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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5월 22일(금)
이상한 꿈속 장면들에 잠을 깨어보니 소변도 마렵거니와 자세가 부자연스러워 꿈속 장면도 그런 장면이었던 것 같다. 시간을 보니 아침 6시이다. 거런데 이곳 기차안 2층은 빛하나 들어오지않는 위치요 커튼까지 쳐져있어 더더욱 그렇다 간이역에 기차는 머물렀다. 내려가 양치질을 하고 물티슈로 세수를 하고 나니 어제 저녁도 굶어선지 배가 고프다. 아직 이들에겐 밤시간이라 다들 자고 있고 내릴사람 내리고 탈사람만 움직인다. 지난번 왔을때에는 짜이도 들고다니고 도시락도 배달해 주곤 했었는데 시간이 되어야 하겠지. 이곳시각 8시반이 가까워 오는데도 기차에 탄 이 사람들은 아직 코를골고 자고 있고 간간이 알람소리와 전화벨 소리가 나지만 곧 조용해진다.
아침 시간이지만 아침을 먹을 방법이 기차 밖에서 사다가 먹을 방법뿐인데 잠시 잠간 쉬었다가 떠나기에 먹을것을 사다가 먹기에는 그리 쉽지가 않다.
하는 수 없이 좀 참자, 물 한병을 확보 하였으니 목이 말라 죽지는 않을 것이고 배고프면 물을 마시면 되지를 않는가. 수 없이 많은 간이역을 거쳐 시간을 훌적 넘긴 오후 1시 반이나 되어서야 고락푸르역에 가까이 다가왔다. 같은칸에 탔던 한 사람에게 하리 전화번호를 보여주며 전화좀 해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흔쾨히 전화를 걸어 주었다. 그런데 하리가 전화를 받지를 않는것이 아니가. 어쩔 도리가 없어 마지막역인 고락푸르역에 도착을 하여 짐을 끌고 기차를 내려 두리번거려 짐꾼을 부르려고 하는 순간 하리가 나타나 반갑게 상봉을 할 수 있었다.
이 짐을 짐꾼에게 맞겨 말어 하리가 주춤 거리더니 짐꾼을 불러 두 가방을 맡기고 가방 하나는 하리가 들러메고 나는 노트북가방을 둘러메고 역 밖으로 나왔다. 시원한 나무그늘에 자리를 잡고 한국에서 일하는 나야크 동생을 만나 전해주라고 부탁한 중고 컴퓨터를 주어야 하기에 아닐에게 전화를 하여 나야크 동생 전화번호를 알려 달라고 하였다. 나올때 자동차를 가지고 나오라고 하였더니 오토바이를 타고 나왔다. 하리가 하는말이 자동차로 하리 집까지 갈려면 기름값과 500루피를 달라고 하였단다. 그러면서 하리가 하는말이 목사님 이렇게 말하는게 친구가 될 수 있어요 하며 난색을 표했다.
주변에서 많은 오토릭샤가 손님을 잡기 위하여 외국인인 나에게 많은 관심을 갖고 여러사람이다가와서 택시 택시하며 자기 릭샤를 타고 갈것을 말한다. 하리가 몇사람을 상대하고는 한 오토릭샤를 선정하여 짐을 싣고 출발을 하였다.
어제 저녁부터 물만 먹은 나에게는 이게 배고픔도 잊어졌다. 하리도 아침에 나와서 점심도 먹지않은 상태 이겠지만 이들은 하루에 두끼뿐이 안먹기 때문에 그리 배고픈것을 못느끼리라. 역을 벗어나 길거리에서 쥬스를 만들어파는 사람들이 있어서 잠시 오토릭샤를 세우고 망고쥬스를 하여 그보다 사탕수수나무 쥬스를 먹어보았었기에 슈가트리쥬스라고 했더니 옆에서 발동기를 돌려 열심히 몇 번이고 누름틀에 넣어 돌려 짜낸 쥬스를 한컵 들려준다. 하리와 오토릭샤기사 이렇게 셋이서 한잔을 먹었는데 하리가 한잔 더 먹으라고 억지로 한잔을 더준다. 어제 저녁부터 아무것도 안먹고 물만 먹은 상태인데 또 사탕수수 즙만 두잔씩 먹어도 괜찮을까 하면서도 한잔을더 마셨다. 밥은 아니더라도 물로 배가차니 포만감이 느꼈다. 덜컹거리며 얼마를 달렸을까. 기차표에 찍힌대로라면 고락푸르 기차역에 오전 10시15분에 도착했어야 하는데 오후 1시반에 도착을 하였고 2시경 기차역에서 오토릭샤를 타고 낮익은 길과 집들 사이로 덩컹대는 것은 그냥 그런거지 하듯 하고 하리집로 가는도중 하리가 집과 통화를 하던중 한국에서 일하다가 불법체류자로 일하다가 체포되어 강제 출국을 당한 옴이 나의 오는 소식을 듣고 하리 집에 오고 있다는 것이다. 엉덩이는 맨시트에 땀으로 끈적거려 불쾌하기 짝이없고 먼지로 코는 간질간질 거리고 온 몸에 배어난 땀과 얼굴에 흐른 땀으로 끈적끈적 찝찝하기 그지없다. 드디어 하리 집에 도착하니 오후 4시반이나 되었다. 오던길에 과일 가게에 들려 과일조금 아이들 먹을 과자 몇가지 사가지고 온 것인데 이렇게 시간이 걸렸다.
하리 집에 도착하니 옴도 와 있었고 어린아이들로 부터 어른 할것 없이 많은 사람들이 낮익은 얼굴로 반겨준다. 이곳 하리 집으로 다시 올 수 있었던 것은 지난2008년도 5월달에 아닐집을 방문하여 지원 어린이들을 선정하고 돌아갔다가 10월 인도 나갈랜드를 거처서 다시 고락푸르 아닐집에 갔다가 어린동생과 엄마가 짐승에게 물려 죽었다는 한 어린이(아가쉬)를 지원대상자로 선정하고 다시 10월에 방문을 하였을 때 아버지마저 돌아가셔서 시집을 간 누나 집으로 가서 산다는 아가쉬를 만나고 아닐 집으로 물어 물어 돌아가던 중 상상도 못했던 하리 마을을 지나게 되어 하리 마을을 지나다가 물을길러 나오는 하리를 만나게된 역사로 말미암아 인도 장학지원 사역을 시작으로 교육시설 및 의료시설 그리고 교회를 세워나가며 자국 선교사를 파송하는 사명의 한 모퉁이 돌이될 땅을 하리가 기부를 하는 역사가 열렸다.
현지의 사정과 여러 문제가 내포되어 있기에 전화나 편지로 될 수 없기에 이렇게 서둘러 다시 오게된 것이다. 말도 정확하게 듣거나 전달하기가 불가능한 이 상황에 나는 무엇을 구하고 의지하겠는가? 오직 나를 이끌어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만을 무기로 삼고 여기까지 온 것이다.
빈틈 없이 세워 가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눈으로 보고 믿음의 능력과 역사를 이루어 가심에 다시한번 나의 하나님을 찬양하며 감사를 돌립니다.
좀더 자세히 설명을 하자면 하리가 2005년도에 한국에 왔다가 파송선교교회에 출석을 하였고 그러던 중 자기집에 있는 땅을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하였었다. 그런 계기가 있었던 바 진실된 마음에서 하였던 그냥 말로만 하였던 것이든 하나님은 오늘 이렇게 이 하리의 땅을 기부하게 하셨고 이제 이곳에 교육시설인 학교를 세울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 나의 눈에 보이는 현장과 생각으로는 기부한 부지가 좀 작게 느껴져 옆에 붙어있는 땅을 사려고 하는데 그리 쉽지많은 않을 것이라는 생각도 해본다.
짐을 내리고 오토릭샤 기사를 돌려보내고 대충 짐을 풀어 구별 한뒤 작년에 와서 보아두었던 교회 간판이 있었는데 그곳에 외국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좀 더 자세한 도움의 방법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하리가 그곳에 가보자는 것이다. 옴과 함께 오토바이를 타고 셋이서 같이 그곳을 갔는데 문제가 발생했다. 작년에 보였던 간판이 안보이는 것이다. 나의 생각에는 작년에 오릿사에서 일어난 선교사 추방 사건과 기독교인 핍박으로 많은 교회가 불탔고 기독교인이 죽엄을 당해 많은 사람들이 정글로 피신하여 어려움이 이만 저만이 아니라던 이야기가 생각이 났다.
혹시 그때의 영향이 이곳까지 미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하리가 이리저리 다니며 알아보더니 큰 바람으로 인하여 간판이 떨어져 나가 다시 달지를 못하고 있으며 외국 사람은 어디에 사는지 알 수 없다고 한다. 내일 다시 알아보기로 하고 돌아왔다.
옴은 시간이 늦어져 다시 집으로 갔다가 내일 아닐과 밀란에게 연락을 하여 하리 집으로 다시 오기로 하였다. 왜냐하면 하리가 땅을 기부하고 교육시설인 학교를 세운다고 하여도 시설 및 땅 주인을 공동 명의 및 법인을 만들어야 안전하기 때문이었다.
저녁을 만들어 온 식구가 한자리에 앉아 나의 기도로 축복하고 나눈 후 옥상에 잠자리를 만들었다. 왜냐하면 집안에선 잠을 잘 수 없기 때문이다. 전기 사정이 좋지 않기 때문에 들어왔다 나갔다 한다. 오늘은 전기가 여느때 같지 않았고 시간이 많이 되었는데도 들어오질 않는 것이다. 그러기에 방에서는 더워서 잘 수가 없다. 밤하늘의 별들은 장관을 이루고 밤 이슬을 맞아야 하지만 그래도 찜통에서는 잠을 이룰 수 없기에 이슬을 머금고 잠을 자다가 땅에서 하늘에 닿은 사닥다리를 보고 하나님을 만났던 야곱을 생각하며 이 밤에 특별한 하나님의 만남을 가져보기를 기대하고 잠을 청하였다. 너무 피곤함에 눕자마자 잠이 들었는데 어느때 전기가 들어왔는지 모르지만 펌프로 옥상에 올린 물 탱크에 물이 넘쳐 흐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엇다. 잠시 다시 잠들었는가 싶었는데 바람이 심상치 않게 부는 소리가 들린다. 잠결에도 느껴 일어났더니 하리도 일어나 일어나는 상황에 어쩔줄을 몰라한다.
나는 옥상에 모기장 설치한 것을 철수하기 시작 하였다. 많은 바람에 눈뜨기가 어렵고 날리는 먼지가 숨을 쉬기 어려울 정도였다.
비를 몰고오는 회오리 태풍과 같은 것이었다. 미국에서 자주 발생하는 토네이너로 집과 많은 재산물을 날려버리는 이야기와 뉴스를 통하여 본 모습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래 층으로 내려와 얼마를 수건으로 입을 막고 일어나는 상황을 지켜 보고 있노라니 두둑 두둑 거리면서 빗방을을 뿌리면서 비바람이 몰아치기 시작 하였다 그 결과 찜통 더위는 싹 날아가 버렸으나 또 어떤 상황이 벌어질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쏱아지는 빗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자리에 다시 들었다. 생각보다 쉽게 잠이 들었다.
2009년 5월 23일(토)
지나가는 비에 찜통 더위는 잠시 몰아냈지만 한국 일기에서 아직 적응이 안된 나는 줄즐 흐르는 땀을 간간이 닦아내며 비몽사몽간 잠들었다 깨기를 반복하다가 아침을 맞았다.
시골 공기의 맑음은 좋지만 머리가 그리 개운치가 않다. 아침에 일어나 이곳 풍습의 짜이를 먹고 10시나 되었을까 아침을 먹었다. 첫날부터 같은 음식이 좀 부답스럽기도 하다. 어제 옴과 이야기한대로 옴이 아닐과 밀란을 데리고 하리 집으로 왔다. 학교를 지을 부리를 확보하기 위하여 땅 주인들과 이웃 사람들이 모여서 밖에선 왁자지껄이고 있다 하리가 왔다갔다 하며 중개 역할을 하며 상황을 알려 주었다. 땅 주인들이 하는 말은 자기 땅을 팔면 다른곳에 땅을 사야만 먹고 살아가는데 싸게 판 땅 값으로 다른곳의 땅을 살려면 비싸기 때문에 다른곳의 땅을 살 수 있는 값을 다라고 한단다.
그럼 결단을 하여야 하겠다.
땅을 팔고 비싼땅을 사라고 할 수도 없는 일이아닌가. 그럼 처음으로 돌아가 하리가 기부한 땅에만 최대한 건물을 살려 지어야할 것 같다.
하리에게 말하였다 주민에게 피해를 주고 우리 학교만 좋게 지을 수 없으니 하리 땅에다가 학교를 세우자고 했다. 옴과 함께온 아닐과 밀란과 함께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 아닐이 말한다. 목사님 하리땅에 학교를 만들때 안전하게 서류 절차를 만들어서 하라는 것이다 인도사람들 이곳도 마찬가지 나중에 건물을 다 지어놓으면 나가달라고 하면 어쩔 수 없이 빼앗기고 만다는 것이다. 어짜피 현지인들로 구성하여 이루어나아가야할 한 선교사역인데 그래도 상관은 없겠지만 근본 목적인 교육시설이 파기되어선 안되기 때문에 서류절차는 꼭 필요하다.
12시가넘어선 시각이 되어서야 밖이 조용해지고 아닐이 배고프다고 말한다. 하리에게 언제 밥을 먹느냐고 했더니 12시반이니까 1시쯤 먹자고 한다. 그런데 옴과 아닐, 밀란이 일어서서 가려고 한다. 밥을 먹고 가라니까 하리가 밥을 먹자는 이야기를 안했다고 한다. 이런것을 보면 하리도 인색하기 짝이없는 사람중의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이곳 하리 빌리지에서 하리집이 가장 잘 지어진 집으로 보이는 것을 보아서 열심히 한국에가서 고생하고 일하여 번 돈으로 이렇게 집을 지었겠지만 먹는것 하나 나눌수 없는 인색함은 구두쇠의 한 단편 모습이 아닌가.
그래도 나에게 쓰는 마음만큼은 아직 의심할 여지는 없지만 아무리 친절하고 믿을만 하다고 하더라도 인도 사람의 마음이 언제 어떻게 편할지는 그 누구도 앟 수 없는 것이다.
하리에게 이곳에 내가 있을 동안에 내가 쓸 핸드폰을 만들어 달라고 하였더니 아마 가족이 쓰던 폰을 내게 주어 사용하게 하는 것 같다. 한번 100루피를 충전하면 한국에 두, 세통 걸고나면 끊어진다. 그래도 한국에서 걸려오거나 내가 전화를 할때 내 전화로 하면 1분에 3천원 가까이 드는것에 비하면 그래도 싼 것이다.
아닐과 옴, 밀란이 돌아갔다. 아닐이 나에게 귀띰을 해준다 만일 어떤 안좋인 일나 다른 일이 생기면 바로 전화를 하란다. 밤이건 새벽이건 언제든지 달려오겠다고 한다.
저녂때가되어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모두 잘 있다는 말과 더불어 지금 한국은 난리라고 한다. 왜그러냐고 물었더니 노무현 전 대통령이 봉화산에 올라가서 뛰어내려 자살을 하였다고 하는 것이다. 사단의 쾌괴는 어두움을 도모하고 거짓을 일삼고 마지막은 죽엄으로 모든 방법이기에 모두가 깨어 있어야 할 것이다.
점심 밥을 챙겨 주는데 도저히 목구멍에 넘어가지를 않는다. 조금 뜨고 물렸더니 왜 조금 먹느냐고 하리가 말한다. 하리가 목사님 많이 많이 먹으라고 하여 지금 내 배가 안좋다. 나중에 배가 고프면 밥 달라고할테니 걱정말라고 하였다. 오늘 하루는 이렇게 지나갔다. 저녁이되어 밥을 먹으려니 속이좀 불편하여 조금뜨고 잠자리에 들었다. 얼마큼 잠들었을까. 배에 이상이 느껴졌다. 깨어 화장실을 가는데 방귀가 나와 개스를 조금 배출하였는데 큰일이 벌어졌다. 느낌조차 분간하기 어렵게 설사가 시작 된 것이다. 화장실로가 개스와 더불어 물을 쏱아내는데 그야말로 맹고 쥬스가 쏱아지는 것이다. 큰일이난 것이다. 어둠속에서 버린 속옷을 빨고 샤워를 하고 다시 돌아와 누웠다. 참으로 이런 말을 써야 할지 쓰지 말아야 할지 망설여졌지만 그래도 있는 그대로 보이는 것이 옳다 생각되어 올렸으니 이 글을 보는 사람은 그리 유쾌하지는 않으시겠지요? 하지만 너무 놀리지도 마시고 더러워 하지도 마시기 바랍니다.^*^.
새벽녂에 다시 잠을 깨 화장실을 다녀왔다. 모양은 역시 맹고쥬스 상태이다.
2009년 5월 24일(주일)
여느때보다 좀 늦게 일어나 아침을 먹으라기에 지금 나의 속이 병이 났다고 하고 내가 먹고 싶을 때 달라고 할테니 그렇게 알라고 하고 힘이 쏙 빠진 상태에서 세면과 면도를 하고 다시 더워지는 공기에 샤워를 하였다. 하리가 바나나조금 먹고 약을 먹으라기에 바나나 작은것 두 개와 맹고 한조각을 먹고 하리 아내가 가져다준 알약 하나를 먹었다. 배는 홀죽해지고 힘이좀 빠지지만 이제 뱃속이 좀 가라앉은것 같다.
오늘은 주일이다. 한국시간은 현재 12시 20분 여느때와 같이 성진이가 순서에 따라 예배를 드렸겠지. 이곳은 이제 9시가조금 안된 시각이다.
이곳에서도 11시가 되면 예배를 드릴 것이다. 하리집에서 역사상 두 번째가 되는 것이다.
시간이되어 예배를 드렸다. 한국에서 드리던 예배 순서와 같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은 나와 우리와 함께 하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언어가 안되기에 답답한면도 많이 있지만 그래도 순수하게 받아들여지는 모습이 더 아름답다.
하리 집 바로 앞에는 템풀이 있다. 이곳에서는 힌디 문화에다가 원숭이를 숭배하는것 같다. 원숭이 동상이 있고 그 앞에 향을 피우는 것도 있고 지금 한창 템풀을 짓고 단장을 하고 있다. 마을 모든사람이 공동으로 한다고 한다. 이런곳에 학교가 세워지고 그 안에서 예배를 드리고 복음을 전해야 하는 상황에 언제나 지금처럼 순탄한 면만 있으리 만무하다. 하지만 복음은 핍박 가운데 전파 되는것이다.
예배를 마친 후 하리는 점심을 먹고 가족과 함께 보이질 않는다. 어디를 갔는가 했더니 힘이없어 잠시 누워 있는 사이 시장을 간 것이다. 내가 먹을 과일을 사러 갔다고 한다. 전화를 걸어 다른건 필요없고 팻트병에 들은 물을 사오라고 하였다. 이곳에 오면서 세끼를 먹지 못했다가 갑자기 인도식 밥을 많이 먹었고 물을 바꾸어 먹었던 것이 탈이난것이다.
델리에 있는 김집사님이 운영하는 유학원에서는 한국식 음식에다가 수돗물이었기에 한국생활과 별반 다른것이 없었는데 이곳 고락푸르 시골에 와서 갑자기 달라진 음식과 물이 약해진 나의 몸이 견디지를 못한 것이다.
하리가 물을 사와 물병 하나 따서 먹으니 너무 물이 맛있는 것이다. 이 물만 마셔도 좀 살것 같다.
저녂이되어 좀 뭐라도 먹어야 살겠다는 생각에 라면 하나를 끓였다. 조금 그릇에 덜어서 국물 한수저 떳더니 좀 속에서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그래서 면을 떠 먹었더니 면은 속에서 받아들이지를 않는다. 국물만 다 마시고 못먹겠다고 상을 물렸다. 상이라고 할것도 없고 라면 그릇 하나 물린것이다.
그래도 라면 국물이 나의 속을 좀 편안하게 하였다. 모기장을 친 나의 침상을 걷어서 옥상으로 하리 딸이 가지고 올라왔다. 어제 그에 이곳 옥상에서 자다가 토네이너와 같은 비바람에 아래 방으로 피신을 하여 비가 오는 바람에 생각보다 시원하게 잠을 잘 수가 있었는데 어제 저녁은 옥상에다가 모기장을 치고 잠을 잤다. 그런데 시원함은 좀 있지만 보이지 않는 이슬에 끈끈함이 찝찝하기 짝이없었다. 그래서 오늘은 아래층에서 자겠다고 했더니 하리가 이슬 때문에 좋지 않다고 하며 이해를 하여 주었다. 자신들은 너무 익숙한 생활이기에 아무런 문제가 되지를 않지만 나로서는 몸이 우선 받아들이지를 못하고 있다. 다행히 천장에 팬이 있어서 돌릴 수가 있는데 이동 선풍기도 옆에다 갔다놓고 필요한대로 사용하라고 한다. 너무 많은 배려에 미안하고 고밥기 그지없다. 모기장 침상에 들어가기전엔 팬을 안돌려도 되겠다 싶어 그냥 들어갔더니 조금 있으니까 서서히 땀이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할 수 없이 나와 팬을 돌리고 잠이 들 수 있었다. 얼마간 잠을 잣을까. 삑삑 소리가 나 눈을 떠보니 충전 되었던 뱃터리가 다된 것이다.
핸드폰 후레쉬를 키고 나오니 하리가 소리를 듣고 내려와 내 앞서 스위치를 꺼주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그래도 잠결이라 다시 잠이들었고 아침이 돼서야 전기가 들어와 팬이 돌아 좀 시원하게 잠을 잘 수가 있었다.
2009년 5월 25일(월)
벌써 한국을 떠나온지 일주일이 지나고 있다.
아직 나의몸은 정상 상태가 아니다. 마음은 괜찮은것 같은데 몸은 마음대로가 아니다.
이곳은 시골이라서 도시 같지 않고 일찍들 일어난다. 어른 아이 할것 없이 더워지기전 일을 시작하는 부지런함이 있다. 몸이 아직 나의 몸이 아니라서 일어나 분주한 소리를 들으면서도 나는 침상에 누워 있었다. 시가을 보니 6시를 가리켰다.
더 이상 누워 있기가 불편해서 서서히 몸을 가누어 일어나 세면과 샤워를 하고 아침을 다시 라면으로 먹었다. 하나를 끓여 사분의 일정도의 면과 국물을 좀 많이 떠 먹으니 어제와는 달리 면도 좀 먹을 수가 있었다. 밥을 조금 달라고 하여 국물에 말아서 억지로라도 먹어야 하였기에 한술 떴다.
하리가 아침 일찍 땅땅거리면서 농기구를 다듬더니 밭에 나가서 일을 할 것이라고 했다. 모든 식구들이 전부 동원이 되어 지금 밖에 나가 막내 아들이 자전거에다가 포자기에 풀을 싸가지고 싣고오는 모습을 보니 버팔로에게 줄 풀을 띁는것 같았다.
오늘 나갈랜드에서 이곳 고락푸르에 와서 선교를 하는 아리 목사가 오기로 하였다. 아리와 목사와 그제 통화를 한 후 나갈랜드에서 한 여자분에게 전화가 왔다. 고락푸르 학교에 있는 교사라고 했단다. 오늘 비행기가 있어서 이곳으로 오기로 하였다. 아리목사와 함게 고락푸르에 있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학교도 방문해보고 이곳에 학교를 어떻게 지을 것이지도 결정하고자 한다. 이제 구체적인 윤곽만 잡히면 설계도를 그리고 공사에 들어가고자 한다. 이곳의 사정을 자세히 우리 선교회 회원들에게 전달하지는 못하였어도 지금도 위하여 기도하고 계심을 느낄 수 있다.
그러면 이제부터 많은 후원금이 필요한 실정이다. 지금까지 아직 나의 입으로 후원을 해달라고는 안했었는데 언젠가는 필요할 때 입술을 열게하실 하나님이심을 나는 믿고 있었다. 아직 공사 전이었기 때문에 후원요청의 입을 열지 않게 하심도 나는 안다.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면 이일에 적극 후원 요청을 하여야 공사비를 충당할 수 있을 것 같다. 이것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하나님이 하셨고 앞으로도 하나님이 하실것을 마는 분명 믿기에 하나님이 하게 하시는 대로 따라가기만 할 것이다. 아무리 나의 생각이 훌륭하고 아이디어가 뛰어난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정하신것은 하나님 뜻대로 행하시는 것이기에 하나님 생각에는 나의 그 어떠한 훌륭함도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고 은혜안에서 움직여지길 나는 항상 소원하고 있다.
아침을 늦으만치 라면 하나를 끓여 절반이나 먹었을까 어제 저녁은 국물만 받더니 오늘 아침은 그래도 좀 나아졌고 점심은 거르고 저녁은 7시쯤 돼서야 라면 하나를 끓여 국물과 밥 한술 말아서 다 먹을 수 있었다. 이제 물을 갈아서 먹으니 좀 좋아지는 것 같다.
하리는 이웃 마을에서 결혼을 약속하는 의식이 있어서 그곳에 갔다. 내일 아침이나 되야 돌아온다고 한다. 하리 딸이 둘 있는데 내가 이곳에오기 몇일전에 했다. 아이들 나이는 이제 고등학교 1학년나이15살과 13살짜리가 있는데 이들 둘을 이런 언약식을 하고 3년뒤 5년뒤 정식 결혼식을 하다고 하는 것이다.
참으로 옛 풍습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좋은 것이지 나뿐 것인지 이해하기도 어렵다. 나갈랜드 목사인 아리와 여 선생님이 오늘 온다고 했는데 내일이나 올 수 있다고 연락이 왔다. 내일 오면 만나서 이야기를 듣고 구체적인 교육 사역방향도 이야기할 것이다.
2009년 5월 26일(화)
하리가 어제저녁 이곳 풍습으로 약혼식을 하는곳에 가 아침 열시쯤 온다고 하였는데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다. 이곳에서는 농사철도 아니고 학교도 방학기간이라서 많은 사람들 어린아이 어른들 노인 할것 없이 밥만 먹으면 빈둥빈둥 할 수 밖에 없다. 어떤 놀이감도 없고 할 일도 없기 때문이다. 하리의 두 딸이 있는데 집 계단에 앉아 계단이라고 해야 깔끔하지도 않은 시멘트 바닦에 앉아 머리 손질을 하는줄 알았는데 이를 잡는 것이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부끄러움에 얼굴을 가리는듯 하였지만 이내 언니가 동생의 머리를 풀러 석케를 뜯어내 손톱에 터뜨리고 이를 찾고 있는 것이다. 이곳 환경이 이렇다는것을 나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교육이 없는 마을이다. 학교가 없는 것도 아니다. 하리집 옆에 멀리 떨어지지 않은곳에 하리 집만도 못하게 작은 학교가 있다. 그러나 하리 말로는 선생님은 학생들이 공부를 하건 안하건 그리 신경을 안쓰고 월급만 나오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고 또한 영어는 가르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영어를 하는 아이들은 아무도 없다. 노오(NO)와 땅큐(Thank) 그 수준인것이다. 그리고 학생들 또한 학교는 꼭 가야 한다는 의식도 부모또한 없다는 것이 보다더 큰 문제인 것이다. 이들에게 문명을 깨우치고 지식을 키우며 세계를 향하여 눈을 뜨게함과 동시에 복음을 접하고 믿음에 거하도록 하는 목적이 바로 우리 아가페선교회가 하여야할 일이다. 마을 어귀에 삼삼오오이상 아이들 또는 청년들, 어른들, 노인들이 모여 무슨 이야깃거리가 많은지 날마다 모여 이야기를 하곤한다. 하리집 옥상에서보면 바로 건너편 앞집에는 아홉, 열 살박이 여자 아이가 매일 하루에도 몇 번이고 흙을 이용하여 그릇을 닦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얼마나 손에 익순한지 능숙한 솜씨로 어른 빰치는 모습이다.그 옆에는 엄마로 보이는 여자가 있는데 멀거니 않아 산이 없는지역이니까 먼산을 바라본다고할 수도 없고 희망 없는 바라봄이 너무 안타깝기만 하다. 한국에서는 이런 또래 아이들로부터 모든 학생들이 지금 여러 학원에 다니며 분주하게 공부중이겠으나 아마 이곳 아이들과 비교하여 행복 수준을 무엇으로 비교할 수 있으랴마는 언젠가는 이곳 아이들이 장래에 커서 자신들의 모습을 회상하면서 자신들과 같은 환경의 아이들을 찾아가 우리 아가페선교회와 같은 일을 분명히 하리라 확신한다. 이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아가페선교회를 통하여 이곳에 복음의 문을 열게 하시기위한 일을 하고 계신것이다. 이 일에 아가페선교회 회원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이 지금 쓰임받고 있는 것이며 사명을 감당하고 있는것이다. 이 일에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에 먼저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돌립니다.
이곳에서는 어떤 생각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처럼 빨리 빨리(이곳말 ; 할리 할리)라는 말을 할 수도 없다. 행동으로 옮기려 하여도 환경이 허락지 않기 때문이다. 전기 코드가, 수도 꼭지가 망가져도 있는 그대로 사용할 수 밖에 없는 환경이다.
하리가 돌아온다는 시간이 지났는데도 연락도 없다. 나도 별 할 일이 없는터라 밖을 처다보고 있는데 아닐이 오는 것이 보였다 아들이 목사님 오셔ㅛ다는 이야길 듣고 왜 자기 집에 안오느냐며 가서 보자고 하여 오토바이 뒤에 태우고 온 것이다.
주인없는 집에서 아닐이 사온 열매를 나누고 있던 중 고락푸르에서 전도인으로 일하는 아리 목사님이 버스정류장까지 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닐이 오토바이를 타고 마중을 나갔다가 하리도 함께 타고 왔다.
하리는 집에와서 손님도 왔는데 올라와 보지도 않고 머리가 아프다며 누워 잠을 자고 있었다. 어제밤 꿈도 이상히 여겨져 무슨징조가 있음을 마음에 두고 있던바 아닐이 말을 꺼냈다. 자신이 아는바로는 하리가 기부한다는 땅이 하리땅이 아니라는 것으로 안다고 했다. 분명히 알려면 이 근처에 살고있는 한국에가서 일도 했었고 한국에 일하러가고싶은 사람들을 알선했던 일명 브러커를 만나면 자세히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리가 깬 다음 나와 아리와 아닐 그리고 하리도 같이 가자고 했더니 오토바이 키가 지금 자기에게 없다며 핑계를 대며 동행하기를 꺼려했다. 분명 무슨 일이 있구나 하며 할 수 없이 장정 셋이 오토바이 하나에 몸을 싣고 일명 브로커라는 집으로 갔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곳에 있었다. 쉽게 그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하다가 사실적인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예전에는 하리가 너무 가난하게사는 천민으로 자신의 집 일을 해주며 돈을 받고 종과 같이 살았었는데 어려운 처지에 하리를 위하여 한국에 데려가 일하도록 해주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몇 년 지나지 않아 돈을 좀 벌더니 이제 지주인양 거만해졌고 버릇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지은 집터도 하리땅이 아니라는말도 해주었다. 그의 땅은 일부 아주 조금뿐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리는 자기의 논이 여기도 있고 저기도 있다며 나에게 가르켜 보여 주었고 쌀을 얼마나 거두었느냐고 했더니 올해 쌀800㎏을 팔았다고 했다. 학교를 지으라고 기부한 땅도 하리땅이 아니라 우리나라 말로 말하면 시유지와 같은 땅을 자기 땅이라고 말했던 것이고 이 모든 말들이 거짓말이라는 것이 들통이 난것이다.
그래서 하리가 브로커라고하는 사람을 만나기를 꺼려했고 핑계를 댔던 것이었다.
내가 이곳에와서 일사천리 일들이 잘 되리라고 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며 내 생각이 아닌 황경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하였고 시간들 속에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모습을 확이하고자 하였다.
부족하고 무능도하며 우매한 종에게 구렁텅이에 빠지지 않도록 미연에 방지를 해주셨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안내하여 주셨다. 이 모든 영광과 감사를 내 주 하나님께 돌립니다.
더 이상 이 하리 집에 머물 필요가 없다고 생각되어 아닐이 온 김에 가방 하나를 먼저 실어 보냈다. 아리 목사님과 하리 이렇게 셋이서 남아 이야기를 하던 가운데 하리의 거짓말을 인정하는가 하여 내가 물었다. 하리 지금 나에게 하고싶은 말이 없습니까? 했더니 자신의 거짓말은 인정하지 않으며 땅 명의가 여러사람으로 되어 있는데 그 사람들의 사인을 받아서 하면 안되냐고만 하는 거이다. 하리에게 처음 이땅을 기부한다고 들었던 나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무지함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무지함이 아닌가 싶어 나를 더욱 자책하게 되었고 인도인 80%가 믿지못할만큼 거짓말에 능숙하다는 것을 인정도 하지만 하리에게 속았다는 생각에 내 마음은 더욱 무겁기만하다. 이 계기로 어떤 길을 열어주시려는가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주의 인도하심을 바란다.
다른 변명도 없고 거짓을 인정도 않고 다른 방법만 찼는 하리의 모습에 더 이상 이곳에 있을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에 아닐에게 전화를 하였다. 아직 아들과 나의 가방 하나를 싣고 집으로 돌아가던중에 전화를 받았다. 아닐 집에 갔다가 다시 나를 데리러 와요 했더니 해는 지고 어둠이 깔릴즘에 왔다. 하리 집에서 사용한 전화 머니촤지금과 물이 바뀌어 탈이나 물을 사다먹은것 그리고 사소히 사용해야 했을 경비를 포함하여 천루피를 주고 다음에 다시 보자고 하고 아닐 오토바이 뒤에 타고 가방 하나를 어께에 메고 하나는 무릅에 얹고 하나는 그 위에 올려놓고 아닐 집으로 출발을 하였다. 털털거리는 도로에 구불구불한 길에 25~6㎞를 달려 아닐집에 도착하니 모두 잡든 오밤중이었다. 오토바이에서 내려와야 하는데 다리를 움직일수가 없었다. 가방을 하나하나 내려주고 간신히 내려와 주물러 푼 다음에야 걷기 시작 하였다. 아닐 어머니가 내가 온다는 말에 밖에 이동 침대를 놓고 앉아 기다리고 있다가 반가이 맞아주었다. 온식구가 깨었는지 안자고 기다렸는지 우리가 먹을 저녁을 만들기 시작 하였다. 늦은 저녁을 먹은 후 샤워를 하고 옥상에다가 이동 침대를 올려 모기장을 치고 피곤함에 몸을 뉘었다. 그런데 누운키보다 침대가 작았다. 할수 없이 불편함을 감수하고 쪼그려 자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얼마쯤 잠들었으까. 모기가 나를 상대로 파티가 벌어진 것이다. 아마 진수성찬이 차려졌다고 모두 불러댔는것 같았다. 가려움을 이기지 못하여 일어나 전화기 렌턴으로 불을 비추었더니 좀 과장 한다면 새까맣게 모기가 안으로 들어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모기장 안에 붙어 있는것이다. 한손으로는 불빛을 비추고 한손으로 모기를 움켜 잡는데 별 어려움 없이 잡을 수 있었다. 너무 많이 먹어 무거움에 날지를 않는것이다. 한손바닥이 빨갛게 피로 끈적였다. 이런 경험은 이런 곳에서나 할 수 있지 어디서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런 경험이 좋은 경험은 아닌데.... 시간을 확인하니 새벽 4시였다. 모기도 나를 기도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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