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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활과 화살 스크랩 (21) 활. 궁시(弓矢)② / 우리나라의 전통무기
알로하 추천 0 조회 36 15.12.10 09:2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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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전통무기

 

(21) 활

 

한민족 최고의 장기, 궁시(弓矢)②

 

삼국시대 고구려가 최강의 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데는 한민족의 장기인 활이 중국에 비해 그 성능이 월등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삼국시대 활의 전통은 이민족과의 전쟁이 잦았던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도 역시 유효하였다. ‘고려사’에 국왕이 행차하여 대장군 이하 병사에 이르기까지 활로 과녁을 쏘게 하였다든가 백관이 활쏘기를 연습하였다, 또 숙위군이 약했을 때에는 궁수를 모집하여 유사시에 대비케 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궁시가 전술상 중요한 무기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고려시대의 특수부대 중 하나였던 경궁군은 관통력이 강한 활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부대였다.

 

이후 조선시대 들어서도 우리 나라에서는 전통적으로 궁술을 중요하게 여겼으며, 화포가 출현하기 이전까지 궁시는 주된 전투무기의 하나로 활용되었다. 이는 궁시가 화약무기의 여러 가지 결함을 보완시켜 줄 수 있는 장점을 보유하고 있어 상호 보완적 역할을 통해서 전투력을 유지시켜 주기 때문이었다.

 

조선시대에 사용되었던 가장 대표적인 활, 각궁(전쟁기념관 소장품)

 

조선의 비밀병기 ‘편전’ 사거리 1천보 넘어

 

조선의 궁시는 고려시대에 사용하던 제도를 거의 답습하였다.
조선시대 들어서는 각궁과 편전이 크게 발달하여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무기로 각광을 받았다. 삼국시대의 맥궁에서 기원한 각궁은 예로부터 우리 나라 고유의 기술로 만들어져 외국의 활이 강력한 탄력성을 따를 수 없었다. 1488년(성종 19)에 조선에 왔던 명나라 사신 동월이 각궁을 평하기를“조선이 사용하는 화피궁은 중국 제
도에 비해서 약간 짧으나 화살이 날아가는 힘은 심히 강하다”(조선부)고 하였다. 이 화피궁이 바로 조선의 각궁을 일컫는 것으로 궁력의 강함을 인정받고 있었던 것이다.

 

편전은 화살 크기가 작아 일명‘애기살’이라고 하는데, 나무로 만든 대롱에 편전을 넣고 쏘도록 되어 있었다. 편전은 화살이 작아 가벼운 대신 가속도가 커서 관통력이 컸기 때문에 보병전은 물론이고 기병전에서도 크게 활용되었다. 또한 편전은 1천보 이상의 거리까지 날아가 적을 맞혔기 때문에 조선의 가장 중요한 비밀 병기로
활용되었다. 그리하여 세종 때에는 북방의 야인에게 편전 제작 방법이 알려질까 염려하여 함경도 지방에서는 편전 교습을 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 중요성으로 말미암아 편전은 조선시대 무관을 선발하는 시험 과목의 하나로 채택되었다. 또한 조선의 편전은 중국의 창, 일본의 조총과 더불어 천하의 제일로 여겨졌다.

이러한 편전을 중국인들은 ‘고려전’ 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와 같은 편전의 우수성은 편전에 대한 지나친 의존과 자만을 불러일으켜 도검, 창 등 다른 무기 개발에 대한 관심을 떨어뜨렸다.

 

조선 최대의 전란이었던 임진왜란 당시에도 조선의 궁시는 당시 일본군의 궁시보다 그 위력이 컸다. 윤근수가“적병이 처음에는 목궁으로 화살을 쏘았는데, 화살의 힘이 강하지 못했다”라고 하였듯이 조선의 각궁은 일본의 단일궁으로 된 목궁보다 강했다. 이 점은 임진왜란 당시의 일본군을 따라 참전했던 서구의 선교사들의 눈에
도 대단하게 보였다. 루이스 데 구스만도 그의 저서 ‘선교사들의 이야기’ 에서 조선인들이 활과 화살을 아주 잘 사용한다고 하였고, 루이스 프로이스 신부도 조선인에 대해 “매우 힘이 좋고 활과 화살을 아주 잘 사용하며 그들의 활은 터키 활과 같이 조그맣다”고 보았다.

그러나 점차 화약병기의 위력이 강해지면서 활은 화약병기에 밀려 전투병기로서의 역할이 떨어지게 되었다. 이후 활은 관가나 군영에서 벗어나 민간에서 활용되어 많은 궁사들이 모여 활쏘기를 수련하고 심신을 단련하는 풍속이 전국적으로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무인 선발의 기본 과목 ‘활쏘기’

 

조선 왕조는 현실적으로 문치주의를 추구하였지만 이념상으로는 문무 양반체제여서 문무겸전을 이상적인 덕목으로 내세웠다. 따라서 문벌귀족 중심의 협착한 인재 등용에서 벗어나 관리 선발의 문호를 개방하여 능력 위주로 인재를 선발하려는 의도에서 무과도 실시하였다. 초기의 무인 선발은‘취재’라는 제도를 통하여 이루어
졌으나, 이후 1402년(태종 2년)에 정식 무과로 시행되었다.

 

무과에는 정기 시험인 식년시를 비롯하여 부정기 시험인 각종 별시가 있었다. 식년시에서는 28명의 합격자를 배출하였지만, 계속적으로 증가하는 과거 진출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해 다양한 특별시험을 시행하게 되었다. 이러한 무과는 세종대를 거치면서 정비되어 ‘경국대전’ 으로 법제화되었다.

 

무과의 시험과목은 크게 무예와 강서시험으로 구분된다. 무예는 활쏘기와 창을 중심으로 목전?철전?편전?기사?기창의 다섯가지 무예와 격구로 이루어졌다. 강서는 병서와 유교 경전의 시험이다.

식년 무과의 초시는 무예만을 시험 보았다. 이들 무과시험의 내용을 살펴보면 궁술과 기마술이 중심이 되고 있으며, 무기체계면에서 보면 네 종의 궁시와 한 종의 창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수 있다.

전반적으로 궁시의 비중이 높았으며, 특히 편전의 평점이 90분으로 전체의 절반에 이를 정도로 편중되어 있었다. 격구는 고려 말에 그 폐단이 극에 달하였던 과목으로 문신들의 폐지 주장이 있었지만, 무예 훈련의 기초가 된다고 하여 1425년(세종7년) 4월에 채택되었다.

 

무과의 복시는 무예와 강서를 시험하는데 초장?중장?종장의 삼장제로 운영하였다. 복시의 종장은 강서로 시험을 보았는데, 이는 문무를 겸비한 장수의 선발을 목적으로 한 데 있었다. 무과의 전시는 기격구와 보격구의 성적에 따라 합격자의 등급을 정하였다.
이리하여 갑과 3명, 을과 5명, 병과 20명으로 등급이 나누어졌다.

 

결국 조선시대 무과는 무예와 함께 병서를 통한 병략에 대한 지식이 요구되는 문무겸전의 무인 선발을 위주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무예의 시험과목 역시 활쏘기와 말타기가 중심이 된 장병 전술 위주의 무예였던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근접전 무예인 격검(칼쓰기)은 시험 과목에서 아예 제외되었으며, 창술도 비중이 매우 낮았던
것이다.

 

편전과 편전을 발사할 때 사용하던 보조장구, 통아(전쟁기념관 소장품)

 

조선시대에 활쏘기에 사용되었던 완대, 궁대, 동개( 전쟁기념관 소장품)

 

 

또한 군사 훈련에서도 궁술은 중요한 포인트가 되었다. 활쏘기는 군관들의 군사훈련인 동시에 체력단련이었고, 오락이며 유희이기도 한 생활의 한 부분이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이들은 거의 매일 활쏘기 연습을 하였다. 군관들끼리 편을 갈라 요즈음과 같은 단체전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인접한 군관들을 방문하여 원정 경기를 펼치기도 하였다. 활은 10순(1순은 다섯 발) 단위로 쏘았는데, 20순이나 30순을 쏜 경우도 많았지만 하루에 10순을 쏘는 것이 상례였다. 그런데 군관들의 활쏘기 솜씨는 뛰어나서 50발 중 최소한 40발 이상을 명중시키는 실력을 보유한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특히 강무가 궁술을 위주로 치러지는 것이고, 대열과 강무가 끝난 뒤 행해지는 관무재의 과목 세 가지 중에서 모구와 삼갑사가 궁술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그만큼 조선 전기의 궁술은 군사 전술의 중요한 부분으로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시대 함경도 길주에서 무과시험을 보는 장면을 그린 북새선은도(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

 

조선시대의 강무 장면을 그린 기록화 강무도(세종대왕기념사업회 소장품)

 

조선의 군사 퍼레이드 ‘대열’ 과 ‘강무’

 

조선 시대 왕은 해마다 농한기인 봄과 초겨울에 전국에서 군사들을 동원하여 직접 군사 훈련을 실시하였다. 이 훈련에는 대열과 강무가 있다. 대열은 전국에서 징발한 군사들을 대상으로 전투 대형인 진법 훈련을 실시하고, 여기에 국왕이 친히 나가 사열하는 것이다.

일명 친열이라고도 하는데, 1432년(세종 3년)에 처음 시행되었고, 이후 1451년(문종 원년)에 진법으로 확정되었다.

 

대열은 전쟁 상황을 가정하여 아군과 적군의 두 부분으로 나뉘어 기본적인 훈련과 함께 전면적인 공격과 방어 전술을 펼치게 된다. 중앙 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전후좌우의 부대 병사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도록 반복하여 훈련하는 것이다. 이 때 병사들은 실감나도록 화살촉을 뺀 활을 쏘거나 날을 헝겊으로 묶은 창이나 칼로 서로를 베기도 하였다. 수만 명의 기병과 보병이 함성을 지르면서 접전하는 광경은 실제 전쟁을 방불케 하였다. 대열이 끝나면 왕은 수고한 대소 신료나 훈련을 잘한 병사들을 선발하여 상을 주었다. 또 병사들의 사기를 드높이기 위해 무과를 시행하기도 하였다.

 

대열에는 적게는 1만 명에서 많게는 10만 명 내외의 병사들이 동원되었다. 10만 명이 징발되면 약 3만 명은 직접 대열에 참가하고 나머지 군사들은 보급을 맡거나 대기하였다. 대열은 1만 명에서 3만 명 정도의 병사들이 국왕 앞에서 진법 시범을 보이는 대규모 행사였기에 성 밖의 넓은 평지에서 시행되었고, 어떤 때는 한양을 벗
어나 경기도 지역에서 하기도 하였다.

 

한편 강무는 국왕이 군사를 동원하여 일정 지역에 출동한 다음 그 지역에서 사냥하고 복귀하는 일련의 활동을 말한다. 이러한 강무는 중국 고대의 주나라에서 유래하였지만, 삼국 시대 국왕이 직접 병력을 거느리고 전쟁에 참여하였던 전통과도 무관하지 않다.

 

조선 건국 후에 무장 출신인 태조 이성계는 스스로 궁궐 내에 갇혀 있는 것을 답답하게 여겨 야외로 출동할 기회를 찾게 되었고, 이를 유교적 국가 운영과 부합시키는 방법으로 강무제도를 도입하였다. 이후 강무는 태종 때 23회, 세종 때 30회 등 활발히 시행되었다.

 

강무를 시행한 목적으로 첫째는 농한기에 군사를 훈련시켜 유사 시 전투 병력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며, 둘째는 사냥으로 잡은 짐승을 종묘 제사에 올리려는 것이고, 셋째는 농작물에 피해를 주는 짐승을 잡아서 농사를 이롭게 한다는 것이다. 이 밖에도 국왕의 국토 순시와 민정 파악의 목적도 있었다.

 

강무는 봄에는 2월 초, 가을에는 10월 초에 10여 일 동안 시행하였다. 강무장은 처음에는 경기?강원?충청?전라?황해도 등의 여러 곳에 있었으며, 강무장으로 지정되면 민간의 출입이 통제되고 사냥이 금지되었다.

 

강무 시행에 따른 군사적 기능은 동원 훈련의 성격을 띤다. 동원되는 군사의 규모는 초기 수천에서 점차 2만~3만 명으로 증가되었다. 동원된 군사는 평소 거주지에서 훈련받은 진법의 숙달 정도를 점검받고, 각급 제대로 편성되어 강무장에서 몰이꾼으로 활용되었다. 이를 통해서 명령 체계를 숙달시키고 군율을 지키게 하며 전투
에 대한 공포감과 두려움을 없애고 담력을 키울 수 있었다.

 

 

수책거적도 : 이순신 장군이 녹둔도에서 여진족의 침입을 물리치는 장면을 그린 그림(고려대박물관 소장품)

 

태조 이성계가 사용하던 활과 화살, 동개

 

활쏘기는 사대부의 기본 덕목

 

‘병장설’에서는“항상 활쏘기, 말달리기를 일삼고, 겸하여 유술을 익히는 자가 상품의 인물이다”라 하여 활쏘기를 강조하고 있다.
문신이라 할지라도 예(禮)?악(樂)?사(射)?어(御)?서(書)?수(數)의 육예(六藝)를 배웠던 데서 알 수 있듯이 활쏘기는 말타기와 더불어 중요한 과목의 하나였다. 이렇듯 조선시대에는 사대부가 반드시 익혀야 하는 무예의 하나로 활쏘기를 꼽았는데, 이는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를 비롯한 역대 왕이 활쏘기를 즐겨하여 장려하였기
때문이다.

 

이성계는 일찍부터 명궁으로 이름을 날렸다. 공민왕이 경대부들에게 활을 쏘게 하고 친히 이를 구경하였는데, 이성계가 100번을 쏘아 100번 다 맞히는 것을 보고 탄복하면서“오늘날의 활쏘기는 다만 이성계 한 사람뿐이로구나”라고 말한 적이 있을 정도였다. 이성계의 활 솜씨와 관련된 이야기는 많이 있지만, 특히 1379년(우왕 5년) 7월 운봉에 침입한 왜장 아기발도와의 일화가 유명하다.

 

당시 이성계는 운봉에 침입한 왜구를 상대로 대우전?유엽전 50여 개를 발사하여 적을 모두 명중시킬 정도로 활을 잘 쏘았다고 한다. 당시 왜구 장수는 아기발도라는 미소년으로 용모도 준수하고 용맹이 매우 뛰어났다. 특히 그는 갑옷과 투구를 착용하여 화살이 들어갈 만한 틈이 없어 고려군이 매우 두려워하였다.

이에 이성계가 휘하 장수 이두란에게“내가 왜장의 투구를 쏘아 벗길 것이니, 그때를 놓치지 말고 그대는 재빨리 그의 면상을 쏘아 맞히라”라고 말하고, 시위를 당겨 아기발도의 투구 꼭대기를 정확히 명중시켜 투구를 땅에 떨어뜨렸다. 이에 이두란이 활을 쏘아 아기발도를 사살하여 결국 승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 이야기에는 이성계의 뛰어난 활 솜씨를 강조하기 위해 과장된 측면이 있겠지만 그의 활 솜씨가 유달리 뛰어났던 것만은 사실이다.

 

이후 이성계는 한성으로 천도한 이후 활을 쏘기 위하여 궁중 후원에서도 사후를 많이 하였다. 이것은 태조가 자기의 무술을 단련하기 위하여 쏜 것으로 생각된다. 태조 이래 역대 왕 또한 활쏘기를 즐겨 무의 중요성을 깨닫고 장려하는 바람에 문신들까지도 활을 잘 쏘았다.

 

활쏘기를 숭상한 예를 살펴보면 1409년에 태종이 세자에게 궁중에서 활쏘기를 익히도록 하였는데 우빈객 이래와 간관들이 이를 옳지 않다고 반대하자, 태종은“옛사람이 이르기를 활 쓰는 것으로 덕을 알아본다고 하였고, 또 이를 이르기를 그 재주를 겨루는 것이 군자의 도라 하였으니 활 쏘는 것을 중지시킬 수 없다”고 하여 이를 일축하였다. 이처럼 궁술은 왕실에서도 중요하게 여겼던 것이다.

 

세종도 경복궁에 거둥하여 경회루에서 내금위?사금?진무?사복과 충의위?별시위에서 활 잘 쏘는 군사를 시켜서 200보 거리에서 활을 쏘게 하였으며, 그때 부사정 박성량과 부사직 강호문?조유례가 가장 잘 쏘았으므로 각궁을 하나씩 하사하였다.

 

특히 문종 연간에서는 임금이 친히 왕림한 가운데 궁술 대회가 자주 열렸다. 1451년(문종 원년) 2월에 왕이 서현정에서 동?서반 각 품관의 활쏘기를 보았다. 그 후 훈련관에서 무사들의 사후도 관람하였는데, 이 때 봉석주?신이중 등 45명이 사후, 치후, 기창 등을 잘한다고 하여 선발되었다. 이 때는 격구, 기사 등을 보았고 대내에서 종친을 불러 사후를 하였다. 따라서 문종 때에는 문무반을 막론하고 종친이나 각 관서의 관리들도 활을 잘 쏘았다.

 

세조는 종친과 공신을 궁중 후원에 불러들여 궁술 대회를 열기도 하고 때때로 문신들을 모아 놓고 활쏘기를 하여 우수한 사람에게는 상을 주거나 벼슬을 올려 주었다. 세조는 미리 알리지 않고 불시에 활쏘기를 관람하는 방식으로 훈련에 힘쓰도록 권장하였기 때문에 당시의 무사 중에는 뛰어난 이들이 많았다고 한다.

 

또한 1502년(연산군 8년) 2월에는 연산군이 강궁 4개를 내어 놓고“이철동 등 세 명과 시위하는 장사 중에 활시위를 당길 만한 힘이 있는 이는 이것으로 과녁을 뚫으라”고 명령하였다. 병조판서 이극돈이 시위하는 장사 17명과 이철동 등 세 명을 번갈아 시험해 보았으나 모두 실패하였는데, 유일하게 겸사복 박세정만이 활을 당길
수 있었다고 한다. 또 같은 달 정승과 승지들에게도 도성 문 밖에서 활쏘기를 연습하게 하고 임금이 직접 시를 지어서 내려 주기도 하였다.

 

중종 때는 재상 가운데서도 활쏘기에 뛰어난 이가 있었다. 어유소는 1품관이면서도 달리는 말 위에서 활을 쏘았다. 승지 김세형도 기사에 능하였고, 최경례는 70세의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활쏘기와 말달리는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북일영도 : 김홍도가 서울의 북일영에서의 활쏘는 장면을 그린 그림(고려대박물관 소장품)

 

조선통신사 일행이 일본에 갔을 때 마상재를 시연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고려미술관 소장품)

 

이웃나라에서도 탐낸 조선의 활 솜씨 ‘마상재’

 

이렇듯 조선의 활쏘기는 널리 유행하였고, 그 솜씨는 중국이나 일본보다 훨씬 뛰어났기 때문에 이웃 나라에서는 어떻게든 조선의 활쏘기를 배우려고 하였다. 특히 조선은 편전 쏘는 법을 ‘아국장기’ 라 하여 중요한 군사 기밀로 취급하였다. 나아가 북방 야인들의 왕래가 잦은 함경도와 왜인들이 거주하는 삼포 지역에서는 편전을
가르치는 것 자체를 아예 금지하기도 하였다. 이는 외국인들에게 편전 제조 기술이 전해질까 염려하였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과 일본에서는 더욱 조선의 활쏘기를 배우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쉽지 않았다.

 

조선도 이런 점을 이용하여 국력을 과시하고자 하였는데, 이와 관련하여 1525년(중종 20년) 영의정 남곤이 일본 사신을 접대할 때의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진다.

남곤은 사신들에게 무예를 관람하도록 하였는데, 과녁을 쏠 적에 일본 국왕의 사신 및 대내전의 사신은 앉은 채로 관람하고 나머지 아랫사람들은 활 쏘는 곳으로 가서 관람하였다.

당초에 병조에서 보사 40명과 기사 40명을 뽑아서 다른 무인들과 섞어 세워 놓고 모두가 활을 잘 쏘는 사람인 것처럼 꾸몄다. 그리고 앞에 선 40명을 뽑아 활을 쏘도록 하였다. 40명의 활쏘기가 거의 끝날 즈음 남곤은 일본 사신들에게 다른 무재를 더 보고 싶지 않은가 물어 보았다. 사신이 더 보고 싶다고 하자 남곤은 즉시 기사를 하도록 지시하였다. 기사를 본 일본 사신들은“평생 이런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사람마다 쏘면 맞히지 못한 적이 없고, 다섯 번 쏴서 다 맞히지 못하는 사람이 오히려 더 적습니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에 앞서 남곤은 말 타고 활을 쏠 사람 10명을 예비로 더 선발해 두었는데, 40명이 기사를 다 끝냈는데도 아직 해가 저물지 않자 그 10명도 기사를 하도록 하였다. 여럿 중에서도 신빈과 정지하의 기사가 뛰어나서 다시 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외국 사신들에게 조선의 국력을 과시하려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또 다른 예로 1718년(숙종 44년) 일본 관백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해 일본에 파견하였던 통신사의 제술관으로 따라갔다 온 신유한이 남긴‘해유록’을 보면 당시 통신사 일행인 군관 양봉명이 일본의 관백 앞에서 활쏘기를 시연하자 보고 있던 상하의 관리들이 모두 놀라고 겁을 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은 이후의 통신
사 관련 문헌들에서도 쉽게 접할 수 있다.

 

일본인들은 특히 말을 달리며 허수아비 모양의 표적을 활로 쏘는 기사에 탄복하였다. 조명채의 ‘봉사일본시문견록’ 에는 “다음에는 기추를 시험하는데, 추인(허수아비)은 우리 나라에서 쓰는 추적(풀단으로 만든 표적)보다 조금 컸다. 임세재?인문조?이세번 3인은 3발을 맞히고 그 외의 사람은 모두 5발을 맞혔다. 말이 매우 살찌고 훌륭하여 나는 듯이 달리는데, 이일제는 첫 추적을 맞히고서 말안장이 기울어져 떨어질 뻔하다가, 곧 몸을 솟구쳐 안장에 바로 앉아서 나머지 화살을 달리면서 다 맞히니, 사면에서 구경하는 사람들이 일시에 모두 입을 벌리고 감탄하였다. 대개, 왜인은 말 다루는 것에 익숙지 못하므로 날쌘 말이 내닫는 것을 보고도 기장하게
여겼었는데, 더구나 사람마다 화살을 헛되이 쏘지 않으니, 구경하는 사람이 모두 혀를 내두르며 탄복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때, 일본인들은 조선 무인들의 뛰어난 기사솜씨와 마상재에 탄복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조선은 이를 통해서 조선의 국력을 과시하려 했던 것이다.

 

 

글 | 박재광 _ 전쟁기념관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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