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북 영주시 이산면 두월1리 877번지
「영주 괴헌고택」은 연안 김씨 영주 입향조 김세형(金世衡)의 8대손인 통정대부(通政大夫)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낸 덕산공(德山公) 김경집(金慶集, 1715~1794)이 1779년(정조 3)에 외풍을 막아주고 낙엽 등이 모여 잘 산다는 ‘소쿠리형’, ‘삼태기형’의 명당터에 지은 집으로 아들 김영(金瑩, 1789~1868)이 분가할 때 물려주었다고 한다. 김영은 회화나무가 가득하다는 뜻에서 이 가옥의 당호(堂號)를 ‘괴헌(槐軒)’으로 짓고 이를 호로 삼았다. 그 뒤 고종(高宗) 8년(1871) 선생의 증손(曾孫) 진사(進士) 김복연(金福淵)이 일부를 중수(重修)하였는데, 지금도 건축 당시 가옥의 옛 모습이 비교적 잘 남아 있다.
「영주 괴헌고택」은 사당, 사랑채, 안채가 유교사상에 입각한 위계질서에 따라 각기의 고유영역을 이루며 배치되고, 구조양식도 이 위계에 따라 격조를 조금씩 달리하고 있다. ‘一’자형 대문채를 들어서면 사랑채와 안채로 구성된 튼 ‘口’자 몸채가 자리 잡고, 몸채 우측 뒤편의 높은 상위 공간에는 사당이 별도로 일곽을 이루고 있다. 또한, 사당으로 들어가는 공간도 사랑마당과 안마당으로부터 구분되게 담장을 쌓고 협문을 통하여 출입하게 하여 사당을 더욱 신성한 장소로 느끼도록 하고 있다.
또한, 사랑채와 안채를 비롯한 몸채의 곳곳에는 생활의 편의를 위하여 쪽마루와 많은 수납공간을 두고 있으며, 쾌적한 실내 환경을 위한 작은 환기창과 고창을 각 방의 여러 곳에 내는 등 쪽마루, 수납공간, 환기창, 고창 등이 발달한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큰 사랑방 위의 다락 안쪽 깊숙한 곳에는 착탈식 널판으로 지혜롭게 위장해 둔 은밀한 피신처가 있는데 이는 일제강점기 등의 시대상을 읽게 하는 흔치 않은 실례이다.
한편 ㅁ자 정침(正寢)의 앞쪽 왼쪽에 있던 월은정(月隱亭)과 오른쪽에 있던 행랑채는 1972년 수해시 유실되었다.
문과 문
출입문에서 사랑채를 바라 봄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