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월꽃
-해방 60주년기념 8.15 통일 대축전에서
양백재인 박 희 용
1. 예천에서
내 오늘 나그네 되어 길에 서다
바라보면 아득해라 기와빛 소백산맥 너머
지난 겨울 북서풍 모질게 불어오던 서울 가는 길
이천 오 년 팔월 십 사일의 햇살은
해방맞이 예순 번째의 뜨거워서 고운 햇살은
예천 버스 정류장 앞 쥐똥나무 이파리마다
공평하게 떨어지고
예약없는 손님을 기다리는 중년의 택시 기사들이
지었다가 금방 허무는 오늘 하루벌이 지폐 위에 떨어지고
풍양가는 버스차비 천 원을 조르는 노파의
굵은 주름 가득한 얼굴에 떨어지고
어머니 나라 치마꼬리 붙잡고 숨어있는
어린 것들의 손바닥에 떨어져
강물이 된다 예천에서 서울까지 붉게 흐르는
농민들은 이제 헛간 깊숙이 숨지 않는다
뒷담을 넘어 산으로 도망하지 않는다
군청이 부르면 즉각 대령하는 이밥이길 거부하며
농협의 만만한 된장찌개이길 거부하며
예천농민회 지도부 네 사람은
농투성이들 가슴에서 성냥개비 한 개씩 뽑아
아리랑표 다황곽 여러 개 만들어 차고
밀짚모자 삐딱하게 눌러쓰고
일렁이는 눈빛으로 서울 가는 길에 나섰다
해마다 관의 돈을 빌려야 사는
도마 위에 오른 생선 신세인 젊은 축들은
재빠르게 눈치를 보며 국보법 뒤로 숨고
새파랗게 날선 독을 뚝뚝 내뿜는
제아무리 거칠고 억센 가시풀덩쿨도
연하디 연한 토끼풀한테는 진다고 믿으며
안동대 운동권 출신 부인과 함께 고향을 지키는 총무 김구일이
사람이 안 건드리면 산짐승도 제길만 간다며
주흘산에 토막을 짓고 민족종교를 한다는 회장 임재국이
평안도에서 열 다섯 살 때 나와 서울에서 택시기사를 하다
예천에 정착해 안경점을 하며 먹고산다는
학력은 낮지만 책을 많이 읽어 아는 게 많다는
민노당 예천지구당 골수당원 안성준이
농촌에선 당최 해먹을게 없어요
금 좀 오를만하면 전부 수입해대니 넋두리 하다가
고속도로 옆을 지나는 여름 배추 한 차를 보고
야 한 오백 벌겠네 금방 알아보는 부회장 최재영이
반백이 되도록 초등학교 교사로 쫀쫀하게 살다가
팔월에 무슨 봄바람이 들어 졸지에 예천농민회 임시회원이 된,
수입개방을 비판하는 최재영이 말에
'나 같은 도시소비자 입장에선...' 속으로 말하는 박희용이,
정작 밥술정도는 먹는 축들이 서울로 간다
2. 서울 가는 길
윗대가리를 바꿔야 해
농민의 대표가 대가리가 되어야 해
군청직원들은 기계야 군수가 조종하는 기계
조합원이 농협의 주인이야
그래야 예천을 바꿀 수 있어
그래야 세상을 바꿀 수 있어
뚫린 목구멍이라 말은 쉽게 나오지만
죽창을 아무리 많이 깎아도
죽은자들이 결코 바꿀 수 없던 세상을
이젠 산자들이 뭉치면 바꿀 수 있다고
손가락 두 개만 바로 찍으면 바꿀 수 있다고
민주주의는 책 속에서 엄숙한 표정이지만
군민의 칠할이 넘는 농민들은 전혀 움직이지 않고
선거는 할 때마다 꺾이고
토호들은 여전히 군 기관장으로 든든하다고
농협 감사나 이사가 된 축들은
감투만 쓰면 사람이 달라진다고
92년식 산타모 차소음보다 더 큰 소리로 푸념하면서
작년 금강산 남북농민대회에서 만나 씨름을 한 북한농민 일곱이
벗어보니 전부 말랐고 들어보니 할 거 없더라고
우리 쪽 대표들은 뱃살이 방방하더라고
낮은 목소리로 말하는 농민회장 임재국이 눈동자에 찍힌
북녘의 산줄기를 따라 우리는 소백산맥을 넘었다
입과 눈에 한껏 고이는 팔월 햇살을 풀어내어
저마다의 가슴에 되풀이 유황칠을 하면서
3. 통일축구
팔월의 오후 상암동 월드컵 축구 경기장 바깥에
남도의 대나무들이 살아서 펄럭이고 있다
전북대 전주교대 민노당 김제지구당
높이 든 깃발마다 조국통일이 나부끼고 있다
전라도 우구치에서 동학군이 녹을 때
뿌리째 뽑혀버린 줄 알았던 남도의 대나무들이 되살아
조국통일 필승 코리아 한 목소리를 내어
보라색 나팔꽃을 떼로 피우고 있다
공권력을 싣고 온 버스가 한 줄로 선 옆에
무표정한 얼굴로 부동자세를 한 젊은이들이
'씨발새끼' 라는 고참의 욕을 낮은 목소리로 들으며
한 시대의 길 잘 든 로보트로 서 있었다
몇 걸음 떨어진 보도에는
두 눈이 뚜렷하고 얼굴이 반듯한 또 다른 젊은이들이
박꽃으로 피어 소복하니 앉아 있었다
하얀 청춘을 흔들며
북녘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슴 빛깔이 같아 오늘 이 자리에 선 육만의 함성이
팔월 십사일의 하늘을 굴리고 있다
계산이 빠른 정객들의 연설 소리보다 더 우렁차게
남과 북은 하나다 조국통일
동심원을 그리며 삼천리 금수강산 방방곡곡으로 번져간다
진보를 생각하는 가슴마다 촛불이 켜지고
온 겨레가 한 목소리로 남과 북은 하나다 조국통일
전광판에 반짝이는 남측과 북측 우리 한글
손에 손마다 흔드는 푸른 한반도기
1:0 2:0 3:0 북측이 밀린다
주눅들지 말아라 북의 젊은이들
한 골 넣어라 한 골이라도 넣어라
국가보안법에 걸릴까 걱정되지만
키도 같고 몸무게도 같고 표정도 같은
남과 북의 젊은이들
약자여 한 골 넣어라 제발 한 골 넣어라
양쪽을 응원하는 소리가 무섭게 일어선다
슛 슛 슛 짧고 낮은 호령 뒤에
동원조직들 사람들의 아 아 탄성
건너편은 서울 시민들 이쪽은 조직동원들
저 쪽에 앉아있는 사람들은 어느 편을 응원할까
저 쪽의 서울 시민들 보아라
북측 응원하는 소리 하나도 없잖아
밀짚모자 쓴 사람들이 수군대는 소리
저 쪽에는 내 고운 딸이 앉아 있는데
노동자 농민들이 꿈꾸는 세상
그 너머에 내 딸이 앉아 있는데
4. 이 땅에 다시는 전쟁이 없도록 하기 위해
저 깊은 마음속에서 솟아나는
뜨거운 맹세 하나 때문에
동서남북 사방으로 난 길을 걸어
오늘밤 이 곳 한 점 경희대 노천극장에 모여
저마다의 몸짓으로 춤을 춘다 통일의 춤
이 땅의 뚜렷한 진보들이 모여
남몰래 감추었던 붉은 심장 꺼내들고
이 땅에 다시는 전쟁이 없게 하자
우리끼리 우리 힘으로 다시 합치자
생김새가 같은 사람들의 가슴에서 솟아나는
그 함성 그 푸른 노래가
남과 북 강산 너머 아득히 메아리친다
황해바람 일어나는 강화에서 개풍 장단 연천을 지나
태백산맥 기슭 차오르며 철원 화천 양구
동해로 내려가는 길 고성 통천까지
이 땅에 사는 생명을 편가르는 이념은 몰라요
태어나 자란 고향 때문에
얼굴 하나 아름 하나 모르면서도 서로가 적이 된
이 땅의 어여쁜 젊은이들
그 두 눈에 사람이 보이도록
개인화기 총구가 낮아지도록
만나자말자 수인사 다음 말을 통하고
담배를 나누며 고향과 사랑 이야기
함경도 아바이 전라도 어마이
소주잔에 김치찌개 한 냄비 같이 나누며
경상도 선배 평안도 후배 고루 챙기도록
오늘밤은 하나다 죽어도 하나다
새벽을 걸어 저녁을 지나
조용한 아침의 나라 삼백 육십 오일 내내
두 주먹 굳게 쥐고 신나게 흔들어라
막춤이 짙어지는 동지들의 강 너머
이 땅에 꼭 한 번은 세우고 싶은 나라
젊은이들을 기다리는 나라
아스팔트도 뚫고 솟아나는 봄날의 풀꽃처럼
한국말 하는 칠천 오백만 가슴마다
그리움으로 피는 나라를 위해
5. 우리끼리 마음합쳐 잘살아 보자
형형색색의 깃발을 따라
젊은이들이 아스팔트길을 달리고 있다
누가 막아내나 저 푸른 물결
가득 채워졌다가 다시 낮은 데로 흘러
세상의 모든 것들을 안아 주듯
둥둥 시대를 고발하며 북은 울리고
사람들은 결연한 표정으로 대학로에 앉았다
팔월 해방의 날 뜨거운 햇살 속에서
서울매미는 요란스럽게 울어대고
프라타나스 가로수의 근심을 받으며
먼길을 걸어 이제야 나타날 미래를
마음속으로 기다리는 사람들은
흰머리와 검은머리를 서로 섞으며
끝없이 줄지어 앉아 있다
무엇이 이 사람들을 이 자리에 앉게 했을까
한 주먹 돈으로도 결코 굽히지 못할 사람들이
쪽수를 보태기 위해 현장에 서기 위해
이 땅의 진보가 시퍼렇게 살아있음을
온몸으로 증명하기 위해
사람의 어깨를 서로 엮은 채
팔월의 함성을 온몸으로 토해내고 있다
한 생애를 진보에 바친 늙은투사들의 연설에
신나게 박수를 치면서 우리는
겨울이 물러간 이 땅에 돋아날 싱그러운 봄날
들녘마다 달래 냉이 산에 산마다 진달래
그득할 그날을 예감하며
저마다 마음속에 한 자 한 자 새기고 있었다
우리끼리 마음합쳐 잘살아보자
6. 샤워를 하며
샤워를 한다
잔치는 끝나고 밀려드는 가벼운 쓸쓸함을 씻기 위해
내 온몸에 묻어온 서울 먼지를 씻어내기 위해
샤워를 한다
술잔을 부딪치며 쏟아낸 허전한 약속들
내가 뱉은 말들을 용서받기 위해
샤워를 한다
주한미군 철수 구호는 아직 과격한 것 아닌가
속으로 생각하면서도 앞사람 따라 흔든 팔을 변명하기 위해
잔잔한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샤워를 한다
오른쪽으로 틀면 차가운 물이고
왼쪽으로 틀면 뜨거운 물이다 금속제 수도꼭지
내 몸에 알맞은 물은 어디쯤일까
어디쯤 틀어야 내 몸에 알맞은 물일까
여름엔 차가운 물 겨울엔 뜨거운 물이 좋다지만
반백의 나이에 알맞게 내 계급에 알맞게
너무 차갑지도 않고 너무 뜨겁지도 않은
그 물은 수도꼭지 어디쯤일까
첫댓글 한 무리의 구중속을 헤집고 다니며 구호하는 저자신이 거기 있었군요
원본 게시글에 꼬리말 인사를 남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