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그리스, 터키 여행
기간 : 2008.01.25(금) - 02.04(월) 10박 11일
★ 일 정
1. 1월25일(금) - 인천(오후3시50분 비행기 12시간소요)출발, 7시간시차 이집트 오후8시 호텔 도착(기자 피라미드부근)
2. 1월 26일(토) - 오전에 기자 피라미드(쿠푸왕, 맨카우레왕, 카프레왕), 스핑크스, 낙타 체험, 오후에 올드 카이로에 이동하여 예수피난교회, 모세기념교회, 이집트 고고학 박물관 견학 후 나일강 디너 쿠르즈(맥심)로 탄두라와 밸리댄스 공연관람
3. 1월 27일(일) - 오전 3시에 호텔에서 출발, 5시 룩소르행 비행기를 탐(1시간소요), 나일강 서쪽의 왕가의 계곡에서 투트모스3세, 람세스3세, 람세스4세의 지하분묘 관람 후 합세슈트 장제전(이집트 최초의 여자 파라오), 맴논의 거상을 관람, 오후에 동쪽으로 이동하여 카르낙 신전 관람, 이집트 전통 배인 펠루카를 탑승(1시간), 룩소신전 관람, 오후 11시 55분 룩소르 출발 새벽 1시 카이로도착 2시 호텔 도착
4. 1월 28일(월) - 사카라(고왕국 상왕조의 무덤군이 있는 곳)로 이동하여 계단식 피라미드와 메네루카 분묘를 보고, 맴피스(고왕국의 수도)로 이동하여 야외박물관 및 람세스2세의 거상을 관람. 오후에 타흐리 광장(카이로에서 가장 큰 광장) 옆의 칸엔칼릴리 전통시장에서 쇼핑을 함
5. 1월 29일(화) - 28일 밤 10시에 알렉산드리아로 출발 밤12시 40분 알렉산드리 공항에 도착하여 29일 오전3시 50분 아테네행 비행기 탑승, 오전 6시 아테네 (베니줄루스공항)도착, 10시 20분 에기나섬 도착(1시간 소요)하여 15분간 개인이 만든 교회와 주변 경관을 보고 10시 40분에 아테네 귀환, 오후에 소크라테스의 감옥, 아크로폴리스 언덕의 파르테논신전을 관람하고 아테네 시내 전역을 전망함, 수상저택과 무명 용사비, 아카데미아 등 아테네 시내 관광
오우 7시 피레우스 항구에 도착하여 8시 페리에 승선함(8시간 30분소요)
6. 1월 30일(수) - 오전 5시 그리스 히오스 항구에 도착, 샌드위치로 아침식사 후 일출을 봄. 8시 30분 체스메행(터키) 배 승선(50분 소요)하여 10시 체스메에 도착, 에페소로 이동(1시간 30분)하여 점심식사 후 에페소(고대 로마의 소아시아 수도)에서 유적지 관람(아르테미스 신전, 하드리아누스 신전, 셀시우스 도서관 등). 파묵깔레로 이동(4시간 소요)
7. 1월 31일(목) - 파묵깔레(면화로 유명)의 석회봉과 노천온천, 히에라 폴리스의 거대한 원형극장을 관람 후 카파도키아로 가는 길에 케러반 사라이(상인들의 성)를 본 후 오후 7시에 카파도키아 도착 (6시간 소요)
8. 2월 1일(금) - 카파도키아의 석굴교회가 있는 괴레메 골짜기, 비둘기집으로 가득한 바위산 우츠히사르, 지하도시 데린구유 관람, 터키의 수도 앙카라로 향함(6시간 소요)
9. 2월 2일(토) - 앙카라(계획도시) 시내의 한국묘지와 무스타파 케말 아타투르크 능묘를 보고 아스탐불로 향함(7시간 소요), 이스탐불에 오후3시에 도착하여 늦은 점심 식사 후 불루모스크 관람 및 고대 이집트의 오벨리스크와 뱀의 기둥, 데오도시우스 황제(400년경)때 만든 지하 물저장고를 보고, 그랜드 바자르에서 쇼핑함.
10. 2월 3일(일) - 돌마바츠크 궁전, 성소피아 성당(사원)관람 후 오후에 토카프 궁전 관람(최대의 규모를 자랑하는 궁전, 보석관 유명) 후 보스포러스 쿠르즈 탑승(1시간 30분), 저녁식사 후후 7시 이스탄불 공항 출발, 8시 55분 인천행 비행기 탑승(11간 소요)
11. 2월 4일(월) - 오후 2시 인천 도착
1. 이집트(1월 26일-토. 1일째) : 카이로
기자피라미드, 낙타체험, 모세기념관, 아기예수피난교회, 이집트고고학 박물관 견학, 나일강 디너크루즈(맥심-탄두라와 밸리댄스 관람)
1월 25일 오후 3시 50분 인천에서 출발하여 12시간 비행기를 타고 (7시간 시차, 우라나라보다 늦음) 01월 26일(토) 이집트 저녁 7시 기자 피라미드 부근의 호텔에 도착하였다. 시차 적응이 어려워 잠못드는 밤을 보냈다. 아침에 일어나니 비가 내렸다. 이곳은 1년 중 한두 차례 비가 오고, 오늘 가장 많은 비(10mm정도)가 왔다고 한다. 버스를 타고 시내를 지나는 동안 도로 곳곳에 물이 고여 있어 통행에 불편을 주었다. 도시에 배수시설이 되어있지 않아 인공으로 도로에 고인 물을 퍼내고 있었다.
<카이로 시내 전경>
이집트의 공식명칭은 이집트 아랍공화국으로 현재 7,800만명으로 수도 카이로는 인구 1700만명이 거주하며 계속 인구가 증가하고 있어 사막쪽으로 건축물이 확장되고 있다. 연평균 기온은 25℃, 강수량은 25mm정도나 겨울 1월은 9℃로 쌀쌀한 날씨로 우리나라 초겨울 날씨며, 7,8월은 38-40℃로 매우 무덥고, 룩소르는 57℃까지 기록하고 있다. 우리가 도착한 26일밤에도 바람이 많이 불고 쌀쌀한 날씨였다. 우리교민은 약 850명 정도로 대사관, 삼성, LG건설, 삼성,LG전자, 자동차 직원, 선교사 등이 진출하고 있다. 85%가 이슬람교이며 콥트교(이집트 정교) 15%를 차지하고 있다. 아랍연맹 22개국 중 선두국가로 GNP는 약 1,600달러로 우리나라 1960년대의 생활을 누리고 있으나 도시와 농촌의 빈부격차가 크다. 문맹률이 54%정도로 교육열이 낮으며 빈부격차가 크고 신분제도가 공공연히 남아 있다. 남자들은 외국인과의 결혼을 선호한다(신분상승의 기회). 우라나라의 위상은 삼성 진출 후 높아졌다고 한다. 현 무바라크 대통령의 장기집권(나세르,사다트에 이어 27년)으로 인한 정치적 무능과 관리들의 부정부패가 아직도 남아 있다. 우라나라의 10배에 해당하는 땅과 풍부한 관광자원, 많은 석유(휘발류 가격 200원정도)와 천연가스, 풍부한 전력, 풍부한 농산물 과 자연재해가 전혀 없어 개발의 잠재력을 갖고 있는 나라다.
카이로의 첫인상은 주변에 쓰레기가 지저분하게 버려져 있고 건물이 오래되고 낡아 마치 유령의 집을 연상될 정도로 흉흉했다. 고대 문명의 발생지로 막연한 환상이 일시에 무너져 내렸다. 이슬람교의 영향으로 비닐 없는 생선, 돼지고기, 술을 금식하며, 낮의 뜨거운 햇살로 인해 밤의 문화가 발달하여 밤늦게까지 거리에 차량과 사람들이 어우려져 있다. 차선과 신호등이 없어 교통체증이 심하나 신기하게도 교통사고는 많이 발생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것은 그들만의 삶의 노하우가 아닐까 생각한다.
<늦은 오후 카이로 시내 전경>
우리는 아침 식사 후 기자 피라미드로 이동했다. 고대 이집트 역사(파라오 왕조)는 고왕조 시대(BC3100-BC2040), 중왕조 시대(BC2040-BC1567), 신왕조 시대(BC1567-BC332)으로 나뉜다.
① 기자 피라미드는 고왕조 시대인 쿠푸왕(4550년전), 카프레왕, 멘카우레왕의 것으로 가장 큰 쿠푸왕의 피리미드는 높이 137m(원래는 146m로 지진으로 무너짐. 정상에 철핀으로 원래의 높이만큼 세워졌다.) 밑면은 230m의 정사각형으로 가장 밑단의 1개의 돌이 15톤이 넘으며(높이1m30cm정도) 총 600만톤의 무게를 자랑한다. 입구는 도굴되었고 피라미드 안쪽은 현실이 정 가운데 위치하고 있다. 15km 떨어진 곳에서 석회암 돌을 가져와 연간 10만명을 동원하여 20년 동안 건축하였고, 피라미드 기단의 기반암은 단단한 사암으로 평평하게 갈았는데, 당시 600만톤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고 평평하게 하기위한 것이었다. 피라미드는 오리온 별자리(실루스 별로 아침 해가 뜰 때 가장 먼저 보이는 별)의 위치와 관련이 있다고 한다. 네 면의 모서리에 태양 빛이 쏟아지는 형상으로 태양신 “라”를 나타내었고 건축당시는 외장이 미끈하고 채색이 되어 화려했다고 한다. 941년 이집트에 이슬람교가 번성하면서 이슬람사원(모스크)이 건축될 때 피라미드의 외장물을 떼어가 지금은 사각형의 돌만 남아있다.
<쿠프왕 피라미드>
두 번째 큰 카프레왕 피라미드는 쿠푸왕의 아들로 높이는 143m이다. 쿠푸왕의 피라미드보다 약간 작지만 보존상태가 매우 좋고 표면을 덮고 있는 화강암은 상부와 하부에 남아 있어 이집트에서 가장 아름다운 피라미드이다. 카프레왕의 피라미드 정면에는 장제전이 있고, 여기부터 참배길이 곧장 강변으로 통해 있다. 현실은 지하 65m에 있으며 도굴되었다. 현실을 내려가는 통로는 좁고 길었으며 숨이 막힐 정도로 답답하고 더웠다. 가장 작은 멘카우레왕의 피라미드는 높이가 65m로 카프레왕 아들의 이다. 카프레왕 피라미드 앞에는 수호신인 스핑크스가 있는데 통바위를 조각한 것으로 높이 20m, 길이 57m로 얼굴은 파라오의 얼굴을 몸은 사자의 형상을 하고 있다. 19세기까지 모래에 파묻혀 있다가 나폴레옹이 군대가 발굴하여 코를 사격하여 모든 조각상에 코를 파괴하였다. 코를 파괴한 것은 코에 정기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카프레왕 피라미드와 스핑크스>
피라미드를 본 후 주변에서 낙타 체험을 했다. 낙타는 수단에서 수입하는데 가격이 150만원이라고 한다. 주변에 피라미드를 순찰하는 경찰들도 낙타를 타고 있는데 관광객의 안전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 이집트는 관광자원과 수에즈 운하의 수익이 중요한 외화벌이로 연간 63억불 이상을 벌어들이고 있다. 수에즈 운하의 통과 수익은 선박당 1억 9천만원으로 국익에 상당수 차지한다고 한다. 통과 선박 중 80%가 현대에서 발주한 배라고 한다. 우리나라 조선소가 세계적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 피라미드와 낙타 >
② 올드 카이로 : 모세기념교회, 예수피난교회
점심식사를 현지식으로 한 후 유대인의 교회가 있는 올드 카이로로 이동하여 모세기념교회와 예수피난교회를 견학했다. 이집트(다신교의 사회)에 기독교가 들어온 것은 BC 30년 이후 로마제국시대(BC30-AD337)로 로마황제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 장군과 함께 클레오파트라의 연합군을 물리치고 이집트를 정복하고 로마의 속국으로 로마의 식량공급지가 되면서 부터이다(서기 17년). 초기 기독교는 이집트에서 콥트교로 정착하였고 3-4세기에는 이집트 전역에 80%가 되었다. 이집트에는 세계 최초의 수도원(성안토니오 수도원)이 있다. 641년 이슬람교가 유입되면서 전국민의 85%가 이슬람교를 믿고 있다. 구 카이로에는 기독교인의 무덤이 많이 있다. 카이로 시내에는 이슬람교의 영향으로 1층에 무덤이 있고 2층에는 간단한 집이 있는 무덤들이 많은데 현재 이곳에는 20만명의 가난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
모세기념교회는 유대인의 집성촌이었고, 모세기념 회랑이 있으며 이곳에서 두루마리 성경지와 탈무드가 발견되었다. 교회의 담쪽으로 바빌론 요새(로마군대가 건축)가 남아 있으며, 주변에 유칼리수 나무가 자라고 있다. 모세기념교회는 이후 이슬람교로 사용되어 천정에 아라베스크(식물과 꽃무늬)가 있다. 어린 모세는 나일강 갈대 숲 사이에서 이집트 파라오 공주에 의해 구출되어 40년간 이집트왕궁에서 살았고 40년간 도피생활을 하다가 시나이산에서 10계명을 받았다고 한다. 모세 탄생 당시는 히브리인(유대인)이 430년 동안 많이 증가하여 이를 두려워하여 이집트가 히브리인을 사내를 죽이는 사례가 많았다고 한다. < 모세기념교회 입구 >
아기예수피난 교회는 아기예수의 피난처로 자연 석회동굴에 기거하였다고 한다. 천장은 노아의 배를, 기둥은 12개(예수의 12제자)로 11개는 대리석으로 1개는 화강암이다(예수를 배신한 베드로 표현). 아기예수교회의 역사는 1700년으로 제자 요셉에 의해 레바논의 삼나무를 가져와 건축하였다고 한다. 1700년된 성화가 많이 전시되어 있다.
< 아기예수피난 교회 내부 >
< 아기 예수 피난처인 지하동굴 >
③이집트 고고학 박물관은 전세계 3대 박물관의 하나로 16만여 점을 전시하고 있다. 카이로 시내에 위치하고 있으며, 1층은 고 ․ 중 ․ 신왕조를, 2층은 투탕카멘 왕의 전시물이 절반을, 미라의 특별 전시관으로 되어 있다. 전시물이 많아 기자피라미드 근처에 새로운 박물관을 지어 이전할 예정이라고 한다. 투탕카멘의 황금관과 황금마스크는 순금이 117kg으로 세계 박물관에 절대 대여가 안되는 전시물이다. 이 박물관은 1897-1901년 완공되었고 프랑스 고고학자인 오거스트 마리에뜨가 건축하여 106점의 유물을 전시하기 시작하였다. 박물관 옆에는 이 고고학자의 동상과 무덤이 있다. 알렉산더 대왕의 원정 시 만들어진 로제타스톤(로제타문자와 이집트 일반상형 문자, 그리스 문자가 표기됨)은 나폴레옹에 의해 발견되었는데, 로제타스톤의 발견으로 이집트 상형문자를 해독할 수 있었다. 투탕카멘왕은 신왕조 중기(약 3350년전) 아멘호텝4세의 아들로 9세에 왕위에 올라 19세에 요절한 인물로 1922년 원형 그대로 발굴한 유일한 파라오이다. 투탕카멘 미이라가 있었던 황금관은 8개의 관으로 에워 쌓여 있었다. 나머지 파라오의 무덤은 고대부터 도굴되었다고 한다. 3500여점의 유물이 발굴되었고, 1700여점이 전시되고 있다. 유물에는 기본 4가지 색을 사용하고 있는데 금색(신), 청금색(바다), 터키색(하늘), 갈색(땅)이다. 세넷이라는 당시의 장기판은 흑단으로 만들어졌는데 매우 정교하다. 투탕카멘의 의자는 예술과 화려함의 극치를 이룬다.
4550년전 카프레왕의 좌상(검은색), 제사장(눈-시나이산의 수정을 깍아 악령을 막기위해 마치 살아있는 눈을 표현)의 조각상과 세계최초의 채색작품인 “새”의 표현은 시나이산의 주변 돌에서 채색을 채취하여 계란 흰자를 덧발라 채색을 유지하였다. 이러한 채색방법 때문에 오늘날 그 색상이 선명하게 보존될 수 있었다고 한다. 고왕조 쿠푸왕의 피라미드에서 출토된 유일한 쿠푸상(7.3cm)은 조각을 이어 붙였다고 한다. 세계최초의 피라미드를 건축한 죠세르상(4650년전)도 전시되어 있다. 죽은자의 문과 안내견(아노비스)이 있고 그 당시의 곡식(씨앗)도 매장되어 있으며 오늘날 실험을 통해 씨앗을 싹틔었다고 한다. 이집트 고고학 박물관 견학은 1시간 30분 정도의 관람으로 다음 일정 때문에 아쉽게 끝났다.
④나일강 디너 쿠르즈는 맥심이라는 배를 타고 저녁식사와 탄두라(남자만이 공연-신앙심 표현)와 밸리댄스(풍요와 다산 의미)를 보며 나일강의 야경을 약2시간 동안 감상하였다. < 밸리 댄스 공연 >
2. 이집트(1월 27일-일요일, 2일째) : 룩소르
왕가의 계곡, 멤논의 거상, 카르낙 신전, 합세슈트 장제전,
펠루카 탑승, 룩소르 신전
27일 새벽3시 20분 호텔을 출발하여 카이로 공항으로 갔다. 시차적응이 어려워 피곤한 상태에서 새벽에의 이동은 우리를 무척 피곤하게 했다. 오전6시 룩소르에 도착(비행기로 1시간)하여 왕가의 계곡을 향해 출발했다.
룩소르는 연강수량이 0mm에 가까울 정도로 비가 거의 없는 사막이며 7,8월 최고의 기온은 57℃로 1년중 가장 날씨가 좋은 날은 1월인데, 우리나라 가을날씨 정도로 낮에는 햇빛이 강하고 밤에는 쌀쌀하다. 왕가의 계곡을 향하는 길에는 사탕수수밭이 길게 놓여져 있는데, 면화와 함께 주요 . < 룩소르 공항 > 품목이다.
룩소르는 카이로에서 남쪽으로 약700km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중왕조시대(BC2040-BC1567)인 11왕조인 몬투호텝2세 때인 기원전 2000년경(4000년전) 고왕조시대의 수도인 맴피스에서 룩소르(과거 테베)로 수도를 정하면서 왕의 피라미드 건축을 중단하고 왕의 분묘를 산속 지하에 만들기 시작했다.
고대 이집트는 7,8,9,10월을 강의 범람기, 11,12,1,2월을 파종기, 3,4,5월을 추수기로 계절을 구분했다. 나일강 주변에 비옥한 토양은 농사에 적당한 곳으로 전국토의 5%에 해당하는 곳이 과거 문명의 중심지였다. 카이로는 나일삼각주가 시작되는 곳에 위치하며, 룩소르는 나일강 중류 계곡에 위치한다. 석회암산 넘어 왕의 계곡에 분묘를 조성한 이유는 ①나일강 범람으로 침수를 예방하고 ②도굴을 막기위해 ③산 정상이 피라미드 형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 왕가의 계곡 뒤의 산 >
▶ 오시리스 신화 : 그리스․로마 문화에 영향을 줌
내용 - 태초에 나일강 파피루스 숲에서 생명이 탄생하였다. 루트(하늘의 신)과 계브(땅 신)사이에 4명의 자식이 태어나는데 첫째가 오시리스(남)로 이집트 전역을 지배하며, 태평성대를 이루었다. 둘째가 이시스(여)로 첫째와 결혼하고, 셋째는 세트(사막의신, 남)는 넷째 네프티스(여. 죽은자를 보호)와 결혼하였는데, 세트가 형 오시리스를 질투하며 형을 제거할 계락을 꾸민다. 자기 집에서 축제를 열어 모든 신을 초대하여 황금관(오시리스에게 맞는 관)을 제작하여 경품으로 황금관이 몸에 맞는 사람에게 황금관을 줄 것을 알리고 마지막으로 오시리스가 관에 들어가자 관을 닫아버린다. 오시리스가 들어간 황금관을 나일강에 띄우고, 흘려 내려가 지중해의 비불루스 항구의 나무에 걸리게 되고, 부인 이시스가 지중해에서 나무에 결려있는 황금관을 찾아 살아나게 된다. 세트는 오시리스가 죽었다고 생각하였으나 살아난 형을 다시 제거할 계획을 세우고 형 오시리스를 42조각내어 나일강 삼각주에 뿌린다. 머리는 아비도스(성지화 함)에 떨어지고 몸 조각이 떨어진 곳에는 초록의 풀이 자라났다. - 이후 그림이나 조각에 얼굴과 피부는 초록색(재생을 의미)을 몸은 흰색(공명정대하게 다스림)으로 채색되었고 양손을 포게는 형상(헤카,헤카카)이 나왔다. - 부인 이시스가 42조각을 찾아내 맞추고 이시스의 날개짓(염원,재생,부활의미)으로 살아나지만 이승에서는 더 이상 살 수 없게 된다(다스릴 수 없게 된다). 아들 호루스(독수리에 비유-독수리는 이집트의 국조) 가 성장하여 삼촌에 의해 아버지의 죽음을 알게 되고, 오시리스는 지하 세계를 다스리는 신으로 세트는 지상을 다스리게 된다. 그 후 세트와 호루스는 싸워 한 쪽 눈을 실명하며 세트를 물리치고 호루스가 아버지 대신 지상을 다스리게 된다.
①왕가의 계곡
현재 룩소르 왕가의 계곡에는 암굴 분묘가 67개 있으나 10개 정도만 개방하고 있다. 투트모스3세 분묘(ㄴ자형)는 산 정상 가까이 있고, 1898년 발굴되었다. 전실과 현실이 있고 현실에 붉은 화강암 석관이 놓여 있으며 현실의 벽에 사자의서(주문서)가 기록되어 있다.
< 왕가의 계곡 입구 > < 투트모스3세의 분묘 입구 >
이집트의 나폴레옹이라 불리며 최대 영토를 차지했으며 가장 용맹스러웠다. 고대부터 도굴이 이루어져 계곡 깊숙이 도굴을 막기 위해 절벽위의 산에 분묘를 조성했다고 하는데 이 역시 도굴을 막을 수 없었다고 한다.
람세스3세 분묘(미완성 무덤)는 투트모스 3세보다 150년 후의 것으로 폭군이었으며 전쟁의 파라오였다. 직선 형태며 전실에서 현실이 약간 구부러져 있다. 그 이유는 다른 분묘와 부딪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인데, 지하에 그물망처럼 분묘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실 뒤에 미완성인 채 남아 있다. 부장품실에 생활상을 반영하는 그림이 채색되어 있는데 길이가 135m로 회랑이 넓고 사자의 서가 선명하게 남아있다.
< 람세스3세의 분묘 내부구조 >
람세스4세 분묘는 람세스 3세의 아들로 석관이 매우 크다(70톤으로 아스완에서 화강암을 가져옴). 천정에 하늘의 신 루트가 태양을 삼키고(12시간 천사 여행), 밤에 태양을 내 뱉는 것을 묘사한 그림이 채색으로 선명하게 남아있다. 통로 주변에는 226개의 사자의 서(주문서)와 왕이 구율을 지킨 내용이 적혀 있다(3100년전에 완공). 천정에는 심한 그을음이 남아 있는데, 콥트인이 로마인 박해의 은신처로 사용한 흔적으로 이들은 회랑 벽에 회칠을 한 후 기록을 남겼다. < 람세스4세의 분묘 내부구조 >
☞ 투탕카멘 분묘의 발견
하워드 카터 - 영국의 고고학자. 어렷을 때부터 유물을 스케치하며 유물관리 직원이 된다. 1800년 후반 이집트는 프랑스의 지배를 받는데 프랑스인과 싸워 직장을 잃게 된다. 마스피로으 도움으로 6년간 오두막 아래에서 발굴 작업을 하다가 1922년 11월 3일 투탕카멘의 분묘를 발견하게 되고 3,500여점의 유물을 10년동안 정리한다.
투탕카멘 분묘는 전실과 규모가 작은데, 그 이유는 재위기간이(9세- 19세, 10년) 짧았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20년의 공정으로 분묘가 조성되는데 비해 기간이 짧았으며 입구가 은폐되어 있었다. 투탕카멘 분묘 바로 위에 람세스 6세의 분묘가 있었고 람세스6세 분묘 발굴시 투탕카멘 분묘위에 움막집을 지었다. 하워드 카터가 움막집 주변에서 주석을 주우면서 우연히 발견하게 된다.
< 투탕카멘 분묘 입구 >
② 하쳅슈트 장제전
투트모스2세와 하쳅슈트 여왕사이(약3500년전) 공주만 2명이 태어나고 투트모스2세가 다른 여자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얻게 된다. 아들이 6세가 되는 해에 왕은 죽고 양어머니가 섭정하여 22년 동안 왕의 자리에 있으면서 스스로를 파라오(고대 이집트 유일한 여자 파라오며, 로마제국시대 클레오파트라도 파라오였다.)라 하며 통치하였다. < 하쳅슈트 장제전 전경 >
하쳅슈트 장례신전은 제를 올리는 곳으로 본인의 영원한 생명을 기원하던 명당 중에 명당이다. 석회암을 병풍삼아 뒤로는 왕의 계곡이 있고, 앞으로는 나일강 벌판(농경지)이 펼쳐져 있는 곳이다. 재위시절 주변국과의 무역을 많이 하여 소말리아까지 무역을 하였고, 신전 입구 양쪽에 소말리아에서 가져온 향나무 밑둥이 남아 있다. 향나무는 이집트에서 생산되지 않는다.
< 장제전 입구 향나무 밑둥 > < 하쳅슈트 장제전 앞의 전경 >
하쳅슈트 장제전은 1,2,3층의 테라스로 구성되는데 2층 테라스에는 소말리아와의 무역의 벽면 부조와 전쟁 등이 화려한 채색으로 묘사하고 있다. 3층 테라스에는 가장 깊숙하고 어두운 곳에 지성소(신이 살고 있는 곳)가 있고 밖으로 기둥을 음각과 양각으로 묘사되어 있다. < 2층 테라스 > < 3층 테라스 >
석회암산에 중요한 건축은 화강암(아스완에서 이동)으로 마무리 하였다. 밖으로는 합체슈트 여왕의 석상이 오시리스 포지션으로 나란히 세워져 있는데 머리가 없는 것은 양아들 투트모스3세가 왕에 오른 후 석상과 신전을 파괴했기 때문이다. 97년 1월에 이곳에서 과격 원리주의자의 사격으로 많은 관광객이 사망한 사건이 발생해 지금도 병풍산 넘어 경비를 하고 있었다. 신전의 왼편에 고대 이집트의 신성한 여신 하토르를 모신 신전이 있다. 하쳅슈트 장례신전은 모래에 파묻혀 있다가 1800년대 발굴되었다.
③ 멤논의 거상
아멘호텝3세(약3450년전)가 장례신전을 건축한 후 장례신전을 지키는 좌상(수호신)을 만들었으며 왼쪽 거상은 통바위를 조각한 것이고, 오른쪽 거상은 벽돌을 쌓아 올려 만들었다. 높이는 21m로 지금은 보수 중에 있다. 장례신전은 흔적 없이 사리지고 로마시대 거상에서 음성이 들려와 그리스․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멤논의 노래와 비슷하여 불리워지게 된다. 지진으로 석상사이 균열이 생겨 바람이 통과하여 소리가 났다고 하며 기원전 2세기(약2200년전) 복원 후에 소리(호루라기 소리)가 사라졌다고 한다. 아멘호텝3세는 룩소르 신전을 건축했으며 집권 38년 동안 전쟁이 없었고 고대 이집트 문화와 미술, 건축이 발달하였다.
④ 파피루스 종이 만드는 학교
현지식으로 점심식사를 한 후 고대 이집트의 대발견으로 꼽히는 파피루스 종이를 만드는 학교를 방문하여 파피루스 종이를 만드는 과정과 파피루스에 학생들이 여러 고대 이집트의 상형문자와 오시리스 신화 등을 그린 작품을 감상하였다. 파피루스는 삼각형의 줄기가 곧게 뻗어있고, 가는 잎이 여러 개 펼쳐져 있는데 줄기를 이용한다. 줄기의 껍질을 벋기고 속을 얇게 자른 후 물에 16일 동안 담아 두었다가 얇게 자른 줄기를 격자로 붙이여 말려 얇게 압축시켜 종이를 만든다. 고대 파피루스 종이를 만드는 방법은 전승되지 않았다가 최근에 많은 연구로 종이 만드는 법을 알아냈다고 한다. 파피루스는 고대부터 이집트의 것이 가장 크고 질이 좋았으나 최근 카이로를 비롯한 대도시가 오염이 심해지면서 많이 생산되지 않고 있으며, 지금은 농장에서 생산되고 있다. 파피루스 종이원료는 3-5년된 줄기에서 축출한다. 학생들의 작품은 매우 훌륭했다.
⑤ 카르낙 신전
이집트 최대의 신전이며 가장 완벽한 땅이란 뜻으로 중왕조시대(BC2040)부터 건축되어 2000년 걸쳐 계속 확장되었다. 여러 명의 파라오에 의해 아문라 신전과 주변에 무트, 몬트 신전 등이 함께 있는 복합신전이다. 아문라 신전은 중왕조 세누스레트1세(BC1964-1919)에 의해 처음 건설되었으나 현재는 거의 없어졌고, 신왕조 18대왕조인 아멘호텝1세(BC1525-1504)가 세운 아문라 신전이 있고, 세티1세와 람세스2세가 건설한 대열주실(134개 원형기둥)과 아문신전이 남아 있다.
신전에는 가장 먼저 탑문을 만나는데 이것은 인간과 신의 경계를 상징하는 것이며, 탑문 앞 양쪽으로 양의 머리 스핑크스가 58개 있는데, 고대에는 3km 떨어진 룩소르와 스핑크스 참배길로 연결되어 양의 머리를 한 스핑크스가 약 370개 있었다고 한다. 제1탑문을 지나면 안뜰이 나오며 안뜰을 지나 주랑(12개의 기둥)을 지나면 지성소(신이 머무는 곳)가 있다. 우리가 들어간 탑문(제1탑문)은 가장 후기에 만들어 졌고, 10탑문이 가장 먼저 건축된 것이라고 한다. 제1탑문은 미완성의 문으로 탑문 뒤에 벽돌과 흙더미가 쌓여 있었다.
< 카르낙 신전 제1탑문앞 전경 >
탑문을 지나 안뜰 오른 편에 람세스2세(약3200년전)의 아몬신과 몬트신을 결합한 신전이 있었다. 열주실은 12개의 기둥이 파피루스 다발을 묶은 모양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지성소에는 돌창문이 있고 곡물을 받쳤다고 한다.
< 람세스2세의 주랑 > < 람세스2세의 석상 >
제2탑문을 지나 양 옆으로 석회암으로 된 높이23m, 15m의 거대한 열주가 134개 늘어서 있는 광경은 그야말로 압권이다. 기둥에는 아몬신과 몬트신 등을 나타내는 여러 부조와 채색이 화려하게 나타나 있다. 그 규모의 웅장함에 놀라 우리는 탄성을 < 카르낙 신전의 주랑 > < 카르낙 신전 주랑의 부조 > 자아냈다.
주랑을 지나 두개의 오벨리스크가 높이 서 있었다. 앞에 있는 오벨리스크는 높이 25m로 트투모스1세(약3500년전-하쳅슈트 아버지)가 2쌍을 세웠으며, 뒤의 오벨리스크는 높이 29m로 하쳅슈트가 2쌍을 세웠다는데 각 1개만 세워져 있다. 1개는 로마가 가져가 현재 터키의 이스탄불에 있고, 1개는 밑둥이 깨진채 연못 근처에 놓여 있다. 오벨리스크는 통돌로 (화강암) 아스완에서 제작되어 나일강을 통해 이동되었는데 카르낙 신전 앞까지 배를 정박할 수 있었다고 한다. 25m의 길이에 그 무게가 700톤이나 되는 오벨리스크를 세우는 방법은 모래를 높이 쌓고 모래 능선을 이용하여 밑둥부터 올리고 서서히 밑바닥에 모래구멍을 내어 모래가 빠지면서 세웠다고 한다. 거대한 화강암의 돌을 깨는 방법은 무화과 나무를 바짝 말려 구멍에 쐐기를 박아 뜨거운 물을 부우면 쪼개지는데 같은 재질의 돌로 연마하여 상형문자를 파고 금은색 등으로 채색을 하였다고 한다. 화강암을 깨는 방법은 여러 학설이 있다. 그 당시 카르낙 신전은 매우 화려했다는 것이 연상된다. 오벨리스크 앞에 람세스3세(약3200년전)가 벽을 쌓아 상탑문을 만들었다. < 두 개의 오벨리스크 > < 떨어진 오벨리스크 >
오벨리스크를 지나 개성소 앞에는 파피루스 모양과 연꽃 모양을 하고 있는 기둥이 있다. 이것은 상․하 이집트를 통일한 상징성을 나타낸다. 고대 수도인 맴피스를 기준으로 상 이집트는 룩소르와 아스완이 대표적 도시이고 파라오는 독수리와 연꽃
<연못에서 바라본 카르낙신전> < 카르낙신전의 주랑 > 을 상징하며, 하 이집트는 카이로와 알렉
산드리아가 대표적 도시로 파라오의 왕권을 상징하는 것은 코브라와 파피루스였다. 기원전 3100년경(5100년전) 나르메르왕(메네스왕)이 상하이집트를 통일 한 후 파라오의 왕관에는 코브라와 독수리가 모두 나타난다. 개성소 안에는 재물을 바치는 재단이 있는데 나일강의 범람이 충분히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축체 때 소를 바쳤다고 한다. 오페트 축제는 나일강의 범람시기인 8,9월에 즉 범람 두번째 달의 첫째 날부터 시작하여 24일동안 지속되었다고 한다.
개성소를 지나 성스런 연못이 있는데 가로120m 세로70m 크기로 신관들이 목욕재개한 곳이 지금도 남아 있다. 그 주변에 장수풍뎅이(에스카바레-생명의 탄생)모양을 형상화한 돌이 있는데 이 주변을 돌면 아들을 난다고 하여 외국관광객들이 돌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 성스런 연못 > <장수풍뎅이 석상을 돌고 있는 관광객>
파라오가 살던 궁전은 이민족 침략(이슬람교)으로 없어지고 모스크 건설에 사용되었다고 추정한다. 카르낙 신전이 오늘날까지 존재하는 것은 거대한 화강암과 석회암을 이용하여 건설하여 3,4천년동안 모래와 마른 진흙에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⑥ 펠루카(이집트 전통배) 탑승
카르낙 신전을 보고 우리는 펠루카(이집트 전통배)로 나일강을 1시간 40분가량 항해했다. 고대 이집트에서부터 있어왔던 펠루카는 바람을 이용하여 돗으로 나일강을 항해하는 배인데, 우리일행은 두 개의 배로 항해에 나섰다. 바람을 이용해서 인지 속도감을 알 수 없어 지루한감이 없지 않았으나 배안에서 맞이하는 일몰은 너무나 황홀하여 차가운 강바람을 잊을 정도였다. 한개의 배는 돗에 구멍이 났는지 바람을 이용하지 못하여 제자리에서 맴돌아가 귀항길에 예인하여 돌아왔다. 그 배를 탄 사람들은 추위에 떨며 배의 전진을 기다리다가 답답하여 왜 전전하지 않느냐고 선장에게 물어보았더니 “이게 다 신의 뜻”이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참 이집트 국민다운 대답인 것 같아 모두 한바탕 웃었다. 고대 이집트 인들은 나일강의 서쪽은 죽은자의 땅이고 동쪽은 산자의 땅이라고 하여 동쪽은 도시와 마을이, 서쪽은 신전과 분묘 등이 분포한다.
< 이집트 전통배인 펠루카 > < 펠루카에서 본 일몰 >
고대 이집트 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심장의 무게를 다는데 심장이 저울보다 무거우면 현생에서 죄가 많다는 것을 의미하며, 심장의 무게가 적게 나가야 통과하여 생명의 열쇠를 얻어 12개문을 통과하여 지하의 왕(신)인 오시리스가 영원불멸을 내려준다고 믿었다.
⑦ 룩소르 신전
카르낙 신전에서 3km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카르낙 신전의 부속신전으로 카르낙 신전이 남성적이라면 룩소르 신전은 여성적 이미지다. 룩소르 신전은 아멘호텝3세(BC1387-1349)에의해 건설되었고, 계속확장되어 람세스2세(BC1279-1213)에 의해 완성되었으며, 기존의 신전에 다른 안마당과 열주실을 추가 건축하였다. 탑문 앞에는 람세스2세의 2개 석상과 그의 부인 네페르타리 석상이 있으며, 탑문에는 람세스2세
<룩소르신전 입구(탑문앞)> < 룩소르 신전의 주랑 입구 > 의 카데쉬 전투 장면이 부조로 묘사되
어있다. 우리가 룩소르 신전을 견학할 때는 마침 해가 저물고 어둠이 밀려드는 저녁이라 조명등에서 비취지는 신전의 모습은 또 다른 운치를 자아냈다. 탑문을 지키는 오벨리스크(25m)는 원래 2개였는데, 하나는 1800년대 무하마드 왕조 때에 프랑스에 선물을 주어 현재 프랑스 콩코드 광장에 있다.(옮기는데 2달이 걸렸다고 한다.) 제1탑문을 지나면 람세스2세의 안뜰, 열주회랑, 아멘호텝3세의 안뜰로 이어진다. 안뜰에는 74개의 파피루스 기둥이 들어서 있고 사이에 람세스2세의 입상이 있으며, 3개의 신당(아문신)이 있다. 안뜰 옆에는 10m벽 위에 이슬람 사원이 지어져 있는데 641년 아블 하각이라는 사람이 지었으며 병을 치유하는 사원으로 유명하였다고 한다. 이슬람사원이 지어졌을 당시 모래와 진흙에 파묻혀 지반이 높았다고 한다.(이집트는 2,3월에 모래바람이 많이 분다고 한다.)
신전의 지성소 들어가는 벽에는 람세스2세(재위67년-92세 사망)가 신전의 개소식(축제)하는 장면이 부조로 묘사되었는데 아들이 200여명이었고, 첫째부터 열두번 째 아들은 사망하고 열세번째 아들이 왕을 이었다고 하는데 그 아들의 나이는 60세
<룩소르신전 안뜰의 주랑> < 신전 개소식에 왕자들의 행렬 > 였다고 한다.(메렘프타왕)
신전에는 로마의 초대황제 옥타비아누스의 비석과 기록이 남아있다. 지성소안의 벽면에는 성화가 그려져 있으며(부조위에 회벽칠을 한 후 그림), 코린트 양식의 기둥이 있는데 이것은 콥틱인들이 교회로 사용한 흔적이다. BC332년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를 점령하고 페르시아 지배를 받던 이집트에 오자 이집트인들이 대 환영하며 파라오로 추앙받았다고 한다. 지성소 바깥 벽면에는 알렉산더 대왕이 아몬신전에서 신탁을 받은 후 음각의 부조(원래 고대 이집트는 양각의 부조를 새김)를 새겨 넣었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이집트인들의 신전을 보고 영혼불멸과 야망을 이루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이집트의 관광객이 가장 많은 시기가 1,2월이라고 한다. 이집트의 고대 거대한 석조물과 문명에 놀라고 세계 각국에서 들어온 많은 관광객들이 어디를 가든 가득하여 사람들에게 놀라면서 룩소르 신전에서의 아쉬운 관람을 마쳤다.
이후 현지식으로 저녁식사를 여유 있게(?) 하며 밤 9시에 밤11시 55분 카이로향발 비행기를 타기 위해 룩소르 공항으로 향했다. 룩소르 공항에서 수속을 밟고 기다리는 2시간은 추위와 그동안 쌓여왔던 피로가 덮쳐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다.
이집트 음식은 향이 강하고 짜서 우리 입맛에 맞지 않았으나 빵은 담백하여 먹기에 좋았다. 과자류는 매우 달며 그들은 커피보다는 홍차를 즐겨 마신다. 이집트에서 생산되는 오렌지는 매우 신선하고 당도가 높았으며 대추야자나무 열매인 대추야자가 매우 맛있었다.
3. 이집트 3일(1월 28일-월,3일째) : 사카라, 멤피스
① 사카라의 계단식 피라미드
1월 28일 새벽 2시에 카이로 호텔에 도착하여 약5시간의 숙면을 취한 후 우리는 카이로에서 서쪽으로 14km 떨어진 고왕조시대(BC3100-BC2040) 최초의 무덤군이 있는 사카라로 향했다. 사카라 가는 길은 전형적인 농촌의 모습으로 풍경이 아름다웠고 종려나무(일명 대추야자나무) 농장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가는 길에 카펫 스쿨(공장)이 많이 있었다. 대추야자나무는 열매인 대추가 우리나라 것보다 크고 맛이 달아 이집트인의 중요 먹거리로 이용되며, 특히 여성들이 아기 출산후 스프와 후식용으로 사용된다고 한다. 또한 대추야자 나무의 기둥은 집 건축 재료로, 잎은 지붕을 잇는 재료로 지금도 사
<사카라 가는길, 대추야자나무> < 멀리 대추야자농장과 사막 > 용되고 있다. 이 나무는 심은 지 15년
만에 열매를 맺는데 50년을 넘게 산다고 한다. 나일강을 끌어들여 운하로 조성하여 오렌지, 망고, 대추야자, 석류, 포도, 바나나, 면화 등이 관개농업을 하고 있다. 나일강 주변의 농경지가 이집트 총면적의 5%인데 이는 우리 한반도 면적보다 더 넓은 경지다. 가는 길에 이집트 전통 복장을 하고 어린 나귀를 타고 가는 고대 영화에서 나올법한 모습이 보였다. 우리 모두 타임머신을 타고 고대 이집트로 거슬러 간 것 같았다.
<계단식 피라미드 입구, 탑문 > < 계단식 피라미드 입구 주랑>
고왕조 최초의 무덤군인 계단식 피라미드는 낮은 산과 풀 한포기 나지 않은 사막에 위치하며, 죠세르왕(약4650년전)의 제사장이자 건축가인 임호텝에 의해 축조되었다. 총6단으로 쌓아올려 높이 62m의 석회암 피라미드이다. 계단식 피라미드는 그동안 마스터바(단층구조의 분묘)형식에서 층수를 처음으로 올린 피라미드이다. 피라미드 입구에 영혼이 넘나드는 문(탑문)을 지나 주랑(파피루스 다발모양)이 있다. 주랑을 지나 넓은 안뜰에는 계단식 피라미드가 중앙에 위치하며 피라미드 앞에는 2개의 재단이 있고, 이곳에서는 새드축제가 열려 파라오가 달리기를 했으며, 이곳에 파라오 석상을 묻어 재탄생을 기원하였다고 한다. 이 피라미드는 기자 피라미드의 멘카우레왕의 피라미드와 크기가 비슷하고, 피라미드 지하 30m에 미로가 있고, 그 가운데 죠세르왕의 미라가 있었으며, 4만여점의 토기가 발견되었다. 피라미드 주변에 재래신전이 있었는데 이곳에 입구에는 투탕카멘과 람세스2세가 방문하여 남긴 데모틱(일반 초서체로 상형문자와 다름)문자를 남겼는데, 이곳이 그 당시 중요한 성지 순례지였다.
< 계단식 피라미드 > <계단식 피라미드옆 제래신전>
계단식 피라미드의 주변에는 많은 피라미드가 있는데 쿠푸왕(기자피라미드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의 아버지 분묘인 스네프르 피라미드, 굴절 피라미드, 붉은색을 띠는 피라미드, 무너져 내리고 있는 우나스왕 피라미드(5왕조) 등 80기가 분포되어 있다. 계단식 피라미드를 비롯한 여러 피라미드도 역시 모래에 수 천년동안 묻혀 있다가 근대에 발굴하였다고 한다. 5왕조 우나스왕과 티티왕의 피라미드에서는 피라미드 텍스트(장송 문서-죽은자)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계단식 피라미드는 기자 피라미드보다 100년 앞서 건축된 분묘이다. <계단식 피라미드 주변 원주민> <계단식 피라미드 주변 다른 피라미드>
② 메네루카의 분묘
사카라에는 고대 4500년전의 치과도구와 치아교정기, 볼링장 레일(돌) 등이 지금도 남아있다고 한다. 4340년전 티티왕 피라미드에서는 사자의서(사후의 삶)가 현실의 벽면에 남아있다. 티티왕의 양아들(당시 제사장)메네루카의 마스터바 암굴분묘로 BC2340년(약4340년전)에 건축되었는데 그의 부인과 아들 등 33개의 방에 당시의 교육, 생활상 등을 부조로 화려한 색채를 이용하여 표현했다. 지하 25m에 메네루카의 미라가 있다.
< 메네루카 분묘 입구 >
사카라와 맴피스의 주변에는 왕이 기거하는 많은 궁전이 있었으나 오늘날은 주춧돌만 남아 있고 흔적 없이 사라졌다.
③ 맴피스 : 람세스2세의 야외박물과 및 거상
메네루카의 분묘를 보고 점심식사를 한 후 우리는 고대 고왕국의 수도였던 맴피스로 향했다. 맴피스는 고대 역사적으로 중요한 도시였지만 현재는 거의 폐허가 되어 스핑크스 이외의 일부 유적만 남아 있다. 유적 주변에는 한가로운 촌락이 있을 뿐이다. 맴피스를 기준으로 나일강 하류는 하이집트, 나일강 상류는 상이집트로 구분한다. 맴피스의 야외 고박물관에는 람세스2세의 석상(석회암의 통돌로 만듬)이 지진으로 다리가 부려져 누워있는 모습이 볼 수 있는데 정교하게 디자인된 문양과 그 크기에 놀란다. 원래 람세스2세의 석상은 신전터 앞에 2쌍이 있었는데 1개의 석상은 박물관에 있다.
<맴피스 람세스2세의 석상 입구> <람세스2세의 석상>
람세스 석상은 살아생전에는 수염을 직선으로 죽은 이후의 석상 수염은 아래가 구부러져 있다. 람세스2세는 석상의 모습과는 달리 키가 167cm였고, 머리는 금발에 메부리코에 못생겼다고 한다. 생전에 이집트 전 지역에 자기를 과시하기 위해 석상을 곳곳에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야외박물관에는 1개의 스핑크스(10m, 설화석고, 1912년 발견)가 놓여 있는데 몸통은 사자, 얼굴은 람세스2세로 표현되었다.
<람세스2세의 스핑크스 > < 멤피스 야외 박물관>
카이로로 돌아오는 중 중세 무하마드 알리 왕조시대 만들어진 무하마드 이슬람 사원을 보았는데 이집트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원이라고 한다. 터키의 이스탄불에 있는 성소피아 성당을 본보기로 지어졌다고 하는데, 사카라, 맴피스 피라미드의 외장 벽을 가져다 쌓았다고 한다. 이 곳 사원에는 프랑스가 선물로 준 고장난 시계가 사원 앞 탑에 붙여 있으며, 그 대가로 프랑스에 오벨리스크 1개를 주었다고 한다. 이집트 전역에 약 2천개의 모스크 사원이 있는데, 부자들이 모스크를 세웠다고 < 카이로로 돌아오는 길, 한 시골마을을 지나며 > 한다.
시타델성이 보였는데, 중세에 십자군 전쟁 때 아랍세계의 영웅인 살라딘이 1776년에 대비하기 위해 건설한 요새이다. 시내에 접어들 즈음 낡은 불량 주택처럼(1,2층) 보이는 이슬람교의 무덤군이 보였다. 이 무덤군은 이제 시체는 없어지고 시골에서 상경하여 카이로에서 최저의 삶을 꾸리고 있는 자들의 거처로 바뀌었다고 한다.(약20만명)
고대 이집트인들은 바위에 글과 문양과 조각을 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었다고 생각했으며, 고대 이집트에서 파리오가 사망하면 배를 태워 나일강에서 목욕을 시키고 뇌의 뇌수와 장기, 심장을 빼내어 항아리에 담아두며, 수분을 제거하기 위해 천연탄산수에 40일동안 담갔다가 대추야자나무 진액으로 소독을 하면서 닦고, 입 등에 부적을 넣고, 주변에 보물을 넣어 오시리스 포지션으로 죽은 후 약 70일후에 미이라로 분묘의 현실에 안장한다고 한다. 당시 미리아로 만들면 영원불멸한다고 생각했다.
<칸엔칼릴리(이집트 전통시장)> < 카이로 타흐리 광장>
우리는 400년이 넘는 이집트 전통시장(칸엔칼릴리)을 향했다. 시장 입구에는 거대한 이슬람사원이 있는데 각각 1100년, 1170년에 지어졌다고 한다. 시장에서 시장을 구경하고 약간의 기념품을 사고 다시 카이로 중심지로 향했다. 가는 중에 오스만투르크 지배시절(1500-1800년간)의 술탄의 동상(아브라함)이 있는 곳을 지나 카이로에서 가장 큰 광장인 타흐리 광장을 지나 우리는 처음 교민이 운영하는 한국식당에서 한식으로 모처럼 맛있는 식사를 했다.
우리 일행은 오후 8시 호텔에 도착하여 2시간을 휴식한 다음 오후10시30분에 버스를 탔다. 밀려오는 피로에 약간의 잠을 청한 후 12시30분에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했다. 아테네행 비행기표를 카이로에서 구하지 못하여 우리일행은 이곳 알렉산드리아까지 오게 된 것이다. 출국 수속을 마치고 약2시간을 알렉산드리아공항 대기실에서 기다리는 것은 또 다른 고행이었다. 3일간의 피로와 부족한 수면으로 지친 우리 일행은 바퀴벌레가 기어 다니는 의자와 그리스로 노동자로 떠나는 이집트 사람들이 가득한 공항에서 2시간을 기다렸다. 이 곳 알레산드리아는 이집트의 제2의 도시로 지중해연안에 위치하며, 카이로에서 북서쪽으로 28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BC332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이 이집트를 점령하고 세운 도시로 2천년전 이집트의 최고 도시였다. 이곳에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있었는데 프톨레미우스 왕조시절 세계의 최대 도서관으로 70만권의 두루마리로 된 파리루스 종이가 보관 되어있었다고 하는데 로마 지배(BC30년-)시절 줄리어스 시저에의해 불타버리고 그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에 의해 복원되었다고 한다. 최근 다시 복원(2002년)되었고 입구 벽면에 세계 여러나라의 글이 쓰여 있다고 하는데, 한글도 쓰여있다고 한다. 우리 일행이 도착한 시각이 저녁 12시가 넘은 시간이라 알렉산드리아 도시를 관광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 알렉산드리아 공항 >
4. 그리스 아테네 1일(1월 29일-화,4일째)
에기나섬, 소크라테스 감옥, 아크로폴리스언덕의 파르테논신전 및 아테네 시내 전망, 아테네 시내 관광
① 에기나섬 관광
3시 55분 아테네행 비행기 탑승, 6시 아테네 베네줄루스공항 도착했다. 베네줄루스 공항은 독일이 2004년 올림픽을 위해 건설된 공항으로 100년동안 임대해서 쓰고 있다고 한다. 우리가 그리스 아테네에 도착한 베네줄루스 공항은 마라톤 평야에 위치하는데 페르시아와 아테네 전쟁(마라톤 전투)에서 아테네의 승리를 알리기 위해서 한 병사가 아테네로 뛰어가면서 비롯한 그 마라톤 평야이다.
에기나섬 정상에서는 아테테시가 보인다. 고대 에기나는 부유한 도시국가로 신전에 재물을 받치는 대가의 이익과 동행세, 정탐을 해주는 댓가로 이익을 얻는 도시였고, 스파르타편에 가까운 도시였다. 그래서 고대 아테네에서는 고자질하는 사람을 빗대어 “ ‘에기나’사람처럼 살지 말라” 고 했을 정도였다. 아테네 전성시대 페리클래스 장군은 에기나섬을 초토화하여 다른 나라에게 팔았다고 한다. 로마시대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가 에기나섬을 다시 아테네에게 주고 대가로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오 동상을 세워준다. <피레우스 항구-에레나섬가는 배>
고대 페르시아 전쟁(살미스 해전)은 페르시아와의 2차 전쟁으로 페르시아의 다리우스황제와 아테네의 크세르쿠세스와의 두뇌싸움으로 크세르쿠세스가 델포이에서(10인의 여사제) 신탁을 받고 페르시아의 대형배의 옆구리를 작은 쪽배(40명 승선)로 구멍을 내어 승리하였다고 한다. 크세르쿠세스의 묘비에는 “자유인은 아테네 사람”이라고 적혀있다고 한다. 동방으로부터 유럽을 구한 전쟁이다. 세계에서 마라돈 대회를 개최하지 않는 나라는 오직 이란뿐이라고 한다.
<에기남 섬의 개인교회> < 교회 내부 >
오전 7시 에기나섬을 가기위해 피레우스 항구에 도착하였다. 8시에 배를 타고 10시 15분에 도착했다. 15분 정도 섬을 돌아보고 10시 40분배로 다시 귀항했다. 에기나섬에서는 개인이 만든 교회와 섬 주변의 풍광을 보고, 15분이라는 한정된 시간이 아쉽기는 했으나 겨울바다의 매서운 바람 때문에 조기 귀항했다. 에기나 섬은 울릉도보다 조금 더 큰 섬으로 아테네에서 40km떨어져 있으며 땅콩, 문어, 새우등이 많이 생산되며, 대부분의 그리스 인들이 에기나섬에서 2,3개월 휴가를 보낸다고 한다. 에기나섬에는 어업을 70%이상 하기 때문에 무사 귀환을 기리기 위한 개인교회가 3천여개가 있다. 인구는 약 14,000명이 살고 고대유적 아페아 신전이 있다.(기원전5-6세기 건축) 우리가 방문한 날은 마침 휴가 시즌이 지나서 철수한 상점이 많았고, 대주교의 죽음으로 애도 기간이라 모든 상점이 문을 닫은 상태였다. < 에기남 섬의 전경 >
♠그리스 소개♠
남한의 1.3배이며 한반도 3/5, 알바니아, 마케도니아, 불가리아, 이탈리아, 터키에 인접함. 3,100개섬 있고, 170개 섬이 유인도, 총인구는 1,100만명으로 수도 아테네에 400만 거주함, 민족성은 낙천적이고 게으르다. 해운수송 물류산업이 41.8%이며, 세계 선박보유비율이 18.2%를 차지한다. 관광객이 연 1,400만명 정도이며, 의원내각제로 수상이 통치하고 국회의원이 많음. 대다수 그리스정교(96%)를 믿고 미성년자는 선교가 불가함. 이력서에 종교가 기재되도록 하여 무교인 경우는 사회 참여를 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함. 9월 학기제로 6.3.3.4로 수업은 오전 8시에 시작하여 오후1시30분에 교육일과가 끝남. 초,중,고,대학이 무상교육이며, 사교육 열풍이 없음. 우리나라 교민수는 250-300명으로 100-150명이 실제 교민으로 여행업, 식당, 화가로 활동함. EU 가입국가 중 5번째 한국에서 수입을 많이 하는 나라다.(18억불, 우리나라는 1억불수입) 그리스어가 어려워 교민수가 적다고 한다.
우리가 방문한 1월 29일(화)에는 마침 그리스 대주교님이 간암으로 사망하여 수,목을 공휴일로 공표되었고 수상보다 더 영향력이 있다고 한다. 건물은 지진으로 옆집과 붙여서 짓고 1층은 습기로 살지 않으며, 유물 때문에 지하를 건설하지 않는다. 건물들은 80년-100년은 기본으로 견고하게 짓는다. 아테네 시내의 거리청소는 알바니아인들이 조직적인 청소업체를 구성하여 하고 있으며, 3D업종은 알바니아와 불가리아인들이 맡고 있다. 모든 직장들이 오전 9시-오후 2시30분에 끝나며, 국민소득이 16,000달러로 EU의 무상융자를 받고 있다.(더 이상 국민소득을 올리려고 하지 않는다. 이유는 EU로부터의 무상원조가 없어짐으로)섬에 2-3개월 휴가를 간다고 한다. 국민연금제도가 잘 되어있어 부모의 70%를 자식이 수령하고 있다. 병원이 무료이며, 사업은 무모하게 하지 않아 은행에서 대출이 없다. 남자가 결혼하면 메트리스와 여자 속옷만을 가져가 여자 집에서 사는데, 분가는 여자의 집의 층을 올린다. 장수국가로(80,90살은 보통) 낙천적인 성격으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소비문화가 발달되어 있다.(내일의 일을 알지 못하는데 오늘이라도 잘 살자!) 그리스는 현대 고정주영 회장이 당시 선박왕 오나시스를 찾아와 설계도면과 500원 동전의 거북선으로 수주를 약속받았다는 일화가 있다. 오늘날 그리스에는 승용차 10%가 기아나 현대차이고 올림픽때에는 현대가 스폰서였으며, 삼성 핸드폰이나 LG전자의 TV등을 가지고 있으면 부자라고 한다. 우리나라 학용품회사인 바른손은 외국인 학교에만 납품되는 고급의 학용품으로 알려져 있다.
<아테네 주택의 발코니 전경>
주택가격은 베란다가 크고, 잘 가꾸어져 있어야 비싸다. 그리스는 베란다 문화로 겨울을 제외한 나머지 계절에 음식과 여유 시간을 대부분 보내기 때문에 아주 중요하다. 여름의 리바스라는 열풍을 막기 위해 천막을 친다. 베란다에 봄에서 가을까지 다양한 꽃을 놓아두어 거리가 한층 아름답다고 한다. 가로수는 귤나무로 귤이 떨어질 때까지 놓아두어 우리가 방문한 1월 29(화)일에도 꽃처럼 피어 있어 거<아테네시의 가로수 귤나무> 리가 아름다웠다.
교통사고가 나면 본인 책임이고 속도를 측정하지 않으며 사전예고로 음주 단속을 한다. 그리스는 능력껏 사는 나라라고 한다. 학교의 건물은 초,중,고가 모두 있고 1-2반 정도, 1반에 17명 정도 있으며, 체벌은 교장선생님이 부모를 소환하여 하고, 벌점제로 유급을 하고 있다. 교사는 교수활동만하고, 교장이 학생을 관리하며, 교사는 수업이 있는 날만 학교에 온다. 그래서 교사의 월급이 적다고 한다. 학생들은 유급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② 아크로 폴리스 언덕 : 소크라테스 감옥, 파르테논 신전,
12시 피레우스 항구에 도착하여 아테네 시내에 있는 한국교민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돼지고기와 감자튀김을 먹고 소크라테스 감옥이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소크라테스 감옥은 가운데>
소크라테스는(기원전4-5세기 활동하였다.) 50세였으며, 그 부인(크산티페)은 10대 후반 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석공으로 파르테논신전에서 일하였는데 누더기 옷을 입고 목욕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크산티페가 악처로 유명한데 그 이유는 밖에서 돌아오는 남편에게 문 밖에서 물을 끼언졌다고 하는데서 유래된다. 사실 소크라테스와의 사이에 아이가 3명 있었다고 하는데 생활비를 가져오지 않아 빈곤한 생활을 영위했다고 한다. 물을 껴얻은 그 날도 아이들의 먹거리를 사오라고 돈을 주었는데 어디선가 돈을 탕진하고(사실 소크라테스는 제자들과 몇날 몇칠을 밤새 이야기함) 10일만에 돌아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당시는 여자들이 자유로이 밖을 출입할 수 없었다고 한다.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도 소크라테스가 처음 한 말은 아니고, 신탁을 받아 자주 이용한 말이며, 원래는 탈레스가 한말이다. “악법도 법”이라는 말도 소크라테스가 한 말이 아니다.
소크라테스 시대는 펠로폰네소스전쟁에서 아테네가 스파르타에게 승리한 이후 당시는 양성애자의 사랑을 고차원적 사랑이라 생각하여 고위관직에 있는 사람 사이에 음성적으로 유행했다고 한다. 그 당시 아이들에게 신화를 가르치는 것이 도덕적으로 금지 되었는데, 소크라테스는 아이들에게 신화를 가르쳐 신성모독죄와 양성애의 죄를 뒤집어 쓰게 되어 마침내 감옥에 가게 된다. 당시의 재판은 첫째가 국외추방령 이었는데 소크라테스가 불복하였고, 둘째는 벌금형인데 돈이 없었고, 셋째가 사형인데 이를 승복하였다고 한다. 델로스의 날(아폴로 탄생의 날) 후에 사형을 진행하기로 되었다. 소크라테스는 제자들에게 죽은 후에 “빚진 닭의 값을 갚아다오”라고 했으며, 죽음을 기다리는 동안 앓고 있었던 열병이 낳았다고 한다. 제자들은 열병이 낳은 것을 보고 소크라테스가 영원의 나라도 갔다는 것을 확신했다고 한다. 내려오는 길에 캐럿나무가 있었다. 다이아몬드를 무게를 재는 단위로 캐럿의 열매를 이용했기 때문이란다. 우리는 전쟁의신 아들인 아레스 언덕에 올랐다.
<아레스 언덕> <아레스 언덕에서 바라본 아테네시 전경>
<아레스 언덕에서 바 라본 아크로폴리스언덕과 파르테논 신전> ☞
아테네도 우리가 방문했을 때 8년만의 강 추위가 몰려와 매우 바람이 세고 추웠다. 베네줄루스 공항에 내린 오전 6시에도 눈과 비가 같이 내리고 있었는데, 아테테 전역에 많은 눈이 밤새 내려 한국에서 올겨울 보지 못한 눈세상을 맛보았다. 아레스 언덕에서 보는 아테네 시내의 풍경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한폭의 그림을 감상하는 기분이었다. 우리는 추위와 바람으로 오래 있지 못하고 내려와 아크로폴리스 언덕으로 올라갔다. 이로드 아티코스 음악당(161년 건축)은 아티카의 대부호 이로드 아티코스가 아테네시에 기증한 것으로 지금도 5월에서 10월말까지 음악회가 열린다고 한다. 1994년 조수미도 이곳에서 공연했다고 한다. 최근 약6천개의 객석을 새로 만들었다.
<이로드 아티코스 음악당> 이로드 아티코스 음악당 옆에는 기원전 6세기에 세워진 1만5천명을 수용하는 디오니소스 극장이 남아 있다.
아크로폴리스 언덕에서는 아테네시내가 360° 사방으로 볼 수 있는데 바다에서 일출과 일몰이 너무나 아름답고 아테네를 전망하기 가장 좋은 곳이라고 한다. 기쁨의 감탄가 저절로 나오는 곳이다. 지진이 많은 나라로 아파트가 없고 5,6층의 낮은 건물로 되어있어 마침 산에 눈이 하얗게 내려 바라보는 경관은 감동 그 자체였다.
아크로폴리스 언덕에서 바라보면, 저 멀리 푸니스 언덕(발디딜 틈 없이 숨막힘)이 보이는데 기원전 6세기 클레이스테네스 “민주정치”의 요람지로 도편주방제가 실시되었던 곳이며 민회에서 정치를 결정한 곳으로 직접민주정치의 출발지이다.
아크로 폴리스 언덕에 있는 파르테논신전은 유네스코가 지정한 그리스 고적 1호로 인류 최초의 불트 방식으로 지어졌으며, 설계도면 그대로 건축하였는데, 설계의 아버지 이티노스가 설계하여 15년간 건축하였다.(기원전 438년 완공) 기둥은 배흘림 기법으로 기둥 가운데가 가장 두꺼우며 기둥 안쪽 가장 위쪽이 7cm 기울어져 있다. 기둥은 지름 2m, 높이 10m, 46개로 160m의 폭에 세워져 있다. 황금비율로 건축하였고 조각품을 가져와 건축하였다. 파르테논 신전는 시민을 위해 만들었는데 예물을 바치 <파르테논 신전> 고 기원을 드리는 곳이다.
파르테논신전 입구에는 정화의 문(프로필레아의 문)이 있는데 도리아와 이오니아식을 결합하여 만들었다. 승리의 여신 니케(나이키)는 도리아 방식으로 만들어졌고, 아그리파 대좌(고대 전차경기 우승자의 동상을 세우는데서 유래)와 아테네 여신상이 금으로 만들어져 있었으나 유실되었다고 한다.(콘스탄티노플 황제시)
파르테논신전 서쪽 옆에는 에레크레이온 신전이 있다.(기원전408년 완공) 이 신전에는 카리아티데스상이 있는데 여신상으로 머리에 물동이를 이고 의상은 위로 말려 있다. 이것은 카리아티데스의 여성이 페르시아의 편을 들어 벌을 주기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 신전들은 그리스의 석조기술은 알렉산더대왕의 정복 후 인도에 까지 영향을 두어 간다라 양식이 탄생하게 된다.
<에레크레이온 신전 옆 카리아티데스상> <에레크레이온 옆 올리브 나무>
신전 옆에는 수명이 오래된 올리브나무가 있다. 올리브 나무는 아테네에서는 신이 내려준 선물로 기원전 776년 올림픽 우승자에게 올리브관을 씌워 졌다고 한다. 올리브에서 생산되는 기름1통은 10대가 먹을 정도로 가치가 있었다. 올리브 수명은 천년이 넘으며 2,3천년된 올리브유와 즙을 먹는다고 한다. 오늘날 올리브유의 가치는 우리나라에도 알려져 웰빙식품으로 올리브유를 쓰고 있다.
파르테논 신전을 지나 아테네를 전망하는 전망대에서 디오니소스 음악당(극장)과 제우스 신전( 기원전 515년 건축)을 보았다. 제우스 신전은 2세기 로마 황제 아드리아누스가 완공했다. 104개의 기둥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15개만 남아 있다. 간혹 빗방울이 떨어지고 바람이 세차게 불어 우리는 언덕을 <아크로폴리스 언덕에서 바라본 아테네시- 멀리 중앙에 제우스신전이 본인다> 아쉽게 내려왔다.
<아크로폴리스 언덕에서 내려오는 길>
③ 시내 관광 : 근대올림픽 경기장, 수상관저, 무명용사의 비, 아카데미아 등
아크로폴리스언덕을 내려와 우리는 시내 관광을 했다. 언덕을 내려오니 맑고 청명한 날씨와 바람이 잦아들어 관광에는 더없이 좋은 날씨가 되어 다행 이었다. 우리는 고대 올림픽(기원전 331년)과 근대 올림픽(1896년)이 열렸던 근대 올림픽 경기장을 향했다. 아베로프(정치명문가 후손)가 고대 올림픽자리에 근대 올림픽을 지었다. 1600명을 수용하였으며, 4년마다 경기(아폴론의 신탁으로)가 열리며, 올림픽 경기를 알리고 불참하면 벌금(300만)을 내게 했다. <근대 올림픽 경기장>
이곳에는 헤르메스상(길 가르쳐주는 전령)을 표현하는데 성기로 비유하여 표현하고 있다. 오늘날 그리스 정치가들은 힘이 세고 지혜가 많아 잘 다스린다고 생각하여 힘의 근원을 남자의 성기로 표현하고 있다.
아테네 시내에는 2인용 자동차가 많았다. 마치 장난감 자동차가 지나가는 것처럼 신기했다. 가로수에는 감귤나무가 많이 있으나, 뽕나무도 많이 있는데 뽕나무가 척박한 땅에 잘 자라기 때문이란다. 열매가 맺기 전에 모두 잘라버린다고 한다.(열매로 도로가 더러워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전기버스가 있는데 우리나라 삼성과 한화가 지원하여 홍보하고 있다고 한다.
<수상관저의 사이프러스 키프러스나무>
<수상관저> <수상관저를 지키는
경비병>
수상저택 마당에는 사이프러스 키프러스 나무가 하늘 높이 뻗어 있었다. 수상 저택 앞에 지키는 군인이 마치 코믹한 마네킹처럼 생겨 꼼짝하지 않고 있는 모습이 재미있었다.
국회의상당 앞 벽에 무명용사의 비가 있었다. 그리스가 우리나라 6.25에 참전하였기에 우리나라 이름(코리아)이 적혀있었다. 무명의 용사가 옆으로 누워있는 모습의 부조를 새겨 넣었다. 무명용사의비 앞 도로 건너편에 헌법광장이 있다. 위병의 신발에는 150개의 못(150명 의미)이 박혀있어 무겁다고 한다.
<무명용사의 비 앞에서> <아카데미아>
아카데미아는 플라톤이 기원전 5세기 만든 학교로 왼쪽이 도서관 건물이고 건물 오른쪽에 아테네 여신의 동상이 건물 왼쪽에는 아폴론 여신의 동상이 있는데 우리가 갈 때는 보수 중 이었다. 아테네 곳곳에는 아름다운 조각품들이 많이 있는데 이는 건물을 지을 때 미관을 생각해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바람의 아들이라는 3500개의 유리로 만든 작품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까메오의 본고장으로 다양한 조각품이 만들어진 매장을
방문해 약간의 기념품을 구입했다.(아테네
<아카데미아 옆 도서관> <아테네 시내 조각품-바람의 아들> 여신의 상징물이 부엉이 라고 한다.)
한국교포가 운영하는 매장에서 올리브 오일(20유로), 올리브 영양크림(28유로) 등을 구입했다. 우리는 한국교민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식사를 오랜만에 맛있게 하고 오후 7시에 피레우스 항구로 이동하여 히오스 향발 배를 탔다. 오후 8시 배는 히오스를 향해 출발했다. 4인 1실로 약 8시간이 소요된다고 한다. 지난3일 동안 에게해의 파도가 높아 배가 출항하지 않아서 배는 이미 사람들로 가득했다. 인솔자가 이집트에서부터 아테네에서 터키로 향하는 배가 출항하지 않을 경우 비행기로 부득이하게 이동해야 하기 때문에 1인당 120유로이상 경비가 더 들어갈 수 있다고 했다. 우리가 배에 탈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현지 이집트 가이드의 깊은 신앙심으로 우리의 무사 여행을 기원한 결과인 것이라고 저마다 즐거운 한마디를 했다. 아뭏든 우리는 무사히 배에 탈 수 있었고 터키를 향해 피로에 지쳐 잠자리에 들었다. 여전히 파도가 높아 배가 파도에 부딪치는 소리와 심한 요동으로 잠을 설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고 한다. 나는 피로가 몰려와 잠에 골아 떨어지고 말았다.
5. 터키 1일(1월 30일-수) : 에페소 (5일째)
① 에페소 관광
1월 30일(수) 오전 6시 그리스 히오스섬에 도착했다. 식당에서 간단한 샌드위치로 아침을 먹은 후 휴식을 취하다가 에게해 바다의 일출을 맞이했다. 이집트 나일강에서의 감동적인 일몰을 보았는데 그리스의 히오스 섬에서 맞이하는 일출은 또 다른 감회를 가져왔다. 우리 일행은 저마다 소원을 빌었다. 8시 터키의 체스메로 향하는 배를 타기 위해 항구로 갔다. 출국 수속을 마치고 9시경에 배에 올랐다. 50명 정도의 정원인 작은 배라서 배의 요동이 심해 선실 밖에서 차가운 바람에 부딪치며, 에게해의 마지막 바다와 풍경을 보면서 국경을 넘었다. 10시 터키의 체스메 항구에 도착하여 입국 수속을 마치고 버스에 올랐다. <그리스 히오스에서 타고온 배> <터키의 체스메항구>
★ 터키의 소개★
터키의 공식 명칭은 투르키에 공화국으로 투르키에는 과거 오스만제국을 가리키며, 터키는 칠면조라고 하여 터키 사람들은 부르기를 싫어한다. 터키의 원주민은 서돌궐족(셀추크투르크)이다. 터키의 영토 3%가 유럽이며, 아나톨리아반도(대부분 초원)가 97%(아시아)를 차지한다. 에게해와 흑해, 지중해를 경계로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이란, 이라크, 시리아와 국경을 이루고 있다. 남한의 7.5배로 우리가 아테네의 피레우스 항구에서 8시간 30분의 배를 타고 도착한 곳은 그리스 영토인 히오스로 제1차세계대전시 그리스가 터키의 동부유전개발과 이스탄불과 바꾼 섬 이다. 히오스는 터키와 40분 배의 거리에 위치한다. <터키 에페소로 가는 길>
한국을 ‘가르데시(동생)’의 나라로 부르며 우호적인데 한국이 터키에서 자동차(현대자동차-택시의 50%)와 삼성 핸드폰(부유층대상)이 많이 팔린다. 터키는 과거 80년대까지 우리나라보다 잘 사는 국가였으나 대륙적 기질로 느긋하고 게으르고 열의가 떨어지는 국민성으로 오늘날은 경제성장이 둔화되고 있다. 전력이 부족하고 지역의 경제격차가 매우 크게 나타나는데, 동부지방은 자급자족 수준이며, 서부(그리스 경계)는 경제력이 크고, 부의 집중현상이 나타난다. 터키의 교육은 중학교까지가 의무교육이며 대학진학률이 40%정도며, 대학을 진학한 남자는 3개월 군대를 가고, 그렇지 못한 남자는 18개월로 기간이 길다. 그 이유는 지식인을 대우하기 위해서다. 농업이 50%, 관광업이 30%,그밖에 공업이 분포하며 인건비가 매우 저렴하여 외국 공장이 많이 있다. 국민 1인당 소득은 4천달러 정도지만, 현지인이 느끼는 정도는 약 1만달러 수준이며 삶의 수준은 15천달러 정도로 느껴진다고 한다. 터키에서는 태어나면서 이슬람교를 믿고, 축구를 좋아한다고 한다. 7천만의 인구에 프로팀이 400개가 되고(한국은 10개), 이슬람사원 다음으로 많은 것이 축구경기장이다. 축구인은 정치에 영향력이 커서 정치인은 축구인과 연계할 정도라고 한다. 2002년 한국에서 열린 월드컵 16강전 한국 심판의 잘못으로 터키가 실점했을 때, 한국으로부터 군수물자 수입 중단을 선언했을 정도라고 한다. 이후 노무현 대통령의 방문으로 재개했다고 한다.
터키는 다민족국가로 동부는 아랍계가, 동북부는 슬라브계가, 서부는 그리스계가 분포한다. 터키어가 공용어로 한국어, 일본어, 핀란드어와 함께 우랄알타이어족에 속하며, 우리나라 어순과 비슷하다(주어,목적어,서술어). 이촌향도현상으로 도시외곽에는 기둥을 박고 집을 지어 달동네를 형성하여 살고 있어 도시화가 가속화되고 있다. 케밥은 불로 구운 모든 것을 말하며, 식사마다 코스요리를 즐겨먹는다. 즉 스프, 주요리, 디저트(샐러드) 순. 음식은 대체로 짜고 디저트는 매우 달며, 개나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 차를 하루 20잔정도 즐겨 마시는데 주로 홍차에 꿀이나 설탕을 타서 먹는다. 야생 투율립이 국화이며, 헌법에 1부 1처로 규정하였고, 이슬람교 교파 중 시아파(이란)는 여성이 차도르를 걸치고, 터키는 수니파라 여성이 희잡을 쓰고 있으나, 아타투르크 이후 탈이슬람을 선언한 이후 초․중․고에서 희잡을 헌법으로 쓰지 않게 했으며, 오히려 여성해방 운동가들이 희잡을 쓰고 있다. 그래서 거리에서 희잡을 두른 여성을 보기는 드물다. 다른 이슬람국가와 다르게 개방적이며, 우호적이고 가부장적이다. 터키사람들은 애국심이 강하며, 칼을 드는 경우는 형제와 가족을 돌볼 경우며, 강한 성격을 싫어한다. 선천적으로 온화하고 가정적인 사람이 대부분이다. 터키에서는 가정에서 구타율이 70%인데, 이 중 40%여성들이 당연히 맞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여성 직업선호 1위가 변호사, 2위가 여행가이드라고 한다. 여성의 사회활동을 선호하지 않으며, 터키의 전통혼례는 굴뚝에 병을 올려 놓아 시집갈 처녀가 있음을 알리고, 원두를 갈아 커피를 마시고 점을 보며, 중매쟁이가 신부집에서 커피에 신부가족이 설탕을 타면 성사 된다. 남자는 여자의 집에 지참금을 주고 결혼하는데 식장에서 공무원이 가족들 앞에서 사인 받아 결혼을 합법화 한다.(혼인신고) 이슬람문화권의 대부분의 나라는 고여 있는 물을 부정하다고 생각하여 쓰지 않으며, 목욕탕에는 욕조가 거의 없다.
터키에는 주상복합이 많아 아파트에 사무실이 있으며, 자동차 휘발유 값이 우리나라 2배로 3천원 이상 된다. 그 이유는 정부가 세금을 정책에 실패하여 부족한 돈을 직접세로 걷고 있어 담배, 휘발류 등이 매우 비싸다. 또한 물가가 우리나라보다 비싸다. 터키는 미국, 스페인, 이탈리아에 이어 관광 대국으로 많은 문화재와 빼어난 자연경관을 갖고 있는 나라다. 우리나라와는 위도가 거의 같으며 시차는 7시간 느리다.
피자의 원조는 오스만 투르크시대 유목민이 먹던 빵이 오스트리아에서 치즈를 위에 뿌려 먹는데서 비롯되었다. 호수가 많고 매우 커서 바다같이 보이며, 동부의 반호수는 티그리스 ․ 유프라테스강의 발원지로 이라크와 시리아를 위협하고 있으며, 이라크와의 국경지대에 쿠르드족이 거주하고 있는데 쿠르드족이 거주하는 곳에 유전이 발견되어 독립에 반대하고 있다.반호수 주변에 아타투르크댐을 건설하여 수원을 조절하고있다. 터키군은 주변국보다 군대가 강력하다.
체스메의 항구에서 이즈미르까지는 1시간 30분의 거리로 터키의 제3의 도시이다. 해군기지가 있다. 체스메에서 이즈미르를 거쳐 에페소에 가는 길에는 올리브나무가 약 80%를 차지하는데, 동부의 면화와 대표적 농산물이다. 지중해 연안에 펼쳐진 주택들은 그리스에서 본 주택과 흡사하여 매우 아름다웠다. 에페소 가는 도중 셀축이라는 곳에서 점심식사를(현지식) 했다. 셀축은 터키의 원조상인 돌궐족이 처음 정착하여 세력을 펼친 곳이다.
<에페소의 한글 안내판> <에페소의 수도관> <에페소 입구 전경>
20분 정도가면 에페소가 나오는데, 고대 도시 에페소는 이즈미르주 셀축 지역에 위치하며, 신석기시대(기원전 6,000년)부터 거슬러 올라간다. 기원전 1050년경 그리스 이주민이 고대 항구도시 에페소에 정착하기 시작하였으며, 기원전 560년경 에페소의 중심지는 아르테미스 신전 주위로 옮겨졌다. 현재 위치의 에페소는 기원전300년경 알렉산더대왕 휘하의 리시마코스에 의해 최초 건립되었다. 헬레니즘 시대와 로마 시대에 최고의 황금기를 누린 에페소는 소아시아주의 수도이자 최대의 항구도시로서 당시 20만 명이 거주 했다. 이후 퇴적물이 쌓여 항구의 기능이 점차 상실되고 전염병이 돌아 에페소 시민들이 셀축 도시로 동시에 이주하면서 쇠퇴하였다고 한다. 오늘날의 에페소 유적지는 시민들이 모두 이주하였기 때문에 그대로 보존되었다고 한다. 에페소에는 예수의 제자 사도 바울이 전도한 곳이 있으며, 크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가 연애했던 곳이 있다. 에페스는 맥주가 유명하다고 한다.
에페소 입구에서 가장 먼저 맞이한 것은 에페소 유적의 안내판이다. 한글 안내판이 있어 반가웠는데 삼성이 에페소에 50억을 기부했다고 한다. 그 대가로 한글 안내판과 삼성의 로고가 찍혀 있는 안내도가 5개 세워져 있었다. 입구 수도관 옆에 로마시대 카톨릭을 박해했을 때 쓰였던 비밀 암호 같은 것이 바닥에 그려있었다. 그 옆 로마시대 수도관(토관)이 다량으로 쌓여 있는 더미를 보았다. 길이에 따라 수도세를 많이 냈다고 하는데, 당시 물은 석회가 녹아 있는 물로 퇴적물이 많이 쌓여 막혀서 짧은 토관을 이용하여 꺼내 교체하였는데, 이음새는 석회와 달걀껍질을 이용하여 납처럼 떼웠다고 한다. 당시에는 물저장고가 없었는데, 물궁전 뒤 언덕에서 물이 풍부하게 내려왔기 때문이다.
에페소에서 정치를 하는 곳인 성문옥과 광장(아고라)이 나타난다. 성문옥은 오늘날 배심원제도의 기원이 되는 곳으로 두 사람의 싸움을 배심원이 광장에서 청중들이 듣고서 의견을
<정치- 성문옥> <성문옥 앞 거리> <원로원 회의장>
반영하여 재판을 하는 곳이다. 다음에 길게 뻗어 있는 공무중심 도로가 나오고 그 옆 건물이 원로원회의장(오늘날의 국회의사당)이 있다. 당시에는 모두 지붕이 있었다고 하며, 역시 앞은 광장(아고라)이 있는데 다른 시민들이 원로원 회의를 듣고 있다가 의견이 맞지 않으면 데모를 했다고 한다. 다음으로 오늘날의 시청으로 세금과 치안을 담당하던 곳을 갔다. 당시는 다신교 사회였는데 로마의 도미티안 황제가 유일신에 부담을 느껴 기독교를 박해했다.
<아고라 광장 언덕위에서> <크레테스거리-에페소 입구방향> <니케아 여신상>
<로마 신상>
신전은 개인 기념탑을 위해 세워졌고, 코린스식(화려함)과 이오니아식이 결합하여 만들어졌다. 크레테스의 거리를 가다보면 헤라크레스의 문, 하드리아누스 신전, 트라야누스의 우물 등을 볼 수 있다. 건축은 돌구멍에 쇠(철심)를 박아서 이었으며, 로마의 여신상은 초기 전체를 조각하였으나, 후기에는 몸과 얼굴을 달리 조각하여 이어 붙였다고 한다.
<헤라클레스의 문> <크레테스거리-세시우스도서관 방향> <쇼핑상점가-아토니와 클레오파트라 연애장소>
그래서 여신상의 머리가 떨어져 몸통만 남은 여신상이 많았다. 크레테스 거리 끝에는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가 쇼핑한 지역이 나오는데 바닥이 여러 가지 돌로 모자이크된 타일이 깔려있어 당시 화려함을 짐작하게 한다. 하드리아누스 신전 왼쪽에는 1세기에 만들어진 공중 목욕탕이 있다. 냉탕과 온탕(사우나)으로 나눠져 있었고 남녀가 따로 사용하였으며, 목욕탕 주인은 당시 실력가로 목욕탕 실내에 조각으로 서있었다.
하드리아누스신전은 로마의 5현제 중 한명인 2세기 하드리아누스가 건축한 신전이다. 공중 화장실이 현재 남아 있었는데 오늘날 수세식과 비슷하며, 앉아 서 용변을 보기에 편하게 만들어졌다.
사도 바울이 2년간 강론한 장소도 있다. 무너져 내린 니케아 여신상 앞에서 는 길이 두 갈레로 나우어진다.
<하드리아누스 황제 신전> <공중 화장실> <공중 목욕탕>
완만한 중심 도로로 내려가면서 우리는 에페소의 규모에 다시 한번 놀라게 된다.
<셀시우스 도서관> <셀시우스 도서관 옆> <셀시우스 도서관 안쪽>
<셀시우스 도서관 조각>
셀시우스도서관은 마블거리에 있는데, 로마집정관인 셀수스가 죽은 후 그의 아들이 아버지 묘 위에 세운 기념 건물이다. 1970년 복원되었다. 2층으로 110년-120년에 건축되었으며 당시 2만5천권의 책(파피루스)이 소장되었다고 하는데, 알렉산드리아 도서관(3만권 소장)과 경쟁 하였고, 당시 지진으로 무너지지 않게(셀블럭 기법) 끼워 넣고, 쇠심을 박았다고 한다. 당시 큰 지진이 11번 있었다고 한다. 정면에 지혜, 운명, 학문, 미덕을 상징하는 여성들의 동상이 있다.
원형극장은 2만4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지름 154m, 높이38m인 반원형 구조로 4세기 검투사와 맹수의 싸움이 벌어졌다. 연극이 공연되었고 모든 시민이 참가하는 회의장이었다. 여름에 실제 공연(오페라)을 한다고 하며, 당시 지정석이었으며 울림(공명)으로 설계되었으며, 오페라 문이 있었고 극장 형식으로 지어졌다. 이곳에서 우리 일행 중 음악교사가 우리나라 창을 실제 공연했는데 그 소리가 웅장하게 들렸다. 아마 한국인 최초의 공연(?)이 되었을 것이다. 오랜만에 우리의 전통 가락을 맛보았다.<셀시우스도서관 옆 마블거리>
에페소에서 주로 신봉한 아르테미신전은 1-2세기 건축한 것으로. 지금은 돌무더기로만 남아 있는데, 기독교 공인 이후에 이스탄불의 성소피아성당 건축시 재료로 사용되어 파괴되었다.
<원형극장 앞> <원형극장 전면> <원형극장>
아르테미스 신전 뒤에 성요한 교회가 4-6세기에 건축되었다. 그 앞으로 넓은 평지가 넓게 펼쳐져 있는데, 이곳에도 다량의 유물이 출토되고 있고, 서민이 거주하는 곳이었다고 한다. 에페소에 2천년이 넘는 유적이 고스란히 남아있고 그 규모에 놀라면서 터키의 문화 유적에 다시한번 감탄하게 된다.
<원형극장에서 내려다본 아르카디안 거리> 우리는 버스를 타고 파묵깔레로 향했다. 파묵깔레는 에페소에서 7시간 정도 걸리는 곳으로 온천과 면화가 유명한 도시(산양도 많이 방목함)다. 데니즐리라는 면화로 유명한 도시를 지났다. 데니즐리는 면직 공장이 많이 있다고 한다. 파묵깔레는 터키의 대부분에 해당하는 아타톨리아 고원(해발 7-800m)에 위치한다. 터키는 기차가 발달되지 않았고, 도로교통이 발달되어있다. 터키는 넓게 펼쳐진 광야와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거대한 대륙이 매우 인상적 이었다. 드넓은 땅을 가진 터키가 부럽기까지 했다. 터키는 도시와 농촌의 격차가 매우 큰데, 지방은 우리나라 6,70년대, 도시는 90년대 정도의 생활을 하고 있다. 도로에는 차가 많지 않아 정해진 속도(90km)로 여유 있고 안전하게 운전하여 편안했다. 이 나라는 워낙 대륙이 넓어 하루에 8-9시간 운전하는 것을 보통이라고 생각한다. 수십년동안 형성된 습관으로 우리가 생각한 만큼의 피로를 덜 느낀다고 한다. 터키를 여행하면서 운전의 베테랑인 버스기사 아저씨의 독특한 말소리가 여행을 끝나는 날까지 이어졌는데, 해맑은 미소와 38살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늙어버린 모습에 장난기가 매우 많은 아저씨였다.
양가죽 제품을 파는 곳에서 패션쇼와 가죽제품을 보고 우리는 저녁 7시가 지나서야 파묵깔레의 호텔에 도착했다. 콘도형 호텔로 온천지이라서 터키인들도 많이 찾는 곳이었다. 탄산칼슘이 많은 온천으로 피부병과 안질환 환자들이 많이 찾는다고 한다.
<가축제품 패션쇼> 터키탕은 20년전일본인이 관광하면서 사우나탕(음탕한?)을 만들어 대명사가 되었는데, 헌법재판소에서 터키탕(터키식 목욕탕)은 증기탕으로 명명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그 오명에서 벗어났다고 한다. 파묵깔레의 쇼핑센터에서 스카프 등의 면제품을 쇼핑했다. 파묵깔레는 이즈미르에서 동남쪽 250km 지점에 있으며, 터키어로는 ‘면의성’이라는 뜻을 가진 터키에서 손꼽히는 온천 휴양지이다.
6. 터키 2일(1월 31일-목) : 파묵깔레 (6일째)
① 파묵깔레 관광
우리는 다음날 1월 31일(목) 오전 9시에 석회봉과 히에라 폴리스에 갔다. 멀리서 연기와 함께 마치 눈이 덮은 하얀 봉우리처럼 느껴지는 석회봉과 그 주변에서 뿜어져 나오는 수증기와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을 연상케 했다. 다른 세상을 밟고 있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석회층은 대지 상부에서 내려온 석회 성분이 함유된 물이 오랜 시간을 거쳐서 결정체가 되고 대지 전체를 뒤덮은 것이다. 산기슭에서 보면 새하얀 설산처럼 보인다. 온천이 나오는 곳에 손을 담그니 물이 따뜻하고 감촉이 좋았다. 그 주변에 넓게 펼쳐진 곳이 히에라 폴리스인데, 기원전 190년부터 도시가 형성되었고, 비잔틴제국시대에는 약 35만명 정도가 살았다고 추정한다.
<석회 온천 주변> <히에라폴리스 고대도시 복원도>
많은 유적이 남아 있는데, 아폴로 신전과 거대한 원형경기장과 황제의 목욕장, 공동묘지 등이 있다. 원형경기장은 하드리아누스 황제에 의해 기원전 2세기에 세워졌으며, 1만5천명을 수용했다고 한다. 에페소에서 본 것 보다 더 크고 웅장했는데, 황제의 자리와 모든 자리가 지정석이었다고 한다. 야외였기에 지붕이 없고 로마식 건축방법으로 지어있다. <원형경기장> <히에라폴리스 박물관>
<석회봉과 야외온천> <석회봉에서 바라본 마을>
1시간 30분가량의 관람을 마치고 우리는 자연경관이 수려한 카파도키아로 향했다. 가는 길에 휴게소에서 터키인들이 즐겨 먹는 요구르트와 꿀과 양귀비 씨가 혼합된 음료수(?)를 먹었다. 파묵깔레는 야생양귀비를 많이 재배한다.<히에라폴리스 주변 유적지> <히에라폴리스에서 나오는 길> <휴게소에서>
터키의 원주민은 돌궐로 동돌궐은 발해가 흡수하여 연해주에 살게 되고, 서돌궐은 초원의길을 타고 서쪽으로 가서 오늘날 터키의 셀축에서 살게되고 이슬람교를 받아 들인다. 그 후 몽고제국(원)에 의해 많은 터키인이 죽고, 소수가 셀축 터키에서 시작하여 오스만제국을 세운다. 6세기 마호메트에 의해 창시된 이슬람교가 들어와 번영하게 되고 오스만제국 번성기(16세기 슐레이만 황제때)에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고 칼리프(교황권)를 이집트에서 가져오게 되어 번영한다. 이슬람의 5대 강령은 1. “알라”신에게 신앙 고백(유일신)한다. ‘마호메트가 유일한 선지자다’라는 기도문을 외운다. 2. 하루에 다섯 번(아침 일출 때, 중천에 해 뜰 때, 중천과 일몰 중간, 일몰, 잘 때) 알라를 향해 기도한다. 3. 성지를 순례한다. 평생 한번은 성지를 순례하는데 보통 퇴직 후에 가족과 함께하며, 가족주의가 강하다. 4. 라마단(금식기간)으로 매년 기간이 바뀐다. 보통 8월말-11월 사이로 여름에 오전5시부터, 저녁8시까지로 해뜨는 날에 아무것도 먹지 않는다. 그래서 야시장이 호황이며, 이 기간 동안 식당에서 식사가 무료로 제공된다. 라마단의 의미는 배고픔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다. 5. 자비(선행)를 배풀어라. 거지에게 돈을 주면서 고맙다고 말한다. 연 수입의 25%를 기부한다.
터키의 국기는 붉은 바탕에 초승달과 별이 한 개 그려져 있는데, 초승달과 샛별이 만나는 날(20년) 천사가 내려오기 때문이란다. 이 나라의 정치는 군벌세력과 이슬람세력이 양분하는데, 아타투르크 이래 군부혁명가들이 국민을 위해 정치를 하였고, 정권을 민간에 이양하여 국민들이 군인을 존경하고 있고, 군인을 명예롭게 생각하고 있다.
카파도키아로 가는 길에 전날 눈이 내려 들에 많이 쌓여 있었다. 콘야 라는 도시를 만나게 된다. 콘야는 체리가 많은 도시다. 체리와 함께 수박, 딸기, 감자, 고구마, 올리브 등이 많이 수확되는데 봄부터 가을 까지 풍부한 노동력을 이용해 수확하러 그룹별로 다닌다고 한다. 콘야는 목축업이 발달하였고, 종교적 ․ 보수적 색채가 강한 도시로 시멘트 공업이 발달하였다. 내륙의 중심 공업도시로 발달하였다. 각 마을마다 잔다르마가 치안을 담당하는데, 군인도 경찰도 아니지만 국방부가 관리하고 있다. 점심식사는 현지식으로 식사를 한 후 다시 우리는 카파도키아로 향했다.
<콘야 주변 마을> <콘야-중공업 도시>
<도로 주변 마을> <태양열을 설치한 집> <지평선이 보이는 광야>
왕의 길을 가다보면 집집마다 태양열이 많이 설치되어 있는 것이 보이는데, 전력이 부족한 터키 정부가 지원하여 설치했다고 한다. 이 마을들은 돌무시 버스(마을버스)가 있어 이용하는데 시설이 매우 좋으며, 저렴하다고 한다. 에페소-파묵깔레-카파도키아로 가는 길은 실크로드의 연장선으로 페르시아의 왕의길 이었다고 한다. 기원전 5세기 페르시아 왕자가 서방 원정길로 사용하면서 페르시아 왕의길 이라고 하였다.
<캐라반 성 입구> <캐러반 성 안-말 숙소> <대상의 숙소>
오늘날 이 길에 도로를 깔아 우리가 지금 달리고 있는 것이다. 카파토키아로 가다보면 과거 대상무역 상인들이 묵었던 숙소 캐러반 사라이(상인들의 성)가 있다. 캐러반 사라이는 50명-100명의 대상인들이 말과 여러 무역품을 가지고 1일을 쉬는 곳으로 무료였다고 한다. 대상 행렬의 규모는 100명 정도로 무리를 지어 이동했으며, 페르시아 왕의 길에는 수많은 캐라반 사라이가 약 40km마다 있었다고 한다. 넓은 광야에 여름에 건조하여 풀도 나지 않고 봄에 약간의 풀만 자라는 끝없이 펼쳐진 곳을 과거 이슬람상인들이 지나갔으며, 아시아의 문화가 유럽으로 퍼지게 되는 바로 그 길이었다. 이 길은 신항로 개척 후 유럽이 아시아와 직항로가 열리면서 서서히 쇠퇴하게 된다.
카파도키아에 가까워지면서 전날 많은 눈이 내려 도로 곳곳에 남아 있는 눈 때문에 속도를 줄이면서 이동했다.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어제 내린 많은 눈 때문에 9시간 도로에 갇혀 있다가 카파도키아를 보지 못한 팀이 있었다고 한다. 내심 걱정을 하면서도 그동안 우리 일행의 운(?)을 믿고 편안히 주변의 풍광을 볼 수 있었다.
<저녁 노을 무렵의 들판-카파도키아 부근>
8시간의 여정 끝에 저녁 7시 예약한 호텔은 눈 때문에 갈 수 없었고, 카파도키아의 다른 호텔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카파도키아에는 많은 눈과 체감온도 -15℃의 추운 겨울 날씨에 시내에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카파도키아- 고메다 호텔>
7. 터키3일(2월 1일-금) : 카파도키아 (7일째)
① 카파도키아 관광
카파도키아는 아나톨리아 고원의 중앙부에 펼쳐져 있는 커다란 기암지대이다. 버섯모양의 바위로 대표되는 기암의 특이한 경관과 그 속의 집, 교회, 지하동굴이 볼거리이다. 우리는 아침식사를 한 후 버스를 타고 파샤바 계곡의 작은 그랜드캐년이라 불리는 곳에 가는 도중 버스가 강추위로 인해 고장이 나서 마침 지나가는 관광버스를 얻어 타게 되었다. 자유여행사로 온 한국관광객의 버스로 그리스 히오스 항구에서 만났던 팀이었다.
<낙타모양의 바위> <낙타모양의 바위> <파샤바 계곡 주위 풍경>
파샤바 계곡을 가는 주변의 풍광에 우리는 탄성을 자아냈다. 다른 세계를 온 것 같은 착각을 일으켰다. 많은 눈과 바위가 제각각의 모습으로 하늘위로 솟아 있는 모습은 자연이 만든 최대 걸 작품인 것 같았다. 낙타 모양을 하고 있는 모습의 바위는 인간이 조각하여 만든 것처럼 보였다. 남의 버스를 얻어 타고 일부 관광을 한 후 우리는 터키석 보석과 옥돌을 만드는 상점에서 쇼핑을 했다. 쇼핑을 한 후 우리 버스를 타게 되어 기뻤으나 기쁨도 잠시 다시 버스가 고장이 나서 다시 보석 상점에서 본의 아니게 다시 쇼핑을 하였다.
<옥돌을 만드는 과정> <터키석의 여러 가지 모양> <옥돌로 만든 여러 작품>
다른 버스를 타고 괴뢰메 지역의 작은 그랜드캐년(캅탄 오스만)이라는 곳에 도착하였다. 파샤바 계곡과 괴뢰메 계곡은 수 천년전 화산이 분출하여 용암이 덮혀 있다가 수천년간의 침심작용 결과 오늘날의 절경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곳의 암석은 현무암과 응회암과 사암으로 적절한 차별침식을 받은 결과라고 한다. 뾰족한 바위에 구멍이 여러 개 나있는데 사람이 살았다는 흔적이란다. <작은 그랜드캐년 부근> <작은 그랜드 캐년> <마을로 쓰인 바위>
괴레메 지역의 장군바위가 있는 곳을 갔다. 마치 만화영화 스머프 마을을 간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는 곳이다. 자연이 만든 위대한 바위를 자세히 보고, 바위 교회에 그려진 프레스코화를 보았다. 유치하게 그려진 성화였다. 1950년대까지도 동굴에 사람들이 살았다고 한다. 그 후 지진위험으로 건물을 조성하여 사람들이 살지 않게 되었다. 지금은 비둘기만이 지키고 있다. 오늘날은 관광지로 개발하여 숙소와 식당으로 개조하여 사용하고 있는 곳이 많이 있다. <괴레뫼 지역의 장군 바위 입구>
<괴레뫼 지역의 시가지>
괴뢰메 지역의 바위교회에는 성화(프레스코화)가 잘 나타나 있다. 약 200년(11세기에서 13세기)에 걸친 십자군 전쟁(원인:기독교의 성지 탈환 전쟁-예루살렘)에서 비잔틴제국(동방정교회)이 패하였다.(7차례 전쟁 중 1차 전쟁만 승리함) 십자군 원정에 패한 이유를 우상숭배(십자가 등)로 인한 것으로 판단하여 성상파괴운동이 전개된다. 성상의 눈을 파내거나, 더 이상의 성상을 제작하지 않게 된다. 한편 로마카톨릭(서방교회)는 르네상스이후 성화를 예술로 승화시켜 발전시켜 나갔다. 비잔틴제국의 동방정교회는 봉헌용으로 금가루를 이용하여 프레스코화(성화)가 발달하게 된다. 괴뢰메 지역의 바위교회에 그려진 성화는 비둘기알의 노른자와 피와 똥을 염료로 이용하여 그려진다. <장군바위의 동굴 입구> <교회에서 바라본 전경> <동굴 속 교회의 성화>
<동굴 들어가는 길> <장군바위의 전경>
점심은 터키식으로 동굴을 식당으로 개조하여 만든 곳에서 유명한 카파도키아산의 와인과 함께 여유있고 맛있는(?) 항아리 케밥으로 식사를 했다. 카파도키아는 세계적으로 유명하여 많은 관광객들이 오는데 겨울은 성수기가 아닌데 한국인이 유독 겨울에 많이 온다고 한다. 최근 한국관광객이 많아져 간단한 인사말을 하고 있었다. 터키에 일본인은 20년전부터 연간 20만명이, 한국인은 10년전부터 15만명 정도 오고 있다고 한다. 우리가 간 식당에도 일본 관광객이 많이 있었다.
<동굴 식당 입구> <동굴 식당 내부> <동굴 식당에서>
<도자기 상점 입구> <도자기 만들기 시범> <다양한 도자기>
점심식사 후 아바도스(도자기 마을)에 갔는데, 히타이트인의 영향으로 다양한 도자기를 생산하고 있는 곳이다. 도자기 상점에서 히타이트시대부터 만들어진 자기와 이슬람영향을 받은 자기, 박물관 수준의 도자기 등 다양한 도자기가 전시되어 있고 판매를 하고 있었는데 그 값이 만만치 않았다. 카파도키아는 또한 모래가 많아 벽돌공장이 많이 있다고 한다. 카파도키아산 벽돌은 와인과 함께 유명하다. <다양한 도자기-국그릇과 찾잔>
카파도키아는 신석기시대(약1만년전)부터 사람들이 살았으며, 히타이트제국 시절(기원전 1200년전 이전, 최초의 철기사용민족)의 중심지로 발전하였다. 히타이트 시대부터 전쟁을 피해 바위와 지하 동굴에 거주하였다고 추정한다. 알렉산더대왕의 헬레니즘 시대와 로마제국에 복속되면서 로마가 기독교를 탄압하자 피란처라 할 수 있는 계곡의 바위에 교회를 짓고, 많은 사람들이 숨어 들어와 동굴을 파고 살게 되었다.
<데린구유의 지하도시 입구> <지하 1층> <지하도시로 네려 가는길>
데린구유(지하도시)도 기독교인들이 박해를 피해 살았던 도시인데 지하 동굴의 역사도 4천년 이상이 된다고 한다. 지하 1층은 고대히타이트인들이 살았으며, 이후에 다른 종족들이 살면서 지하 8층까지 지하도시를 확장했다고 한다. 물론 기독교인들이 박해를 피해 그들만의 종교 집회장소, 피신처, 식당, 창고, 거주지 등으로 사용되었다. 지하도시 거리가 9km정도 되며, 카파도키아에는 지하도시가 36개 발견되었다고 한다. 우리가 본 지하 동굴도 미로처럼 되어 있어 자칫하면 길을 잃을 수 있고, 매우 복잡한 구조로 되어 있었다. 1층에서 8층까지 내려갔는데 좁고 어두워 조심해야만 했다. 1층에는 가장 공간이 넓은 장소가 나타나는데 이곳에서 변절자에게 벌을 주거나 집회장소로 쓰였다고 한다. 주방, 외양간, 우물, 곡식저장 창고 등 내려갈 수록 다양한 장소가 나타났다.
<집회장소이자 벌을 주는 곳>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지하 우물-지상과 뚫려있다> <지하의 여러 통로들>
다시 우리는 터키의 수도인 앙카라로 향했다. 카파도키아에서 앙카라는 7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앙카라도 어제(1월 31일) 많은 눈이 와서 앙카라로 가는 길에 눈이 치워지지 않아 많은 시간이 걸렸다. 저녁 7시가 넘어 앙카라의 외곽에 있는 호텔에 도착했다. 피곤함에 지쳐 샤워를 하려는데 녹슨 물이 나왔다. 호텔의 식당에서 저녁을 먹는 동안 터키인들의 담배연기 때문에 목이 칼칼하여 입맛을 잃었다. 터키의 젊은 여성들도 담배를 열심히 피워대고 있었다.
9. 터키 4일(2월 2일-토) : 앙카라(8일째)
앙카라 : 한국공원, 무스타파케말 능묘,
이스탄불 : 오벨리스크, 뱀기둥, 콘스탄티노플 돌기둥, 그랜드바자르
2월 2일(토) 아침 앙카라 시내에 있는 한국공원에 갔다. 여전히 날씨는 춥고 바람이 많이 불었다. 한국공원에는 석가탑 모양의 대리석으로 만든 4층 탑이 세워져 있었는데 탑 주변으로 한국전쟁에서 사망한 770여명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우리나라에 1만5천명이 파병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참전에 참가한 사람들이 모여 그 때를 기린다고 한다. 우리는 이들을 위해 묵념을 하고 방문록에 서명했다. 그들의 값진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나라가 발전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앙카라는 계획도시로 수도가 들어서기 전에는 약 3만명이 살고 있는 작은 도시였다고 한다. 지금은 터키의 도시로 이스탄불에 이어 제2의 도시로 700만명이 살고 있는 동부와 서부의 교량역할을 하고 있다. 앙카라의 동상 98%가 무스타파 케말의 동상이라고 한다.
☜ <한국공원> <한국공원-참전전사자 명단> <앙카라 시내>
터키 최고의 영웅 무스타파 케말 아타투르크는 우리나라 김구와 세종대왕, 김좌진, 박정희 대통령을 혼합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터키의 민족지도자며 위대한 지도자로 전세계에서 2위로 꼽히는 인물이다.(1위는 링컨) 그는 터키의 문맹률이 높은 이유로 어려운 아랍문자를 쓰기 때문인 것을 알고 독일과 영국학자를 모아 새로운 문자를 창시(터키문자)하게 한다.(말글자와 소리글자 이용) 오스만 제국의 그리스지방 출신으로 1차 세계대전에 오스만제국이 참패하고, 영국과 프랑스에 의해 지배를 받다가 독립운동을 전개하는데, 다르다닐스 해전에서 누구나 패한다고 생각한 전투를 대승으로 이끌어 국가의 영웅으로 대통령이 된다. 1927년 터키 공화국으로 만들었고, 터키의 수도를 앙카라로 이전하여 서부에 치중한 개발을 동부 내륙 개발에 힘썼다. 탈 이슬람국가를 선언하면서 잘사는 국가로 나아가기에 힘써 한국과(극동) 교류가 활발해졌다. 터키에는 부자인 유태인이 많았는데, 터키 국민 모두가 잘 사는 나라를 염원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NATO(북대서양조약기구)에 가입하였다. 터키 곳곳에는 아타투르크의 초상화가 많이 있는데, 우리가 탄 버스 정면에도 초상화와 함께 “아버지 당신을 따르겠습니다!”라는 문구가 적혀있는 커다란 휘장이 붙여있었다. <무스타파 케말 능묘>
다음에 무스타파 케말의 능묘를 먼 발치에서 보았다. 사진도 찍지 못하게 하여 한편으로 아쉬웠다. 다음 일정 때문에 능묘를 보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터키에서는 아타투르크를 신격화하여 어디에나 초상화나 문구, 동상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앙카라는 분지지형으로 매연이 많고 갈탄을 난방으로 사용하여 매케한 냄새가 많이 나며, 이스탄불과 같이 물가가 비싼 도시이다. 앙카라는 양이 많은 도시로 시가지에 양떼와 개를 조각한 작품이 있었다. 시내에 교통량은 700만명이 사는 도시에 비해 교통체증이 심하지 않아 보였다. 시내에 버스는 정부가 운영하는 파란색 버스와 개인이 운영하는 빨간색 버스가 있었다. 돌무시 버스는 택시와 버스의 중간으로(봉고차 규모-마을버스) 도시 외곽에도 많이 있었다.
앙카라를 지나 우리는 5시간이상 걸리는 우리의 최종 목적지인 이스탄불을 향했다. 버스를 타고 4일째 터키의 아나톨리아 반도 절반을 돌고 있는 우리는 주변 경관의 신선함이 떨어지고 무료해 질 무렵 그동안 아껴두었던 잠을 맘껏 잤다.
<이스탄불 가는길-휴게소>
이스탄불(1일) : 불루모스크, 오벨리스크, 뱀의 기둥, 콘스탄티노플의 돌기둥,
그랜드 바자르
아나톨리아 고원(광야)을 서쪽으로 장시간 달리다가 산을 내려가 도로는 좁아지고 마침내 이스탄불이 가까워지면서 우리는 미지에 대한 호기심이 발동하면서 눈을 크게 뜨고 주변의 경관을 담았다. 이스탄불 근처에는 가까이에 1995년 지진으로 3만명 이상이 죽은 이즈밑이라는 도시가 있다. 이곳에 현대차 공장이 완공을 앞두고 있다. 이즈밑의 지진으로 현대차 공장만이 무너지지 않아 터키인들이 놀랐다고 하며, 그 후 이스탄불 시내의 택시 절반이 현대차라고 한다. 터키에서 가장 유적이 많고 세계적인 문화유산이 많은 이스탄불은 주택이 그리스에서 본 것과 같이 고풍스럽고, 매우 아름다웠다.
2월 2일 토요일 오후라서 이스탄불 시내에는 많은 차량으로 교통체증이 심하였다.
<이스탄불 제1대교 가는길> <이스탄불 제1대교에서> <유럽대륙의 이스탄불>
우리는 보스포러스 해협의 제1대교를 지나 유럽의 이스탄불로 향했다. 다리를 사이로 아시아 대륙과 유럽의 대륙을 잇는 역사적인 곳에 우리가 서 있는 것이다. 다리의 중앙에서 바라보는 보스포러스 해협은 황홀해서 배고픔을 잊고 저마다 탄성을 자아냈다. 아시아 쪽의 이스탄불 사람들은 조용하고 정적이며, 유럽 쪽의 이스탄불은 문화재가 많고, 중심지에 해당하는 곳으로 주택가격이 더 비싸다고 한다. 우리가 점심식사 후 관람하려고 하는 불루모스크, 성소피아 성당, 돌마바츠 궁전, 토카프 궁전 등도 유럽의 이스탄불에 있다. 대다수 구시가지는 유네스코가 지정한 문화재 거리로 함부로 증축이나 신축을 할 수 없다고 한다. 오후 3시 점심식사를 위해 식당을 걷는 동안 보았던 시가지의 건물들은 수백년이 넘어 고풍스러웠다.
이스탄불의 인구는 1400-1600만으로 인구는 계속 증가 하고 있지만 건물을 신축과 증축을 할 수 없어 임대료와 건물 가격이 비싸고, 서울보다 물가가 더 비싸다. 보스포러스 해협을 끼고 해안가에는 많은 주택들이 들어서 있는데 가격이 30억-100억 이상이라고 한다. 해안가에 있는 과거 술탄의 여름궁전은 개방되어 1일 사용료 가격이 1일 1천만원이라고 한다. 주택가에 높은 담은 1700년된 로마시대 세워진 성벽의 일부라 한다. 이스탄불은 로마제국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수도를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로 옮기면서 발전한 도시이다. 오리엔트 특급열차의 출발지 실키역이 있고, 아타투르크가 간경화로 죽음에 임박했을 때 국민들이 지어준 배(데니지)를 보았다. 해안가에는 출퇴근용 배가 많이 있었고 낚시를 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이스탄불-로마옛 성벽> <점심식사한 곳 주변>
오후 3시 늦은 점심을 먹고 우리는 불루모스크로 향했다. 오스만제국시절 과거 비잔틴제국때 만든 성소피아성당을 사원으로 개조하여 사용하였지만 불편하여 이슬람사원의 필요성을 느껴 불루모스크를 건축한다.(1616년 건축) 높이 43m, 지름27.5m의 대형돔과 중간돔과 30개의 작은 돔으로 받쳐있고 푸른색을 띄어 불루모스크라 불렀다. 멀리서 바라보는 불루모스크는 웅장하고 화려했다.
<불루모스크 입구의 시장> <불루모스크 입구> <불루모스크 내 세정대>
사원내 부속건물로 아니스타 바자르(시장)를 지나 사원 입구에 쇠사슬이 걸쳐 있는데, 이것은 술탄이라도 말에서 내려 고개를 숙이고 들어오라는 뜻이란다. 입구를 지나 기도를 위해 세정하는 세정대가 있다. 이곳은 기도하기전에 귀,입,손,발을 씻는 곳이다. 세정대를 지나 사원의 정문을 들어서면 불루모스크 사원과 마당, 회랑의 모습이 나온다.
<불루모스크 사원> <불루모스크 사원 회랑> <불루모스크 사원 내부>
사원내부로 들어가니 남자들이 손, 발, 이마를 대고 11번(33번, 알라의 이름 33가지) 절을 하고 있다. 여자들은 뒤의 다른 칸에서 기도한다고 한다. 사원 안은 화려하고 웅장하며 글자와 꽃의 문양을 이용한 아라베스크 무늬가 화려하게 채색과 함께 그려져 있었다. 창문도 화려한 채색으로 되어 있었다. 금요일 오후 2시에 대예배가 있어 이맘(목사)의 설교를 듣는다고 한다. 불루모스크는 문화의 공간이며, 생활의 공간(거주)이다. 사원 안 한편에 사원을 축소한 모형이 전시되었는데, 모두 금으로 만들어 졌다고 한다.
<불루모스크 내부 천정> <불루모스크사원 모형> <불루모스크 내부>
불루모스크를 관람 후 우리는 불루모스크 앞의 광장에 있는 오벨리스크와 뱀의 기둥과 콘스탄티노플 오벨리스크를 보았다. 로마제국시대 데오도시우스황제(1600년전)가 이집트에서 투트모스3세의 오벨리스크(25.6m)를 가져와 당시 마차 경기장이 있던 곳에 세워졌는데 그 밑 둥에 4면을 부조로 황제와 신하, 그리고 마차 경주를 하는 모습 등 이 새겨져 있다. 우리는 이 오벨리스크를 보고 며칠 전 이집트의 카르낙 신전에서 보았던 오벨리스크 중의 1개라는 것에 감동과 또 다른 어떤 거대한 존재감을 실감했다.
<오벨리스크 전면> <오벨리스크 밑단> <오벨리스크 밑단의 부조>
그 옆의 뱀 기둥은 청동으로 된 8m 높이로 그리스가 페르시아 전쟁(BC 5C)에서 승리 후 무기를 녹여 뱀의 기둥을 만들었는데, 콘스탄티누스1세대재 때 원래 그리스 델포이 신전에 있었던 것을 로마가 가져와 현재 위치에 세웠다고 한다.
☜ 왼쪽 <오벨리스크와 뱀의 기둥>
오른쪽 <뱀의 기둥>
콘스탄티노플로 로마의 수도를 이전한 후 로마의 경기장(5만명 수용)을 크게 만들고, 전세계에 로마를 알리기 위해 돌로 쌓아올리고 청동을 두른 오벨리스크를 콘스탄티누스7세에 의해 만들어 진 것이다. 십자군 4차 원정 때에 비잔틴 제국을 점령하면서 청동을 떼어가고 지금은 울퉁불퉁한 거대한 돌기둥 만이 남아 있다.
<콘스탄티노플의 오벨리스크 밑단> <돌기둥 가운데>
<돌기둥 전면>
우리는 데오도시우스황제(400년경-1600년전) 때에 건축한 지하 물 저장고를 보았다.
<지하 물 저장고 입구> <지하 물 저장고> <지하 물 저장고 천정>
이스탄불에는 약 40개의 지하 물저장고가 있다고 한다. 23km떨어진 곳에서 물을 가져와 식수, 전투용으로 사용되었고, 물고기를 키워 수질을 살폈다고 한다. 벽은 달걀껍데기와 석회를 이용하여 방수 처리 하였다. 우리가 관람한 지하 물저장고는 정부가 관리하여 무료로 개방하고 있었다.
우리는 이어 그랜드 바자르(카팔루치아)에서 쇼핑을 했다. 한 호텔의 식당에서 종업원의 유창한 한국말에 반가워하며, 한식으로 저녁식사를 오랜만에 맛있게 했다.
<이스탄불 시내 도로> <그랜드 바자르 가는길> <그랜드 바자르 입구> <그랜드 바자르>
10. 터키 5일(2월 3일-일. 여행 9일째)
이스탄불 관광-돌마바츠 궁전, 성소피아 성당, 토카프 궁전, 보스포러스 해협 쿠르즈
2월 3일(일) 오전 8시 30분 우리는 불루모스크(술탄 마흐멧) 옆에 있는 돌마바츠 궁전에 갔다. 돌마바츠 궁전은 31대의 술탄이 목조궁전이었던 것을 1843년부터 10년이 넘는 세월을 들여 현재의 모습으로 바꾸어 놓았다. 대리석을 이용한 유럽의 바로크 양식과 오스만 양식을 접목시킨 웅장하고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오스만제국의 마지막 자존심을 가지고 건축한 최고의 건축미학과 화려함의 극치를 자랑하는 곳이다. 입장료가 30유로(42달러)로 이집트, 그리스, 터키의 문화재 관람료 중 가장 비싼 곳이다. 현지 가이드(배태영)가 강력 주천 하는 곳이었기에 우리는 관람하기로 결정하였다.
터키의 문화재 화보로 가장 대표적인 곳인 시계탑과 분수대가 입구에 있다.
☜가장 왼쪽
<돌마바츠 입구-시계탑>
<시계탑 전경> <돌마바츠 입구>
이곳은 터키의 영웅인 무스타파 케말이 마지막 1년 동안 집무를 본 곳이기도 하다. 1938년 11월 10일 09:05시 집무중에 사망했다. 고인을 기리기 위해 집무실 시계는 그가 사망한 시간을 가리키고 있다.<입구-교대식><돌마바츠궁전 입구문> <돌마바츠 입구에서 시계탑 방향>
입구의 시계탑에는 프랑스로부터 받은 시계가 가운데 있고, 다른 정문을 들어가면 넓은 정원에 호수가 놓여 있고 가운데 아름다운 백조 문양의 분수가 조각되어 있다.
<궁전을 들어가서> <제2의 문> <정원의 호수 및 분수 조각>
궁전 내부로 들어가면 제일 먼저 집무실이 있고, 연회 장소가 있는데 아라베스크 무늬를 이용한 가구와 벽 등이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돌마바츠 궁전 입구> <집무실 입구> <연회장소 천정>
복도에는 네덜란드와 영국 등의 화가를 불러들여 술탄의 성지 순례(왕의 길 이용)와 술탄의 행차 등을 그린 그림이 걸려 있었다.
<연회장소 대기실> <술탄의 성지순례그림-왕의길> <연회장소>
흑단목으로 짠 탁자가 너무 화려하였고, 생활도구나 나무의 기둥에도 문양(아라베스크 무늬)을 넣어 화려하게 만들었다. 외교관이 술탄을 만나기 위해 기다린 곳은 최고의 화려미를 자랑 했다. 우리가 주변에서 만나는 엔틱 가구의 원조가 오스만제국의 왕실 가구라고 생각이 든다.
<왕실에서 쓰던 찾잔>
술탄의 부인(왕비)의 접견실, 왕자들의 교육장소, 서가 등 이동할 때마다 우리는 화려함에 감동을 받고, 탄성을 자아냈다. 이 세상 어디에도 돌마바츠 궁전 만큼의 화려함을 볼 수 없을 것 같아 우리는 가이드를 따라 눈을 크게 뜨고 다가갔다.
<왕비의 접견실> <2층의 계단> <크리스탈로 만들어진 난간>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의 난간에는 크리스탈 기둥을 제작하여 가운데 나무를 끼워 넣어 화려했다. 대연회장은 아라베스크 무늬를 이용하여 화려하였고, 입체적으로 그려 마치 2,3층의 난간과 돔을 보는 것 같았다.
<왕비의 연회실> <왕비의 연회실 천정> <연회실-장식품> <크리스탈 벽>
카페트도 대연회장의 크기만큼 통으로 제작하였다고 한다.
☜ 왼쪽부터
<접견실>
<술탄의 서재>
<왕자의 악기
연습장소>
술탄의 목욕실은 대리석으로 되어있어 화려했고, 자연 채광을 이용하였고, 창가로 보이는 보스포러스 해협의 경치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는 왕실 가족들의 방>
<복도의 불루모스크 그림> <복도의 그림과 바다가 보이는 창문> <천정-화려한 아바베스크 무늬>
대연회장 옆에는 무스타파 케말이 ‘국민들에게 보내는 편지’가 액자에 쓰여 있었는데, 명문장이라고 한다. 최고의 화려함을 자랑하는 대연회장은 오스만제국이 쌓아온 예술의 경지를 보는 것 같았다. 가이드 말 데로 심장을 잡고 들어가야 한다는 말이 꼭 들어 맞았다. 들어가서 사진 촬영은 허락되었으나 후레쉬는 터트리지 않아 사진이 잘 나오지 않았다. 디카와 비디오 카메라도 각 5유로와 8유로를 내고 들어갔으나 자칫 후레쉬가 터지는 날에는 경비원이 다가와 엄격히 제지 하였다. 가구와 벽지, 크리스탈로 만들어진 화려한 상드리에가 너무나 화려하고 예뻐 자연히 손이 가면 즉각 제지를 당했다.
<술탄의 목욕실> <술탄의 목욕실 천정> <목욕실 바다가 보이는 창문>
<대연회장 접견실> <대연회장 천정> <대연회장의 2층 돔> <무스타파케말의 국민들에게 보내는 편지>
돌마바츠 궁전은 마지막 3대의 술탄이 기거 했던 곳이라고 한다. 궁정에서 쓰였던 도자기와 찾잔 등의 여러 가지 생활도구는 지금도 쓸 수 있을 정도로 고전적이면서 화려하고 세련되게 제작되어 탐이 날 정도였다. 궁전의 여러 곳을 보아도 각각의 얼굴을 하고 있을 정도로 하나 같이 다른 디자인으로 제작된 것을 알 수 있다. 커텐이나 책상, 의자, 카펫, 전등, 상드리에 등이 어느 하나 같은 것이 없었다. 대연회장을 보고 우리는 밖으로 나왔다.
이곳은 사신들이 배에서 내리는 입구였다. 보스포러스 해협을 바라보는 경관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인간의 손으로 인간이 만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화려한 것을 보고 나니 그 어느 때 보다도 행복했고 진한 감동이 밀려왔다. 내 눈이 한층 업그레이드 된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대연회장 밖> <배에서 내려 대연회장으로> <외교사절이 배에 내려 들어오는 곳>
다음으로 우리는 1500년이 된 성소피아 성당(성소피아 사원-박물관)을 갔다. 성소피아 성당은 비잔틴제국의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 받고 있다.
<성소피아 성당 입구> <성소피아 성당 회랑> <성소피아 중앙>
건물이 오래되어 지금도 입구는 보수 중에 있었다. 과거 시멘트로 보수하여 시멘트를 떼어내고 원석으로 다시 복원하고 있다고 한다. 성소피아 성당은 로마법 대전을 편찬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537년)에 지어진 것이다. 원래는 325년 콘스탄티눗스1세에 의해 건축되기 시작하여 여러번 소실을 반복하다가 유스티니아누누스 황제가 각 속주에 칙령을 내려 가장 아름다운 기둥을 가져와 5년 7개월 만에 조립하여 완공하게 된다.
<항아리-세정수> <이슬람사원의 흔적> <성소피아 중앙 천정> <이슬람사원 때 술탄의 기도단>
이 때 에페스의 아르테미스 신전에 있었던 기둥이 쓰였다고 한다. 동로마제국(비잔틴제국)이 멸망하고 이후 오스만제국이 정복하여 성소피아 성당은 사원으로 개조되어 사용되다가 무스타파 케말이 박물관으로 개조하였다. 성당 입구에 성화는 황제와 마리아와 천사 미카엘이 그려져 있는데 봉헌 목적이기 때문에 금으로 모자이크한 성화였다. 지금은 천정 부근 얼굴과 몸의 일부만이 남아 있었다. 대형돔 안에 있는검은 바탕에 금색으로 쓰인 컬러그러피의 둥그런 판에는 알라, 무하마드 등 4명의 카리프 이름이 새겨져 있다.
<지진으로 무너진 유리창-오른쪽 시멘트로 막음> <대리석 바닥> <2층으로 올라가는 입구>
황제의 문을 지나 지진을 대비한 추를 내린 흔적(+)이 있고, 2m나 되는 큰 대리석 항아리가 2개 있었다.(원래는 3개 있었다고 한다.) 항아리에는 세정수가 있었고 뒤에 수도꼭지가 있었다. <2층의 회랑> <2층에서 본 중앙홀> <훼손된 성화>
코란의 경전을 가르치던 곳, 술탄의 기도단을 지나 오색찬란한 유리창이 시멘트로 막혀 있는 곳이 있었다. 건물이 지진으로 무너질 위기에 놓여 유리창을 막았다고 한다. 2층 입구에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편두통이 심해 만졌던 돌기둥이 있다.
<베네치아 상인-단호르의 무덤><멀리서 바라본 성소피아 성당>
2층으로 올라가는 곳은 13도 경사로 사람들이 걷기에 가장 좋았다. 2층에는 황녀가 예배를 보는 대리석과 대관석(황제가 서서 국민들을 보던)이 있었다. 성당내에 있던 모자이크로 된 대부분의 성화는 4차 십자군 전쟁이 일어나면서 많은 군인들이 금을 떼어가서 천정의 일부만 남아있는 상태였다. 성소피아성당도 웅장하고 화려했지만 돌마바츠 궁전을 보고 온 터라 그 감동은 덜 했던 것 같다. 단호르(베네치아 상인)의 무덤이 있었는데, 4차 십자군원정 때에 배 일만척의 대가로 성당에 무덤을 원하여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 이외에 11세기에 만들어진 성화가 있었다.
점심 식사 후 우리가 관람한 곳은 토카프 궁전이다. 셀축은 돌궐족으로 원래 유목민족이었다.
<토카프 궁전 입구> <토카프 궁전 성벽 문> <오스만제국의 영토 확장 지도>
1453년 이스탄불을 침략한 마호메트2세가 1460년 현 위치에 토카프 궁전을 세우기 시작했다. 70만m2의 광대한 부지를 지닌 궁전은 그 자체가 하나의 소도시를 이루고 있다. 1856년 돌마바체흐 궁전이 완공될 때까지 사용되었다. 25대 술탄이 기거 했던 곳으로 궁전 중 가장 크게 지여졌으며, 15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에 강력한 권력을 지녔던 오스만 왕조의 궁전이다. 정원은 과거 군영을 지키던 훈련소였다고 한다. 정원은 넓고 아름다워 터키인들의 휴식공간으로 이용된다고 한다. 황제의 문에는 각 술탄 문양이 그려져 있고, 이곳에서 경비병들의 교대식을 하고 있으며, 경의 문 첨탑에 돌출한 원기둥에서 참수를 하였다고 한다. 바다로 둘러 싸인 언덕 끝, 동서교역의 접점인 보스포러스해협을 주시하듯이 궁전이 서 있다. 과거 이곳에 대포가 설치되었던 것에서 대포 문 궁전으로 불리게 된다.
<황금의 잔> <식당에서 사용된 도구> <무게를 재는 추>
오스만제국의 번영기(1.1299-1326:셀축활동기, 2.1326-1481:,그리스, 흑해 연안 등의 확장기, 3.1481-1699:오스만대제국 최대 번영기) 중 최대 번영기에 술탄이 기거했던 궁전이다. 이곳에 모세의 지팡이와 다윗의 칼이 전시되어 있다. 보석 박물관에는 오스만제국 번영기에 많은 나라에서 선물로 바친 여러 진귀한 보석이 전시되었는데, 루비, 사파이어, 에머랄드, 다이아몬드, 진주, 금 등 세계의 모든 보석이 이곳에 모여 있을 정도로 화려하고 수집량이 아주 많았다.
<술탄의 이불-황금,보석으로 수놓음> <궁전에서 바라본 보스포러스 해협>
주방에서 쓰이는 도구들의 전시장에서는 5,000명이 식사할 수 있는 엄청난 주방 기구가 전시되어 있는데, 당시 주방장은 서열 3위로 주방 부대에서 사면권과 사형권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예절의 문에서는 술탄도 기어서 들어갔으며, 술탄의 침실에서는 술탄이 덮던 이불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모두가 황금과 보석으로 꾸며져 있었다.
우리는 다음으로 보스포러스 해협의 크루즈를 탑승했다.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역사적인 곳, 바다에서 가장 아름답고 황홀한 경치를 여유 있게 감상한 여행의 종착역이었다.
<보스포러스해협 쿠르즈 배> <여름 궁전-별장> <제1대교 아래>
이스탄불은 길이 약30km의 보스포러스 해협을 사이에 두고 유럽과 아시아로 나뉘어 있다. 해협의 폭은 최소 700m 이상이다. 관광객이 주로 찾는 곳은 유럽 지역으로 사무실, 상점 등 주요 기능이 유럽쪽에 집중해 있다. 최근 아시아쪽을 개발하고 있으나 대부분 주택지여서 많은 사람들이 페리를 타고 유럽쪽으로 출근한다.
우리의 보스포러스 해협 쿠르즈 여행은 우리가 건너온 제1대교를 지나 제2대교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코스였다.
<제1대교를 지나며> <멀리 제2대교의 전경> <제2대교 옆의 로마성곽>
제2대교는 일본이 건설한 것으로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보스포러스 해협의 가장 가까운 폭(680m)에 놓여 있었다. 일본은 그 대가로 1년간 통행세를 가져갔다고 한다.
<제2대교 아래> <다양한 별장들-낚시하는모습> <다양한 주택들>
어디를 가나 경제 대국 일본의 발 빠른 진출은 우리를 다시 한번 놀라게 한다. 이스탄불에서 가장 비싼 주택들이 모두 모여 있는 곳으로 1채에 30억에서 110억이 넘는 고급 주택들이 저마다 예쁘고 화려한 자태를 뽐내면서 당당히 줄지어 서 있었다.
<제각기 모습을 뽐내는 별장들> <해군사관학교>
제2대교 부근에는 로마시대 건축된 성벽이 지금도 고즈넉하게 남아서 보스포러스 해협을 지키고 있었다. 몇 시간 후면 한국으로 간다는 설레임과 10일간의 지난 여행을 떠올리면서 1시간 40분의 여정은 막을 내렸다. 한편으로 보스포러스 해협에서 일몰을 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기는 했지만 타이트한 일정으로 휴식이 필요했던 우리에게 가장 적절한 시기에 맞이한 휴양이어서 우리는 너무나 행복해 했다. <제각기 모습을 뽐내는 주택들>
보스포러스 해협의 아름다운 전원주택 <다양한 자태를 뽐내고 있는 주택들>
과 술탄의 화려한 여름 별장을 보면서 이곳에서 24시간 거주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하고 부럽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 여행을 하면서 우리가 공통적으로 느낀 것은 그래도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이 가장 살기 좋으며, 대한민국이라는 자긍심을 갖고 미래를 향해 나아갈 때는 언젠가는 세계 제일의 국가가 될 것이라는 자신감을 갖게 된 것이다.
우리는 저녁을 현지식으로 한 다음 저녁 7시 이스탄불 공항으로 가서 8시 55분 대한항공의 비행기를 타고 11시간 30분의 비행을 하여 2월 4일(월) 오후 2시 30분에 무사히 대한민국의 인천 공항에 도착했다. 10박 11일의 이집트, 그리스, 터키의 여행을 추억하면서 우리는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