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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이야기 스크랩 풀·꽃 이름과 풀·꽃에 얽힌 전설
토방(윤정귀) 추천 0 조회 68 08.09.17 17:2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풀·꽃 이름과 풀·꽃에 얽힌 전설

가녀린 보라색이 돋보이는 제비꽃이다. 모양과 빛깔이 제비를 닮아서일까. 아니면 봄소식을 제일 먼저 알려와서일까. 이 꽃은 이른 봄 갓 부화된 병아리처럼 귀엽다고 하여 병아리꽃, 어린 잎은 나물로 먹기 때문에 외나물이라고도 불렀다. 또 꽃 모양새가 씨름할 때 장수 같다고 하여 씨름꽃 또는 장수꽃(강원도), 그 외 봉기풀(함경도)이라고도 했으니 이런 이름은 제비 같은 이 꽃에게는 무례한 이름이 아닐까?

오랑케꽃 -이름이 그렇다. 오랑캐는 옛날 두만강 근방에 살던 겨레들(특히 여진족)을 가리키지만 중화(中華)에 대해 주변에 살던 미개한 종족을 멸시하는 말로 사용되면서 부정적 어휘로 쓰인다. 오랑캐라는 이름이 붙은 연유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조선의 각 고을에서 이 꽃이 필 때 북쪽의 오랑캐 무리들이 쳐들어왔다고 해서 붙었다는 설이요, 또 하나는 꽃모양이 머리태를 드린 오랑캐의 뒷모습과 닮았다 하여 그렇다는 것이다. 뒤쪽 설과 관련된 시도 있다.긴 세월을 오랑캐와의 싸움에 살았다는 우리의 조상들이 너를 불러 ‘오랑캐꽃’이라 했으니 어찌 보면 너의 뒷모양이 머리태를 드리운 오랑캐의 뒷머리와도 같은 까닭이라 전한다.

패랭이꽃을 보면, 패랭이를 닮았다고 패랭이꽃이란다. 패랭이는 댓개비로 엮어 만든, 신분이 낮은 사람이나 상제가 쓰던 갓이다. 갓이 양반들의 정장 모자(정관:政冠)라면 패랭이는 상민이나 천민의 정장 모자였다. ‘패랭이에 숟가락 꽂고 산다’고 하여 세간이 아주 보잘 것 없음을 나타내는 속담에도 들어갈 만큼 가난과 하층민을 연상시키는 갓이지만 앙증맞은 귀여움이 있다. 이 꽃에 대해 “꽃대가 연약한데도 여러 송이의 꽃이 피어 있는 모습은 여름에 작은 소녀가 얼굴을 붉히고 풀밭에 앉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묘사하기도 했다. 이 풀은 너도개미자릿과에 딸린 여러해살이풀로 온몸이 희부옇고 줄기는 모여 나며 높이 30∼60 cm, 잎은 바소꼴(긴 침처럼 생긴 꼴) 또는 실꼴로 마주 난다. 6∼8월에 흰빛, 붉은빛의 여러 가지 꽃이 피는데, 꽃잎은 잘게 째지고 열매(씨앗)는 아주 작아서 약한 바람에도 잘 날린다. 꽃은 ‘구맥’이라 하여 약재로 쓴다. 석죽(石竹)이란 이름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이 외에도 나팔을 닮았다고 나팔꽃, 잎이 수박잎을 닮았다고 수박풀, 줄기에 길게 나 있는 털이 노루의 귀에 난 털과 비슷하다 하여 노루귀, 꽃이 은방울 같다고 은방울꽃, 매 발톱같이 생겼다고 매발톱꽃, 신부 머리에 쓰는 족두리를 연상시키는 족두리풀, 장군들의 투구 같은 투구꽃 등 제 몸값을 하는 이름들이 무수히 많다. 그리고 며느리밑씻개풀, 며느리배꼽풀, 도둑놈의갈고리꽃 등과 같은 해학적인 이름도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해학적이지만 슬픈 전설과 함께 피는 꽃이 있다. 며느리밥풀꽃이 그것이다. 실제 입 안에 밥풀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 꽃은 산 속의 길가에서 잘 자라고 작기 때문에 사람의 발길에 자주 밟힌다고 한다. 사람들에게 자주 밟히는 고난의 꽃이기에 슬픈 전설을 부여했는지 아니면 실제 한 많은 며느리 영혼의 꽃인지 사연인즉은 이렇다.

옛날 어느 산골 마을에 효성이 지극한 아들이 어머니와 살고 있었다. 아들은 어느덧 커서 장가를 들고 며느리를 맞았는데 며느리 또한 효성이 극진했다. 그런데 신방을 꾸민 지 며칠 만에 아들이 이웃 마을에 머슴을 살러 가니 이때부터 시어머니의 며느리 학대가 심해졌다. 빨래를 해오면 더럽다고 내팽개치고 물을 길어 오면 쏟아 버리는 등 놀부 심보 뺨쳤으니, 며느리는 밥도 제대로 못 먹을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시장한 나머지 부엌에서 밥을 급히 먹는데 그만 시어머니에게 들키고 말았다. 여지없이 시어머니의 폭력이 따르고 며느리는 밥풀을 입에 문 채 급체로 죽고 말았다. 그 뒤 며느리 무덤가에 이름 모를 풀들이 많이 자라나 여름이 되면 며느리 입술마냥 붉은 꽃에 밥풀이 든 듯한 형상을 보이는 것이었다. 이때부터 이 꽃을 며느리밥풀꽃이라 불렀다 한다. 하얀 밥풀처럼 보이는 것은 사실은 꽃부리 밑쪽에 있는 두 개의 하얀 무늬이다. 꽃부리는 길이 1.5∼2 ㎝ 정도로 겉에 잔 돌기가 있고 안쪽에는 다세포로 된 털이 있다. 이름은 새애기풀 또는 꽃새애기풀이라고도 부른다. 새로 들어온 며느리를 새애기라고도 하기 때문이다. 갈래도 큰산며느리밥풀꽃, 원산며느리밥풀꽃, 새며느리밥풀, 백두며느리밥풀, 애기며느리밥풀, 큰애기며느리밥풀 등 다양하다. 물론 기본 모양과 꽃 피는 시기는 같다. 먹거리와 관련된 또 다른 식물이 조팝나무이다. 꽃이 핀 모양이 튀긴 좁쌀을 나뭇가지에 붙인 것처럼 보여 조밥나무 또는 조팝나무라고 부른다. 벌들이 많이 날아들어 양봉 농가에 도움을 주기도 하며 뿌리는 한방 약재로도 쓰인다.

할미꽃 전설은 며느리밥풀꽃 전설보다 더 애절해 보인다. 할미꽃은 어렸을 적 할머니의 사랑이 늘 연상되는 친근한 꽃이다. “뒷동산의 할미꽃 호호백발 할미꽃 젊어서도 할미꽃 늙어서도 할미꽃”이란 동요 때문에 더욱 그런지 모르겠다.

옛날 어느 산골 마을에 할머니가 두 손녀를 키우며 살고 있었는데 큰 손녀는 얼굴은 예뻤으나 마음씨가 고약했고, 둘째 손녀는 밉상이었으나 마음씨는 비단결처럼 고왔다. 그런데 둘 다 성장하여 첫째는 이웃 마을 부잣집으로, 둘째는 고개 너머 가난한 집에 시집을 가게 되었다. 둘째가 할머니를 모시겠다고 하였으나 첫째는 할머니 재산을 차지할 욕심으로 자기가 모시겠다고 했다. 그러더니 재산만 정리한 채 곧 모시러 오겠다는 말만 남기고 훌쩍 떠나가 버렸다. 아무리 기다려도 소식이 없자 할머니는 첫째 손녀를 찾아 나섰으나 문전박대만 당하고 작은 손녀 집으로 가는 산길에서 그만 죽고 말았다. 뒤늦게야 이 사실을 알게 된 둘째 손녀는 달려와 할머니를 부둥켜안았으나 할머니는 이미 하늘나라로 간 뒤였다. 둘째 손녀는 할머니를 뒷동산 양지 바른 곳에 묻었는데 이듬해 봄에 할머니 무덤가에 할머니 허리같이 땅으로 굽은 꽃이 피었다. 이때부터 할미꽃이라 불렀다는 이야기이다. 할머니의 한이 서려서일까. 이 할미꽃의 뿌리는 강한 독성이 있어 진통, 지혈 등의 약재로 쓰인다. 옛날 소독 약품이 귀할 때는 재래식 변기 속에 뿌리를 넣어 여름철에 벌레가 생기는 것을 예방하기도 했다. 꽃과 꽃가루에도 독성이 있어 아이들에게는 못 만지게 했다. 예나 지금이나 노인을 박대하는 것은 우리 사회의 가슴 아픈 단면이다. 모시기 싫어하는 것에서부터 자질구레한 것까지. 노인을 구박하는 사람들은 그들도 노인이 된다는 단순한 사실조차 잊은 건 아닐까. 그들에게 할미꽃의 전설을 들려 주고 싶다. 이 전설은 잘난 것 없이 평범해도 마음씨 곱게 살아가는 사람들(동생)을, 화려하게 잘났어도 마음씨 고약한 사람들(언니)과 대비시켜 보여 주고 있다. 물론 얼굴이 예쁘면서 마음씨 고운 사람도 많겠지만 인물값 한다고 괜히 거들먹거리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할미꽃은 꽃이 피고 나서 약 한 달 후면 꽃잎이 떨어진 자리에 암술의 날개가 긴 은발처럼 아래로 축 늘어진다. 며칠이 지나면 늘어졌던 날개는 백발 할아버지가 머리를 풀어헤친 것처럼 하얗고 둥글게 부푼다. 그래서 할아버지 흰 머리칼(백두) 같다고 하여 백두옹이라고도 부른다. 이 밖에 지역에 따라 노고초(老姑草), 호왕사자(胡王使者), 할미씨까비, 가는할미꽃, 조선백두옹, 주리꽃 등으로 불린다. 할미꽃은, 신라 시대의 설총이 꽃을 의인화해 지은 ‘화왕계(花王戒)’에서 충신의 상징으로 나온다. 꽃나라의 왕인 화왕은 처음에는 아름다운 여인인 장미(간신배)에게 마음이 쏠렸으나 점차 머리 센 늙은이인 할미꽃(충신)의 충언을 듣고 마음을 바로잡아 바른 정치를 편다는 얘기이다. 왕의 생활 태도를 바꾸어야 함을 직언하는 백두옹의 당당한 모습을 보면,

어떤 사나이가 베옷에 가죽띠를 두르고 머리는 백발이며, 손에는 지팡이를 들고, 절름거리는 걸음으로 허리를 굽히며 들어와 말했다. “저는 서울 밖 한길가에 사는데, 아래로는 아득한 들경치를 바라보고, 위로는 우뚝 솟아 삐죽삐죽한 산빛이 비꼈습니다. 이름은 백두옹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말씀드리고자 하는 바는, 임금님께서는 좌우에서 온갖 물건을 넉넉히 공급해서 비록 기름진 쌀과 고기로 창자를 채우고, 아름다운 차와 술로 정신을 맑게 하오나, 상자 속에 깊이 간직된 양약으로 원기를 돋우어야 하고, 영사(靈砂)로 독을 제거해야 합니다.

머리가 백발이라는 것은 긴 세월을 청렴하게 살아온 삶을 상징해 주는 것이고 올곧게 살아온 것은 베옷으로 상징되는 소박한 삶과 자연을 배경으로 하는 삶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야말로 진정한 원로이다. 우리나라는 원로다운 원로가 드물다고 하니 백두옹의 충언은 아직도 유효한 듯하다. 냄새에 따른 꽃 이름도 있다.

노루오줌꽃은 여름이 한창일 때 대부분의 산에서 두루 볼 수 있는 꽃이다. 늘씬한 여인처럼 생겼건만 이름은 조금 지저분(?)하다. 기다란 줄기에 실 같은 꽃잎, 꽃잎과 구별할 수 없을 만큼 화사한 수술들이 꽃송이를 이루고 이 꽃송이들이 층층이 세모꼴을 이뤘다. 아마도 자신의 이름에 불만이 많은 꽃을 묻는다면 이 꽃도 손을 번쩍 들 것이다. 자신의 시원스런 몸매도 있는데 왜 하필 냄새로 이름을 지었느냐고 말이다. 이 꽃은 그늘이 드리워지고 주변이 축축한 곳에서 분홍빛 꽃송이를 흐드러지게 피운다. 이 칙칙한 냄새가 아름다운 외모에 대한 배신감으로 작용해 냄새를 기준으로 이름을 지은 것은 아닐까. 비비면 오이 냄새가 나는 오이풀도 있다. 오이풀은 장미과에 딸린 여러해살이풀로 높이 30∼150 cm, 뿌리는 굵고 잎자루가 달린 깃꼴겹잎의 잔잎은 길둥글며, 7∼9월에 붉은 자줏빛 꽃이 이삭 모양으로 핀다. 뿌리는 ‘지유’라 하여 지혈제로 쓰고, 어린잎은 먹는다. 옥시(玉?), 외나물이라고도 한다. 가을에 붉은빛을 띤 흰 꽃이 가지 위에 피고, 축축한 땅에 자라며 오이 냄새가 난다. 향이 백 리까지 간다는 백리향이라는 식물도 있다. 꿀풀과에 딸린 좀나무로 줄기는 덩굴지어 땅으로 기고, 잎은 무딘 바소꼴로 가는 털이 마주 나고, 8∼10월에 불그레한 꽃이 피어 열매는 가을에 어두운 갈색으로 익는다. 화초로 가꾸고, 줄기의 잎은 약제 또는 소스의 원료로 쓰인다. 곁을 스치기만 해도 향긋한 냄새가 나 매운탕을 끓일 때 생선 비린내를 없애는 양념으로도 쓰고 차 재료로도 쓰인다. 이 밖에 꽃의 특성에 따른 이름도 있다. 말 그대로 질기다고 ‘질경이’, 흙이 별로 없는 돌 위에서도 잘 자란다고 ‘돌나물’, 잘못 먹으면 미친 듯이 날뛰다가 목숨을 잃게 되는 ‘미치광이풀’ 등. 사람을 지켜 준 꽃도 있다.

과부의 정절을 지켜 주었다는 과꽃은 엉거시과에 딸린 한해살이풀로 키는 50∼100 cm에 이르고, 잎은 어긋나며 바소꼴이고 거친 톱니가 있는데, 여름철에 가지 끝에 남빛, 붉은빛, 자줏빛, 흰빛 따위의 큰 머리꽃이 핀다. 우리나라 북부와 만주 동남부가 원산지이며 구경거리로 널리 가꾼다. 고의, 당국화, 추금, 추모란, 취국이라고도 한다. 관련 설화를 들어 보면,

옛날 백두산 근처에 추금이라는 과부가 어린 아들과 살고 있었는데, 그 집앞에는 갖가지 꽃이 가득했다. 죽은 남편이 정성스레 가꾼 꽃으로 꽃을 볼 때마다 남편 생각이 간절했다. 그러나 중매쟁이 할멈이 끊임없이 재혼을 설득하자 부인의 마음도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 뜰에 핀 하얀꽃들이 하나둘씩 분홍색으로 변해 가기 시작했다. 이상하여 가만히 살펴보니 죽은 남편이 미소를 지으며 나타났다.

“부인! 내가 다시 돌아왔소.”

둘은 다시 아들과 함께 행복한 삶을 누리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해 백두산 부근에 심한 가뭄이 들어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부인은 남편의 뜻에 따라 만주로 이주하게 되었고 이사할 때 흰색과 분홍색 꽃 한 그루씩을 가지고 갔다. 십여 년이 지난 뒤 장성한 아들은 뒷산에 나무를 하러 갔다가 독사에 물려 죽고 말았다. 슬픔을 잊기 위해 이들 부부는 다시 옛집으로 돌아왔다. 남편의 일을 도와 주러 따라나섰던 어느 날 부인은 벼랑의 꽃을 몹시 갖고 싶어했고 남편은 꽃을 따다 발을 잘못 디뎌 그만 떨어지고 말았다. 그것을 본 부인은 혼절하고 말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엄마! 엄마!” 부르는 소리에 깨어나 보니 꿈이었다. 몹시 허전했다. 뜰에 핀 꽃을 보니 하얀 꽃이 밤새껏 분홍색으로 변해 있었다.

“흔들리는 내 마음을 바로잡기 위해 죽은 남편이 꿈에서나마 일생을 같이하여 주었구나.”하고 반성하며 마음을 굳히고 살아갔다. 장성한 아들은 마침내 무과시험을 보기 위해 한양으로 떠났다. 그때 오랑캐들이 쳐들어와 두목은 추금 부인을 아내로 삼으려 했다. 그런데 끌려간 만주의 두목집이 꿈 속에서 남편과 함께 살던 그 집이 아닌가. 두목이 매일 찾아와 열쇠를 주며 졸랐으나 열쇠를 밖으로 내던져 버렸다. 한편 무과에 급제한 아들은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몇몇 병사와 함께 어머니를 구출해 냈다. 추금 부인은 아들에게, “이 집은 네 아버지가 끝까지 나를 지켜 주신 집이다.”하고 밖에 나가 보니 열쇠가 떨어진 곳, 바로 꿈 속에서 아들을 묻었던 곳에 보라색 꽃이 피어 있었다. 그 꽃 한 포기를 캐어서 가슴에 품고 고향으로 돌아와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이다. 백두산을 중심으로 만주에서 피는 이 꽃이 과부를 지켜 주었다 하여 과꽃이라 부른다. 흰 과꽃은 모정, 분홍 과꽃은 달콤한 꿈, 보랏빛 과꽃은 사랑의 승리라는 꽃말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설화와도 맥이 닿는다. 재혼이 철저히 금지된 조선 시대의 제도를 합리화시켜 주는 전설이긴 하지만 꽃의 특성에 따른 치밀한 구성이 꽃의 아름다움을 더해 준다. 잘못 알고 있거나 헛갈리는 꽃 이름도 많다.

지금은 많이 바로 잡혔지만 한때 한라산에서 자생하는 왕벚꽃을 한국 사람조차 일본 벚꽃(Japanese Chery)으로 안 적이 있었다. 왕벚나무 또는 제주벚나무의 왕벚꽃은 한라산과 전남 해남의 두륜산이 원산지이다. 지역에 따라 앵화(櫻花), 앵(櫻), 대앵도(大櫻桃), 일본앵화, 염정길야행, 큰꽃벚나무 등으로 다양하게 부른다. 이 왕벚꽃에도 전설이 서려 있다.

만수는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효성이 지극한 청년이었다. 기운도 세고 마음도 착해 마을 사람들의 자랑거리였다. 한라산 기슭에서 나무를 해다 생활을 꾸렸지만 홀어머니를 공경하는 것만이 큰 기쁨이었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던 어느 날 어머니는 그만 병석에 눕게 되었다. 만수가 온갖 노력을 다 해도 어머니는 점점 쇠약해졌다. 만수의 지극한 효성을 잘 알고 있던 스님이 만수네 집을 찾아왔다. 간절히 애원하는 만수에게 이렇게 말했다.

“한라산에 가면 백록담 주변에서 풀을 뜯고 있는 사슴이 있을 것이다. 그 사슴의 뿔을 베어다 어머니께 달여드리도록 해라.”

이튿날 새벽, 만수는 한라산을 올라갔다. 해가 중천에 뜰 무렵 백록담에 도착하니 사슴 무리가 보였다. 눈여겨 보니 유난히도 커다란 뿔을 가진 사슴이 보여 가만히 다가가서 잽싸게 덥쳤다. 도망치려고 몸부림치는 사슴은 뿔이 나무에 걸려 툭 부러졌다. 만수는 얼른 뿔을 집어들고 산을 내려오는데 웬 여인의 상냥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이었다.

“여보세요, 도련님!”

만수는 깜짝 놀라 발걸음을 멈추었으나 ‘결코 대답하지 말고 뛰어라’라는 스님의 말이 떠올라 애처로운 여인의 말을 뒤로 하고 급히 집에 도착, 뿔을 달여 어머니께 드렸다. 역시 어머니는 감쪽같이 나아 만수의 근심은 사라졌지만 여인의 애처로운 목소리가 영 맘에 걸려 한라산에 오르니 사슴 무리 옆에 선녀 같은 여인이 앉아 있었다. 아버지 대신에 사슴을 지키고 있다는 여인은 만수의 사연을 듣더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버지도 도련님의 효성을 아시면 노여움을 푸실 것입니다.”하였다. 만수는 여인의 고운 마음씨에 반해 아내가 되어 줄 것을 청했고 여인도 허락했다. 둘은 여인의 집에서 정한수 한 사발로 결혼식을 올리고 달콤한 날들이 지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만수가 잠에서 깨어보니 여인은 간데 없고 나무 옆에 누워 있는 것이 아닌가. 만수는 여인을 찾다가 밤이 되자 할수없이 집으로 내려왔다.

“아이구 얘야, 엿새가 넘도록 아무 소식도 없이 이게 무슨 꼴이냐?”

만수는 자신이 겪은 일을 털어놓을 수도 없어 말수가 줄고 식욕도 없어졌다. 이듬해 봄, 나무를 하러 한라산에 올라갔더니 옛날 그 여인의 집이 있던 자리에 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왕벚꽃이었다. 꽃의 향기를 맡다 깜박 잠이 들었는데 꿈 속에서 아내가 나타났다.

“도련님! 저는 한라산 산신령의 외동딸이었는데 사슴뿔로 인해 당신을 만났고 용기 있는 당신의 아내가 되어 살았습니다. 그러나 사람과 결혼했다 하여 아버지의 노여움을 사 지금 도련님 옆에 있는 나무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만수는 깜짝 놀라 꿈에서 깨어 보니 눈이 부시도록 왕벚꽃이 피어 있었다. 은은한 꽃내음에 만수는 며칠이고 나무 곁을 떠나지 않았지만 여인이 사라졌듯이 꽃도 지고 말았다. 이 꽃의 꽃말이 ‘정신적인 미인’ 또는 ‘보이지 않는 미소’라 하니 전설에 실린 의미가 더욱 안타깝다.

우리 특산물인데 외국이름 에델바이스로 더 많이 알고 있는 것이 솜다리이다. 이 풀은 우리나라 제주도 한라산과 중부 지방의 소백산, 설악산 등 고산지에서 자라는 국화과의 여러해살이풀인데, 요즈음은 등산객들이 마구 꺾어 보기 힘든 풀이 되었다. 한라산이나 설악산의 해발 800 m 이상 되는 곳은 4월이 되어도 눈이 녹지 않고 남아 있는데 이때쯤 꽃대 줄기가 눈 속에서 올라와 꽃이 핀다. 눈 속에서 피지만 겨울꽃은 아니고 봄부터 가을까지 핀다. 또한 에델바이스와 똑같은 것은 아니므로 솜다리로 불러야 한다. 이 이름은 흰 솜털이 많아 붙인 이름으로 추정된다. 솜다리는 생명력이 강해 눈 속을 뚫고 나와 꽃을 피우거나 고산지의 험한 바위틈에서도 자란다. 이런 강인한 생태에 비해 이름은 무척이나 연약해 보인다. 그것은 연노란색의 아름다운 꽃 때문일 것이다. 눈 속을 헤치고 꽃을 피우는 처녀치마, 얼레지, 족도리풀, 당개치 등은 그래서 더 아름답게 보이는지 모르겠다.

우리 고유의 꽃은 아니지만 우리 가슴 깊이 들어와 있는 꽃이 있다. 생태계를 파괴하지 않고 우리에게 이로움을 주는 꽃이라면 그것이 우리 고유의 것이 아니어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이런 꽃들이 채송화, 나팔꽃 그리고 봉숭아 또는 봉선화라 하는 꽃이다. 봉선화 이름의 유래를 규방의 여인과 관련시켜 지은 조선 때 가사인 봉선화가(鳳仙花歌)도 있다. 지은이와 지은 때가 알려지지 않는데, 일설에는 허난설헌이 지었다고 한다. 이 봉선화는 우리와 무척 친한 꽃으로 ‘봉선화 물들이기’라는 민간 풍속이 생겼을 정도이다. 음력 5월경에 아녀자들이 봉선화 꽃과 잎을 짓찧어 손톱에 빨갛게 물을 들이는 것인데 이는 빨간빛은 잡귀를 물리친다는 데서 유래한다. 빨갛게 물들인다고 해서 봉선화에 빨간 꽃만 있는 것은 아니다. 여름철에 붉은 꽃, 흰 꽃 들이 피는데 붉은 꽃으로는 손톱에 물을 들이며, 방추꼴의 열매는 약재로 쓰인다. 원산지는 동남아시아다.

많은 사람들이 헛갈리는 식물 중에 갈대와 억새가 있다. 대개 억새를 갈대로 잘못 아는 경우가 많다. 억새는 벼과에 딸린 여러해살이풀로 줄기는 모여 나며 높이 1∼2 m이고 곧게 자란다. 잎은 좁고 길며, 7∼9월에 이삭이 패어 자줏빛을 띤 노란 잔 꽃이 많이 핀다. 줄기와 잎은 지붕을 이는 데나, 소, 양의 먹이로 사용하며 실생활과는 갈대보다 훨씬 가깝다. 그리고 억새의 잎가에는 날카로운 톱니가 있어서 살짝 스치기만 해도 손을 베어 ‘억새에 손가락(자지) 베었다’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이다. 물론 이 속담은 대수롭지 않은 상대에게 뜻밖의 손해를 보았다는 뜻이다. 갈대는 벼과의 여러해살이풀로 줄기는 곧고 단단하며 속이 비고, 잎은 길고 끝이 뾰족하며, 가을에 솜털이 많은 옅은 잿빛 꽃이 줄기 끝에 핀다. 물가나 축축한 곳에 저절로 자라는데, 줄기는 갈대발, 갈삿갓, 삿자리 따위의 재료로 쓴다. 갈대는 가을에 꽃이 피므로 ‘가을을 알리는 갈대’와 같은 단골 표현이 있을 정도이다. 언젠가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갈대라 해놓고는 억새를 보여 주어 웃음거리가 된 적도 있었다.

한국식물연구회는 “대체로 ‘억새’는 건조한 언덕에 나며, 그 이삭(정확히는 씨의 털)이 하얘서 시를 짓고 싶은 마음을 일으키는 데 반하여, ‘갈대’는 바닷가의 갯벌이나 물가에 나며 그 이삭이 희지 않고 밤색을 띱니다.”라고 지적한 바 있다. 억새가 시적 감흥을 더 일으킨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외형의 아름다움에 기준을 두고 한 말일 것이다. 시적 감흥은 엄격히 말하면 주관적인 것이다. 화려한 꽃보다 보잘것없는 듯한 들꽃에서 더 시적 감흥을 얻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제 시를 조사해 보면 시 제목이나 시 구절 속에 등장하는 시어는 거의 다 갈대이다. 김희보 편저 「한국의 명시」에만 하더라도 ‘갈대’를 직접 제목으로 삼은 시가 한 수 있고, 그 외 본문 구절 속에 갈대가 들어간 것은 꽤 많은데 ‘억새’는 발견하기 어려웠다. 억새를 갈대로 잘못 쓴 것인지 실제 갈대를 소재로 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아래 신경림의 초기 시 ‘갈대’는 갈대의 흔들림을 통해 삶의 밑바닥에 흐르는 슬픔을 노래한 시이다.

이름의 어원을 알 수 없는 꽃 가운데 우리에게 너무도 친근한 도라지꽃도 애절한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옛날 황해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산골 마을에 도라지라고 하는 소녀가, 고아가 된 친척 오빠와 살게 되었다. 무척 정이 들었을 무렵 도라지 부모도 바다에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게 되었다. 도라지 오빠는 두 번 고아가 된 셈이었다. 지나가던 스님이 하염없이 울고 있던 그들을 발견하고 소년의 관상을 보더니,

“얘야, 내가 너의 관상을 보니 운명이 참 기구하구나. 더구나 네가 있는 곳마다 죽음이 따라오니 다 전생의 죄값이다. 너는 공부를 해서 선한 일을 해야겠다.”

하고는 중국 유학을 주선해 주었다. 친척 오빠는 도라지에게 10년 후에 꼭 오겠다고 약속을 하고는 떠났다. 도라지도 스님이 되어 공부를 하면서 기다렸으나 10년이 지나도록 소년은 오지 않았고 소식조차 없었다. 도라지는 오빠를 찾아 나섰고 어느 고개에서 도둑이 된 오빠를 만났으나 대신 잡혀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래도 오빠를 원망하지 않고 기다리던 중 그 도둑 오빠가 잡혀 죽었음을 알게 되었다. 도라지는 오빠를 바다가 바라보이는 산허리에 묻고는 쓰러진 채로 숨을 거두었다. 도라지를 오빠 곁에 묻어 주었는데 이듬해 여름이 올 무렵 도라지 묘에 꽃이 돋아났다. 스님의 장삼처럼 파란 빛깔의 꽃잎과 스님의 고깔처럼 하얀 속잎이 기다랗게 목을 늘이고 누구를 기다리는 듯한 모습이었다. 도라지꽃은 애처로운 아름다움도 있지만 뿌리는 요긴한 먹거리요 약재이기도 하다. 여름 산의 대표적인 들꽃이지만 요즘은 보기가 매우 어렵다. 대신 농가에서 대량으로 재배하고 있다.

충남, 경북 지역을 7월에 여행할 때 도라지밭을 많이 볼 수 있다. 일부러 대량으로 키운 것이어서 전설의 묘미는 느낄 수 없었으나 전설을 생각해서인지 꽃의 물결이 간절한 그리움으로 비쳤다. 그래도 도라지꽃의 본모습은 골짜기에 홀로 핀 모습이 아닐까. 수많은 풀들은 어떤 관계든지 서로 뒤엉켜 살아가고 있다. 그러다 보니 비슷한 풀도 있을 터이다. 우리네 조상들은 서로 비슷한 풀들에게 인간의 관계처럼 앙증맞은 이름을 부여해 놓았다.

대표적인 것이 ‘너도, 나도’가 붙은 것이고 다음으로는 ‘―아재비’가 붙은 것이다. ‘너도, 나도’가 붙은 것은 너도밤나무 나도밤나무에서 살펴보았으니 넘어가고 ‘―아재비’를 보면 ‘미나리아재비, 방동사니아재비, 둥굴레아재비’ 등과 같이 꽤 있다. 우리나라에 자라고 있는 풀과 나무는 통틀어 약 4천 5백여 종쯤이라고 한다. 자생식물만도 3천 7백여 종에 이른다 하니 좁은 국토에 비하면 꽤 많은 편이다. 이 가운데 1천여 종은 약용으로 쓰이는 것이며 6백여 종은 식용 가능하다고 하니 국토 자체가 식물원인 셈이다.

유홍준님은 우리 국토 박물관이라는 말로 우리나라 문화 유산의 자랑스런 전통을 설파했는데 이 말을 따라 국토 식물원이라는 말도 씀직하다. 그런데 국토 박물관이 무지한 사람들과 개발의 논리에 의해 위협받고 있듯이 국토 식물원도 비슷한 이유 때문에 위협받고 있다. 이런 점을 안타깝게 여기고 우리 자생식물 보호를 위해 애쓰며 경기도 용인군 외사면 옥산리에서 한택 식물원을 운영하고 계신 이택주 님은 가장 아픈 사연으로, 우리 야생화가 외국에서 개량된 뒤 역수입된다는 점을 들었다. 우리가 로얄티를 지불하고 수입하는 꽃 가운데 백합, 튤립은 우리나라 자생식물인 ‘나리’의 변종이라 한다. 회를 먹을 때 양념으로 쓰는 와사비는 우리나라의 ‘고추냉이’를 가져다 만든 것이다. 고추냉이는 겨자과에 딸린 여러해살이풀로 잎은 뿌리에서 떨기로 나고 염통꼴(심장형)이며, 그 사이에서 줄기가 솟아 첫여름에 흰 꽃이 총상꽃차례(긴 꽃대에 여러 개의 꽃이 어긋나게 붙어서 아래부터 피는 것)로 핀다. 땅속줄기는 살이 많고 매운맛이 있어 양념 또는 약재로 쓴다. 이런 현실 속에서 그린 라운드는 우리의 자생 식물이 훼손될 중대한 위협이라는 것이다. 그린 라운드라는 것은 ‘식물의 종 다양성 협약’에 의해 새로운 종을 연구해 육종한 사람에게 특허권을 인정한다는 내용인데, 자생 식물이 외국에서 개발되어 역수입되고 있으니 우리는 손해를 보면서 로얄티까지 지불해야 하는 심각한 결과가 예상된다는 것이다. 또한 식물의 문제는 식물 문제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식물이 있어야 동물도 있을 수 있다. 이를테면 백선(白鮮:검화)이라는 식물이 없으면 산호랑나비는 살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자생식물을 논의하는 것은 내 꽃 남의 꽃 식으로 나누는 배타적인 국수주의 관점이 아니다. 우리 주위에 지천으로 널려 있는 풀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바로 우리와 같은 터전에서 살아가는 우리 생명의 일부라는 점이다. 그리고 내 것 남의 것을 따지는 것은 인간의 욕심이나 돈 때문에 피해를 입는 것을 막자는 것뿐이다. 돈을 벌기 위해 수입한 황소 개구리, 그 황소 개구리가 던져 주는 의미를 잊지 말아야 한다. 한국 식물을 위해 애쓰고 계신 전의식 님은 우리 국토에서 자라는 식물은 우리의 허파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우리의 주위에서 볼 수 있는 하찮은 풀에도 모두 이름이 있으며 그 이름 속에는 우리 조상들의 삶과 얼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들을 때마다 우리 조상들의 뛰어난 관찰력과 상상력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답변참고 >> ‘풀 이름, 꽃 이름을 아시나요’ 「말글생활」 창간호(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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