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슈 관광을 마치고 다시 시모노세키로 돌아가는 길, 차창 밖은 비가 “오다 흐리다”를 반복하지만 상관없다. 오늘 여행도 잘 하였겠다, 느긋한 마음으로 면세점 들러 즐겁게 쇼핑하는 일만 남았다. 쇼핑이란 누구에게나 가슴 설레는 일이다. 더구나 외국에서 평소 접해보지 못했던 물건들을 구경하고 구입하는 재미는 여행의 또 다른 즐거움이다.
시모노세키로 이동하는 버스안에서 전미영씨가 들려주는 마지막 일본 이야기, 이번에는 일본인들의 대화 방법이다.
사업을 하고 있는 아들이 사정이 어려워 아버지에게 급히 운영자금을 빌리기 위해 찾아 간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저녁식사를 같이 하는데 아버지는 아들이 그냥 온 것 같지는 않고 무슨 일이 있어 왔을까 궁금해 한다. 여기까지는 어느 나라 부자지간에라도 비슷하다.
자연스럽게 소소한 가족 얘기며 사업 이야기가 나오는데 아버지가 물어본다.
“그래 요즘 사업은 잘 되냐?”
아들은 “환율이 올라 제품원가는 나날이 올라가는데 불황이라 판매도 부진하고, 인건비는 계속 오르고...... 많이 어렵습니다.”라고 대답한다.
이쯤 되면 아버지도 사업자금을 도와 달라는 아들의 의도를 알아차린다. 도와줄 의향이 있다면 “그래 사업 자금은 잘 돌아가고?”라며 사업자금 얘기를 먼저 꺼낸다.
이러면 아들도 아버지가 도와 줄 뜻이 있음을 알아차리고 그 쪽으로 이야기를 이어간다.
만약에 아버지가 도와 줄 형편이 안 되면 그냥 일상적인 이야기만 계속하면 된다.
아들이 어렵다는 얘기를 해도 “그래? 그래도 올 하반기부터는 경기가 좋아진다고 하니 좀 지나면 괜찮아질 거다. 열심히 하다보면 좋은 시절도 오고 그러는 거지. 그래 요번에 입학한 막내는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냐? 다음에는 애들도 같이 데리고 와라. 녀석들 본지가 꽤 오래 됐구나......”
이렇게 이야기를 진행 시키면 도와줄 수가 없다는 말이 된다. 아들도 알아차리고 이런저런 일상 이야기 나누다 작별인사 드리고 돌아온다.
아버지 입장에서는 아들로부터 사업 자금 빌려 달라는 얘기를 들은 적이 없으므로 부담을 갖거나 미안 해 하지 않아도 된다. 그냥 아들 녀석이 오랜만에 찾아와서 저녁식사 같이 하고 돌아갔을 뿐이다.
아들 입장에서도 아버지에게 직접 돈 빌려 달란 소리 한적 없으니 부담이 없고 자존심 상할 일도 없다. 속으로야 어떨지 몰라도 겉으로는 부모님께 섭섭할 일 하나도 없다. 그냥 부모님 찾아뵙고 저녁 얻어먹고 돌아 왔을 뿐이다.
이것이 일본인들의 소통 방법이다. 부자지간에도 직접 부딪히거나 서로 입장 난처하지 않도록 애둘러 표현한다. 우리가 보기에는 애매하고 답답하기 짝이 없지만 이렇게 말 한마디에도 서로 부담을 주지 않도록 극도로 조심한다. 그러기에 신속성은 떨어질지 몰라도 사회적 갈등 요인이 적은지도 모른다. 이 또한 이들이 살아가는 방법일 것이다.
시모노세키에 가까워지면서 전미영씨의 면세점 상품소개가 이어진다. 건강을 지켜준다는 게르마늄 팔찌와 목걸이, 노화방지 기능성 화장품, 항균 도마 등 몇 가지 상품을 소개하는데 아무래도 오늘의 메인 상품은 게르마늄 팔찌인 것 같다. 가이드의 상품소개를 듣다보면 그 컨셉이 그려지는데 여유만 있으면 추천 상품을 구입하는 것도 좋지만 경험상 거기에는 리스크도 함께 다닌다. 그래도 이번 여행은 쇼핑센터 방문이나 다른 기획 시리즈가 없어서 편안했다.
면세점에 도착해보니 그리 크지 않은 매장에 다양한 물건들이 있었다. 직원들이 모두 한국 사람으로 그 수가 꽤 많았는데 한눈에 한국 단체 관광객이 들리는 쇼핑 시설임을 알 수 있었다. 모두 항균 도마며 양산, 화장품, 생활용품 등 가족이나 아내를 위해 선물을 사는데, 평생 가족을 위해 열심히 살아 왔고 그 짐을 한시도 내려놓은 적 없는 아버지들의 모습이다.
한 시간 가까이 쇼핑을 끝내고 손에 한 보따리씩 선물을 들고 버스에 오르는데 이 순간만은 모두 남부럽지 않은 부자가 된 기분이다. 곧바로 세모노세키항으로 이동하여 출국 수속을 마치고 출국 대합실에서 기다리는데 대합실에도 한국인을 위한 매장이 있었다. 주로 식품들로 한국인이 많이 찾는 참기름이며 간장, 수산가공품 들이 대부분이다. 참기름 가격이 국내보다 저렴했는데, 일본에 와서 한국 참기름과 일본 참기름의 차이점을 처음 알았다. 한국에서는 참깨를 볶아서 기름을 짜므로 맛이 고소하지만 일본에서는 볶지 않고 직접 기름을 짜내기 때문에 고소한 맛이 덜하다고 한다. 하지만 일본 참기름은 참깨를 볶지 않고 짜기 때문에 영양소 파괴가 적어 영양학적으로는 좋다고 한다.
대합실에서 마지막 쇼핑과 이런 저런 일본에서의 무용담 얘기로 시간을 보내다 하마유호에 승선하여 귀국길에 올랐다.
(일본회갑여행 여정도)
이렇게 짧지만 너무나 길었던 이틀간의 일본 여행을 마무리했는데, 어제 아침에 시모노세키에 내려 맨 처음 조후 성하마을(사무라이마치)과 코산지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우베시 도키와 공원, 루리코지 5층탑, 아키요시다이, 이키요시 동굴을 관람하고 하기시에서 하룻밤을 묶었다. 오늘은 하기시에서 시모노세키로 이동하여 아카마 신궁, 가라토 수산시장을 둘러보고는 큐슈로 이동하여 탄가 재래시장, 리버워크, 고쿠라성을 관광하고 다시 시모노세키로 돌아오는 일정을 모두 잘 마쳤다.
이틀간의 외국여행은 길다고 할 수는 없지만 고등학교 졸업 후 이렇게 몇 십 년 만에 친구들과 함께하는 특별한 여행이었기에 너무나 많은 이야기들을 만들어내며 아주 긴 시간 함께한 기분이다.
하마유호도 올 때 타고 온 성희호와 마찬가지로 선실이 깨끗하고 전반적으로 쾌적한 환경이라 편안하다.
사연 많았던 시모노세키항과 시가지가 점점 멀어진다. 시모노세키 시가지 한가운데 우뚝 솟은 타워가 높이 143 m로 서일본에서 가장 높다는 카이쿄유메 타워다. 저 타워에 올라가면 시모노세키 일대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는데 이번에 못 보았지만 상관없다. 다음을 기약하면 된다.
혼슈와 큐슈 사이의 좁다란 간몬해협은 두 지역을 연결해주는 요충이기에 많은 역사적 사연들을 간직하고 있으며 일본의 패권을 놓고 다투던 전국시대에는 수많은 해전이 있었다. 또한 조선의 통신사들이 이곳을 지나 다녔고 일제시대에는 수많은 우리 동포들이 한 맺힌 사연들을 가슴에 안고 이곳을 지나 다녔을 것이다.
그러나 바다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말이 없다. 멀리서 바라보는 항구와 시가지, 그마저도 처음부터 자연의 일부인양 넉넉히 품에 안는다.
간몬해협을 사이에 두고 좌측이 혼슈, 우측이 큐슈지역이다. 우리에게 바다와 육지는 대부분 육지에서 바라보는 모습이 전부다. 그러나 이렇게 배를 타고 바다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우리가 몰랐던 또 다른 신비함을 간직한 곳이다. 선상여행에서만 누릴 수 있는 특혜이자 즐거움이다.
손에 잡힐 듯 들어오는 큐슈지역의 공업지역, 카메라를 줌인하여 촬영하니 바로 옆 공장굴뚝처럼 가까워 보인다. 이렇게 간몬해협은 천혜의 항구이기에 예부터 수산업과 공업이 발달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의 여행이 막을 내리 듯 간몬해협 수평선 저 너머 석양이 아름다운데 지나가는 배 한 척이 외롭게 보인다.
해가 진 고요한 바다, 육지에는 땅거미가 지는데 수평선 너머에 드리운 먹구름 위로 한 마리 학이 나래를 한껏 펼치며 하늘로 날아오른다. 수 천 번 이 곳을 지나다닌다 해도 다시 못 볼 자연의 경이로움이다. 그러나 이 순간을 상룡이가 포착하지 못했으면 자연이 주는 이 특별한 선물도 의미 없이 지나가 버렸을 것이다.
모두 느긋한 마음으로 선상에서 석양에 물든 간몬해협의 정취를 즐겼다. 바깥이 어두워지자 선내에서 이곳저곳 둘러보는데 식당 앞에서 추진위원장 진이를 만났다. 선상 만찬은 서울 친구들이 주최하기로 했는데 미리 식당에 와서 메뉴며 식사 시간 등을 점검하고 있었다. 주방장을 만나보니 일본인이었는데 이렇게 많은 인원이 특별한 요리를 드시려면 당연히 사전에 예약이 되어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음식의 메뉴별로 준비된 양이 한정돼 있다고 한다. 한 종류 당 7~8인분 정도만 준비돼 있어 그 범위에서 몇 가지 메뉴를 예약했다. 그리고 시간도 조금 앞당겨 일반 승객들이 몰리는 시간을 피해서 정했다.
진이를 보면 언제나 자신감과 여유가 묻어나는데, 그 자신감과 여유로움 뒤에는 이렇게 사전에 준비하고 꼼꼼히 점검하는 치밀함이 있었다. 덕분에 레스토랑 별실을 차지하고 여유로운 선상 만찬을 즐길 수 있었다. 정말 맛있게 잘 먹었다. 그리고 진이에게 한 수 잘 배웠다.
저녁 식사 후 목욕을 마치고는 다시 라운지에 모였다. 이번에는 제주 친구들을 대표해서 달희 회장이 2차 자리를 마련했는데 라운지에 맥주가 많이 준비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지만 더 필요하면 자판기에서 캔 맥주를 뽑아다 마시는 것은 괜찮다고 한다. 이렇게 식당이나 라운지에는 평상시 팔리는 정도의 양만 준비하고 필요 이상의 식재료나 주류를 준비하는 것 같지가 않다. 이 또한 일본식 경영법일지도 모른다.
한 순간에 라운지 맥주는 바닥이 나고, 덕분에 총무 태요가 부지런히 캔맥주를 날라야 했다. 그러나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덕분에 다양한 맥주며 음료수, 한국에서 가지고 간 소주까지 다양하게 즐길 수 있었다.
4일 동안을 같이 돌아 다녔지만 아직도 못 다한 이야기가 너무 많다. 이 밤이 새고 나면 다시 각자의 삶의 터전으로 헤어져야 한다. 이렇게 반가운 친구들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다음번에는 제주에서 뭉치기로 약속을 했다. 적당한 시기에 제주에서 만나 산행도 하고 회포를 풀기로 하고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모두 잠자리로 돌아왔다. 그러나 아직도 아쉬움이 남는 친구들은 소주병 들고 갑판으로 올라간다.
온종일 돌아다녔고, 기분 좋게 한잔 하고 난 후라 편안하게 잘 잤다. 새벽에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에 잠을 깨어보니 창 밖에 오륙도가 보인다. 부산항에 도착한 것이다. 바람이 불어 꽤 파도가 높지만 얼른 갑판으로 올라가 주변 경관을 둘러보는데, 세벽의 바닷 바람이 상쾌하기 그지없다.
부산항을 앞에 두고 입항을 기다리는데 일본에 입국할 때와 마찬가지로 부산항 출입국사무소 업무가 개시되는 시간에 맞추어 입항하는 것 같다. 그 시간 동안 여유를 가지고 목욕도 하고 짐을 챙겨 입국 준비를 했다.
간단한 입국수속을 마치고 대합실로 나오니 출발할 때 만났던 바로 그 자리다. 모두 손을 잡고 작별의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서울 친구들은 다시 왔던 길을 따라 열차편으로 서울로 향하고 제주도 친구들은 지하철을 타고 공항으로 향하는데 비행기 시간이 오후다. 여유를 가지고 김해에 내려 뒤풀이 행사를 가진 후 무사히 제주로 내려왔다.
제주에 도착해서는 왕식이 부회장이 그냥 헤어질 수 없다며 해단식 행사를 주최한다. 오랜만에 시원한 자리물회에 막걸리와 소주로 마무리하고 헤어졌다. 그리고 서울의 친구들도 무사히 도착하여 집에 잘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제는 해외여행도 마음만 먹으면 배낭하나 매고 훌쩍 떠날 수 있는 편한 세상이 되었지만 이렇게 고등학교 동창 친구들이 함께하는 회갑여행은 그렇게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여행이 아니다. 평생에 한번뿐인 특별한 여행이었다. 꿈 많던 학창시절을 함께 했던 그리운 친구들, 얼굴만 보아도 반가운데 4일 간이나 한데모여 특별한 여행을 다녀왔다. 행복한 4일간의 여정이었다. 이 특별한 여행을 추진한 추진위원장과 제주, 재경 동창회 회장단과 많은 도움을 주고 함께했던 친구들에게 감사드린다.
그러나 우리의 여정은 아직 끝 난 게 아니다. 우린 아직 젊고 저 드넓은 세상이 우리를 기다린다. 내일은 저 넓은 세상을 향해 또 다른 음모를 펼쳐보자!
첫댓글 늦었지만 금년 마무리하는 날에 둘러본 창남이의 여행기를 보며 새록새록한 연말을 맞는다. 수고 많이 했다. 영원히 남을 우리들의 추억이 여기에 있다. 새해에도 건강하고 2월에 다시 만나자...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