풍성해지는 것은 당연하다. 또 디도의 이런 보고를 받은 바울도 기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을 향한 신뢰와 담대함 때문에 바울은 기뻐했다. 복음 사역자들에게 고난과 핍박과 교회로 인한 근심도 많았지만, 또한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기쁨도 풍성하였다.
1] 내가 범사에
이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조금도 거리낌없이 신뢰할 수 있게 되었다.
본문에 표현되는 바울의 신뢰와 기쁨은 자신이 애써 수고한 모든 사역이 수포가 되지 않았음을 확인한 데서 느끼는 목회자로서의 신뢰와 기쁨이며, 이것은 고린도 교인들의 현재 상태뿐만 아니라 미래에까지 이어진다.
바울은 이 모든 위로와 기쁨이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겸손한 자에게 위로를 주시는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이 바울이 실패하지 않는 목회자가 되게 한 중요한 이유였음이 틀림없다.
2] 너희를 신뢰하게 된 것을 기뻐하노라.
신뢰(信賴)는 굳게 믿고 의지함을 의미한다.
* 대하 20: 20 - 이에 백성들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드고아 들로 나가니라. 나갈 때에 여호사밧이 서서 이르되,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들아. 내 말을 들을지어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의 선지자들을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 하고
* 시 32: 10 - 악인에게는 많은 슬픔이 있으나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에게는 인자하심이 두르리로다.
* 시 71: 5 - 주 여호와여 주는 나의 소망이시요 내가 어릴 때부터 신뢰한 이시라
* 잠 3: 5 -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 사 26: 4 - 너희는 여호와를 영원히 신뢰하라.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심이로다.
* 빌 3: 3-4 - 3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 4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 두려움으로 깨끗하게 하자.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영육의 더러움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여 온전한 거룩함을 이루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거룩함과 의 가운데 사는 것이다.
죄가 인류의 모든 문제의 근원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영육의 모든 더러움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여 온전한 거룩함을 이루어야 한다.
둘째, 우리는 세상 근심은 하지 말자.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만 하여 참된 회개와 구원에 이르러야 한다.
의, 식, 주의 염려, 건강의 염려, 경제의 염려, 사회 환경의 불안 등의 세상 근심은 우리의 믿음을 약하게 만들고 파괴한다.
우리는 그런 근심은 하지 말고 하나님께 다 맡겨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해야 한다.
우리는 죄를 철저히 미워하고 버리고 바로 살기를 결심해야 한다.
셋째, 하나님은 복음 사역자들에게 많은 고난 중에서도 위로와 기쁨을 얻게 하신다.
그것은 특별히 교인들이 주께서 세우시고 말씀을 전하게 하신 자들을 영접하고 그들의 교훈에 순종하여 죄를 범한 자들이 회개할 때 생긴다.
목사들은 많은 고난 중에도 위로와 기쁨을 얻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