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개골의 밤
○ 구술자: 이0화
○ 구술자 나이: 77세(1936년생)
○ 면담자 : 이학주
○ 면담주제 : 6.25 한국전쟁 전후의 서화리 상황과 구술자의 삶.
○ 면담일자 : 2012년 11월 14일
○ 면담장소 : 서화면 서화2리 이0화 씨의 자택
<면담 상황>
겨울이 다가오는 문턱 즈음 서화리를 찾아갔다. 밭에서는 마늘을 심는 사람들이 드물게 보였고, 일찍 김장을 하는 집도 있었다. 역시 전방이라 곳곳에 군부대가 있었고, 훈련이 한창이라 도로에 바리게이트를 친 광경도 쉽게 볼 수 있었다. 이곳이 그 옛날 6.25한국전쟁의 중심에 놓여 있던 곳이라는 것을 주변 풍광으로 인해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60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치열했던 전쟁의 상흔이 완전히 지워지지 않고 있는 곳이었다.
서화면의 구술자를 찾기 위해서 여러 문헌과 전화번호 등을 뒤졌다. 그 결과 해당 나이에 있는 사람들 10여명을 물망에 올렸다. 그러나 현지에 가서 보니 생각했던 것 보다는 쉽게 적당한 구술자를 만날 수 없었다. 그래서 많은 곳을 헤매다가 서화리에 살고 계시는 심0관 씨를 만났다. 면담을 하고는 뭔가 부족한 면이 있어서 또 다른 제보자를 선정해 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이 동네에서 아주 오랫동안 살았다며, 이0화 씨를 소개해 주셨다. 마침 이0화 씨는 댁에서 손자를 보며 계셨다.
이0화 씨는 아직도 목소리가 맑았으며, 말씀을 아주 잘 하셨다. 구술 중 한숨을 자주 내쉬고, 삶이 전쟁으로 인해 고통으로 얼룩졌다고 했다. 지주라는 이유로 가족 5명을 하루아침에 잃고, 14살 어린 나이에 동생을 데리고 살다가 둘은 품안에서 보냈다. 14살 소녀가 고아가 된 몸으로 동생들을 보살펴야 했던 것이다. 집도 재산도 모두 몰수당하고 의지할 데 없이 살았던 것이다. 지방 빨갱이들의 거듭된 조사와 원주로의 피난으로 고통스런 삶은 계속 이어졌다. 또 열(염)병으로 인해서 친척을 대부분 잃었고, 부모님들이 부치던 땅마저 거의 잃었다.
이처럼 이0화 씨는 6.25한국전쟁의 최대 피해자면서, 그 소용돌이를 직접 몸으로 겪은 장본인이었다. 따라서 아래의 구술은 인제군의 전쟁전후사와 우리의 근대사를 재조명 하는데 있어 아주 중요한 자료로 쓰일 것을 확신한다.
<면담내용>
- 오늘은 11월14일 서화2리입니다.
-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나 이0화.
- 몇 년도 생이세요?
난 칠십일곱이니까. 모르지 뭐. 난 몇 년생인지 그건 몰라.
- 77살?
칠십일곱 살. 이제 여든 다 됐지 뭐.
- 그럼 1936년생이네. 그죠?
그건 잘 몰라.
- 어디 출신이에요?
나 저 골안에. 동개골이란 데 거기서 살았어.
- 동개골, 서화리에요, 거기도?
서화리지. 동개골. 이 안에 들어가서.
- 학교는 어디까지 다녔어요?
학교는 못 댕겼어. 야학 배운다 댕기다하다가 말았지 뭐.
-농사짓고 계셨어요?
그럼 부모들이 농사짓고.
- 부모들은 어떤 분이셨어요?
우리 어머이 아버지. 아이고, 말도 못해요. 얼마나 고생들 하다가 돌아가셨는지. 어머이 아버지 할머니 할아버지 삼촌 여기서 살다가 글쎄. 그리고 우리 삼남매인데. 그래 우리 아홉 식구가 살다가선. 글쎄 다섯 식구가 하루저녁에 돌아가셨어. 우리 어머이, 아버지, 할머니, 할아버지, 삼촌이랬어. 우리 삼촌은 그래도 많이 가르친다고 가르쳤어. 그때 서화 여기서 고등학교 나왔으면 잘 나왔다 그랬잖아 왜. 고등학교 댕겨서 나왔으니까.
- 삼형제였어요, 삼남매?
우리가? 삼남매.
- 위에는요?
위에는 없어.
- 제일 맏이에요?
아니, 내가 둘째야. 맏언니 하나 동생 하나 삼형제. 아니 동생하나는 데리고 나갔다가 또 죽고. 피난 나가서 남동생. 그래 삼형제 딸 삼형제 남았어. 하나는 양평 살고 하나는 인제 덕산리라는 데 살고.
- 딸만 셋 남았네요?
예, 딸만 셋. 그래 집안이 망했어. 그러는 바람에.
- 지금 자녀들은?
시방. 시방은 내가 여기 나와 가지고 7남매 낳았지.
- 몇 살에 결혼하셨는데요?
열일곱에.
- 열일곱, 빨리 하셨네요?
그래가지고 20살부터 낳은 게 7남매 낳았어. 그래도 다 출가시키고. 그래 야가 막내아들 손주. 그래, 야 데리고 살아요.
- 그 일제시대 때 기억나요?
나지요.
- 그때 얘기 좀 해주세요?
일제시대 때 뭐 아주 저게 몸빼만 입고 당기게 하더라고. 치마도 못 입게 하고. 그러고 뭐 사방서 그렇게 하고선 살았어. 엄청 엄했어. 그쪽엔. 이북에선 엄청 엄해. 이북서 나와 가지고. 그러니 이북 땅이지 여기가. 이 땅에서 그렇게 우리가 살다. 아이고, 말도 못해. 엄청 고통 겪었어.
- 어떤 고통?
아주 참 별의 별. 아저씨도 여기 계시지만. 농사지어 혼자 못 먹어. 갖다 바치라 지랄해서.
- 어떻게 바쳤어요?
그냥 가져갔지 지가.
- 얼마나요?
얼마나 마나 그 먹을 거만 남기고 다 가져 갖지 뭐. 우리 농사지어가지고 싹 넘어갔어. 땅이고 뭐 등기장이고 뭐 싹 넘어갔댔어. 그땐 뭐 있으면 다 가져가. 나처럼 고생한 사람 없어. 진짜로.
- 그땐 지주였어요?
내가 지주가 아니지. 할아버지 할머니 어머이 아버지 삼촌이 있는데.
그래 우리 큰아들이 그랬어. 아이고, 저게 우리 어머이 고생 많이 했다고 내가 성공해 가지고 아주 책을 하나 내준다고, 크게 하나 내 준다고 그러더니, 그만 교통사고로 죽었어. 얼마 전에. 우리 큰 아들이. 그래 아들하나 낳아놓고 아들 둘을 낳아놓고 갔구만. 그러니 작은 것들이야 아무 것도 모르지 뭐. 내가 고생했는지 뭐 했는지 모르지 뭐. 큰 거 맏아들이 그러더니, 내가 고생한 이야기 죽 하면, 다 적어놓더라고 그렇게. 그런데 그거 가고나니 뭐뭐. 없지 뭐. 고생 말도 못했어 난 아주. 고생 나처럼 한 사람 없을 거야.
- 일제시대 때 학교를 못 다녔겠네요?
못 다녔지. 학교라는 건 문턱에도 못 가봤어. 거 동네서 무슨 야학들 한다고 하면 어머이 가면 뒤에 따라가 앉았다 오고 그랬어.
- 인민군이 와서 어떻게 했어요?
아휴 인민군들이 그때 싸움이 붙어가지고. 저기 가매소지요. 아저씨도 알지요. 가매소서 여기 헌병대 싸움이 붙어가지고. 아주 말도 못했어 그때. 많이 죽었지 여기 사람도 많이 죽고 거기서 나온 사람도 많이 죽고. 그러고 나서 전쟁이 났었지. 가매소서. 그런데 인민군 하나가 우리 집에 밥 먹으러 오더니만 그만 쓰러져 죽었어. 너무 많이 맞았던가봐. 그래 밭 밑에다 파묻고. 댕겼는데. 거기만 당기면 무서워 못 댕기겠더라고. 사람 파묻은 걸 봐서. 그러다가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어. 다 이렇게 변경이 돼 가지고. 그렇게 어떻게 동네서 살다가 피난을 나가가지고 여기 군대가 막 들어오니까 인제. 그래 나가가지고 사는 게 고생도 많이 했지. 열네 살에 나갔으니까 인제. 그래 가가지고 피난해가지고 여기 들어왔는데. 그래 여기 들어와 사는데 참 이렇게 살아.
- 전쟁 나기 전에 인민군이 들어왔잖아요, 들어와서 어떻게 했어요? 인민군들이.
아이고, 얼마나 뭐 무섭지 뭐. 그냥 밥해 달라 그러고 뭐. 배가고프니 그래 밥해 먹고 자지도 않아. 그래 산으로 올라가고 올라가고. 내가 조그마해서 보니까. 그래도 우리 어머이 아버지 할아버지 할머니가 부자로 살았어. 우리가 그렇게 부자로 살았어. 그렇게 반동이라고 아주 내 몰려가지고 몰살을 했어요. 우리는 아주.
- 어머니 아버지 데려가서 어떻게 했어요?
총살시켰지. 그럼. 밤에 와서 데리고 가더라고. 그러니 내가 14살이니 꾀가 말짱하지 뭐. 아이고, 밤에 뭐 우당탕탕탕해서 쫓아 나와 보니 우리 할머이 할아버지 어머이 아버지 삼촌 다섯이 삥 둘러 앉혀가지고 뒤로 손을 묶어 놨더라고. 그러더니 날 부르더니 나도 손을 묶더라고 이렇게. 그래 어머이 아버지하고 손을 묶고 앉았지. 그 다음에 애들은 우리 젖먹이가 조그마한 게 하나 있었지. 그리고 네 살 먹은 머슴애 있지. 그리고 양평 간 애가 그때 아홉 살 먹었지. 그래가지고 서이서 자는데. 그래가지고 내가 문밖까지 나가는데. 이놈의 애들이 막 깨어 운거야. 내가 나가다 보니. 그래 나갔지요. 줄래줄래. 나가다 보니. 애들이 막 울더니만, 내가 그랬지. 아이고, 저 애들을 어떡해 어떡해하고 그러니. 우리 어머니가 이따가 우리 저 큰 애만 살려달라고. 저 애들은 누가 건사를 하냐고. 저 애들 다 깼는데 어떻게 하냐고. 사정을 하더라고. 이렇게. 저 큰 애만 좀 살려달라고. 그러니까는 참 나를 내 손을 풀어 놓더라고. 그래가지고 나는 엄마한테 따라간다고 손으로 휘잡으니까, 엄마가 발길로 팍 차더라고. 그런데 내가 쓰러지는 바람에 일어나 보니 어디로 간지 없더라고. 그래 집에 들어와 가지고 애들을 하나는 업고 하나는 붙잡고 이러고 밤새껏 울었어. 서이 다. 그래 새벽녘이 돼서 아주 막 뭐 들이닥치더라고. 그런 걸 가지고 어떻게 지게에다 파묻었는지 어땠는지. 그러고 뭐 다 들어온 거야. 우리 집에 쳐들어온 거야.
- 인민군들이?
인민군대도 아니야. 그 동네 빨갱이들. 그럼. 그래가지고 주방에도 그때 낯은 몰라 그래가지고 들어오더니만 막 뒤지면서 등기장이고 돈이고 뭐고 다 꺼내. 광에 들어가 쌀자루 뭐 막 세어서 다 적어 이렇게. 치부책을 갖고 와서. 다 꺼내놓고 우리 서이가 먹으라고 세 가마를 주더라고. 좁쌀하고 콩하고 인제 그래 세 가마를 주면서 죽겠으면 죽고 모른데. 그래 어떡해. 그걸 가지고. 큰집에가 그 밑에 있는데. 큰집에 가니 그 이튿날 큰아버지가 와서 데려 가더라고. 그래 거기 가있는데 애가 병이 나서. 그 젖 먹든 기 젖을 못 먹으니 죽더라고. 그래 내가 끓어 안고 막 드러누워 자다보니까 애가 죽었어. 그래 할아버지가 가서 파묻고 왔더라고. 아휴 말도 못해 내 고생한 얘기를 진짜 너무했어.
- 어머니, 아버지 시체 못 찾았어요?
있어요. 근데 시체가 여기 동개골 어귀에다 묻었는데. 그렇게 저기 마당을 닦았더라고. 여기 시방 부대 있잖아요. 부대가 있어 마당을 죄 닦아 암만 가 봐도 모르겠어.
- 그럼 묘가 없어요?
묘도 없어졌지 뭐. 아주 뼈다귀조차도 없어. 다 밀어서 제쳐서.
- 그럼 묘 주인도 안 찾고 뭉개 버렸어요?
그럼요. 그래 가지고 어떻게 됐는지 다 밀어제쳤어. 몰라 시방은 어디가 있는지. 그래도 그 질에 댕기며 내가 만날 거기만 쳐다보고 다니지. 그래 피난 나갔다 들어와 가지고 내가 한 번 가 찾아봤어 거길. 묘 있는 데를. 그러더니만 이렇게 내가 기억이 나더라고. 거기 내가 조그마해서 가서 이렇게 데려다보고 울고 하던 적이 나. 가보니 있더라고. 그런데 군인들이 싹 들어와서 싹 밀어 붙인 거야. 허허. 운동장을 만들어 버렸지. 아주 이렇게 마당을 닦았어 시방. 거개 아주 없어졌어. 그래 내가 하도 억울해서는 부대에 들어가서는 여기매 왜 이렇냐고. 우리 어머이 아버지 여기 묻었는데 왜 밀었냐 그러니까. 모른대. 그 사람들이 자꾸 이동해 가고 오고 그러니. 그래 모르겠다 그러더라고. 그러니 그만이지 뭐. 어떡해.
- 그럼 14살 때 막내는 안고 죽고?
안고 죽고 또 9살, 4살 먹은 거는 피난 나가 원주가 죽고. 머스맨데 갸가. 그리고 9살 먹은 거는 저 양평 가서 살아 시방. 난 여기서 살고. 그래 어떻게 돼서 그 뼈다귀 다 밀어서 그런지. 언니도 중풍 났지요. 동생도 여 허리수술해서 꼼짝도 못해요. 우리 동생도. 그러더니 나도 시방 다리가 아파요. 먼데 못 가. 집구석에서만 이러고 애나 봐주지.
- 천도재를 한 번 지내주지?
그러니 제사를 내가 계속 지내다가. 언니도 병신 됐지 동생도 그렇지 에이 이건 제사를 지내도 이렇게 못 살게 하는 거 내가 안 지낸다고 그랬어. 그냥 밀어 붙이고 말았어. 나 혼자 지내면 뭐해. 누가 보러 오는 사람도 없지요.
- 그때 인민군 시절에 지방 빨갱이들 대단했어요?
대단했지요. 무서워요.
- 어떻게요?
그래 그렇게 없는 거를 막 찾아내서 죽이고 그랬죠. 그래서 다 죽었어. 우리 어머이 아버지. 그래 제삿날은 아나, 그러니 몇 해 지냈어. 지내다가 하도 동생도 못 오지요, 언니도 못 오지. 나 혼자 지내려니 진짜 애들 보기에도 그렇고 그래. 그리고 외손봉사(外孫奉祀)는 안 한다고 그러더라고. 남들도 그래. 그러니 그만둬라. 안 지내지 뭐.
그래 하루는 사위가 저기 있는데. 거기매 나물을 뜯으러 가자고 작년에도 그렇게 해서 그래 갔는데. 세상에 거기 가니 그렇게 눈물이 쏟아져. 나물이고 뭐고 앉아 헤매고 울다 그냥 왔어 내가. 하도 억울해서. 묘라도 있으면 가서 좋잖아요. 묘도 없지 아무것도 없으니. 그래 앉아 울다 보니 우리 사우가 아이고 이젠 산도 50년이 흐르고, 인제 그렇게 60년이 흘렀는데 이제 울면 뭐하냐고. 가시자고. 나물이고 뭐고 가시자고. 그렇게 하고 오더라고. 아무것도 못해 가지고 그냥 왔어요. 아이고, 그런 날에, 억울하게 그랬어 나는.
- 그럼 지방 빨갱이는 어떤 사람들이었어요?
모르지요. 어떤 놈들이 와 밤에 와서 뒤집어쓰고 그러니. 누가 알어요.
- 머리에 쓰고 왔어요?
그럼요. 다 쓰고, 이 총 끝에다 칼을 번들번들 한 걸 이런 걸 끼워 가지고 하나씩 다 메고 왔더라고. 그래 거기서 말 한마디 잘못하면 죽어. 그래 부모들은 그래 돌아가셨지만 나는 아주. 시방 저 다리 꼬댕이 그 부대 있는데. 거기매 뭐 보안댄가 무슨 지랄인가 있는데. 거기 맨날 오라는 거야, 조사받으러. 그래 무조건 모른다고 그랬어 내가. 알면서도 모른다고 그랬어. 몇 명 왔다하는 것도 모른다. 아는 사람이 왔다하는 것도 모른다. 무조건 모른다고 하니 죽이진 않더라고. 그래서 살아났어.
- 그러고 나서는 어떻게 됐어요?
그래 놓고 그놈들도 다 들어가고 나는 거기서 떨어져가지고. 아이 가재 자꾸 그리로 들어가래.
- 북한으로?
어, 들어가래. 아이 난 죽어도 아파서 못 간다고 아주 늘어졌지. 난 죽어도 못 간다고. 여기서 죽어도 여기다 파묻어달라고. 그냥 그랬더니. 말짱 거기 있는 사람들 다 죽여 버리고 그냥 이렇게 실어내더라고. 다 들여 몰아. 염병이 그땐 또 그렇게 무서워 염병이. 그저 말 한마디만 잘 못하면 그 자리에서 쏴 죽이는 거야.
- 인민군이 그런 게 아니라 지방빨갱이들이 그런 거예요?
인민군들도 나오고, 지방빨갱이들도 그러고. 그쪽 편이지 다. 그래가지고 들어가래 자꾸. 그런데 아파서 들어갈 수가 있어. 나는 죽어도 못 가겠다고 늘어졌더니, 그래 놔두고. 여느 사람만 들여 몰고. 우리는 소가 꽤 많았어. 소도 갱변에다 갖다 놓고 막 쏴서 지들이 잡아먹더라고. 잡아먹었는지 어쩐지 그러더라고. 그러고 들어갔어. 그러고 나와서 이쪽 아군들이 막 들어오더라고. 그래서 실어내서 저 원주 귀래라는데 가서 살았어. 귀래면. 거기 가서 좁은 막사를, 요래요래 천막을 치고 구석구석에다가 인제 주더라고. 거기서 피난을 해가지고 그래도 거기 갔다가 여기와 앉았어. 내가.
- 피난 갈 때 미군이 실어갔어요?
미군인지 한국군인지 와서 싣고 가더라고. 미군도 왔다 갔다 하더라고.
- 여기 있는 주민들 다?
네 피난시켜 주더라고. 그래 이 패들 우리 다 같이 가서 피난 갔지. 귀래면에 갔다가.
- 갔다가 언제 돌아 왔어요?
꽤 오래 있었어요. 꽤 오래 있었지요. 우리가. 그때 들어가라 해서 우리가 여기 들어왔지요. (여기 수복된 다음에 - 심병관). 그래 가지고 고생도 많이 했어요.
- 피난살이 할 땐 어떻게 견뎠어요?
그냥 뭐 배급을 주던데. 그래도. 허허허. 보리쌀도 주고 밀쌀도 주고, 그거 줘서 그거 가지고 죽쒀먹고, 모자라면 죽쒀먹고, 나물 뜯어다가 죽쒀먹고 이러고 살았어.
- 천막 같은 거 쳐놓고, 단체로 여러 사람이?
이렇게 크게 천막을 치고 구석구석에 이렇게 있었어. 그래 가지고 그렇게 해준 게 고맙더라고. 그러니까 살았지.
그 다음에 국군이 여기 밀고 들어와서.
그래 가지고 들어와 가주고선. 그래가지고 들어가라 그러니. 들어오니 뭐 있어 아무것도 없잖아 살림이 있어 뭐있어.
- 전쟁 다 끝나고?
다 끝나고. 그래 들어와 가지고 인제 와서 우리 언니네가 있었어. 언니가 그래도 나이 먹은 게. 그래 거기 사랑에 살다가 있다가, 여기 들어와서 인제 이렇게 앉아있지.
- 그 언니는 누구인데요?
인제 덕산에 있어.
- 몇 촌이에요?
친언니지. 친언니가 말도 못하고 이 중풍이 나서 아무것도 몰라.
- 그럼 옛날에 시집 갔었네요?
우리 언니는 시집가고. 나는 동생하고 이래 뛰어다니다가 그렇게. 우리 언니는 시방 중풍 나고 맨날 그러고 있어. 아들네가 착해서 그래도 편안히 있어.
- 여기 14살 때 그 거할 때 언니한테 가지 그랬어요?
아이고, 언니도 살기 힘든데 어디 거기 가서 밥 얻어먹게. 그러니까 내 몸은 아무 데고 갱변에서도 자다가 그러고. 이래 귀래 나가서 천막을 쳤더라고. 그래 그 속에 가 있었지. 시상에 그렇게 고생하고 살았으니.
- 여기 들어왔잖아요. 들어와서는 어떻게 살았어요?
들어오니 우리 언니가 또 무슨 야네(손자) 할아버지한테 중신을 했어. 그때 19인지 그랬어. 18이구만. 그래서 시집을 준다고 주대. 이 집도 아무것도 없어. 숟가락도 하나 없어. 오니까는. 허이, 군인이었다고 왔는데. 숟가락도 하나 없으니, 인제 가서 숟가락을 얻어다 먹었으면 다 알지. 시어머니 하나 있고. 신랑 하나 있고 그렇게. 그래도 그놈의 살림을 내가 이어 나갔어. 여태까지. 그러니 이 아저씨도 알지만 우리 나그네가 일을 안 해. 군인 갔다 와서. 맨날 술만 먹으러 댕겨. 그저 맨날 술만 먹으러 다니며 일을 안 해. 일을 해야 살잖아 사람이. 그래도 뭐 직업을 가져야 사는데 안 해. 그러다보니 내가 나가 농사를 짓는다, 애를 8남매 낳았는데 하나 죽어서 7남매 됐지. 8남매를 낳아 놓은 거를 그거 다 건사하며 내가 일을 해 먹고 살았어. 남의 품팔이를 하니. 그리고 땅 좀 여기 들어와 조금 찾아가지고 그것도 붙이며, 이래 가지고 살았어.
- 그러면 옛날 땅을 못 찾았어요?
조금 찾았어요. 내가 그래도 돌아댕기며, 할머니(시어머니)가 그래도 어디 잔치 보러 가면 좇아가서. 내가 그때 그 붙이는 집에 가서 인제 찾자고 그래 하다보면 오더라고. 그래 그걸 알고 쫓아다니며 내가 우리 동네 우리 아버지 할아버지 친구분들한테 사정을 했더니만. 그래도 이래 도장을 찍어서 찾았어. 그래가지고 논이 찾아야 얼마 안 돼. 그래가지고 참 애들 그렇게 키우며 사는 게.
시방은 아주 큰 고통이야 우리 막내 데리고 있는 게. 그게 땅 팔아가지고 춘천 병원에 다니는데 시방 걱정스러워 죽겠어.
- 땅 다 못 찾았어요?
못 찾았지. 다 못 찾았어. 그래 뭐 이게 증명을 해줘야 찾는데 그거 안 해주면 도장 안 찍어주면 못 찾아.
- 등기가 없으니까?
그래 등기가 없어서. 등기가 아주 없으니까. 그 사람 땅이라고 도장을 찍어줘야 찾아요, 그때는. 그래도 할아버지 친구들이 많이 봐줬어. 그래서 조금 찾아가지고, 애 새끼들 먹여 살리며 이 만큼 살게 됐어 내가.
- 그때 그 염병사건은 뭐에요?
전쟁하는 거 보기만 했지.
- 주변에는 염병 걸린 사람 없었어요?
그 게요. 우리 집 식구가 다 들어가서 죽고. 우리 작은 어머니하고 다 죽었어요. 염병이 들어가지고. 우리 큰 집이 홀딱 망했어 아주, 염병이 들어가지고. 그래도 나는 하도 들었다 놨다 하더니만 그 저 살려주더라고 그 염병이. 그때 내가 죽어야 내가 편해. 살아도 산 것이 아니지. 한 집안에 한 명은 살려줬고. 그래가지고 내가 살아서 이렇게 여태까지 나온 게. 살기 힘들어 너무 힘들어. 그래 내가 어떤 때는 살기 힘들면, 에휴 그때 염병하다 죽었으면 어머이 아버지 혼이나 따라가 고생은 안했지. 영감보고 맨날 그러고 울었어 내가. 에휴 너무 고생스러워서 그래 내가. 뭐 있어야지 살지. 애들은 거듭 낳아 놓고.
- 중공군 같은 건 봤어요?
중공군도 봤지.
- 어땠어요?
에이, 사람 같지도 않지 뭐 중공군은. 저기 뭐. 그 사람들이 들어 올 적에 일본사람들도 그때 숱하게 나왔댔어.
- 일본 사람 들이요?
그 일본사람들도 나와서 그 볶아치다가 들어가고 그랬어.
- 그 얘기 좀 해주세요?
그래 나와 가지고 저 뭐이 돌아다니면서 말썽을 일으키더니만. 봤을 거예요. 이 아저씨도.
- 언제요?
우리 거기 살을 때. 동개골 살을 때.
- 일정 때?
일제시대 땐 많이 나오지 뭐. 말이 통해? 일본사람들이 잘 떠들잖아. 조그마한 게 그냥 보기만 했지 뭐. 그렇게 피해는 안줬는데, 와서 설치고 돌아가더라고. 피해는 안 줬는데. 아이고, 일본놈들 같으니라고. 난 진짜 우리가 거기서 고생을 하고 살았지만 너무 심했어. 아주 너무 심했어. 남들이. 시방도 이북서 이렇게 텔레비 보면, 아이고 너들이 우리 식구 다 잡아 가더니만 그래 그러는 구나.
- 중공군들은 와서 어떻게 했어요?
중공군들은 뭐 솰라솰라 하면서 돌아댕기니까 무섭더라고, 그래서 졌테도 못 갔어. 솰라 거리고 돌아 댕기니. 떼거리로 돌아댕기면서 얼굴이 시커먼 것들이 돌아다니니까.
- 총도 안 가지고 다닌다면서요?
안가지고 다녀 그 사람들은. 총도 10명 20명에 하나 꼴이라고. 총도 없어. 그냥 돌아댕겨. 그랬지 뭐 열 몇 살인데. 참 힘들어. 그래도 한국 군인들이 들어와서 실어다가 밥을 먹여 살려 이만큼 살았지. 허허.
- 전쟁 중에는 그 상황을 모르겠네요?
모르지, 몰라. 피난 갔다 와서.
- 치안대 이런 거 들어봤어요?
얘기만 들었어. 치안대 소리는.
- 내무서는?
그 내무서도 얘기만 들었지.
- 그때 경험은 안하고 요?
예. 아이고 아이고 나는 아주 한참 해도. 어딘지 이름도 몰라. 거 다리골 건너서. 그렇게 날 불러가는 거야. 우리 큰 집 삼촌 그때 그 삼촌은 20살이고, 나는 14살이었지. 그래 삼촌이 댕기더니만 자꾸 총질을 뭐 이렇게 하니 놀래가지고. 그만 영아(嬰兒)가 됐어. 그래 어디 나가 죽었는지 몰라요. 피난 나갔다. 그냥 멍하니 이렇게 앉았어. 하도 이렇게 총질을 해서 혼이 빠져가지고. 그래 밥도 안 먹고 이렇게 앉았더니 그냥 어디로 스스로 나갔더니. 내가 찾을 재간이 있나 뭐. 그래 어디 나가 죽어서 찾지도 못하고 잊어먹고 말았어.
- 그 삼촌이 누구에요?
우리 큰집삼촌. 우리 친 삼촌은 죽고. 부모도 돌아가서 죽고. 우리 큰집 삼촌. 그 우리 때문에 조사받으러 댕기다가. 그렇게. 나하고 꼭 둘을 불러가지고 가. 그래 나는 그래도 에이 죽지 않으면 살겠지 하고 눈깔을 똑바로 뜨고 대들었지. 동생들이 내가 죽으면 그 어떻게 하겠어. 그래서 아주 모른다고만 내밀었어. 그러니 죽이진 않더라고. 거 뭐 안다고만 하면 금방 싹 죽여. 그러면 뒤가 있다고. 금방 싹 죽여.
- 그러면 조사하는 사람들은 누구에요?
모르지 뭐. 누군지. 그러고 와서 그러니. 누군지도 모르고. 거기서 그렇게 차리고 있더라고. 그런데 이제 밥은 이래 보리밥을 해서 콩나물국에다 한 숟가락 놔서 주고. 그리고 조사하고.
- 조사할 때 뭘 물어요?
아 뭐 어머이 아버지가 어떻게 죽었느냐. 아 어떻게 살았느냐 그런 걸 물어봐. 몇이서 와서 그랬느냐. 기억나느냐. 그런 걸 맨날 그런 거만 물어보니.
- 옛날에 어떻게 살았는지도 물어봐요?
뭐, 어떻게 살았는지. 우리가 거기서 부자로 살았어요. 진짜 동개골에서는 부자로 살았는데. 그렇게 그 재산 압수하느라고. 그래서 그런 거지 뭐. 아휴 그러니 잘 살 필요도 없어. 거기선. 여기선 맨날 이렇게 먹어가며 잘살지만. 거긴 잘살아봤자 죽여 버려. 그래서 안 돼.
- 국군이 들어오기 전까진 여기서 살았잖아요.
살았죠. 그래 그걸 먹고 어른들 다 갖다 죽이고. 나를 그거 거 세 가마, 좁쌀 한 가마 쌀 한 가마 주고 큰집으로 가래. 집도 다 뺏고. 그래서 큰 집에 가 들어앉았으니. 진짜 내가 꾀가 말짱해서 14살에 이런 거 저런 것을 참 모른다곤 하지만 다 알지 뭐. 아휴, 그거 그렇게 먹고. 큰집도 어렵게 살아. 그래 우리가 맨날 쌀을 주고 그랬는데. 그렇고. 그거 같이 먹고 떨어지니. 산 기 뭐. 그러고 그 뭐 여름에 또 난리가 난거야. 여름에 5월 달에 감자 꽃 하얗게 피는 데 가라고 내쫓더라고. 그래서 나갔어요.
- 원주로 가라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지. 군인들 아군들이 들어와 그저 막 실어내더라고. 차에다 막 실어내더라고. 여기 아군들이 막 밀고 들어오며, 우리를 살려 내려고 실어 나르는 거지. 그래 이리도 못 나가고 저 운봉으로 그리로 해 돌아 나갔어 우리는. 아주 무슨 군인들 차를 타고 나갔어. 저 귀래에 갔다 내려놓더라고. 저 원주에 흥업 갔다가 갱변에서 또 며칠째 잤어요. 그 흥업 개울에서 자다가 갔어요. 개울에서 아무 데서나 그냥 잤어요. 그래 사람이 많지 동네사람들 있으니. 그러고 자고 또 그 다음에 군인이 실어 나르더라고. 거기다 갖다 그렇게 포장을 쳐 놓은 데다가 갖다 놓더라고. 그렇게 살다 들어와 가지고. 그래도 이 양씨네 씨를 많이 퍼트렸어. 하하하. 그래서 내 생일날 이 방이 폭 터져. 7남매나 모였더니, 이 애들 있지. 사우들 있지 하니. 아주 이 방이 폭 터져 앉을 수가 없어.
- 그때 지방 빨갱이들은 다 도망갔겠네요?
들어가고 죽고 뭐. 들어갔지. 남으면 죽지 뭐. 그러니 다 들어갔지.
- 지방빨갱이는 어떤 사람들이었어요?
지방빨갱이야 뭐 동네서 살다가 우리가 잘 사니까 그걸 뺏어가지고 먹으려고 그랬겠지 뭐. 그러니 얼굴에다 뭐를 싸매고 와서 그랬지. 뭐 땅도 부치고 하던 사람들이지 뭐.
- 얼굴을 가리니까 누군지 모르겠네요?
모르지. 밤에 와서 그러니까. 아휴 총을 이렇게 해가지고 칼을 큰 걸 꼽아가지고 와서 휘두르는 게. 간이 떨어지지 뭐. 어린 게 뭐. 그래도 내가 참 억세 빠지다 그래 모두. 허허. 진짜 내가 억세 빠지고 독하고 그렇대.
- 미군들이 와서는 피해 없었어요?
미군들이 와서는 안 그러더라고요. 그냥 실어 나르더라고. 아휴, 아휴 그렇게 살았어.
- 그 뭐 다른 얘기들 있으면 좀 해주세요.
다른 얘기 뭐 있나. 저 아저씨(심병관)가 나보다 더 잘 알지. 아이고, 여기서 살던 사람들 다 힘들었어. 다 힘들었어. 살기가. 그때도 한 번은 미군 하나하고 한국군인지 뭐 둘이 와서 나더러 물어보더라고.
- 언제요?
한 삼년 넘었어.
- 유해발굴 하려고요?
그 이제 찾으려고. 그래 뭐 내가 묻는 걸 봤어야 알려드리지. 그래서 못 알려 드렸지.
- 피해 그런 건 못 봤어요?
못 봤어. 혼자서만 이렇게.
-수복되고 나서는 바로 들어왔어요?
수복돼도 나는 저 인제 있다가 오래돼서 들어왔어요. 여기에. 들어가게 해야지. 그때도. 맘대로 못 들어와요. 증명을 내야 들어와. 그래서 인제 언니네 사랑에 왔으니 그러다가 하도 애들은 있고 굶어죽겠으니 어떡해. 군단까지 좇아갔어. 내가 아주. 군단장까지 좇아가서 살려달라고 볶아쳤더니, 그래서 그러더니 그 보안대장한테 갖다 연락을 해가지고 그래 올려 밟으라고 하더라고. 그래 내려 밟으면 안 된대. 올려 밟아야 된대. 하하하. 그래 보안대장에게 또 찾아가서 사정을 했더니. 가서 나 좀 살려 달라고. 애들은 서이나 되고 굶어죽겠다고. 땅 한쪽도 이렇게 찾아놓고 못 들어가니 어떡하냐고 그랬더니. 증명을. 이렇게 교환할 적에. 그때 그 동네 사람들 여기서. 그래서 와서 먼저 들어오지 말고 끝판에 오래 날. 그래서 끝판에 가서 그렇다니까. 벌써 얼굴을 보더니 알던데 날. 그러면서 내 주더라고. 그것을 증명을.
- 그때 16살 짜리가요?
아니요. 그 땐 애들 낳았으니까 20살 때. 그래서 그걸 내줘서 그 다음엔 맘대로 댕기고 농사도하고 그랬어. 그래 하도 내가 가을에 농사를 지어서 그게 너무 고마워서. 그래 와서 증명 내줘서 농사를 지었어요. 그렇잖으면 못해요 내쫓았어. 그래서 내가 쌀을 두 말을 이고 찾아가서 주고 왔어. 그랬더니, 아이고 이걸 왜 가져왔냐고 그러더라고. 하도 고맙잖아. 그래서 애들을 옷도 시커먼 거 입혀가지고 데려갔는데 그 옷을 겉옷을 싸주던데 가서 애들 입히라고. 그래 옷도 다 얻어 가지고 오고. 군대에서요. 그래 군단이 저 신남 거기 있었어요. 그래 거기매를 찾아가봤어요.
- 관대리요?
예, 관대리요. 아주 보초를 서고 못 들어가게 했어요.
- 어떻게 들어갔어요?
나 좀 나와 면회 좀 하자고 그랬지요. 나 안다고 말이야. 그랬더니, 여자가 나왔더라고. 남자도 또 좇아 나왔더라고. 그래가지고 면회를 했지. 그랬더니, 이렇게 하시는 게 아니고, 순서를 올려 밟으래. 내려 밟으면 안 되니까. 우리가 이걸 위에서 자꾸만 내려오면 안 되니까. 올려 밟으면 해 드린다고. 그러고 그렇게 해서 이리로 들어왔지.
- 고생 많이 했네요?
아휴, 고생이나 마나 눈물이 쏟아져 시방도. 그러니 시방 애들이 잘 돼야 하는데. 글쎄 우리 애가 아프고 농사를 빚을 지고 시방 그래서 너무 안타까워 죽겠어. 정말.
- 말씀 고맙습니다.
예예. 그렇게 살았어.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