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 영화 한 편 볼까? 이 말은 영화 관람 자체에 내재된 이벤트적인 성격, 축제적인 성격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주말에 영화관을 찾는 이들은 자신들의 만남을 좀 더 풍성하게 해 줄 이벤트를 한 편의 영화에서 찾는다. 바즈 루어만의 <물랑루즈>는 영화를 관람하는 경험이 지닌 축제적인 성격에 기대면서 축제의 역동적인 순간을 형상화하고 있다.
영화는 순수하고 열정적인 사랑에 대한 환상, 무한한 자유를 향한 꿈, 번득이는 기지와 천재적인 영감에 대한 동경 등 아직 생활과 맞닥뜨리지 않은 시기에 예술의 언저리에서 맴돌았던 이들을 사로잡았던 일락의 세계를 완벽하게 구현하고 있다. 물론 그 옷은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기존의 예술에서 모조리 빌려온 것들이다. 영화는 뮤지컬을 표방하고 있지만 귀를 두드리는 것은 새로운 영화 음악이 아니라 익히 듣던 팝의 멜로디이며, 영화의 핵을 이루는 비극적이고 애절한 사랑은 베르디의 오페라에서, 우리의 신파극에서 숱하게 보아 온 것이다. 나아가 불치병을 앓고 있는 여주인공과의 애절한 사랑은 다시 액자 구조의 형식을 빌어 이야기 속의 이야기와 얽히고 있지만 이 역시 익히 보아 온 바다. 이처럼 루어만이 입힌 옷을 뜯어내면 그의 것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을래야 찾을 수 없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의 정교한 세공 솜씨로 완벽하게 시술되어 탈바꿈한 옷은 빌려 입은 옷의 남루함은커녕 이렇게 멋진 옷이었던가 감탄을 자아낸다. 눈길을 끄는 새롭고 독창적인 것은 하나도 없지만, 그러한 것들을 하나로 그러모으는 강렬한 힘과 역동적인 리듬 속에서 우리의 감각은 마법에 걸린다.
사실상 <물랑루즈>에서 특정 장면을 분리시켜 따로 떼어내는 것은 불가능할 뿐더러 무의미한 일이다. 영화 스틸에서 <물랑루즈>의 에너지를 느낄 수는 없다. 영화의 화려하고 현란한 색감은 다분히 원색의 유화를 연상시키지만, 그것에 생동감을 부여하는 것은 음악적인 리듬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영화는 정적인 사진이나 회화보다 동적인 대중 음악에 가깝다. 콘서트장에서 대중 가수에게 열광하듯 영화는 관객이 일상을 잊고 몰입하게끔 이끈다. 그러나 이 마법은 독을 가지고 있다. 영화는 관객의 열광을 끌어내는 대신 생각을 금지시킨다. 영화에 관객이 부여할 수 있는 의미는 없다. 루어만은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하고 거침없이 보여주고 심지어 강요한다. 우리는 영화를 좋아하는가 좋아하지 않는가 만을 말할 수 있다.
이 영화가 자유와 진실을 기치로 내걸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 과자로 만든 성처럼 보이는 것도 그런 이유이다. 그러나 술에, 여자에, 마약에 취해 있는 세계, 하나씩 그 달콤함에 이끌려 뜯어 먹다 보면 남은 것은 빈 손바닥 뿐임을 모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영화가 쏟아 내는 뜨거운 에너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아버지의 품에서 막 벗어나 세상에 첫 발을 내딛은 풋내기 예술가 크리스티앙이 세상을 몸으로 배운 닳고 닳은 배우 사틴의 품에서 세상에 대한 눈을 뜬다. 그러나 크리스티앙이 세상을 체험한 곳은 세상의 한복판이 아니라, 세상에서 벗어난 곳, 삶의 무풍지대이자 시공을 초월한 공간이다. 성장이라는 말이 현실을 자각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면 크리스티앙은 성장하지 않는다. 물랑루즈 안에서 시간은 흐르지 않고 멈춰 있다. 그는 물랑루즈라는 꿈의 세계를 경험한 것일 따름이다. 영화는 열락의 밤을 담아내고 있는 것이지 취기가 가신 아침을 말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꿈 속의 세상과 꿈에서 깨어난 세계는 천국과 지옥처럼 단절된 세계이며, 그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간극이 놓여 있다. 잠에서 깨어난 직후의 어리둥절한 순간처럼 이 간극은 비약적으로 뛰어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몰입된 상태를 표현하기 위해 역동적인 에너지를 끌어낼 수 있었던 루어만의 뛰어난 재능은 다시 한 번 놀라운 것이다. 그리고 영화는 물랑루즈 안에서 벌어지는 광란의 축제에 맞춰 크리스티앙과 사틴의 광적인 사랑을 보여준다. 일년 내내 카니발이 열리는 곳, 사랑과 금기와 죽음이 공존하는 곳, 자유와 미와 진실과 사랑을 일상으로 실천하는 곳, 물랑루즈는 바로 보헤미안의 낙원이다. 이 유혹적인 환락의 세계에서 방탕과 자유는 동일시되며, 진실과 거짓이 뒤섞이고, 욕망은 풀어 헤쳐지며, 금기는 깨어진다. 현실에서 이탈한 꿈의 세계에서 사랑은 무 아니면 전부, 모 아니면 도이다. 그리고 우리는 현실의 올가미를 풀고 뿜어져 나오는 몰입된 사랑, 그 불꽃을 목격한다.
사랑을 향한, 삶을 향한 사틴의 뜨거운 에너지는 불을 뿜자마자 스러진다. 물랑루즈가 자신의 집이었던 사틴은 물랑루즈 안에서 숨을 거두었다. 사라 베른하르트와 같은 대배우가 되고자 열망했던 그녀의 바람은 사랑과 함께 흔들리지만 사랑을 지키기 위한 그녀의 몸부림 속에서 성취된다. 재가 되지 않고 불꽃처럼 살다간 짧은 삶이 쉽게 그 나이를 넘긴 이들을 오래 사로잡는 것처럼, 순간은 영원으로 통한다. 그녀는 크리스티앙의 소설 속에서 다시 태어나서 생명을 이어갈 것이다. 그러나 피그말리온이 자신이 만든 조각상과 사랑에 빠져 그녀에게 숨결과 체온을 불어넣었던 것과 정반대로, 크리스티앙은, 그리고 루어만은 찬미와 숭배의 대상으로서 그녀를 박제시켰다. 우리가 숭배하고 꿈꾸었던 여신들이 물랑루즈의 어두운 뒷골목에서 일그러진 얼굴로 반쯤 벗은 채 과거를 추억하며 다시 한 번 유혹의 눈길을 보낸다면 우리는 그 흉측함에 질겁하고 달아날지도 모른다. 동전의 양면처럼 추악함과 화려함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물랑루즈의 세계 속에서 찬란한 아름다움은 예술 속에서만 영원의 생명을 보장받는다는 것을 루어만은 알았으리라.
이처럼 사랑지상주의는 예술지상주의로 통하며, 사랑의 불꽃은 예술을 창조하는 영감의 원천으로 작용한다. 그리고 대중의 눈길을 먹고 사는 배우처럼 대중의 사랑과 지지를 필요로 하는 예술은 끊임없이 대중에게 구애를 보내야 한다. 어떤 예술 분야보다 경제적인 가치가 중요시되는 영화는 예술인 동시에 산업이다. 그 경제적인 가치는 영화에 재력을 행사하는 제작자와 재력을 보장해주는 관객의 입김에 좌우된다. 따라서 공작의 요구에 따라 변형되는 인도판 사랑의 결말처럼 영화는 감독 자신의 기호와 제작자의 기호, 그리고 대중의 기호를 모두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지점을 찾아낼 때 영화는 살아 있는 꿈이 된다. 루어만은 대중의 기호와 타협해야 하는 예술가의 고뇌를 말하는 대신, 그것을 소명으로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그가 누릴 수 있는 자유를 만끽하고 있다. 그리하여 영화는 대중 예술에 대한 애정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이 영화가 빌려온 뮤지컬이라는 형식은 실상 뮤지컬이라는 장르가 지닌 힘, 다시 말해 음악과 영상과 춤이 하나가 될 때 뿜어져 나오는 그 강렬한 에너지를 가져 온 것이다. 그 안에서 미국의 팝 음악, 너바나에서 비틀즈에 이르는 빌보드지 히트곡들을 차용함으로써 루어만은 예술이란 대중과 함께 호흡할 때 진정한 생명력을 얻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불이 꺼지고 막이 열리면 현실은 닫히고 꿈이 펼쳐진다. 지루하고 남루한 일상의 나날들이 기적처럼 생명을 부여받고 활기를 띠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든 영화가 보여주는 허상에 빠져들 준비가 되어 있다. 한낮의 피로를 깊은 밤의 잠으로 풀 듯이 삶의 나날들이 주는 피로는 삶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뛰어든 축제를 통해 해소된다. 꿈을 꾸는 우리에게 영화는 릴케의 말처럼 '나에게도 축제, 당신에게도 축제'이며, <물랑루즈>는 그러한 꿈의 집합체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