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회 영남불교문화연구원 삼국유사유적답사
2006. 6. 18
지리산과 구례군
지리산은 백두대간(白頭大幹의) 종착지다. 백두대간이란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지리산까지 이어지는 큰 산줄기를 일컫는다. 영조 때 학자인 신경준(1712,숙종38~1781,정조5)이 우리 선조들이 인식하고 있던 국토관을 요약하여 산경표로 만들었다. 이는 현재 우리들이 배우고 있는, 일제 때 작성된 산맥도와는 격을 달리하는 산경도로 역사, 지리, 풍속, 국토개발 등 총체적 안목에서 유기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개념으로 되어 있다. 이에 의하면 한반도는 등뼈에 해당하는 백두대간과 어깨뼈인 장백정간과 갈비뼈인 13개의 정맥으로 형성된, 살아있는 인체로 파악되고 있는데,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 그 사상과 내용이 잘 반영되어 있다.
지리산은 전남의 구례군, 곡성군, 전북의 남원시, 경남의 하동군, 산청군, 함양군 등 3도, 1시, 5군에 걸쳐 그 주위가 800리가 넘는 거대한 산이다. 세조 때의 학자 이륙이 지은 [[지리산기]]에 “산 주위에는 목(牧)이 하나, 부(府)가 하나, 군(郡)이 둘, 현(縣)이 다섯, 부읍(附邑)이 넷 있다”는 기록과 선인들의 유람기가 많이 남아 있어 시대적 상황과 변천과정을 비교적 소상히 알 수 있다.
지리산은 예부터 금강산(봉래)과 한라산(영주)과 더불어 삼신산의 하나인 방장산으로 불리어 왔고 통일신라시대에는 5악의 하나인 남악으로서 국가로부터 춘추로 제사를 받아온 영산으로 숭앙되었다. [[삼국유사]]에는 신라시대에는 시조인 박혁거세의 어머니인 선도성모를 지리산신으로 봉안하여 나라의 수호신으로 받들었다고 했고 [[제왕운기]]에는 “고려는 신라의 제도를 본떠서 태조의 어머니 위숙왕후를 지리산신으로 봉사 한다”고 되어 있다. 이러한 산신 사상은 조선을 거쳐 현재에도 전승되어 지리산신은 여신상으로 표현되고 있다.
용트림하듯 구불구불 뻗어나간 주능선의 동서 길이가 140km에 이르고 최고봉인 천왕봉(1915m)에서 노고단(1507m)까지 45km의 준령에는 1500m가 넘는 봉우리만 10개가 넘는다. 이런 웅대한 위용과 1억3천만 평의 거대한 산악군으로, 인간이 이 땅에 살기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수많은 사연과 한량없는 전설들을 보담은 채 민족의 성산으로 굳건히 서있는 것이다.
지리산의 남쪽 기슭을 차지하고 있는 구례군은 동, 북, 서 3면은 지리산이, 남쪽은 백운산이 가로막고 있는 산간 분지다.
역사적으로는 삼한시대에는 54국 중의 하나인 고랍국에 속해 있었고 삼국 시대에는 백제의 영토로 구차례현 또는 구차지현이라고 불렀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 시대에는 무진주에 예속되었고, 경덕왕 16년(757)에 구례로 이름을 바꾸어 곡성군의 속현이 되었다. 고려 초에는 남원부에, 조선 세조 때는 순천부에 예속되었다가, 연산군 때는 지역민 중에 역모에 가담한 자가 있어 부곡으로 강등되기도 했다. 중종 2년(1507)에 다시 현으로 복구되었고 고종 32년(1895)에 현감을 고쳐 군수라 하였다. 지금은 전라남도 22개군 중에서 면적이 가장 협소한 작은 군이다.
연곡사(鷰谷寺) (전남 구례군 토지면 내동리)
대한 불교 조계종 제 19교구 본사 화엄사의 말사다. 외침이 잦고 화재가 빈번했던 우리나라 사찰들이 대부분 그러하듯이 연곡사 또한 전해오는 기록이 없다. 신라 진흥왕 5년(544)에 연기조사가 창건했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으나 당시 삼국의 정황으로 보아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어쨌든 인근의 거찰 화엄사의 영향권 내에서 터전을 마련했을 것은 틀림없지만 현재 남아 있는 부도와 유물 등으로 미루어 통일신라 말기에서 고려 초에 걸쳐 가장 번성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연곡사에 관한 기록은 1530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처음 나타나고, [[난중잡록]]에 정유재란 때인 1597년 4월 10일 왜적 400여명이 지리산의 쌍계사, 칠불사, 연곡사에 들어와 불을 지르고 살육과 만행을 저질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왜란으로 전소된 절을 소요 태능(1562~1649)이 중창해서 사세가 크게 확장되었다. 이때 <<석가여래성도기>>가 목판본으로 이곳에서 발간되기도 했다.
1728년 이인좌 란 때는 이 절의 승려 대유(大有)와 승려 출신 송하(宋賀)란 자가 모반에 가담하여 하동을 거점으로 활약하다가 실패하자 지리산으로 숨어버렸다고 한다. 1745년(영조21)에는 파아골 일대가 국가와 왕실에 신주목을 봉납하는 율목봉산지소(栗木封山之所)로 지정되자 연곡사가 이를 관리하는 특권을 누리게 되었다. 19세기 들어 밤나무의 남벌과 가혹한 수탈로 승려들이 유망하여 절은 비게 되었다. 1907년 8월26일 의병장 고광순이 의병 본영을 연곡사에 설치하여 화개, 하동 등지를 무대로 활약하다가 10월 11일 일본군의 야간기습으로 의병들은 모두 순국하고 절은 불탔다. 그 뒤 다시 중건된 절은 6,25를 전후한 시기에 다시 폐사가 되었다. 1965년에 소규모 대웅전과 요사채가 들어서면서 시작된 불사가 90년대에 와서는 대대적인 규모의 중창이 이루어져 지금은 제비집을 연상시키던 옛 자취는 사라지고 이름과도 맞지 않고 자연경관과도 어울리지 않는 형태의 절이 되어버렸다.
연곡사 동부도 (국보 제 53호)
부도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 부도가 자리하고 있는 위치의 방위에 따라 동부도라고 부르고 있다. 연곡사에 전하는 3 기의 부도 중에서 가장 우아하고 정교한 작품이다.
팔각원당의 일반형으로 사각의 지대석 위에 기단과 탑신, 상륜이 중첩되어 있다. 8각의 하대석은 2단으로 되어 있는데 아랫단에는 상서로운 구름 속에 몸을 언뜻언뜻 나타나는 용을 나타내었고, 상단에는 가장자리를 테로 돌리고 그 속에 다양한 형태의 사자상을 새겼다. 그 위에 조금 낮은 듯한 중대석을 얹었는데 각 면에는 8부 신중이 박진감 있게 조각되어 있다. 그 위의 둥근 상대석은 옆면에 연꽃을 아래 위 두 줄로 새겼다. 위쪽 앙련에는 또 다른 꽃잎이 조식 되어 있다. 상대석 위에 놓인 높다란 상대 고임은 옆면에 둥근 마디가 있는 기둥을 세우고 그 안에 가릉빈가를 여러 가지 형태로 새겼다. 그 위의 8각 탑신 각 면에는 문비, 향로, 사천왕상 등이 부조되어 장중한 신앙성을 나타내고 있다. 지붕돌은 목조건축의 수법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부연이 있는 서까래와 기왓골, 처마 끝의 막새까지 묘사되어 있고 지붕 밑면에는 구름문양을 양각으로 새겼다. 지붕마루 끝, 윗부분에는 잡상 같은 것을 얹었던 흔적이 있다. 샹륜부는 앙화 위에 네 방향으로 날개를 활짝 편 새를 조각하고 그 위에 다시 연꽃 문양의 보륜을 얹었다. 네 마리의 새는 머리가 파손되었는데, 이 부도를 모본으로 삼았을 다른 부도의 새를 보면 봉황으로 추측된다.
도선국사의 부도라고 전하지만 믿기 어렵다. 몇 년 전 도선이 입적한 백계산 옥룡사 부도 터 밑에서 그의 무덤이 발굴되었기 때문이다.
이 부도의 형태나 수법은 868년에 건립된 것을 추정되고 있는 쌍봉사 철감선사 탑과 비슷하다, 따라서 이 부도는 철감선사보다 약간 늦은 시기에 연곡사에서 입적한 고승의 부도로 추정된다.
연곡사 동부도 비 (보물 제 153호)
동부도 주인공의 생애와 업적과 위대성을 찬양했을 비이나 지금 비신은 없어지고 귀부와 이수만이 동부도 앞 오른쪽에 서있다. 지대석과 한 돌로 된 귀부는 네 다리를 사방으로 쭉 뻗고 납작하게 엎드린 모습을 하고 있다. 거북의 등이 육각형의 귀갑문이 아니고 파상곡선으로 이루어진 새 날개 모양을 하고 있는 특이한 형태다. 새 날개의 정상에 직사각형의 비좌를 구비하였는데 네 면에는 구름문양을 고부조로 새기고 윗면에는 연꽃문양을 넣었다.
머리부분은 여의주를 물고 있는 통속적인 용머리로 입술과 잇몸이 밋밋하여 긴장감이 빠져 보인다. 이수는 보편적으로 볼 수 있는, 용이 뒤 엉겨 여의주를 희롱하는 반결용형(蟠結龍形)이 아니라 비의 좌대 문양과 같은 구름무늬로 조각되어 있고, 정상에는 화염보주를 다듬어 놓았다.
귀부와 이수는 색깔과 돌의 재질이 다르고 형태에 있어서도 특이한 점이 있지만 전체적으로 보아 동부도를 건립한 뒤 어느 정도 시간이 경과한 후에 조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연곡사 북부도(국보 제 54호)
연곡사에서 북쪽에 해당되는 산비탈에 있기 때문에 북부도라 한다. 이 부도는 앞선 시기에 만들어진 동부도를 모본으로 그 양식을 충실히 이으면서 세부적으로는 균형미를 추구한 것으로 보인다. 크기나 형태나 조식에 있어서 동부도와 차이가 거의 나지 않을 정도로 비슷하다. 많은 사람들이 경내의 서쪽에 있는 현각선사 탑비의 주인공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앞으로 현각선사비 조각이 많이 출토되고 관련 기록들이 나온다면 명확해지겠지만, 보통 부도가 먼저 건립되고 나서 비를 세우는 관례에 따라 이부도의 건립시기는 고려 극초로 보여진다.
2001년 3월에 도굴범들이 무너뜨려 놓았던 것을 다시 복원하였다.
연곡사 서부도 (보물 제 154호)
서부도라는 이름은 연곡사의 서쪽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붙여진 편의상의 이름이고, 실제는 탑신석에 “逍遙大師之塔 順治六年庚寅”라는 명문이 있어 소요대사의 묘탑임을 알 수 있다. 소요대사는 청허 서산대사의 법맥을 이으면서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린 연곡사를 중창하고 후학을 가르치다가 순치 5년(1649)에 입적한 선승 태능이다. 위태로웠던 한 세대를 이끌었던 걸승, 태능의 비는 금산사에 있고 부도는 연곡사, 대둔사, 심원사, 백양사에 있다.
이 부도는 지대석에서부터 상륜부에 이르기까지 모두 8각과 원으로만 이루어진 8각원당의 기본 구조를 따르고 있다. 지대석의 상단 윗면 가장자리에는 비올 때 물을 빼내기 위한 홈이 맷돌처럼 파여져 있어 생소한 감을 준다. 탑신은 8각으로 한 면에 문비형을 모각하고 나머지 면에는 신장상을 고부조로 배치해 놓았다. 옥개석 역시 8각으로 처마는 얇고 넓은데 추녀는 두드러진 귀꽃으로 마감되어 있다. 앙화, 복발, 보개, 보주가 완전한 상륜부에는 벼슬을 늘어뜨린 네 마리의 봉황이 사방을 내려다보고 있다.
시대와 여건은 달라도 동부도와 북부도를 모방하여 만든 조선시대의 작품으로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양식이다.
현각선사 탑비(보물 제 152호)
이 비는 높이가 205cm에 이르는 거대한 크기로 지금 비신은 없어지고 귀부와 이수만 남아 있다. 지대석과 한 돌로 된 귀부는 용두가 몸체에 비해 너무 크고 조각이 간단하지만 장대한 기상과 활력이 넘치는 작품이다. 등은 6각의 귀갑문으로 덮여 있고, 귀갑문의 중앙에는 직사각형의 비좌가 마련되어 있다. 4 면에 귀꽃과 안상이 조식된 비좌 위에 얹힌 이수는 반룡이 번결한 채 중앙의 보주를 향해 긴박한 느낌을 주어 사실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다. 이수 앞면에 중앙에는 “玄覺禪師碑銘”이라는 전액이 음각 되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옛 탁본에 의하면 이 비는 고려 경종 4년(979)에 건립되었다. 비가 파괴된 것은 19세기 후반기 때 일이고, 1907년에 더욱 큰 피해를 입어 흩어졌던 조각들을 1970년에 한데 모와 붙였다고 한다.
연곡사 3층 석탑(보물 제 151호)
신라 정형탑 형식을 취하면서 3층의 기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대석 밑에 또 한 층의 석재가 있어 지대석이 마치 하층 기단의 갑석 같아 보인다. 하대석과 중대석을 붙여 한 돌로 만들고 각각의 면석에는 우주와 탱주 하나씩을 모각해 놓았다. 갑석 윗면은 완만한 경사가 보이고 중앙에는 각형과 호형의 고임이 있다. 상층 기단 면석은 훨씬 작아졌고 각 면에는 우주와 탱주가 하나씩 있다. 상층 기단 갑석은 하나의 돌로 밑에는 부연이 표시되어 있다. 1967년 해체수리 때 상층 기단에서 24cm 크기의 여래상이 발견되었다.
금환락지(金環落地)의 명당
지리산은 그 후덕한 기운 탓으로 청학동과 금환락지 같은 이상향과 명당의 전설이 전국적으로 퍼져 있다. 백두산에서 시작된 신령스러운 기운이 지리산까지 이어져, 노고단 월령봉을 타고 내려온 내룡이 왕시루봉 줄기와 어우러져 섬진강을 끌어안은 곳에 삼진혈(三眞穴)이 있다는 것이다. 삼진혈은 금귀몰니(金龜沒泥), 금환락지(金環落地), 오보교취(五寶交聚)의 명당길지를 일컫는 말로서 이곳에서는 상대, 중대, 하대라고 부르고 있다. 이 지역 사람들은 모두 자기네가 살고 있는 곳이 바로 명당이라고 믿고 있다. 이곳의 지명인 토지면도 본래는 금가락지를 토해냈다는 토지(吐指)면이었고, 금내리(金內里)주민들은 금가락지가 자기 동네 안에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원내리(垣內里)사람들은 오보교취의 하대가 바로 자기 마을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들의 대부분은 환란의 시대를 만나 가족들의 안위와 자손번영, 부귀영달의 땅을 찾아 전국에서 모여든 사람들이기 때문에 명당관념이 신앙처럼 고착되어 있었다. 일제 강점기 때 조선총독부가 조사한 토지면 인구 통계를 보면 1918년 70호 350명이던 인구가 1922년에는 148호 744명에 이르고 있다. 일제의 수탈이 날로 가혹해지고 서양문물이 밀물처럼 몰려오던 격동기에 대규모의 이동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주자들은 단지 비결에 대한 신념 하나만 믿고 이곳으로 모여들었던 것이다.
임진 병자 양란 이후 “白雲地理 千里相逢至處 有大地曰 金環落地”라는 비결이 감여가들 사이에 널리 퍼졌다.
산경표와 대동여지도로 살펴보면, 백운 지리 천리란 말은 틀림없다. 백두대간의 큰 줄기 중에서 경상도와 전라도를 경계 짓는 덕유산에서 한 가닥이 서로 달려서 노령산, 모악산 내장산을 이루고 다시 남으로 달려 무등산, 월출산을 세우고 동남으로 가 웅치에서 동북으로 역류하여 조계산을 이루고 또 동북으로 송원치를 이룬 다음 동으로 달려가서 백운산을 일으켜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북쪽의 지리산을 회룡고조형으로 바라보고 있으니 이것이 천여 리를 달려온 호남정맥인 것이다. 그러나 대지가 있다는 말은 믿기 어렵다. 섬진강이 우리나라에서 7번째로 길고 큰 강이지만 유역에는 평야가 없는 유일한 강이다. 토지면 일대는 신석기 시대부터 사람들이 거주한 흔적이 있는 곳이고, 옛날부터 명당길지를 찾아 터전을 마련한 사람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 땅에 살면서 자자손손 금환락지의 발복을 받은 사람이 과연 있을까. 맹신자들은 아직 그 땅을 찾지 못했을 따름이라고 얼버무리겠지만.
비결이나 비기는 조그만 상처에도 좌절하고, 포기하고, 체념하는 시련기의 나약한 인간들에게 위안과 용기를 주는 희망의 방편일 뿐이다.
화엄사(전남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
지리산의 주봉 천왕봉에서 제석봉, 축봉, 세석고원을 거쳐서 지도봉, 토끼봉, 날나리봉, 반야봉을 지나면 노고단이 나타난다. 노고단에서 질매재로 내려오면 화엄종찰 화엄사가 자리 잡고 있다.
화엄사는 대한 불교 조계종 제 19교구 본사다. 절의 창건에 관해서는 정확한 역사적 기록이 없어 분명하게 밝히지 못한다. 절의 역사를 담고 있는 문헌과 사적기 등이 적지 않지만 대개 후대에 정리된 것이고, 또 역사적 객관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1936년에 지은 [[대화엄사사적]] 등 모든 사적기에는 544년(신라 진흥왕 5) 인도의 승려 연기가 창건했다고 되어 있다. [[구례속지]]에는 백제 법왕(재위 599~600)이 3000명의 승려를 입주케 했으며, 신라 선덕여왕 때(632~647) 자장이 증축하고, 문무왕 때(661~681) 의상이 장륙전을 건립했다는 등의 기록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언제인지 모르나 연기가 창건했다고 되어 있다.
연기법사는 통일신라 경덕왕(742~785) 대에 황룡사에 주석하면서 화엄경 사경을 주도한 큰 스님이라는 것이 1979년에 발견되어 지금 호암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백지묵서 화엄경 사경>에서 밝혀졌다. 이로써 화엄사는 경덕왕 때 창건되거나 확장되고 다른 여러 설은 사실이 아님이 입증되었다.
신라 말에는 도선((827~898)이 이곳에 주석하기도 했다. 후삼국시기에는 견훤을 지원한 남악의 관혜 스님이 이곳을 거점으로 활동하면서 북악의 희랑과 대립해서 그 후유증이 심각한 지경에 이르기까지 했다.
고려 광종(949~975) 때는 홍경선사가 중수하고 문종(1047~1083) 때는 대각국사 의천이 주석하면서 크게 중창했다.
조선시대인 1424년(세종 6)에는 선종대가람으로 승격되고, 임진왜란 때는 당시의 주지인 설홍대사가 300여명의 화엄사 승병을 이끌고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이때 500여 칸의 대가람이 일순간에 전소되고 말았다. 1630년(인조 8) 벽암 각성이 중건에 나섰고, 1699년(숙종 25)에는 성능이 그의 스승 벽암의 뜻을 이어 장륙전을 중건했는데 3년 뒤에 완공되자 숙종은 이를 각황전이라 사액하고 선교양종대가람으로 승격시켰다. 이때 연잉군(영조)을 위한 불사가 숙빈 최씨에 의해서 대대적으로 시행되었다. 이후 현재도 중수와 증축이 계속되어 본래의 모습을 찾을 수 없게 되어가고 있다.
보제루 (전남 유형문화재 제 49호)
절의 중심 구역으로 들어가는 누문이다. 정면 7 칸, 측면 4 칸으로 절에서 행하는 각종 의식과 집회가 열리는 강당으로 사용되었으나 대웅전이 법당의 역할을 하게 된 이후로는 그 기능이 상실되었다.
지름이 70cm가 넘는 괴목을 기둥으로 사용한 주심포 양식의 건물로 내부 바닥은 마루로 되어 있고 남쪽 벽에는 판자로 짠 문을 두 짝씩 달았는데 양쪽 끝은 판벽을 하여 문을 생략하였다.
대웅전과 같은 해에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1911년에 발간된 [[조선사찰사료]] 화엄사 편에는 보제루의 조성연대를 ‘’100년 이내‘’라고만 적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본다면 1800년 이후의 건물이 되는 것이다.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가운데 칸을 통로로 만들어 누 밑으로 출입 하는 구조로 되어 있었는데 언젠가 옆으로 돌아가도록 바꾸어 놓았다. 지난 달에 답사한 백련사가 돌아 들어가도록 개조한 것을 원래대로 누하진입으로
되돌려 놓았듯이 이곳도 본래의 모습대로 복원되어 전통을 지켜나가야 한다.
동서 5층 석탑
보제루 뒤 축대 밑에는 동서로 석탑 2기가 서 있다. 이들 탑을 두고 대웅전을 중심한 쌍탑 가람이라는 사람과 동탑은 대웅전, 서탑은 각황전에 딸린 1금당 1탑이라는 주장이 대두되고 있다. 이런 논쟁은 1930년대에 정립된 가람구조에다 일괄적으로 적용 시키려는 데서 오는 무리일 뿐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 두 탑과 축대 위의 대웅전과 각황전은 직접적인 관련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보제루와 탑이 있는 쪽에서 각황전, 대웅전이 있는 구역으로 가려면 거대한 축대를 거치도록 구획되어있다. 깨달음의 황제, 석가모니불의 세계로 들어감을 강조하기 위해서 거대하게 축대를 쌓아 그 이전의 세계와 구분 짓고 있는 것이다.
두 탑은 창건 때부터 있어온 것이 아니라 지금의 가람구조로 증축 또는 개축 되면서 다른 곳에서 옮겨 왔던지 아니면 시대를 달리해서 조성되었다고 생각된다. 두 탑은 외형적으로는 비슷해 보이지만 세부적으로는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어 제작 시대가 같을 수 없다. 축대도 신라시대의 것이 아니라 조선시대 쌓은 것이다.
동탑(보물 제 132호) 은 단층 기단에 아무런 장식이나 조각이 없는데, 서탑(보물 제 133호)은 초층 탑신까지 많은 장식을 가지고 있다. 높이가 6,4m에 이르는 동탑은 4 매로 된 하대석 위에 양 우주와 탱주 하나를 모각한 기단을 올려놓았다. 탑신부는 옥개와 옥신이 별개의 돌로 되어 있고 2층부터 급격한 체감으로 인하여 탑 전체가 세장한 느낌을 준다. 상륜부는 노반 위에 반구형의 복발과 보주가 장식 없이 놓여 있다.
서탑은 초층 기단에 보기 드물게 12 지신상을 새겨 놓았고, 상층 기단은 각 면을 탱주로 2분하고 8부 신중을 조각하였다. 탑신부는 1층 탑신에 8부 신중과 비슷한 크기의 사천왕상을 부조했고, 옥개 받침은 5 단으로 되어 있다. 추녀 끝이 반전되어 경쾌감을 주고 각층의 체감률이 알맞아 우아한 느낌을 준다. 전체적으로 보아 연약한 느낌과 기단의 안상, 장엄 등 조각 수법이 9세기 경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대웅전(보물 제 299호0
임진왜란(1592년) 때 화엄사의 승병 300여명은 하동을 거쳐 남원으로 가려는 왜군을 맞아 섬진강 가 석주진에서 전원 장렬한 최후를 맞이했다. 이듬해(선조 26년, 1593)에 화엄사에 침입한 가등청정은 전해의 항전에 대한 보복으로 화엄사와 연곡사를 불사르고 많은 보물을 노략질해 갔다. 그 후 인조 8년 (1636)에 병자호란의 사명당이라 불리는 벽암대사가 대웅전과 몇 채의 요사채를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금당 안에는 화려한 닫집 아래 화엄종의 주존인 법신 비로자나불을 중앙에, 오른쪽엔 보신 노사나불, 왼쪽엔 화신 석가모니불을 모셨다. 3존불 뒤의 3존 탱화는 대웅전을 중수하고 개금불사를 했던 영조 33년(1751)에 제작된 것이다.
본존불이 비로자나불이므로 당연히 당호도 대적광전이나 대광보전이어야 하는데, 어긋나 있다. 아마도 불교를 잘 몰랐던 의창군이 쓴 현판을 양반들의 황포를 막을 목적으로 그대로 달았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각황전(국보 제 67호)
우리나라 목조 건물로서는 가장 큰 각황전은 정면 7 칸, 측면 5 칸의 팔작 2층이면서 속은 통층으로 되어 있다. 원래 이름은 장륙전으로 4면 7 칸의 3층 건물이었다고 한다. 석가모니를 일컬어 장륙금신이라 했으니 황룡사 금당 장륙존상 유지에서 알 수 있듯이 서 있는 석가모니불이 봉안되었으리라 추측된다.
임진왜란 때 참화를 당한 각황전은 대웅전과 동시에 중건되지 못하고 60년이 지난 후인 숙종 25년(1699)에 계파 성능에 의해 현재의 각황전으로 탄생되었다. 시주로는 후에 영조가 된 연잉군과 그 어머니인 숙빈 최씨의 이름이 상량문에 적혀 있다. 내부에는 나무로 된 3 불상과 4 보살상을 모셨다. 개금할 때 발견된 복장기에 의하면 12자의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아미타불과 다보불을 11자 크기로 모시고 10자의 관세음, 문수, 보현, 지적보살을 협시로 모신 특이한 구성으로 되어 있다.
각황전 앞 석등(국보 12호)
우리니라에서 제일 큰 6,36m다. 8각의 하대석은 각 면에 3구씩 안상을 배치했고 그 위에 귀곷을 장식한 복련을 둘렀다. 간주석은 북 모양에다 중앙에 띠를 두른 위에 꽃을 연속적으로 새겨 놓았다. 상대석은 3단의 받침과 화사석 괴임대를 얇은 돌 하나로 처리했다. 4면에 화창을 낸 통식의 화사석 위에 큼직한 옥개석은 귀꽃을 갖추고 완전한 상륜을 구비하고 있다.
외관상 소박한 느낌을 주는 이 석등은 커다란 옥개석 위의 많은 장엄으로 인하여 잔주석이 상대적으로 빈약하게 보인다. 9세기 말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노주(보물 300호)
일반적으로 원통전 앞 사자탑으로 부르고 있으나 여러 가지 면에서 문제점이 있는 작품이다. 4사자 3층석탑을 본떠 상층기단에 4마리의 사자를 이용했으나 조형의 솜씨는 둔중하고 밋밋하여 4사자탑에 뒤진다. 평평한 갑석 위에 불룩하게 연화를 두르고 그 위에 길쭉한 탑신을 받고 있다. 탑신이 1층 밖에 없어 탑으로 보기에는 문제가 있는 것이다. 또 노반지주란 말을 줄여서 노주라고도 하지만 이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어떤 용도로 쓰였는지 알려져 있지 않다. 연화문이나 탑신조각이 섬약해졌고 그 수법이 치졸한 것으로 보아 9세기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사사자 삼층석탑(국보 제 35호)
불국사의 다보탑에 버금가는 우수한 이형탑이다. 이 탑은 2층 기단 위에 3층 탑신을 얹은 신라 석탑의 기본형을 따르고 있으나 상층 기단에서 특이한 의장을 보이고 있다. 탱주 없는 하층 기단에는 천인상이 양각되어 있고 상층 기단은 우주를 대신하여 연화대 위에 무릎을 꿇고 않은 두 자웅의 사자가 머리로 갑석을 받고 있다. 인간의 희노애락을 나타내고 있는 사자들의 복판에는 탱주 대신 스님 한 분이 연화대 위에 서 있다.
탑신부는 일반 탑과 동일한데 초층 탑신 4면에는 문비형을 모각하고 양편에는 인왕상, 사천왕상, 보살상을 조각하였다.
특이한 탑 앞에 역시 특이한 석등이 놓여 있다. 연화대 위에 간주석 대신에 공양좌상을 취한 스님상을 안치하고 세 곳에 8각 돌기둥으로 옥개석을 받쳐 마치 감실 모양을 이룬 것 같이 했다. 앙련, 복련을 받쳐 머리에 이고 있는 석등의 화사석은 상부 개석에 비해 작아졌고 4면에 화창을 낸 일반 형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석탑의 스님은 이 절의 창건자인 연기스님의 어머니이고 그 아래 석등을 이고 꿇어앉은 스님은 효성이 지극했던 연기스님이라 한다. 원래는 탑을 향해 공양을 올리는 승려를 형상화 한 것이겠으나 두 승려의 무언의 대화와 겸양을 다한 자세가 서 있는 어버이께 효성을 드리는 아들 관계로 이어지고 이것이 연기스님으로까지 자연스럽게 윤색된 것으로 여겨진다.
발상의 전환이나 조각비법 등으로 미루어 보아 다보탑보다 다소 늦은 8세기 말의 작품으로 여겨진다.
화엄석경(전남 유형문화재 제 31호)
의상대사가 화엄 10찰을 전교의 도량으로 삼으면서 왕명을 받아 화엄사에 3 층으로 된 장륙전을 건립하고 그 벽면을 돌에 새긴 화엄경으로 둘렀다는 기록이 구례읍지인 [[봉성지]]에 실려 있다. 그러나 이 기록은 역사가 오래임을 과시하고 사격을 높이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고증 없이 기록한 것이므로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 왜냐하면 163상자에 파편으로 남아 있는 석경에는 의상대사가 입적한 지 100년 후인 798년에 번역된 40화엄도 섞여 있고, 또 글씨체가 구양순체로 최치원이 쓴 진감국사비와 비슷하다는 점을 들어 신라 하대의 것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다. 신라 정강왕 때 화엄결사와 화엄경불사가 있었는데, 그 때 최치원이 원문을 썼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석경이 그 화엄불사일 수도 있다는 느낌이 든다. 석경이 경주애서 가져온 옥돌이라고 전해지고 있으나 돌 전문가들 얘기로는 지리산에서 볼 수 있는 납석이라고 한다. 원형대로 복구는 불가능하겠지만 복원사업이 빨리 시도되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