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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와 보들레르, 그리고 이성복은 내가 조용히 되뇌어보는 이름들이다. 내게 카프카는 측량사 K를 통해 안개와 눈에 가려진 성(城)의 완고한 신비로, 보들레르는 진창에 떨어진 후광의 더럽혀진 신비로, 이성복은 유곽에 떠 있는 별의 치욕과 연민의 신비로 각인됐다. 이성복은 내용면에서는 카프카적이며, 형식면에서는 보들레르적이다. 그 자신도 산문집에 보들레르, 카프카를 일컬어 <선을 향한 두 개의 등대>라고 적었다. 시인의 정신적 공간인 대구의 고택 집필실에 머물던 여름밤, 나는 그가 젊은 날 쓴 메모첩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을 발견했다. <카프카 극복의 두 가지 길-Brecht와 Buber>. 카프카가 안개와 눈으로 가려진 고독한 내면의 성채를 찾아 떠났다면 브레히트와 종교사회주의자 부버는 현실 속에서 이상을 발견하고자 한 사람들이다. 이성복이 「가장 어려웠던 날들의 수첩(手帖」이란 제목으로 1979년 10월 29일부터 1980년 1월 14일에 걸쳐 쓴 이 메모첩에는 <치욕>, <나사로>, <환청>, <상처> 같은 단어들이 보인다. 첫시집에 수록된 시편들의 초교가 메모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는가 하면 글쓰기에 대한 치열한 상흔이 엿보인다. <글은 정신의 사랑행위이다.(확실히 나는 보들레르보다 더 따뜻한 곳에서 살고 있다) 사랑은 언제나 죽음을 낳는다. 죽음 있는 곳에만 삶이 있다. 우리는 셋이서만 산다-너와 나 그리고 破産(혹은 끝장)> 이러한 글귀들은 후일 그의 첫시집과 네 권의 산문집에서 꽃씨처럼 발견되는데, 나는 그 시차의 아득함 속에서 한 인간의 강인한 정신력에 흠칫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의 집필실 고택의 뜰에서 달빛을 받고 있는 석류처럼 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려고 했으나, 다음과 같은 구절을 발견하곤 한숨을 쉬지 않을 수 없었다. <위대한 것들은 모두 위독하다.>
이성복은 일찍이 악몽으로 점철된 카프카를 구부려 유곽을 창조했고 그 스스로 유곽의 의사가 되었다. 내게도 삶은 유곽에서 시작되었고 시 역시 진창에 떨어진 후광을 유곽에 덧씌우는 것이었다. 어느 겨울이 생각난다. 나는 후배와 함께 대구의 이성복을 만나러 갔다. 후배가 "이성복 선생님이 세상을 편하게 사는 법을 가르쳐주신다고 했어요."라고 전화로 통보했고, 나는 서둘러 그에게 치료를 받으러 행장을 꾸렸다. 대구에 도착해서 그의 집필실에 들렀을 때 고택의 뜰에는 매운 바람이 석류에 내려앉은 눈발을 흩뜨렸다. 밤이 깊어 드디어 그가 세상을 편하게 사는 법을 가르쳐줬다. 세사람이 앉아 있는 중앙에는 탁자가 놓여 있었는데, 문풍지 사이로 바람이 스며들어와 한기가 들었다. 그동안 우리는 세계여행 전문가인 후배에게서 터키 이야기를 듣다가, 그가 물을 때마다 나는 간간이 서울 이야기를 했고, 그는 묵묵히 듣고 있었다. 자정이 가까워올 무렵 말이 없던 그가 탁자를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렸다. 탁자를 두드리는 기다란 손가락에 눈길이 가자 얼굴이 너무 섬세해서 <유리처럼 바스러질 것 같았다>는 어느 선생의 그에 대한 인상기가 떠올랐다. "박형준씨는 이 소리가 어디서 나는 것 같아요" 이럴 땐 정신을 바짝 차려야 되지만 환자는 의사 앞에서 단순해지는 법이다. "그야 탁자에서……" 의사답게 이성복은 뜸을 들인 후 다시 말했다. "그럼 이번에 눈을 감고 들으세요. 이 소리가 어디서 나요?" 나는 그때서야 그의 의중을 알아차렸다. 소리는 탁자에서 나는 것이 아니었다. 눈을 감고 들으면 그 소리는 문풍지 사이로 스며드는 매운 겨울바람일 수도 있다. 내가 듣고 있는 소리는 집착과 습관에서 나온 것일 뿐, 그것에서 빠져나오면 모호하기 그지없다. 그는 뒤이어 서울에서 일을 보고 새마을호 열차로 대구로 내려올 때의 일화를 소개해줬다. 기차가 천안에 도착했을 때 텔레비전에서는 드라마를 방영하고 있는데 그 아래 <이번 역은 천안역>이란 자막이 찍혔다는 것이다. 아무런 연관성 없는 두 세계가 한 공간에서 아무 이유없이 만날 수 있다는 것인데, 기억과 집착에서 벗어나면 삶은 자유로워진다는 말이었다. 그가 1시쯤 집으로 돌아간 후 후배와 나는 컴퓨터 모니터에 붙어 있는 금색불상 그림을 바라보다가 간혹 탁자를 두드리며 겨울바람 소리를 들었다.
그러면 이번 방문은 어떤가. 겨울과 여름이라는 차이가 있고, 이번에는 일 때문에 온 것이기는 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그는 메모첩을 남겨놓고 자택으로 돌아갔고 나는 집필실 뜨락에 앉아 한 섬세한 인간을 통해 새삼 시와 삶이란 무엇인가를 곰곰 고민해볼 수밖에 없었다.
아래의 글은 그러한 불면의 하룻밤을 보내고 아침 일찍 찾아간 그의 직장 계명대 이성복씨 방에서 찾아낸, 어제는 맛보기이고 이번부터 본게임이라는 듯 숨겨있는 놀랍게도 많은 메모와 노트, 그리고 이야기를 토대로 작성한 것이다.
1. 가문을 레벨업 시키자
그 친구는 카프카를 무척 좋아했다. 뭔지 모르게 음산하게 그를 둘러싸고 있는 불안과 초조를 느끼고 있었다. 상식성에 기겁을 하며 손을 내 저으며, 웃을 때면 그 특유의 웃음-비웃는 투의 씨니컬한 웃음에 가까운, 속에서부터 울려나와 흠칫 듣는 이를 놀라게 하는 웃음을 조심스럽게 사물에 투영시켰다.
그 친구는 좋은 놈이었다. 한 권의 소설을 읽으면 그에 푹 빠져들어 며칠간은 몽롱한 속에서 살았고, 한 편의 영화를 보면 며칠을 그 배우에 대한 사진을 수집하러 돌아다녔다. 『개선문』의 라비크와 『의사 지바고』의 지바고를 <좋은 놈들이야>하며 <의사란 모두 좋은 놈들인 모양이야>란 결론을 서슴치 않게 내 놓을 정도였고, 한편을 개봉관, 제 개봉관 그리고 3류로 한달에 걸쳐 혼자서 보고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 친구에게 여자와의 관계란 오입질 할 때의 창녀 둘 뿐이었다. 좋아하면서도 상식성에 두려움을 느낀 그는 좋아하는 여자를 멀리하고, 따라서 아예 접근조차 제 능력 밖의 문제로 취급했다. 그 친구는 시를 잘 썼다. 열심히 그리고 훌륭한 시를 쓰기를 원했다. 집에서 모든 그의 식구가 다 잠든 밤, 도둑처럼 안방다락으로 기어가 밤새 소주를 마시고 잠이 들었던 기억을 내게 털어놓았을 때, 그때 그는 <술병에 별이 떨어진다>는 시구에 술을 마셨다고 자신도 모르겠다는 어처구니 없는 표정을 지었다.
-유태수, 「깃발 없는 풍경」『형성』, 1973.
위 글은 대학시절 선배가 이성복을 모델로 하여 쓴 소설의 앞머리이다. 소설이란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성복이 그동안 써낸 시집과 산문에서 보이는 상식성을 거부하는 집요한 정신과 성격의 일단이 흥미롭게 드러난다. 이러한 상식을 거부하고 대상에 파고드는 집요함과 끈질김은 그의 유년시절에서부터 형성된 것이다.
이성복은 1952년 경북 상주읍 오대리에서 오남매중 넷째로 태어난다. 위로 누나 둘과 형, 아래로 여동생이 있다. 한산 이씨로 목은 이색의 갈래였고 임진왜란 때 서애 유성룡의 사위이기도 했던 그의 선조는 안동 일직에 정착한다. 이후 그의 윗대에서 안동으로부터 선산을 거쳐 상주에 터잡게 되지만 이미 가세는 기울어진다.(이 대목에서 이성복은 자신과 멀지 않은 선대에서 양대 진사를 배출한 가문이라고 하면서 조심스럽게 보자기를 풀어 선조들의 문집을 펼쳐보였다. 이성복은 기회가 되면 그 문집을 번역하고 싶다고 했다. 이후 수없이 쏟아져나온 그가 쓴 2만매는 족히 될 메모와 미발표 시원고를 세 시간 여 감상하면서 부러움과 시기로 눈이 멀고 기가 질렸다. 사실대로 말하면, 행복해서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아버지 이한구(李漢求)씨는 3대 독자로 상주 농잠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금융조합이나 경북능금조합에 근무했다. 형제들이 없었던 아버지는 민감하고 감성적인 성격이었던 반해 형제들이 많았던 어머니는 <잘난 사람이 있는 자리는 거들떠 보지 않을 정도>로 자존심이 세고 이지적이며 강인한 기질을 타고 난 분이었다. 이성복은 이러한 부모님의 상극적인 두 성향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이성복이 아주 어렸을 때 동네의 다른 집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는데, 한사코 소를 끌고 가겠다고 고집을 피워 주위에서 모두 혀를 찼다고 한다. 이렇듯 모질고 딱 부러진 어머니의 성격과 민감하고 연약한 아버지의 성격이 충돌하면서 시인 이성복의 복잡한 내면을 형성해냈다. 이 점은 이성복의 식구들도 마찬가지여서 현실적이면서 열렬한 개신교 신도이고, 이성복 또한 초월적인 것은 믿지 않되 삶의 방법으로 종교를 선택하는 계기가 된다. 그러나 유년시절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이성복은 강인한 어머니의 기질이 강했던 모양으로 야심만만하고 출세지향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반에서 1등이자 글짓기선수였던 이성복은 상주 남부초등학교 5학년 때 「성신여중고 주최 전국예술제」에서 「내 목소리」란 산문으로 특상작을 받게 된다.
얼음장 같이 차디찬 여관방에 누우니
어머니의 따뜻한 품안이 한없이 그리워진다.
(…)
먹물을 뒤짚은 듯 깜깜한 밤에 역앞까지 나오셔서
"성복아 잘 갔다 오너라 몸조심해 그리고 당선되어서 와."
차는 떠나가고 어머니의 말씀은 바람처럼 사라진다.
나는 한참 동안 어머니의 생각에 잠겨 잠자코 있었다.
"아버지는 왜 돌아가셨을까?
가엾으신 어머니."
"엄마. 엄마."
나 혼자 가만히 어머니를 불러본다.
"엄마는 나를 서울에 보내기 위하여 줄음살을 늘리셨다. 그렇다. 꼭 당선되어서 돌아가야지."
(…)
백일장에 참가하기 위해 여관방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소년의 내면이 잘 드러나 있는 이 글은 현실의 변두리를 섬뜩하게 그려내어 그로테스크하기까지 한 첫시집의 유곽이미지를 떠올리게 만든다. 하지만 삯바느질을 하는 어머니를 매개로 하여 멀쩡히 살아있는 아버지를 돌아가시게끔 하면서도 끝내 백일장에서 <당선>이 되고 싶었던 소년의 야심은 서러운 바가 있다. 이러한 소년이 백일장에서 본 서울 학교 아이들의 칼라가 달린 산뜻한 교복은 서울에서 출세하고 싶은 야심을 부추겼을 것이다. 그가 고등학교 3학년인 1970년 3월 22일에 쓴 시 「비굴한 마음」에서 <하루 저녁 금(金)송아지 한 마리씩 잡아먹는/가물은 집 여자애가 부러운가? 나는./아무렴 가난으로/말라붙은 잇발을 쑤신대도 한번/네 애인이고 싶어라>라고 쓴 것은 부잣집 딸애가 아무리 가물어도 <판자집보다 대견>스럽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때 그가 서울로 전학온 배경에는 부산서 전학 온 아이로부터 시골에서 1등을 해도 서울에 올라가면 30등 밖에 되지 않을 것이라는 모멸을 받은 것이 한몫 했다. 라이벌 아이가 자기보다 더 좋은 점수를 받으면 그 아이의 시험지 답을 놓고 틀렸다고 우기다가 선생에게 뺨을 맞아 코피를 흘릴 정도였으니, 부산 아이의 그 말은 그의 자존심에 일대 도전장을 내민 거나 다름없었다. 이성복은 1963년 5학년 2학기에 <밥도 안 먹고 울고 떼쓰고 하는> 등의 끈질긴 고집으로 셋방살이를 하느라 도저히 받아줄 처지가 못 되었던 고모집에 얹혀 숙대 바로 옆 효창초등학교로 전학을 한다. 첫시집에서조차 유년체험을 한 줄도 적지 않을 정도로 어려서부터 잡초 비슷하게 될 것 같은 시골이 싫었던 그는 이때 서울에 가서 어떻게든 <가문을 레벨업>시켜야겠다는 자신의 각오를 실현할 기회를 잡은 것이었다. 하지만 서울에서 받은 첫 성적표는 정말 30등이었다.
2. 정치지망생 혹은 수재형 돈키오테
당시 이성복의 손위 누나들은 대구의 제일모직에 취직하여 여공생활을 시작한다. 1960년대에 시골에서 제일모직을 다닌다는 것은 운이 좋은 삶의 과정으로 이성복 아버지 친구가 그 직장에 근무한 덕분이라고 한다. 공장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던 손위 누나들은 휴가를 나오면 『소공자』, 『소공녀』, 『프란다스의 개』, 『알프스의 소녀』 같은 갱지로 된 동화책을 선물해주었다. 그런데 첫시집에 나오는 <티밥같이 웃는 누이>는 여동생을 지칭하는 것이다. 손위 누나들과는 나이차가 많았지만 여동생과는 네 살 터울이어서 그의 식구들이 모래내에 살 때의 이미지가 반영된 것이라고 한다.(이 대목에서 이성복은 손위 누나들은 학교를 제대로 못 다녔지만 자신이 서울에 올라온 덕분에 여동생은 이대 영문과까지 나왔다고 했다.) 그리고 6학년이 되면서 형이 서울용산고등학교에 입학하여 고모집에서 두 형제는 해후를 한다. 이듬해인 1965년 이성복은 월등한 성적으로 서울중학교에 입학하게 되고 두 형제의 뒷바라지를 해주기 위해 작은 누나가 올라오게 된다. 이어 아버지가 건설회사 경리로 취직을 하고 어머니 또한 <송곳 꽂을 만한 땅>을 팔아 일가는 서울에 터전을 마련한다. 서대문구 천연동의 이율곡 사당이 이성복 일가가 서울에 터를 잡은 첫이주지인데, 사당지기가 사는 방 두 칸짜리 집을 전세낸 것이었다. 거기서 한 반년쯤 살다가 냉천동에 한옥을 사서 이사한다. 30미터 벼랑 위에 지어진 집에서 일가는 그가 해군에 입대할 때까지 살았는데, 1971년 무렵 장마에 벼랑이 무너지면서 집이 폭삭 주저앉을 뻔하기도 했다. 하지만 초등학교 5학년 때 끊어진 글쓰기는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쓰지 못한다.
마침내 돈키호테처럼 야심많고 좌충우돌하는 성격은 1968년 경기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본색이 드러난다. 동일계인 서울고등학교에 입학하는 대신 아버지가 담임 선생과 싸우면서까지 원서를 쓰게 된 배경에는 그의 야심이 숨어 있었다. 경기고등학교의 흰테를 두른 교모와 다이아몬드형의 이름표와 뱃지는 부모들의 소망이었고, 어린 이성복에게도 성공의 지름길로 보였다. 환경에 의해 조성된 유목민 근성도 한몫 했겠지만, 더 많은 좋은 가문의 아이들하고 사교를 해서 정치를 하겠다는 원대한 포부가 더 컸다. 일찍이 초등학교 4학년 때에 <정의>에 대한 개념과 실천에 대해 2백매나 써내려갈 정도였던 소년은 고등학생이 되자 최남선이나 루소 같은 사상가들을 흉내내기 시작했고, 그들처럼 그 나이 또래에 <뭔가>를 보여주기 위해 <대단한> 이론과 사상을 설계하기 시작했다. 강연회의 글로 <위대한 소수의 체질과 생리>를 쓰는가 하면 어느 밤은 10시30분에서 12시 45분까지 두 시간 동안 예술문화론에 대해 40장을 원고지에 써내려갔다. 1인 문집 「사조(思鳥)」를 만든 시기도 이 무렵이었다. 예술과 사상에 두루 통하면서 민족과 사회의 미래에 전망을 주고 싶었던 의지가 창공에 날개를 편 새의 이미지로 표출된 것이다. 그는 이 문집을 친구들에게 5백원씩 주고 팔았고, 출판기념회도 열었다. 또한 정치지망생답게 웅변반에 들어가 기백을 키웠는데, 경기 웅변반은 훗날 인권변호사로 유명한 조영래, 나중에 국회의원이 되는 유인태 등을 선배로 두고 있었다. 이러한 돈키호테적인 측면은 고2때 주민등록증을 발급 받을 때 동사무소 직원에게 한 말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지금까지 살면서 내가 해놓은 게 정말 없구나>했다고 하는데, 이때 동사무소 직원에게서 들은 대답이 <조그만 놈이 헛소리하는구나>하는 야단이었다. 그만큼 그는 최남선처럼 열여덟살쯤 되면 확실한 뭔가를 보여줘 이름을 날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무렵 그는 연애를 하더라도 아주 철학적으로 하고 싶어했다. 루소처럼, 연애를 하려면 사상과 예술의 감식안을 지닌 귀족부인들의 치마폭에 쌓여 근사하게 해야지 세속적인 것은 벌레보듯 싫어했다. 가령『마담 보봐리』같은 소설이 왜 세계문학에 들어가는지 이해할 수 없었고, 문학이란 인간을 위대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생의 본질을 캐는 영웅주의적이고 예술적인 것을 추구하는 토마스 만 같은 작가가 위대해보였다. 이와 같이 이성복은 문학과 정치를 이끌어가며 예술과 철학 쪽 책들을 섭렵해간다. 시 습작도 서서히 시작되었다. 웅변반 반장을 하고 흥사단에도 다니면서 사회사상가이자 위대한 사회개혁자가 되고 싶었던 이성복은 고등학교 2학년 때 국어교과서에 실린 시를 보면서 다시 희미한 문학의 성채를 꿈꾼다. 이때 백일장에 「황국」이란 제목으로 입선한다. <(…) 다방 「아다지오」 앞/누런 꽃 두러미//황국의 모가지/철사테에 묶이우고//니코친같이 시커먼 먼지에/ 퇴색한 이파리// (…) //버스가 간다/이곳 골고다 언덕 위로//황국의 해골이 묶이운/새남터 위로// (…)> 이 시는 비오는 날 신장개업한 상점 앞에 걸린 국화가 모가지가 부러져 골고다 언덕의 예수를 생각케한다는 내용으로 상투성을 거부하는 그만의 참신한 표현법을 엿볼 수 있다.
미래의 소설가 이인성을 만난 것도 이 무렵이었다. 경기고등학교 화동문학상에 투고한 이성복의 「꽃핀 아유자의 노래」라는 시를 본 이인성이 낙선된 작품이지만 교지에 싣자고 제의한 것이다. 이성복은 그 당시 남한에 숨어들던 간첩들을 사살해 시신을 사과나무에 묻는다는 소문에 착안해, 간첩의 시체에서 사과나무가 자란다는 내용을 담았다. 초현실주의적이고 어두운 그의 시는 나중에 문학과사회의 리더가 되는 이인성의 눈길을 끌었고, 그때부터 둘의 교유는 서울대 불문학과 시절은 물론 현재까지 이어진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사직도서관에서 우연히 창작과비평을 보게 되고 거기서 <김수영추모특집>을 읽게 된다. 이때부터 성적은 뚝 떨어져 반에서 50등까지 밀리기도 한다. 그래도 그는 서울대 불문과에 진학한다. 그가 불문과에 지원한 이유는 세 가지였다. 첫째는 여학생이 많았다는 것, 두 번째는 독일어 학습에 질렸다는 것, 그리고 세 번째는 그가 읽었던 프랑스 소설이 장크리스토프였다는 것,(왜냐하면 위대한 것을 좋아했으니까.)
3. 정신의 부름켜, 동숭동 시절
서울대학교 교양학부 학생이 된 이성복. 1학년 생답게 고교시절 웅변가 출신에다 흥사단 서울시지회장 경력까지 있으니, 데모에 가담해서 이틀간 유치장에 갇힌다. 경찰서 출입은 이때 말고 1980년에 한차례 더 겪는다. 이때는 80년 5월, 결혼을 하고 야학 선생을 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5·18일이 일어난 얼마 뒤 그의 생일날 새벽 야학 교장이 김대중지지 삐라를 뿌린 일로 남대문경찰서에 끌려가 2박 3일간을 지내다 나온다. 하지만 그는 한번도 데모 주동을 한 적은 없고 동원부대로서 달려나갔다는 것이 사실에 가깝다. 시인의 회고에 따르면 만약에 그 당시 문학에 관심을 안 두고 고등학교 때의 신념이 살아 있었다면 그 쪽으로 많이 빠졌을 거라고 한다. 그러함에도 늘 정신은 그 쪽에 두고 있었고, 언제나 <손을 들 때, 손 수가 필요하면 달려나가는 쪽>이었다. 그러나 이 시기는 아직 불문학에 흥미를 느끼지 못한 채 고무신을 질질 끌고 다니다가 조교 선생의 꾸중이나 듣는 혼돈기였다. 그래도 평론가 김현과의 운명적 해후는 뚜렷이 기억한다. 그 전까지는 김현이 누구인지 몰랐지만 신입생 소개 시간에 당시 학과장이던 정명환 선생의 소개로 알게 되었다. 그 때의 김현에 대한 인상은 김현을 추모한 「크고 넓으신 스승」에 생생하게 적혀 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 갓 서른 살에 이른 선생님께서는 다소 살찐 얼굴에 빨간 넥타이를 매고 계셨다. 그 빨간 넥타이는 두고두고 내 기억 속에 남아 언젠가 선생님께도 그 이야기를 드린 적이 있다.> 1학년 때는 불어가 아닌 공부를 하고 싶어 고등학교 때 읽지 못한 책들을 도서목록 카드를 만들어 외국문학과 사상, 종교 서적을 탐독한다. 특히 이때 읽은 독문학은 뒷날 그의 첫시집에 뚜렷이 나타난 상징주의와 깊은 관련을 맺는다. 그는 카프카와의 만남을 이렇게 적고 있다.
당시 나는 종로 2가의 양우당이라는 서점에서 두 눈이 등대처럼 빛나는 카프카의 얼굴이 박힌 책을 샀었는데, 그 얼굴은 줄곧 내 눈에서 떠나지 않았다. 몇 년 동안이나 나는 카프카의 얼굴이 담긴 액자를 내 방에 걸어두었는데, 아직도 그 사진은 내게 남아 있다.
--「기억 속 책들의 눈빛」에서
이러한 독서는 일일이 번호를 붙여 하나씩 지워나가는 방식으로 진행됐으며 제대할 때까지 꾸준히 이어진다.(여기에서도 한곳에 빠지면 끝까지 자신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가는 집요한 성격을 엿볼 수 있다.) 그는 계속 습작시를 써나가면서 교양과정부 문학상에 투고를 한다. 그때 시의 제목은 「지(知), 부지(不知)」였는데, 심사평은 <아직도 이런 유치한 제목을 쓰는 대학생이 있는가>라는 의문부호였다. 아직 그의 초현실주의적인 시는 일상과 충돌을 일으키지 못한 채 겨우 자신의 미학을 부정하는 수준에 머문 정도였다. 이때의 시들은 주로 관능적인 소재들로서 고등학교 때까지 자신이 견지해왔던 영웅주의에 대한 반동, 즉 타락하고 싶은 심리가 <관능적 영웅주의>로 표출되었다. 1972년 대학 2학년 그는 문리대 문학회에 가입한다. 이성복을 모델로 문리대 학회지인 『형성』에 소설을 발표한 유태수 등과 만나고, 『형성』에 편집기자로 들어간다. 그리고 서강대 국문과 교수로 서울대에 출강했던 김열규 선생으로부터 원형비평 등을 배우고, 이때 딜런 토마스를 읽게 되는데 그 역동적인 상상력은 그의 초기시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
하지만 그에게 동숭동 시절은 짧았다. 1971년 3월 문리대 불문과에 입학했던 그는 공대가 들어 있는 공릉에서 일 년 동안 교양학부를 마치고 이듬해 3월 동숭동 캠퍼스에 들어갔으나, 2학년을 마치자마자 해군에 입대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1976년 2월 군에서 제대한 다음에는 내내 관악산 캠퍼스에서 수업을 들었다. 그 일년도 채 되지 않는 동숭동에서의 짧은 시절은 그가 살아온 세월 가운데 가장 가난하고 풍부하고 열정적이고 진지했던 시간으로 기억된다. 이성복 정신의 부름켜에 해당될 그 시절의 고뇌.
1972년 여름 어느 날 저녁 의대 캠퍼스 언덕에서 문리대 뒤 산동네 아파트에 방방이 불 켜지는 것을 바라보면서, 나는 저 창문들이 다 잠자리의 겹눈처럼 많은 눈이라는 생각을 했다. 내가 아픔의 렌즈로 세상을 바라보기 훨씬 전부터 세상은 수많은 겹눈들로 안쓰럽게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동숭동 시절의 추억」에서
이렇듯 그의 고뇌는 어느 가을 저녁, 철학하는 친구와 술을 마신 후 약국 앞에 내놓인 국화 화분을 안고 창경원 뒷담길을 달려가게 했으나, 토할 것만 같은 그 세월을 더 이상 견디기 힘겹게 만들어 군에 입대한다. 1973년 4월 21세 때 그는 십대 일인 공군 입대 시험에 낙방하고 해군 의무병이던 형의 도움으로 몸무게를 속여 십오대 일인 해군 입대를 한다. 12주의 훈련은 허약한 몸과 정신을 견디지 못하게 하여, 이성복은 자주 꾀병을 부려 열외를 한다. 1년간의 구축함 생활에 지친 그는 해군본부에 있던 형의 도움으로 해군 작전부장실 당번병으로 근무처를 옮긴다. 하지만 작전부장이 완전히 차를 타지 못했을 때 힘껏 차문을 닫아 작전부장을 다치게 한 후 다시 작전 차장실 당번병으로 자리를 옮긴다. 이런 경험 때문인지, 첫시집의 「제대병」에는 이런 구절이 보인다. <아직도 나는 지나가는 해군(海軍) 찝차를 보면 경례! 붙이고 싶어진다.> 또 흥미로운 사실 한가지. 훗날 그에게 고초를 안겨주었던 테니스처럼 해군에 복무했으면서도 끝내 수영을 못했다는 것.
그가 이따금씩 꾸는 행복한 꿈속에는 아주 흐린 저녁 좁은 폭의 잔잔한 강물을 따라 아무 힘 안 들이고 헤엄쳐가는 장면이 들어 있다. 강 양편 기슭에는 아카시아나무들이 짙게 우거지고 초록 나뭇가지들이 물위에 드리워져 있다. 그는 참으로 평화롭게 헤엄쳐 내려가는데, 때로 강물이 굽어 돌아갈 때는 물은 사라지고 아늑한 아카시아 잎새 그물 위로 그의 몸이 떠오르는 느낌이다. 그는 너무도 기뻐서 깨어난다. 사실 그는 헤엄을 치지 못한다. 삼 년 동안 그는 해군 수병으로 복무했고 제대한 뒤에도 수영 강습을 받았지만, 결국 물위로 떠오를 수 없었다.
4. 사람들은 시를 쓰지 않고 어떻게 사는가
1976년 이성복이 제대하기 직전 일가는 신림동으로 이사를 간다. 학교 역시 관악산으로 이전했는데, 제대한 이성복은 학교까지 30분 정도 되는 길을 걸어서 다녔다. 휴가 나올 때 알았던 황지우, 김정환, 김석희, 최윤 등과 다시 만난다. 이 무렵 황지우도 신림동으로 이사를 와서 그가 휴가 나올 때는 황지우집 앞에 있던 작부집에서 같이 논다. 그는 제대 말년 인 이때 작부집에 해군 세라복 차림새로 가면 작부들이 귀엽다고 밀고 댕기며 모자도 뺏으려고 한 기분좋은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이성복의 일가는 이 무렵부터 안정기에 들어간다. 여동생은 대학을 다녔고 아버지는 취직하고 형은 결혼하기 직전이었다. 하지만 제대병 이성복의 머릿속은 여전히 <머리 전체가 인생에 대한 숙제>로 가득차 있었다. 더 이상 정치지망생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위대한 것, 성스러운 것에 대한 집착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여자와 연애를 해도 시나 예술을 뺀 일상적인 대화를 할 수 없었다. 어느 독일 소설의 한 대목처럼 그는 <하도 생각을 해서 머리로 걸어다녔다>. 그는 당구를 몰아치기 하는 것처럼, 자신의 머릿속에 어떤 주제가 생기면 거기에 모든 걸 집중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성미였다. 어렸을 때 정치가가 되어 가문을 레벨업시키기 위해 학교를 바꿀 정도였던 그는 이제는 문학 없이는 살 수 없었다. 어느새 그는 문학이란 장벽이 아무리 높아도, 장애물을 돌아서서 가지 않고 정면으로 뛰어넘으려는 장애물 달리기 선수나 과녁을 향해 곧장 날아가는 화살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수줍고 집요한 문학청년은 손바닥만한 수첩에 시를 빼곡이 써나가기 시작했다. 개인적으론 애인도 없었고 시대는 황량했으니 시적으로 매우 예민하고 충만해져서 종이만 있으면 쓸 수가 있었다. 그 자신 속의 갈등과 시를 잘 쓰겠다는 노력이 겹치면서 그 앞에 글쓰기의 낙원이 펼쳐진 것이다. 슈베르트가 아침에 안경을 쓰는 사이 악상이 달아날까봐 밤마다 안경을 쓰고 자듯이, 그 역시 자기 전에 노트를 옆에 두고 잘 정도였다.(슈베르트의 음악을 위한 안경 쓰고 자기, 이성복의 노트를 옆에 두고 자는 정성의 시.) 그러는 동안 카프카의 프라하는 이성복에게 한국식 보통명사가 되어 있었다. 이대 앞 음악 다방에 하루종일 죽치고 앉아 바라본 창밖에 펼쳐진 전나무들은 프라하의 고성(古城)을 연상시켰고, 그는 그런 풍경을 노트에 <프라하시편>으로 적어나간다.
이렇듯 70년대 말기 황폐한 시대 상황 속에서 카프카와 보들레르는 그의 등대지기였다. 그는 그들을 통해 첫시집의 주요 이미지인 <정든 유곽>과 <하숙집>으로서의 세계인식을 마련할 수 있었다. 보들레르에게 세상이 <병원>이라면 그에게는 <유곽>이었던 것이다. 그가 세상을 <유곽>으로 파악한데는 오규원의 시 「정든 땅 언덕 위」의 영향도 있었다. <정든>과 <유곽>을 하나로 묶어 세계란 우리 삶을 치욕스럽게 만들지만 그곳 아닌 다른 곳에서 삶을 찾을 수도 없다는 인식, 그리고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유곽에서 벗어나 살 수 없다는 메타포가 시적으로 성숙되어갔다. 이와 같이 이성복에게 1976년, 1977년은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의 전사(前史)에 해당된다. 문학회 활동도 활발해서 황지우와 함께 교내 시화전을 하거나 서로 시를 주고 받는다.(이성복은 지금도 황지우의 습작시를 보관하고 있다. 이때 쓴 황지우 시 한 구절, "책은 몸을 감싸는 풀잎". 이성복은 한국시단에서 서정주와 황지우를 재능이 가장 큰 시인으로 꼽는다. 그에 비하면 자신은 노력파라는데......)
그대 내게 돌아와 긴 잠을 펼치고
기슭을 굴러내리다가 가문비 나무처럼
솟아오르네 그대의 춤추던 팔과 흩어
지는 말들이 내게로 엉겨붙고 사방으로
내 눈이 빛나네 그대 내 후광(後光)에
사로잡힌 죽음 이제 두려움은 통통한
살에 가득 밀려오는 가려움이네 그대
내게 돌아와 끊어지면서 완성(完成)된 강(江)
꿈틀거리는 강(江) 무지개 그으며 분출하는
잠 이를 악물어도 깨지 않는 좋은 술이네
-「시월에 흩어진 노래·Ⅷ」
그는 이때 열린 시화전에 「시월에 흩어진 노래」연작을 걸어두거나 학보에 발표한다. 산문집 『꽃피는 나무들의 괴로움』에 실린 소설 「천씨행장」이 탈고되고, 황지우와 함께 교수인 황동규가 아니라 시인 황동규에게 찾아가 인사한다. 김현과도 운명적으로 시 쓰기로 만난다. 훗날 문학평론을 하는 서정기가 김현의 시 쓰기를 이야기한 것이다. 1977년 여름, 이성복은 스스로도 의문투성이였던 시를 김현에게 내민다.(이때도 이미 이성복은 여러 권의 노트를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그 중 한권이다.) 노트에 정갈하게 정리된 이성복의 시를 읽은 김현은 1977년 「문학과지성」겨울호에 「정든 유곽에서」와 「1959년」을 내보낸다. 이 두 편의 시가 사회성과 현실 의식이 강했던 모양으로, 노트의 나머지 시들은 초현실주의적이고 섹슈얼하고, 딜런 토머스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5. 꽃피는 시절
1978년 시인이 된 이성복은 대학신문사 전임기자로 들어간다. 서울대학신문의 방송통신대학판을 만드는 것이 그의 일이었는데, 여기서 사회의식이 진한 후배들과의 뒹굼이 시작된다. 술과 시작(詩作)이 조화를 이루던 시기로, 1978년의 노트에는 이렇게 메모되어 있다. <내가 대학신문사 들어오고 난 다음 생긴 악(惡)-맥주와 택시. 정말 무서운 것은 자기자신이다. 밀려가는 물처럼 자기자신의 옹벽을 갉아먹는 죄. 눈을 뜨라. 눈을 뜨라.> 그 밑에는 <「이만하면 됐다」는 식의 고통은 고통이 아니다. (…) 시는 쓰고 싶을 때 쓰여지는 것이 아니다. 시는 강처럼 사람 사는 곳을 지나갈 뿐.(사람은 강을 찾아 마을을 이룬다) 어느 부분도 전체이다. 고통이라는 말 또한 허위의 껍데기일 것이다.>라고 적혀 있다. 그의 말대로 쓰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의 몸을 지나온 말들을 받아적으면 그대로 시가 되던 1978년~1980년의 기간은 이성복에게 문학적으로 가장 행복한 시절을 안겨준다. 1978년의 노트에는『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의 원형이 보인다. 일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1) 그 나무가 푸르게 서 있는 모습을 보지 못했듯이 나는 푸른 애인으로 누구에게도 다가가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 내가 떨어뜨린 가랑잎.
(2) 경향문학-국경을 넘어버린 탈주병. 비판은 가능한가?
(3) 1978년 10월말. 내가 생각하기로는 이제 개인은 없다. 있다면 연약한 핏덩이가, 짓밟힌 땅이. 어느 시대에나 곤봉이나 무기가 있었지만 지금처럼 아름답게 만들어진 적은 없다. 1978년 10월 말 영등포 역전에서 시흥 쪽으로 못쓰는 철길을 따라가본 사람은 알 것이다. 삶은 비닐포장한 신분증 한 장 만한 무게도 없음을. 제분공장과 니나노집이 이토록 가깝고 지나가는 남자들과 손짓하는 계집들이 이토록 호흡 안 맞음을.
(4) 작년부터 나는 시인이 되었고, 그건 내가 사람이다라는 말과 마찬가지이다. 앞으로 나는 무얼 먹고 살까? 가을과 함께 지나가는 사람들. 시는 빵틀도, 빵도 아니고 그림도 아니고 후두둑 떨어지는 빗방울. 혹은 열지어 날아가는 철새들, 구두점이 찍히고, 그런 것도 아니다. 앞으로 시는 무얼 먹고 살까.
(5) 어느날 나는 명사만으로 시를 만들 것이다. 밥통, 아주까리, 쌍나발. 이런 것들이 나에게 땅위에서 헤엄치는 법을 알으켜 줄 것이다. 안 보이는 것을 보기 위해선 귀를 막고 나도 안 보여주기.(…) 자갈길을 가면 자갈에 묻은 가르샤 로르까의 피냄새. 어느날 나는 내가 잘못 살아왔음을 깨달을 것이다.
이 외에도 <서정시인은 비정해야 한다>, <禽獸江山>, <언저리를 사랑한다>, <상처는 지속하지만 기교는 소멸한다>, <나의 숙제는 파멸-나는 좀더 삭막한 곳으로 내 삶을 몰아가는 운전사다>, <내 앞날에 초칠하기, 파멸은 나의 열렬한 희망이다>라는 등의 구절이 인상 깊다. 이 노트에는 첫시집의 「꽃 피는 아버지」, 「그날」, 「그해 가을」, 「세월에 대하여」등의 상당수의 시가 거의 손보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또한 이 시기에 이미 두 번째 시집 『남해금산』에 수록될 「서시」(1978년)와 「자주 조상들은 울고 있었다」(1979년)를 쓴다.
1
자주 조상들은 울고 있었다. 풀뿌리 아래서 울고 있다. 누이야 우리가 하늘이라고 생각했던 곳은 자갈밭이었다 누이야 집을 짓지 못하고 떠도는 종달새, 우리는 어느 곳에 알을 낳을까. 자주 조상들은 울고 있었다. 선산 앞으로 도살장의 붉은 피가 흐르고 곳곳에 군인들이 참호를 파고 있었지 누이야 네 울음은 또 한 무덤을 이루고 내가 무슨 할 때면 마른 나무 잎사귀가 공중에서 서걱이었지
(…)
자주 조상들은 울고 있었다. 이불 속에서 낯선 육체도 따라 울었다. 어김없이, 울음이 가신 자리는 치욕이었다 누이야 우리는 발가락 사이로도 울고 있었다
이 시외에도 「가장 어려웠던 날들의 수첩」에는 두 번째 시집의 주요 이미지가 되고 있는 <치욕>에 대한 스케치가 강렬하게 채색돼 있다. 그러니 그는 첫시집을 준비하면서 벌써 먼 훗날 쓰여질 두 번째 시집의 테마를 벌써 새싹처럼 밀어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성복은 1979년에 대학원에 진학하고 조교로 있던 이인성의 밑에서 T.A를 하며 당시 같은 T.A로 있던 지금의 부인 김혜란을 만난다. <1979년 12월 16일-약혼(함지박) 엄마 아버지. 혜란이 아버지. 엄마. 언니.(…)문구멍으로 유곽을 들여다볼 줄 아는 여자. 착하고 착해 그 마음에 새로 떡잎 돋는다. 사랑한다 가엾은. 혜란아.> 이해 김현과 더불어 자신의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유평근교수를 만나고, T.A를 그만 두고 소설가 김원일씨가 상무로 있던 국민서관에서 아동문학 서적의 교정일로 8개월 가까이 근무한다. 야학의 교장 때문에 남대문경찰서에 갇히기도 했던 서슬퍼런 1980년 5월, 그는 김혜란과 결혼한다.
6. 비극은 비극의 되새김에 의해 소멸한다
이성복의 일가는 대학 4학년 때 북가좌동으로 이사한다. 그의 첫시집에 등장하는 모래내는 버스로 두 정거장 거리. 그가 모래내란 제목으로 시를 쓴 것은 <따뜻하면서도 무너지기 직전의 섬 같은 이미지> 때문이었다고 한다. 또한 모래내와 더불어 등장하는 지명인 <금촌>은 아버지가 가죽공장에 경리사원으로 근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로 이성복은 금촌에 간 기억이 없다고 한다. 가죽공장의 힘든 노동과 가죽이 주는 부드러운 질감, 혹은 <금촌>의 <금>에 해당되는 부분과 시골의 <촌>이 맞물려 일으키는 불협화음...... 시인이 끌렸던 것은 이러한 지명에서 풍겨나오는 바닥정서였다고 한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전학오면서 가졌던 야심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안간힘을 이러한 지명과 이미지를 통해 드러낸 것이다. 그는 바다에 시체를 버리듯 야심의 밑바닥에 돌을 매달아 자신을 내던져버리고 싶었던 것이다. 그의 시에 나타난 모래내, 금촌의 바닥 정서란 <야심의 밑바닥에 매달린 돌>과 같은 것이었다.
이와 같이 어렸을 때부터 <낡은 것, 늙은 것에 대한 불편함>을 가지고 있었던 시인은 시란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을 쓰는 것임을 알게 된다. 시골 촌뜨기가 옛애인을 죽여 시체에 돌을 매달아 바다에 버리고 부잣집 딸과 결혼하여 보트를 타고 가는데, 보트 뒤에 시체가 찍하고 딸려오듯이. 삶이란 뒤를 돌아보면 망하는 법인데도 시인은 불행 속에 자신을 밀어넣는 <비망록으로서의 문학>을 선택함으로써 자기 존재를 증명한다. 첫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는 80년대 한국시단에 혁명적 감수성을 몰고온 그 결과물이다. 출간 당시 한사코 그가 시집 제목을 『정든 유곽에서』로 고집한 이유도 비참하고 싶은 바닥 정서에 있었다. 훗날 산문집에 수록하기도 했던 <정든 유곽>에 대한 애착은 1979년 12월 5일 날 쓴 수첩에 고스란히 기록돼 있다.
나의 첫 시집은 『정든 유곽에서·1』
두 번째 시집은 『정든 유곽에서·2』
……………………………………………
마지막 시집은 『정든 유곽에서·n』
이렇게 하면 나는 첫발자국에서 한발자국도 전진하지 못한 것이 되며 그것은 바로 내가 바라는 완벽한 승리이다.
이처럼 그가 <정든 유곽>에서 빠져나오지 않으려고 했던 것은 그가 불안하고 고통스러운 세계에 얼마나 집요하게 매달렸는가를 잘 보여준다. 비극은 비극의 되새김을 통해 소멸한다. 비극으로 여겨지는 모든 것은 비극에서 적당히 떨어져 있을 때 뿐이며, 가난을 문학 속에서 얘기한 순간 가난은 더 이상 가난이 아니다. 자신의 원적지를 망각한 구원이나 행복은 있을 수 없다. 이성복에게 있어 글쓰기의 윤리란 처녀애가 풀숲에서 오줌을 누고 그 자리에 가보듯 더럽고 성적이고 축축한 세계이지만 다가가보는 것이다. 즉, 당신을 생각하는 자리가 유도로 치면 당신에게서 내침을 당하게 되는 자리가 될 것이나, 또한 동시에 그것은 그 스스로 고상한 것들을 땅바닥에 내리꽂지 않으면 안될 운명이 속박된 자리이다. 이렇듯 깨지는 게 분명한데도 다가가보는 이미지가 첫시집의 <모래내>나 <금촌> 등의 바닥 정서를 낳았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이 시집에는 1970년대 후반의 삶의 풍경화가 크로테스크하면서도 세밀하게 그려져 있다.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이나 <집 허무는 사내>들처럼 오직 생계를 위해 자기 삶의 터전을 무너뜨리는 행위를 하는 인간군상, 그리고 <새 점(占) 치는 노인>에서 보여주는 <점(占)>이라는 초월적인 것과 <변통(便痛)>이라는 육체적 배설의 비초월적인 것의 대비가 보여주는 고통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그 시대의 미래가 바로 <변통>과 함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이처럼 결코 치유될 수 없는 당대 사회의 타락은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로 집약된다. <아픔>은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아픔>이 있기 때문에 치유도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병들어 있으면서 아픔을 느끼지 못해 치유될 수 없는 비극적이고 절망적인 상황이 첫시집의 풍경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이성복의 시작은 자기 주변을 돌아보기, 즉 가족주의로부터 출발되었다. 이 시집의 주제는 시인 자신의 말대로 <악성(惡性)> 신화와 상징들이 횡행하는 아버지의 세계>였다.
나의 시에서 아버지는 현실의 내 아버지이면서, 동시에 모든 사람들의 아버지이며, 하나님 아버지이기도 하다. 처음 시를 시작할 당시, 내가 이러한 생각을 갖게 된 것은 프란츠 카프카의 작품을 대하면서이다. 그의 작품들 가운데 특히 『변신』이라는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개체와 전체, 물질과 정신, 개인과 집단 등의 문제가 결코 둘이 아니며, 내 자신의 가족 관계만을 철저히, 적나라하게 드러낼 수 있다면 인간과 신의 관계라는 종교적 문제까지도 해명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기독교를 비롯한 여러 종교에서 신과 인간의 관계는 대체로 가족 관계로 환치되어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철저한 리얼리즘만이 완벽한 심볼리즘에 도달하는 지름길이라고 믿었다. 일체의 정신주의적 가능성을 엿보이지 않고 현실의 있는 그대로에 충실하는 것만이 궁극적으로 물질을 정신으로, 현실을 상상으로, 가족의 문제를 종교의 문제로 전도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버지·어머니·당신」에서
이 당시 그는 리얼리즘이 심볼리즘과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들을 극사실로 그리면 거의 무의미해 보이는 경지에 도달한다고 믿었고, 그런 점에서 사실주의와 상징주의는 하나라고 생각했다. 그의 이러한 시쓰기는 그의 고백대로 온몸을 쥐어짜며 막다른 골목으로 자기를 몰아가는 카프카적 글쓰기를 모델로 한 것이었다. 카프카적 글쓰기는 그의 문학사에 있어 심대한 영향을 끼친다. 유태민족을 오렌지에 비유하며 과즙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쥐어짜야 한다고 했던 카프카처럼 이성복은 이후 온몸을 쥐어짜는 자신의 문학사를 형성해나간다. 그는 이렇게 카프카에서 정신과 글쓰기의 윤리학을 배웠다.(이성복의 글쓰기 윤리학-타고난 재능은 내 책임이 아니지만 최선을 다하지 못한 것은 절대적으로 자기 책임이다.) 하지만 이러한 자신의 강박관념에 대한 반동이었을까. 이후 펼쳐진 그의 시사(詩史)는 대상을 지극히 리얼하게 좁혀 들어가려고 하는 시에서 소설적인 부분과 모든 소설적인 것을 밀어내고 극도로 서정적인 곳으로 날아가고 싶어하는 두 성향이 교차했다.(그러니 시인이지.)
7. 분지시절에서 2차 프랑스체험까지
1981년 그의 아내가 먼저 대구에 내려가 직장을 갖게 되고 이성복은 「보들레르에서의 현실과 신비」라는 석사학위 논문을 쓴다. 주가 전혀 없는 이 독특한 논문은 유평근 교수의 섬세한 가르침에 빚진 것이다. 1982년 대구 계명대학교에 강의조교로 부임하면서 대학 사회에 발을 디딘다. 1981년 겨울, 첫시집으로 제2회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한다. 대구에서 이성복은 이태수, 서종택, 이하석, 강현국, 이기철, 송재학, 이문열 등과 추억을 만들어간다. 분지에서 첫 아이, 효원(曉遠)이가 태어난다. 뒤에 해체되어 『남해금산』에 실릴 장시 「분지일기」가 그가 편집동인으로 참가한 『문학과지성』의 뒤를 이은 무크지 『우리세대의 문학 1』에 실린다.
1983년 둘째 아이 지원(址遠)이가 태어나고 아내가 먼저 프랑스 유학을 떠난다. 한 아이는 친가에 한 아이는 외가에 맡기고 이성복은 엑스에 있는 프로방스 대학에 박사과정을 등록한다. 「가장 어려웠던 날들의 수첩(手帖)」에 따르면 이미 1980년 2월부터 유학을 꿈꾼 모양이다. 거기엔 <늙은 어머니는 메주를 쑤고 우리는 건너방을 세주고 그 돈으로 유학할 계획을 세웠다>고 써 있으나, 1차 프랑스유학은 이성복에게 뼈저린 불행감만 안긴다. 김화영, 곽광수 등이 수학했던 엑스 양 프로방스 대학이 위치한 곳은 지중해를 앞에 둔 남불로 우리나라로 치면 진해 정도에 해당된다고 한다. 그는 여기서 프루스트를 공부하려고 했지만 너무 방대해서 네르발 쪽으로 선회한다. 네르발, 보들레르는 모두 프루스트가 좋아했던 선배들. 이성복은 체질적으로 불란서 문학 중에서 말라르메나 발레리보다 보들레르, 네르발, 프루스트가 맞았고, 이 세 사람의 공통점은 모두 과거지향적이라는 데에 끌렸다.(그런데 그가 보기에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는 그러한 것이 모두 들어 있다고 한다. 그는 이때 못한 프루스트를 잊지 못해 프루스트 연구를 곧 문학과지성사에서 한 권의 단행본으로 출간할 계획이다.)
그러나 뼛속까지 프랑스 정신으로 살았던 그는 막상 프랑스에 갔을 때는 어디에도 자신의 자리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카프카와 보들레르라는 등대를 통해 세상의 항로를 잡아 정신의 고향에 당도했으나, 서구가 이 동양의 젊은 시인에게 안긴 것이라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냉대일 뿐이었다. 결국 그는 겨우 1년을 채우고 귀국한다. 이렇게 프랑스에서 <약간의 환멸>을 안고 돌아온 이성복에게 계명대 국문과교수인 민현기는 동양 고전을 권유한다. 이미 『시경』을 공부한 시인 서종택도 『예기』와 『논어』, 『주역』등을 권한다.
1985년 셋째 아이 수유(茱萸)가 태어난다. 그 이름 수유는 산수유의 수유이고 서정주 시에 나오는 수유이다. 1985년 5월에 생전 처음으로 소월과 만해를 깊게 읽기 시작한다. 그때 <남해금산>은 프랑스에서 겪었던 외로운 심정으로 멈칫거리던 시인에게 운명적으로 다가온다. 서정인의 뛰어난 단편 「산」과 맥락이 닿아 있는, 남해금산은 광주에서 열리는 학회에 가는 길에 예감처럼 그를 기다리며 바닷물에 뒤척이고 있었다. 1986년 제2시집 『남해 금산』이 출간된다. 「분지 일기」와 「약속의 땅」을 해체하여 여러 편의 시로 만든 시들은 시의 첫머리를 그 제목으로 삼는다. 이 시집에는 <세상의 온갖 노폐물들을 투명한 샘물로 바꾸어주는 어머니의 세계>, 즉 여성의 세계가 아름답게 펼쳐진다. 또한 이 시집에 수록된 「또 비가 오면」이라는 시에서 <사랑하는 어머니 비에 젖으신다/사랑하는 어머니 물에 잠기신다>라는 구절은 허약한 아들로 인해 힘들어하시는 어머니에 대한 죄책감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두 번째 시집에서부터 넘치는 물의 이미지는 1990년에 출간된『그 여름의 끝』에 와서 <당신>이라는 삼인칭과 만나면서 아름다운 연애시가 된다. 세 번째 시집은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인식이 시인을 바꾸어 <내 자아를 지움으로써 이 세계와 화해하고 사랑한다>는 방법론을 통해 당신과의 연애를 꿈꾼다. 즉 당신이라는 존재를 사랑의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시인은 지금까지 보호받아왔던 어머니의 사랑으로부터 멀리 떠나오게 된 것이다. 그가 처음부터 염두에 두고 전략적으로 썼다는 이 세 번째 시집은 아버지-어머니를 거쳐 당신이라는 삼인칭과 만나면서 그의 시가 가족주의의 틀에서 벗어나는 전기를 마련해준다.
이 시집을 출간하기까지 그는 동양과의 깊은 만남을 지속해나간다. 1987년에는 대구 대명 한의원의 서찬호 선생을 찾아가 주역을 배우고, 1988년 계명대학교 중문과 교수들 사이에 논어 윤독회가 만들어지자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석한다. 주역 공부를 열심히 한 그는 1990년 말 「네르발 시의 역학적 이해」란 논문을 완성한다. 그해 겨울 제4회 소월시문학상을 수상한다. 1990년에는 학교에서 부교수로 승진하고 박사학위를 수여받는다. 산문집 『그대에게 가는 먼 길』과 『꽃 핀 나무의 괴로움』이 살림출판사에서 출간된다. 하지만 이 해에는 그에게 육친의 죽음에 견줄 정도로 슬픔을 안긴 스승 김현이 죽음이 놓여진다. 산문 「크고 넓으신 스승」에서 그는 김현의 죽음을 이렇게 애도한다. <바람이 불어도 트인 공간이 자기를 드러냄이 없듯이, 선생님께서는 한 번도 자신이 우리들을 키워냈다고 자부하신 적이 없다. 바로 그 때문에 우리들은 선생님의 정신 속에서 성장할 수 있었고, 우리가 선생님 덕분에 자라났다는 사실을 까맣게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일찍이 선생님께서는 우리에게 위압하거나 군림하신 적이 없고, 다만 함께 하셨을 뿐이다. 우리가 그분을 추종하였다면 아마도 생전에 그분에게 큰 짐이 되었으리라.>
1991년 이성복은 연암재단의 교수 해외파견 기금으로 파리로 유학을 떠난다. 이곳에서 도교의 권위자인 한 프랑스 교수의 강의를 수강하지만, 늘 앞엣것을 끔찍하게 부정하고픈 그에게 유가사상은 시들해진다. 두 번째 유학에서 그는 정신의 황금기를 맞는다. 1978년에서 1980년까지 폭포수처럼 시가 쏟아지던 문학적 황금기에 비견할 만한 시기였다. 그가 머물던 기숙사의 방은 매주 토요일날 개방되어 철학, 미술사, 미학 등 여러 전공의 한국 유학생 열몇 명이 모여 동양철학을 중심으로 서로의 학문을 교환한다. 특히 이 공부방에서 파리에 포교하러 온 원불교 정녀를 알게 되면서 원불교 경전을 읽고 감명을 받게 된다. 불어로 쓴 논문 「역경으로 본 보들레르의 시적 여정」이 프랑스 문학 연구지에 발표되고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1978년과 비슷해지면서 파리 시편 「높은 나무 흰 꽃들은 등(燈)을 세우고」를 쓴다. 불교를 공부하면서 현장의 세계와 이법의 세계가 둘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네르발을 좋아하는 프랑스 친구들을 만나거나 문인들과 교류하면서 다시 서양과의 만남을 가진다. 1차 유학에서 동양을 찾았다면 2차 유학에서는 서양을 되찾게 된 것이다. 동양과 서양의 각기 다른 이 만남은 이성복 시가 한차례 더 변화되는 계기를 형성해준다. <파리학숙>에서 시인은 가족에 대한 애정을 적극적으로 표출하면서 네 번째 시집의 주제는 자연스럽게 <아버지>가 된다. 첫 번째 시집에서는 아들이 본 아버지였다면, 이제는 자식을 둔 아버지, 아내를 둔 남편의 내면풍경이 펼쳐지는 것이다.
1992년 마흔살이 된 시인은 귀국한다. 이태수 시인을 통해 알게 된 계명대 미대 출신의 화가인 이병헌과 교유하고, 이병헌의 그림을 소재로 「소묘」가 씌어지고 「봄밤」, 「정물」이 이병헌의 전시회 팜플렛에 수록된다. 박사논문을 근간으로 한 『네르발의 시 연구』가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된다. 1993년 네 번째 시집 『호랑가시나무의 기억』이 출간된다.
8. 시집 『남해 금산』에서 『호랑가시나무의 기억』까지
이성복은 두 번째 시집 『남해 금산』의 이름을 이뻐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의미적으로 살펴보면 <남해>는 바다이면서 물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부드럽고 낮은 느낌을 준다. 또한 <금산>은 산이다. 그것은 딱딱하고 높은 느낌을 주는데, 이러한 상반된 이미지가 한 단어 속에서 대비되고 있다. 음악적인 효과면에서 살펴봐도 <남해>의 <ㄴ>은 의미상의 부드러운 느낌을 음가로 간직한다. 마찬가지로 <금산>의 <ㄱ>은 산의 딱딱한 느낌을 음가로 머금고 있다. 그리고 <금산>이라고 할 때의 <ㅁ>은 물, 무(無), 물질, 마음, 어머니, 무덤이라고 할 때의 <ㅁ>이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그는 아직도 『남해 금산』이라는 이 제목이 사랑스럽고 언제까지나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한다.
첫시집에서 두 번째 시집으로 오면서 가장 큰 변화는 <정든 유곽>에서 <약속의 땅>으로 의미변화를 일으키고 있다는 점이다. <약속의 땅>은 원형적인 꿈과 기억이라는 성서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다. 그리고 시에 등장하는 <미루나무 잎새>는 삶 자체의 떨림, 바로 초월을 향한 삶의 깃발 같은 것을 의미한다. 고통들 속에 방치되어 있는 <아이>는 이성복 시에서 자주 등장하는 <여자>와 마찬가지로 상처받기 쉽고, 하지만 상처받아서는 안 되는 존재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상처받기 쉽기 때문에 그들은 위대한 존재가 된다. 이성복의 시에 <아이>, <여자>들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드문드문 잎이 남은 가을 나무 사이에서
혼례의 옷을 벗어 깔고 여자는 잠을 이루었다
엄청나게 살이 찐 검은 사슴이
바닥 없는 그녀의 잠을 살피고 있었다.
-「테스」전문
이 시는 나스타샤 킨스키 주연의 영화 「테스」를 보고 연작시 20편 이상을 쓴 것 중에 시집 나올 때 마음에 들지 않아 모두 잘라내고 남은 부분이라고 한다. <테스>는 물론 상처받고 더럽혀진 여인의 한 전형이다. 첫시집의 주요 이미지인 <더럽혀진 누이>의 이미지가 이 시에도 계속되고 있지만 <정든 유곽에서>의 누이와 <약속의 땅>의 <테스>는 상황과 분위기가 다르다. <혼례의 옷을 벗어 깔고 잠을 자는 여자>는 질고 낮은 땅에서 커다란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우리들의 누이를 연상시키나, <엄청나게 살이 찐 검은 사슴>은 두려움과 부드러움을 동시에 지닌다. 저항할 수 없는 운명을 상징하는 <검은 사슴>은 그래서 미묘하고 여러 가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표제작「남해 금산」은 <테스>의 상황과도 같이 <돌 속에 묻혀 있는 여자>가 지상에서 천상으로 우주의 초월적인 공간으로 떠나버리고 나혼자 남게 된 사랑의 비극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사랑은 바로 부재와 결핍으로만 존재할 수 있을 것이며, 만약 이루어지면 그것은 이미 사랑이 아닐 것이다.
세 번째 시집 『그 여름의 끝』이라는 제목은 이성복 인생의 한 과정을 요약해서 보여준다. 1990년 그가 이 시집을 내게 되었을 때 그는 30대 막바지에 서 있었고, 이제 무덥고 폭풍우치던 한 시절이 막 끝나려함을 위기감으로 체험하고 있을 때였다. 그는 이 시집이 출판되고 서울에서 책을 받아가지고 대구로 내려오기 위해 고속버스 터미널에 들렀다가 우연히 구내서점에서 『그 여름의 끝』이라는 책을 발견한다. 그래서 가까이 가보았더니 그 책은 제목만 같은 서울신문사 발간의 추리소설책이었다. 이 에피소드는 어쩌면 이 시집 자체도 추리소설과 같은 구조를 지니고 있으며, 통과제의적 수난과 시련의 의미를 담고 있음을 암시한다.
어느 날 몹시 파랑치던 물결이 멎고
그 아래 돋아난
고요한 나무 그림자처럼
당신을 닮은 그리움이 생겨났습니다
다시 바람 불고 물결 몹시 파랑쳐도
여간해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비단길 1」에서
연애시의 특징을 띠고 있는 이 시에서 세상에 때묻은 장면들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그리움의 남음>은 인생의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사람은 오고 가도 그 사람에 대한 그리움은 남는다. 사랑은 바로 이 그리움으로서만 존재한다. 속눈썹 한번 깜빡하는 순간처럼 삶은 왔다 가고 세상에는 아무 흔적도 남지 않는다. 그러나 그 순간은 언제가 분명코 있었던 순간이며, 시는 그 순간에 대한 기억이고 제사이다.
네 번째 시집 『호랑가시나무의 기억』에서 시인이 <호랑가시나무>를 제목으로 한 것은 나무의 모습 때문이 아니라 그 이름을 발음했을 때의 음이 주는 느낌 때문이었다고 한다. 즉 우리가 <호랑>이라고 말했을 때 섬뜩하고 무서운 존재인 호랑이가 연상되고, 또한 <가시>도 찔린다는 느낌과 함께 무엇인가 <아픔>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기억>이란 것도 대개는 마음에 상처를 주고 무엇인가 아프게 하는 것들을 동반하게 한다. 이렇게 하여 이성복의 네 권의 시집, 즉 <아버지-어머니-당신-아이들의 아버지>로 이어지는 가족의 순환구조는 한 개인 안팎의 정신사를 나타내며, 이후 시집 4권 전부를 한꺼번에 이해하려는 시 읽기가 시작된다.
9. 비가(悲歌), 혹은 정신의 위생학
4권의 시집을 출간한 뒤 한동안 그는 시를 발표하지 않았다. 그 동안 그는 테니스나 운전에 대한 산문을 발표하는 등 <몸>과 <시>에 대한 뛰어난 은유를 생산해낸다. 2001년에는 기존의 산문집에서 가려뽑고 새로 써서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와 『나는 왜 비에 젖은 석류 꽃잎에 대해 아무 말도 못 했는가』를 문학동네에서 출간한다. 자신을 <머리인간>, <의식인간>이라고 스스로 규정한 것은 몸에 대한 관심으로 증폭되고 테니스 라켓을 10개 정도는 허비할 정도로 10년 간 테니스에 몰두한다.(그러나 공의 생리를 생각지 않고 자기 식으로 치다 보니 실력이 별로 늘지 않았다고 한다. 상대방의 흐름에 자기를 맞추기보다는 뭐든지 자기 식으로 정리해내야 시원해지는 성미 때문이다. 그런데 그 안 되는 힘이 오히려 몸에 대하여 새롭게 생각하게 했다. 그는 그것이 바로 문학의 공간이라고 했다.) 그런 과정에서 그는 그 동안 몸이 너무 무시당했다는 것과 언어도 몸의 소산이고 반영임을 알게 되었다. 한편으론 엑셀러레이터와 브레이크를 동시에 잡는 듯, 자신의 글쓰기에 대해 안되는 글쓰기와 왜 안 되는가를 따지는 <문학과의 불화>가 심화되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정신분석학, 후기구조주의, 포스트모더니즘, 인지심리학, 가톨릭의 영성책, 불교서적 등을 지속적으로 탐구해나간다. 특히 현대 서양 철학은 내면적으로 불교와 흡사해 그에게 도움을 준다.
11년만에 출간된 다섯 번째 시집 『아, 입이 없는 것들』은 이러한 그의 각고의 노력이 스며 있는 시집이다. 이 시집에는 <마라>라는 제주 비가 연작이 나온다. 1994년 한일작가회의 참석차 제주도에 들린 그는 제주의 이색적인 풍경을 바라보며 자신이 그간 써온 연애시의 분위기에서 벗어나 자신도 모르는 말을 중얼거리고 싶다는 충동을 느낀다. <마라>는 그것의 산물로 그는 이 단어에서 다음과 같은 것을 연상해낸다. 첫째 한반도 최남단으로서의 어떤 존재, 둘째 프랑스 혁명 말기의 마라, 당통,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와 유혈낭자극, 셋째, 윤회를 지배하는 수호신, 넷째 ㅁ과 ㄹ의 부드러운 음소. 이와 같이 그는 <마라>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상호이질적인 유혹과 거부, 그리고 공포 등을 버무려 의미의 상관보다는 음악적인 요소로 영혼의 목소리를 내고 싶었던 것이다. 시집은 <물집>, <느낌도, 흐느낌도 없이>, <진흙 천국> 등 3부로 나뉘어져 있지만 첫번째 시 <여기가 어디냐고>에서 125번째 시 <밤 오는 숲속으로>에 이르기까지 시인은 원래 하늘에서 살았지만 저주받아 영원히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는 뮤즈를 불러들이고 있다. 이에 걸맞게 수없이 등장하는 식물의 이미지, 돌과 산의 이미지, 욕정으로 몸을 뒤트는 붉은 꽃 등은 지상의 뮤즈가 <살아가는 징역>을 견뎌야 하는 징표로서 기능하고 있다.
그가 네권의 시집에서 선보였던 <가족주의>를 마감하고 오랜 침묵 끝에 내놓은 이 시집은, 한편으론 그가 이제까지 써왔던 4권의 시집의 세계관이 한데 버무려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3부의 시들은 첫시집의 <모래내>와 <금촌>의 바닥 정서를 연상케하며, <나는 나를/비참하게 만들어 생에 복수하고 싶었다>는 이미지를 낳는다. 1, 2부는 연애시의 특징을 물려받은 경음악 같은 것으로 너무나 끔찍한 세상에 눈감고 싶은 3부를 위한 전희로 보인다. 말랑말랑하고 맑고 착하고 여린 것에 대한 떨림과 또 다른 한쪽에서 벌어지는 잊지 말아야 할 두 세계의 길항관계는, 어쩌면 그가 이 세상에서 어쩔 수 없이 떠안아야 하는 연민의 고리를 놓치지 않겠다는 의미일 수 있다. 1부에 나오는 시어 <물집>은 몽고텐트와도 비슷해서 그 안이 부풀어 있다. 우리의 인생은 생(生), 사(死), 성(性), 식(食)이라는 네 개의 기둥이 받치고 있으며, 우리말로 이 네 글자는 텐트처럼 <ㅅ>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유는 <정든 유곽에서>의 이미지에서 훨씬 비관적인 데로 나아가 <백치임신>, <가상임신>이라는 이미지를 낳는다. 하지만 그의 비관주의는 <삶에서 유일한 길은 모든 것이 환상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 이상으로 더 나은 생이 없다>는 프루스트의 말이 한 대답이 될 수 있다. 환상을 차단하자는 것이 아닌, 환상이 일어나는 마음을 바라보는 새로운 마음을 만들어낼 때 오히려 고통이 최소화된다는 시론인 것이다. 고통을 받지 말자는 것이 아닌 고통의 최소화를 위해서, 자신의 가장 밑바닥까지 파헤쳐 까발리는 이러한 정신의 위생학은 이번 시집이 <뱀의 입속에 모가지만 남은 개구리가 허공에 대고 하는 고백>임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리고 이것은 그가 젊은날부터 천착해온 신비를 찾는 과정에서 역설적으로 도달한 또 하나의 길이다. 그에게는 이제 더 이상 존재론도, 구원도, 형이상학도, 신비주의도 남아 있지 않다. 그러함에도 그의 비관주의에 남는 것은 연민밖에 없다. 그의 비관주의는 연민까지도 소용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럴수록 더욱 철저하게 연민에게 속아주겠다는 의미에서 나온다. 마치 테니스를 다섯, 여섯 게임하고 파김치가 되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한번 신나게 하고 딱 그만 두는 게 아니라 여전히 바닥에 남아 있는 어떤 부분 혹은 느낌들처럼 말이다. 어쩌면 그는 그렇게 이번 시집에서 테니스나 치면서 11년 간을 놀다가 문득 나와보니 자기가 논 곳이 생, 사, 성, 식이란 네 기둥으로 받쳐진 텐트 속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모른다.
그리고 이제 그는 이미 존재하고 있는 <돌속에 있는 조각>을 빼내려는 상징주의적이고 신화적이며 기억으로 가득찬 시의 길에서 조용히 벗어나, 마치 돌속에서, 돌의 무늬에서 보는 각도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순간순간의 인생의 거대한 보고서를 작성해나가려고 한다. 그가 지난 겨울 그를 찾아온 내게 가르쳐주려 한 <인생을 편하게 사는 방법>도 이와 같은 이치에서였음을 이제는 어렴풋이 알겠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그의 시가 연민의 산물임을 믿고 있다. 그래서 그가 「가장 어려웠던 날들의 수첩」에 기록한 마지막 구절을 인용하기 위해 여기까지 나는 힘들게 왔는지 모른다. 야학시절 청년학교 아이들이 준 만년필로 1980년 초에 쓴, 수첩의 맨 마지막 페이지는 이렇게 끝난다. <빵이 필요할 때 당장 없어서는 안될 때 누가, 빵에 대한 글을 씀으로서 빵에 대한 욕구를 대치시킬 수 있을까. 한 인간을 죽여야 할 때, 죽이지 않으면 안될 때 누가 그 인간에 대한 자기의 증오로써 그 인간의 죽음을 대치시킬 수 있겠는가. 그런 점에서 문학은 허위이다. 문학은 그것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하는 질문의 포기로써만이 문학일 수 있다. 이 또한 「왜 사는가」라는 질문이 가지는 현실부정(지금 살아 있다는 점에서)의 허구성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야 한다는 윤리(-이 맹목성!)를 동시에 갖고 있다. 나는 실패했고 실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실패에 대한 나의 끝없는 사랑……> 이 실패에 대한 사랑이 삶의 연민이고 그가 그토록 평생의 화두로 삼았던 <나는 누구인가>를 위한 활활 타오르는 불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부디 시인이시여, 당신이 카프카나 보들레르에게서 받았던 것처럼 그 불꽃을 나의 식어가는 가슴에 부어주시라.
계간[작가세계]2003년 가을호
(150매)
약력
1966년 전북 정읍출생. 199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으로 『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 『빵냄새를 풍기는 거울』, 『물속까지 잎사귀가 피어 있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